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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 & Reader 이문열, 시대를 쓰다
“가슴 애틋한 거로 하겠다” 이문열이 꼽은 대표작 셋
카드 발행 일시2024.10.28
에디터
신준봉
이문열, 시대를 쓰다
관심
이문열, 시대를 쓰다 〈최종회〉
작가 이문열의 회고록 ‘이문열, 시대를 쓰다’가 오늘로써 일단락된다. 지난 3월 18일 연재를 알리는 인터뷰를 시작으로 8개월간 30차례에 걸쳐 매주 월요일 아침 배달된 그의 육성 회고는 압축 현대사요 파노라마 문화사였다. 문학과 현실, 분단과 억압, 그에 맞선 한 개인의 좌절과 분투가 그 안에 있었다. 우리는 이문열을 다른 어떤 작가보다 뜨겁게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경원시하곤 했는데, 그가 모순적인 태도를 보일 때 그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회고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문학평론가 류보선(국립군산대 교수)씨는 ‘시대와의 불화’를 이문열 문학의 중핵(中核)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진작에 밝힌 바 있다. 작가와 시대와의 불화야말로 위대한 문학의 필요충분조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된다면서다. 『젊은 날의 초상』 같은 이문열씨의 초기작부터 역사적 현실과 정면 대결한 『영웅시대』나 『변경』은 물론 『금시조』나 『시인』 같은 예술가소설까지 시대와의 불화라는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두 사람은 과거 글과 술로 여러 차례 어울린 적이 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 이문열이라는 문학 나무의 뿌리와 우듬지, 그 결실과 그늘에 대해 짧지 않은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둘의 문학 대담을 육성을 살려 전한다.
마지막으로 뵀던 게 2014년 『변경』 개정판이 나왔을 때였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서 대담 제안을 받자마자 다른 사람한테 갈까 싶어 바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시고 한두 해 전 선생님 고향 영양의 문학연구소도 화재로 전소됐다고 전해들어, 많이 가라앉아 계실 줄 알았는데 오늘 뵈니까 건강하시고 마음도 편하신 것 같습니다.
큰 불편은 없지만 전 같지는 않습니다. 2년째 신통찮은 병이 하나 있어서 특별한 증세나 고통은 없는데 아직 약은 먹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아프다는 사실을 자꾸 드러내지 말라고 하는데, 짐승도 병들면 그 상처를 감춘다고 하고요. 하지만 어차피 드러났고 해서, 굳이 감추지 않고 지냅니다.
요즘 일과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집 울타리 밖으로 잘 안 벗어나는데요, 정원이 좀 넓다 보니 손 가야 할 데가 많아서 가드닝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만나고 그럽니다. 옛 부악문원을 레지던시로 개방해 현재 다섯 분 정도 들어와 있는데, 며칠에 한 번씩 볼까. 나만큼 나이 많은 분도 있고 해서 문학 얘기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이미 몇 차례 말씀하셨던데, 실은 한국 문학을 외국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선생님이십니다.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고, 선생님 세대가 발판을 다져놓으신 그 열매를 선생님 세대가 거뒀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좋은 말은 이미 몇 차례 해버렸고, 한강의 이번 수상은 한국을 포함해 동아시아 국가 작가들에 대한 노벨상의 관심이 커진 영향도 있을 겁니다. 한강 작가의 문학 세계도 요즘 노벨상의 방향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뭐가 뭔지 모르고 지내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노벨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고요. 이제는 가만히 앉아서 상 가져다주기를 바라서는 안 되지.
이문열 작가(왼쪽)와 문학평론가 류보선(군산대 교수)씨. 단풍이 물드는 부악문원에서 장시간 대담을 나눴다. 김현동 기자
1979년에 등단하셨으니 작품 써오신 지 50년이 돼 갑니다.
아이구야, 많이 됐다.
