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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입성하심
마 21:1-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마 21:1-11 / [예루살렘 입성;막11:1-11,눅19:28-38,요12:12-19] 예수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감람산 위에 있는 벳바게 동네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예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2) 말씀하셨다. `너희가 저 동네로 들어가면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같이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하고 말하라. 그러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4) `이 일은 옛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5) ㄱ) `너 시온성아, 기뻐 뛰어라! 너희 예루살렘 시민들아, 환호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왕께서 네게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의로우시고 노련한 해방자이시다. 그런데도 겸비하여 나귀를 타고 오신다. 잡종도 아니고 전투용도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ㄱ. 사62:11,슥9:9) 6) 두 제자가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께서 올라타시자 8)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겉옷을 벗어 길에 폈으며, 어떤 사람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9) 군중이 예수를 앞뒤에서 에워싸고 따라가면서 크게 환성을 올렸다. 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비오니, 우리를 구하소서. 한없이 높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여. 호산나!' (ㄴ. 시118:25-26)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도시가 들끓었고 사람들마다 `이분이 누구요?'하고 물었다. 11) 무리는 `이분은 예수님이요.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신 예언자요' 하고 대답하였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준비를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나귀, 그것도 나귀의 새끼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1-6)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자신이 타고 갈 나귀와 나귀 새끼가 준비되어 있으니 그것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3).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자 선뜻 자기 나귀와 나귀 새끼를 내주었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잘 아는 내용의 이야기이지만 당시 제자들에게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생소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평소 예수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동하실 때 이동수단을 이용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또한 전통적으로 유월절의 예루살렘 순례는 걸어서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 앞에까지는 걸어서 오시다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나귀를 타시는 것이 이상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와는 다른 행동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깨닫기 바라는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7-11) 본문에서 주목할 표현은 “나귀와 나귀 새끼”라는 표현입니다(7).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입니다. 마태가 “나귀와 나귀 새끼”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귀 새끼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부각하고 싶어서입니다. 너무 어린 나귀여서 어미와 함께 있어야만 하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타신 나귀는 어린 나귀정도가 아니라, 어미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장 작고 연약한 나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어린 나귀를 타신 이유가 5절에 나왔습니다. 보통 왕이 탔던 것은 백마였습니다. 나귀는 결코 왕이 탈만한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미가 없으면 안 될 정도의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이 땅에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는 방법은 겸손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은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담당하시는 겸손으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적용: 예수님은 빌린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은 재산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잘 살기 위해서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 생각입니까?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따라가며,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외침대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성하시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시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 되게 하소서.
< 설 교 >
나귀를 타신 종려 주일의 주인
마 21:5 / 강성찬 목사
농부에게는 두 명의 쾌활한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소년들은 아버지의 밀밭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소리쳤습니다. "저걸 좀 좌, 여기에 있는 이것은 보기 싫게 구부리고 있는데 저기에 있는 것은 보기도 좋게 똑바로 서 있잖아!" 그러자 또 다른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렇지! 내가 만일 우리 아버지였다면 여기에 이렇게 고개 숙이고 있는 것들을 모두 뽑아서 던져 버릴 거야." 그러자 소년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엿듣고 있던 아버지가 나타나 소년들에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애들아, 그렇지 않단다. 여기 너희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이 이삭들이 사실은 가장 좋은 것들이란다. 이 이삭들이 보기 싫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유는 밀알이 무겁기 때문이야. 하지만 저기에 똑바로 서 있는 이삭들은 텅 빈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 요컨대 너희들이 꼭 알아야 할 점은 바로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 밀밭의 경우가 적용된다는 것이야. 인간들 중에서도 텅 빈 머리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언제나 더 설쳐대는 법이란다." 작은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큰 모임에 참가하고 난 후 돌아오는 길에 물었습니다. "아버지, 아까 그 모임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많은 말을 하며 연설하던 그 멋진 신사 분은 누구예요?" "머리가 텅 비고 허영심만 강한 떠벌리란다." "오, 슬픈 일이군요. 그러면 아버지, 내 왼쪽 편에 앉아 있던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머리를 숙이고 거의 말도 하지 않으면서 아버지가 떠벌리라고 비난한 그 사람에게조차 몇 번이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던 그 사람 말이에요"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들은 후 따뜻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아비는 하늘이 너에게 그 사람의 겸손과 더불어 그 사람의 지식까지도 선사하시기를 바란단다!"(고개 숙인 이삭)
본문의 말씀은 사62:11절과 슥9:9 을 인용하되 예언서들에 대한 정확하고 자구적인 인용이 아니라 다분히 신학적 관심과 의도가 첨가된 것으로, 예수님의 나귀 입성을 사 62:11와 슥 9:9에 담긴 상징적인 두 의미로써 동시에 나타내고자 함을 봅니다.
이사야 62:11절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합니다. 이는 구원 선포에 의하면 구원자는 마치 개선장군이나 정복군주 또는 강력한 통치자의 모습으로 승리의 개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서 입성함을 나타냅니다.
슥 9:9 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합니다. 이는 메시야는 온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겸손히 입성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들과 평화를 전하는 전령들이 사용하던 짐승인 나귀(삿 5:10;10:4)를 타고 오신다고 표현함으로써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들의 고대하던 진정한 구주이며 평화를 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려 주일 주님은 나귀를 탓시고 예루살렘 성에 둘어 오십니다.
나귀를 타신 종려주인의 주인은 평강의 왕을 나타냅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라 하여 왕이신 메시야를 말씀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합니다.
말은 전쟁과 용맹을 상징하나 나귀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의 권세와 특권을 부여받으신 임금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주권자요 절대군주입니다. 그리스도는 시온의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시 2:6) 합니다. 시온에서 왕으로서의 영광이 빛납니다. 시온으로부터 "율법이 나왔으며,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나왔습니다."
복음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은 통치됩니다. 교회의 율례가 제정되고 공직자들이 위임되고 보호 아래 놓입니다.
한 나라의 통치 분위기는 통치자의 성품과 통치 방법에 따라 달라집니다. 메시아가 도래하여 이루실 새 왕국은 결코 무력과 억압으로 세워지는 공포의 왕국이 아닙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 것처럼 메시아가 통치하시기에 '평화의 왕국'을 이루시려 '평강의 왕'으로 오시었습니다.
탄생에 관한 가르침에서도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12-14)합니다.
종려 주일 입성하실 때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눅 19:37,38)입니다.
종려 주일 나귀를 타신 주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십니다.
나귀를 타신 종려 주인은 겸손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는 겸손하여라고 합니다. 자신도 겸손 하시다고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하십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시고 겸손히 오시었습니다.
(빌 2:7,8)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비천한 곳에 겸손하게 탄생하시었습니다.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가보면 콘스탄틴 대제 때 마리아를 기념하여 말구유 자리에 세운 기념 예배당이 있습니다. 요사이도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은 으레 그 예배당에 한 번 들어가 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념예배당은 꽤 큰데 출입구는 하나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좁고 낮아서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눅 9:46-48)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제일 큰 영광 하늘나라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것 은혜 중에 제일 큰 은혜는 곧 겸손입니다.
그래서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고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세계는 1일, 2일, 3일... 하는 순서에 따라 만들어져, 6일째에 완성되었습니다. 사람은 그 마지막 6일째 만들어졌습니다. 왜 인간은 마지막에 만들어졌을까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탈무드에 의하면, 파리 한 마리도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면 인간은 그다지 교만해지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한 겸허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0-28)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가장 귀한 자리 영광된 자리는 겸손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지상의 교회에서도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된 은총과 복이 임 할 줄로 믿습니다.
포테스 수녀는 심장이 멈추는 듯했습니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보니 교황님께서 서 계신 것이 아닌가! 교황 요한 23세께서 성신병원에 입원 중인 사제 문병을 오신 것이었습니다. 포테스 수녀는 문을 열어 드린 후 원장 수녀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급히 달려갔고, 원장 수녀는 흥분된 얼굴로 달려 나왔습니다. 이제껏 성신병원에 이렇게 귀한 분이 문병 온 적은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당장 자신을 소개해 올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성신수녀원의 원장 수녀입니다." 교황은 다정한 미소로 응답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높은 사람은 못됩니다. 저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일뿐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5-12)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 14:7-14)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영광에 이르는 길은 이 겸손의 길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길이 자신을 높이는 길입니다.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도 가르치셨습니다.
(눅 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배당에 나와 예배 할 지라도 먼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길고도 참된 겸손이 충만 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먼지만 일으키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4-1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사랑 하시는 사람들을 위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 만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성이론 발견으로 크게 성공한 다음에도 대자연 앞에서 자신은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학문과 전문적인 지식은 어디에서 나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험기구에 있던 물에 손가락을 적신 뒤 한 방울의 물을 툭 떨어뜨리며 말했습니다. "나의 학문은 바다에 비유한다면 이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겸손히 부모님께 순종하며 섬기셨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 2:51)
겸손하게 조그마한 마을 나사렛에서 사시었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23)
필립 네리는 16세기의 아주 훌륭하고도 지혜로웠던 그리스도인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네리를 시켜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성녀로서 평판이 나 있었습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도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뒤로 물러나서는 그런 천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명성을 얻고 있는 자신이 그런 일을 요구받다니, 그녀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났습니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놀라실 것 없습니다. 거기는 성녀가 없어요.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자기 영광의 도성에 입성함에 있어서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솔로몬은 부와 지혜가 절대적이었습니다. 비잔틴의 왕좌는 보석으로, 모굴의 왕좌는 공작의 깃털로 꾸몄으나 만왕의 왕 예수는 새끼 나귀를 타고 그의 수도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종려 주일의 주인은 십자가 지심을 나타냅니다.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막 11:2에는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으로 되어 그 순결성과 순수성이 강조되고 있으나 마태는 그 나귀가 아직 멍에를 메고 있지는 않으나 곧 무거운 짐을 메야 할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귀는 평화와 고난을 동시에 상징하는 짐승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예시,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화평의 길을 열어 주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멍에를 메야 할 나귀와 참으로 유사한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종려 주일의 주인을 예루살렘 주민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메시야는 교회에서 전투를 행하시며, 왕으로서 승리를 확보하십니다. 이 임금은 오랫동안 오는 중이었으나 이제 오셨습니다. 문 앞에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말씀이 곧 육신이 되어 지경 안에 거하십니다. 자기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며 크게 기뻐하며 즐거이 불러야 합니다. 기쁜 소식으로 여기며, 참된 것임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오심을 생각하고 기뻐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 오시었습니다. 이에 기쁨이 너무 커서 감출 수 없으며, 너무 당연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처럼, 기쁨의 환호로 맞아야 합니다.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교회의 환호가 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배반하지 말고 십자가 까지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겸손 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평강의 왕을 나타냅니다. 겸손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를 지심을 나타냅니다. 우리 위해 나귀 타시고 입성하시고 삽자가의 길을 가시는 주님과 함께하며 고난 주간을 경건하게 보내는 모두가 됩시다.
나귀를 타신 왕
마 21:1-11 / 문기태목사
오늘은 무슨 날입니까? 고난주일입니까? 정확하게 말해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 무슨 날입니까? 우리는 종려 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이 오늘입니다. 온 백성들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려고 길가에 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환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주님께서 아주 특별한 왕이심을 온 천하에 알리신 의미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종려주일은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왕이십니다."하고 외쳐야 합니다. 종려주일은 왕에 대한 찬사와 감격과 환희가 있는 특별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주일로만 알고 무겁게 우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속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이번 주간은 수난 주간 또는 고난 주간입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은혜를 음미하며 보내야합니다. 그렇지만 종려주일까지도 그렇게 가라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기쁨의 찬양을 드리며 보내야 할 것입니다.
종려주일에 대하여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본문에 기록된 사건을 깊이 관찰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하시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는 벳바게라는 동리에 이르자 갑자기 이상한 명령을 하십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어미 나귀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볼 터인데 나귀를 끌고 오너라." "누가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돈을 주면서 시키신 것도 아니고 남의 나귀를 무조건 끌고 오라고 하니 황당하기 이르데 없는 명령입니다. 게다가 '새끼 나귀를 뭐에 쓰시려고 끌어 오라고 하시나' '이제 2킬로만 더가면 되는데 이제까지 잘 걸어오시다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왜 나귀를 타고서 가시려는 것일까?' 등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민망하였는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안장처럼 깔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에 올라 타셨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생각났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그러자 비로소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천년동안 기다리던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한 왕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남루한 옷차림으로 낮은 곳을 골라 낡은 샌달을 신고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이도록 걸어다니는 초라한 청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만왕의 왕 예수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러자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겉옷을 벗어 예수께서 타신 나귀새끼가 지나는 길에 깔았습니다. 어떤 이는 종려나무가지를 꺽어 길에 깔았습니다. 어떤 이는 앞장을 서며 외쳤습니다. "왕이 나가신다. 길을 열어라." 어떤 이는 뒤에서 따르며 외쳤습니다. " 호산나 찬송을 받으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위대한 왕이시여!"
그렇게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자 온 성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소란한 소리에 놀라 튀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행렬을 보며 서로 물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 "도대체 나귀를 타신 저분은 누구냐?"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님을 따르며 지나는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랍니다." "그런데 왜 나귀를 타고 갑니까?" 당신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언을 모르시오? 저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우리가 기다리던 다윗의 뒤를 이은 왕이랍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왕이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함께 환호하며 왕되신 주님을 향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아이들까지 성전에까지 따라와 계속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분을 내며 예수님께 '왜 저들의 외침을 자제시키지 않느냐?'고 원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셨을까요?
1.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입니다. (5)
예수님은 항상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언을 성취하시려 하셨습니다. 또한 예언의 성취를 통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믿을 수 있도록 입증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갖고 계신 능력을 사용하신다면 수 많은 사람들을 쉽게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굉장한 기적을 행하시므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그런 쉽고 간단한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는 것을 확인하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깨달아 스스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지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정서적으로 느끼며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위엄을 느낄 백마를 타고 입성하시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코끼리를 타고 입성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화려하게 느낄 금수레를 타시지도 않았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구약의 예언들을 알고 기다리는 사람의 눈에만 띄게 다른 짐승을 택하지 않고 작고 초라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환영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라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분을 낸 이도 있습니다.그것은 성경의 지식은 있었으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대로 살펴보니 초라했습니다. 본능대로 판단하니 전혀 하나님이 보내신 왕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기는 커녕 미워했습니다. 오히려 거절하고 죽여 없애려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지십니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말씀의 성취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늘도 성경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는 사람만이 우리 주변에 가까이 찾아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환영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께 찬양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이 성경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신 구세주이심을 의심없이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방법으로 찾아 오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을까요?
