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9-15절
9-10.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וַיֹּאמְר֣וּ אֵׄלָ֔ׄיׄוׄ אַיֵּ֖ה שָׂרָ֣ה אִשְׁתֶּ֑ךָ וַיֹּ֖אמֶר הִנֵּ֥ה בָאֹֽהֶל
וַיֹּ֗אמֶר שֹׁ֣וב אָשׁ֤וּב אֵלֶ֨יךָ֙ כָּעֵ֣ת חַיָּ֔ה וְהִנֵּה־בֵ֖ן לְשָׂרָ֣ה אִשְׁתֶּ֑ךָ וְשָׂרָ֥ה שֹׁמַ֛עַת פֶּ֥תַח הָאֹ֖הֶל וְה֥וּא אַחֲרָֽיו׃
『어디 있느냐』이 말은 아담이나 가인에게 하신 말과 같다. 죄와 의와 심판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죄는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고, 의는 아버지께 그리스도가 나아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28절에서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14장 2-3절에서『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거처는 제자들을 의미한다. 제자들이 성전이 되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온다는 말이다. 다시 돌아오는 표현에서 돌아오면 그에게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아들은 바로 그리스도이며, 그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천국이 된다.
장막은 성막, 성전의 의미를 갖는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라가 들었다. 『들었다』는 단어는 출애굽기 2장 24절에서『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에서 들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들었다는 것은 귀로 들은 것에서 나아가 마음으로 들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3장 7절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듣는 것은 마음으로 들었다는 것이다. 즉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흘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드렸다는 의미다.『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했지만, 다시 자신의 육으로 바라보면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두번의 약속을 하셨다.『나는 약속한다. 너에게 자녀를 주겠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자녀를 주겠다고 하신 그 약속은 죽을 병이 낫는 것 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그런 약속이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기 전, 99세까지는 믿음이 없었다. 사라도 속으로 웃었다. 하나님이『너는 웃었다』고 지적하니 『아니라』고 거짓말까지 했다. 아브라함은『백세가 되었는데, 어찌 자녀를 가지리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이스마엘이 바로 율법이라는 존재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쌓은 신앙을 말한다. 이스마엘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주님은『이스마엘을 내어 쫒으라』고 하셨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육신적, 율법적 사고에 젖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과 같은 그런 교회가 되어야만 한다. 육신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영적 설교에 못견디어 한다. 이삭 외에는 구원받지 못한다. 갈라디아서가 증거하고 있다. 약속을 따라 난 자만 구원받는다. 육신을 따라 난 자는 내어 쫒김을 받는다. 이삭은 이스마엘을 핍박하지 않지만 이스마엘은 이삭을 핍박했다. 성령을 따라 난 자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핍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육신을 따라 난 자는 다른 사람을 핍박하거나 비판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육신에 거하는 믿음이다. 육신을 따라 난 자는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믿음이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믿음은 내 속에 신뢰할만한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주님만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이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그 믿음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셔서, 아브라함이 받아드린 만큼이나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성경지식으로 쌓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쌓은 지식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요, 회개없이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멘으로 화답했지만, 열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눈으로 확인을 하자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11-12.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וְאַבְרָהָ֤ם וְשָׂרָה֙ זְקֵנִ֔ים בָּאִ֖ים בַּיָּמִ֑ים חָדַל֙ לִהְיֹ֣ות לְשָׂרָ֔ה אֹ֖רַח כַּנָּשִֽׁים׃
וַתִּצְחַ֥ק שָׂרָ֖ה בְּקִרְבָּ֣הּ לֵאמֹ֑ר אַחֲרֵ֤י בְלֹתִי֙ הָֽיְתָה־לִּ֣י עֶדְנָ֔ה וַֽאדֹנִ֖י זָקֵֽן׃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육적 반응은 이렇게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육의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옛사람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주신다. 오직 하나님 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가 아닌가의 차이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육의 눈으로 바라 볼 때 말이 안된다고 비웃는 것이다. “노쇠하다(베로티 בְלֹתִי֙ , 기본형은 바라흐)” 라는 표현은 옷이 헤진 것을 의미한다. 헤진 것은 늙었음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시편 32편 3절에서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바라흐)』이사야 51장 6절에서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노쇠한 것은 옛하늘과 옛땅이다. 성도의 입장에서는 옛사람이다. 옛사람의 옷은 버리고 새사람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것이다.
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יֹּ֥אמֶר יְהוָ֖ה אֶל־אַבְרָהָ֑ם לָ֣מָּה זֶּה֩ צָחֲקָ֨ה שָׂרָ֜ה לֵאמֹ֗ר הַאַ֥ף אֻמְנָ֛ם אֵלֵ֖ד וַאֲנִ֥י זָקַֽנְתִּי׃
사라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의 마음을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웃으며 어떻게 아들을 낳겠는가” 라고 말을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원래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씀해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1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הֲיִפָּלֵ֥א מֵיְהוָ֖ה דָּבָ֑ר לַמֹּועֵ֞ד אָשׁ֥וּב אֵלֶ֛יךָ כָּעֵ֥ת חַיָּ֖ה וּלְשָׂרָ֥ה בֵֽן׃
일은 다바르( דָּבָ֑ר )이다.『 הֲיִפָּלֵ֥א מֵיְהוָ֖ה דָּבָ֑ר 하잎파레 야훼 다바르』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번역하면,『여호와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할 수 없는 것이 있겠느냐』라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낳는 것이 라는 의미다. 누가복음 1장 37절에서『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15.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וַתְּכַחֵ֨שׁ שָׂרָ֧ה׀ לֵאמֹ֛ר לֹ֥א צָחַ֖קְתִּי כִּ֣י׀ יָרֵ֑אָה וַיֹּ֥אמֶר׀ לֹ֖א כִּ֥י צָחָֽקְתְּ
『두려워서(야레아 יָרֵ֑אָה기본형은 야래)』라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이다. 창세기 22장 12절에서『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즉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표현의 방식이다.『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처음에는 비웃음 같은 웃음이지만, 나증에는 기뻐서 웃을 것이라는 말이다. 요한복음 1장 10-13절에서『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모르는 자는 비웃지만, 능력을 깨닫는 자는 아들의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서『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큰 상은 사레에게는 이삭이 된다. 성도에게는 그리스도가 된다. 이 세상에 나그네의 삶을 사는 자는 세상의 핍박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의 상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