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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주방 안에도 하느님께서!>
저희 살레시오회 안에서는 ‘일상의 영성’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때로 지루해 보이고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우리들의 반복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와 만나는 이웃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영성입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소소한 일상사에도 분명히 큰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믿으며 성실히 반복해나가는 영성입니다.
이러한 일상의 영성에 대한 충실한 실천은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장 39~40절)
신앙생활을 이벤트처럼 해나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주일만 신자’인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분위기 좋은 성탄 때만 신자인 분들도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 바짝 열심히 하고 나서 푹 쉬는 그런 이벤트가 절대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자세가 있는데, 바로 지속성이며 일상성입니다.
신앙생활은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때로 힘들어도, 때로 악천후라 할지라도 꾸준히 걸어가는 용감한 행위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잘 실천하기로 유명한 17세기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자가 있었는데,
수도원 주방장이었던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했던 그는 아주 기쁜 얼굴로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수프를 저으면서 동료 수도자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하찮아 보이는 행위들을 하느님을 위한 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지만
동료들의 낡은 구두를 수선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반드시 큰 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이러한 라우렌시오 수사님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만나면 마치도 주님을 만난듯 한 느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주방에서 접시를 닦을 때의 모습은 마치 경건한 사제가 거룩한 성찬례를 집전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제도 아니었고 명설교자도 아니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돈 보스코 성인께서 강조하셨던 일상의 영성,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가 쉽게 넘겨버리고 마는 일상의 소소한 작은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영성입니다.
작은 의무들에 중요성을 두고 충실히 이행하는 영성입니다.
매일 아침이면 내 책상 앞에 놓이는 매일의 업무들, 귀찮은 일상적 소임들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영성입니다.
영성생활 안에서도 ‘특별한 그 무엇’을 추구하지 않고
매일 되풀이되는 미사나 아침저녁기도에 구원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져 있음을 기억하고 ‘할 때 잘 하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내고 있는 ‘일상’은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축복의 순간들이며, 찬란한 기적들이 수시로 반복되는 금쪽같은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 일상의 영성의 골자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복음적인 삶, 균형 잡힌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그때 그 때 상황에 충실하다는 것, 매 순간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잘 해낸다는 것, 모든 것을 미리 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믿는 이들은 누구나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종으로 불림받고 있습니다.
기본에 충실한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주제가 깨어 있음입니다.
준비하며 깨어 있기 위해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하여 사부 성 베네딕도는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말라'하시며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평생, 매일 일정한 시간에 끊임없이 바치는 시간경의 시편 기도가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하느님 향한 이정표가 되어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 줍니다.
비단 수도자만 아니라 깨어 삶의 기본에 충실하려는 모든 이들이 명심해야 할 수행입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수행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가 '수행자'입니다.
삶의 모두가 수행이요 수행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인 기도를 포함한 모든 일이 수행입니다.
수행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주님 사랑은 수행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여 사부 성 베네딕도는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두 번째 지침을 주십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 우리를 깨어 기도하게 하고 주어진 책임의 수행에 충실하게 합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베네딕도회 모토를 실현하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늘 하느님 불러주신 '지금 여기'의 제자리에서 주님을 사랑하여 깨어 기도하며,
주어진 책임의 수행에 충실한, 기도와 일의 기본에 충실한, 슬기로운 당신의 종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 말씀입니다.
바로 1독서의 바오로가 주님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본보기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확신에 넘친 고백이 우리에겐 좋은 격려와 자극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나에게 주신 은총의 직무를 여러분은 이미 들었을 줄 압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양상은 달라도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무방합니다.
우리 역시 나름대로 주님께 받은 '은총의 직무'에 따라,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늘 깨어, 주님 사랑과 기도와 일의 기본에 충실합시다.
이래야 주님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요,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복음의 일꾼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이사 12,3)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지금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대로 한 번 해 보세요.
“먼저 남산타워를 절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어떻습니까?
남산타워를 절대로 생각하지 않고 계십니까?
사실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남산타워를 다녀오신 분이나, 또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으신 분은
생각하지 말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남산타워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나의 구원을 방해하는 등 결코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 죄가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르고 짓는 죄가 아닌, 알고도 짓는 죄를 계속해서 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이러한 우리 머릿속 습관을 이용한다면, 죄로부터 약간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죄에 대한 생각이 들 때 곧바로 다른 생각을 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남산타워를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생각이 계속 남산타워에 머물게 되지만, 바로 이 순간 “63빌딩을 생각해 보세요.”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하지 말라는 남산타워는 정말로 생각에서 잊혀지고, 63빌딩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죄에 대해서도 이렇게 해 본다면 어떨까요?
‘죄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면 할수록 떠올려지는 것은 죄일 것입니다.