2. 우리의 멍에를 메기 위해 오심을 암시하기 위함입니다.(5)
나귀는 멍에를 매고 일을 하는 짐승입니다. 나귀는 본래 타고 다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멍에를 메고 일을 하는 짐승으로 알려졌습니다. 본문에서도 나귀를 설명하며 멍에를 메는 짐승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이사야 53장4절이하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요한도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예수님을 소개 하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우리의 죄와 그로인해 따라 붙는 우리의 무거운 형벌이 실려 있습니다. 주님은 자원하여 그런 멍에를 지신 분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담대히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내게 네 인생의 무거운 짐을 다 대신 짊어지마, 나의 멍에에 연결된 수레에 네 짐을 실어라' 라고 말한 이가 예수님말고 또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나귀처럼 무거운 짐을 지시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처럼 저와 여러분의 죄악을 짊어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고통도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슬픔도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다 감당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마다 어깨를 누루는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날아갈듯한 가벼움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혹 여러분의 어깨에 아직도 벗겨지지 않은 무거운 짐이 여러분을 누루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이 용서받지 못한 죄입니까? 고통과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질병입니까? 인생의 복잡하고 괴로운 문제입니까? 멍에메는 짐승을 타신 예수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주님께서는 기꺼이 여러분의 짐을 감당해 주십니다.
옛날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에 초 나라의 장왕이 커다란 잔치를 베풀고 장수들을 초대했습니다 각 장수들에게는 아름다운 궁녀들이 한 사람씩 배정이 되었습니다 잔치의 흥이 고조될 무렵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방안의 불이 모두 꺼졌습니다. 술도 거나하게 취하고 불도 꺼진 참이라 장웅이라는 장수가 어둠 속에서 옆의 궁녀를 희롱하였습니다. 화가 치민 궁녀는 그 무뢰한을 잡기 위해 그 장수의 투구에 달려 있는 금 술을 잡아떼어 왕에게 고해 바쳤습니다. 왕의 궁녀를 희롱했으니 장수는 목베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불켜는 것을 잠시 중지시키고 초대된 모든 장수들에게 투구에 달린 금술을 떼어 왕에게 바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시 명하여 불을 켰으나 모든 장수들의 투구에는 금술이 없었기에 궁녀를 희롱한 장본인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후 몇 년이 지났습니다. 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장왕이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용감한 장수가 장왕을 구해 냈습니다. 바로 지난날
궁녀를 희롱하여 목베임을 당할뻔 하였던 그 장수가 용서해 준 왕의 은덕을 갚을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주님께 어떻게 보답하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 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을까요?
3. 왕중의 왕이심을 만방에 알리기 위함입니다.(5)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종려주일의 가장 큰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떤 작은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계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떤 위대한 왕과도 비교가 안 되는 왕중의 왕이십니다.
그분에게는 강력한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높은 지위과 보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큰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왕이십니다. 위대한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말입니다. 왜 하필 나귀를 택하셨을까요?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겸손을 자기 비하나 비굴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겸손은 무조건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비천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겸손한 것을 무조건 실력을 갖추어서는 안되는 줄 압니다. 높은 지위와 실력을 다 버리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겸손의 첫째 조건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낮은 사람은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거지가 부자앞에서 동냥을 하며 굽실거리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비굴한 것입니다. 말단 사원이 사장앞에서 허리를 굽히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힘이 없는 사람이 주먹이 센 조폭앞에서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은 절대 겸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자가 거지에게 거들먹거리지 않고 불쌍히 여겨 손을 잡아 주는 것은 겸손입니다. 사장이 말단 사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주며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힘이 센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깔보지 않고 한 대 맞고도 참아 주는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체포된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군을 당장 불러올 수 있지만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힘이 없는 것 처럼 잡혀 주셨습니다. 당장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으나 그대로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달린 것은 우리의 고통을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의 왕되심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겸손하시지만 여전히 왕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을 더욱 높이사 모든 무릎으로 예수님의 이름앞에 무릎꿇게 하셨습니다.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주님은 종려주일에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왕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당신께서 왕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위대한 왕이신 예수께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겸손하게 낮추시더라도 이 종려 주일에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높여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왕되게 하여야 합니다. 왕의 대접을 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왕되기 보다 믿는 너희들의 왕되시기를 원한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뿐아니라 세상에서도 예수님을 왕대접하며 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요 그분의 신하입니다. 따라서 그분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왕의 유익을 나의 유익보다 앞세워야하며 왕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배신입니다. 명성황후에 보면 고종은 왕인데 아무 힘이 없습니다. 신하들도 왕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백성들도 왕보다는 대원군을 더 신뢰하고 따릅니다. 나라가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결국 힘이 없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일단 왕으로 세워졌으면 충성을 해야 합니다. 얼마전 왕건에서 왕건이 위기에 몰리자 대신 왕복을 입고 싸우며 왕이 피할 길을 열어주고 자신은 죽은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며 그 정도는 충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덕 볼려고 하지만 말고 충성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천국을 소유하고 사십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안에 이루어졌습니까? 천국의 평안이 여러분안에 있습니까? 천국의 질서가 여러분안에 이루어졌습니까? 천국의 충성이 여러분을 통해 증명이 되고 있습니까? 천국의 승리가 여러분안에서 확산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안에는 진정한 천국이 있습니까?
여러분, 종려 주일의 주인공인 겸손하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왕이 되어 주실 것을 간청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주 예수님, 이 시간부터 저는 주님의 백성이기를 기뻐하고 백성의 자리에 있겠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주님께서 나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저의 왕이 되시고 제가 주님의 백성됨을 인하여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 제게 명령을 하시옵소서, 주님의 신하로 충성되게 왕이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습니다. 하룻동안만 왕이 아니라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영원토록 주님만이 나의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 21:1-9 / 피종진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어 새끼와 함께 있는 나귀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입성하시는 참으로 귀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수많은 나귀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 이 나귀는 얼마나 축복이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그 나귀에게 임한 영광이 너무나 크고 귀한 것입니다.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쓰임 받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행복과 불행, 생명과 죽음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신 것은
첫째, 모든 만물이 다 주의 소유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께서 만물의 주인(소유주)이심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나라들이 분노하고, 열방들이 훤화하고, 인생들이 각기 제 나름대로 자기 의지를 가지고 동서남북을 띠 띠고 다닐지라도 결국은 모든 것이 다 주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세계 각 나라들이 국경과 한계를 정해서 ‘내 나라, 네 나라’ 하고, 섬 하나를 놓고도 침략을 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한계를 지어서 국가 단위를 형성케 하고,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와 자유와 구원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위대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부를 때 우리의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주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 1~2절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뿐만 아니라 새와 물고기, 동물, 인간 등 모든 만물을 다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다 도와주실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음성과 건강, 시간, 재산, 지위, 명예, 권세’ 등을 쓰시고자 할 때 마땅히 ‘아멘’하고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주께서 예언하신 바를 그대로 진행하는 과정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4,5)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고자 하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스가랴 9장 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경륜이 아닌 것이 없고,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창세로부터 마지막 종말까지 하나님이 정하신 그 계획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진행하게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진행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기쁘고 감사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망 불평하며 짜증스럽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슬픔도, 고난도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갈 때 온갖 중상모략 속에서도 그 길을 주의 음성만 생각하면서 가니까 갈 수가 있었습니다. 좌우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서 갈 수가 없습니다. 주의 길을 똑바로 가면 거기에는 생명과 영광, 소망과 축복, 천국과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타락 이후에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을 예언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종말의 시대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주님께 귀히 쓰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신대로 세상이 진행될 때에 가장 귀한 것은 주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 삶의 기쁨이요, 하나님께 보장받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시며, 우리 가운데 역사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언제나 겸손과 화평의 사람이 주께 쓰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귀는 겸손과 화평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 2:6~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막 10:45). 겸손한 사람이 주께 쓰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겸손한 마음은 은혜 받는 그릇이 된다’고 했고, 톨스토이는 ‘겸손한 사람보다 더 힘이 강한 사람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또한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주셨습니다(골 1:20). 히브리서 12장 14절을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했고, 마태복음 5장 9절을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주께 쓰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만물이 다 주의 소유임을 믿고 주께서 쓰시고자 할 때 즉시 ‘아멘’하고 감사함으로 순종하며,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언제나 겸손과 화평의 사람이 되어 주께 귀히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마 21:1-9 / 김충식목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공생애 사역의 마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인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 방향을 바꾸어 남쪽인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실 때까지 계속 배척받는 여행을 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의 기사가 마태복음 16장-20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여행은 유대로 가시기 전(마 16:13-18:35), 갈릴리에서 유대로(마 19:1-20:16),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노정(마 20:17-21:11)으로 이어집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라는 말씀으로, 예수님 무리가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감람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기간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사역을 하거나 복음을 전파하거나 말씀을 가르치거나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고난 받으시고 자신을 내어 주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살펴보면서,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영적인 교훈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신성과 주권을 가지신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능력과 권위와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모든 사실을 알고 말씀하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지(全知)하신 신성과 주권을 가지신 왕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주권을 행사하는 왕임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는 모두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미리 나귀를 사서 준비해 놓았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주님을 흠모하는 사람이 제자들이 달라고 할 때에 기꺼이 내어놓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지하시며, 왕의 권위로서 무엇이든 가지실 수 있는 주권을 행사하는 분임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순종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기 어렵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인생의 최우선순위가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도 믿고 받아드릴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끌어져 왔는지도 모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께 칭찬 받은 서머나 교회가 있는데, 그 곳에는 위대한 순교자 폴리캅 감독이 있습니다. 폴리캅 감독은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직접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로마 사람들의 말에 굴하지 아니하고, “주님은 나를 84년 동안 한 번도 떠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겠는가?”라고 대답하며 빌라델비아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작렬하게 순교했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과감하게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작은 이권 때문에, 작은 쾌락과 만족 때문에 신앙을 바꾸는 경우는 없습니까?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알리기 원하시는데,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항상 주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성공을 위하여 스펙(spec) 쌓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행이 교회까지 침투하여 교회도, 목사님들도 외향적으로 드러나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많은 부분을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대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생명은 영성에 있고, 말씀에 있습니다. 주님의 인격과 품성에 있습니다. 내가 성공하고 축복 받으려는 것보다 먼저 주님을 알아가기를 원하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과 모습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의 생명이 있습니다.
어느 선박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직원들에게 일요일에 출근해서 도착한 선박에 실린 짐을 함께 내려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사장님, 저는 일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내일은 주일이기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겠습니다’ 라고 하자, 사장은 회사보다 교회를 더 중시하는 직원의 말을 듣고 그를 해고시켰습니다. 얼마 후 사장은 절친한 친구로부터 새로운 은행을 열게 되었는데 믿을 만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사장의 머리의 떠오른 사람은 자신이 해고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이라면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서 믿음과 신념을 바꾸지 않고 믿고 은행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보 같더라도 진실하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사람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 세우시고 쓰십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만왕의 왕 되심을 나타내셨는데,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을 인정하는 순전한 믿음의 고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겸비하고 온유한 평강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본문 4-5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내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서 9:9를 인용한 것으로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을 나타낸 것으로, 이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5절에 나타난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왕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즉흥적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철저하고 완벽한 계획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진행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에 속한 왕으로서 입성하시지만 자신의 온유함과 비하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이나 마차, 수레를 대기시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하는 것과 왜 둘을 필요로 하셨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은 먼저 나귀를 타셨고, 예루살렘 성 가까이 이르셨을 때 나귀 새끼로 바꿔 타신 것 같습니다.
나귀나 나귀 새끼는 온유와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신분적으로 낮다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온유와 겸손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왕은 오만한 위엄으로 오지 않으시고, 온순함과 겸손함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의 왕들의 입성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 나는 멍에 메는 짐승을 탈 것이지만 나의 온유함을 보이기 위해 나귀 새끼도 또한 함께 가야 한다. 이는 하늘에 속한 왕이 얼마나 온유한가를 사람들이 알도록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철저히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싸우거나 경쟁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겸비하고 온유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속한 위대한 왕이셨지만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거나 군림할 의도가 전혀 없으셨고, 온유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온 주님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셨습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황제였던 나폴레옹(Napoléon)은 최후를 맞이하면서 “나는 무력으로써 세계를 정복해 보려고 했으나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하고 말았는데,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는 벌써 세계를 다 지배하고 있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평생 전쟁을 통해 세계 정복을 꿈꾸었지만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했는데, 온유와 겸비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은 모든 인류를 다스리는 권세와 온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모습을 닮기 원합니다. 바보 같아도, 미련한 것 같아도,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말을 타기 보다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시는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본문 7-8절을 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겉옷을 나귀와 나귀 새끼 등에 얹어서 주님을 타시도록 했고, 무리들도 그들의 겉옷을 주님 가시는 길에 펼쳐서 겸비하신 주님을 존귀케 했습니다. 옷을 나귀 등에 얹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왕을 영접하거나 왕의 즉위를 나타낼 때 행하는 극적인 예절에 속합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의 예후가 왕이 될 때에 이런 행위가 있었습니다.(왕하 9:13) 제자들과 무리들은 몇 벌의 옷밖에 없었을 텐데도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리므로 예수님을 환영하였고, 주님은 그것을 통해서 영광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을 존귀케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어느 때는 죄인이나 세리들로부터, 또 어느 때는 가련한 과부의 두 렙돈 까지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선교사이자 의사이자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탄생한지 200주년이 됩니다. 리빙스턴은 검은 대륙의 아버지, 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분으로 위대한 선교사요, 복음전도자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어려서 교회를 다닐 때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선교사가 와서 선교 보고를 한 후 헌금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헌금 쟁반이 돌았고 리빙스턴은 주머니를 뒤져보니 아무 것도 없자, ‘하나님, 드릴 것이 없으니 제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며 자신이 쟁반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때의 그 고백이 리빙스턴의 생애가 되었습니다.
