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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의 옛날 얘기
信天함석헌
할아버지 옛날 얘기
나를 여기다가 모셔다 놓고, 이 추운날 따뜻한 방안도 아닌 바깥에다 앉혀놓고, 자꾸만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불러 대니, 옛날 얘기나 하나 하렵니다. (웃음) 할아버지들은 옛날 얘기 잘 하는 것이고, 또 사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다운데, 할아버지의 할 일은 옛날 얘기 하는데 있습니다. 옛날 얘기라면 그저 웃음꺼리나 되고 사실은 아닌 허튼소리고, 재미는 있으나 실용가치는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그런 것 아닙니다. 도리어 그 옛날 얘기야말로 철학이 들어 있고 교훈이 들어 있으며 없어서는 아니 되는 곧 실용 가치가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실용이 아니면서 실용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실리주의로만 나가서 무슨 돈 버는 방법, 권력 움켜쥐는 수단에 관한 말이라야 모두들 귀가 바싹해서 들으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모르고도, 그보다도 몰라야만 사람질 할 수가 있어도, 할머니가 아랫목에서, 할아버지가 동네 느티나무 밑에서 하는 이 옛날얘기 못 듣고는 사람질 할 수 없습니다. 옛날 애기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먹어서 소화되어서 씨의 얼굴에 화기로 나타난 학문, 도덕, 종교의 체험담입니다.
그러면 혹시 길거리에 범람하고 가정에 소용돌이를 치는 소설, 영화, 라디오, 텔레비가 있지 않으냐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위입니다. 조작입니다. 직업심리에서 일부러 말들어낸 것이지 자연스럽게 되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워야 선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적당히 일을 하면 쉬는 동안에 자동적으로 피로 회복이 되고, 리크리에이션, 즉, 원기의 소성이 제절로 되게 되어있습니다. 기계를 만들어서 노동을 피하고 지나치게 한가한 시간이 많기 때문에 심심, 지루를 느끼고, 그것을 풀려 인위적으로 짜릿짜릿한 오락을 만들기 때문 에 그 죄값에 오락이 오락이 아니라 도리어 몸과 정신에 해독이 되고, 한편으로는 지나친 고역에 지쳐 인생 파괴를 당하는 무리로 사회악이 쏟아져 나옵니다. 나는 옛날에 속하는 사람이므로 아직도 비교적 자연에서 덜 멀어진 생활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심을 모르고 적적을 모톱니다. 텔레비 필요 없고 연속극 소용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보다는 훨씬 더 몸과 정신의 건강에 자신 있습니다.
하여간, 일 잘됐습니다. 근대식으로 장식한 강당에는 못들어가고 쫓겨났으니만큼 자연에 가깝고, 문명병 들지 않았던 옛날에 가깝습니다. 느티나무 밑으로 알고 옛날 얘기나 합시다.
정란의 목각 애기.
옛날 후한(後漢) 때에 정란(丁蘭) 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이었습니다. 그래 남들은 다 부모가 계셔서 봉양을 할 수가 있는데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평생 유감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나무를 아로새겨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진짜 어머니로 알고 섬기기로 했습니다. 밤이면 그 목상한테 가서 정성으로 “어머님 안녕히 주무셔요”하고, 아침이면 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고, 어디 갈 일이 있으면 들어가서 “저 어디 갔다오겠습니다”해서 허락하는 기색이 보이어야 가고, 근처에서 무슨 물건을 빌리러 오면 “저 아무개가 무엇무엇을 빌리러 왔는데 주랍니까”하고 품해서 허락하는 안색이 나타나 뵈야 빌려 주었습니다. 하루는 근처에 사는 장숙(張叔)이라는 사람의 아내가 와서 정란의 아내 보고 무슨 물건을 좀 빌려달라 했습니다. 정란의 아내는 그 목각한테 들어가 품했더니 안색이 좋지 않았으므로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장숙의 아내가 목각 보고 끓어 앉아 얘기하는 꼴이 보기 사나와 욕을 퍼붓고 작대기로 목각을 두드려 패고 다라났습니다. 정란이 돌아와서 나무사람이 낯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아내더러 까닭을 물으니 아내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정란이 분김에 장숙의 아내를 칼로 질려 죽였습니다. 그래 관가에 잡혀가게 됐습니다. 그래 그 목상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려 들어갔더니 그 목상 눈에서 눈물이 주루루 흘렀습니다. 관리가 그것을 보고 정란의 지극한 효성이 신명에까지 통한 것을 보고 놀랍게 여겨 그 죄를 다스리지 않고,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표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에 유명한 정란의 목각이라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왜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나를 여기 끌어다 놓고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는 것을 볼 때 내 마음 속에 여러분이 아마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대단히 간절한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집에는 늙은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늙은이는 기력이 다 쇠하여 일도 할 수 없고, 여러 가지로 붙들어 들여야 하니 물질적으로 손해되고 정신적으로 걱정꺼리 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그래도 집 아랫목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앉아 있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 아니해도 좋습니다. 