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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시각에서 바라 본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 입니다. 요즘은 무엇이 참된 구원이며, 어디 단계가 구원이라 인정 할 수 있는가를 두고 많은 의견이 제시 되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구원의 문제와 연관해서 한 가지 소흘히 다루어지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해’ 입니다. 인간의 한계와 제한됨을 이해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구원을 이해하기(받기위한) 위한 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새삼스레 위에 언급한 바른 구원을 위해 인간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순서적인 기준이 교회개혁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곧 누가 누구를 개혁할 것이며, 누가 무엇을 개혁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숙고가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겸손한 접근에 동의 합니다. 여기사 한 가지 동의를 요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거듭나고 의롭게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유자로서 이전까지 자신을 얽어메던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능히 제어 할 수 있다는 쉬운 선입관에 종종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본 현실은 전혀 그렇치 않음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신앙의 연수가 더 해 갈수록 실감하게 됩니다. 곧 인간의 가려진 본질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의미 입니다. 율법시대도 아닌 지금에도 굳이 형식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점에서 형식은 내용을 호도하는 혹은 대체하는 외형이 아니라, 참된 내용을 담는 최소한의 틀로서 여전히 작용합니다. 한 예를 들면, 신앙의 관점에서 국가법은 하위법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국가법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곧 최소한의 규제로서, 자신과 공동체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기본 차원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용을 담는 형식과 포장이라는 차원에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그 국가법이 성경의 정신을 위배 할 지라도 이를 존중하고 수용할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물론 없습니다. 결국 드리고 싶은 의견은 내용도 형식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의견을 아래에 언급된 ‘일천번제’에 대입해 보겠습니다. 무속화된 일천번제, 개 교회의 특정의도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천번제는 옳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와 기도를 소흘히 하려는 본능을 극복하려는 형식으로서의 일천번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 한다는 축면에서 최소한의 유용성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행처럼 확대되고 있는 ‘특별 새벽기도’ 역시 같은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인정 해야 할 것 입니다. 불순한 의도로 요구하는 특별 새벽기도는 거부한다는 개혁을 향한 열정이 새벽기도 자체를 거부하는 부작용으로 나타남을 우려 합니다. 이점에서 존경 받으실 만한 어느분이, 그런 기도회라면 차라리 참석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은 성급하고 경솔한 의견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특정한 예배를 인도 한다고 해서, 예배자체를 거부하는 일은 지혜롭지 못한 대응입니다. 특정 예배의 참석이 바르지 못한 주최측의 의도에 동의함을 의미 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교회가 바르지 못한 하나님을 소개 한다고 해서, 그 반 작용으로 하나님을 포기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배와 기도는 마치 이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예배와 기도’는 양보 할 수 없는, 아니 결코 해서는 않되는 성도의 특권이며 권리입니다. 주변의 상황이 불리하다고 해서 모두가 불리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열망하는 참된 개혁은 부당하고 불순한 형식일지라도 그 곳에서 바른 내용을 채워감으로 이루어 질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건전한 일천번제는 없을지요? 아니 건전한 일천번제를 만들어 갈 의향은 없으신지요? 솔로몬과 같은 동기로 드리는 일천번제, 보상을 기대하기 보다는 순수한 헌신의 표시로서의 일천번제, 진솔한 헌신의 한 표현으로서의 일천번제는 불가능 하다는 확신에 찬 전제가 무척 아쉽습니다. 그것이 40일 이든 일천번이든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기회를 스스로 부정하는 결단(?)은 숭고하지 않습니다. |
첫댓글 페인트를 희석 할때는 신나가 좋고, 양질의 국을 희석 할때는 물타기가 좋습니다
교통사고로 차가 박살나고 사람이 죽어도, 지역 정비공장의 경제와 지역 병원경제는 흥하지만, 국가 경제와 개인의 사생활은 박살 난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고드름님,일천번제를 일천번의 예배라는 관점에서 말씀하신것 같은데..말씀하신대로 율법시대가 아니어도 형식은 필요합니다..그래서,주일예배를 드리고 매일의 기도생활을 위해 새벽기도를 한다고 말할수 있겠지요..그러나,일천번제를 우리가 지키기위한 규범,형식에 넣을수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천번으로 예배를 계수한다는 자체가.. 완전한 헌신의 예배,주님을 섬기는 정신에 위배된다고 할수도 있지 않을까요? 필요없는것은 필요없는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천번제의 그릇된 관념이나 허구성을 짚어보고 예배자로서의 바른 신앙관을 회복하자는것이 숭사리의 정신이며 솔로몬의 일번번제와 작금의 일천번제는 근본적으로 동일하지 않다는것이 핵심입니다. 형식과 내용의 관계는 일천번제를 설명하는것에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기회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할 문제입니다. 하나님편에서 제시하신 헌신의 내용이나 방법이 아닌 인간편의 헌신은 매우 위험한 측면이 있습니다. 바른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중심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이 특심해도 인간중심의 헌신은 상달된다고 보기에는 어려운것입니다.