8절 하반절을 보면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합니다. 옷만 편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요한복음 12:13-14을 보면 나뭇가지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리킵니다. 종려나무는 보통 승리의 상징으로(계 7:9) 주로 왕이 지나는 길에 펴놓거나 그것을 들고 흔들었습니다.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편 것은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승리의 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환영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오랜 메시야 대망에 살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인식하고 그가 당장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종려나무는 생명의 풍성한 산출을 누리는 만족을 의미합니다. 종려나무는 감춰진 샘물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하늘 높이 치솟아 자라남으로 풍성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승리자요, 생명을 주시는 왕으로 인식하고 주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것에 승리자가 되시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9절을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합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지금 구원하소서’(시 118:25)라는 뜻이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칭하는 말입니다. 무리들은 하늘에 속한 왕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시편 118편을 인용하여 “메시야 만세,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외치며 찬양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찬양 받으실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무리들은 찬양을 통해서 주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요, 자신들을 구원할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과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성과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우리가 가진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 ‘우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길에 펴면서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을 환영하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라는 찬양을 진심으로 드리고 있는가?’입니다. 이 시대는 기독교인은 많아도 그리스도인은 적다고 합니다. 교회는 많아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1/4 이 기독교인이고, 전 세계 인구의 1/3 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중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에게 입성하시는 주님을 얼마나 진정으로 영접하고 있는가를 되새기면서, 예루살렘 입성 당시의 무리들처럼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을 맞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호산나! 예수님!
>성경본문|
마21장 01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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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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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배혁목사
>비 고|
안토니오교회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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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 예수님!
마 21:1-11 / 배 혁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모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앞으로 그에게 있을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죽음을 결단하고 그 성문을 통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그 길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비장하고 두렵고 떨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면, 죽음의 두려움 속에 떨고 계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축제와 같은 분위기입니다. 제자들의 온 무리가 나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폅니다. 그리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합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소리를 높여 부르며, 소란스럽게 환영하는 모습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불평을 합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이 말씀은 지금 그들이 외치는 그 소리는 지극히 정당하고,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입도 없는 돌들이 나서서 외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환영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예수님을 환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유대인이 꼭 지켜야 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 동안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특별한 준비를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나귀, 그것도 나귀의 새끼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고서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십니다. 누가 보더라도 아주 어색하고 우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하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가지 나무를 흔들면서 환영을 합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 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9:9절에 "시온의 딸들아 기뻐하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하셨습니다.
시온의 딸들은 예루살렘의 사람들,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스가랴 선지자 당시에 예루살렘은 황폐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암울한 시대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상황하고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앞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그들을 구원하실 왕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어떻게 오십니까? 나귀의 작은 것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보니, 나귀새끼를 타고 그들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말씀이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처럼, 왕되신 구원자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일제히 기뻐하며 즐거이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되심을 즉각 믿고 기뻐하며 환영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보면서 기뻐하며, 자신들을 구원하실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불쾌해 합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믿지 못하기에 예루살렘에 주신 큰 기쁨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이 돌들이 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돌들까지라도 외쳐야 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외침은 무엇입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고 부르짖습니다.
호산나는 아람어로, "오,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하실 구원자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외칠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이를 제재하는 바리새인들을 저지하시고, 그 호산나의 외침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을 향하여서 "호산나, 구원해 주십시오" 외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라는 외침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드릴, 그리고 그분의 구세주 되심을 증거하는 외침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호산나의 외침은 이 천년 전 그들만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여전히 외칠 믿음의 고백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필요한 구원이 예수님께 있음을 믿고 '호산나' 외쳐야 하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인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이 다른 나라에 의해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영혼들이 죄의 권세, 사탄의 권세에 사로 잡혀서 멸망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살았지만 영적으로 죽어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전쟁과 테러가 많아 졌습니다. 깨어지는 가정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학교에는 총기사고와 폭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약이 어린 학생들 사이에까지 퍼져 나갑니다. 경건한 자들을 유혹하여 쓰러뜨리는 악한 권세가 팽배해 있는 세대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우리 자녀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 사회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기도문의 한 구절과 같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더욱 간절한 기도와 외침이 필요한 때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한 대상으로 다른 것들을 향해서 외칩니다. 돈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돈을 향해서 호산나 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력을 향해서 호산나, 좋은 직장을 향해서 호산나, 세상을 향해서 호산나 외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상에 썩어질 것들이 나의 인생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호산나’ 외침의 대상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4:12절 말씀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이름인 줄로 믿습니다.
호산나 외침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며,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원하시며, 나의 가정과 사회를 구원할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의지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믿음의 고백과 외침이 돌들이라도 나서서 증거해야 할 중요한 외침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바리새인과 같이, 예수만이 구원자라는 고백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왕이요 구세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외치며, 구원의 왕으로 고백할 때에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전적으로 신뢰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한 쇼가 아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왕으로 오신 구원자가 겸손하여, 나귀의 새끼를 탔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겸손하시고, 그리고 그 겸손의 모습으로 세상을 구원할 것을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할 ‘호산나’의 방법은 “겸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귀가 멍에를 매듯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지시고, 사람들에게 핍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워주는 십자가를 멍에와 같이 지고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나귀를 타시고 오심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셨고 그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결코 백마를 탄 개선장군과 같이 자신의 말발굽아래에 모든 것을 밟아 무너뜨리는 방법이 아니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폭력과 힘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방법은 사탄의 방법입니다. 호산나 외치는 숱한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답게 강력한 힘을 규합하여서 로마에 대해서 대항하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강력하게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시면서 온 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죽어갈 때에 다른 이들을 살릴 수 있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W.헌터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단의 방법이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방법이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강력한 힘을 보여 달라고 그렇게 열렬하게 환호하고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아주 무기력하게 어떠한 저항도 없이 로마병사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잡히시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제자가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잘랐을 때에 예수님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다.”라고 하시며 꾸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저항없이 로마인들에게 끌려 가셔서 채찍을 맞고, 사람들 앞에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재판장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라고 할 때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빌라도는 다시 묻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질문할 때에 더욱 거세게 사람들은 외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사람들이 저럴 수 있을까? 며칠 전에는 ‘호산나’하며 구원해 달라고 열렬히 맞아들이더니,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돌변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큰 배신감을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더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저렇게 무기력하게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며칠 전 예수라는 청년에게 기대를 가지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환호했던 자신이 수치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의 호산나의 외침은 분노로, 배신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받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호산나 외침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호산나 외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나의 기대와 방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기대와 예수님의 방법을 의지하며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치는 자들이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고통과 어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에 홍해바다를 갈라서 그 사이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 광야생활을 먹게 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막고 있던 견고한 성 여리고성을 어떤 무력도 사용하지 않고 무너뜨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들을 말씀한 마디로 고쳐주셨습니다. 죽어서 냄새가 나는 사람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게 사람의 방법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방법이 나의 생각과 방법과, 내가 생각하는 때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반드시 우리를 하나님의 기막힌 때에 기막힌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그 어느 때 보다도 호산나의 외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어느 때보다 죄가 많고 유혹이 많은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왠만한 죄는 죄처럼 느껴지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인들도 이성과 돈의 유혹속에서 무참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세상의 바쁨과 분주함, 물질숭배사상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관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물질이 풍요하고 건강하면 그것이 복이라고 여기며 영혼의 갈급함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시대로부터 우리는 구원함을 받아야 합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자연의 재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진과 해일, 홍수, 토네이토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 가정과 자녀, 교회와 사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 없을 정도로 문제가 없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 구원이 간절한 때입니다. 돌들이라도 외치게 하겠다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듣고자 원하시는 ‘호산나' 외침은 나만의 구원을 바라는 이기적이거나 , 미움과 증오의 마음에서 나오는 구원이 아닙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고,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호산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우리의 마음을 합하는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어려움과 고통에서 해결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우리가 해결받아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구원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만들어지는 많은 문제들, 이것을 위해 중보하며 호산나 해야 합니다. 이 세대를 구원해 주소서, 이 사회를 구원해 주소서.
특별히 고난주간을 우리가 지날 텐데, 이 세대 가운데 구원이 필요한 상황들을 돌아보시면서, 호산나의 간절한 외침이 있기를 바라고, 그 응답이 우리의 가정, 교회 사회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마 21:1-1 / 최종천목사
이제 다음주일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부활절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성탄절만큼 큰 의미를 빚은 감회의 절기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를 죄악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아름다운 탄생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마 이때쯤 되면 우리 마음의 성도라면 누구나 특별한 심정이 되어서 우리의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그 부활을 앞둔 준비의 주간으로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성도들은 나름대로 주님의 고난에 각양의 모습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기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셨던 아름다운 이웃사랑에 대한 동참을 이루게도 됩니다. 특별히 금식을 하며 나름대로 가슴속에 느껴지는 주님의 고난에 대해 묻고 하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는 것이 믿음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때마다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본들 주께서 그 가슴속에 느끼고 흐르셨던 그 고독과 좌절의 절규를 이해하기에는 인간으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위에서 절규는 인간적 고통에 대한 절규 뿐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죄악에 대한 좌절, 또는 그 죄악에 대한 절규이며 그것은 또다시 생명으로 태어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강력한 소망의 외침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즉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아나시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으셨으니 얼마나 아픈가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죄악에 대한 좌절에 대해서 이해함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고난이 시작되는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그의 마지막 공생애 사역을 보내는 한 주간으로서 그 사역의 최고의 절정의 한 주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주간의 시작으로 오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호합니다. 그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다 깔고 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도 깔고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려는 그들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로마로부터의 경제적 정치적 풍요와 자유를 원하였으나 그것을 주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군병들에게 잡히시게 되고 고난을 받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꿈이 깨어지자 그들은 폭도로 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거친 말과 혹독한 얘기를 품어냈던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폭도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원함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전에 품었던 마음이 변하여 오히려 가해하는 인간의 죄악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내용 중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장면을 잘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장면을 생각해 보며 몇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또 말씀 후에 고난주간을 앞두고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성찬식을 거행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서 그가 비로소 왕이요, 메시아이심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이영광의 환호위에 주님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역사를 이루시게 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메시아로서의 공적인 선언과 그 이후에 고난을 통한 영광스런 맺음을 위한 은혜의 여정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땅위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정돈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우리는 먼저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의 성취자이시며 겸손과 온유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행적 중 우리는 우연히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까지도 모든 것은 정확한 성경의 예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유숙하시다가 감람산 벳바게 지역에 이르렀을 때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두 제자를 보내어서 타고 갈 새끼 나귀를 끌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여기서 굳이 나귀를 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 전 생애를 통해서 다니시면서 무엇인가 탈것을 타고 다니신 적이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도보로 다니셨습니다. 굳이 탈 바에는 새끼 나귀를 초라하게 타야 될 이유도 물론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입성이라는 것은 이제까지 그분의 사역을 생각해볼 때 특별한 점이 있는 것을 봅니다. 더욱이 간청하던 제자들에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던 주님께서 스스로 예루살렘에 가시기를 자청하셨고 이제 예루살렘 입성을 이루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새끼나귀를 끌어오라고 하신 것을 보면 특별한 행차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것은 <스가랴 9장 9절>에 말씀하신 예수그리스도는 새끼 나귀를 타고 그 나라에 입성하신다는 말씀을 성취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삶 자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초라한 행색에 나귀를 탔을지언정 수많은 사람의 환호를 받고 그 말씀을 이루어 말씀의 성취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인식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를 따르는 백성이요, 제자요, 그의 자녀라면 우리도 당연히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 우리 삶의 기쁨이요, 감동이요, 은혜요, 영광인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겸손과 온유의 왕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 예수님은 수많은 권능과 권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귀새끼를 타고 이와 같이 초라한 행색으로 입성하셨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셨죠.
예수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겸손의 이유는 또 있습니다. 세상적인 목적과 꿈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의도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다보니까 자연히 그 모습은 겸손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것, 섬김으로 높아지는 것, 죽어짐으로 사라지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전에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정복자들은 당당하게 백마를 타고 전승의 환호를 누리며 환호를 받고 입성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와 같이 환호 받으며 당당한 모습으로 입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렇지 않고 새끼 나귀를 타고 온유와 겸손으로 입성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데 결과가 온유와 겸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0장 20절>에 기록된 메시아의 나라가 이르렀을 때 천국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로 싸웠던 제자들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 같은 위축된 모습이나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비록 새끼나귀를 타고 가는 이와 같은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영광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뻐길 필요도 없었으나 위축될 필요도 없는 분입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겸손과 온유의 모습을 이루었으나 가장 당당한 자의 영광을 이루는 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할 때 방법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우리들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겸손과 온유의 모습입니다. 인간세계에 대한 파악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의 열광과 환호에도 그리고 수많은 조롱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칭찬하면 흔들리게 돼요. 또 조롱하고 비난하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길을 가셨던 것을 봅니다. 환호에 대하여 높아질 필요 없고 비난에 대하여 낙심할 필요 없으시고 끝까지 겸손과 온유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을 나는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독의 토로의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닌 분으로 이렇게 고독하셨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들은 어찌하겠나 생각을 합니다. 외로워 그 모든 마음을 채워 주리라고 환호도 해보고 스스로 이루지 못하는 공허의 체험에 낙심하며 격렬한 비난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들을 볼 때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본심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환호하는 이들도 무엇인가 결핍이 되어서 환호할 것이고 좌절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무엇인가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달라는 간절한 모습임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을 볼 때 하나님의 나라와 위로와 은혜를 바라보며 그리고 세상 사람을 볼 때 우리를 향하여 무엇인가 갈급한 심령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온유와 겸손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육신적 욕구와 기대의 충족을 위하여 춤추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을 보고 그들은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 기대는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도성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정치적인 도성입니다. 수많은 권력자들이 그것을 손안에 넣으려는 갈등과 아픔이 있는 힘겨루기의 터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전에 수많은 정복자들이 있었습니다. 300년 전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렉산더 대재라는 유명한 정복자가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사람으로 또한 기록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 당시 강자였던 로마가 그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들은 로마의 피지배하에 핍박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누군가 힘센 자가 나타나 로마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주는 것을 소원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빵과 세금, 모든 것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이와 같은 구속자 메시아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그런 차에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가는 곳마다 병을 고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모이고 기적의 떡을 먹였고 귀신을 쫓았고 자연을 정복했던 이와 같은 빛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회오리처럼 몰려들고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한 줄기 빛을 본 사람들은 그 빛을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나름대로 채색합니다. 그 가운데 옷을 입힙니다. 정치적인 메시아의 옷을 입혀 세상의 능력을 가진 메시아로 옷을 입혀 마음대로 꾸미고 마음대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었던 것이며 이 땅에서 죽음으로 인간을 죄에서 영원히 구속하고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실 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무리가 겉옷을 벗어서 길에다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높이는 목적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이기적인 욕구를 이루고자 한 것이 환호의 목적이요 동기유발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환호했지만 그들의 계산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던 그들의 욕구로 인하여 이들은 추락하게 되었고 오히려 격렬한 공격자가 되어 자신을 찌르고 맙니다. 이기적인 욕구로 기도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게 될 때 더욱 격렬한 비방자가 될 뿐입니다. 오늘도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열광한 백성들 나름대로의 계산을 이루지 못할 때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욕심에 따라 춤추는 무리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네 번째 살펴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예루살렘 백성을 보며 우리 삶에도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의 삶과 자세는 어떠해야 될까 입니다. 말씀의 성취자인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백성으로 우리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삶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위에서 하신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러한 주님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역시 같은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것인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이룰 것인가?
