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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01
《한 수련, 최악의 남자를 만나다.》
숨이 막혀 온다. 뭔가 강하게 아주 강하게 온몸을 휘감고 숨통을 조여온다. 살고자 발버둥치며 자신의 몸을 억누르는 이 뭔가를 떼어
내려 아무리 바둥되도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기는 커녕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그녀를 압박해 온다. 이대로는 정말 죽을지 모른
다. 그만. 이제 그만. 제발 그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가위에 눌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이마엔 식은 땀이 맺혔다. 희미하게 남은 불쾌한 느낌이 간밤
의 꿈이 지독한 악몽이었음을 말해줄 뿐, 꿈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한동안 촛점 없는 시선으로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을 멍하
니 바라본다. 껌뻑껌뻑, 눈꺼풀을 연신 움직여 되며 그것이 천장이라는 걸 깨닫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허나 그것이 낯선 천장
이라는 걸 눈치 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더라 … ,가 아니잖아! 정신이 번쩍 든다. 느슨하게 풀렸던 수련의 눈이 휘동그레진다. 어디야! 어디냐고!? 오쉣. 주변을
본 답시고 고개를 휙휙 돌려되던 수련, 욱신욱신 머리가 아파온다. 일어나자 말자 너무 격하게 반응해서 그런가, 응?!!! 뭔가 부자연
스러운 움직임이다. 다시 한번 손을 들어보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건 손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부자연스럽
게 움직임을 저지 당하고 있었다. 이 느낌은 분명 무언가에 온몸이 묶여있다. 혹시 납치?! 그, 그 영화에서 보고 뉴스에서만 보던 그
납치?! 머리속이 혼란스럽다. 낯선 장소. 포박된 몸. 그거 말고는 없다. 겁이 덜컹 났다.
주변을 보려 살짝 고개를 옆으로 튼다. 누워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만큼 아무런 무늬도 없는 순백의 새하얀 침대. 한쪽 벽면을 모두
가리고 있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실크 느낌의 하늘거리는 커텐. 그리고 침대 만큼이나 새하얀 벽과 천장. 눈에 띄는 정보는 그게 전
부였다. 창고라고 하기엔 너무 깨끗하고 방이라고 하기엔 뭔가 퀭한 이상한 장소였다. 머리를 들어 자신의 상태를 보려던 수련은 힘
없이 그대로 누워버린다. 오른쪽 머리가 아까부터 심하게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눈물이 울컥 났다.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헐크처럼
쭈악 찢어 보려 팔을 양옆으로 벌려 보지만 느슨해 지긴 커녕 엄한 핏줄이 찢어 지게 생겼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다. 몇번인가를 더
죽을 힘을 다해 움직여 보던 수련은 축 늘어진다. 자신의 힘으로는 골백번을 도전한들 무리다.
아,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28년 짧은 생을 이렇게 마감해야 하나. 무서움과 비참함, 두려움과 서글픔이 일순간에 밀려든다.
살면서 남에게 크게 해를 입힌 기억도 없는데 설사 나도 모르는 사이 작은 죄들을 지었다고 쳐. 그렇다고 이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
야 하나. 너무한다. 신이 있다면 당신은 진짜 이럼 안되는 거다. 어제 그리 비참하게 차였는데 그것에서 헤어나기도 전에 납치라니 너
무 한거 아냐! 아, 써글!!!