그 순간 사랑하는 내 가족을 생각하고, 나와 함께 할 동료를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을 떠올린다면 죄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무책임하게 죄에 방치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임무를 소홀히 하는 불충실한 종이 되지 말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야기하시지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시기는 하지만,
죄를 이겨내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 구원을 위한 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심판 날에 매를 많이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생각해보니 주님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받았는데, 그 받은 것을 주님을 위해서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안일하고 나태한 마음으로 그냥 그 자리에 맴돌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열심히 사는 오늘, 죄로부터 자유로운 오늘을 함께 만들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당연한 일>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주인의 뜻을 알고 있는 종'은 일차적으로는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주인의 뜻을 모르는 종'은 '안 믿는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과 책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책임과 권한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죄를 지어도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닙니다.
특별한 부르심에 응답했으면 응답한 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신앙인들은 세례성사 때 이미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살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자가 아닌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영적 생활과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억지로 부과된 의무가 아니라 그 자신이 그렇게 살겠다고 서약함으로써 스스로 받아들인 의무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라는 말씀은,
"은총을 많이 주었으니 그 대가를 많이 내놓아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라." 라는 뜻입니다.
사도가 사도답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교황이 교황답게, 추기경이 추기경답게, 사제가 사제답게, 수도자가 수도자답게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생색 낼 일도 아니고, 자랑할 일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 내용을 반대로, 즉 '벌'이 아니라 '상'을 받는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과 신앙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죄를 지었을 때 더 엄한 벌을 받는다면,
반대로 똑같은 선행을 실천했을 때에는 '더 큰 상'을 받게 될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10)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대해서 상을 받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짓입니다.
앞의 질문에서 '똑같은 선행'이라는 표현은 함정입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과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큰 선행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선행'을 하고서 뭔가 특별한 선행을 실천한 것처럼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지도자의 겸손한 모습과 청빈한 모습에 대해서 세속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칭찬하고 존경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세속의 지도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일은 바로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점을 반성해야 합니다.
안 믿는 세속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지도자의 '삶'에 대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감동을 받고 존경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인데,
교회 안에서마저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제자답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고 감동일 수 있겠지만,
교회 안의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마저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는 것은 그동안 교회가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반증이 될 뿐입니다.
안 믿는 세속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지도자에게서 감동을 받고, 그를 칭찬하고, 존경하는 일은
사실은 우리 교회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주인의 뜻을 모르는 종'의 경우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안 맞을 것이다."가 아니라 "적게 맞을 것이다."입니다.)
예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받을 때에는 신앙인들과는 좀 다른 기준이 적용될 것입니다.
그래도 죄와 악행에 대해서 처벌을 면제 받지는 못합니다.
선과 악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다르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안 믿은 사람에게도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어떤 짓을 한 다음에 그것이 악행인 줄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 있는 경우가 몇 가지나 있을까?
정말로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기회도 없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기회도 없었던 사람들-일부러 거부한 것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받게 될 심판입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더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을까? >
요즘 유투브에서 박보영 목사님의 간증을 듣고 있습니다.
이 목사님의 삶을 들으며 가톨릭교회 사제지만 부끄러움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상처를 많이 받고 교인들의 험한 모습을 보며 하느님이 없다고 확신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신앙을 버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가문 좋은 집 딸과 혼인을 하였고 병원과 땅과 돈도 많았으며 아들도 하나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미국에서 프로 골퍼와 골프만 치며 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가정이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술로만 지내던 탓에 어느 날 심장마비에 걸리게 되었고,
간신히 살아나기는 했지만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매일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삶을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심장이 떨려서 답답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됩니다.
의사로서 죽음만 기다려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한 순간에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도 들었고 의사로서 모든 의심을 하여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하느님을 외면하고 살았던 삶이 너무 죄송하여 먹은 것을 다 토할 정도로 쓰러져 울었습니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그 고마우신 하느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분을 만났다면 반드시 이런 고마움을 느끼고 받은 것에 대해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의사를 그만두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쳐도 부족하더랍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을 아내에게 맡기고 보지 않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애정이 생기는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의 것으로 가지려고 하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만난 모든 가톨릭 성인들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바쳐도 죄송한 마음.
그리고는 거지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우는 과정에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습니다.
라면 하나를 물에 불려서 여러 명이 함께 나누어 먹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7년 정도 고생하다가 지금은 사람들이 알아줘서 교회가 커지게 되었고 삶도 편안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목사님은 이제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미 중국의 오지로 들어갈 생각을 굳혔습니다.
공기가 희박하여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으로 들어가서 남들이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나오지 않고 거기서 뼈를 묻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작은 봉사, 작은 자선, 작은 선행을 하고서도 하느님께 보답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 생명까지 다 바쳐도 모자랄 만큼 큰 은혜를 내려주셨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다면 아직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만났다면 내가 목숨까지 바치더라도 하느님의 그 사랑에는 털끝만큼도 보답해 드리지 못하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감사해서 바치는 것이어야지 보답을 바라며 봉사하는 것은 참으로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를 하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봉사하면 안 됩니다.
