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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향기를 발하는 교회
사도행전 2:43-47
사랑의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특별히 이 땅에 새롭게 세워지는 진해 주사랑 교회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쳐나길 기원합니다.
이제 미미하고 미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장차 주사랑교회를 통해 주님의 사랑이 온 세계로 퍼져나가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설교 때마다 거의 매번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생명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세상’을 꿈꿉니다.
이 꿈은 우리의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기 원하시는 역사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사람들 앞에 고백하지 못합니다.
손가락질당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왠지 싸구려 취급을 당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굳이 나의 신앙적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의 슬픔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썩으면 가장 추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 세상은 한국의 교회를 보며 그런 혐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피처 대학의 종교사회학 교수인 필 주커먼이 쓴 『신 없는 사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주커먼 교수가 스칸디나비아의 두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에 약 1년여 거주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조사한 결과를
기록한 책인데, 저자는 그 책에서 “한 사회의 도덕성과 종교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구성원들이 성경을 많이 사랑하는
사회가 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빈곤을 사실상 퇴치한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많은 구성원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회가 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어린이와 노인, 고아의 복지를 위해
전문적인 보살핌을 제공해주는 사회가 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등 다양한 물음을 던집니다.
기독교 윤리나 사회정의, 공공복지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한 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아무튼 두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인 동시에 탈종교화된 세속적인 국가입니다.
물론 아직도 교회세를 내는 이들이 많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하고, 그 아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결단할 청소년 무렵이 되면 견진성사를 받게 합니다. 우리의 입교식과 같은 것입니다.
결혼식과 장례식을 교회에서 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커먼 교수가 많은 사람을 만나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다가 한 일화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검사로 일하는 크리스티안은, 그 이름에 이미 크리스천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주커먼 교수에게 자기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몇 해 동안 친밀하게 만나왔던 친구가
어느 날 파티에서 포도주를 어지간히 마신 후 고백할 것이 있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했습니다.
그 말에 크리스티안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거지요.
‘아니,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단 말이지?’ 이런 것입니다.
당혹스러워하는 그에게 친구가 한 말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날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아줘.” 주커먼 교수는 뒤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포도주의 힘을 빌어 ‘신앙’이라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필 주커먼, 김승욱 역, 『신 없는 사회』, 97쪽)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도 미구에 이런 상황에 이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말했습니다. 기가 막힌 말이 아닙니까?
우리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고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죽어야 예수님이 산다니 말입니다. 그가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이지, 예수를 ‘사는’ 종교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의 대형교회를 방문했던 외국학자가 예배 전후 교인들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본 후에
했다는 말이 참 뜨끔합니다. “한국교회에 열(熱)은 있는 것 같지만 빛은 없는 것 같다.”
뜨거움은 있는 것 같지만 빛은 없는 것 같다. 참으로 아픈 이야기입니다.
조금 성급하고 오만한 판단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또 부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 몰리면 근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떠나온 지점이 어디인지, 도대체 왜 여기에 모여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딘가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교회 됨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누구나 다 압니다.
그것은 ‘예수 정신’입니다. 예수 정신이 살아있다면 가장 작은 교회라 해도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작다 크다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의 교회가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 정신이 살아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곳이 아무리 큰 교회, 비록 수십만 명이 모인다 해도
그곳은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린 성전을 보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2:19)고
말씀하셨습니다. 박제화된 신앙, 그릇된 권위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종교는 허물어져야 할 성전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사해의 동쪽 언덕 마케루스 산성에 수감되어 있던 세례자 요한이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11:3)
그때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려면 그가 하는 자기 진술에 의지하면 안 됩니다.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입니다.’ 명함에 수도 없이 많은 직함을 찍어 다니면서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내놓는 것을 보면 참 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속이 공허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의 자기 진술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가 일으키는 물결 혹은 삶의 무늬,
혹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벌어진 사건은 무엇입니까?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생명 회복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생명의 회복을 경험했던 사람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벗들은 사회의 유명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성전 체제의 대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들풀처럼 짓밟히고, 천대받고, 상처투성이가 된 채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셨고, 또 그들은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예수 곁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점잖고 높으신 분들의 잔치 자리는 서열에 따라 자리가 배치되었고 지켜야 할 격식과 예절이 엄연했지만,
예수의 벗들이 벌인 잔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비난하며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마11:19) 한 것도 이해할만합니다.
주님은 이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즐기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의 식탁에서는 누구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고, 마음껏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 잔치를 통해 가혹한 로마 제국의 수탈과 종교적인 차별로 인해 갈기갈기 찢겼던 사람들의 마음은 치유되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그들은 우정과 나눔에 바탕을 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비록 가난할망정 함께 나눌 때 삶이 축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군가의 기댈 언덕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숲속의 빈터처럼 누군가 찾아와 머물다가 마음이 고요해져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 된다면 더 좋겠지요.