딸각.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스윽스윽, 슬리퍼를 끄는 듯한 마찰음이 들린다. 정체 모를 인기척에 수련은 두눈을 꼭 감고 자는척 숨
소리를 죽이며 청각을 쫑긋 세운다. 얼마간의 발소리 후에 찾아오는 정적. 눈안이 간질간질 거린다. 눈앞의 상황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먼가 쓰윽 자신의 머리 곁에 다가오는 느낌과 함께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수 냄새. 강한 듯 하면서도 은은
한 향기가 풍겨온다. 향수 냄새? 땀 냄새가 아니라? 납치범이라 추정되는 저놈한테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어디선가 맡아 본듯한,
두 눈을 움찔움찔 되는 여자를 내려다 본다. 깨어 났으면 냉큼 일어나 갈 것이지 자는 척을 하고 있다. 정말이지 그녀가 하는 행동은
뭐하나 납득이 가는 게 없다. 한마디로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비정상적이다. 백보 양보해서 창피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애초에 저 어설픈 연기는 뭐람. 미간에 짜증이 베인 깊은 주름이 페인다. 넥타이를 확인하고 세웠던 셔츠 깃을 내린다. 새 셔츠를 꺼
내 입은 듯 하얀 셔츠의 손매에 커프스버튼을 체운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 반이 다 되어 간다. 이 여자를 쫒아내고 출근 해야 하는
데. 저리 생쇼를 하는 여자가 쉽게 일어날리 만무. 그렇다고 그녀와 실랑이를 할 만큼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 작은 한숨을 내쉰다.
" 창피해서 못 일어나는 거라면 한 5분 있다 일어나. 난 지금 출근해야 하니까. "
" … . "
"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일러두는 말인데. 내 물건에 절대 손대지 말았으면 해. 타인이 손대는 거 딱 질색이니까. 물이나 냉장고 안
에 음료수를 마시는 정도는 용서해 주지. "
중하의 톤에 약간 허스키한 음성이다. 발음이 굉장히 섬세했다. 뭐랄까 교과서적인 느낌이랄까. 그래, 마치 아나운서 같은 말투였다.
좋은 향기가 나고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이 남자. 납치에 포박에, 이젠 감금을 할 모양이다. 아, 어떻해야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
을까. 지금까지 정보를 수집해 보면 이 남자, 왠지 굉장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느낌이다. 그렇다는 건 정신 이상자?! 그래 요즘 현대
인들이 스트레스와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엄청난 업무량과 대인관계에서 고뇌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하다. 그럼
혹시 이렇게 날 감금시키고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전부 나한테 푸는 거 아냐? 순간 섬뜩한 영상이 머리속에 그려진다. 파르르 떨
리는 입술을 지그시 문다. 일단 이 사람과 대화를 시도해 봐야 할 것 같다. 먹히던 안 먹히던 설득이라도 해봐야 희박해도 살길이 열
릴 거 아니겠어?
" 저기요! "
다급한 그녀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뒷통수가 보인다. 분명 고지식하게 생긴 아저씨. 저 각잡힌 하얀 셔츠를
봐. 혼자 사는 남자가 저리 깨끗한 옷이라면 엄청 깔끔을 떠는 거다. 혹시 결벽증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서워. 설마 2대 8, 가르마를
하시진 않으셨겠지? 그럼 안되는데. 완전 꽉 막힌 사람일 거 아냐. 시대에 뒤떨어진 꽉막힌 아저씨. 생각만으로 눈물이 찔끔 나려 한
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깊은 심호흡을 한다. 귓가가 보이고 옆 얼굴이 보이고 높은 콧대가 보이고 그리고 … . 수련의 눈이
점점 커져 휘동그레 진다. 이 사람이 납치범?! 빠직하고 머리속에 그려진 영상이 깨진 거울처럼 부서진다. 그려 넣은 듯한 반듯한 눈
썹과 그 아래 자리 잡은 유달리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잘 생겼다. 세상에나. 그녀가 여태 본 남자중에 이렇게 완벽하게 생긴
사람은 없었다. 이런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납치를?!!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젖는다. 사람은 겉만 보고 모르는 법이다. 지금 저 남자의
얼굴에 빠져 헬레레 할 때가 아니다. 여기서 도망가기 위해선 지금 밖에 없다. 기회는 한 번!
