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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중국화가 운수평 恽寿平 35세 전후에 보기 드문 의고 산수화 미술사적 의의.
恽寿平三十五岁前后作罕见拟古山水册的美术史意义
2022년 01월 13일 11:06 시나 컬렉션 소스: EK 이페어케이 플러스
의고 소책자 혜숭, 미부문, 일봉노인, 매화암주제종
"떨어지지 않을 때 사람의 이랑길도 아는 사람과 감식하라"
▲2021 서령추박
운수평 35세 전후에 보기 드문 의고산수책화발 恽寿平 三十五岁前后作罕见拟古山水册 画跋
마찬가지로 서령 한 권에서 운수평은 스스로 혜숭과 미부문을 모방하였다.인), 일봉노인(황공망), 매화암주(오)진) 네 분의 전현; 다른 제목으로는 강삼, 왕인끈.자오위안 코구스 제가의 필기.전체성의 창작으로서, 책자의 각 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다.화풍이 비교적 통일되어 있고, 필법에 참원을 하여 자신의 뜻을 많이 나타낸 것은 형체를 탈략하고 멋대로 섭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방"자는 물론 의고의 뜻이 있지만, 결코 옛 사람에게도 보행하는 것은 아니다.추, 모사라고 하지 않고 모사라고 하는 것은 바로 표명이다.운수평과 사왕대 예술가.전통적으로 깊이 정리하려는 뜻.
보라, "풍신 절세·천선화인"이라고 한탄받는 버들은, 운수이다.평사법혜숭, 조대년의 가장 마음에 드는 원소, 운씨인정"버들이 제일 하기 쉽지, 송이상은 상관하지 않는다.풍류가 고담하다"고 말하자, 그는 "혜숭하고 대년을 좋아하며, 버드나무 그림마다 필경으로 여긴다.규범. 혜숭. 연화류를 본뜬 강남소경은 법외를 유람하며 혜숭이후 또 한사람을 얻었다고 자부한다.
『구향관집( 有香館集)』에는 버드나무의 의상에 대한 글이 많이 실려 있다.어떤 것은 직접 회화 기법에 관한 것으로, 송인화류 "난사같이 보기하늘의 정취는 매우 멋지게 날고, 영감과 전을 깨우친다.외풍류인불원(外風流人不遠) 왕석곡(王石谷)과의 경기(競技)는 지금 그림으로 옮겨보면"한남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시석곡 왕산인은 천애제동호화류(天崖諸同好畵柳), 송원제가의 변체를 다하여 극연함을 궁공하여 한때의 일을 승이라 칭함), 어떤 이는 이별취산, "난류(亂柳)는 "길부용(路夫容)을 배웅하여 손님의 영손초부추(孙孫楚秋)"라고 한다."민남은 무청류가 아니다, 해국원문설 이미 뽕을 심었다." 교외에서는 시·사·황의 맛이 있다고 탄영하였다.단엽은 이미 먼지가 됐다" "강남 삼월춘을 감쇄하라" "잠을 조금 피우면 병기가 그림에 잡히지 않는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리하여, 명말 청초에 크게 추앙받았던 혜숭·조령양으로 대표되었다.강남 소경도식으로, 운수평의 재단·재편을 거쳤다.'바람 속의 버들' 하나까지 직접 집어넣었다.원소는 도식전범에서 생명의 진성을 나타내는 대문장으로 제시된다.
강남은 숨길 곳이 없고, 의고(儀古)는 숨길 곳이 없다.
운수평은 인생의 중요한 단계에서, 집중적인 산수 창작에 있어서, 한쪽을 가리킨다.면은 심미 이념에 대한 확고한 추구에 기초한 것이다.전조 원작의 확장이 그것이다.운수평 의고를 대표하여, 명말 청초에 후대의 화가로서의 자아 풍격을 갖추었다.형성 과정에서 고대 작품에 대한 모범적인 수용이 강조되고 있다.특정 작품에 대한 추억이 배림되어 있고, 직접 어떤 집의 준법(準法)을 얻어 배치하거나, 명분을 고르는 부분이 있다.
