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아낙의 푸념 소리 - 사이다 한컵의 힘

[산적(주정필)]

사이다 한컵의 힘

(글 제 '운명' 에 이어...)

한 청년을 만났으니...

아가씨로 성장한 내가 운영을 도맡다시피한 수퍼에서.

그는 왕의 남자 아닌 운명의 청년이었다.
바람 타고 나타난 듯한...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던 해는 전쟁도 끝났을뿐더러 공직생활을 하시던 울 아부지 덕분에
넓다란 관사에서 먹거리 풍족하게 평화로이 살았었다.

내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공직생활을 접고, 모 어업조합 이사로 잘 나가던 울 아부지는
한마디로 사업가 체질이 아니셨던 분.

그 후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된 이른 봄 돌아가신 울 엄니의 죽음을 정점으로 또 다시 서서히
기울던 우리집의 가세.
어려워진 가계를 그나마 꾸려가던 건 둘째오빠였다.

그 오빠의 삶 역시 대하소설 감.
파란만장하게 살고 계신다.
숙명처럼 운명처럼 파란을 안고..

그 오빠의 노력으로 차리게 된 수퍼.
나의 이십대 70년대는 광주에서 우후죽순격으로 수퍼가 생겨나던 시대였다.

오빠는 신흥 교수촌이라 불릴만한 곳에 그 당시 타 점포에 비해 제법 큰 매장을 가진
수퍼를 오픈했다.
아부지와 동생들이 운영하여 가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사이드 지원사격을 해주며.

어릴적 잔병치레를 많이하여 울엄니 속 깨나 썩이던 나는 천성이 그러한지,
노는 것도, 여럿이 어울리는 것도, 싸돌아다니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는 거라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처럼 웅크리고 앉아 골똘히 생각하는 것,
배 깔고 엎드려 열심히 책 읽는 것, 꼼지락거리며 뭔가에 열중하여 움직거리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런 유년기의 성장에서 배인 습성은 아가씨가 되어서 고착화된 습관으로 굳어졌는지 여전했다.
울 엄니 돌아가시고 엄마 대행 노릇을 줄곧 하던 내게 수퍼 운영은 당연한 몫이었다.

24개들이 플라스틱 음료수 박스를 창고에서 매장으로 옮기는 건 기본,
아가씨의 몸으로 감당키 어려운 힘든 일들을 나는 묵묵히 처리해냈다.

그 당시의 음료수는 콜라, 오란씨, 칠성 사이다 등등, 대부분이 병에 담긴 것이었다.
통조림 역시 깡통에 담긴 것이 대부분이었고 설탕이나 밀가루 역시 3kg 짜리였다.
그 모든 제품들이 만만치 않은 무게.
그 무거운 무게가 바로 나의 이십대 내 삶의 무게였다.

카운터에 놓인 서흥인가 서창인가의 자그마한 철제 금고를 여닫으며 계산하는 캐셔역 역시 내 몫.
나는 참으로 열심이었다.

1년 사시사철 해 뜨기 전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매장을 지키며 가게를 꾸려 갔다.
가게에 딸린 쪽방에 혼자 기거하며.
살림집은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있었고.

늦은 저녁 시간대.
가게 문을 닫을 즈음 가게 문을 밀고 조용히 들어선 운명의 청년.
무거워 뵈는 안경을 끼고 들어와선 업소용 수퍼 냉장고에서 음료수 한병을 꺼내와 계산대에 놓고
오프너로 마개를 땄다.

유리컵 두개.
당시 매장엔 그 청년과 나 뿐.
조용히 바라보는 내게 두꺼운 안경테 너머의 커다란 눈은 함께 마시자는 은근한 권유를
내비치고 있었다.

들이킨 사이다 한컵에 힘을 얻어 말문을 연 그 청년.
"영화 티켓 두장이 생겼는데 함께 가실래요?" 하며 넌지시 운을 떼었고,
나는 대뜸 기다렸다는 듯, " 그래요~" 하고 대답해 버렸다.
내심 왜 그런 대답이 나왔을까 스스로 놀라며.

좋아하는 거라곤 그저 일하고, 책 읽고, 생각하는 게 전부였던, 무색 무미 무취였던 나로썬
참으로 이상할 노릇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바로 운명이지 싶은데, 더욱 놀라운 것은 약속한 날,
영화 관람을 끝내고나서였다.
다음에...

2011.10.21. 아낙네( http://산적소굴.kr )
 

[농선]

재밌습니다

[강태산]

즐겁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