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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태: 02. 갈렙. 수14:6-16
"6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9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 세로되 11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12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13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15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수14:6-15)
믿음의 사람들(02) - 갈렙
성경 속에서 나타나는 인물 가운데 갈렙 만큼이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갈렙의 믿음을 이야기한다면 외유내강형의 그런 믿음의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참 온유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확신에 대하여서는 자신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이고 뿐만 아니라 그는 참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다 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왜 그가 왜 겸손한 사람이고 용기 있는 사람인지는 여러분들이 오늘 설교를 들으시면 아마 동감하실 것입니다.
민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 라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그들이 여기서 가나안 땅을 정탐할 정탐꾼을 각 지파에서 족장 된 자 한 사람씩을 뽑아서 세우게 됩니다.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로 선발이 되는데 성경은 그의 아버지는 여분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분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돌이키신다"는 뜻입니다. 이 갈렙의 아버지인 여분네를 수14:6절에서는 그니스 족속이라고 하는데 이 그니스 족속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에서의 후손 중 에돔 족속의 한 족장이었던 엘리바스의 후손이다 라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에돔 족속과 관련을 맺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던 이방민족들이 아닌가?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에 그 여분네의 조상이 그런 이방족속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집안은 대단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이 막강한 집안인 유다 지파에서 족장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 여분네의 아들이 갈렙인데 그 이름의 뜻이 "공격한다"라는 뜻의 이름임을 볼 때 그는 매사에 신중하고 적극적이고 충성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그들이 오래 전에 이스라엘 민족 속으로 편입이 된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그 충성심과 용감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았을 것이고 또 겸손하였기에 유다 지파의 대표로 뽑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로 뽑힌 눈의 아들 호세아 즉 여호수아와 함께 각 지파의 대표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라는 모세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40일을 동안을 가나안 땅에 머물며 정탐을 하면서 그는 이 구석 저 구석을 샅샅이 살폈을 것이고 여호수아와 함께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 그들의 보고가 나머지 10명의 사람의 보고와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달랐는가? 그것은 그 두 사람의 보고는 현실에 기초한 "믿음의 보고"였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습니다. 10명의 정탐꾼. 그들은 아주 사실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고한 이들의 보고가 결코 나쁜 보고는 아니었습니다.
민13:26절 이하에 보면 그 10명의 정탐꾼들이 보고하기를 과연 그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이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다 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열매도 크고 모든 것이 풍성한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는 크고 강한 백성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는 그들에게 겨우 메뚜기 정도에 불과합니다. 라고 악평하여 보고를 하였다고 민13:32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왜 우리를 여기서 망하게 하는가? 하고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말이 이렇게 해서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전체의 분위기를 바꿀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도 억지로 왔는데 오로지 젖과 꿀이 흐른다는 땅만 생각하면서 죽을 고생을 하고서 겨우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미 그 땅에는 주인들이 있고 그 주인들은 우리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크고 강한 족속이라는 보고가 그들의 소망을 무참히 무너뜨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런 보고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애굽을 출발하여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시련이 많이 있었습니까?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죠?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쬐는 광야 길을 헤매었죠, 마실 물은 물론이요 먹을 것까지도 넉넉지 않는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은 참고 또 참았는데 이제 순식간에 그 모든 꿈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보고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갈렙과 여호수아는 사실 있는 그대로를 보고는 하였으되 거기에다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믿음의 보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고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믿었고 소망하고 확신한 땅이기에 우리가 그 약속을 믿고 이제 그 땅 앞에 이르렀는데 비록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크고 강대하다고는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강한 믿음과 확신과 신뢰가 담긴 보고였습니다.
저는 가끔씩 요6장에 나타난 사건을 한번 생각해봅니다. 주님께서 벳세다 들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데 어느새 저녁때가 되어 사람들이 시장할 그런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빌립에게 너희가 어떻게 해 보아라 하셨지만 빌립을 위시한 대부분의 제자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고 오히려 불편과 불만만 털어놓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용기를 꺾어 버리고 먹는 것에 대한 실망만 안겨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실패의 분위기, 좌절의 분위기 속이지만 안드레 한 사람만은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용기가 한 사람의 신뢰가 수 천명을 먹이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만들어 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10명의 정탐꾼들은 아주 사실적이고 현명하고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고 분석하고 진단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로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좌절을 경험하게 하고 낙심을 경험케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민수기 13장에 나타난 갈렙과 여호수아의 보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한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강하고 기골이 강성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밥이며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인가? 계획하고 계실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하나님을 신뢰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갈렙과 여호수아의 보고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보고라는 말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말한 바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저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들의 밥이다 라고 하는 것은 오늘 저들이 믿고 의지하던 그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라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당면한 문제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가끔씩 그 현실의 문제를 너무나도 크게 의식하여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전혀 배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다른 것은 지금 이 문제를 넘어서면 보다 더 멀리 있는 원대한 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면한 이 문제 때문에 더 성장해야 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더 멀리 바라보아야 하는 기회를 놓쳐 버린다면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 10명의 정탐꾼들은 사실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분석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또 다르게 표현을 한다면 현재의 사실에 너무 신경을 쓰고 현재의 일들에 너무 집착을 하였기 때문에 그 문제 너머에 있는 축복을 보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즉 현재의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신 Vision을 보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나 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롬8:18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스런 상급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울 그가 얼마나 어렵게 그리고 힘들게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감당했는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그 사역을 계속적으로 감당한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승리한 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시는 상급이 있음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요, 의에 면류관이 있음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재의 사실을 인정하고 그 현재의 사실을 뛰어넘은 믿음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현재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Vision을 가지고 내일을 바라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하는 그런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그런 Vision이 있고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정탐꾼중의 10명이 나 되는 사람들이 그리고 백성들의 대다수가 우리가 잘못 왔다. 우리가 속았구나 하면서 원망을 하는 그런 분위기에서 자신이 믿고 확신 것을 위하여 끝까지 주장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민수기에서는 갈렙과 여호수아가 자꾸만 자기 주장을 하니까 백성들이 돌을 가지고 때려서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구조 가운데서 무엇을 결의하는데 있어서 참 불합리한 것은 바로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옳은 일에 많은 사람들이 찬성을 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옳지 않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찬성을 하고 나선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결론이 만들어지는 것을 봅니다.
