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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곤 목사(광명교회 원로)가 본 여수노회(노회장 구제수 목사, 호산나교회) 2024 신년감사예배 시 말씀을 전했다. 1월 2일(화) 오전 11시에 성도교회(박은효 목사)에서 신년감사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전 노회장 서영곤 목사가 "내 이름은 어떻게 기록될까?(롬16:1~4)"라는 주제로 신년메시지를 전했다. 서영곤 목사는 “롬 16장에는 33명의 성도 이름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라고 묻고 “지금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자들의 이름을 그 책에 빠짐없이 기록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서영곤 목사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이름은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요?”라고 또 한 번 묻고 “신실한 참된 목사와 장로로 기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서 목사는 “주의 품에 안길 때 수고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면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줄 주님을 기대하고 사모하면서,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설교 전문으로 당일 참석을 못한 분들과 참석한 분들도 되새기기 위해 원고를 얻어 실어드린다.
2023년 1월 2일(화) 노회 신년하례 감사예배 설교
롬 16:1-4 "내 이름은 어떻게 기록될까?"-서영곤 목사-
탈무드 이야기 : 두 사람이 굴뚝청소를 했습니다. 한 사람은 얼굴이 온통 새까맣게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굴이 깨끗했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세수를 할까요? 주일학생들에게 물으면 얼굴이 새까만 사람이요.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속으로만 대답하십시오. 안 그러면 탈무드를 안 읽은 사람으로 오해합니다.
탈무드의 대답은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세수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상대방이 얼굴을 보니까 새까맣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내 얼굴도 더럽구나 생각을 하고 가서 세수를 합니다. 반대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이 깨끗하니까 내 얼굴도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세수를 하지 않는답니다.
제가 왜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지요. 송구영신! 한 해를 결산해 보고 새해를 맞이하는 자신을 성찰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자신을 성찰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너그럽지만, 남에게는 철저하게 잘못을 따지는 못된 본성들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역지사지! 입장 바꾸어서 생각해 보기가 실은 잘 되지를 않습니다.
목회생활 30년을 정리하면서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설교할까 고민 하다가, 로마서를 강해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성경이 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지만, 그 중에서도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로마서를 복음의 진수라고 합니다.
목회자를 부르신 목적도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선포하라고 했기 때문에 로마서를 선택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설교를 준비해서 제 자신도 은혜를 받고, 성도들의 반응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강해를 마무리 하면서 마지막 16장에 외서, 무엇인가 뒤통수를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중고등부 학생 시절에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에 이해가 되지 않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경에는 왜 그렇게 쓸데없이 사람들이 이름이 많이 등장할까? 그것도 히브리어 헬라어 이름이어서 읽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다른 종교의 경전은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롬 16장에는, 33명의 성도 이름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되어서 로마서 강해를 두 번 했는데, 12년 전에 했던 그때의 설교를 찾아보니까, 16장은 설교가 없어요. 쓸데없는 이름만 많이 기록되어 있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은퇴하기 전의 마지막 설교니까, 조금 더 깊이 묵상해 보니까, 참 은혜가 많이 되면서 깊은 찔림을 받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1
하나님께서 이토록 많은 사람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자들의 이름을, 그 책에 빠짐없이 기록하고 계십니다(계시록- 생명책은 단수, 행위 책은 복수). 저는 지난해 칠순 잔치를 자녀들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날은 칠십은 청년이고, 유엔도 70부터 청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내가 주님 앞에 갈 텐데, 그때 내 이름 밑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이름은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요? 여수노회라는 이름 밑에 여러분의 이름이 차례대로 기록이 될 텐데, 어떤 사람이라고 기록되고 있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는 참으로 신실한 참된 목사와 장로로 기록이 되어 있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기록이 되어 있을까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름을 보고 우리는 도전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목사, 장로가 될 수 있을까요?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몇 가지를 자세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여기 등장하는 이름들 가운데, 공통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자신의 은사에 따라 봉사하되,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성도의 형편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연구해 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33명은 신분이나 경제적 여건 등이, 모두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아리스도블로’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헤롯 대왕의 손자였습니다. 11절에 ‘나깃수’는 황제의 비서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레오"라는 사람은 로마 집정관의 비서관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로마의 귀족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더디오”라는 사람은, 이 로마서를 사도 바울 대신에 기록한 사람입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글씨를 쓰지 못할 정도로, 시력이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더디오"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셋째라는 뜻입니다. ‘구아도’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는 넷째라는 뜻입니다. 옛날 노예들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셋째, 넷째라고 불렸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유대인, 이방인, 귀족, 노예 등 다양한 자들이, 한 교회에서 형제자매가 되어 섬기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민족과 신분과 경제적 여건과, 사회적 위치가 달랐지만 서로 용납했습니다. 2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노회안의 교회와 목회자와 장로님들의 환경도 다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노회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용납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 신념, 정치 색깔, 철학이 다 다릅니다. 또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야가 전부 다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보니까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어떤 성도들은 자녀 교육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자기 옷은 아무렇게 입어도 자녀에게는 모든 것을 쏟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취미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 취미생활이, 삶의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차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은 크게 보고, 단점은 잘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서로 판단합니다. 우리는 서로 판단하기 쉬운 부패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가 아니고 진리가 아닌 이상, 하나님의 공동체에서는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서로 돕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위대한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평신도 사역자 33명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이름 앞에는, 별명 같은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사랑하는 누구, 아시아의 첫 열매인 누구, 너희를 위해 많이 수고한 누구,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누구.