《남전화발》은 화리원류 외에, 소장품감에 대한 기록이다.바르부르크가 피렌체 중산층까지 올라가듯이급 찬조자 연구 시야에 넣는다, 군브리메디치 가문의 초기 찬조가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촉진 작용을 분석하길 바란다.마찬가지로, 이미 어떤 학자들은 운수평 예술 양식의 형성과 명청 강남 소장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 힘썼다.명대 강남 지역의 왕족(望族)들의 풍부한 수집은 남전(南田) 등의 시각 경험의 토대가 되었다.비릉당씨(당우소, 당우광부자, 반원), 비릉장씨(장경생, 담암), 비릉양씨(양조로, 楊兆魯)가 그 예가 된다.근원), 경구 장씨(장례천, 배풍각), 그리고 남전화발(南田畵跋)에는 '비양귀척왕장안(維揚貴戚王長安)'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남전화발》 논혜숭류, 논조선장, 논자구, 《南田画跋》论惠崇柳、论赵善长、论子久
논미씨, 논운림, 논강관도, 논매화암주제종
강희무(康熙戊) 신년(1668) 경에 왕시민(王時敏)이 남쪽으로 떠났다.전피왕씨제자연류서려삼년경신하(庚申夏1680)부터 계해춘까지(1683), 이 십수년은 운수평의고( 拟壽平儀古)에 새로운 집중의 시기가 되었다.그 인생 창작의 역정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남전화발(南田畵跋)은 이들 강남 대족이 소장하고 있는 혁혁한 진품(眞品)을 기록하여 화가들이 반복적으로 모사하는 모본(母本)이 되었다.
오늘날의 통계에 따르면, 운수평은 역대 산수화가 및 작품 중에서 모방한다.5대 및 송고가 5분의 1을 차지하고, 원대가 반수를 차지하여 명나라가 되었다.대십분의 일(채성의편 《寿壽平》'전집'). 강남 대족이 조성한 텃밭으로 '초의객 수평'들에게 제공유학의 거처는 부유한 수집으로 운남전(翚南田), 왕총(王 等) 등의 예술을 자양하고 있다.의고작의 이면에는 전조대사의 필법에 대한 개별 예술가의 재구성과 재현뿐만 아니라 일시대 엘리트들의 집단창작 방향이 시대공생의 미적 감각이 집약되어 있다.
▲2021 서령추박
운수평 35세 전후에 보기 드문 의고산수책 (국소) 恽寿平 三十五岁前后作罕见拟古山水册(局部)
남전 예술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한편으로는 서령 한 권 몇이다.역대 고위직의 소장자:
장인휘, 광서 31년 병부 우시랑, 같은 해 학부 좌측으로 개과하였다.시랑, 광서 32년 개업부·법부·이부우.시랑;장형가,역광록사경,병사부시랑, 예부시랑 등의 직책.옛것을 좋아하고 정감하여 감상하며, 서화를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다.섭, 청말 주영공사, 총리아문 장경, 헌정고찰대신, 민국국국무총리, 교통총장, 외교총장, 심지어 '꼴찌 두 번째 입' 여소송, 민국사법부 차장, 총장대리까지.
한편, "빈한 자도 큰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도 있다.
육시화 《오월소견서화록》에 그의 조부가 운수평에 있다고 기술하였다.한 작품 뒤의 발미: "여통변관경사님, 뵙겠습니다.여러 명의 경들이 남전화를 사들이는데, 가난한 자도 마다하지 않는다.거금. 어려서부터 인품이 높았던 것을, 이로써 비로소 그 필묵의 묘를 알고, 옛사람을 힘껏 뒤쫓았다.극정으로부터 흘러나와도.남전선이 간 지 오래인데, 이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남전 그림의 실추에 대해 시장과 학술이 다른 곡률의 파동을 암시하고 있다.
오호범(吳湖梵)이 소장하거나 제발한 운수평(寿壽平)의 그림은 적어도 20점인데, 이 가운데 《모혜숭강남춘도축(模惠崇江南春圖軸)》이 있고, 남전과 석곡의 산수화에 대한 성과도 여러 차례 변별하여 남전산수책 페이지에도 많이 출제되어 있다.오호범은 남전화훼에서도 산수화 일격일로를 녹였고, 특히 예찬의 그림에서 터득한 '적막하여 어찌할 수 없는 곳'을 제시했다.
