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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한 마음을 살갑게 해 준 봄꽃과 미스터트롯
이관순의 손편지[112]
2020. 03. 16(월)
이 풍진 세상의 봄날
덧없기가 먼지 같고, 위태롭기가 살얼음판 같은 세상에 봄이 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꽃놀이 나서는 사람들로 산과 들이 북적일 텐데, 올해는 모두 신명을 잃고 납작 엎드려 있습니다. 집집이 문을 걸어 잠그고, 나라마다 빗장을 질러 하늘 길과 국경을 막는 초유의 바이러스 비상사태가 문 밖 출입조차 두렵게 만듭니다.
이 화창한 봄날을 창밖 풍경으로 달래야 하니, 사람들은 애먼 카톡에 눈을 박고 위로를 청합니다. 어둑하고 눅눅한 현실 앞에 우울하다는 사람들도 늘어갑니다. 3월이면 숙여지겠지 하던 기대가 아예 7,8월로 예견을 미룹니다. 이런 야만의 공간, 야만의 시간이 언제 또 있었을까?.
지난 2월 어느 날, 좀 어떠냐는 대통령 질문에 “거지같아요.” 라고 말한 시장 상인의 대답은 곧 국민의 심기였습니다. 그러고도 한 달이 지난 지금 똑 같은 문답 상황이 되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한마디로 ‘울고 싶어라.’ 보통 사람들이 캄캄한 어둠에 잠길 때 우는 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요.
어찌할 수 없는 감염이 전국에 번지고, 텅텅 빈 도시의 공간들을 보노라면 인간이 만든 재앙 같아서 치렁치렁 두려움이 몸을 감습니다. 인터넷 검색창에는 “신랑이 술 안 먹고 일찍 와서 좋아요.” “애들이 아빠랑 놀 시간이 많아졌어요.” “잔소리가 많아 싫어요.” “삼시세끼 밥하기가 힘들어요.”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팔자입니다.
성수기에 얼어붙은 건 중매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봄은 중매시장의 성수기인데, 우한코로나 방역이 장기화되면서 노총각 노처녀들 가슴을 졸게 합니다. 연초에 “올해는 무조건 결혼한다.” 다짐한 선남선녀들이 실천으로 옮기는 시기가 지금인데, 못된 바이러스가 중매시장을 강타해버린 겁니다. 꽃피는 시절만 기다린 중매시장의 탄식이 이어집니다.
선보기를 싫어하는 아들이 이를 핑계로 더 미룬다며 고민하는 아버지가 있고, 세 건의 소개팅을 갖기로 했다가 다 없던 일이 돼버렸다며 결혼 운까지 들먹이는 40대 변리사 노총각도 있습니다. 예년 이맘때 주말이면, 보통 15건 정도 미팅을 주선했지만, 요즘은 절반도 못 건진다는 게 결혼정보업체 대표인 지인의 말입니다. 대부분 여성들이 만남을 미루자고 한다는데 “마스크를 쓰고 만나기도 그렇고, 썼다가 벗으면 얼굴 화장을 다시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싫다“고 합니다.
사람은 때때로 서러워서 울고 슬퍼서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눈물이 많이 말랐습니다. 세상이 삭막해지고 거칠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지요. ‘여자는 벽에 부딪히면 운다’ 고 한 니체의 말도 이젠 고전입니다. 욕설로 대신하거나, 소매를 걷고 두 팔을 허리에 올려 일전 불사할 태세거나, 심지어는 어떻게 복수할까 음모를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회적 울분이 ‘미스터트롯’을 만나면서 웃음으로 살아났습니다. ‘미스트롯’에서 진화한 미스터트롯은 3월 12일 결승을 치르기까지 높게는 35.8%의 역대급 시청률을 기록하는 국민 프로그램이 되었었지요. 결승전 채점방식으로 도입한 국민투표에는 770만 명이 참여해 집계와 결과 발표틀 이틀 미루는 생방송 사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미스터트롯에 열광했을까? 트로트 힘의 재발견입니다. 한이 트로트를 만나 흥을 찾고, 꾹꾹 눌러둔 화기가 분출하면서 울고 싶은 마음을 뻥 뚫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무대도 좋았지만 석 달 간 대장정이 만든 프로그램을 통해 젊음이 만드는 풋풋한 우정,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양보하며, 하나 로 단합된 모습이 잊고 지낸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이전에 못 보던 진행방식, 관중과 함께 즐기는 마스터들의 따뜻한 시선도 아름다웠습니다. 이날이 오기까지 트롯맨들의 굴곡진 인생사의 굽이굽이가 서사로 녹아들면서 트롯의 미학을 오롯이 살린 감동의 음악영화 한편을 만들었습니다.
요즘시대에 보기 힘든 휴머니티로 사람들의 언 가슴을 녹여주고, 메말랐던 국민감성을 토닥여주었지요. 가락가락에 환호하고 눈시울을 적시게 한 흡인력도 목요일 밤의 기쁨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외톨이로 만드는 이 암울한 시기에 큰 위로의 시간을 주었던 미스터 트롯. 이처럼 트로트가 품격을 갖추는 사이, 이 풍진 세상에도 봄은 오고 꽃소식이 들립니다.(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