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의 ‘열하일기 내력’
(答李㑖存書)
그들이 열하일기를 두고 오랑케의 칭호를 쓴 글이라고 시비한다는 게 대체 무엇을 두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나라 연호인 건륭을 썼다고 그럽니까? 청나나 지명을 말하는 것입니까? 열하일기는 기행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글이 있든 없든 또 잘 된 글이든, 못된 글이든 간에 세상에 그다지 영향을 끼칠 것이 못됩니다. 애초부터 춘추의리(춘추의 대의명분을 지키는 것)에 비교하여 따질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에 사람이 갑자기 그런 것들을 들고 나서서 나에게 책임을 추궁한다면 잘못 된 일입니다.
서글픕니다. 청나라의 연호를 세상에 처음 쓸 때 우리 선현 중에 관직의 직첩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자고 제의한 분이 있었습니다. 또 사대부들이 묘비문을 새길 때 숭정기원(명나라 연호)의 연호를 쓰는 관례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문서이든 사문서이든 모든 문서에는 그것을 피할 수 없으니 대개 부득이한 까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밭이나 집을 장만할 때는 모두 후세까지 계승시키려 하지만 정작 문서를 만들 때는 그 당시의 연호를 쓰게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매매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 춘추의리에 그렇게 철저한 그들이라고 해서 집문서에 오랑케 칭호가 붙었다고 그 집에서 살지 않으며, 또 밭문서에 오랑케 칭호가 붙었다고 그 땅에서 나는 소출을 먹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예전에 내가 중국 여행을 하면서 그 노정, 숙박지, 날씨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압록강을 건느면서 그 날에 첫머리를 ‘세번 째 되는 경자년’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몇 번 째라는 말을 쓰는가?’ 숭정기원이 지난 이후부터 따지기 때문입니다. ‘왜 몇 번 째인가?’ 숭정 이후 세 번 째 돌아오는 갑자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알지 못하게 쓰느냐?’ 장차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쓰고 붓을 던지고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에는 겉으로는 군소리가 없었으나 속으로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소위 피리춘추(皮裏春秋)라는 것이 있다더니 이제 나는 껍데기만 따진다는 소위 곽외공양전(鞹外公羊傳-겉껍데기 밖의 공양전이라는 뜻)을 쓰고 싶구나.”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 자체가 이미 구차스러운 가식임을 스스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날씨를 기록하며 그 뒤에 춘추식의 연월일 쓰는 법으로 대서특필한다면 정말 틀려먹은 것입니다. 이렇게 쓸까 저렇게 쓸까 망설이다가 가끔 청나라 연호인 강희나 건륭으로 그 시대를 구별했습니다. 도리어 이를 가지고 춘추필법으로 책망하니 어안이 벙벙해 집니다. 이건 정말 열하일기를 보지 않고서 억지소리를 하는 겁니다. 꼭 ‘되놈의 임금’이라거나, ‘오랑케 황제’라고 떠들어야만 비로소 춘추의리에 철저하다는 것입니까?
만약에 중국이 오랑케 땅임을 수치로 여겨 중국 지명을 따서 책 이름도 지을 수 없다면 그것은 더욱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 중국이 오랑케에게 점령된 것은 비단 오늘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모두 오랑케 땅으로 되었던 곳이라고 해서 그 지명을 쓰지 못하게 해야 합니까? 순 임금은 동쪽 오랑케에서 나온 인물이고, 문왕은 서쪽 오랑케에서 나온 인물입니다. 지금의 춘추의리를 찾는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정작 순임금과 문왕을 위해서 그 출생지도 억지로 숨겨야 하겠습니다.
춘추(春秋)란 본래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케를 배척하는 책입니다. 그렇자만 그 저자인 공자도 일찍이 동쪽 오랑케 땅에서 살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 저들처럼 따져서야 어떻게 자기가 배척하는 그 땅에 성인 자신이 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춘추의리를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지킬진데 오랑케에 관한 일을 일체 연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나를 벌주거나 나를 알아주거나 간에 정당하게 변론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내가 과거시험을 폐하고서부터 자못 마음과 생각이 한가하여 법도 밖에 노닐려는 숙원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멀리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을 사모하고 가까이는 노가재 김창업을 본떠 주체궂은 짐도 없이 채칙 하나로 중국 여행 만리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무런 직책이 없다고 하나 명색이 선비입니다. 역관도, 의원도 아닌 신분이라 처신하기 불편하고 도 슬그머니 갔다가 슬그머니 온다고 해도 행색을 숨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애초부터 조심하고 경계하는 떳떳한 도리로 따져보더라도 내심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매일 동틀 무렵 말고삐를 쥐며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천하 명승을 구경한다는 것이 무어 그리 장한 일인가? 유명한 고적이있는 지방도 구경하지 않고 돌아온 사람이 있지 않았는가?”