방원제 『허재명화록』 권14책 페이지류로 운남전 『모조고산수팔탱』, 『화훼산수십이탱』, 『모조산수십탱』, 『산수화훼책』, 『모조산수책』, 즉 『운남전왕석곡산수합벽십이탱』이 있다.
운수평은 같은 시기의 다른 화가들에 비해 그림이 희소하고, 대부분이 수장(公藏)에 들어가 더 이상 시장(市場)에 진출하기 어려웠던 탓에 그 그림이 시에서 결장되었다.현재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경화를 보면 그 소경화가 매우 흥미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운씨( 难氏)는 일찍이 "큰 폭으로 득세하기 어렵고, 작은 경치는 득취하기 어려우니, 동종백(東宗伯)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그 뜻을 희롱하는 것은 거의 재미에 가깝다.득세하여 스스로 그림원의 명언이라 여기고, 의리를 탐구하는 자는 어렵거니와, 내 말은 반드시 황당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마음의 씨앗:인생 장력과 화면 장력 心中的种子:人生张力与画面张力
청년 시절부터 여소송은 일기하는 습관이 있었다.이 민국의 사법 고관은 고미술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고서화경안록》에 집록하였다.서령(西齡)은 이 책에서 남전(南田) 의고(儀古)로 만청(晩淸)의 명신 장인정(張仁 、)·장형가(張亨嘉)를 거쳐 여씨(餘氏)가 금 3백50금을 구하다가 실패하였고, 북양정부 외교총장 왕대섭(王大燮)이 금 4백금을 주고 장사지냈다.여씨는 다시 왕에게 관문을 빌렸다.'정묘지심'을 느끼며 50금을 아끼지 않아 한 맺힌 인연을 아쉬워했다.
이것이 바로 이 절세의 산수에 대한 감장설화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음에 심은 씨앗이다.
'남전화발'은 "치옹의 묘적, 장선삼의 소득, 오매불망 담벼락 십년우여"와 같은 설렘을 기록하고 있다.수백 년을 하명하여 일찍이 의고했던 중·청년 예술계의 신예는 이미 신세계 쟁탈의 종사가 되었다.여소송역은 정치무대의 이슈메이커에서 국수의 문화리더로 돌아섰다.씨앗이 범주를 이루었을 때, 같은 것은 문예복귀이다.흥, 재구축의 충동.
옛사람의 법도 속에 잘 들어갑니다. 빠졌을 때 길이요, 샴푸의 새로운 맛입니다.남전의 친구이자 시가 창작의 지음(知音)인 고조우(古祖禹)가 『어향관집(香香館集)』 서(序)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친구 운숙자, 적게 당하고 다난한 일을 당했습니다.그 경험의 어려움과 위험은 기이하게 변한다.
상란도 겪었고, 소장할 때 괴짜 협사와 많이 헤엄쳐 천리를 달리다가 황홀사생하고, 남색도 낙심하고, 숙자는 의기양양했다.
숙자는 적게 거자업을 버리고 할 일이 없다.또 그 집안의 가난을 상하게 하니 그 친척에게 기꺼이 뜻을 표할 수 없다.산수를 한회하여 단석을 주니, 아는 자가 다투어 그것을 치치하려 한다...
운수평 소년사는 운에서 공부하였는데, 중년은 강남 수집권을 이용하여 대량의 진적을 음미하고, 선인을 우러러 외국 사단을 조화시켜, 기존의 회화 언어와 도식으로 새로운 창작의 원형을 삼고, 독자적인 시학적 품격을 부여하여, 모사에서 융금, 격조로부터 신운으로 통하는 합리적인 경로를 마련함으로써, 명청 산수 발전 및 민국 이론 성숙에 큰 공헌을 하였다.왕석골 등과도 잘 어우러져 청아하고 아속들 사이에 시장과 선비들의 이중적인 검증이 이루어지면서 독자적인 문화적 인격을 드러낸다.
