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보전 정책 최고의 걸작 - 그린벨트
그린벨트를 두고 외국에서는 “20세기 각국의 국토 계획 중 성공사례로 보전정책의
백미(白眉)“라는 극찬을 받고, 국내 에서는 “대도시 주민들에게 숨쉴 공간을 마련
해 준 박정희의 최대 걸작“ 이라는 칭찬과 ”해당 지역 주민들의 생존권을 옥죄는
고통의 띠“라는 비판이 엇갈리는게 그린 벨트 이다.
이 그린벨트는 1971년 7월 30일 건설부 고시 제447호 로 수도권 일부를 묶는 것을
시작으로, 1977년 4월 18일 전남 여천 일부를 지정하기까지 전 국토의 5.4% 인
5,397.1 제곱킬로(㎢) 의 어마어마한 면적에서 DJ가 자신의 인기유지를 위해서
건드리기 전까지 단 한 뼘도 줄지 않았었다.
1971년초. 당시에는 대선, 총선, 개각, 차기대선 불출마 선언등 정국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린 벨트에 관해서 최초의 회의는 1971년6월12일 오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김의원 건설부 국토 계획 담당관(이름이 의원.)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16절지
에 그림을 그려가며 양택식 서울 시장,김태경 경기도 지사, 김용석 건설부 도로국
국장에게 도로 재정비 지시를 끝내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린벨트 라는거 있지. 그린벨트”
영어로 GREEN BELT 라고 쓴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금방 스케치한 수도권 도로망
외곽에 두 줄로 띠를 두른 뒤,
“이렇게 빙~ 둘러쳐 봐. 빨리 계획짜서 가져와.”
이것이 그린벨트와 관련한 박정희 대통령의 첫 지시였다.
그린벨트는 행정, 법률 용어가 아닌 학술 용어이다.
박정희의 그린벨트 구상을 누가 건의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고 그린
벨트는 영국 런던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제도이다. 건설부 국토계획국장, 도시국장
등을 거치면서 박정희시대 그린벨트 업무를 주도했던 김의원씨는, “이한빈 전 부
총리, 주원 전 건설부 장관 등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모른다고 했
다.“고 말했고,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 역시 “주 영국 대사들로
부터 그린벨트 얘기를 들으시고 관심을 보이신 적은 있다“며 ”박정희 아이디어“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반론도 있다. 동훈 전 통일원 차관은 “ 1969년 말인가 1970년 초 청와대 정무
비서관 시절에 박 대통령으로부터 “수도권 인구 억제 대책을 연구, 보고하라”는 지
시를 받고 그린벨트 제도 도입을 건의했다”라고 했고,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런던의 사례 등을 참고해 비밀리에 만들었습니다. 미관과
환경 등을 고려해 도시 주위에 녹지를 일정한둘레로 돌리면 좋겠다는 착상이었
지요. 그 때 성남이 막 생겨나고 있었는데 서울과 성남 사이에 그린벨트를 설치해
격리함으로써 성남을 위성도시, 베드타운으로 만들자는 식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 찬성했습니다.
그걸 보고한 때가 1970년 가을입니다. 개발 제한 구역이란 말은 나중에 붙인 것이고
그냥 그린벨트라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께서 “그린벨트, 그거 분명히 영어지” 하시
면서 “욕 먹더라도 강력한 조치 한 번 해보지” 라고 하셨습니다.”
급속한 도시화, 공업화로 1971년 7월에 서울 인구가 543만 명에 달하는 등 인구의
대도시 집중화 현상은 당시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변두리에 즐비한 판자촌은 안양,
의정부 등으로 계속 확산이 되고 있었고, 일부 기업과 부유층에 의한 부동산 투기
열풍은 백약이 무효였다. 여기에 바로 그린벨트라는 기상천외한 조치로 수도권일대
의 부동산 투기는 가라앉았다.
박정희는 김의원 부국장이 며칠 뒤에 가져온 초안을 퇴짜 놓았다. 구파발 검문소
와 삼송리 검문소 사이에 북한산을 끼고 흐르는 창릉천 주면, 불광동 기자촌 일대
등 몇 군데를 빠뜨렸다는 이유였고. 축척 5만분의 1 지도 위에 그린 훑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책상 서랍을 열어 뭔가 유심히 들여다 보고는 “여기는 왜 뺐어?“ 하면서
일일이 지적했다. 김 부국장이 “집 없는 기자들이 집을 짓겠다고 터를 닦고 있는데
그린벨트에 포함시키면 난리가 날겁니다.” 라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 그래도 포함
시켜, 이런것 저런 것 눈치보다가는 죽도 밥도 안돼. ” 라고 일축했다.
김 부국장은 그때 ‘도데체 대통령은 사람 눈인가 매눈알을 박았나. 어떻게 5 만분
의 1 지도에서 빠진 부분을 그렇게 칼같이 찝어내지 ?“ 라고 회상했다.
며칠 뒤 2차 초안에서도 창릉천 주변이 빠져있었고 김 부국장은 “서울이 북쪽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하고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말을 가로
막으면서 “아~ 거 참 답답한 친구들이네” 하면서 말씀하셨다.
이 한마디가 바로 그 유명한 그린벨트 안보관이다.