턱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쥐 안 잡는 고양이란 말이 있습니다마는, 늙은이야말로 말 아니하는 복신입니다. 각별히 교훈, 참고 될 만한 말 한마디 아니해 줘도, 있는 존재 그 자체가 복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의 싸움 다 싸우고 자기가 길러낸 그 자손을 말 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 자체가 곧 천지의 근본 되는 생명의 상징이요 선조 대대의 피 땀으로 엮어진 역사의 살아 있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존경과 감사가 갑니다. 그러므로 모든 가족이 그를 바라보고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을 때 그 집은 자연히 화목이 되고, 모두 기쁜 감정에 차 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잘되고, 가다 혹시 서로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곧 쉽게 풀리고 다시 하나 되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러한 정신적 감사 공경의 대상되는 늙은이가 없을 때 그 집의 가족들은 중심이 없기 때문에 의견이 서로 엇갈리고 이해가 서로 충돌되어 불화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가화만사성”이라고, 화목이 못되면 돈 있고 학문 있고 세력 있는 것이 도리어 화가 됩니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한 가정만 그런 것 아니라 나라도 그렇습니다. 나라는 더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작으니만큼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어도 서로 서로의 얼굴과 음성 속에서 부모, 조부모의 모습을 보아 잊었던 화목을 그래도 쉬이 되찾을 수가 있지만, 나라는 서로 육친의 관계가 먼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느니만큼 화목이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에는 반드시 주의 사상의 여하를 막론하고 일반 국민들로부터 신임 존경을 받는 늙은이가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정치인일 필요 없습니다. 도리어 정치인이 아니어야 일반 국민의 신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치가 반드시 국민 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정치보다는 사회적인 면이 더 중요합니다. 사회개혁이 됐으면 쉽게 정치 개혁을 할 수 있지만 사회 혁명을 못해 가지고는 옳바른 정치 개혁이 있을 수도 없고, 설혹 일시 된다 해도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사회악을 더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의 늙은이는 결코 정치가가 아닙니다. 인간과 민족의 총합적인 슬기와 신념을 상징하는 사상과 덕행의 인물이어야 합니다. 맹자가 문왕(文王)을 말하면서 “늙은이를 잘 치는 이”(善養老者)라고 했을 때의 그 늙은이가 곧 그것입니다. 맹자는 또 다른 데서는 그것을 “큰 사람”(大人)이라고 했습니다. 그 큰사람은 “正己而物正이라고, 자기를 바르게 하면 천하가 발라진다고 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나라 늙은이의 지지를 얻는다면 나라는 틀림없이 잘됩니다. 왜냐하면 나라 늙은이가 그를 지지할 때 국민은 자연 그에게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늙은이의 지지를 잃어버릴 때 그 정치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늙은이는 곧 민족 양심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장 좋은 실례가 사울에게 있습니다. 사무엘의 축복을 얻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됐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 그는 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늙은이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없어서 화기가 먼지 모르는 집안 같습니다. 안정 안됐기 때문에 단속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되지 않습니다. 공공정신 없고, 사람들이 거칠고, 생각이 야비하고, 인정의 두터운 것이 없습니다. 국민의 마음이 불안과 의심에 떨 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은 죽어 버리고 악을 행할 수 있는 힘만이 발동합니다. 젊은 아버지들이 매양 실패하는 것은 욕심과 법도만 알고 사람 속에 숨어 있는 선한 힘을 발동 시킬 수 있는 넓은 도량과 밀어 주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있어야 교육이 바로 되고, 국민은 정치가만 아니라 나라 늙은이가 있어 정치와 국민 사이에 서서 신뢰와 온화의 공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해방 이후 오늘까지 국민적 동맥은 경화일로로만 왔습니다. 이러다가는 언제 경련이나 중풍 현상이 돌발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요새 일어나는 근로자 문제를 보면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의식하시고 했는지 모르지만, 정란의 목각 같은 이 나를 불러다 놓고 여러 가지 말을 하고, 또 나더러 말을 하라는 것은 이러한 걱정 속에서 답답해서 하시는 일이라고, 나라 늙은이를 찾노라고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비록 나무 같이 둔한 것이더라도 여러분이 정말 정성으로 나라 늙은이를 대하는 심정으로 하신다면, 돈이나, 힘이나, 법으로가 아니라 인정과 도리의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하신다면,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나올지 누가 압니까. 그러나 또 반대로, 그런 정성을 가지신 분들이 더러 있다 하더라도 무지한 장숙의 아내 같은 사람이 너무 많으면 가엾은 정란을 옥으로나 보내고 말지 모릅니다.