가학의 영향을 받아 그 학화는 산수로 시작되었다.운수평이 지은 산수화는 전체 작품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데, 어향관 화론에서 산수화론은 화훼의 논리를 훨씬 능가하는 주도적인 장이다.운남전은 평생 산수화를 경작하고, 화조(花鳥)를 능가하며, 고목(古木)의 마른 버드나무로 화신(化身)화한 유민(遺民) 사상도 여기서 많이 나타난다.그러나 이런 강남 선인들의 이별은경험의 풍경을 풀어 쓴다는 것은 지나간 옛 추억에 빠지지 않고 내재된 탈속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운씨( 书氏)의 서향일문(書香一門)은 아버지 운일초 이학자 유종주(劉宗周)의 고족(高足)이며, "경세지재(經世之才)를 자임하고 천하를 자기임으로 삼는다."고 복사(復社)의 구성원이 되었다.남전은 열한 살 때 아버지와 차형을 따라 천태산에 은거하였고, 열다섯 살 때 장형이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여 차형이 포로로 잡혀 종말을 알 수 없게 되자, 그는 청군 주장의 양자가 되었는데, 스무 살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장수를 설계하였다.그는 구출되었다. 귀향 후 엄격한 유가 사상 교육을 받고 백부 운을 따라 그림을 배웠다.
청년기에 유학을 배웠고, "시청각은 신중하고, 바깥에서는 이미 경한위야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면서 중년에 이르러, 운수평은 행유 피난 중에 역사의 정혁과 자기 나래를 받고, 부지런한 회화 창작에서 고전정신을 집대성하였다.
'남전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청각에 밝은 장소.
남전 서술 그림 "요당취율"
바람과 같이 나무에서 소리가 나니 그 소리가 손가락으로 들리지 아니하니라
'남전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현실 세계와 매핑되고 상호작용하는 강남 원우주
매우 장력이 있는 탈속 세계.
강희 5년 병오 1666년 康熙五年丙午 1666 年
34세
춘삼월, 남전은 누동으로 떠난다.
초가을(칠월), 길상재도(吉祥在圖) 부채를 그린다."이건 도라지꽃이야"라는 제목이 붙었다.(상하이박물관 소장)
가을, 9월, 송백영지도(松白靈芝圖)의 큰 축을 만들었는데, 아버지 해에 찬사를 하고 수평이 대필하여 그림에 썼다.(《양리관 과안록·권34》, 천진박물관 소장.)누동육세의는 이 해부터 다음 해까지 상주(常州)에서 운일초( 初日初) 등과 함께 연릉서원(延陵書院)에서 강의하였다.
단양, 왕꿩이 누동을 건너고, 왕시민이 남아서 여름을 보냈다.
강희 6년 정미 1667년
서른다섯 살
가을에 금모래를 걷고 양자를 건너 태흥 계씨 댁에 들렀다.
"동생이 가까이 산수를 그리니 필력이 조금 나아가는 듯하고, 사생도 간결함을 얻었는데, 산수에서는 결국 일자의 관문을 깨뜨리기 어렵습니다, "궁핍"이라고 하였다.
남전이 왕총과 협력하여 『괴은도책』을 2절하였다.(고궁박물관 소장)
9월, 태흥에서 돌아와 조카에게 살찐 삿짐이 있어, 사직을 하고 세진을 불러들였다.(몽원서화록·권십구·운남전수찰),
10월 구덕화상(具德和尙)은 비양천녕사(維揚天寧寺)에서 죽었고, 그 뒤 탑신은 영은혜일헌(靈隱惠日軒)이었다.세추, 황하결, 회수의 난폭, 인민의 표류, 현의 관역, 백성의 제방을 쌓고 수백 리를 채찍질했다.