" 뭐, 뭔가 그쪽분도 많은 이유가 있었겠죠. 네 압니다, 알고 말고요. 오죽 하셨으면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셨겠어요? 그치만 말
이죠 이렇게 한다고 그쪽분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랍니다. 아, 그렇다고 지금 제발이 절대 따지거나 그런 거 아닙니다. 절대 오
해 없으시길 바래요. 저는 다만 이런 방법 말고도 다른 방법도 있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직은 서로에게 딱히
뭔가 피해를 준 것도 입은 것도 아니니 이 시점에서 잘 마무리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요. 절대, 네버, 결코 당신이 지금 이
시점에서 절 풀어 주신다면 신고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네! 하늘에 맹세코 절대. "
" … . "
" 알아요. 처음 본 절 어떻게 신용하시겠습니까. 그쵸? 그치만 저 절~대 그런 나쁜 여자 아닙니다.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고 이런 짓 하
지 않아요. 자자, 침착하시구요. 한번만 더 신중히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사람이 궁지에 몰렸어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냉정히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누누히 말하지만 절대 강요나 따지는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돌변나지 마세요.
침착하게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하게. 후우~ 심호흡도 하시구요. "
" … . "
" 이 시점에서 욱하시면 그건 저를 납치한 것보다 더 큰 실수를 하시는 거에요. 솔직히 제입으로 말하긴 글치만 저 불상한 여자 입니
다. 사실 이렇게 그쪽분한테 납치되서 차라리 콱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죠. 근데 생각해 보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7년이나 사귄 남
친한테 이유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차이고. 그 아픔을 정리할 틈도 없이 이렇게 납치에 감금에.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가엽지 않
나요? 저 이런 불상한 여잡니다. 한번만 자비를 베푸세요. 이번 기회에 착한일 한번 하시면 또 압니까? 하늘에서 복이 내릴지. 안 그
래요? "
이 여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시훈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아 멀뚱히 그녀를 본다. 납치? 감금?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어
제 시련을 당했다니 그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아 버린 모양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몹쓸 것을 주서온 것 같다.
" 이보세요!! 풀어 주고 가세요오, 자비를!!!!!! "
" 거참 말 더럽게 많네. 그쪽이 휘휘 감고 잠든 이불까지 내가 풀어 줘야 하나? 허튼짓 그만하고 어서 빨리 내 집에서 나가줘.
지금 당장! "
이불!?!? 고개를 번쩍 든다. 욱신거리는 머리 덕에 눈살이 찌푸려 진다. 실눈을 뜬 채 자신의 몸을 휘휘 감고 있는 그것을 본다. 밧줄
이어야 하는데 진짜 이불이다. 낯선 장소에, 묶였다고 생각해 그것의 존재 자체를 확인하지 않았던 수련. 간밤에 악몽에 시달려 이리
저리 뒤척이다 이불이 김밤처럼 돌돌 말린 거다. 당혹감에 귓볼이 후끈 얼굴이 달아 오른다. 자신을 향한 그의 시선.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미.친.여.자. 라고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래, 미쳤지 미치치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쓰냐고. 울고 싶다. 혼자 생쇼한
것도 모잘라 낯선 저 남자한테 어제 무참히 차였다고 심경 고백까지 했다. 아, 최악이다. 울상이 되어 바둥되는 수련을 전혀 도와줄
의사가 없어 보이는 저 남자. 자꾸 울어되는 핸드폰 소리에 걸음을 돌린다. 애벌레 마냥 꿈틀되던 수련은 황급히 몸을 데구르르 굴려
몸에 말린 이불을 푼다. 최대한 신속히 이 집을 떠나야 한다. 그 일념 하나로 힘차게 굴렀다.