나의 기쁨을 추구할 것인가,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룸이 나의 모든 기쁨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평생 동안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패되었고 우리는 온전치 못한 인간이기에 내 마음에 원하는 모든 소원을 이룰 수가 없고 이루어도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면 우리가 이룬 그만큼 까지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조차 잊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과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역시 겸손과 온유로 우리 삶의 내용을 구성하며 우리 삶을 통하여 겸손과 온유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종려주일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의 주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고 힘이 없어서 겸손하고 온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과 능력이 있어서 겸손한 것입니다. 제가 반복해서 말씀드리죠? 오늘도 한 번 따라서 합시다.
“탁월한 능력, 겸손”
우리는 두 가지에 대해서 늘 말씀드렸죠.
우리는 탁월함과 겸손함 두 가지를 동시에 양손에 잡고 있어야 돼요. 탁월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겸손해야만 다른 사람을 도울 수가 있어요. 탁월한 사람이 겸손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탁월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탁월하기 위해서 애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탁월함을 가졌으면서도 우리는 교만한 것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며 이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영광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주님은 영광과 권세의 자리에 계셨지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어떤 정복자보다도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셨지만 예루살렘을 정복한 그 어떤 역사의 인물보다도 예수님은 온 세상을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 완전히 정복하셨던 것입니다.
힘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과 모사가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겸손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이 세상을 정복합니다. 내 욕망을 위해서 주님을 해석하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길과 뜻과 사역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고 우리 삶은 그것을 이루어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세상이 나를 위주로 돌아가야만 하는 나 중심의 어리석은 자아관, 세계관, 우주관을 벗어나야 합니다.
내 마음이 기쁘고 슬프고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우리의 슬픔과 기쁨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내 욕망을 이루느냐, 내 감정을 이루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를 순복시키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믿음의 축복은 내 모든 주변이 바뀌어져서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져 내 모든 주변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니 모든 삶의 해석이 달라지고 모든 삶의 관점이 달라지니 결국 그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로 와 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 앞의 사람이 바뀌어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뀜으로 내 앞의 사람이 행복하고 그가 행복하니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삶의 모습입니다.
아내가 바뀌어야 남편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인 내가 바뀌어 아내가 행복하니 내가 더욱 더 행복한 것이고 우리는 또 남편이 바뀌어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니 남편이 행복하고 그 남편이 행복한 모습을 보니 아내인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자식과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축복이라는 것은 환경이 바뀌기 전에 내가 바뀌어 그 환경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 따라 춤추는 군상의 무리와는 달리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를 순복시키는 은혜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주일입니다. 마침내 그 가운데 사람들은 각각의 계획에 따라 춤추며 예수님을 환호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소망이었고 그 소망이 깨어질 때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삶에는 내가 그렇게 원했는데도 이루지 못하는 꿈이 있어요. 그러나 내가 그렇게 원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내가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백성들의 찬송과 환성 속에 이미 비난의 고함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비난의 고함소리에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외치는 그들의 간절한 구원의 소리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도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주셨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종려주일을 지내고 고난주간을 지내며 고난을 묵상할 때 하나님 나라와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 삶에 대한 진실한 깨달음과 우리의 삶을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실현하여 실천해드림과 이제는 이 교회는 선언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 성도들은 선언하는 성도들이 아니라 실천하고 실현하는 성도요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생활 속에서 내 삶에서 이루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 21:1-11 / 윤영택목사
사복음서 모든 저자들이 오늘 읽은 사건을 동시에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을 참고하여 그날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재구성 해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운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심부름 보내십니다. 거기에 가면 한 나귀가 새끼와 함께 매여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낼 것이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제자들이 맞은 편 마을로 들어가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문 앞 거리에 나귀와 그 새끼가 줄에 매어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그 나귀를 풀어가려고 할 때 주인이 나와‘이 나귀를 풀어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알려주신 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합니다’하자 주인은 다른 말 없이 허락하였습니다. 나귀를 예수께 끌고 온 제자들은 새끼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었고 예수께서는 그 위에 타고 가십니다. 죽임 당하실 어린 양으로서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발걸음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왕의 공식 행차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길가에 있던 사람들은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보고 자기 겉옷을 길가에 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펴며 앞서고 뒤따르면서 소리질러 찬송하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찬송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이르자 길가의 군중들은 더 많아졌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찬송소리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요란한 등장에 온 예루살렘 도시가 발칵 뒤집혀 ‘너희들이 소리질러 찬송하며 맞이하는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묻습니다. 그때 군중들은 ‘이 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줄거리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를 본 어린아이와 어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흔들며 호산나 찬양으로 왕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주일을 종려주일이라 이름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종려나무가 이스라엘에서 흔하게 자라는 나무이기도 하지만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왕의 행차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였습니다. 그날 환영식은 제자들이 사전에 기획하고 사람을 동원하여 자리를 채우고 연습하여 보여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마침 유월절 축제에 참여하러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왕의 행차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 뜨거운 환영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외친 ‘호산나’는‘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담긴 유대인의 환호성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환영 행사가 우연히 즉흥적으로 벌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치밀하게 사전 준비된 행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길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뿐이지 그날의 일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선포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세상에 나타내심입니다. 요한은 나중에 복음서를 기록할 때‘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12:16)고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그리스도를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어린 나귀를 타고 갑니다. 그것도 뭇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나사렛 출신 랍비 혹은 선지자로 알려진 사람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갑니다. 예수님이 이전에 하지 않던 이상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날의 동물 애호가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동물학대 반대시위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왕에 왕의 행차를 하려면 키가 크고 멋진 말을 타고 한껏 멋을 내고 들어가시던가 그럴 형편이 아니면 어미 나귀라도 타야 어울릴 것을 왜 하필 나귀의 새끼였습니까? 특히 나사렛 예수를 눈엣 가시처럼 여기고 호시탐탐 헛점을 노리던 반대자들에게는 아주 눈에 거슬리는 돌출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왕 만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며 왕 만세를 부른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몇 일 전에 나사렛 예수가 베다니 동네에서 죽은 나사로를 나흘 만에 다시 살리신 일을 목격하였고 더 많은 사람들은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분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그분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시는가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너도나도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맞으러 나가 외쳤습니다(요12:12, 13).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 설움을 당하던 이스라엘은 옛날 조상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오신 것이라 생각하고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그분이 우리의 왕이 되어주시기만 하면 로마의 군대는 한 순간에 물리치고 자유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기적의 떡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그 능력으로 이 나라 백성들을 배불릴 것이라는 희망도 가져봅니다. 정치적인 문제와 국가 경제 문제를 한 순간에 해결해 줄 능력이 있는 분이 자기들의 시대에 나타났으니 흥분되었고 기꺼이 왕으로 모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왕이시니 메시야를 기다리던 백성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슥9:9).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의식하고 나귀의 새끼를 타신 것은 보란 듯이 자신을 드러내는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이전에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감추거나 조심스럽게 드러냈었는데 이번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주님은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에 왕으로 오신 분임을 선언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정하신 때가 되매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며,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온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들이 전한 예언을 하나하나 이루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땅에 탄생하실 때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뜻밖의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먼 나라 동방으로부터 별을 보고 찾아온 박사들, 그리고 들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 천사가 전하여 준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달려와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실 때 의로운 사람 목수 요셉과 그와 정혼한 처녀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태어난 세례 요한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놀라운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뿐이지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성 방문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잘 준비된 왕의 행차였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가시던 그 길, 왕의 행차를 위한 일에 헌신적으로 동참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물론 본인들은 자신들이 예수께 베푼 섬김이 이처럼 소중한 일이었는지 모르고 한 일이었을 겁니다. 오늘 읽은 말씀처럼,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시도록 예수님께 어린 나귀를 내어준 이름 모를 사람이 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이미 예약이 되었다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나귀를 내어줌으로 그리스도의 왕 되심에 기쁨으로 협력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실 장소를 제공한 사람 역시 말 없는 헌신자였습니다. 제자들이 유월절 양 잡는 날 유월절 식사 장소를 어디에 예약할까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동네에 들어가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니 그를 따라 그 집으로 들어가 집 주인에게 우리 선생님이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 드실 객실이 어디있습니까 물으면 잘 준비된 큰 다락방을 보여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던 두 제자는 그 집 주인을 만났고 주인은 마치 예약이 된 방을 내어주듯 제자들에게 큰 다락방을 보였고 주님은 거기서 최후의 만찬을 드셨습니다(막14:15).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마리아는 ‘이 여인이 내 장례식을 미리 준비하였다’는 주님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마리아 자신도 제자들도 아무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그 일을 통해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장례식을 준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구레네 시몬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힘겹게 끌려가실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비록 로마 군인이 억지로 맡긴 십자가를 지고 갔지만 주께서 당하신 고난의 한 자락을 함께 나눈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까지 그 복된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한편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비록 그 강도는 자기 죄 값으로 당연히 받는 십자가 형벌이었지만 아무 죄도 없이 당하는 주님의 고난을 깨닫고 주님과 함께 고통을 나누었던 행복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람을 기꺼이 받아주심으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기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찾아가 당돌하게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청하여 자신의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는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이사야 53:9)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이루는 일에 동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제공한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주님의 장례식을 도운 뜻밖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흠모하였으나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가 그날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당돌하게 드러내는 용기있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안식일이 지난 첫 새벽에 돌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을 찾아간 여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준비하고 무덤으로 찾아간 여인들은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마지막 헌신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섬김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와 죽으심에 있어 위에서 언급한 이 모든 사람들 중에 어느 누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영광스런 승리를 향한 발걸음에 동참하는 줄 알고 일하였겠습니까? 다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랑과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방식은 달랐지만 그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즐거이 환영하며 온 마음과 행동으로 찬송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주님이 가시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거부하고 끝까지 반대하며 핍박하던 무리들도 있습니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사시는 날 동안 마지막 순간까지 훼방자요 미혹하는 자였습니다. 역설입니다만, 사단도 역시 제딴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자 가룟 유다를 유혹하였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형을 선고한 로마 총독 빌라도와 십자가 사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은 불명예스런 책임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1:15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들과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중지시키라고 항의하였습니다. 아이들의 노래를 그치게 하라는 불평에 주님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시8:2 참고)’ 하고 도리어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저자 누가는 이 부분을 기록하기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불평하여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할 때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셨습니다(눅19:39, 40).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게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을 기쁨으로 환영하며 그분을 주인과 왕으로 찬양하며 모셔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관심과 반대와 저주와 핍박으로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린 아기로 탄생하실 때도 그러했고, 세상의 구주와 빛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에도 똑같은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아침 이런 불행한 사람들보다는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왕을 기쁨으로 환영하며 찬양하던 백성들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마지막 길에 온 마음으로 동참한 복 있는 사람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그 사명을 다 이루셨고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은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을 모두 이루신 주님은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분명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께서 처음 세상에 오실 때에 그러했던 것처럼 재림의 주님이 오실 때에도 두 가지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멸망에 무관심과 무감각으로 살다가 어느날 도적같이 임하시는 주님 앞에 두려움으로 떨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림의 주님은 심판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도록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실 때 성령을 보내주시리라 약속하신 주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재림의 날을 앞두고 성령의 감동으로 죄인들을 부르고 계시는 동안에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재림하실 때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그때는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오직 선과 악을 구별하여 영원한 상급과 영원한 멸망을 선고하실 뿐입니다.
