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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이상국의 뷰] 고독과 외로움 사용설명서
당나라 시인 유종원 다음으로 '고독'이라는 말을 혁신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이땅의 시인 다형(茶兄) 김현승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견고한 고독'과 '절대고독'은, 고독이 추상화하면서 낭만적인 구석을 기웃거리던 무렵에, 고독을 의지나 믿음의 내면에 존재하는 깊이있는 자존감의 형상화라고 해석하면서 낡은 언어를 새롭게 닦아낸 공로가 있다.
고독의 원래 의미
고독은 외로울 孤에 홀로 獨을 쓴다. 외로움과 홀로있음이 합쳐진 개념같지만, 원래 의미는 그런 뜻은 아니다.
고(孤)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는 아이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살펴주는 부모가 없으니 외로운 것이다. 고아(孤兒)라는 말은 거기서 나왔다.
독(獨)은 모셔주는 자식이 없는 노인의 상태를 말한다. 독거노인(獨居老人)이란 말은 그런 원개념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독은 가족의 보살핌이 없는 '관계결핍'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 말이 '보편적인 외로움'을 가리키는 말이 되면서 추상적인 개념에 더 기울어졌다.
당나라 유종원의 '고독'
이 '고독'이란 말을, 한번 들으면 잊지 못할 풍경으로 읊어준 사람은 중국 당나라의 유종원일 것이다.
천개의 산에는 새들의 날갯짓 끊어졌고
만개의 길에는 사람 발자국도 사라졌는데
외로운 배 하나 삿갓 쓴 노인 하나
혼자서 낚시질 하네 겨울강엔 눈발만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萬徑人踪滅(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柳宗元(유종원 773~819) '江雪(강설)'
오언절구의 첫 글자만 모아 읽으면 '천만고독(千萬孤獨)'이 된다. 고독은 저마다 갈라져 하나하나 외톨이가 되는 것이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천만개의 고독이 저 삿갓 쓴 노인처럼 자기 안에 갇혀 꼼짝않고 있는 것과 같지 않던가.
범재(汎在)하는 고독과, 이를 돌보지 않는 듯한 우주의 삼엄함. 시는 핵겨울의 풍경 같다. '자기 속에 갇힌 죄수'처럼 물밑의 어신(魚信)을 기다리며 버티는 인간을 절대공간 속에 그려넣었다.
절대고독을 찾아낸 시인
유종원 다음으로 '고독'이라는 말을 혁신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이땅의 시인 다형(茶兄) 김현승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견고한 고독'과 '절대고독'은, 고독이 추상화하면서 낭만적인 구석을 기웃거리던 무렵에, 고독을 의지나 믿음의 내면에 존재하는 깊이있는 자존감의 형상화라고 해석하면서 낡은 언어를 새롭게 닦아낸 공로가 있다.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ㅡ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견고한 고독(1968)'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ㅡ 나의 시(詩)는. '절대고독'(1970) (의도적으로 행갈음을 하지 않았다.)
'고독'이란 말이 지닌 독특한 질감을, 뛰어난 촉각으로 만지기 시작한 이 천재는, 고독의 견고함에 주목했다. 왜 가을은 봄이나 여름이나 겨울보다 더 고독한가. 무성함을 내려놓으며 헐벗는 나무들은 왜 고독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가. 그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들로 더욱 단단해지는가.
이 질문 속에서, '고독'은 이전에 지니고 있던 감상(感傷)적인 너울을 벗었다. 고독의 너울을 벗겨낸 그 속에 존재의 내면이 단단한 자아 그 자신으로 고독을 형성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견고한 고독'에 대해, 사람들이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표현했을 때, 그는 그 고독을 끝까지 밀어올리는 시적 추구에 매달린다. '절대고독'은 마침내 인간과 신의 단독대면을 연상케하는 신앙의 '절대적 비경(秘景)'으로 새겨진다.
김현승에게 '고독'은 더 이상, 인간이 숱한 사소함으로 늘어놓는 외로움의 몸짓이 아니라, 제 가지를 치고 하늘에 손을 벋은 나목과도 같은 절대의 언어로 올라서게 된다.
고독은 고상한 것, 외로움은 유치한 것?
이 '고독'의 충격 이후, 많은 한국인들은 고독은 외로움과는 다른 고상하고 근원적인 존재본질을 직핍하는 '성스러운 언어'로 여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고독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불편한 인식을 걷어내면서, '고독'을 향유할 수 있는 일이야 말로 인간의 수준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지 않았나 한다.
