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813 / 바울의 믿음을 배우자 (엡3:14-21)
어떤 책을 보니까 인간관계를 밥에 빗대어 얘기한 게 있는데, 상대방에게 스스럼없이 ‘밥 좀 사라.’고 할 정도면 둘 사이는 친구 사이일 거라고 합니다. 또 밥 먹고 나오면서 ‘내가 내지요,’라거나 ‘내가 사야지.’라고 하면 선후배나 동료일 게 분명한데, 간혹 ‘밥 좀 주쇼.’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거지라는 겁니다.
그냥 하는 얘기겠지만, 그렇더라도 누구든 거지 같은 인생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인생을 지금보다 더 낫게, 더 의미 있게 살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과연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살 수 있는 몇 가지 원리 내지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간구했던 바울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는데 먼저 16절을 보면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인생을 지금보다 더 낫게, 더 의미 있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속사람이 강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 봐야 할 것이 바울은 콕 집어서 ‘속사람’을 강하게 하시기를 간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의 반대말은 ‘겉 사람’이라 할 수 있을 텐데, 바울은 어째서 기도하면서 겉 사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게 해 달라고만 간구했던 걸까요?
사람에게서의 겉 사람과 속사람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전에 보면 ‘능력’은 ‘어떤 일을 해 낼 수 있는 힘’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능력이 있게 되면 우린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그 어떤 일이든 ‘해 낼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실패도 고민도 걱정도 없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전에는 비슷한 말로 어떤 일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란 의미로 ‘실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뜻만 놓고 보면 능력은 ‘어떤 일을 해 낼 수 있는 힘’인 반면에 실력은 어떤 일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능력은 안에 잠재적인 힘이고 실력은 밖으로 실제로 행해지는 능력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실력이 밖으로 드러난 능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실력은 그 사람 안에 능력이 있어야만 발휘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인생을 실력자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능력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능력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예전에 외국인을 만나 손짓, 발짓해가며 겨우 길을 가르쳐 준 적이 있는데 멀찍이서 지켜보던 권사님이 다가와 하시는 말씀이 ‘야! 우리 목사님 능력 있네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야! 우리 목사님 실력 있네요.’라고 했어야 맞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미국 사람이 영어로 말하는 걸 보며 ‘그 사람 능력 있네’라던가 ‘실력 있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같이 영어권 밖에 있는 사람이 어거지로라도 영어로 의사소통했단 이유로 능력이 있다거나 실력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잘했든 못했든 수년간 영어를 배우고 연습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렇듯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실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능력을 배우고 연습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외국어를 잘하는 실력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그 외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서 그의 안에 외국어를 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야에서든 실력자가 되고자 하면 그 분야에 관한 것들을 배우고 연습해서 그쪽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을 키워야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성령의 능력이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기를 먼저 기도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능력이 있어야만 그 능력이 실력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빌립보서 4:13절은 단순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내 속사람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 겉 사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배워서 숙달되면 그것이 능력으로 남습니다. 이는 믿음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이젠 여태까지 기도했는데도 여직 응답이 없다 해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조급해하지 마시고 그렇게 기도하는 한번 한번이 여러분이 기도의 실력자가 되기에 필요한 믿음의 능력들이 내 안에 쌓여가는 과정이라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해 지금 내게는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 나타나기까지 능력이 채워지는 중이라는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의 능력이 쌓이고 모이다 보면 조만간 인생의 여러 분야에서 우리도 실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이제부터는 인생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실력자로 살기 위해서라면 속사람부터 능력으로 채우기 위한 믿음에 힘쓰고 믿음을 연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실력자가 되면 실제로 기도의 응답이 있게 됩니다. 그러자니 열심히 기도를 연습해서 기도의 능력자부터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의 실력자가 되면 자녀 손 천대까지 복을 받습니다. 그러자니 열심히 순종하기를 연습해서 순종의 능력자부터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여기까지만 듣고 돌아서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배우고 연습해서 가질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만 아무리 배우고 연습하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 즉 내 능력 밖의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예를 들어 약으로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면요? 돈으로 해결 안 되는 문제가 생겼다면요?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무능력자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럼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내 힘만으로 안 될 때면 그땐 외부의 힘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기도했던 겁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여러분도 내 힘만으로는 도무지 가질 수도, 얻을 수도 없기에 실력은커녕 능력조차 가지지 못할 형편에 처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런 나의 속사람에게도 능력을 주셔서 나의 겉 사람까지 실력자로 거듭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백만장자 록펠러가 시카고의 한 호텔에 들어가서 가장 싼 방을 주문했더니 지배인이 하는 말이 ‘회장님 아들은 우리 호텔에 오시면 늘 최고급 방을 사용하시던데요.’라고 하자 록펠러가 하는 말이 ‘그야 그놈한텐 부자 아빠가 있지만 나에겐 그런 아버지가 없거든요.’라고 했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아들의 권세, 딸의 권세라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아십니까?
자식이라는 이유로 언제든 아버지께 요청할 수 있는 권세가 자식에게는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입니다.