그런 뜻에서 저는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생명은 그래요/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보세요”.
시인은 우리가 기대는 데가 참 많다면서 시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신비스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비스듬히 기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너’ 없으면 ‘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독교인은 삶이 ‘덕분’임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지친 마음을 기댈 언덕이었고, 쉼터였습니다.
그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오면 우리도 누군가의 기댈 언덕이 되고 쉼터가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놀랍기만 합니다.
성령 강림절 이후,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이 땅에 실현된 천국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누가는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고 말합니다.
그 모습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요? 병든 사람이 낫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어울려 식탁공동체를 이룬다고 하는 것, 이전에는 서로를 냉랭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하는 것, 이것처럼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들의 삶은 서로의 차이를 넘어 어떻게 일치를 이루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표징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신앙 공동체의 세 가지 표징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 일치, 거룩함이 그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자기 초월의 능력’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더 크게 기뻐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13:35).
초대교회는 그런 사랑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일치는 무엇입니까? 일치는 모두의 차이를 없애고 획일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꽃동산을 이루는 것입니다.
각자의 삶이 보여주는 빛깔과 모습을 함께 기뻐하고 경축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이것을 일러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조화를 이루되 똑같아지지는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미술에서 ‘색상대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채도가 반대인 색, 예컨대 빨간색과 녹색을 동시에 보면 그 색들이 본연의 색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이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이기에 서로를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색도 자기 본래의 색을 잃지 않았지만,
다른 색과의 조화를 이룸으로써 혼자는 일으킬 수 없는 감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일치의 중심, 그들을 조화롭게 만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들 가운데 있을 때,
곧 그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을 때 그들은 한마음으로 형제자매를 대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거룩함은 세상적인 가치와는 구별되는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비춰주시는 빛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 빛으로 보면 세상에는 하찮은 것도 없고,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일상의 매 순간을 성사(聖事)로 대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사랑, 일치, 거룩함이 온전히 드러나는 교회였습니다.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은 모두가 가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은 그들을 가르던 사회적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사심 없이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참 놀라운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세종맑은샘교회라는 한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서로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자기라는 한계를 벗어나 다른 이들과 소통하려 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합니다.
연루되기를 꺼립니다. 그것이 야기하는 불편함이 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귐을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가장 값진 은총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낯섦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을 경축하고 고통을 나누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거룩한 친교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우리 삶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런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한달음에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해도, 마음을 열고 노둣돌 하나를 놓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더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불의에 저항하여 싸우고, 함께 성찬을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참 낯설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가혹한 세금 정책으로 말미암아 기아선상에 서 있던 사람들이 삶을 함께 경축한다는 것,
더 어려운 사람들을 기억하며 밥 한 숟가락을 덜어내며 산다는 것,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품어 안고 산다는 것….
인간다운 삶이란 그런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낯설게 여겨지는 세상은 병든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심각한 병에 들어있습니다.
주후 1세기의 팔레스타인이나 21세기의 오늘이나 상황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2월 27일 공개한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 및 격차 실태와 정책적 함의’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순자산 기준으로 상위 1%가 우리나라 전체 자산의 10.9%를 차지하고 있는데,
1997년 IMF 이후 소득 집중 양상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소득의 불균형이 심화된다는 것은 새로운 신분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신분이 굳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공적인 이익보다는 사적인 이익에 집착하게 됩니다.
사적인 이익에 사로잡히게 되면 인간관계는 서먹서먹해지고 부정의가 심화되면서 사회불안도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대안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 해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해야 합니다. 아니, 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힘은 비록 부족할지라도 바로 그런 세상을 이루어내기 위해 동역할 때, 세상은 분명히 변화될 것입니다. 교회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여 성장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지만, 자기 과시를 위해 빚을 내 땅과 건물을 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교세 확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교회는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질적 복과 평안을 약속하는 것이 과연 복음일까요? 저는 그것이야말로 ‘다른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혈과 육을 예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도록 이끌지 않는 교회는 예수의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바로 이런 딜레마에 처해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독점과 지배와 풍요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과 청빈함이 오히려 삶을 축제가 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많이 소유한 것이 행복이 아니라 나눔으로써 풍요해지는 세계가 있음을 그들은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47)
산 위에 있는 마을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참된 교회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제 지난 오 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새로운 한 해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고, 세속적인 행복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맛보게 하고, 예수라는 푯대를 향해 가는 길벗들을 만나 외로움을 벗어버릴 수 있는 교회, 그리스도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 하는 교회, 마치 뿌리 뽑힌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향이 되어주는 교회 말입니다. 김준태 시인은 <고향>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향에선 눈감고 뛰어도/자빠지거나 넘어질 땐/흙과 풀이 안아준다”. 고향에서는 그런 겁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고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고향과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의 향기를 발하는 교회가 되라!” 이 명령에 철저히 순복하여 스스로에게 복이 되고, 이웃들에게 덕을 끼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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