나라에 늙은이 없다
그러면 나라의 늙은이는 어째서 없어졌습니까? 그 원인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많은 사람이 없단 말은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인 이상 나많은 이가 없을 리는 없습니다. 도리어 근래는 팔십, 구십, 백을 넘는 이도 많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비해 먹는 음식의 영양도 많고, 약도 좋고, 운동, 위생의 정신도 높아지고 한 탓으로 장수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나많은 것이 늙은이는 아닙니다. 사람은 동물이 아니고 정신입니다. 정신 연령이 높았어야 늙은이입니다.
그럼, 사회에 어째서 정신 연령 높은 늙은이가 없습니까? 정신에 대한 대접이 없기 때문입니다. 늙은이는 마치 해묵은 느티나무나 밤나무와 마찬가지 입니다. 늙은이와 늙은 나무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느티나무 밑에서 하는 옛날 얘기란 말을 했습니다마 는 할아버지들이 있으면 늙은 나무 있고, 늙은 나무 있는 마을이면 늙은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동네 안에 늙은 나무는 왜 있습니까? 사람은 그늘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도 하지만 또 쉬임도 찾습니다. 제각기 제 집 살림도 하지만 또 공동체도 찾습니다. 내 생각도 하지만 후손 생각도 합니다. 현실의 살림도 하지만 또 상상의 나라도 찾습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해묵은 밤나무 느티나무의 퍼진 가지의 그늘입니다. 그 그늘 밑에서 나온 것이 호랑이 수염처럼 내뻗은 하얀 눈썹 밑에 인자와 위엄과 뚫러 보는 날카로움이 한데 어린, 광선을 쏘는 눈을 가지고 빙그레 웃는 늙은이입니다. 그는 그 늙은 나무 그늘 밑에서 나왔지만, 또 그 자신이 하나의 늙은 나무입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그늘 밑에 많은 어린 혼을 길러줍니다. 혼의 자람을 원해 새벽의 엄숙, 대낮의 황홀, 저녁의 장엄을 찾는 젊은 생명들이 있는 한, 그 늙은이는 언제나 느티나무처럼 축복의 팔을 벌리고 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에서 그 찾음이 말랐을 때 그 늙은 정신의 나무도 말라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이마다 도시의 맘몬의 졸병으로 끌려가는 이때에 마을의 느티나무는 찍히어 장작 가치로 될 수밖에 없고, 마을의 느티나무가 찍히우는 날 앉을 그늘을 잃은 마을의 늙은 혼은 두견새로 변해 뒷동산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늙은 나무 찍히우고 거기 깃드렸던 혼, 산으로 도망갈 때, 마을에 남는 것은 주고받기와, 시비와, 깔고 앉음과 깔리움 밖에 있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의 변천으로 오는 점도 있지만, 나라의 늙은이가 없어진 데는, 또 지난날의 잘못으로 인해서 되는 점도 있습니다.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어려움의 근본 원인은 인물 못나는 데 있다고 합니다. 크게 난 사람이라야만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자꾸 죽였으니 큰 인물이 어떻게 납니까? 사람을 자꾸 죽이면서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에 우리 같이 어리석은 민족은 없습니다. 다른 나라와 싸워서 전쟁에 죽은 것은 그만 두고,제 나라 안에서 서로 당파싸움으로 죽인 인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나라 안, 나라 밖의 모든 어려움은 결국…그릇이 크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라 할 것인데, 그것은 결국 이씨네 오백년의 나쁜 전통에서 내려오는 타성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해서 양반 정치의 때를 벗지 못 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새 역사는 위대한 혼에서
5.16사건이 일어나던 그해에 그 사건 후 조금 있다가 돌아간 장준하씨가 사상계에다가 그 사건을 비판하는 글을 쓰라 해서 썼던 일이 있는데, 당시 모부서 의장으로 있던 사람이 장준하씨를 보고 나를 가르쳐 “정신분열증 들린 할아버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만 아니라 어느 누구가,뭐라 한다기로 까딱이나 할 내 마음은 아니지만, 듣고서 참 불쾌했습니다. 그 때 자타가 다 알기를 그 사건의 가장 앞장에 선 대표 인물이라 했는데, 그가 감히 나를 보고, 나이로나, 학식으로나, 경력으로, 사회의 여론으로나, 감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아무 것도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의 앞날을 생각해, 자기의 선 자리를 생각해, 무엇보다도 자기가 스스로 하겠다고, 누가 시키지 않은 것을 자임하고 나선 그 일의 중대성을 생각해서라도, 감히 그렇게 경솔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인격문제가 아니라, 한민족, 한시대의 문제입니다. 민족의 정신이 얼마나 타락이 됐으면, 그렇게 무시할 수 있을까? 그런 무식이 어디 있습니까? 나무의 밑둥을 베이면서 어떻게 스스로 자랑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 말한 그 개인을 시비하리만큼 한가한 사람도, 그만큼 작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 말이 나온 이 세대가 슬퍼서 하는 말입니다.