고독이 이렇게 주가가 수직상승하는 동안, 외로움은 생물학적인 날것의 감정으로 정체해 있었다. '고독'이 한자인 반면 '외로움'은 우리 말인지라, 서로 대립하거나 비교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고독을 '존재본질'을 향유하고 진작하는 숭고한 감정 조건이라고 말하는 동안에, 외로움은 평가절하 되어 유치하고 부정적인 감정인 것처럼 매도되었다.
외로움에 관해 갈파한 다석 류영모
그런데 '외롭다'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음을, 강의 때 설명해준 분은 뜻밖에도 다석 류영모였다. 다석의 이 '참외로움'을 제자 박영호 선생에게서도 듣고, 그를 인터뷰한 김서령선생에게서도 들었으니, 하늘의 누군가가 내게 이 얘기를 굳이 들려주기 위해 작전이라도 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김서령선생은 이렇게 썼다.
<참외의 ‘외’는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외아들·외딴집 할 때의 그 ‘외’다. 영어로도 참외는 ‘me-lone’이다. “Are you lonesome tonight?” 할 때의 그 ‘lone’이니 역시 ‘혼자’라는 뜻이다. 한자의 외로울 고(孤)자에도 참외 하나(瓜)가 들어앉아 이쪽을 말갛게 건너다본다.
우리말과 영어, 한자를 만든 이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한 것도 아니련만 ‘혼자’라는 의미에 똑같이 ‘외’라는 과일을 사용한 건 희한한 일이다. 왜 ‘외로움’이란 의미를 밭에 돋아 홀로 열매가 굵어가는 저 보잘것없는 초본식물로부터 만들어 냈을까.
다석선생은 참외가 단순히 단물 가득한 과일이 아니고 ‘외로움’을 표상하게 된 비밀을 이렇게 말했다.
외는 마디 하나에 꽃이 하나씩만 핀다. 다른 식물은 대개 쌍으로 꽃이 피어 열매도 쌍으로 달리는데 박과 식물만은 홀로 꽃피니 열매도 하나뿐이다. 사과도 배도 대추도 감도 곁의 놈에게 의지하건만 외만은 아니다. 홀로 피어야 열매가 둥글게 자랄 수 있다.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몸이 굵어질 수 있다. 몸 안에 단맛을 충분히 저장할 수 있다. 외가 홀로 비와 어둠과 바람과 땡볕을 견디고 또 누리는 것은 그 길만이 안에서 익어가는 성숙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외’의 진정한 의미다.>
놀라운 것은 아까, 김현승 시인이 '고독'에게서 발견한 그 뜻이 '외롭다'에도 그대로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외꽃이 하나인 건 원래 둘이었던 것의 결핍이 아니라 홀로됨을 기꺼이 선택해 성숙에 이르기 위함이다.
존재가 남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홀로 견디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참외의 선택에게서 배워야 한다. 외로움은 그에게 단물을 들이는 시간이다.
고독과 외로움의 본질은, 자아와의 직면
이렇게 살펴 보면, 고독이나 외로움이나 모두 심상치 않은 말이며, '홀로 있다는 것' 혹은 '홀로 산다는 것' 혹은 '홀로 된다는 것'이 인간을 괴롭히거나 고단하게 만들려고, 어느 노래처럼 '슬프게 하려고' 지워주는 악조건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고독과 외로움을 분간하고 편을 갈라, 어떤 의미를 강조하고 교훈을 생산하려 하는 건, 피상적인 탐구일지도 모른다. 홀로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현실적 고립과 고통과 불편을 무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말들에 들어있는 그런 다급한 의미들을 굳이 씻어내버릴 이유도 없다.
다만, 인간에게 필연처럼 주어지는 '고독'과 '외로움'을, 떨쳐야할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고, 제대로 그것과 동거하며 그것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본질과 자아를 재발견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면 될 것 같다. 고독을 누리는 힘, 거기에서 뜻밖에 인간의 절실한 생과 깊이있는 인식이 가능하다고 역설하는 이들이 유튜브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왜 없겠는가.
한편 참외가 외로움으로 굵어지듯, 인간 또한 고독으로 견고한 생의 인식을 얻게 될 수 있다는 팁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고독의 높이에서 영원의 먼 끝을 만지는 인간의 이미지. 이 완전하고 소슬한 감정을 꿈꾸는 일이야 말로 고독이란 절대자가 인간을 통해 쓰는 한 편의 절창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