강희 7년 무신 1668년
36세
춘월, 남전은 항주에 가서, 마침내 돈탕을 건너고, 산의 질 위를 유람하며, 경호에 배를 띄우고, 또 우혈을 탐험한다. 그 위에 고백이 있다. 고백이 있다. 기이한 것을 고치고, 상피설건, 수천 년의 물건도 흔쾌히 《우혈길백도》를 그리며 함께 알고 있다.(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봄, 정월, 아버지를 따라 저장, 적홍승은 북경으로 가서 국자감을 수료하고, 심겸, 마오위스, 장징광 여러 사람과 함께 보내는데, 《홍방사북유》의 칠율일 수상에게, 그리고 그린 산수 부채면도 선물한다.(장배항(章培恒) 홍승연보(洪昇年譜) 어향관집(香香館集)·권이(卷二))
봄에 돈탕을 건너 소흥에 이르러 아버지를 따라 유씨를 문상하러 가다.아버지께서는 황종의와 밤낮으로 극담을 나누셨고 지은 책과 황종의, 종의를 다하여 같은 길로 삼으셨다: 가라사대, "이 세상에는 내가 서로 합치니 외로운 일이 없으리라. 일초의 문집 때문에 서문을 지었다.(황종의 남뢰문안·권일·운중승문집서)
또 경호, 우혈탐사, 주사치 묘소, '고인묘 지나감' 칠율 한 곡이 있습니다.(주사 치장 대우릉 서원)
오역객은 지난 2월 비릉 허씨(許氏)의 보처당(補處堂)에서 당씨 소장왕몽(觀唐氏所藏王蒙)인 《하일산거도(夏日山居圖)》를 병합하여 임하였고, 9월 6일 우산(禹山)으로 귀향하였다.
6월 19일, 《옛날의 16수》를 써서, "부귀는 내가 천한 것보다, 빈천한 것은 내가 귀한 것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뜻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어향관집·권2)
새가을 항에서는 '동각암, 치황, 동기, 운경, 호남집 북문 주씨 서재' 등 여러 편의 성가가 있다.(어향관집·권2)
8월 황공망 부춘도 권에 쌍장제식이 있다.
9월 10일 만에 낙필한 '모동원계산도(模東源溪山圖)'는 '세유상(世有賞)이 있는 자는 그 밑에 앉아도 무방하다'는 등의 제언이 있을 정도로 축을 이루고 있다.(남경박물관 소장)
가을의 끝, 《모조일봉부춘도의》를 짓고 산수를 세우며, 스스로 7절의 한 수를 지었다.(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9월에 왕시민은 손님들이 서쪽에서 맑게 노닐며 호루에 운집하였다.
청정에 조서가 있으니, 고명종실이라 한다. 자손이 많고, 산림을 도피한 자가 있으면 모두 전려로 돌아가고, 성씨는 모두 복구하였다.
10월 5일, 동북원을 본떠 산수소탱을 그리며 시 한수를 그리고 "무왕신지기(無王辛之奇), 무소공척지만리(無少公尺地萬里)의 형세. 운연을 그리려 하고, 제비를 어지럽히고, 우리 산을 오래오래 점아산영구(點我山靈久)하라.(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겨울, 11월 16일, 항주의 고운각(막시룡가)에서 《고산수책(古山水冊)》12탱을 만들었는데, 이 중 《홍수방조곡자》《동북원유이법》등의 제폭이 매우 정묘하다.(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11월 항저우 고운각에서는 '소상수운도'를 그려 조운서의를 썼다.(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그해 겨울 11월 16일 '서유문계산의 끝없는 도의를 본떠서'를 짓고 "청등야설, 금지층빙.난로를 고고 앉으면 구절을 읊는다.제목이 우세한데 상음지동원을 광흥시키려니, 목감께서 옛사람들을 내주셨다.(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11월 한겨울, 우항, 그리고 항주의 고운각에서 《고모조 산수책》을 12절씩 지었는데, 각 페이지마다 식견이나 시제가 있었다.(《석거보급초편》저서)
《모황공망부춘대령도》의 축을 만들다.(석거보급·권35 저록, 남경박물관 소장.)북원신운도 축 2탱을 그렸는데, 종이본은 크기가 작고 견본은 크기가 커서 색을 입혔다.(남경박물관 소장)
강희 8년 기유 1669년
서른일곱 살
초봄에 양선(陽 (, 지금의흥), 우학가헌(于鶴迦軒)에서 주태사 영후(英侯)의 설경(雪景) 및 호산소경(湖山小景)을 그리고, 《설산(雪山)을 그려 성도의 병을 일으켰다》라는 시가 있다.
운수평년보(34~37세 부분)
《운수평전집》 권4에 실려, 천진인민미술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