역사가 뭔지, 인생이 뭔지 모르는 생각입니다. 전체 없이 개인도 없고, 전통 없이 역사도 없습니다. 전통을 가능한 한 살리려고 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무엇이 그리 잘난 것이며 과거를 온전히 죽이면서 어떻게 미래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되지 못한 세대는 그 사람의 입을 빌어 자기 심판을 한 것입니다. 내가 양반 정치의 때를 아직도 못 벗었다 할 때는 이것을 맘속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대접을 아니한 정치가 그 말로가 어떻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아랫목에 턱 자리잡고 앉았는 집이라면 까부는 손자가 있을 이가 없고, 나라의 늙은이가 광명 천지에의 옛날얘기를 유유히 하고 있는 나라라면 정치인이 판을 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더구나 유능한 인물을 나와 같지 않다는 생각에 죽이면, 그 피는 땅이 마셔버리지만, 그 악한 생각과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고 민의 독소는 내 영혼의 고갱이를 먹어버립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십년, 이십년만 가는 것 아니라 수십대 수백대도 내려갑니다. 그러므로 그 병의 독균이 오고 오는 세대의 자손의 혼을 비틀어 기형이 되게하고, 간질이 되게하고, 변태 심리가 되게 합니다. 허튼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어떤 민족 무조건 예찬주의자라도 그것이 밑이 점점 빨아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이 민족적 죄의식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항상 죄의식에 떨었고 거기서 속함을 받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속죄제를 들이지 않고는 못 견디었던 이스라엘민족이 고난의 역사의 길을 걷기는 하면서도, 역사상 다른 어떤 민족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으리만큼 풍부하게 위대한 혼의 인물을 낳았다는 사실에 견주어 볼 때에 더욱 확신이 갑니다. 아주 깊은 데서 통회하지 않고는, 겉으로 경제로 기술로 어떤 발전을 한다 해도, 이 민족은 결코 위대한 인물을 낳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대한 혼 없는 새 역사를 낳을 수가 있겠습니까?
영원한 소꼽얘기 계속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할 것은, 사람들이 갈수록 더 실리주의만 추구하고, 정치가 그것을 계획적으로 더 장려한다는 사실입니다. 속담에 “원두아니 삼년에 삼촌을 몰라 본다” 했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발생적으로 되던 옛날도 그랬거든 하물며 이 계획적 조직적인 시대에서겠습니까? 실리주의에 설 때 늙은이는 무용지물 입니다. 원인을 다 만들어 놓고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야 비로소 놀라서, 이제 새삼 충·효를 부르짖지만,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각 가정에서 늙은이를 내쫓는데 나라의 어느 구석에 늙은이 있을 자리가 있겠습니까? 경로당 정도 가지고는 절대로 노인문제 해결 아니 됩니다. 제 주체도 못하는 늙은이가 어떻게 나라의 늙은이 노릇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이 문명 전체의 문제입니다. 인류 전체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인생관, 국가관이 근본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본(本)과 말(末)은 하나입니다. 밑이 끝이요, 끝이 밑입니다. 알파가 곧 오메가요, 오메가가 곧 알파입니다. 천지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됐다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연이 근본이라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중간의 것은 한번 소꼽으로 해본 것이었습니다.
늙은이는 늘 그인 이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늙은이 입니다.
그것을 쓸데없는 일로 알았던 실리주의의 문명을 버리고 다시 근본을 찾는 날 영원의 늙은이는 그 영원의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수많은 손자들을 데리고 가정이요 나라요 하던 그 영원한 소꼽의 옛날 얘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씨알의소리 1978년 3월 72호
저작집30; 13- 295
전집20; 4-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