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한여름 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좁고 어두운 시골길에서 독사에 물렸다.
중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 1978년이었다.
단짝 친구 세 명이 좁은 시골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맨 앞엔 두환이, 내가 가운데, 내 뒤엔 금수가 따라오고 있었다.
몹시도 무더웠던 한여름 밤.
우린 모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 당시 시골에선 대개 그랬다.
처음엔 무지 큰 가시에 찔린 줄 알았다.
"아얏, 나 큰 가시에 찔렸나봐. 무척 아픈데?"
그러나 어두운 시골길에서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처음엔 가시에 찔렸다고 생각한 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골에서 가시에 찔리는 일은 흔한 경우였으니까.
점점 욱신욱신 쑤셨지만 계속 걸었다.
동네 가운데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큰 우물이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헤어졌다.
그리곤 혼자서 집까지 평상시 보폭으로 걸어갔다.
집에 도착하고 비로소 불빛 아래서 나의 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시에 찔린 게 아니었다.
"아뿔싸! 세상에나... 어찌 이런 일이"
나의 새끼발가락 쪽 발등 부분에 큰 구멍 2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상처에선 붉은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고 샛노랗게 생긴 독사의 독이 잔뜩 묻어 있었다.
"끼약~~"
독사에 물린 것이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독사에 물렸던 경험이 있던 옆집 아주머니께서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오셨다.
그 분이 날카로운 칼로 발등을 더 째고 입으로 독기를 빼내주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극심한 통증을 더 느끼기 시작했다.
고무줄로 꽁꽁 동여맨 장딴지 아랫부분이 심하게 붓고 저려왔다.
"오오,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 당시 나는 중 2였고 아직 어린 학생이었지만 진짜로 살고 싶었다.
정말이지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생명에 대한 갈급함과 극심한 통증으로 나는 질질 짜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지금처럼 자동차가 대중화되었거나 우리 가족이 도시에서 살았더라면 금세 병원으로 달려갔으리라.
그러나 하루에 몇 대만 하얀 먼지 풀풀 날리며 신작로를 오가던 시내버스도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그 당시엔 도회지와 멀리 떨어진 농촌의 교통 현실이 그랬다.
택시도 전혀 없었다.
격오지였다.
택시회사에 전화를 해도 밤이 깊어 올 수 없다고 했다.
운전기사들도 도회지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시골 동네를, 그것도 야심한 밤엔 특히 무서워하곤 했었다.
그 시절의 교통 형편과 사회적 인프라가 그랬다.
우리도 그러려니 하면서 살았다.
대안이 없었다.
극심한 통증과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감내하면서 집에서 하룻밤을 견뎌야 했다.
날이 새면 택시가 달려와주겠다고 했다.
그나마 실낱같은 위안이었다.
밤이 깊었지만 동네 어르신들이 저마다 달려오셨다.
그 분들이 전해주시는 민간요법은 가지각색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모님은 밤새도록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시도해 보셨다.
가족들도 눈물 반 걱정 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새벽.
희뿌옇게 동이 틀 무렵 택시가 달려왔다.
도회지 큰 병원으로 내달렸다.
촌음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사이 나의 정신은 자꾸만 혼미해져 갔다.
보이는 사물들이 점점 촛점을 상실한 채 흐릿해 졌고 희뿌옇게 보였다.
"아! 이대로 죽는 것인가"
이미 전신에 독기가 퍼진 뒤였다.
어린 마음에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두려움에 떨었다.
영혼과 육신의 점진적인 분리와 이탈이 찾아온 듯했다.
생각대로 내 몸과 모든 감각기관들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고 작동하지 않았다.
내 의지대로 반응하지 않는 육신의 저편 너머로 나는 자꾸만 꺼져들어가는 것 같았다.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를 침착하게 이겨내기란, 중 2학년 까까머리 애숭이에겐 너무 가혹하고 무서운 형벌이었다.