한 예로 눅23:4절 보면 빌라도의 재판이 나옵니다.빌라도 그는 유대인들이 고소하는 죄목에 대하여 예수님을 심문하였지만 그런 죄를 찾을 수가 없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하니 그가 거절을 하다가도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킬까봐 자신의 뜻을 굽히는 것을 봅니다. 만약에 빌라도가 의로운 사람이고 분명한 사람이고 용기가 있는 사람이면 그는 거기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을 것입니다. 정치가로서 의로움 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불의한 사람이었기에 백성들의 요구에 승낙을 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것을 봅니다.
아뭍튼 그 갈렙은 참 용기 있고 믿음이 분명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동편에 대한 땅을 분배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 대한 분배의 장면입니다. 이제 14장부터는 요단강 서편을 9개 반 지파가 서로 나누어 갖는데 특이한 것은 제비를 뽑아서 나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비를 뽑는 것은 성경에서 많이 나타나는 방법인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아간을 가려낼 때도 그들은 제비를 뽑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하는 요나를 찾아 바다에 던질 때도 제비를 뽑았고, 맛디아라는 새로운 사도를 뽑을 때도 제비를 뽑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비뽑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귀중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갈렙은 제비도 뽑지 않고 헤브론 땅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얼핏 생각하면 갈렙이 자신의 욕심 때문에 좋은 땅을 제비뽑기 없이 요구하였지 않나 생각을 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 헤브론 땅에는 갈렙이 처음 정탐꾼으로 왔을 때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던 그 거인족속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워낙 강력한 족속이라 아무도 쉽게 그들을 내어 좇지를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지금 갈렙이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갈렙은 그 헤브론 땅을 요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 나라가 가나안 땅에 세워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개국공신입니다. 그는 가장 좋은 땅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수14:9절에 보시면 "모세가 갈렙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라고 하였기에 갈렙은 가나안 땅의 제일 좋은 곳 아름다운 곳을 그는 기업으로 받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낙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크고 강력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땅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이것을 나이가 많아 늙은 갈렙의 만용이고 갈렙의 실수였다고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까? 갈렙의 판단력이 흐렸기 때문에 잘못되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11절에서 말하기를 오히려 45년 전 보다 더 건강하고 힘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갈렙의 건강이 45년 전 과 똑같으며 아니 오히려 더 건강하고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겠습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멀리 볼 것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건강이나 힘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까? 그런데도 오늘 갈렙은 건강이나 힘이 똑같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바로 갈렙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의 힘이 더 성숙하였고 또 그의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갈렙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갈렙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는 결코 화려하게 나타나지 않았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호수아를 도와서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한 그런 믿음 좋은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으며 오늘 본문 이후에서는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찾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대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갈렙은 나 자신이 편안한 것보다, 나 자신이 대접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가 있고 섬김이 있고 희생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가진 기득권으로 인하여 더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남이 갖지 못한 권세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자 하는 것이 인간이요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교회에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기에 서로가 잘 알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예수를 믿기를 작정하고 우리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서고 있습니까? 실제적으로 어떻게 그들을 섬기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내가 가진 기득권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습니까? 내가 신앙 생활하는 모습으로 인하여 혹시 어린 새 가족들의 마음이 다친 적은 없습니까?
갈렙은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어렵고 힘든 일을 자청하여 감당하는 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갈렙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갈렙처럼 내가 가진 그것을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남이 갖지 못한 나의 그것을 가지고 남을 섬길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갈렙 그는 남을 배려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섬김과 희생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남들이 갖지 못한 그런 것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것을 가지고 섬겨 보십시다. 우리의 것을 남을 배려해 보십시다. 그러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시드니 영락교회 안에는 갈렙과 같은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모두에게 유익함을 주는 섬김과 나눔의 귀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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