" 아, 그리고 당신 옷이라면 옆에 있어. "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는 시훈, 너무 힘차게 굴러 바닥으로 요란하게 추락한 수련과 시선이 마추친다. 쿵하고 어찌나 큰 소리가
났던지 시훈이 움찔한다. 알싸한 통증이 몸 전체에 퍼졌지만 그것조차 내색 못할만큼 당황한 수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무렇
지 않은 척 태연하게 방금 그가 한말을 되뇌며 고개를 끄덕인다. 참 친절도 하시지. 그래, 내 옷 … 내 옷? 가만 내 옷이 옆에 있다면
지금 난 뭘 입고 있지? 수련은 무심결에 자신을 내려다 본다. 작은 하트 무늬가 들어간 깜찍한 속옷이 보인다. 응?!?!
" 뭐야 이건!!! "
비명이 가까운 외침과 함께 후다닥 조금전까지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던 이불을 끌어 당겨 몸을 감싼다. 왜 자신이 옷을 벗고 있냐고
따지는 그녀의 눈짓에 그가 혀를 찬다. 세상에나 처음 본 여자의 옷을 홀랑 벗겨놓고 저 당당한 표정은 뭐냔 말이다.
"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신 정체가 뭐야? "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입돌아 갈까봐 데려와서 재워줬더니 감사는 커녕 소리만 꽥꽥 질러된다. 역시 이런 여자는 버리고 왔어
야 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볼품 없는 몸매를 건드릴 만큼 여자에 굶주리지 않았어. "
" 보, 볼품없는 몸매? 내가?!? "
" 그래. 그리고 기차통을 삶아 먹었어? 무슨 여자가 목소리가 그렇게 커. 그러니까 시련이나 당하고 있지. 시끄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
네. 볼일 끝났으면 그만 내집에서 나가줘. "
눈썹 하나,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거만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 남자. 재수없다. 이게 어딜 봐서 볼품 없는 몸매야. 이 정도면 나이스
바디지.
" 하아, 남이사 차이든 차든 그쪽이 무슨 상관? 그리고 볼품 없다면서 옷은 왜 벗기셨을까? 이렇게 정황 증거가 있는데 어디서 발뺌이
야, 발뺌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사과를 해도 모잘판에 뭐가 어째? "
" … . "
" 왜? 정곡을 찔리니 아프남? 그렇겠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겠지. 왜 지금이라도 사과를 해야 하나 고민 때려? 근데 어쩌나~
난 저얼~대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 당신 신분증 내나봐. 내가 가만 안둘테니까. "
" … . "
" 갑자기 석상이 되셨네? 내가 강하게 나오니까 겁이라도 났나? 당신 사람 잘못 골랐어. 내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나 알아?
제대로 콩밥 먹여 줄라니까 어서 신분증 내놔. 변명거리 그만 생각하고 신분증 내놓으라고. "
" 혹시 작가가 꿈이야? 작가 지망생 모 이런 거. "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
" 되먹지 않은 소릴 하니까. 대체 뭘하면 그런 것들만 생각할 수 있는 거야. 나 바쁜 사람이야. 소설 그만 쓰고 당장 내 집에서 나가. "
돌아서는 그를 황급히 붙든다. 자신을 붙든 손과 그녀의 얼굴을 번가라 바라보는 시훈의 얼굴에 더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깃든다.
" 도망 못가! "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갑게 내쳐진 수련의 손이 허공을 가른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에 움찔했으나 이내 기죽지 않고 그를
노려본다. 오만상을 구기며 수련이 붙들었던 팔뚝을 턴다. 마치 더러운 뭔가가 묻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털고 또 털어된다.
" 착각은 자유지만 정도가 심하면 정신병인 거 알고 있나? "
" 착각이라니. 그쪽이야 말로 무슨 정신병 있는 거 아니야? 날 끌고 와서는 옷까지 벗기고. "
" 갈수록 과간이구만. 장편 소설 하나 나오겠어. "
" 본인 잘못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나 본데. 이건 범죄라고. "
" 그럼 하나만 묻지. 당신이 여길 어떻게 왔는지 알아? "
" 그야 당연히!! … . "
" 또 쓸떼없이 소설쓰지 말고 정확하게 자신이 이 집에 어떻게 왔는지 왜 왔는지 기억하냐고? "
10초 … . 1분 … … . 3분 … … … … .