깡촌의 시골뜨기 키 작은 소년.
독기가 전신에 퍼지고 세상의 온갖 형상들과 부모님의 말 소리마저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 갑작스런 사고 앞에서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끝 모를 죽음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입원과 긴급 처방.
병원 관계자들과 부모님이 동분서주하시는 모습들이 점점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그리고 이내 정신줄을 놓았는지 그 이후로는 전혀 기억이 없다.
얼마나 그렇게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비록 흐릿하긴 했지만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사물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슴아슴 가물거리는 안갯속 같은 병실이었지만 그래도 미약하나마 인식의 촉수들이 조금씩 작동하기 시작했다.
미약한 인식의 저편이었지만 내가 '죽지 않았음'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아, 살았구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으나 내 영혼은 그렇게 감사를 고백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잃었던 정신과 몸의 감각들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다.
그때, 까닥까닥 다시 살아난 인식의 피안에서 뭔가가 내 얼굴 위로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부모님께서 내 육신을 부여잡고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시면서 뜨거운 울음을 토하고 계셨다.
"주여! 어린 자식을 살려주소서..."
자식을 살려달라며 부모님은 간절한 목소리로, 애타는 울음을 울고 계셨다.
내 얼굴과 팔뚝 위로 두 분의 갈급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죽음 같은 긴 잠에서 깨어나 내가 맨 처음으로 인식한 병실의 풍경은 바로 부모님의 뜨거운 눈물이었다.
내가 아무리 어린 나이였어도 뭔가 저릿한 울림이 내 영혼에 꽃히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혼미한 인식이었지만 그래도 두 분의 눈물을 나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30년 하고도 몇 해가 지났지만 조금도 옅어지거나 바래지 않았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절대로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전부와도 바꾸지 않을 만큼 귀하디 귀한 자식의 목숨.
그런 생명에 대한 갈급함과 간절한 기도.
그것이 어떤 것이며 어떤 마음인지 나도 자식을 키우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게슴츠레 눈을 떠보니 여러 개의 링거줄이 내 몸 속을 향하고 있었다.
깨어났지만 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부모님의 애끓는 절규 같은 기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병상에 누운 채로 부모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아내고 있었다.
내 어린 가슴판에 그 사랑이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어머니의 눈물은 여러번 보았지만, 아버지의 눈물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 이후로도 영영 보지 못했다.
치료를 잘 받았고 경과가 좋았다.
일 주 만에 무사히 퇴원했다.
그로부터 다시 숱한 세월이 흘렀다.
내 자식은 어느새 장성했고, 사랑하는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먼 여행을 떠나셨다.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난 늦게 철이 들었다.
그리고 내 새끼를 키우면서 비로소 인생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숨겨진 사랑,
어머니의 한없는 희생.
사랑을 자주 표현하진 않으셨지만 그 넓고 큰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숭고하며 고귀한 것인 지를.
지금도 부모님의 그 뜨거웠던 눈물과 기도가 내 영혼 속에서 온전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 당시 아버지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작은 인간이며 편협한 가슴이란 것을.
삼십 년 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만 생각하면 늘 고개가 숙여 진다.
"사랑하는 부모님, 더 사랑하고 섬기며 살겠습니다. 제가 받았던 깊은 사랑과 헌신, 이젠 이 세상을 향해 제가 조금이라도 더 베풀며 살겠습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예배 마치고 돌아오는 어두운 시골길에서 독사에 물려 죽을 뻔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사고는 점점 잊혀져 갔고 부모님의 애끓는 사랑과 희생만 오롯이 남아 오늘도 내 영혼 안에서 함께 숨쉰다.
"일생 동안 두 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과 헌신이 제가 받았던 가장 값진 유산이자 최고의 선물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2012년 4월 13일.
아버지 소천 4년 후.
그 분에 대한 진한 그리움으로 아주 오래된 기억을 소환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