감히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저는 아무리 글을 써도 익숙해지지 않더라고요. 쓸 때마다 처음 쓰는 것 같고, 갈수록 더 힘들고 그래서 가급적 핑계를 만들어 안 쓸 수 있으면 안 쓰려고 노력하는데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3년째 글을 못 쓰고 있긴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으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처럼 오랫동안 많은 작품을 쓰신 분을 뵈면 그토록 글에 매달리게 한 원동력 같은 게 따로 있는 건지, 아니면 쓰시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열심히 글 쓴 가장 큰 원동력은 역시 내 글에 대한 수요라고 해야 할 겁니다. 내가 글쓰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같은 것들이 마지막 글쓰는 순간까지 느껴졌어요. 내가 지금 이걸 써야 한다, 내가 쓰고 싶은 저거 말고 지금 이걸 이 사람들을 위해서 써야 된다 하는 게 있었습니다.
시대가 어떤 글을 필요로 한다는 인식 같은 것이었을까요?
시대와의 관계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고, 내 나이나 감성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을 수도 있을 거예요.
더 쓸 게 있는데 못 쓰신다니 조급한 마음은 없으세요?
일종의 자기방어를 위해서도 조급한 마음을 안 가지려고 애를 쓰는데, 요즘은 그래요. 영영 글을 못 쓰게 되는 상황에 대비를 좀 해두자. 없앨 건 없앤다든가, 가까운 날에 언제 한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못 쓰신다고 하시지만 저를 포함해 선생님의 글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상당하리라고 봅니다.
올드팬들이 있겠죠. 올드팬들이 있겠는데, 잘못 글 썼다가 늙은 색시 지분 바르고 나온 꼴같이 될까 봐 걱정입니다.
여기 오기 전에 선생님 작품 목록을 죽 한번 훑어봤더니 정말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제 젊은 시절도 독서 기억의 형태로 그 목록 안에 들어 있고, 젊은 날 고비마다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며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선생님 덕분에 이 정도라도 문학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게 됐구나, 이런 생각도 새삼스럽게 해봤습니다.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대표작을 세 편만 꼽으신다면 어떤 작품들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출세작이자 성공작인 『사람의 아들』이 들어가야 할 테고요. 그다음 『황제를 위하여』, 그다음에 『젊은 날의 초상』을 해야 할지 『시인』을 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철이 좀 들어서 쓴 거는 『시인』인데, 『젊은 날의 초상』도 보면 가슴 애틋할 때가 있어요.
그러시군요.
가슴 애틋한 거로 하겠습니다.
상반된 질문이겠는데, 정말 좋은 작품인데 제대로 받아들여지 않아서 섭섭하거나 아니면 쓴 의도와 너무 다르게 받아들여져 답답했던 작품은 없었나요?
나는 참 행복하게도 거의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아, 남이 몰라줘 서운한 작품은 별로 없었습니다. 쓰다 중단해 애석한 건 있어요. 월간 신동아에 연재했던 ‘둔주곡(遁走曲) 80년대’가 그런 작품인데, 내 딴에는 하나의 선율에 다른 성부(聲部)의 선율이 대위법적으로 보태져 한 덩어리로 흘러가는 서양 음악의 둔주곡 형식에 기대, 고약한 불협화음 지대를 통과했던 우리의 80년대를 그려보려 했던 건데, 이상한 자기검열이랄까,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가기가 힘들어 그만뒀습니다.
이문열씨는 스스로 "행복한 작가"라고 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았지 독자들이 몰라줘 서운한 작품은 별로 없었다"고 했다. 김현동 기자
등단하시자마자 평단과 독자들의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는데 정작 등단은 좀 늦으셨죠?
네. 서른한 살에 등단했으니까요. 하지만 남들보다 등단이 늦은 대신 소위 재고가 많이 쌓여 크게 도움이 됐다고 얘기하곤 했습니다. 등단한 79년 한 해에만 중편 네 편, 단편 다섯 편을 발표했으니까요.
그 재고라는 게 투고했다가 당선 안 된 것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안 된 것도 있고, 어떤 거는 써 놓고도 선을 못 보인 것들이었죠. 그중에는 노트에만 써둔 채 원고지에 안 옮긴 것들도 있었고요.
등단에 계속해서 실패할 때 과연 문학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은 없으셨어요?