왕의 행차는 온 예루살렘을 소동하게 하였습니다. 아기로 탄생하실 때도 예루살렘이 소동하였고, 왕으로 행차하실 때 역시 예루살렘은 소동하였습니다. 그만큼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그가 과연 누구인가? 궁금하여 여기저기 수소문합니다. 그들에게 아직까지 기회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분을 소개받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림주로 오시는 주님을 보고 역시 소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기회가 없습니다. 지금 기회가 주어졌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문이 활짝 열려있을 때 주님을 왕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하신 왕, 평화의 왕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나의 왕이 되어주시면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능력있는 왕도 대통령도 줄 수 없는 참 평안입니다. 내 가정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며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내 직장과 학교가 주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그리고 나와 이웃들이 그 나라 백성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갑니다. 그것이 성도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이 한 주간 고난의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날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감사하는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를 섬기며 드리는 헌신자인가 자신을 살피는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그분을 찬송하며 기쁨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나귀를 타신 왕
마 21:1-11 / 이정선목사
드디어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가까이 왔습니다. 감람산 중턱에 있는 벳바게라는 마을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 약 1km 밖에 있는 작은 산입니다. 이 산은 해발 818미터이지만, 예루살렘의 고도가 630미터이기 때문에 약 200미터 높이의 작은 산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 산에는 올리브 나무가 많아서 이름이 Mount of Olives, 감람산이 된 것 같습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여리고를 출발하여 곧장 감람산 벳바게로 오신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요한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베다니에서 하룻밤 묵으셨습니다. 베다니 역시 감람산에 있는 마을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서 감람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1:1, 눅 19:29). 그러니까 감람산 여기저기에 마을들이 있었다는 얘기지요? 예수께서 붙잡히셨던 겟세마네 동산도 감람산에 있었습니다. 이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수시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다가 기도하시려고 감람산으로 가셨다가 거기서 잡히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벳바게에서 멈추셨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두 명을 마을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나귀와 그 새끼가 있을 터인데,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너라.’ 아니, 마을에 들어가면 나귀가 있을지 송아지가 있을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사실 나귀는 당시 아무 데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마을에 들어가도 나귀를 만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느 주차장에 가면 도요타 캠리가 주차되어 있을 것인데, 끌고 오라고 하시는 것이나 별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웬만하면 당첨될 수 있는 확률 높은 게임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귀가 필요하셨고, 자기가 사용하실 나귀가 어디 있는지 아시고 제자들에게 끌고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귀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 하느냐고 묻는다면, 주가 쓰시겠다고 대답하라고까지 일러주십니다. 즉 모든 것을 아시는 신적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의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이 말씀은 다르게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즉시 보내리라’는 동사의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나귀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주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나귀 주인이 즉시 보내리라고 번역을 했지만, 주님이 즉시 보낸다고 번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번역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필요하시니 쓰신 다음에 즉시 돌려보내겠다 하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그렇게 번역을 했군요.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d it back here shortly.'[NIV]
우리는 이 나귀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가 쓰신다는 말에 두말없이 나귀를 빌려준 것을 보면, 이 사람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이루실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내드렸지만, 그러나 그의 나귀가 하늘의 왕을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가진 것을 내드릴 때, 주께서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면, 그것처럼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께서 쓰신다면 나의 나귀를 기꺼이 내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행사를 준비하시는데, 필요한 것은 나귀 새끼 한 마리였습니다. 왕이 성에 들어가는 일은 큰 이벤트입니다. 정복자가 성에 들어가면 그 성의 백성들은 새로운 왕에게 복종하고 충성하겠다는 표시로 다 나와서 환영해야 합니다. 환영행사에 나오지 않은 사람은 반역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성이 정복되고 새로운 왕이 들어온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구원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성이 다른 나라에게 빼앗겨 있었다면, 백성들은 다른 왕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을 것인데, 이제 우리 왕이 다시 성을 되찾았으니 백성들은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가서 왕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백성의 환호와 갈채 속에 성에 들어오는 왕은 위엄과 능력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말을 타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옵니다. 이것이 왕이 성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예수께서는 왕으로 오셔서 이제 왕의 도성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왕의 입성에 어울리게 말을 타고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준비하신 것은 나귀입니다.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기로 하셨습니다. 마태는 이것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이 예언은 이사야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사 62:11).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은 더 구체적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여기서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한 것은 여자들만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백성 전체를 의미하는데, 딸이라고 한 것은 아름답다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끌고 온 나귀에 제자들이 안장 대신 겉옷을 얹고 예수께서 올라타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봐도 왕의 행차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왕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왕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셨단 말입니다. 그것도 잠깐 쓰고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남의 것을 빌려와야 했습니다. 왕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행색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말하기를 그 예수께서 시온에 구원을 가져오시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 즉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신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닙니다.
멍에 메는 짐승은 고된 일을 하는 짐승이란 뜻입니다. 지금은 나귀를 흔히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만, 이솝 우화 같은 옛날이야기에 보면 주로 나귀가 일하는 짐승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나귀는 사랑받는 짐승이 아닙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다 늙고 힘없어지면 버려지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런 폼도 나지 않는 나귀를 타셨단 말이에요. 오늘 우리가 사는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일류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뭐든지 남보다 앞서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불안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그러다보니 나보다 못한 사람이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 분해서 우는 것은 한국사람 뿐이라는 말도 있는데, 꼭 1등을 해야 행복한 세상이라면, 한 사람 빼고 다 불행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이 왕의 행차를 하시면서 볼품없는 나귀를 타셨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일류병은 우리 믿음에 큰 해가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자녀들 키우면서도 뭐든지 1등을 해야 하고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보다, 다른 사람 입장도 이해할 줄 알고 양보도 할 줄 알고 희생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가치를 심어주는 교육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타고 가시는데 그 옆에서 우리가 말 위에 올라타서 뽐내고 간다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빌 2:3). 서로가 상대방을 낫게 여기고 자기를 낮추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겨서 늘 싸운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더군요.
예루살렘을 구원하러 오신 왕이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는 것은 그가 이루신 구원의 방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한 성을 정복하고 그 백성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와야 할 것입니다. 변변찮은 군대를 가지고는 성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말에 높이 올라탄 강력한 군주야말로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시는 것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늘의 왕께서 하늘의 보좌에서 내려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늘의 왕이 보좌에 앉아 심판한다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멸망을 의미했습니다. 인간은 영영 구원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이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빌 2:6-8). 그것만이 죄와 사망에 사로잡힌 자기 백성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늘의 왕은 낮아지셨고 겸손해지셨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는 그렇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낮아지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므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진다는 것은 그분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법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싸울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 25-27). 이것이 그분을 왕으로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저히 왕의 행차라고 볼 수 없는 형편인데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니까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길에 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기도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옷을 길에 깔아드린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놓으면 나귀 타고 가시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나뭇가지에 걸려 불편하지 않겠어요?
제가 어렸을 때 본 나무는 소나무, 참나무, 포플러나무, 이런 것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나무의 가지를 꺾어다 길에 깔면 통행하기에 더 불편해질 뿐이지요. 여기서 사람들이 꺾어다가 길에 편 나뭇가지는 팜트리입니다. 특히 여리고에 팜트리가 많아서 여리고의 별명이 종려의 성읍(the city of palm trees)이었습니다(신 34:3). 팜트리는 사실 가지가 없고 큰 잎만 나는 나무입니다. 그런 팜트리 잎을 잘라다가 길에 깔면 길이 완전히 포장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왕이 가시면서 발에 먼지를 묻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을 영예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레드카펫 하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요즘에는 전도희가 칸 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았네 어쨌네 하는 것이 뉴스거리입니다만, 원래 레드카펫이란 왕이 특별한 행사에서 걷는 길에 까는 것입니다. 국가 원수의 비행기가 도착하면 먼저 레드카펫을 깝니다. 그러면 국가 원수가 비행기에서 내려 레드카펫 위를 걷는 것입니다. 국가 원수를 위한 공식적인 환영행사에는 반드시 레드카펫을 깔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팜트리 잎을 잘라 길에 까는 것은 레드카펫을 깔아드리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이렇게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 말은 시편 118편 25절과 26절의 인용입니다.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5,26)
호산나라는 단어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히브리어인데, 사람들이 일종의 구호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의 칭호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야로 인정하고 그 구원을 바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께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려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순간은 얼마나 숨 막히게 중요한 순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일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이 장성하기까지 30년을 기다리셨다가, 마침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지 3년의 기간을 보내시고, 이제 드디어 그 일을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고 소망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기뻐서 소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온 우주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지극히 높은 곳이란 하늘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나타나서 찬송했던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 역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호산나를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땅에서도 기뻐하고 하늘에서도 기뻐하는 위대한 순간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사람이 누구야?’ 묻습니다. 그러자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대답합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말에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었습니다. 이제 그 왕께서 들어오시니 또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하게 들어오신 왕은 이 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성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오늘 그 복음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 들어와 여러분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사렛에서 시작된 천국복음이 온 땅,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 이름에 무릎 꿇게 되기를 바라며, 또한 이 일을 위하여 우리의 헌신이 주님께 드렸던 작은 나귀 새끼처럼 귀하게 사용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
마 21:1-11 / 이정선목사
드디어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가까이 왔습니다. 감람산 중턱에 있는 벳바게라는 마을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 약 1km 밖에 있는 작은 산입니다. 이 산은 해발 818미터이지만, 예루살렘의 고도가 630미터이기 때문에 약 200미터 높이의 작은 산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 산에는 올리브 나무가 많아서 이름이 Mount of Olives, 감람산이 된 것 같습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여리고를 출발하여 곧장 감람산 벳바게로 오신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요한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베다니에서 하룻밤 묵으셨습니다. 베다니 역시 감람산에 있는 마을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서 감람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1:1, 눅 19:29). 그러니까 감람산 여기저기에 마을들이 있었다는 얘기지요? 예수께서 붙잡히셨던 겟세마네 동산도 감람산에 있었습니다. 이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수시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다가 기도하시려고 감람산으로 가셨다가 거기서 잡히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벳바게에서 멈추셨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두 명을 마을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나귀와 그 새끼가 있을 터인데,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너라.’ 아니, 마을에 들어가면 나귀가 있을지 송아지가 있을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사실 나귀는 당시 아무 데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마을에 들어가도 나귀를 만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느 주차장에 가면 도요타 캠리가 주차되어 있을 것인데, 끌고 오라고 하시는 것이나 별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웬만하면 당첨될 수 있는 확률 높은 게임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귀가 필요하셨고, 자기가 사용하실 나귀가 어디 있는지 아시고 제자들에게 끌고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귀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 하느냐고 묻는다면, 주가 쓰시겠다고 대답하라고까지 일러주십니다. 즉 모든 것을 아시는 신적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의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이 말씀은 다르게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즉시 보내리라’는 동사의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나귀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주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나귀 주인이 즉시 보내리라고 번역을 했지만, 주님이 즉시 보낸다고 번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번역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필요하시니 쓰신 다음에 즉시 돌려보내겠다 하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그렇게 번역을 했군요.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d it back here shortly.'[NIV]
우리는 이 나귀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가 쓰신다는 말에 두말없이 나귀를 빌려준 것을 보면, 이 사람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이루실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내드렸지만, 그러나 그의 나귀가 하늘의 왕을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가진 것을 내드릴 때, 주께서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면, 그것처럼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께서 쓰신다면 나의 나귀를 기꺼이 내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행사를 준비하시는데, 필요한 것은 나귀 새끼 한 마리였습니다. 왕이 성에 들어가는 일은 큰 이벤트입니다. 정복자가 성에 들어가면 그 성의 백성들은 새로운 왕에게 복종하고 충성하겠다는 표시로 다 나와서 환영해야 합니다. 환영행사에 나오지 않은 사람은 반역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성이 정복되고 새로운 왕이 들어온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구원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성이 다른 나라에게 빼앗겨 있었다면, 백성들은 다른 왕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을 것인데, 이제 우리 왕이 다시 성을 되찾았으니 백성들은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가서 왕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백성의 환호와 갈채 속에 성에 들어오는 왕은 위엄과 능력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말을 타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옵니다. 이것이 왕이 성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예수께서는 왕으로 오셔서 이제 왕의 도성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왕의 입성에 어울리게 말을 타고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준비하신 것은 나귀입니다.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기로 하셨습니다. 마태는 이것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이 예언은 이사야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사 62:11).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은 더 구체적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여기서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한 것은 여자들만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백성 전체를 의미하는데, 딸이라고 한 것은 아름답다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끌고 온 나귀에 제자들이 안장 대신 겉옷을 얹고 예수께서 올라타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봐도 왕의 행차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왕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왕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셨단 말입니다. 그것도 잠깐 쓰고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남의 것을 빌려와야 했습니다. 왕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행색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말하기를 그 예수께서 시온에 구원을 가져오시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 즉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신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닙니다.
멍에 메는 짐승은 고된 일을 하는 짐승이란 뜻입니다. 지금은 나귀를 흔히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만, 이솝 우화 같은 옛날이야기에 보면 주로 나귀가 일하는 짐승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나귀는 사랑받는 짐승이 아닙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다 늙고 힘없어지면 버려지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런 폼도 나지 않는 나귀를 타셨단 말이에요. 오늘 우리가 사는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일류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뭐든지 남보다 앞서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불안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그러다보니 나보다 못한 사람이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 분해서 우는 것은 한국사람 뿐이라는 말도 있는데, 꼭 1등을 해야 행복한 세상이라면, 한 사람 빼고 다 불행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이 왕의 행차를 하시면서 볼품없는 나귀를 타셨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일류병은 우리 믿음에 큰 해가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자녀들 키우면서도 뭐든지 1등을 해야 하고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보다, 다른 사람 입장도 이해할 줄 알고 양보도 할 줄 알고 희생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가치를 심어주는 교육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타고 가시는데 그 옆에서 우리가 말 위에 올라타서 뽐내고 간다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빌 2:3). 서로가 상대방을 낫게 여기고 자기를 낮추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겨서 늘 싸운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더군요.
예루살렘을 구원하러 오신 왕이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는 것은 그가 이루신 구원의 방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한 성을 정복하고 그 백성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와야 할 것입니다. 변변찮은 군대를 가지고는 성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말에 높이 올라탄 강력한 군주야말로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시는 것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늘의 왕께서 하늘의 보좌에서 내려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늘의 왕이 보좌에 앉아 심판한다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멸망을 의미했습니다. 인간은 영영 구원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이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빌 2:6-8). 그것만이 죄와 사망에 사로잡힌 자기 백성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늘의 왕은 낮아지셨고 겸손해지셨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는 그렇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낮아지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므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진다는 것은 그분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법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싸울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 25-27). 이것이 그분을 왕으로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저히 왕의 행차라고 볼 수 없는 형편인데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니까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길에 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기도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옷을 길에 깔아드린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놓으면 나귀 타고 가시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나뭇가지에 걸려 불편하지 않겠어요?
