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루카 12,13-21)
복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만날 준비는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아주 외진 곳이지만 피정객들께서 많이들 찾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 거저 되는 일 하나도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합니다.
단체로 피정을 오시면 준비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식사, 강의, 청소, 침구 세팅, 냉난방 점검...그리고 최종적으로 내가 만일 손님 입장이라면...하는 마음으로 최종적인 점검을 합니다.
외부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초도 해야 하고, 훼손된 산책로도 복구해야 하고, 낙엽도 쓸어야 하고...오후에는 가뜩이나 일손도 부족한데, 엄청난 양의 잎을 떨구어, 배수로를 막는 주범인 활엽수 두 그루를 베어냈습니다. 한 그루를 잘랐는데 트럭 두 대 분량입니다.
이런 저런 손님 맞이 준비를 하면서 문득 든 생각입니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환대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로구나. 이렇게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더없이 철저하면서, 과연 주님 만날 준비는 얼마나 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허리에 띠를 매고’라는 표현을 묵상해봅니다. 오늘도 저희 사제들은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허리에 띠를 맵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봉사할 준비가 잘 갖춰졌다는 말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오시는 분을 향해 사랑을 실천할 만반의 자세가 갖춰졌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들은 부모를 위해, 우리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잘 준비한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복음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큰 준비보다는 작지만 정성이 담긴 준비, 사랑과 마음이 담긴 준비에 전념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준비 중의 준비, 하느님 맞을 준비에 가장 우선권을 두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잘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봤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 사이에 기꺼이 서 있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보다 밝은 미래로 인도하기 위해 늘 연구하고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고통 중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변화되지 않는 그 누군가를 바라보며 한숨 쉬는 분들 많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 어디로부터 다가올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끝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절절한 하느님 체험은 한 사람을 완전히 뒤바꿔놓습니다. 그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노력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보다 깊은 하느님 현존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 배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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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sUuLyXaE_0
<가끔 예수님의 말씀이 황당하게 들리는 이유>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참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제 형에게 분부하시어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게 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합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형이 동생의 몫까지 독차지한, 아주 부정의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정의의 편이신 예수님께서 "이 녀석아, 동생에게 당장 유산을 내놓아라!" 하고 호통치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황당합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하시며 거절하시고는, 뜬금없이 "너희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하고 훈계하십니다.
아니,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시는 게 예수님이 하실 일이 아닙니까?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서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 어딘가 이상하고 황당하게 들리지 않으십니까?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황당하게 들린다면, 그건 우리가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는 환경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여보게, 안식일이니 좀 쉬었다가 허우적거리게나." 하면 그 말이 들리겠습니까?
사람은 두 가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누구는 '동산'에서 살고, 누구는 '정글'에서 삽니다. 에덴동산에 나타났던 뱀의 말을 믿으면, 우리는 정글에서 살게 됩니다. "하느님은 믿을 수 없어. 네 힘으로 살아남아야 해." 이 거짓말이 우리를 정글로 내몹니다. 정글에 사는 존재들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자신을 감추고, 속이고, 진실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야생의 멧돼지는 다리에 가시가 박혀도 절대 절뚝거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절뚝거리는 순간, 약점이 노출되어 바로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정글에서는 이처럼 늘 긴장하고, 경계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이 갖고, 더 강해져야만 합니다.
바로 이 정글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 나온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유산은 생존의 문제였고, 예수님은 그 생존 문제를 해결해 줄 힘 있는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탐욕을 경계하여라. 재물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하시니,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겠습니까?
프랑스의 장클로드 로망이라는 사람은 18년 동안 세계보건기구(WHO)의 저명한 의사 행세를
했습니다. 그는 의대 시험에 낙방한 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대한 거짓의 성을 쌓아 올렸습니다. 18년간 그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습니다. 언제 거짓이 들통날까 봐, 약점을 잡힐까 봐, 정글의 멧돼지처럼 늘 긴장하며 살았습니다.
결국 거짓이 탄로 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진실을 마주하는 대신 아내와 두 자녀, 그리고 부모님까지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비극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없는 정글에서, 거짓의 옷을 입고 생존하려 발버둥 치는 인간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냉전 시절 주한미군 병사였던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부대에서 잦은 말썽을 부리다 군사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자, 그 처벌이라는 진실을 마주하는 대신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한으로 망명하는 거짓의 길을 택했습니다.
장클로드 로망처럼, 드레스녹 또한 자신의 작은 거짓을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거짓의 체제라는
더 큰 거짓으로 덮으려 한 것입니다. 그는 잠시의 위기는 모면했을지 몰라도, 남은 평생을 '위대한 수령 동지께 충성하는 미제 귀순용사'라는 거짓된 역할을 연기하며 더 지독한 정글의 감옥에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동산'에서 말씀하십니다. 동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생존'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이것만 하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동산의 법칙입니다. 그러니 동산에 사는 사람에게 유산 다툼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이 동산의 관점에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얘야, 그런 건 아버지가 다 채워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너는 그저 형제와 사랑하며 잘 지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글에서 나와 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정글로 들어가는 문이 '거짓'이었다면, 동산으로 들어가는 문은 '진실'입니다. 나를 가리던 나뭇잎 옷을 벗어 던지는 것입니다.
이 진실의 문으로 들어간 대표적인 성인이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입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어느 날, 아버지와 도시의 주교,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화려한 옷을 모두 벗어 던졌습니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 그는 세상의 모든 거짓과 허영을 상징하는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선언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분만을 모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생존하려 했던 정글의 삶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돌보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동산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로 그 진실의 순간, 모든 것을 벗어 던진 그 순간, 그는 비로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폐허가 된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에서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가는 내 집을 고쳐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말입니다. 진실하게 자신을 벗어 던졌을 때, 그는 주님의 뜻을 알아듣게 되었고, 무너진 성당을 벽돌 한 장 한 장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탐욕과 위선으로 무너져가던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 전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관계 맺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교입니다. 이 학교를 졸업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관계 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예수님 곁에서 3년이나 따라다녔던 가리옷 유다처럼 말씀을 돈주머니 채우는 수단으로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진리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절대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만이 우리를 동산으로 이끄는 유일한 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어떤 환경에 서 있습니까? 여전히 거짓의 나뭇잎으로 나를 가린 채,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정글에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진실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동산에서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를 옭아매는 거짓의 옷을 벗어 던지고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진실의 문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동산으로 들어갑시다. 그럴 때, 황당하게만 들렸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들려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출처: 복음말씀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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