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프라이어와 전자레인지가 뒤늦게 성공한 이유
1. 레이더에서 시작된 전자레인지의 역사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방위산업체 레이선(Raytheon)은 레이더 부품을 공급하던 기업이었습니다. 그중에는 마이크로파를 생성하는 ‘마그네트론’이라는 부품을 연구하던 엔지니어 퍼시 스펜서(Percy .L. Spencer)가 있었죠.
그는 1945년 마그네트론을 실험하던 중 우연히 자신의 주머니 속 초콜릿이 녹은 것을 발견합니다. 이 현상이 마그네트론과 관련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마그네트론으로 달걀과 팝콘, 그리고 가재를 조리하기 위한 적정 주파수가 무엇인지 연구해서 특허를 내죠.
레이선 사는 스펜서가 발견한 이 현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던 중 스펜서와 함께 마그네트론을 연구했던 마빈 복(Marvin Bock)이 전자레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1954년 레이선은 레이더레인지(Radarange)라는 이름으로 1~3kW(오늘날 가정용이 700w)의 출력을 내는 대형 전자레인지를 상용화했습니다. 이 제품은 호텔, 레스토랑 등 영업용으로 판매되었죠.
1955년에는 타판(Tappan)에서 레이선의 라이선스를 구매해 최초의 가정용 전자레인지를 출시합니다. 하지만 약 1,300달러라는 높은 가격과 더불어 벽걸이 형태로 출시되는 바람에 일반 가정에서 쓰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67년이 되어서야 레이선의 자회사 아마나(Amana)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가정용 전자레인지를 출시했습니다.
1970년대 미국의 전자레인지는 아마나, 타판, GE 등이 시장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일본과 한국의 저렴한 제품에 밀리게 됩니다. 심지어 GE는 1980년 모든 전자레인지를 삼성에서 제조하기로 합니다.
2. 수출 효자 상품 전자레인지
1976년 삼성전자 임원이 미국에서 우연히 전자레인지를 봤습니다. 이를 계기로 삼성전자는 전자레인지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GE 전자레인지를 리버스 엔지니어링하여 1978년 첫 번째 시제품 ‘RE-7700’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고, 1979년에는 전자레인지의 핵심 부품인 마그네트론을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했죠.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의 전자레인지 보급량은 400여 대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평균 월급의 2배에 달하는 RE-7700의 가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냉동식품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시대적 배경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자레인지의 용도가 애매했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래서 전자레인지는 내수가 아닌 수출에 중점을 뒀어요.
삼성전자는 1979년 파나마에 340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1987년에는 영국에 공장을 설립해 빠른 속도로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합니다. 금성사도 1982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 전자레인지를 수출했고, 1983년에는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해 1988년 미국에서만 210만 대를 팔며 세계 시장 점유율 19%로 1위를 기록하죠.
하지만 그해 전자레인지로 조리하면 식중독을 유발하는 리스테리아균이 살균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유럽에 퍼지면서 큰 타격을 입습니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 금성의 세계 시장 점유율 순위는 4~5위로 하락했죠.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성능으로 일본과 점유율 1위를 다툴 만큼 다시 성장했습니다. 우리나라 전자레인지가 너무 잘 팔리자 1996년 유럽 연합에서는 한국산 전자레인지에 9~24.4%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기도 했어요.
3. 전자레인지는 위험하다?
전자레인지의 위험성에 관한 이야기는 1973년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소비자 연합회에서 ‘전자레인지에서 방사능이 나올 수 있으니 구입하지 말라’고 권고한 것이죠. 물론 소비자 보고서를 통해 매년 전자레인지를 테스트하면서 몇 년 후에는 이런 두려움이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비자 단체를 통해 1989년 방사능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왔습니다. 국립전파연구원은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전파가 건강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지도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실제로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전자레인지의 문을 닫으면 밖으로 나오는 전파량이 아주 적어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실제로 전자레인지가 인체에 해로웠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GE에서 출시한 전자레인지 문틈에서 915MHz의 주파수가 새어 나와 리콜한 적이 있었거든요.
4. 에어프라이어? 회오리 오븐!
에어프라이어는 오븐에 팬을 장착해 뜨거운 열을 대류시키는 장치를 의미합니다. 크기가 크면 컨벡션 오븐(Convection Oven)이라고 구분하기도 하죠. 팬이 장착된 오븐은 1914년 전기 공기 압축 오븐(Electric Air Pessure Oven)이라는 이름으로 테크니컬 월드 매거진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개인 발명품에 그쳤죠.