헐~ 기억이 없다.
녀석의 저 당당한 표정과 말투. 혹시 내 발로 따라 온 건가? 어제 내가 술을 마셨던가? 아, 모르겠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 주차장에
서 신발을 주우려 했던 기억 말고는 지우개로 말끔히 지운 것처럼 기억이 없다. 이런 거 혹시 충격으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증? 드라
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처럼 비운의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여인의 이야기, 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충격의 원인인 차인 걸 기
억하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돼. 그럼 왜 기억이 없냐고!!
" 모르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간략하게 말해 주지. 그쪽이 내 차에 달려들어 문짝을 찌그러 트리고 기절 했어, 그건 기억나? 하긴 기억
나면 이렇게 뻔뻔하게 꽥꽥되진 않았겠지. 마음 같아서야 버리고 그냥 오고 싶었지만 다음날 신문에 실린 당신을 보면 내 기분이 얼
마나 더럽겠어? 그래서 급한데로 우리 집으로 데려온 거야. 솔직히 기절한 거라 금방 정신 차릴 줄 알았어. 그런데 아주 숙.면.을 취
하시던데. 덕분에 난 거실에서 잤고 지금 온몸이 찌푸둥한 게 죽을 맛이야. 그런데 감사는 못할 망정 변태 취급을 해? "
" 아니, 그런게 아니라 … . 그럼 옷이 왜?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 요? "
" 나참. 주차장 바닥에 뒹군 더러운 옷을 입은 여자를 내 침대에 눕히라는 거야? "
" 그렇다면 당신 옷이라도 입혀 놓을 수 있잖아 … 요. 그래도 여잔데 이렇게 홀랑 벗겨 놓으면 누가 의심 안하겠어 … 요. "
" 낯선 사람에게 내 옷을 왜 입혀. 기분 나쁘게. 아, 그리고 당신이 여자라는 생각을 못했어. 전.혀. "
읔! 자신을 우롱하는 저 눈빛. 지금 이 상황은 수련이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는 거 잘 안다. 하지만 이 남자 말중에 자꾸만 그녀의
신경을 긁어되는 특이한 재주를 가졌다. 그의 말대로 감사해야할 상황에 울화가 치민다. 아, 이 몹쓸 다혈질. 그렇게 있는 추태 없는
추태 다 부리는 바람에 정작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말도 못하게 만든 자신의 성격에 화풀이 한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겠다. 거실로
나간 그를 흘깃 처다보고 서둘러 자신의 옷을 찾는다. 하지만 그가 분명 옆에 있다고 한 자신의 옷이 보이지 않는다. 방에 물건이라고
는 침대, 커다란 전신 스텐드 그리고 창가에 놓인 전신 의자가 전부인 달리 숨길 곳도 없는데 옷이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보이
지 않는다.
" 아씨. 어따 둔 거야. "
수련은 머뭇거리며 거실로 슬그머니 머리를 드리민다. 전화 통화를 하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넓은 거실이 보인다. 자신의
집 전체 평수와 맞먹는 넓은 거실. 방에 비해선 많지만 거실 역시도 그닥 많은 가구가 들어차 있지는 않다. 엔틱풍의 쇼파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참으로 비싸 보이는 고가의 쇼파, 고풍스러운 취향이다. 맞은편 끝에는 와인바로 추정되는(드라마나 이런데서만 본)
대리석 테이블과 선반, 위쪽 스텐봉에 줄줄이 메달린 잔들이 보인다. 그 옆으로 난 어두운 복도. 아마도 저쪽에 또 방이 있는 모양이
다. 집 한번 정말 의리의리하다.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커다란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촌년 서울 구경하듯 넋놓고 둘러보던 수련
은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시훈과 마주친다. 움찔하여 문 틈으로 내밀었던 머리를 빼려다 목이 낀다. 벽을 짚고 머리를 빼야지 왜 문을
짚고 머리를 빼냐고 이 등신아!! 머리가 낀 채 베베시 웃는 수련을 얼척이 없다는 얼굴로 바라본다.