많았죠. 아무리 좋아한다 하더라도 될 걸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될 가능성이 없는 걸 한다는 건 미련스러운 거죠. 그래서 한 번은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한테 작품을 한 편 보냈어요.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반송 봉투와 우표까지 집어넣어서 딱 한 줄이라도 좋으니까 꼭 답신을 바란다고, 정 안 되면 가부(可否) 표시라든지 아니면 ‘할 말 없음’이라는 말이라도 써서 보내달라고요. 그렇게 해서라도 평가를 받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답신을 안 하시더라고. 그래서 화가 나서 문단에 나온 뒤 황순원 선생님을 마주치면 인사도 안 하고 그 옆에 가지도 않고 그랬어요.
그때 왜 그러셨냐 안 물어보셨어요?
나중에 황순원 선생님 아드님인 시인 황동규 선배가 그러더라고. 이 형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이 형 같으면 얼굴도 생판 모르는 사람이 가부나 오엑스를 표시해 보내달라고 하면 하겠느냐고, 자기는 아버지 입장을 이해한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보니 좀 이해가 되더라고. 그래서 황순원 선생님을 다음에 만나 뵀을 때 인사를 했더니 빙긋이 웃으시더라고.
등단 전에는 야박하던 문단이 막상 나와서 발표하는 작품마다 이문열 이문열 하는 분위기여서 좀 당황스럽거나 이건 뭐지 하는 마음은 없으셨어요?
사실은 일종의 자기 확신 같은 게 있었어요. 내가 그렇게 허황한 도전을 하는 건 아니다 하는. 그러니까 작품들을 안 버리고 모아뒀겠죠. 나중에 실제로 좋은 반응이 잇따르자 자기 확인을 한 것 같고, 으쓱하고 흐뭇한 기분이었고요. 그런 게 격려가 돼서 원고 뭉치 형태로 가지고 있던 거 말고 내 재주로 제대로 한번 써보자 해서 나온 게 『황제를 위하여』였어요.
80년대 초반에 작품을 엄청 쏟아내셨는데, 그 과정이 좀 놀랍기도 했어요. 젊은이의 방황 이야기(『젊은 날의 초상』)나 서양 종교에 관한 이야기(『사람의 아들』)를 하시다가 갑자기 『황제를 위하여』를 발표하셨을 때 야, 이 세계는 또 뭐지, 해서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대체 이런 의고(擬古)의 세계, 전통적인 가치관의 세계는 어디에 내장돼 있던 걸까 하는 궁금증도 일었고요.
『황제를 위하여』는 실은 일종의 희필(戲筆, 장난삼아 지은 시문)로 쓴 작품이에요. 고향 마을의 재담 가운데 황제가 될 관상을 타고났다는 말만 믿고 평생 빈둥대며 살다가 결국 굶어죽게 된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데, 숨넘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그러더랍니다. ‘황후여, 태자를 불러오시오. 짐(朕)이 곧 붕어(崩御)하느니’라고요. 죽기 직전에 비로소 황제가 되는 그런 얘기지요. 고향에는 그런 종류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많았어요. 양반도 아니면서 문자 쓰기 좋아하다가 괘씸죄에 걸려 곤욕을 치른 민촌(民村) 출신의 상민(常民)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실컷 곤장을 얻어맞은 다음 ‘니, 이제 앞으로는 문자 안 쓸끼가’ 물었더니 ‘네, 차후(此後)로는 불용문자(不用文字) 하오리다’라고 답해 몇 대 더 얻어맞았더랍니다.
『황제를 위하여』에서 길 떠난 황제가 기차를 처음 보고 혼비백산한 이야기도 고향 마을에서 들은 거고, 회고록 24회(‘내 소설의 뿌리, 고향과 문중’)에서도 소개했던 어수룩한 OO 할배 얘기는 겨울 저녁에 할 얘기 없을 때 꺼내면 모두가 배꼽을 잡으며 하루 저녁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런 점에서 『황제를 위하여』는 고향 덕에 쓸 수 있었던 소설이에요. 고향은 내게 큰 문학 자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를 그만두고 떠돌아다니다 고향에 내려가 서당에서 9개월가량 한학을 배운 적이 있는데, 집사람을 그 서당에서 만났어요. 서당 동기였죠.
