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화문은 원래 경희궁의 정문이었는데 일제가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1932년
남산 박문사 절의 정문으로 옮겼었다. 해방 후 1988년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94년 이제서야 이 궁을
복원하기 위해 제자리도 아닌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으니
이 문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비애를 간직한 문이라 하겠다.
경희궁(慶熙宮)을 아십니까?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1-126에 있는 조선시대의 별궁
사용 시대 : 광해군 때 건축되어 270여 년 간 궁으로써 사용 (사적271호)
가는 길 : 광화문에서 서대문 쪽 중간에 위치.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임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옆. 구세군빌딩 옆. 내일신문사 뒤)
①일반버스 - 154.155.156.157.159
②전철 - 5호선 광화문역에서 하차 도보로 서대문 쪽으로 8분.
관람 시간 : ① 평일 : 09:00∼18:00
② 공휴일:10:00∼18:00
휴관 : 1월1일 매주 월요일
관람 요금 : 무료
문의 전화 : 안내 02-724-0274∼6
경희궁이 어디있는지 모르는 분이 많기에 이 약도를 실었습니다. 잘 보시고 찾아 오세요.
경희궁은 숙종과 경종이 태어난 곳이며 숙종, 영조, 순조, 인헌왕후,
인선왕후, 인경왕후, 선의왕후가 승하했고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한 곳이다. 경희궁은 조선 후기에 270여년간
정치사에서 중심무대로 활동한 중요성을 간직한 궁궐이다.
그래서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부르고 경희궁을 서궐이라 한다.
경희궁의 흥화문과 경희궁 내 여러 전각 사이에 흐르던 시내 위에 세운 금천교입니다. 이 금천교는 제자리에 놓인 것인데 흥화문이 엉뚱하게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흥화문이 이 앞 구세군 빌딩 자리에 서야 되는 것인데 너무나 먼 곳으로 가서 동남쪽으로(원래는 동쪽문) 서 있는 것입니다.그러기에 금천교가 의미가 상실되었지요.돌짐승들이나 도깨비상은 궐내로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경희궁은 광해군 9년(1617)부터 짓기 시작해 1620년에 완성된 조선 후기의 이궁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서자이자 차남으로 임진왜란 중 세자로 책봉되어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과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하는 1608년 행궁인 경운궁에서 불안하게 등극한 후 1615년 4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자신의 이복 동생인 정원군이 사는 새문동(현재의 신문로2가)에 왕기가 서려 있다하여 그 집을 몰수하고 지은 궁이 경덕궁(경희궁의 옛이름)이다. 광해군은 뒤에 인조반정으로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후에 인조가 됨)에 의해 중도 하차하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당시 인목대비가 기거하고 있던 경운궁에서 즉위하였지만, 창덕궁과 창경궁을 법궁으로 사용하였다.
이 바위는 태령전 뒤에 있는 바위로 이름은 서암이라 합니다.물이 흐르는 암천으로 바위 속에서 샘이 솟아 물이 흐르는데 이로 인하여 이 자리가 왕기가 있다하여 광해군이 정원군을 쫒고 이 궁궐을 지은 것입니다.
경덕궁(慶德宮)은 인조 이후 철종 때까지 10대에 걸쳐 임금이 머물면서 왕궁의 구실을 착실히 해낸 궁이다.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숙종 때부터 헌종 때까지 대부분 왕이 이곳에서 즉위하거나 승하하였다.
영조36년(1766)에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 하여 경희(慶熙)”궁으로 이름을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숭정전 정문으로 긴 회랑을 거느렸습니다. 회랑은 일제가 뜯어가지 않아 옛날 것이라 하더군요.
경희궁에는 숭전전,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고종 초에 경복궁을 중건하고 고종이 그곳을 법궁으로 삼아 임어하자 경희궁은 이제 더 이상 왕이 임어하지 않는 빈 궁궐이 되어 기능을 상실했다. 경희궁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순종이 왕이 되는 융희 연간에 들어가면서 급속도로 훼손되고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일제에 의해 전각의 대부분이 헐리고 일본인 거류민단에서 통감부중학교(후에 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섬)를 세우고, 면적의 절반이 축소되었다. 이렇게 면적의 일부를 떼어내어 처분하면서 동시에 그때까지 남아있던 건물들도 모두 외부로 매각 처분하였다. 이렇게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의 건물들은 일부 회랑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소멸되었다. 이리하여 궁궐은 과거 속에 묻히게 되었다.
이 건물은 원래의 숭정전을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원래의 숭정전은 밑에 밑에 있는 동국대의 정각원입니다. 어찌 되었든 경희궁의 정전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건립되었습니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입니다.특히 경종, 정조,헌종, 등 세임금은 이 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984년 서울시가 이 터를 매입하고 금천교, 흥화문, 숭정문, 숭정전, 자경문, 자경전과 회랑과 태녕전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에게 공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는 경희궁터 일부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어 그 자리가 완전히 복원되었다고 볼 수 없으며 특히 흥화문은 제자리가 아닌 박물관 주차장 정문이 된 것 같아 이를 보는 국민의 마음은 서글프기만 하다.
숭정전 안에 있는 임금의 보좌입니다.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천장에는 용을 두 마리 조각해 놓았습니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이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1932년 남산에 세운 절 박문사의 정문으로 쓰기 위해 옮겨 갔었다. 그러다가 1988년부터 장충동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쓰이다가 199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나 원래의 자리는 구세군빌딩 자리이며 이 문이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의 정문 노릇을 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위의 건물이 현재 동국대학교 정문 오른편에 있는 정각원인데, 원래는 경희궁 숭정전 건물이었습니다. 이 건물을 보면서 일제의 탄압과 그 시절의 우리 백성들의 고초를 생각하니 민족적 울분과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천교도 복원은 되었으나 그 것이 원래는 흥화문이 앞에 있어야 되는데 서울역사박물관 동쪽 입구에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숭정전은 1926년에 조계사에 팔렸다가 동국대학교 구내로 옮겨져 현재는 정원각이란 이름의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경희궁에 있는 것은 모형이라 하겠다.
황학정은 원래 광무 3년(1899)에 경희궁에 세웠던 射亭(사정)이었는데 현재 사직동으로 옮겨져 있다.
이 건물은 숭정전 뒤에 있는 자정전입니다.경희궁의 편전으로 1617-20년 사이에 지어졌습니다.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입니다.숙종이 승하하였을 때 빈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태령전으로 영조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던 곳입니다.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2000년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황학정으로 광무 2년(1898)에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세운 사정(활 쏘는 정자)이었는데,1922년 일제가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현 위치인 종로구 사직동 산 1-1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가서 보니 애국애족심을 가진 궁술인 40여몀이 일치 단결하여 열심히 궁술을 연마하고 있었습니다. 황학정이란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라고 합니다.
첫댓글 가야여인님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얼마전 경희궁에서 "대장금"뮤지컬을 공연하기에 관람하러 갔었어요. 정말로 우리역사와함께 파란만장한 세월을보낸 경희궁 이렇게라도 복원되고 기억할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