제가 어렸을 때 본 나무는 소나무, 참나무, 포플러나무, 이런 것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나무의 가지를 꺾어다 길에 깔면 통행하기에 더 불편해질 뿐이지요. 여기서 사람들이 꺾어다가 길에 편 나뭇가지는 팜트리입니다. 특히 여리고에 팜트리가 많아서 여리고의 별명이 종려의 성읍(the city of palm trees)이었습니다(신 34:3). 팜트리는 사실 가지가 없고 큰 잎만 나는 나무입니다. 그런 팜트리 잎을 잘라다가 길에 깔면 길이 완전히 포장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왕이 가시면서 발에 먼지를 묻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을 영예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레드카펫 하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요즘에는 전도희가 칸 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았네 어쨌네 하는 것이 뉴스거리입니다만, 원래 레드카펫이란 왕이 특별한 행사에서 걷는 길에 까는 것입니다. 국가 원수의 비행기가 도착하면 먼저 레드카펫을 깝니다. 그러면 국가 원수가 비행기에서 내려 레드카펫 위를 걷는 것입니다. 국가 원수를 위한 공식적인 환영행사에는 반드시 레드카펫을 깔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팜트리 잎을 잘라 길에 까는 것은 레드카펫을 깔아드리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이렇게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 말은 시편 118편 25절과 26절의 인용입니다.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5,26)
호산나라는 단어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히브리어인데, 사람들이 일종의 구호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의 칭호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야로 인정하고 그 구원을 바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께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려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순간은 얼마나 숨 막히게 중요한 순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일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이 장성하기까지 30년을 기다리셨다가, 마침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지 3년의 기간을 보내시고, 이제 드디어 그 일을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고 소망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기뻐서 소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온 우주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지극히 높은 곳이란 하늘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나타나서 찬송했던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 역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호산나를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땅에서도 기뻐하고 하늘에서도 기뻐하는 위대한 순간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사람이 누구야?’ 묻습니다. 그러자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대답합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말에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었습니다. 이제 그 왕께서 들어오시니 또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하게 들어오신 왕은 이 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성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오늘 그 복음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 들어와 여러분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사렛에서 시작된 천국복음이 온 땅,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 이름에 무릎 꿇게 되기를 바라며, 또한 이 일을 위하여 우리의 헌신이 주님께 드렸던 작은 나귀 새끼처럼 귀하게 사용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사렛 예수
마 21:1-11 / 조재호 목사
지난 주 미국과 한국의 영웅 하인스워드가 어머니와 함께 공항을 통해 개선장군처럼 귀국하였습니다. 꽃다발, 환영 인파, 카메라 프래쉬로 귀국장이 가득했습니다. 원래 개선문은 전쟁터에 나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황제 또는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세우는 문이며, 세계 최고의 개선문은 프랑스 나폴레옹 1세의 1805년 오스텔리츠 전투 승리를 기념하여 1836년에 완공한 것입니다. 높이 50미터, 폭45미터의 개선문 벽면에는 나폴레옹 군대의 각종 승전도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과거 승리하고 개선하는 왕이 크고 당당하게 생긴 흰 말을 타고 입성하면 팡파레 울리고 퍼레이드가 시작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여 나라는 온 통 축제 분위기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조금은 이상한 퍼레이드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퍼레이드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평상시는 걸어서 들어 가셨는데 그날은 제자들에게 “저 건너 마을에 가서 어니 집에 매어 있는 나귀와 그 새끼를 풀어 오라. 누가 왜 남의 것 풀어가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고 데려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입성을 위해 화려한 리무진 승용차도 아니고 잘 훈련된 등치가 큰 멋있게 보이는 명마도 아니고 볼품없는 나귀를 풀어 왔습니다. 안장도 없는 나귀 위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덮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자기들도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 꺾어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며 환호하였습니다.
작년에 이스라엘 남부 사해 주변 마사다 성채 지하에서 종려나무 씨앗을 발견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DNA 검사와 방사선 연대 측정 결과, 자그마치 2000년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이 씨앗을 배양하여 싹을 틔어 7개의 잎이 나왔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 지나도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은 생명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씨끌 벅적한 퍼레이드는 예루살렘 안까지 이어졌고 사람들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작은 나귀 위에 올라탄 저 사람 누구냐?’고 물으니 무리들은 ‘그는 나사렛 예수시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사렛에 자랐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나사렛 예수’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서 가브리엘 천사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셨지만 하나님은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가브리엘을 시골 마을 나사렛으로 보내셨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마태복음 2:23)
성경 속의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길러리에 앉아 있던 소경 바디메오, 그는 길거리의 사람들이 누군가 지나간다는 소식으로 예사롭지 않을 때 왜 그런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이 때 그는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마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고 또 외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총독 빌라도,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대문의 문패처럼 이름적은 패를 십자가 위에 걸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겁쟁이 베드로, 그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성령충만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겁쟁이 베드로가 복음에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성전에 기도하려고 올라가다가 걸인을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 3:6)고 선포함으로 앉은 뱅이를 걷게 만들었습니다. 테러리스트 바울, 그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쫓아다녓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그에게 하늘에서 광채가 내려오고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때 그는 하늘에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후로 그는 위대한 선교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로 사셨다가 나사렛 예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은 생명의 이름, 능력의 이름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 이름이 좋습니다. 그 이름은 거칠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고 푸근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은 나를 품어 주십니다.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은 나를 쉬게 하는 이름이고, 그 이름은 내게 힘을 주는 이름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분은 이 세상에 어떤 분으로 오셨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 분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은 겸손의 이름이시오 그 분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대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1:28-29) 겸손하신 주님은 세상 살이에 지친 우리에게 힘과 쉼을 주십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딸. 아버지가 워낙 엄하고 완고하였습니다. 남들 다 있는 핸드폰 하나 사달라고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들은 채도 안하셨습니다. 오히려 ‘학생이 무슨 핸드폰이 필요해? 안 돼!\' 딱 잘라 거절하였습니다. 딸이 울고 있을 때, 어머니가 안스러워 아버지 몰래 싼 핸드폰 사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안들키려고 집에서는 진동으로 하며 조심조심하였습니다. 1주일 지났을 쯤, 학교 있을 때 문자와 왔습니다. 내 딸아 쉬엄쉬엄 공부해라. 사랑한다”모르고 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보낸 문자였습니다. 딸은 그날 얼마나 기뻤는지? 마음의 부담이 다 살아졌습니다. 솜털같이 가벼워졌습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 겸손하신 주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무한한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는 물과 같습니다. 생명을 담고 흐르는 하나님의 물입니다. 또 은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겸손하신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로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십니다.
둘째,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은 구원이름, 치유의 이름이시오 그분은 구원의 왕 치유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누가 뭐라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귀를 푼다는 것은 맨 것을 푼다는 것이고, 붙잡아 맨 것을 풀어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꽉 졸라매어져 있는 운동화 끈을 풀듯이 푸는 것입니다. 이리 저리 매듭이 져 있는 실을 풀듯이 푸는 것입니다.
봄과 가을, 어머니 큰 빨래인 이불 빨래를 하셨습니다. 겨울 이불 홋청을 뜯을 때 중요한 것은 굵은 실을 잘 회수해야 이불 꿰멜 때 다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방바닥에 길게 늘어놓았는데, 그 때 엉켜뜨려 놓았다가 혼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문도 잘 안나오는 거친 손으로 슬슬 푸셨습니다.
예수님은 꽁꽁 매는 분이 아니시라 매어져 있고 막혀 있는 것을 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손가락을 귀에 넣고 안수 하시며 기도하시고 외치셨습니다. ‘에바다(열려라)’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또,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외치셨습니다. 나사로는 수족이 베로 동인 채 나왔고,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하여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풀어 놓아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고통스러운 문제에서 풀어 주셔서 시원하게 해 주시는 분이속, 예수님은 여러분을 육체의 고난의 병에서 풀어주셔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은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풀어 주셔서 가볍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에게 큰 권세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야 너희가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땅에서 메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은 삶의 원천,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한 주간 동안 주님 이름으로 치유가 일어나기를,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앙이란
마 21:1-11 / 김장환 목사
영국의 유명한 여류작가는 인간은 알든지 모르든지 다섯 가지 감옥에 갇혀서 산다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첫째로 사랑의 감옥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우리 아이들만 좋은 대학에 가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랑의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여 오늘 여러분이 그런 감옥에 갇혀 살고 있다면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그 감옥에서 해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근심의 감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의 입시, 남편의 건강, 사업, 결혼 등의 근심의 감옥에 갇혀 삽니다. 어떤 산모는 아들을 낳자마자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서 빨리 서울대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하나 사라고 하더랍니다. 그 아이가 커서 서울대학교에 붙을지 안 붙을지 모르면서 쓸데없는 근심의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감옥에 갇혀 사신다면 빨리 해방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향수의 감옥입니다. 여기도 이북에서 오신 분들, 타향에서 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 분당이나 수지에 동네가 없었습니다. 호박밭이었어요. 극동방송국을 옮기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닐 때 여기 땅을 사라고 사람이 왔어요. 그 때 왜 내가 그 땅을 안 샀던가, 지금 얼마나 후회를 하는지 모릅니다. 제일 비싼 땅이 평당 700원이었어요. 지금 아파트가 들어 서 있는 신갈 인터체인지 부근이었습니다. 내가 미국서 막 돌아왔을 때 미국에서 왔으니 부자 목사인줄 알고 나더러 땅을 사라고 했는데 “한 평에 얼마요?” 하니까 “5원에 사세요” 하더라고요. 그 때는 돈 5원이 없어서 못 샀어요. 그래서 지금 제가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하는 거예요. 향수의 감옥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고향을 떠나서 지금 분당이나 수지나 다른 동네에서 산다고 해도 이곳이 여러분의 고향인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미국에서 10년 유학을 하면서 저녁에 해가 떨어지면 “해는 저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에 위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서 분당에서 사시는 여러분들, 향수의 감옥에서 하루속히 해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처지나 형편은 옆에 있는 김 집사나 이 집사만 못하고, 내 아내는 박 장로 부인 보다 못하고, 내가 타는 자동차는 거지같고 이 장로가 타는 자동차는 멋있게 보이고, 내가 사는 집은 작게 보이고 박 권사가 사는 집은 크게 보이는 선망의 감옥에서 갇혀 사는 사람들, 오늘 속히 해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 선망의 감옥에서 해방되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모두 눈을 감으라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다시 결혼 할 수 있다면 지금의 부인과 결혼할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니까 한 사람도 없어요. 나는 나이 70이 되어서야 우리 마누라가 귀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옛날에는 잘 몰랐어요. 자기 가족, 친척, 고향을 다 버리고, 살기 힘든 남편의 고향 한국에 따라와서 40여 년 동안 병원 한 번 안 갔어요. 애들 셋을 낳으면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하룻밤씩 있었던 것 외에는 병원에 간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1년 전에 제 미국 부흥회에 따라왔다가 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가 보니 골수암 3기 진단을 받게 되었고 아직도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아내 귀한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모시고 사는 남편이 최고요, 여러분이 같이 데리고 사는 부인이 최고요, 여러분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신 천사입니다. “다른 애들은 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는데 너는 왜 못 들어가니?” 이런 말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울 대학이 다 아니에요. 난 서울대학 안 나왔어도 하루에 밥 세 끼 잘 먹어요. 선망의 감옥에서 해방되길 바랍니다. 물론 서울대학, 연세대학 가면 좋고 미국 하버드대학 가면 좋은데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섯째로 가장 무서운 감옥은 증오의 감옥입니다. ’91년 8월 16일 전주 법원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9살 때 좋지 못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여인이 한 명 있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그 남자를 찾아서 죽였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판사가 할 이야기가 없냐고 물어 보니까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짐승을 죽인 것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21년 동안 그 남자를 증오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이 증오의 감옥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시어머니 미워합니까? 해방되십시오. 목사님 미워합니까? 해방되십시오. 열린우리당 미워합니까? 해방되세요. 세상에 무슨 민주주의가 이렇습니까? 우리 도에 도의원이 106명인데 전부 다 한나라당이에요.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몇 사람은 열린우리당 뽑아 주고 민주당을 뽑아서 밸런스를 맞춰줘야 한다고 믿어요. 그냥 이거 아니면 저거, 죽기 아니면 살기식입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늘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그 증오의 감옥에서 해방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 초림의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이러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을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첫째는 찬양하는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21장 9절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기 전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찬양은 곡조가 달려있는 설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찬양입니다. 우리가 어떤 역경과 고난과 시련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근거로 보면 찬미하는 신앙이 말세를 대비하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7,8절)
둘째는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불러서 맞은편 마을로 가라고 하시니까 그 제자들이 두 말하지 않고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모릅니다. 돈 가지고 갔다는 얘기도 없습니다. 그냥 “저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하자 제자들은 두 말 하지 않고 나귀를 끌러 갑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저도 “하나님, 저도 하나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순종하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기도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니까 새벽 일찍 일어나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을 보면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 교인들이 순종보다는 자기 뜻대로, 자기 고집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처음 목회할 때 우리 교회 찬양대 가운을 하얀색으로 할 것인지, 빨간색으로 할 것인지, 파란색으로 할 것인지를 제직회에 내 봤어요. 2시간이 걸려도 결론이 안 나더군요. 그 후로 찬양대 가운 색깔에 대해서 제직회에 내 놓은 적이 없어요. 그냥 음악 목사의 결정에 따라 만들라고 했어요. 왜? 빨간 가운을 원하던 사람은 하얀 가운을 만드니까 다른 교회로 가더라고요. 하나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순종하는 믿음이 말세를 대비하는 믿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유명한 목사님이 되어 있지만, 김씨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대학을 못가고 선교사님 집에서 잔심부름 해주고 영어나 배우려고 갔는데, 어느 날 선교사님이 큰 트럭에다 장작을 한 가득 싣고 와서 그 청년에게 쌓아 놓으라고 했어요. 청년은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예쁘게 쌓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와서 보시더니 “여기는 미관상 보기 싫으니까 저쪽으로 다시 쌓아 놓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 옮겨서 쌓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나와 보시더니 “여기는 애들 노는데 위험하니까 저쪽 처마 끝으로 다시 쌓아 놓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 여기는 응달이니까 다시 저쪽 양지쪽에 쌓아 놓게” 하셨어요. 그렇게 일곱 번이나 옮겼습니다. 저 같으면 “나 이 더러운 선교사 집에 안 있는다”고 발길질 한번 하고 나갔을 텐데 이 청년은 일곱 번을 아무 말 없이 다 순종하고 쌓았습니다.