[아모스5장22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희생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말라기1장10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우리가 아무때나 예배당에서, 우리의 관점에서 예배드리면, 주님께서 항상 기쁘게 받으신다, 이것은 착각 아닐까요, 저희집에 키우는 개도, 아무때나 개 주인 마음대로 밥을 주어도, 항상 먹는게 아니던데요? 하물며 우리의 주님이신 천상에 지존께서 일천에 일만번제를 곱하여 드린들.........
여러분들 께서 좋은 의견 주심 감사드립니다. 짧은 의견 드립니다. 주안에님, 님이 언급해 주신 주일예배, 매일의 새벽기도 역시 '규범'에 포함되지 않을지요? 일천번제를 강제적인 의무규정으로 정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배와 기도를 위한 다양한 신앙의 규정(자발적 규정 동시에 바른 규정)은 개발되고
활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에디누님,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는 하나님을 향한 나름의 진지한 헌신의 내용과 방법이었습니다. 작금의 일천번제는 솔로몬의 헌신이 결여 되어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헌신이 포함된 일천번제는 어떨까? 질문 드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가 '하나님 중심'에서
드려졌음을 의심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인간의 열심을 소멸하는 일로 만족하기 보다는 그 열심을 하나님 중심의 열심으로 전환할수는 없을까 라는 의견 이었습니다. 대영가스님, 잘못된 번제와 소제의 형식에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심을 신앙합니다. 일천번제가 우리의 관점이라는 전제에 동의 해 드릴수 없습니다.
본질과 현상을 구분해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입장 입니다. 비록 타이틀이 40일.. 일천번제... 특별 작정 00일 기도... 일지라도 그 숫자자체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진지하게 그리고 집중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묵상 한다는 의미를 가질수는 없을지요?
전 이제야 이글을 접했습니다. 제 나름으로 물론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야고보서의 말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을 늘 새기며 말씀을 바라보고 다가섭니다. 그것은 어쩌면 위에 올리신 글 속의 자유에 대해 방종으로 흐르는 위험을 미리 알려주신 것으로 바라봅니다. 바울의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
전혀 별개로 바라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마치 피라미드처럼 위에서 보면 사각형이지만, 아래에서 보면 마치 삼각형의 꼭지점만이 보이는 것처럼, 그러나 결국은 하나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게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모든 것들이~~
마음으로 전해지고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알아가는 자는, 먼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다가설 수 있겠지요. 정해진 규범이 아니라 내가 말씀안에서 깨달은 만큼씩만 드러나며 행하는 것으로!! 예배가 구원의 감사에서부터임을 아는 자는 어떤 규범이나 형식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립니다.^^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는 여름날에 고드름 슬~~슬~~ 녹아 들기 시작 하네요....
솔로몬과 같은 심정으로 드리는 일천번제 많이 와 닿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향한 순수한 헌신으로 시작된 일천번제 새벽기도 라면 세상의 혹은 남들보다 깨어있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심스런 잣대는 결코 신경 쓸 것이 못될 것입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소 일천마리로 한방에 거하게 드린 제사 아닌가요 일천번 드린 제사가 아니고... 백일기도니 사십일 기도니.... 하나님께서 그런 숫자에 연연 하시는 분일까?
하나님께서 숫자에 연연해 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솔로몬의 일천번제가 단번에 드려진 것이라는 것은 숭사리 회원 대부분이 아실 것입니다. 글쓴분께서는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 바로 섰을 때 행해지는 일천번제나 새벽기도 자체를 잘못되었다 하는 것은 아닌것 같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으신 듯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