자식들이 세상에서 비난이나 멸시를 받게 되면 ‘거 뉘집 자식이냐?’며 부모가 욕을 먹습니다. 반대로 항간에 ‘아빠 찬스’라는 말도 유행되고 있는데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자기 자식을 위해 사용함으로 해서 생긴 부정적이고 자조적인 말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이 두 가지 사실에서 우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배우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지 못해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전능하다더니 하나님이 능력이 있기는 한 거냐?’라는 조롱과 멸시를 듣지 않으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자니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아빠 찬스’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찬스’를 쓰세요. 그 찬스를 묵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빠 찬스’를 받고자 하는 소망과 ‘아빠 찬스’를 쓰고자 하는 믿음만 있으면 우리도 세상 사는 동안 ‘능치 못할 일이 없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인생을 살 기회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닌 말로 나는 내 자식을 혼내고 야단칠지라도 남이 내 자식을 지적질하면 그 꼴은 또 못 보는 게 부모의 마음 아닐는지요?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 된 우리에게 그러하십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 뒤에 계심을 믿으신다면 내가 하다 하다 못할 때면, 해도 해도 안 될 때는 하나님 아버지가 나설 것이고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이고,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보기를 원하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부턴 배우고 연습해서 가질 수 있는 능력이라면 부단한 노력으로 능력을 쌓아서 인생을 실력자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배우고 연습해도 가질 수 없는 능력이라 해서 그저 두 손 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도 믿음의 사람이 할 일은 아닙니다. 그럴 때라도 역시나 우리에겐 배우고 연습하고 숙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하라는 말을 믿음의 적용 면에서 해석하자면 이는 우리 마음에서 그리스도가 잊혀지지 않게 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에서 그리스도가 늘 생각나게 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이제 더는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예수님은 우리가 믿을 때만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을 때든 안 믿을 때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는 말씀은 이제까지 안 계시던 예수님을 새삼스레 오시게 하고 계시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보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고 하는 싯귀가 있는데, 실상 꽃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거지요. 다만 내가 그 이름을 불렀느냐 아니냐에 따라 내게 꽃이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더란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믿음으로 부르지 않는 한 예수님은 내게서 지식으로만의 예수님으로 계실 뿐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예수님은 나에게서도 능력 주시는 예수님으로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무얼 하든지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하시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관점을 달리해서 생각하세요. 지금 당장엔 죽느냐 사느냐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엔 사소한 것들이라는 것을.
아닌 말로 암이 우리에게나 큰 병이지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100억이 우리에게나 큰돈이지 하나님께는 그저 사소한 금액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우리에겐 이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당장엔 나에게 심각하고 큰일이 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때부터 그 일은 하나님께는 사소한 일이 되어 결국엔 해결되게 된다는 믿음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권면 드리기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장차 사소해질 일로 인해 심각하게 낙심하지 말고 대신 하나님을 향해서만 심각하게 기도하고 심각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현재 여러분에게 있는 장애가 무엇인지, 단점이 무엇인지,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무엇인지는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은 절대로 인생에서 비틀거리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1번. ‘나의 필요가 간절할 때.’ 2번. ‘나의 간절한 그 자리에 예수님이 거기 계실 때.’ 역사는 나타납니다. 그러니 혼자서 1번만 붙들고 애쓰고 끌탕 하지 마시고 어여 2번으로 넘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서 심각했던 문제가 예수님 안에서 사소한 것이 될 것을 믿으신다면 사소한 것이기에 예수님이시라면 쉽게 해결해 버리실 것을 왜 여직까지 내가 끌어안고 심각한 채로 살아야겠는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인생을 실력자로 살고자 하면 먼저 능력자부터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령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이제부터는 마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나의 구주 되심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잊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늘 계시는 믿음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믿음으로 인해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 인생이 충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6절에서도 보면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믿음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결심한다고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믿음이 있게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거듭 강조드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든 안 믿을 때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하나님도 우리를 잊지 않고 늘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하니 우리도 성 삼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늘 기억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해야 할 순간에 예수님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때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과 에베소 교회를 향한 여러 환난으로 인해 낙심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친히 하나님께 중보기도로 ‘기도하는’ 본을 보였던 것입니다. 15절을 보세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모두가 낙심하고 힘들어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할 때 바울은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게 우리가 배워야 할 바울의 믿음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6장에서도 보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도 감옥 밖에서는 다들 걱정하고 슬퍼하는 중에도 정작 옥에 갇힌 바울은 실라와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되었습니까? 성경은 그 결과가 어땠다고 했습니까?
‘기도했더니 기적이 일어났더라!’
이게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이게 환난 중에도 바울이 믿음으로만 기도했던 이유였고,
이게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말고 믿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만 믿으세요. 그리고 이왕에 믿는다고 할 거면 저는 스스로에게 이런 다짐을 하며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작게 믿지 말고 크게 믿자!’
이유는 본문 20절로 21절에서도 보듯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을 크게 믿자!”
아닌 말로 월세나 면하겠다고 겨우 전셋집 놓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왕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믿으신다면 내 집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기도가 됐든 응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하나님을 믿되 작게 믿지 말고 크게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그런 하나님의 복을 받고 누리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일이며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기에 이제부터는 범사에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나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각자 모두의 인생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