최초의 상용품은 1945년 윌리엄 맥슨(William L. Maxson)에 의해 개발됩니다. 윌리엄 맥슨은 군수품을 발명해 납품하는 일을 했습니다. 다연장포, 자신의 위치를 계산해 주는 비행기용 내비게이터 등을 개발했죠. 그가 발명한 군수품 중에는 냉동식품도 있었어요. 당시는 전자레인지가 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맥슨은 냉동식품을 데우는 기계도 직접 만들게 됩니다. 그게 바로 에어프라이어의 시작이 되는 회오리 오븐(Whirlwind Oven)이었죠.
회오리 오븐은 오븐 뒤에 선풍기를 설치한 형태로 뜨거운 공기를 순환시키는 장치였습니다. 이 기계는 일반 오븐보다 2배 빠르게 음식을 데울 수 있었고, 모든 곳을 균일한 온도로 데울 수 있었어요. 회오리 오븐도 군수품으로 납품되면서, 미 해군 항공 수송기에서는 전쟁 중에도 차가운 샌드위치와 전투식량이 아닌 스테이크와 비프스튜를 먹을 수 있게 되었죠.
전쟁이 끝나자 맥슨는 일반 시장에 진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냉동식품을 슈퍼마켓에 판매하고, 회오리 오븐을 가정용으로 판매할 계획을 세우죠. 1947년에는 일반 항공기에도 도입합니다. 하지만 그해 윌리엄 맥슨이 사망하고, 아무도 그의 회사를 인수하지 않아 계획은 사라지고 맙니다.
5. 에어프라이어가 뒤늦게 성공한 이유
맥슨이 사망하고 20년이 지난 후에야 일반 시장에 회오리 오븐(에어프라이기)이 등장합니다. 맥슨의 오븐은 최고 온도가 약 93도에 불과했는데, 노르드스코그 컴퍼니(Nordskog Company)에서 더 높은 온도를 낼 수 있는 회오리 오븐을 만들어 냈죠.
비슷한 시기 멜리어블 아이언 레인지(Malleable Iron Range)에서는 가정용 오븐 크기의 회오리 오븐을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개량된 제품들도 2000년대까지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냉동식품을 데우기 위한 역할은 전자레인지가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죠.
200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회오리 오븐이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우선 2011년 필립스(Philips)에서 에어프라이어(Air Fryer)라는 이름의 제품을 출시합니다. 네, 바로 여기서 에어프라이어라는 이름이 굳어졌죠.
에어프라이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필수품 취급을 받지는 않았어요. 비싼 가격도 문제였지만, 쓰임새가 애매했기 때문이었죠. 당시만 해도 에어프라이어는 ‘기름 없이 튀기는 건강한 튀김기’라는 포지션을 내세웠는데, 막상 에어프라이어는 오븐이었기 때문에 튀김기를 기대하고 산 소비자들에게 실망을 안긴 것입니다.
그러다가 에어프라이어가 튀김기가 아닌 소형 오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레시피가 활발히 공유되기 시작하면서, 에어프라이어가 인기를 끌게 된 거죠.
6.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 하나만 산다면 어떤 게 좋나요?
인터넷에 종종 올라오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더 이상 안 해도 됩니다.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를 합친 제품이 이미 출시되었거든요. 2018년 SK매직에서 ‘오븐 레인지’라는 이름으로, 2021년 삼성전자에서는’비스포크 큐커’라는 이름으로 출시한 제품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가격은 에어프라이어와 전자레인지를 각각 사는 것보다 좀 비싼 30만 원대네요.
마무리하며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둘 다 불 없이 음식을 조리하는 기기라는 점,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만들어졌다는 점이 있죠.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 모두 기계 자체가 발명되었을 때보다 기기를 활용할 수 있는 냉동식품과 레시피가 등장했을 때 유의미해졌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의 플랫폼 산업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플랫폼의 기능 그 자체보다, 플랫폼을 구성하는 콘텐츠의 양과 질이 더욱 중요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죠.
결국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조업이나 IT 산업이나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가 핵심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듯합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첫댓글 두가지 제품의 비교설명이 재미 있네요
덧붙여 저도 궁금했던 부분인데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를 합친 제품이 이미 출시되었거든요. 2018년 SK매직에서 ‘오븐 레인지’라는 이름으로, 2021년 삼성전자에서는’비스포크 큐커’라는 이름으로 출시한 제품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가격은 에어프라이어와 전자레인지를 각각 사는 것보다 좀 비싼 30만 원대네요.>> 이내용 도움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