류보선씨는 "1980년대 이문열 선생님이 대표작들을 쏟아낼 때 놀라울 정도로 작품 세계가 다양했다"고 했다. 김현동 기자
선생님 문학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으로 시대와의 불화를 들어야 할 거 같은데요. 초기 작품들이 주로 시대가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억압하는가, 개인은 그에 맞서 어떤 처절한 몸부림을 보이는가를 때로는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했다면 자전적 장편 『영웅시대』로 가면서는 선생님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시대하고 불화하려고 했거나 아니면 시대가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이런 작품을 써서 어떤 변화를 도모해봐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셨던 건 아닌지 궁금합니다.
『영웅시대』는 내가 실패를 자복하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에요. 실패까지는 아니더라도 어긋나거나 틀린 데가 많고 못마땅한 작품입니다. 어쩌면 원래 불가능한 걸 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우선 한국전쟁을 전후한 북한에 관한 정보가 크게 부족했는데, 회고록에서도 밝혔지만 월북한 소설 주인공 이동영이 평양에서 원주를 기차로 오가는데 당시 실제로는 기차가 없어서 평양에서 원주까지 걸어서 빨라야 이틀 걸렸다는 거예요. 80년대에 작품을 쓰다 보니 월북한 아버지의 북에서의 행적을 그리는 데 여러 가지 금기로 인해 어려움도 있었고요.
하여튼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 많아 쓰면서도 굉장히 당황했던 작품이에요. 써놓고는 다시 손 안 댔는데, 언젠가 고치려다 보니 일이 너무 많고, 다른 쓸 것도 있고 해서 못 고쳤어요. 지금도 고친다고 원고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래서 아직 교정 중인 거라.
87년 이상문학상 소감에서, 체제를 유지하려는 검열관과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검열관 양쪽 모두와 불화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두 검열관 사이에서 어떤 조정자 역할 같은 것을 해보고 싶어 하는 열정이나 사명감 같은 게 있으신 것 같다고 느꼈거든요. 특히 진보 진영을 향해 당신들의 선한 의도를 실현해 내려면 냉철한 현실 파악, 보다 현실주의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작품 속에서 내셨던 것 같은데 진보 진영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아니꼬워하거나 아니면 엉뚱한 소리라고 여겼겠죠.
책 장례식 사건 때는 마음이 복잡하고 힘드셨을 것 같아요. 분노도 느끼셨을 것 같고.
그때 실은 나하고는 관계없는 엉뚱한 일로 당한다는 느낌이었어요. 분노도 절실하다기보다는 기분만 굉장히 나쁘고 이거 왜 이래 싶기도 했고요. 그래선지 그 사건이 내게 깊은 영향을 주지는 못했어요. 책 장례식 때문에 내가 변한 건 없어. 추상적인 공포,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된다 하는 생각은 하게 됐지만 내면의 변화 같은 건 전혀 겪지 못했어요.
『젊은 날의 초상』에는 젊은 시절의 실제 방랑 체험이 녹아든 걸 텐데요.
그게 사실은 경험이 많아 쓰기 쉬운 거였어요. 회고록에 소상하게 밝혔지만, 사법고시에 도전한답시고 70년에 대학교를 떠난 후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기까지 한참을 헤맸는데, 그 이전 청소년기에 이미 한 10년을 헤매고 다녔고, 어려서는 어머니의 피해의식 때문에 삶 자체가 떠돌이였어요.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을 임신한 몸으로 아버지를 찾아 월북하다가 연천에서 붙잡히는 바람에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는데 임산부는 격리 수용하라는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어떤 경우에도 경찰의 소재 파악 아래 있지 않는 게 큰 목표였어요. 뜬 혼이 돼가지고 꿈자리가 사나우면 이삿짐 싸서 떠나는 거죠. 덕분에 우리 집에는 장독이 없었어요. 거추장스러우니까 장만을 안 하는 거죠. 경찰의 소재 파악을 피해 몰래 이사가면 경찰이 수소문해 다시 찾아오는 데 2년가량 걸렸는데, 그런 생활이 62년 주민등록법이 만들어져 더 이상 도망갈 이유가 없게 될 때까지 계속됐어요. 그때부터는 포기하고 정착을 한 거죠.
