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峯 趙憲 (中宗 39 1544 ~ 1592 : 宣祖 25)
朝鮮 宣祖 때의 의병장·儒學者. 字는 汝式, 號는 重峯·陶原·後栗. 本貫은 白川, 경기 金浦 출신. 趙應祉의 아들로 金浦 坎井里에서 태어났다. 栗谷 李珥와 牛溪 成渾의 門人으로서 靜菴 趙光祖와 退溪 李滉을 私淑하였으며, 土亭 李之菡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1567년(명종 22)에 과거에 급제 校書館正字 등을 지내고 1574(宣祖 7) 聖節使를 따라 明나라에 다녀와 「時務八條疏」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戶曹와 禮曹의 佐郞·監察 등을 역임하고 通津縣監이 되었다가 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富平에 3년간 유배되었다. 1581년 公曹佐郞에 기용, 이듬해 부모 봉양을 위해 報恩縣監을 자청해 나갔는데, 이때 상소하여 연산군 당시의 貢案을 폐지할 것과 魯山君의 후사를 세울 것, 그리고 六臣의 節義를 顯彰할 것을 청하였다. 1586년 公州敎授 및 提督官에 임명되어 당시 정권을 잡고 있는 東人이 栗谷·牛溪 등을 추죄하려 하자 「辨師誣兼論學政疏」를 올려 변명·구원하고 아울러 鄭汝立을 논척하였다. 1589년 다시 東人의 專橫과 時弊를 극론하고 疏를 올렸다가 三司의 탄핵으로 吉州에 유배되었으나 이해 겨울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先見之明이 있었다 하여 방면되었다.
1591년 倭使가 오자 沃川에서 상경, 대궐 앞에서 왜사를 처단하라는 「持斧上疏」를 하고 왜군의 침략에 대비한 방위의 증강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1600명을 규합하고 그 후 靈圭 등 僧兵과 합세하여 淸州를 수복하였다. 이어 왜적이 충청·전라 지역을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하였는데, 巡察使와의 의견 대립과 戰功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이 흩어지고 700여명의 의병만이 남았다. 이들과 함께 금산 전투에서 끝까지 용전하다가 衆寡不敵으로 전군이 모두 전사하였다.
그는 故事와 今務에 정통하고 天文·地理에도 밝았으며, 또한 방대한 양의 讀書遍歷으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특히 절의와 道學을 겸비한 학자로서, 평생을 強毅와 直言으로 일관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론보다도 實行과 實功을 지향하여, 道學과 實學의 요소를 동시에 수용하였다. 그는 국내외의 大局을 명확히 간파하여 절실한 대응책을 강구, 제시하였다. 民瘼을 제거하고 시폐를 물리치는 爲民思想的 개혁주의에 입각하여 여러 가지 經世論을 폄으로써 朝鮮 후기의 실학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뒤에 北學派 實學者인 朴齊家는 그의 「北學議」 序文에 重峯의 애국위민의 실학사상을 본받았다고 밝혔다. 重峯의 충효사상과 자주정신은 후세에 국난이 있을 때마다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의리사상으로 전개되어, 丙子胡亂 때의 淸陰 金尙憲이나 尤菴 宋時烈, 韓末의 勉菴 崔益鉉과 같은 이들이 모두 그를 숭앙하였다. 특히 隱峯 安邦俊은 그의 遺文과 行錄을 모아 「抗義新編」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高敬命·金千鎰·郭再祐와 함께 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이조참판·이조판서·영의정에 추증되고 文廟에 配享, 沃川의 表忠祠, 배천의 文會書院, 금산의 星谷書院, 보은의 象賢書院, 김포의 牛渚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諡號는 文烈이다. 著書에 「重峯集」·「重峯東還封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