" 이상한 여자를 집에 두고 나가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늦어서 먼저 나가야 겠어. 분명 경고하는데 내 방 물건에 절대 손대지 말고 조
용히 사라져 줬으면 해. 열쇠 없이 문만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니 괜히 열쇠 찾는 답시고 뒤지지 마. "
" 네. "
아까와는 다른 조용한 그녀의 대답. 그래도 창피한 건 아는가 보다. 소파에 걸쳐 놓은 겉옷을 입으며 가방을 든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현관으로 향하는 시훈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수련의 시선이 거슬린다. 저 여자 진짜 짜증난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가
득이나 시간 없어 죽겠다고 몇번이나 말했는데 할말이 있으면 빨리 할 것이지.
" 뭔데? "
" 네? "
" 할말 있으면 빨리 해. "
" … . "
" 없으면 가고. "
" 자, 잠깐만요! "
" 뭐야 용건이. "
" 그게 제 옷이 안 보여요. 어디다 두셨는지. "
" 스텐드 옆에. "
" 없던데 … . 다시 찾아 볼께요. "
" 용건 끝? "
" … . "
" 간다. "
" 저, 저기 … . "
" 또 뭐? 할말 있으면 빨리 해. 늦었다고 했잖아. "
시계를 확인하고 독촉하듯 자신을 보는 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한심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 평소 같으면 드럽고 아
니 꼽다고 백번은 소리쳤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저런 사람에게 부탁이라는 걸 해야하는 자신의 처지가 혀 깨물고 죽고 싶
지만 긴 심호흡과 함께 참는다. 아쉬운 건 그녀, 웃음으로 떼우며 아양을 떨 수 밖에 없다.
" 제가 어제, 너무 정말 너무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지갑을 놓고 왔지 뭐예요. "
" 그래서? "
"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집에는 가야 할 거 아닙니까. 제가 여기 계속 있는거 원치 않으시잖아요. 그러니까 염치불구하고 차비를
좀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
말 그대로 정말 염치라고는 눈꼼만큼도 없는 여자다. 하긴 애초에 그런 게 있었으면 저리 말도 안되는 행동들을 했겠나 싶어 더는 말
없이 지갑을 열어 수표 한장을 테이블에 올려 놓는다. 다시는 보지 말았으면 하고 바램을 담아.
" 아, 버스나 전철타면 되는데. "
" … . "
" 아뇨, 아뇨. 감사합니다. 근데 연락처는? 돈을 돌려 드릴려면 연락을 … . "
" 필요 없어. "
" 네? "
" 필요 없다고. 그 돈 몇푼 받겠다고 당신과 또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
왕 싸가지. 거만함을 넘어 오만함을 휘두르고 자신을 향해 살짝 내리뜬 시선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어쩜 말을 고따구로 이쁘게 하
시는지. 나 역시도 당신 같은 남자랑 두번 다시 얽히고 싶지 않네요! 저벅저벅 걸어가 그가 테이블에 올려 놓은 돈을 든다. 피식, 그녀
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도도한 웃음을 흘리며 당황해 하는 그를 본다. 그리고 보란듯이 그의 면상이 수표를 휙 던지는 수련. 내가 서울
시내를 하루종일 걷는다 해도 이깟 돈 안 받아.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짐에 그녀의 얼굴엔 웃음이 번져간다.
