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쓸 때가 되었다. 역사를 바로 쓰는 데 있어 상해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가진 것인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이전의 공산주의자와 이후의 공산주의자를 달리 평가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해방 전후 공산주의자에 대해 평가를 함에 있어 좌파정권에 의해 잘못된 기존의 평가를 싹 다 없애고 자유민주적 관점에서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많은 사람이 소비에트 또는 중국의 공산당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의열단 단장이라는 김원봉이라는 인물이다. 김원봉은 자유시 참변과 관련된 인물이다. 소비에트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 3,500여 명 중에 소비에트 군대에 편입을 반대하는 독립군 500명 이상 사살되고 1,000여 명이 강제노역장을 끌려가서 죽었다. 당시 홍범도가 이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시정부에 있던 인물 중에는 공산주의자가 많았다는 것은 임시정부와 관련된 책자 등에서 알 수 있다. 일본의 항복하자 임시정부의 인물 중 일부는 남한으로 일부는 북한으로 가서 정치활동을 하였고 남한 내에 있던 남로당은 남한에서 정권을 잡기 위해 테러를 저지르기도 하였고 제주 4.3 사건의 주동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상해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외국 그것도 중국에 있는 외국 조계지 내에 몇 사람이 모여 1919년도에 상해임시정부라는 것을 세웠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임시정부가 한 것은 소규모 무장 투쟁과 일본 요인 암살 정도였다(일부 주장은 정부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말을 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상해임시정부에 대해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일본은 중국의 많은 지역을 점령한 상태지만 상해임시정부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강하게 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상해임시정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일본 요인 암살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에 대응한 정도가 아닌가 싶다.
1905년 을미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 등이 일본으로 넘어감으로써 대한제국은 국호만 갖고 있을 뿐 나라는 망한 상태였다. 1919년에는 고종이 죽게 되자 대중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저항한 것이 3.1만세운동이다.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나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그즈음 소수의 인물이 중국으로 가서 세운 것이 상해임시정부다.
상해임시정부가 중국에서 수립된 후 중국과 소비에트에서 독립군이 구성되어 청산리전투 등 소규모 전투는 있었으나 그 결과는 미미했다. 그러던 와중에 중국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여의치 않자 독립군들은 중국을 떠나 소비에트 민주시에 모였다. 당시 약 3,500명의 독립군이 있었으나 독자적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세력과 소비에트 군에 들어가야 한다는 세력과 갈등 속에서 김원봉 등의 소비에트 파에 의해 500여 명이 사살당하고 1,000여 명이 강제노역장으로 끌려가서 노역하다가 죽어갔다. 자생적이고 독자적인 독립군은 이 당시에 소멸하였다고 할 수 있다(이후 소수의 독립군이 있었음).
상해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가진 정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대한제국의 순종 또는 영친왕과 같은 황태자가 중국에서 정부를 세웠다면 망명정부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상해임시정부는 소수 사람이 임시로 만든 정부로 나름대로 반일본 투쟁을 해왔으나 일본의 통치가 길어지면서 한국민의 지지를 그리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 초장기에는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임시정부의 활동이 미미해지면서 국민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여 중국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동남아 나라를 침략하여 점령한 후 하와이를 전격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본격화하였고 유럽에서는 독일의 유럽을 침공하여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는 이 전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하던 일부 사람은 중국 팔로군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여하고, 일부 사람은 소비에트 군대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여하였을 뿐이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된 것은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여 얻은 결과물일 뿐이다. 적어도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전쟁의 참여국이 되었다면 나름 정통성은 부여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저 얻은 독립을 마치 자신들의 독립운동으로 해방이 된 것처럼 말한다면 그건 억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독립에 어떠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것 때문에 정통성을 인정받기는 어렵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이전의 공산주의자와 이후의 공산주의자를 달리 평가하는 것이 맞는가. 좌파들은 이에 대해 해방 이전에 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과 소비에트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고 이들 국가의 군인으로 일본과 전쟁에 참여한 것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이므로 공산주의 활동을 비판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국민의힘 소속 김태흠 충남지사도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광복 이전 좌와 우는 같이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건국, 6·25전쟁과 맞물려 판단해야지 그 전에 공산당 가입 전력을 문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말하고 있다.
좌파들이나 김태흠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자들이 해방 이전에 죽었든 살아있든 다를 것이 없다. 홍범도 같은 공산주의자가 해방 이전에 죽었을 뿐 홍범도 아래서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을 배운 자들이 중국 팔로군으로 6.25 전쟁에 북한을 위해 전쟁이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남로당 세력이 되어 한국을 혼란스럽게 하고 무장반란까지 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하다면 1948년 8월 15일 또는 6.25 전쟁을 기준으로 공산주의자를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기괴하고도 가소로운 소리다.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인물 중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다. 김구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자라고 하고 있다. 민족주의는, 역사적으로는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 구별하고 그 통일·독립·발전을 지향하는 사상 혹은 운동이며, 정치적으로는 민족을 사회공동체의 기본단위로 보고 그 자유의지에 의하여 국가적 소속을 결정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김구의 민족주의는 서구적 민족주의라고 하기보다는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여야 한다는 사상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을 함에 있어 임시정부에 대다수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및 여러 사상과 이념을 가진 자들을 그 일원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해방이 되면서 남한에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가, 북한에는 소비에트와 중국의 공산주의가 자리 잡았다. 북한에서는 자유민주주의자, 자본주의자가 처단되었으나 남한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처단하지 않았다. 6.25 전쟁으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가 죽거나 북한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는 쥐가 새끼를 치듯 무한 반복적으로 씨를 뿌렸다. 남한에는 5%에 이르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똬리를 틀고서 자리 잡고 있고 이에 동조하는 15%의 세력이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 누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이며 그 자손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백서를 발간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부의 적을 알고 그 적을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陸士생도들이 홍범도로 부터 배울게 뭐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