조금 지나서 시뻘건 아침 해가 요동벌에 꽉 차고 우뚝 솟은 탑이 말머리에서 나를 맞아 주는데 수은같은 연기는 나무에 자욱하고 황금빛 기와집들은 구름 속에 웅긋쫑긋 솟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왼편으로 푸른 바다를 따르며 바른편으로 험준한 산을 끼고 앞으로 앞으로 가니, 마음과 눈이 하루하루 새로워져 전날의 소견이 좀스러웠음에 가소롭고 마음속에 탁 틔어짐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드디어 만리장성을 나가서 북으로 사막에까지 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열하까지 구경하고 돌아온 까닭입니다.
귀국후에는 비단 시비하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나의 여행을 부러워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그 뒤에 연암협에 은거하여 무료하기도 해서 전날 적어놓았던 종이 쪽지를 정리하여 몇 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열하일기를 짓게 된 까닭입니다.
예리하고 세심한 나의 관찰력으로 보지 못한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정작 문자로 옮겨놓고 보니 구우일모(九牛一毛)격으로 대부분 빠졌고 그나마도 필치가 변변치 못하다. 벼개에 기대어 졸다가 생각해보면 여행 출발 초의 마음에서 이미 멀어졌습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이리저리 떠돈 것이 부질없고 이따금 책장을 떠들어보면 별 볼 일이 없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내가 보기에도 시답잖으니 다른 사람이야 누가 보기나 하겠습니까? 그 동안 집안에 우환이 잦고 초상도 나서 마치 거두어 갈무리할 경황도 없었으며, 또 벼슬살이를 한 뒤로는 더 더욱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그저 이름만 남아 가증스럽고 몹쓸 책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소외 오랑케의 칭호를 썼다는 것입니다. 지난 20년 동안에 글을 쓴 나 자신은 마치 꿈 속에서 쓴 것 같건만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들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정도가 아니라 호랑이가 두 날개를 달고 있다고 떠듭니다. 이 어찌 과하지 않습니까?
그대는 나를 위해 지금 춘추의리를 따진다는 그자들에게 전해주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나를 책망하지 않는냐고.
“자네가 전에 돌아다니던 곳은 중국, 고대 이래로 성인과 훌륭한 임금 및 한, 당, 송, 명 나라들이 다스리던 지바일세. 지금 비록 불행히 오랑케가 차지하고 있을망정 그 성곽, 궁실, 인민 들은 모두 그대로요.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도구도 보래 있던 그대로요. 최노황사(崔盧黃謝)의 성씨들이 지금도 명문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 않은가. 정자나 주자의 학문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네. 저 오랑케들도 중국이 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강탈하여 자지하기에 이른 것일세. 자네는 어째서 옛날부터 내려오던 중국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라든지 중국의 자랑으로 될 만한 전통과 사실을 알아다가 모두 책으로 저술하여서 우리나라에 유용하도록 하지 않는가? 자네는 이런 일을 하지 않고 한갓 사신들의 꽁무니만 따라 다녔는가? 지금열하일기에 기술된 내용을 가지고서야 어떻게 남들에게 큰소리로 자랑할 수 있겠는가? 자기 수양에도 손해요. 인격에도 손상만 줄 뿐이네.”
이렇게 말한다면 듣는 나로서도 어찌 등에서 식은 땀이 나고 말문이 막혀 고개를 푹 파묻은 채 여생을 마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제후를 끌어안고 제후를 공격하는 거기에 ‘춘추’의 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서서 춘추를 끌어안고 남을 욕하려 한다면 그것이 옳습니까? 나도 모르겠거니와 춘추의리를 어떻게 말소리와 웃는 맵시로서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p127-131. 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