대학 시절을 전후한 방황도 그런 연장 선상이겠습니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검정고시로 마쳤는데, 검정고시 붙고 나면 약간 해방된 기분에 집에 있기도 그렇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잘 떠났어요. 당시는 무전여행이 유행일 때였는데, 나는 비위가 좋지 못해 그리 잘하는 편이 못 됐고, 어머니에게 몇 푼 받거나 친척이 있는 도시로 떠나 신세 지는 식이었으니 무전여행이라기보다는 걸식 여행 같은 거였죠. 어쨌든 내 생활 양식이 그렇다 보니 남들 눈에는 방황을 많이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텐데, 어떨 때는 자유롭게 그야말로 독일 시인 횔덜린의 소설 주인공 히페리온처럼 마음먹고 길을 떠난 적도 있었죠.
이문열씨(왼쪽)와 류보선씨가 부악문원 산책로를 거닐 때 고양이가 길동무로 함께 나섰다. 집고양이는 아니지만 먹이를 주며 돌봐주는 고양이다. 김현동 기자
대학은 세 학기만 다니셨는데 그만두신 계기 같은 게 있었나요?
학교 수업도 맘에 안 들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만뒀는데 나중에 군대 갔다 와서 사범대라도 졸업해 선생이라고 하려고 학교에 가보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놓았냐 하면 아예 학적 자체가 없어져 버렸더라고요. 그렇게 학적을 없애려면 교수 회의를 했어야 하는 사안이라고 하던데, 나를 아껴주셨던 교수가 자네는 학적을 지우고 가 놓고 왜 돌아왔느냐고 하시더라고. 내 나름의 비장함을 드러내느라 그런 의사 표시를 했던 거 같은데, 학적 자체가 없어질 줄은 몰랐던 거죠.
중편 ‘금시조’나 장편 『시인』 같은 작품은 예술가 소설입니다.
방랑 시인 김삿갓을 다룬 『시인』은 진작부터 쓰고 싶었던 거였어요. 조부가 반역죄를 저질러 방랑 시인이 된 김병연처럼, 월북한 아버지를 둔 내게 아버지의 부정, 나는 빨갱이가 아니라는 얘기는 늘 하는 맹세 중 하나였거든요. 누가 나보고 빨갱이 자식이라고 할까 봐 항상 예민해져 있었고, 화를 내곤 했죠.
대하소설 『변경』은 86년에 연재를 시작해서 98년 12권으로 완간하셨는데, 처음부터 스케일을 그렇게 크게 잡으신 건가요?
12권에서 끝난 게 아니고 실은 전체 3부 가운데 1부만 끝난 거예요. 주인공 인철이 겨우 절에서 내려오는 성장소설로 1부를 끝맺었는데 2부에서는 인철이 태평양을 건너가 아메리카 제국도 만나야 하고, 3부는 1부에서 거창하게 얘기를 꺼냈던 부르주아 계급과 기본계급 사이의 조정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좋게 말하면 예지를 담은 눈으로 가까운 미래에 대한 약간의 전망 같은 것까지 담아내는 게 대충의 얼개인데 3부는 지금 많이 비어 있습니다. 아메리카를 만나는 2부는 그걸 위해 2000년대 중반 미국에 3년간 가 있으면서 수집한 자료도 있고 해서 그나마 괜찮은데, 그것도 실은 요즘 얘기를 담아 써야 되는 거라서 골치가 아픕니다. 과연 쓸 수 있을지.
어쨌든 2부는 메모나 초고도 좀 있겠네요.
있는데, 10여 년 전에 메모를 할 때 예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동안 벌어져서 단순하게 메모를 바탕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죠. 예전 같으면 한 6개월이면 2부를 쓸 수 있었겠지만.
저는 선생님이 『변경』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생각했거든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제국의 변경 국가, 그것도 분단으로 갈린 나라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철저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하는데, 길게는 식민지 시대부터 해방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를 바라보는 가설로서 정말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경론이라는 가설은 처음부터 온전한 상태였나요 아니면 작품을 쓰면서 구체화하신 건가요?