그 해 크리스마스가 되니까 선교사가 이 청년을 또 불렀습니다. 청년은 “저 선교사가 장작 귀신 병이 들었나, 오늘은 장작을 어디다 쌓으라고 나를 부르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들어가자마자 “오늘은 장작 어디가 쌓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장작 쌓으라고 자네를 부른 것이 아니네. 자네가 워낙 순종을 잘하니 우리 집에서 썩는 것이 아까워서 내가 내 미국 친구네 집에 편지를 보내 신학교 입학원서와 재정 보증서를 받아 왔으니 빨리 가서 여권을 내고 비자를 준비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당신 나라에 큰일을 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유학하고 돌아와서 신학대학 학장이 되었고 큰 교회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맞은 편 마을에 가 나귀를 끌고 오는 그 제자들의 모습, 그러한 순종이 말세를 대비하고 예수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28장에서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교회 모든 일에 적극 참여하는 그 사람이 말세를 대비하는 신앙의 소유자인줄 믿습니다. 헌금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이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누가 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헌금하라고 하면 해야 하고 십일조 하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말세를 대비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충남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가 교회당을 지어놓고 빚 50만원을 못 갚아서 헌당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유명한 강사 목사님을 모셔다가 일주일간 부흥회를 하면 50만원 헌금이 나올 줄 알고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지금은 돈 50만원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 우리 목사 월급이 한달에 2,500원, 3,000원이었습니다. 금요일까지 부흥회를 하는데 돈 50만원이 안 들어옵니다. 금요일 저녁 마지막 집회를 앞에 놓고 강사 목사가 부담을 느껴서 “혹시 돈 50만원 헌금할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하니까 아무도 손드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저 뒤에서 자매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드는데 옷 입은 것이나 뭘 보더라도 50만원이 나올 거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혹시 말귀를 잘 못 알아들었거나 정신이 좀 오락가락 하는 성도 같아서 손 내리라고 하고 앞에 앉아계신 장로님들에게 “김 장로, 5만원만 헌금하세요! 아멘? 박 장로도…” 이렇게 억지로 50만원을 떠맡겼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담임 목사님과 차 한 잔을 하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요. 문을 열어 보니 아까 50만원을 헌금 하겠다고 손 든 자매에요. 50만원이 든 통장과 나무 도장을 가지고 와서 “목사님, 저는 지금 이 돈이 필요 없습니다.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식모살이를 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바칠테니 교회 헌당하시고 부족한 저를 위해 안수기도로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두 목사님은 너무나 뜻밖의 일에 감동을 받아서 안수 기도하기 전에 이 돈이 어떻게 된 돈인지 물었습니다. 강원도로 시집을 간 자매가 애를 못 낳는다고 시집에서 소박을 당하고 받은 이혼 위자료랍니다. 강사 목사님과 담임 목사님께서 그 자매를 위해서 간절히 축복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강사가 호남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 중에 우연히 그 자매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고 당회실에서 당회원들과 차 한 잔을 하고 있는데 그 교회의 수석 장로님 되는 분이 3년 전에 부인을 암으로 잃고 새 장가를 가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마땅한 여자가 없으니 그 자매를 자기에게 소개 해 달라는 겁니다. 호남에서 충남의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벌써 서울로 식모살이 하러 갔답니다. 두 목사님은 서울에 올라와 다 뒤져서 그 자매를 찾았습니다. “자매님, 호남의 어느 장로님이 상처를 하셔서 새 장가를 가려고 자매님을 소개해 달라는데 혹시 결혼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제가 장로님을 모시지요” 두 사람은 맞선을 보고 목사님 주례로 결혼을 하고 그 자매는 장로님 부인이 됐습니다. 돈 50만원 헌금하고 그렇게 팔자 고친 여자 처음 봤어요. 중소 기업하는 장로님인데 조그만 지프차 하나를 내 주면서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목사님 모시고 다니면서 신방만 해요” 하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해야지요, 선교하라고 하면 선교해야지요, 헌금하라고 하면 헌금해야지요, 봉사 하라고 하면 봉사해야지요, 찬양대 하라고 하면 찬양대 해야지요, 장로 하라고 하면 장로 해야 되요. 장로 하라고 하면 사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그러는가 보니 아직 술을 못 끊었어요. 나 같으면 오늘 술 끊고 내일 장로 할래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세의 우리의 신앙 자세는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말세를 대비하고 예수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는 출자하는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물질보다 우리의 시간을 투자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했습니다.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잠 20:13)고 했습니다. 물질보다 더 귀한 것은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24시간을 똑같이 주셨습니다.
제가 어느 집에 갑자기 심방을 갔습니다. 집사님이 집을 치우고 정신없이 하다가 예배를 드리려고 앉았습니다. 5살 된 아이더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책 가지고 오너라” 하니까 무슨 잡지책 하나를 가지고 와요. 아마 엄마가 성경책 한번 안 보고 매일 그 잡지만 들여다 본 모양이에요. 시간을 내서 성경을 봐야 합니다. 시간을 내서 봉사해야 합니다. 시간을 내서 기도해야 합니다. 시간을 내서 선교해야 합니다. 내 시간을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믿음이 말세를 대비하는 신앙입니다. 제가 수요일 날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하고 악수하고 나면 이 집사도 뛰고 박 권사도 뛰고 최 권사도 뛰고 모두들 뛰어갑니다. 그래서 제가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요?” 하면 “네, 빨리 가서 연속극 봐야 되요” 하는 겁니다. 그 때 한창 “용의 눈물”이 인기 프로그램이었을 때였어요. 뭐 한 편정도 보는 건 문제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어떤 교인들은 한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올 때까지 TV를 봅니다. 그것도 끝나면 어떤 사람들은 영어도 못 알아들으면서 AFKN까지 보고 미국 국가까지 듣고 잡니다. 그러면 새벽기도 절대로 못나옵니다. 직장도 가야 하고 살림도 해야 하고 애들도 돌봐야 합니다만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말세를 대비하는 신앙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서울 서대문 불광동 장로교회에 황 영일씨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육군 중령으로 제대하고 퇴직금을 받아서 어느 분하고 동업을 하다가 망했어요. 서대문 영천, 산 비탈길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가지고 지게를 하나 사서 지게 품팔이를 했습니다. 겨울이 닥쳐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짐 운반해 달라는 사람이 없어요. 택시 정거장 옆에 한 아주머니가 커다란 짐을 하나 놓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암만 기다려도 택시가 오질 않습니다. 그 때는 택시 잡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였지요. 그래서 이 분이 “아주머니 제가 그 짐을 지고 갈테니 택시 한 구간 값만 주세요” 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가 안 오자 그 분이 짐을 지고 아주머니를 따라 갔습니다. 한참을 가서 그 집 앞에 다다라 아주머니가 택시 한 구간 값 60원을 주었습니다. “아주머니, 이렇게 멀리 까지 왔는데 좀 더 처 주세요.” “택시 한 구간 값만 달라고 해 놓고 왜 여러 소리 하고 그래요.” 그리고 아주머니는 짐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더랍니다.
돈 60원을 받아서 해가 어둑어둑 넘어 갈 무렵 집에 가려고 하는데 수요일 저녁 예배당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냥 집에까지 가면 예배를 못 드릴 것 같아서 근처 개척 교회 같은 곳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끝난 다음에 크리스마스 임박해서 구제 헌금을 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잠자리채 같은 헌금대가 있었어요. 그 분은 저 뒤에 앉았다가 잠자리채 헌금대가 오기 전에 나갔어요. 그 60원으로 라면 2개를 사야 가족이 끓여 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어요.
나가서 지게를 지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너 헌금하고 가라.” “못합니다.” “헌금 하고 가라.”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다시 돌아가 60원 헌금을 하고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보니까 부인이 성경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거기 눈물 자국이 있었어요. “여보 나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요?” “예배드리고 오느라고.” “어서 씻으세요. 제가 밥상 차릴게요.” 밥상이 들어 왔는데 반찬이 대여섯 가지에다 기름이 좔좔 흐르는 쌀밥에, 미역국이 올라왔어요. “여보, 이게 어찌된 밥상이요?” “그냥 어서 드세요. 다 드시고 나서 제가 자초지종을 말씀해 드릴게요.” 그런데 밥을 반 쯤 먹고 보니까 애가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니, 쟤 머리가 왜 저래요?”
딸아이가 학교에서 도시락 안 싸온 사람에게 나누어준 카스테라 빵 하나와 우유 하나를 집에 있는 동생과 먹으려고 가방 속에 넣어 뒀는데 오후에 출출해진 반 친구들이 그 빵을 먹겠다고 빼앗으려 해서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얼른 가방을 싸서 2층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이마가 깨어졌답니다. 선생님들이 그 소리를 듣고 돈 6천원을 걷어서 쌀을 좀 사고 반찬과 미역도 샀다는 것입니다. “지금 먹고 있는 밥이 그 밥이에요.” 그러니 밥 먹다 말고 넘어 가질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른들은 배고픈 것을 참을 수 있지만 저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울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문을 열어보니 어느 아주머니가 핸드백에서 돈 3만원을 꺼내 “내가 가진 것이 이거 밖에 없어요. 이거 가지고 애 치료하세요” 이러는 겁니다. “아니, 누구신데 우리에게 돈을 주십니까?” “나는 아까 당신이 왔던 교회에서 안내하는 권사입니다. 내가 안내하다 보니까 당신이 예배를 드리고 들락날락 하며 수상하게 행동을 해서 혹시 간첩이 아닌가 뒤를 따라오다 문 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딱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내일 혹시 지프차가 오면 타고 와 보세요” 하고 가더래요. 다음날 정말 지프차가 한 대가 왔는데 그 권사님 남편이 대기업을 하는 회사 사장이었어요. 인터뷰를 했습니다. “학벌이 어떻게 되오?” “육사 6기생입니다.” “군대 있을 때 뭐 했습니까?” “행정을 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회사의 기획실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돈 60원 헌금하고 대기업의 기획실장으로 발령이 났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요.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들에게 빚지고 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교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교회입니다. 세계를 가슴에 품고 이 교회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환희와 고난
마 21:1-11 / 조용기 목사
환희와 고난
>성경본문|
마21장 01절 ~ 11절
……………………………………………………………………………………………………………………………………………
>주 제|
고난
……………………………………………………………………………………………………………………………………………
>출 처|
조용기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
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
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
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
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
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
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
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
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
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세계 어느 곳이나 연중 축제가 있으며 사람들은 축제에 참여하여 큰 기쁨을 체험합니다.
그 기쁨이 그 소도시나 주민들의 화합과 단결을 촉진시켜 다가오는 어려움이나 고통을 이
기게 합니다. 이같은 마음의 환희는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가 큰 고난을 이기
려면 큰 환희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1. 예수님의 환희 체험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바울 선생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
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큰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예
수님 마음속에 넘치는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가혹한 십자가를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환희 체험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28∼36절에 보면 예수
님은 갈릴리를 떠나 유다 지방으로 마지막 여행을 하십니다. 그 길은 이제 이 세상과 작별
하기 위한 길로 예수님은 가는 길목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
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갑자기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영광으로 얼굴
이 빛나고 그 옷은 눈이 시리도록 희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와서 예수님
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들어보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
실 것과 장사지낸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놀라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나이다. 하나
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
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구름이 그들을 덮으므로 구름 속에 갇히어 두려워 할 때, 음성이 들려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니 저만 들으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구
름이 걷히고 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
님은 그 변화산에서 굉장한 환희를 체험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에도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잠시 누리게 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자인 엘리야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을
말해줍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고난당할 것을 표시한 것이고, 모든
예언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대속의 역사를 하시고 부활하실 것
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가 와서 예수
님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그 영혼 속에 크나큰 환희와
황홀함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다시 한 번 확인토록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35절에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훗날 그 경험을 베드로후서 1
장 17∼18절에서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변화산상에서의 체험으로 예수님은 지극히 큰 존귀와 영광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와 같은 황홀한 존귀와 영광의 체험이 훗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한없는 고통을 당하실
때 극복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고난 당하시기 일주일 전에 감람산 벳바게에서 놀라운 체험을 하셨습니
다. 주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
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
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
라”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벳바게 건너편 마을에 가니 나귀와 나귀 새끼가 있는 것을 보
고 새끼를 풀어서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 위에 올라타셨습니
다. 나귀는 말보다 작은 짐승으로 그 나귀의 새끼라면 더 작은 짐승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그 위에 타셨으면 다리가 땅에 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
렘으로 입성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 옷을 벗어 깔고 나뭇가지를 꺾어 예수님 가는
길에 펼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도에 서서 고함을 치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유월절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율법에 의하
면 예루살렘 주변 30km 지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곳으로 와야만 했습니다. 약 300만의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합니다. 이는 부산 시민 만큼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것
입니다. 감람산 벳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약 3.4km로 10리쯤 됩니다. 예수님이 바
로 이 10리 되는 길을 걸어가시는데 앞에서는 환호를 하고 뒤에서는 수많은 군중이 따릅니
다. 이들은 옷을 벗어 던지고 나뭇가지를 꺾어서 길에 펴며 장엄한 광경을 연출했던 것입
니다.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하고 그 곳에 모인 300여만 명이 모두 놀랬습니다. 사람들은 “이는
갈릴리에서 오신 선지자 예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가랴 9장 9절에 “시
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
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
귀 새끼니라”라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훗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실 때
에 모든 사람들이 환영할 것을 주께서 이미 실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굉장한 감격과 영광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실 것을 기억하고, 그 때 천군 천사와 함께 수 많은 주의 백성
들이 주님을 환호할 것을 기억하며, 예수님은 이 예언적인 사건으로 마음속에 큰 위로와
평안을 얻었습니다. 황홀했습니다. 그 황홀한 체험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장차 십자가 고난
을 능히 짊어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제 십자가에 못박히기 일주일 전, 수난 당하기 엿새 전이었습니다. 베
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갑자기 마리아가 들어와 나드 한 근이 들어 있는 옥
합을 가져와 깨뜨렸습니다. 마리아는 나드 기름을 예수님의 발과 머리에 붓고 자신의 머리
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온 방에 나드 향기가 가득하게 하였습니다.
