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 보인다 / 이남옥
퇴근하고 집에서 쉬고 있으려니 전화가 왔다. 서울에 사는 대학 동창으로 시사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그녀는 매주 한 번 서점에 가는 것이 일과 중 하나고 뉴스 공장이나 명사들의 강연 듣는 것을 좋아한다. 관심이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순천 지역이 나와서 방청객 중에 내가 있나 싶어 전화했다고 했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알 수 없지만 나라면 당연히 거기에 있을 거라 여겼단다, 친구라고 나를 대단하게 보았나 보다. 순천 왜성은 알아도 거기에 얽힌 역사는 잘 모르노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서울에 비하면 조그마한 도시이긴 하나 순천시 인구가 28만 명이 넘는데 곧바로 나를 찾다니 미소가 떠올랐다.
그 방송을 유튜브에서 찾아보았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정유왜란 강연이었다. 이순신 장군 탄생의 날에 맞춘 순천 정유재란 역사공원 개장 기념 특강이었다. 그는 정유재란을 임진왜란의 연장이 아닌 독립된 별개의 사건으로 해석했고 이순신을 도와 승리로 이끈 민중의 관점으로 얘기했다. 정명가도가 목표였던 이전과 달리 조선 상륙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는 전략을 바꿔 일으킨 전쟁이었기 때문에 정유왜란을 동북아 국제전쟁으로 규정했다. 조정에서 내쳤던 이순신 장군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혼신의 힘을 다해 호국정신을 발휘하도록 동력을 실어준 곳이 전라도였다. 그리고 희생과 헌신의 중심에 순천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끔찍했던 7년의 전쟁으로부터 피눈물 흘리면서 이 땅을 지켜낸 조상의 혼을 다시 불러일으켜 주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며 전라도 수호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장군의 절박한 심정을 믿고 끝까지 뒷바라지했던 민초들의 숨결도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호남의 역사는 정유재란에 이어 동학혁명과 여순민중항쟁, 그리고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연결됐음을 알겠다. 새로운 시각으로 사건을 재조명해 주고 지역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주는 그의 말은 깊은 공감을 주었다.
때로는 거친 말로 잘난 체하는 사람을 자극하고 때로는 너무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있지만, 도올은 얼마 안 되는 바른말을 하는 인물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으로 거침없이 사실을 폭로하고 강하게 자신의 견해를 던지는 힘이 있다. 온갖 욕을 해대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험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꿋꿋하게 문제를 던지고 풀어 나간다. 그래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일부 소아적 편협증이 있는 이들을 용감하게 깨부수어주길 은근히 기대할 때가 있다. 여러 번 겪어 온 비극의 끝에서도 육자배기 가락으로 삶을 풀어내는 호남인은 늘 그 너머의 자유를 꿈꾸며 풀잎처럼 살아왔다. 그런 역사의 고리를 제대로 꿰뚫어 속시원하게 엮어 주는 이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의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이 땅의 주인이 진정 누구인지 알게 하는 데 딴지 거는 사람에게도 그는 포효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친구와 다시 통화를 하다 5·18민주화운동을 이야기했다. 80년의 봄은 여고생의 기억을 아픔으로 남게 했다. 군사 독재에 반대하며 벌어진 민주화 운동에 폭행으로 대응하는 계엄군의 행태를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그녀는 딴나라당이나 기타 보수 단체들의 잘못된 발언을 들으면 분노를 터뜨린다. 총알이 날아드는 거리와 계엄군에 쫓겨 골목길로 숨어든 청년을 질질 끌고 가는 광경을 보았다. 무서워서 바깥 동정만 살피던 숨이 막혔던 날을 잊지 못한다.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 진압군이 시내로 진입하여 도청과 시내를 장악하자 진압에 대항하는 시민군의 무장 항쟁을 기억한다. 그리고 시민군을 도우려고 주먹밥을 싸서 나르던 시민들의 작은 투쟁도 소중하게 간직한다. 그런데도 5·18민주화운동은 군사 쿠데타 주역들이 정권을 쥐고 있는 동안 폭도들이 일으킨 광주사태쯤으로 치부되었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 나올 때까지 광주 시민들은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올해로 41주년이 된 5·18민주화운동은 역사를 바르게 알고 자유를 지키는 데 힘쓸 수 있도록 학교에서도 계기 교육을 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릇된 역사 인식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국민을 깎아내리는 소인들이 있어 답답하다. 알아야 뭔가 보일 텐데 그들은 귀막고 아웅만 한다. 김수영 시인의 시에서처럼 바람이 불면 풀잎처럼 숨죽여 누워야 했던 역사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 풀잎이 다시 일어섰기에 이 나라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