기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할 만큼만 하십시오.
억지로 하는 것은 자신까지 속이는 위선이 되고 바리사이가 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 교회를 박해하다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리 자기 자신을 바치더라도 항상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그분의 말씀 하나하나에 하느님께 대단한 일을 해드렸다고 자만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러한 은총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다른 민족들에게 전하고 ... ”
말씀의 봉사자로 불러주신 것에 대해 그저 감사하는 마음뿐인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말씀을 전하기 위해 땀과 피와 고생을 했는데도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봉사자는 말씀을 전하기 이전에 먼저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레지오나 소공동체 모임 등을 할 때 활동 보고에 치우쳐져서는 안 됩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에게 해 주는 것을 남들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합니까?
말씀을 만나면 내 자신을 저절로 봉헌하게 되고 봉사하게 됩니다.
먼저 그분을 만나 그분의 사랑에 감동하여 눈물을 하염없이 흘릴 수 있는 우리 신앙인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 이후엔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행위가 존재를 따르게 해야지, 억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지금 매를 맞는 것이 낫다>
어린 시절 기억입니다.
시골에는 ‘아이스께끼’ 장사가 있었습니다.
일주에 한두 번 고물 자전거를 타고 와서는 동네 어귀 느티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비료포대, 고무신발, 구리철사 등 그야말로 돈 되는 고물은 무엇이든 받아 챙기고
얼음을 채운 나무통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씩 내어 주었습니다.
비료포대 하나도 귀했으니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모였지만 먹지 못한 채 구경만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도 너무 먹고 싶었는데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고 있다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1원짜리 동전 하나였습니다.
1원이면 아이스크림 두 개입니다.
신이 나서 느티나무 아래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습니다.
옆에 아이들이 부러운 듯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쫓아 오신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하며 놀랬습니다.
그 뒤는 상상에 맡깁니다.
저는 그날 아이스크림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돈이 없었으니까요.
지금서 얘기하지만 전에는 작은집 울타리를 엮어놓은 구리철사를 풀어다가 엿을 사먹은 일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하신다.” (히브 12,6)
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훈육하시어 우리가 당신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히브 12,10).
우리의 부모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꾸짖음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루카 12,47-48)
따라서 지금 매를 맞는 것이 다행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매를 맞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관리인입니다.
그리고 관리인은 주인이 바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따라서 충성스러움이 요구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의 것을 내 것 인양 남용하여 멋대로 쓴다면 주인은 더 이상 그에게 관리를 맡길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것을 관리하도록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과 능력, 재물 등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써야 합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8)
고 하셨으니 누군가 나에게 요구한다면 많이 받은 줄로 생각하고
또 주님께서 많이 맡겨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기 바랍니다.
교회의 일을 돌봄에 있어 그 직책이 높은 이는 편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어려운 일을 하게 됩니다.
책임이 무거울수록 더 하느님께 바쳐야 할 필요와 요청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다른 이들을 영적으로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에 걸맞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어제와 오늘 복음의 비유들은 제자들에게 필요한 내적 자세의 본질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한 성서학자는 제자의 이러한 덕목을 ‘주의력’과 ‘책임성’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주의력’을 지닌 제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혼인 잔치’로 상징되는 하늘 나라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알아보는 이이며,
비록 ‘때’는 모른다 하더라도 ‘곧’ 사람의 아들이 돌아와 하늘 나라를 완성하시리라는 확신으로 늘 깨어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어 오늘 복음에서는 ‘책임성’에 대해 성찰하게 됩니다.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의 책임성은 무엇보다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세속적 권력이나 사목적 권한을 주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했는지에 따라
주님께 ‘행복한 종’ 또는 ‘불충실한 종’으로 인정받는다고 오늘 복음의 비유는 말합니다.
그런데 ‘주의력’과 ‘책임성’을 갖는 데 실패하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주인의 부재’의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부재’가 항구적일지 일시적일지 ‘외적’으로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 가슴속에서 믿음과 불안과 의심이 뒤엉키게 되고, 어떠한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 그 기준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들은 유다인들이 즐겨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선악과 진위의 분별이 어려운 ‘개와 늑대의 시간’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처럼 우리의 인생 또한 어찌 보면 주님께서 ‘부재’하시며,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고 모호한 시간 속에 놓여 있어 보입니다.
그러기에 주의력과 책임성을 가진 제자다운 판단보다는
눈앞의 이익과 허무한 욕망에 따라 사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오는 행복하고 충실한 종은
‘주인의 부재’가 사실은 부재가 아니요, 그분께서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함께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기억하면서 의심과 태만의 유혹을 이겨 내고
믿음과 희망 속에서 주인과 ‘이미’ 함께하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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