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8일 아름다운 사람
한 지인이 국립 수목원의 아주 특별한 곳을 다녀왔다며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식생과 현상 사진을 보냈다. 그곳은 사람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예약자들만 인솔자를 따라 둘러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수십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말 그대로 자연이었다. 그 지인이 부러웠던 건 희귀한 것들을 구경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현존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큰 홍수를 일으키시기 전에 하느님은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5-6).’ 하느님은 다른 것들은 그냥 말씀만으로 ‘생겨라, 갈라져라.’ 해서 만드셨는데, 사람은 심혈을 기울여 손수 빚어 만드셨고, 그들에게 거룩한 임무까지 주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 1,26).” 그런데 그 피조물 인간들 안에 악이 자라날 줄은 생각도 못 하셨던 거 같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신 걸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셨다.
사람은 하느님의 장난감이라고 한다. 장난감의 본질은 주인을 기쁘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닮아 자유 의지를 지닌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 내려다보시며 기쁘고 또 반대로 슬퍼하신다. 아무리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이어도 그것은 하느님께 큰 즐거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늘 그렇게 하니까. 후회하고 뉘우쳐 다시 돌아오고 그러면서 성장하고 당신에게 말을 걸어오고 때론 당신과 흥정까지 하는 피조물 사람을 보고 즐거워하신다.
갈등하는 인간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대자연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가깝게 느낀다. 그런데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힘을 다해 선과 하느님 뜻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 그리고 자신 안에 살아 계심을 체험한다. 이 세상 유형 무형한 모든 걸 선하신 하느님이 만드셨는데 왜 악이 있는지, 나는 선하게만 살고 싶은데 왜 자꾸 악한 걸 선택하게 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답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안다고 그런 현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내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있는지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에 마음 쓰지 않는다. 나중에 하느님 앞에 서면 모든 게 다 밝혀질 것이고, 그런 것들은 쭉정이나 마른 나뭇가지처럼 날아가거나 타서 없어질 거다. 내 안에 있는 악함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한다. 반면에 선하고 의로운 생각을 기쁘게 반기고 그 의지에 힘을 불어넣는다. 이런 피조물 사람이 하느님을 얼마나 기쁘게 할까? 대자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하느님께는 이런 사람 하나보다 못할 거다.
예수님, 주님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셨습니다. 제게도 그런 품위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금욕이 주는 즐거움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알게 도와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