작품 제목을 ‘변경’으로 정할 때 물론 개념은 있었지만 막연한 상태였고 써나가면서 정교하게 다듬은 거죠. 남북한은 결국 미국과 소련, 두 제국의 변경 국가에 불과할 뿐이고 각각이 속한 제국의 경제적·군사적·정치적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식으로요.
이문열씨(오른쪽)는 12권으로 끝낸 대하소설 『변경』이 사실은 전체 3부 가운데 1부에 불과하다고 했다. 자신에게 시간이 남아 있다면 3부까지 완성하고 싶다고 했다. 김현동 기자
가설 형태만으로도 그런 변경론은 의미심장해서 이미 완성해 놓으신 1부만으로도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건강이 좋아지셔서 마저 써주신다면 독자들에게는 행운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제를 바꿔 선생님 만날 준비를 하면서 그동안 연재된 회고록을 읽어 봤더니 반가운 이름들이 나오던데 특히 이문구나 이청준 선생님과 좋은 인연을 맺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문구 선배와는 인간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편이었어요. 입담이 좋아 재미있는 분이었는데, 자기가 처음 문단에 나왔을 때 이문희(1932~1990)의 장편소설 『흑맥』의 위세가 대단하더래요. 얼마 후에 거기서 놓여나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으니까 이씨 성(姓)에 ‘문(文)’자 항렬을 쓰는 작가가 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원래 ‘문’자 항렬이 아니고 집어넣은 것이더래요. 내 본명은 이열(李烈)이고, 이문열(李文烈)은 필명이라는 얘기를 한 거죠. 나를 참 좋아했고, 나도 그 양반을 좋아했죠.
이청준 선생하고는 어떠셨어요.
이청준 선배하고는 출신 지역도 다르고 나이도 아홉 살이나 차이 났는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5, 6년가량 집중적으로 친하게 지냈어요. 참 양반이다 싶은 분이었어요. 사람에 대한 연민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야. 어릴 때 마을 어른들이 빨갱이들을 잡아 와 처형하는 걸 목격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양반 눈에서 연민이 뚝뚝 묻어나요. 좌익분자들을 잡아온 마을 사람이 마치 짐승처럼 그들의 목을 묶어 옆에 앉혀 두고는 ‘이놈들 밥 먹고 쏴죽일 거야’라며 으름장을 놓고는 실제로 처형했는데, 그 좌익 빨갱이들이 진짜 짐승처럼 눈알만 데룩데룩 굴릴 뿐 아무런 말도 저항도 못 하더라는 얘기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회고록에서 황석영 선생도 몇 차례 언급하셨습니다.
황석영 선배는 재주가 대단한 사람이죠. 흉허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잘 지낸 편입니다. 89년 불법 방북 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를 전전했는데 90년대 초에 뉴욕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별 소득은 없었지만, 그때까지 북한에 선이 닿아 내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아봐 줄 수 있다며 수소문해 준 적이 있습니다.
이문열씨(왼쪽)와 류보선씨는 그리운 사람들을 회고하며 표정이 밝아졌다. 소설가 이문구, 이청준 등을 거론했다. 이씨는 특히 황장엽씨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다 말았다는 사연을 소개했다. 김현동 기자
2014년 『변경』 개정판을 내셨을 때도 선생님과 대담한 적이 있는데, 북한의 아버지로부터 모두 세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쓴 순서대로 오지 않고 두 번째 쓴 편지가 제일 먼저 오고, 첫 번째 쓴 편지가 두 번째 오고, 그렇게 엇갈려 왔다고 하셨어요. 그걸 모티브 삼아 글을 한 편 써볼까 하신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1980년대 중반에 처음 아버지 편지를 받는 순간 참 신기했어요. ‘열아, 보아라’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쓴 글이라는 느낌도 무척 낯선 데다 중간에 ‘조국은 아직도 내게 실존’이라는 사르트르 풍의 문장이 적혀 있어 놀라웠어요. ‘네가 썼다는 글의 요약도 들었고 거창한 평설도 몇 구절 읽어보았다’는 걸로 봐서 아마 『영웅시대』를 읽으셨던 모양인데 ‘외세와 억압을 뼈아프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네 애매한 태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 일깨워주고 싶은 게 있다’ ‘우리 족보 어디에도 예속과 굴종의 기록은 없다’고 적으셨더군요. 친미(親美)로 기울 수밖에 없는 소설 분위기가 못마땅하셨던 거죠.