나드는 굉장히 귀한 기름입니다. 이는 히말라야 산맥 인도지방에서 재배된 나드 향나무
의 뿌리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나드 향유는 한 근에 300데나리온이나 됩니다. 이는 노동자
들 1년 소득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현재 우리의 값어치로 환산하면 약 3000만 원 정도 됩니
다. 게다가 향유를 담았던 옥합은 이집트의 알라버스트론 지방의 산에서 난 돌로 만든 것
으로 매우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옥합과 나드 향유 모두를 합하면 약 3000만 원에서 5000
만 원 정도 되는 값비싸고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과 머
리에 붓고 자기 머리로 닦으며 예수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던 가룟
유다를 중심으로 제자들은 흥분하고 노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무슨 낭비인가? 이 귀한 것
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으면 좋을 뻔했다”라며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
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
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 최후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과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마리아의 예수께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류를 구원하
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영광과 황홀의 체험을 하셨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얻은 충만한 기쁨
으로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황홀과 기쁨의 체험 없이는 고난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변화산상에서 영광과 존
귀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놀라운 군중의 환희와 영광을 체험하게 하셨
습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인류를 대표해서 마리아가 예수께 드린 흠모와 사랑을 체험하고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해 주신 것입니다.
2. 예수님 제자들의 환희 체험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똑같았습니다. 그들이 체험한 환희로 제자들은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 당하신 이후, 제자들은 완전히 낙
심하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사십일 동안 흩어진 제자들을 예루살렘
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그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이 모여 기도할 때 강하고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머리에 임하더니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
언으로 말하는 황홀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 때의 체험이 얼마나 강했던지 모든 제자들은
술취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와서 이 광경을 보고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체험이 있고 난 후, 제자들은 그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는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
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
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체
험이 있었기에 제자들은 그 후에 다가온 큰 핍박과 환난, 죽음까지도 능히 감당할 수 있었
던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37절에서 바울 선생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
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
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을 성령 충만으로 체험하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환난과 고난을 이길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순
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고, 안드
레는 그리스에 가서 전도하다가 X자형의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서 헤롯에게 칼로 목베임을 당해 순교하셨습니다. 요한은 기름 가마에 던져 넣어도 죽지
않자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에베소에서 말년까지 복음을 전한 살아있는 순교자
로 전해집니다. 빌립은 부르기야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순교하고, 바돌로매는 아
르메니아와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고, 도마는 인도에 가
서 전도하다가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베임
을 당해 순교하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림을 당해 순교했습니
다. 가나안인 시몬은 애굽에서 유대로 돌아와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하고,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페르시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하고, 가룟 유다 대신 열 두 제자
의 반열에 오른 맛디아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이 모
든 일들이 교회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 요한 외에는 모두 순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그들이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의 복음을 피로써 도장 찍을 수 있
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 충만으로 임
하여 황홀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
다.
3.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환희 체험
오늘 성도들이 세상을 이길 힘이 어디서 생길까요?
종교를 가졌다고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해서
세상을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은혜의 체험이 있어야 이 세상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은혜의 체험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면 그것으로 인한 황홀함이 우리를 어떠
한 환난이나 고난에서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삶에서 환희의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영적 삶에서 환희의 체험은 성령 충만한 체험입니
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히 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로마
서 5장 5절에서 바울 선생은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
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음바 됨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
아 사랑이 우리 각자의 마음에 부음바 되면 그 황홀한 체험을 통해서 그 이후에 일어날 환
난이나 곤고, 적신이나 위험, 기근이나 칼, 죽음까지라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
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수의 강이 넘쳐흘러야 성공적으로 승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
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체험을 할 때 큰 은혜를 받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성
경을 아무리 많이 외운다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깨달으
면 큰 영광과 힘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승리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
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
기를 원하시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에는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를 ‘듣
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깨닫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
다.
18세기 영국을 변화시킨 요한 웨슬레는 그의 대학시절 뜨거운 신앙인이 되어서 선교사로
미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선교에서 실패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는 신앙 교육을 잘 받았고 선교사로 미국까지 다녀왔지만 구원 받은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선교지에서 도망쳐 영국 런던으로 돌아오게 된 것
입니다.
그런데 1738년 5월 24일 웨슬레는 런던의 올더스게이트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
니다. “그날 저녁에 나는 마지못해 친구의 강요에 의해서 올더스게이트의 거리에 모이는
집회에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9시
15분 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내 마음속에 이상한 뜨거운 불이 임하여 설레이기 시작했습니
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받
는다는 진리를 마음속으로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전, 그는 머리로써 읽어서 안 것이 마음 속에 부딪혀 오지 않았는데, 그날 저녁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고 설레이는 불길이 임하더니 믿음으로 용서와 의를 얻는다는 진리가
확연히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러자 영혼에 밝은 빛이 비취고 환희가 넘쳐났습니다. 그 길
로 그는 일어나 영국을 변화시키는 복음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웨슬레에게
“당신은 무슨 힘으로 이렇게 위대한 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체험 이후 언제나 성령의 설레이는 불길이 마음속에 있어서 그 불길
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진리를 깨닫자 그 마음이 성령의 불길로 설레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
는 것으로는 우리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깨
달아질 때, 그러한 체험이 있어야 이후 어떠한 시련과 환난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
겨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심적인 삶에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체험, 소망의 체
험, 사랑의 체험, 의의 체험, 평강의 체험, 희락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바울 선생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또한 시편 16편 11절에는 “주
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
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체험하고 소망과 평강이 넘쳐나고, 희락이 넘쳐
나는 체험을 해야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체험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저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예배하다가 마음속에 얻는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뼛속 깊이 아로새긴 체험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나
가서 어떠한 핍박을 받아도 넉넉히 이겨나갈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생활 속에서 환희의 체험을 해야만 합니다. 신병의 치료함을 받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겨 놓습니다. 시편 103편 3∼5절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
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
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
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
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병들어 고통 당할 때 주님의 능력을 통해 치유되는 체험을 하면, 이러한 체험은 우
리 일생에 등불이 됩니다. 이 체험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배반하지 않게 만들며 어떠한
어려움에도 믿음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우
리에게 놀라운 치료의 체험을 주십니다. 혹은 고통스러운 문제가 해결될 때 이 은혜가 우
리 마음을 부여잡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
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
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생활과 사업에서 캄캄한 사망의 음
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동서남북 그 어디를 바라보아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 절망 가운데 우리가 주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예수님은 형식적인, 신학적인, 종교적인
주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모습으로 우리의 생애 속에 나타나셔서 우리 마음에 사망 대신 생
명을, 어두움 대신 빛을 비춰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시고 주의
지팡이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주의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체
험을 하게 될 때 그 체험의 황홀한 감격으로 인해 우리는 신앙 속에 굳건히 설 수 있게 되
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면서 많은 축복을 체험합니다. 시편 1편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
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은혜를 체험하고 삶 가운데
주님의 은혜로 형통을 체험한 사람은 그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에스겔 34장 26∼27절에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
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예수님은 축복의 주님이십니다.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주를 찾는 자는 복을
받고 젊은 사자는 굶주릴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적인 신앙은 삶이 평탄할 때에는 괜찮은 것 같지만, 큰 시련이 다가오면 모래성 같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큰 환희의 체험으로 삶 속에 기록될 때 그것
은 거대한 기쁨과 힘이 되어 우리 삶 가운데 부딪히는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능히 극복
할 수 있게 합니다.
종려주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은 이제 한 주일 후에는 자신이 처참
한 고통 가운데 죽어야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도망
칠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타협하고 헬라로 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
살렘으로 올라오는 도중, 변화산상에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받는 체험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수 많은 군중들이 그를 환영하며 환희로 고함치는 소리를 통해서 장차
이 땅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어 오실 것을 몸소 체험하고 환희를 느끼셨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그 깊은 사랑과 헌신에 큰 위로와 용기와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환희의 체
험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환희의 체험이 있어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세상은 환난과 시험이 많
습니다. 마귀는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모든 악한 힘을 동원하여 우리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지막 때에 신앙을 견지하고 마귀를 이기고 나아가기 위
해서는 성령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체험해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를 깨닫는
체험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체험해야 합니다. 또한 병고침과 축복
도 체험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 황홀한 체험으로 아로새겨질 때 또한 생활
가운데 그러한 체험을 했을 때, 우리는 어떠한 고통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
겨나는 것입니다.
[기 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심은 살아계신 그리스도
를 체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도 의식도 아니옵니다.
주님!
주님의 깨어진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에 놀라운 변
화의 체험을 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확실히 체험하고 환난이나 곤고
나 핍박이나 위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
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선택의 기준
마 21:1-5 / 김경년목사
요즘 우리 국민들은 총선을 앞두고 몇 사람만 모이면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봅니다. 목회자들도 모이면 가끔 정치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김 목사님은 무슨 당을 지지하느냐?” 고 질문하셔서 “대답하기 곤란해서 나는 지지하는 당이 없다고 했더니” 옆에 계신 분이 “김 목사님은 여당이다” 또 다른 사람이 “김 목사님은 야당이야” 그래서 제가 “나는 예수당입니다”라고 말하며 웃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의 일꾼이든지, 교회의 일꾼이든지, 분명한 것은 선택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경영자 (CEO)들은 총선 후보자들에 대한 선택 기준으로는 '소속정당'이나 '공약'보다는 참신성이나 개혁성 같은 '인물'을 중시했고, '검증된 과거경력과 자질'도 주요 기준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총선후 정치적 변화에 대해서는 '정치권 물갈이를 통한 세대교체'를 가장 많이 꼽았고, '불법 정치자금 근절'이 뒤를 이었습니다.
17대 국회의원들이 갖춰야할 덕목으로는 '도덕성과 청렴성'을 가장 높게 꼽았고, '리더십'과 '경제경영 전문지식'을 들었습니다.
어쨌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매우 특별한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분명히 목적이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예수님이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본문 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것을 주님이 오시기 4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셨습니다. 스가랴는 예수님이 오시기 400년전에 이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즉 스가랴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은 그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한번도 감정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행동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신 후에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에도 몹시 배가 고프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져야할 것인지, 피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행동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좇아내며, 온갖 신기한 기적을 펼친다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 (마7)
우리가 나라의 일꾼을 뽑든지, 교회의 일꾼을 세우든지 중요한 것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 선택을 하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면 성공적인 일꾼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금년 5월에 직원 선출을 합니다. 장로3인, 안수집사5인, 권사10인을 뽑습니다. 중요한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3:2-7절에 나오는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듣겠습니다.
감독은, 책망받을 일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않으며, 난폭하지 않고 너그러우며, 다투지 않으며,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아주 공손히 복종하게 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모르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또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그러면 그가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을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감독은 또한,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비방을 받지 않으며, 마귀의 올무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직원을 선출하면 그릇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데 혈연, 지연, 학연으로 뽑으면 시험에 듭니다. 이런 모든 것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양심의 손을 얹어서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필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선택하셨습니까?
같은 내용을 마가복음 11장2절에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란 곧 순결하고 구별된 나귀를 십자가 사역의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순결하고 거룩한 백성을 선택하여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쁘다고 아무 그릇이나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금그릇이라도 더러우면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초라한 나무 그릇이라도 깨끗하면 주님이 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십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할 때 이새의 집에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용모가 준수한 이새의 아들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덟 아들 가운데 가장 작고 초라한 막내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신을 볼 때 외모가 준수하지 않아서 고민입니까? 돈이 없어서 공부를 많이 못해서, 직장이 별로여서, 그런 외적인 환경을 보지 말고 여러분의 중심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도 사람의 중심을 보고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의 학벌, 외모, 경력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라를 살릴 사람인가? 자기 배만 채울 사람인가?
선거 때만 되면 교회 나와서 한 표 부탁하고 선거 끝나면 몇 년 동안 교회 한번 찾지 않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저들의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일꾼을 세울 때 외모나 학력 같은 것을 보지 말고 사람의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가를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강조하신 내용은 나귀 새끼입니다. 본문에 보면 어미와 새끼가 함께 있었는데 그 가운데 새끼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사역에 중요한 도구로 쓰시는데 필요한 것은 새끼였습니다. 그 이유가 본문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선택하신 이유는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주님의 겸손은 무엇을 뜻합니까? 무조건 예 예 하고 머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공의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지만, 거짓과 불의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선택하셨습니다. 겸손하신 주님은 오늘도 겸손한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라의 지도자를 세울 때도 겸손한 자를 선택의 기준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버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해진 사울에게 “차라리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시며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자들을 제자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교만해져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유다에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인생” 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일꾼을 뽑을 때 겸손한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겸손한 것 같아서 뽑았는데 몇 년도 못가서 교만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니 우선 우리가 할 일은 겸손한 사람을 찾는 일입니다.
많은 경우에 겸손한 것 같아서 뽑았는데 직분을 받더니 사람이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도사가 목사가 되더니 교만하게 되고, 집사가 장로가 되더니 교만해지고, 권사가 되더니 교만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나라의 지도자를 세울 때도 겸손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선거운동 할 때는 180도로 인사하다가 당선되면 인사도 받지 않는 사람을 뽑으면 안됩니다. 교만한 사람을 세우면 나라가 망합니다.
결 론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공(細工)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높이 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범선(帆船)이 되어 가지고 사람들의 왕래를 도울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나는 여기 남고 싶다. 높이 높이 자라나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 주겠다"고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했던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공을 받아 작은 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가 핥아먹고 개가 핥아 먹고 하는 먹이통이 되어 마굿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되어 대양(大洋)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나는 생선이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없을 때는 쓸모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한 소원과는 달리 어느날엔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어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아, 나는 왜 하필이면 이렇듯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단 말인가?'하고 그는 탄식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어느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숱하게 좋은 처소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 천덕꾸러기 말구유에 태어나시는 것이어서, 첫 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할 수 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오셔서는 그 보잘것없는 조각배에 올라 앉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어서,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그렇듯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두란노 출판-세그루의 나무 중에서)
여러분 세그루의 나무는 비록 각자의 꿈은 깨어졌지만 결국 깨어진 꿈속에서 다시 주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큰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비록 산산조각으로 부서질지라도 예수님을 모신 구유처럼, 예수님이 타신 작은 배처럼, 예수님이 못박힌 십자가처럼 주님을 위해 쓰임받는 다면 영원히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내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큰 인물이 되리라, 큰 기업가가 되리라, 세상에서 큰 명성을 날리는 학자가 되리라 꿈 꾸었으나 그 꿈이 다 산산조작이 나서 깨어졌을찌라도 지금 이시간 주님께 쓰임받고 있다면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크게 쓰임받지 못했다고 탄식하지 말고 우리의 남은 생애가 주님께 더욱 쓰임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도 순결하고 거룩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겸손한 자를 기다리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