" 이봐! "
" 네? "
이러고 싶은 마음이야 꿀뚝 같다만. 아직도 용건이 남았냐는 그의 표정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긋 웃는다. 망할 주댕이 말하라
고 있는 것이거늘 그저 웃기만 한다. 현관문을 나서는 얄미운 그의 뒷통수를 노려보다 울분을 실은 주먹을 날리며 메롱하고 혀를 쏙
내민다. 물론 한참 떨어진 그의 뒷통수에 명중시킬 수는 없지만 그녀 나름의 소심한 화풀이다. 그가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 천
천히 거실로 나와 그가 놓고간 수표를 들었다. 신분증도 없는데 대체 이 수표를 무슨 수로 따라는 거야, 에휴. 팔랑이며 공중에서 이
리저리 방향을 틀어 날리던 수표가 천천히 바닥에 내려 앉는다. 그것을 사분히 밟고 털레털레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연다. 음
료수 정도는 된다고 했으니.
" 이 남자 … . 대체 정체가 모야? "
냉장고 문을 열면서 이렇게 숨이 턱하고 막힌 건 처음이다. 자로 잰듯 반듯하게 놓인 반찬 그릇들. 크기 별로 모아서 차곡차곡 정리되
어 있고 줄지어 있는 음료수 또한 들쑥날쑥 없이 크기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반찬 그릇이야 잘 보이게 하려고 그럴수 있다
지만 보통 음료수까지 이렇게 크기별로 줄지어 놓느냔 말이지. 정리 수준이 거의 병적이다. 수련은 눈살을 찌푸린다. 못볼 것을 본듯
찜찜함에 입맛을 쩝쩝이며 음료수를 포기한 채 냉장고 문을 닫아 버린다. 정수기에서 물이나 마셔야겠다. 물잔을 들고 창가로 걸어간
다. 아찔한 높이, 대체 몇층이길래 이리 높은 거야.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무섭기 까지 했다. 물러서려던 수련은 다시 창밖으
로 시선을 옮긴다. 보는 각도가 달라져 느낌이 살짝 틀리긴 하지만 분명 낯익은 건물들과 거리다.
" 그리고 보니 그 남자를 만난 게 지하 주차장이었지. "
그렇다는 건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이 자신이 살고 있는 건물이라는 거다. 그럼 이 집은 높이를 보아하니 펜트하우스? 어쩐지 의리의
리 하더라. 수련은 서둘러 방으로 달려갔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금 당장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거다. 또 봐도 퀭한 방안을 둘러보
며 스텐드로 걸어간다. 대체 여기 어딨다는 건지. 무슨 서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련은 몸을 숙여 침대보를 들춘다. 혹시라도 밑에
들어갔나 싶어 보았지만 역시나 없다.
" 아, 확실히 여기 둔거 맞아? 착각한 거 아냐? "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수련의 눈에 띄는 물건. 에이 설마.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아닐거라고 피식 웃어 버린다. 이 세상 모
든 가정집에 있는 이 물건. 휴.지.통. 하지만 저런 곳에 물건을 넣어두는 사람은 없다. 분명 그가 둔 곳을 착각한 거라고 생각하며 방
을 나서려다 발걸음을 멈춘다. 아닐거라고 생각하면서 왠지 모를 이끌림에 다시 그 앞에 선다. 때아닌 긴장감이 감돌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뚜껑을 살며시 연다.
" 이런 망할 자식! "
아무리 더러워졌기로서니, 세탁까지는 바라지도 않았건만. 바들바들 떨리는 손길로 휴지통에 처참하게 처박혀 있는 자신의 옷을 움
켜진다. 이미 이 집을 떠나고 없는 그의 멱살을 잡듯 힘껏 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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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글을 쓰는 사람의 원동력이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용
제에게 힘을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ㅡ^
카타린아 님, v애그데olv 님, 엠블랙이준찬양 님, 민초은 님,
감사드립니다 +_+
첫댓글 와~~재밌어요...잘 읽고 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허걱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키키키 수련이 어떡해!!!! 완전 웃겨요 혼자 착각하고ㅋㅋㅋㅋ 남주ㅋㅋㅋ 이정도면 거의 결벽증보다 심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