“남북이 다시 맞붙어 불행히도 우리가 서울까지 후퇴했다고 치자구. 그러면 인민군
2,3개 사단을 이 계곡에 몰아넣고 북한산에서 공격하면 섬멸시킬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에 시가지를 조성하면 안돼”. 김의원은 “탄복했다”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린벨트는 결코 예외가 없었다. 그린벨트의 주무 장관이었던 태완선(작고) 당시
건설부 장관은 취임 후 첫 작품인 그린벨트 때문에 재산을 날렸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서울 남태령고개 부근의 임야 5,000 평이 1 차 그린벨트 지정고시에 묶
여버린 것이죠. 실무진이 작성해 온 최종안을 보고 나서 그는 “허허허.난 망했
군. 망했어”라고 쓴웃음을 짓다가 “쯧... 그래도 공정해야지” 라면서 결재했다고
한다.
국세청 내사를 통해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 상태를 손바닥보듯 알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태 장관을 두고 “그 사람 참 양심적인 사람이야”라고 칭찬했다고 당시
대통령 경제2수석을 지맨 오원철씨는 후일 증언했다.
일본 국토청 차관을 지낸 시모고베 아츠시(下河邊淳) 는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
(등소평)의 경제 자문관으로 한때 활약했다. 그는 1980년대 초“베이징과 상하이
같은 대도시 주변에 그린벨트를 두르는 것이 후일을 위해 바람직하다“며 그 모델
로 ”상세한것은 한국에 가서 알아 보라“고 건의를 했고 이후 신군부에서 여기
에 관련된 자료를 넘겨주었다는 말이 있었다.
그린벨트.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미주알고주알 참견한 분야가
이 그린벨트이고, 그는 건설부령 그린벨트 관리 규정을 처음 결재할 때부터 겉표
지에 “건설부 장관이 개정할 수 있으되 개정시에는 반드시 대통령의 결재를 득할
것” 이라고 써 놓아 사실상 대통령이외에 주무 장관의 재량권을 봉쇄 시켰다.
“작은 구멍 하나가 큰 둑을 허문다”는 소신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의 그린벨트에
대한 의지는 냉혹할 정도 였다. 1977 년 여름에 있었던 일.
“저, 각하. 참으로 딱한 사연이 있습니다.” - 6척 거구에 화통한 성격의 신형식
당시 건설부 장관이 말인 즉,
사람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수리산 기슭에 천주교측이
전국의 수녀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수영장을 마련했다. 그런데 화성 군청은 1976
년 12월 4일 그 곳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자 불도저를 동원해 수영장을 메워
버렸다.
“수녀들이 남들처럼 해변에서 수영할 수도 없고...” 선처를 바라는 신 장관의
진언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 특유의 단호성으로, “이 양반아! 그렇게도 머리가
안돌아가 ? 수녀들에게 그렇게 해 주면 스님들은 가만 있겠어, 또 목사들이
그냥 있겠어. 종교가 어디 한 두 개야?”
박정희 대통령은 그린벨트 내 군부대 초소의 기왓장 몇 개 바꾸는 것까지 건설부의
사전 허락을 받도록 했다. 자존심이 상했던지 한 국방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대 안 그린벨트는 군이 관리 하도록 해 달라”고 강력하게 건의 했다가
박정희에게 호된소리를 들었다. 그 말은 아직도 유명하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군인들이 그렇게 법을 잘지키나 ?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오
면서 법 한줄도 어기지 않았어 ? 대통령인 나도 수백줄은 어겼는데 ? 잔소리말고 건
설부 통해서 해!!” 라고 한마디로 거절당했다고 김의원씨는 후일 증언했다.
딱 한번 예외가 있었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장기영씨의 장지(葬地)
이다. 집권 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1977년4월에 사망한 장씨의 장지는 팔당
댐 부근인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창우리 선영으로 결정됐는데, 윤세달 당시 광주
군수가 직원들과 함께 장지 입구를 가로막고는 “그린벨트 내 불법 묘지이니 대통령
의 재가를 받아오라”고 버텼다. 결국 장기영은 건설부, 보사부 공동 발의로 국무회
의 의결이란 “엄청난(?)” 과정을 거쳐 선영에 묻혔다. 진해 별장에 내려가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이 보고에 몹시 얺짢아 했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2526명의 공직자가 그린벨트 관리 잘못으로 징계를 받았다.
징계내용은 파면 191명, 감봉 114명, 견책 229명, 직위해제 2명, 경고.주의.훈계
1990 명 이었다. 그린벨트 지역 공직자들 사이에서는“사표를 내놓고 일한다”, “그
린벨트 감사에 비하면 감사원 감사는 사도 아니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다.
박정의 대통령 생존시 “신성 불가침”이었던 그린벨트는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 밀려 선거철 등 민감한 시기마다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고
1997년 9월11일에 발표된 건설부의 파격적인 규제 완화 즉, 잘난 정치인의 자신의
인기몰이용으로 이제는 존립의 근거마저 위협받고 있다.
김대중,김영삼, 노무현 - 과연 이들이 그린벨트에 담긴 이런 사연을 알기나 할까 ?
기껏 박정희 대통령이 몸을 바쳐 만들어놓은 업적을 한순간에 망치는걸 능력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그린벨트에 담긴 의미도 모르는 무식으로 중무장한 정치인 보다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첫댓글 누가 뭐래도 박정희 전대통령은 우리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십니다.. 박대통령의 그린벨트 정책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서울은? 끔찍했겠지요....
좋은 글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