그런데 편지에서 다른 가족들의 안부는 궁금해하면서 정작 어머니 안부를 묻지 않아 말썽이 났어요. 어머니가 화가 나셔서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94년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주석이 정상회담을 한다고 했을 때 내가 조선일보 기자 신분으로 북한에 따라가기로 하면서 마음이 바뀌셨는데 새벽에 글 쓰고 있는데 내 방문을 두드리시더라고.
당시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정상회담을 결국 못 했죠?
결국 북한에 못 갔죠. 어머니가 새벽에 내 방을 찾으셨던 건 김일성 죽기 전이었으니까, ‘니, 정말 가나? 가면 아버지 볼 수 있나?’ 물으시길래 아마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우시면서 ‘내가 너 아버지 원망 많이 했지만 지금은 안 한다. 만나거든 내가 원망했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렇게 화해를 하신 거죠.
황장엽씨 이야기를 소설로 쓰시려다 못 쓰신 거로 압니다.
한때 숙제처럼 생각했던 건데 황장엽씨가 사망하면서 못 쓰게 됐어요. 97년 망명한 황장엽씨가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1999년)를 쓸 땐데 안기부에서 나보고 봐주라고 하더라고. 글도 봐주고, 간섭도 하라는 거였겠죠. 그래서 한 20일가량 황장엽씨가 머물던 안가로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퇴근하며 접했는데, 황장엽씨가 누구입니까? 주체사상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이잖아요. 참 들을 얘기가 많고 쓸 만한 것도 많은 재미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한 지식인이고 모스크바에서 유학해 철학이 단단한 사람이었는데 만나 보면 바로 아주 재주 있고 영리한 사람이라는 게 딱 보여요. 북한에서 1년에 3주씩 생쌀과 솔잎만 먹는 생식을 했다고 해서 남한에서도 할 거냐고 물었더니 해봐야겠다고 하던 게 기억납니다.
내가 소설로 쓰고 싶었던 건 그의 망명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숙청의 불안감 끝에 남한으로 망명을 결심하고는 남겨질 아내에게 귀띔은 해줘야겠는데 집안에서는 도청의 위험이 있으니까 텃밭으로 불러냈답니다. 대놓고 망명하겠다는 얘기를 하기가 어려웠는지 러시아 작가 고리키의 유명한 장편(掌篇)소설 ‘매의 노래’ 이야기를 꺼냈데요. 하늘을 날다 떨어져 다친 매가 율모기(뱀)와 대화를 나누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날아 보려 하지만 끝내 떨어져 죽는 얘기죠. 황장엽씨는 ‘매의 노래’ 한 구절을 러시아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답니다. ‘오, 내가 맑은 천국의 깊은 공기 속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날 수 있다면.’
그 짧은 소설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는지 아내가 고개를 푹 숙이더랍니다. 황장엽씨 아내 박승옥씨 역시 유학파로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아내를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내만 북에 남아 수용소에 보내지면 견디지 못하고 자살할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그 얘기 듣는데 나도 참 애틋해 눈시울이 화끈해집디다.
그런데 왜 작품으로 못 쓰셨나요?
내가 다른 쓸 얘기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실화를 고스란히 소설화한다는 게 다시 생각해 보니 흥미가 좀 떨어졌던 거죠.
그러셨군요. 제가 준비한 질문은 여기까지인데요, 긴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계속 건강 유지하셔서 말씀하셨던 작업을 하실 수 있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정심(定心)해 가지고 제대로 된 걸 하나 쓰긴 써야 되는데, 요즘 좀 나아지는 것 같긴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류보선=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개별적인 작품 독해에 그치지 않고 문학사적인 시각에서 맥락화하는 비평에 관심이 많다. 89년 김원일론으로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문학 그 높고 깊은–박범신 문학 연구』 『한국문학의 유령들』 『한국 근대문학의 정치적 (무)의식』 등을 썼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을 지냈고, 팔봉비평문학상·이헌구 비평문학상·현대문학상을 받았다. 국립군산대 국문과 교수.
에디터
신준봉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