주 안에서 수고한 누구, 내 동역자 누구, 내 형제들, 친척들 누구.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뚜렷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결 같이 사도 바울과, 그의 사역에 최선을 다하여 협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요즘같이 목회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회자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이름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몇몇 이름은 살펴보기 원합니다(1절). 놀랍게도 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여성입니다. 당시나 조선시대에는 여자의 이름은 족보에도 안 올라갑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 로마서를 썼는데, 바로 이 서신을 로마교회에 전달한 사람이 여자 성도 뵈뵈입니다. 아마 집사나 권사였을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사도 바울이 얼마나 뵈뵈를 신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이 뵈뵈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2절). 여기서 '보호자'란 무슨 뜻입니까? 3
아마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뵈뵈라는 여성은 사도 바울과 다른 사역자들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후원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과 복음을 전하는 당시 사역자들은, 돈을 쓸 일이 많았습니다. 아마 귀족 출신이었을지도 모르는, 이 뵈뵈라는 여성이 사도 바울의 비서 역할을 자청하고 모든 일을 수행합니다.
게다가 바울의 보호자, 후원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뵈뵈를 보내며, 그들에게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노회 안에서도 연약하고 힘든 목회자들을, 교회들을 좀 더 돕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종들이 많아지는 2024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참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는 단어입니다. 아들이 군대 가 있을 때 편지할 때도, 평상시 자녀들에게도 카톡이나 메시지를 보낼 때 마다, 맨 처음에 쓰는 단어가 바로 너! 하나님의 사람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라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동역자란 말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는 사람!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까?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3절에 보면 그 유명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나옵니다. 두 사람은 부부인데 아내인 여성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초대교회부터 여자들이 얼마나 교회에 헌신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도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동역자라고 표현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우리의 모습도, 서로 진정한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로마 황제는 유대인을 매우 싫어해서, 그들을 로마에서 내 쫓아냈습니다.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쫓겨나 고린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천막 공장을 차리고 생업을 하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저 구원받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변했습니다. 인생의 가치관을 비롯한 모든 것이 변했고, 그래서 일 년 반 동안 바울이 고린도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바울을 돕습니다.
에베소로 사역하려고 떠날 때도, 그들은 생업을 다 정리하고, 집도 팔고 에베소까지 따라갑니다. 대단한 평신도 사역자들입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교회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사할 때 교회는 고려 대상도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전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나온 이 평신도 부부를 보십시오. 그들은 공장 문을 닫으면서까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이사를 다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기대하십니다(3,4절). 그들이 영적 지도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도왔는지. 사도 바울은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자기를 위해서 다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성도를 가진 목사는 정말 얼마나 행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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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말씀을 반대로 적용해 봅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 자기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목사와 장로님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 행복한 신앙생활이겠지요.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지적합니다.
본문에 나온 별명을 자세히 보십시오.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별명이 따라 오겠습니까? 구약의 한 사람을 예로 들자면, 아담의 자손 중에 아벨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은 그 이름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사람이다.
다 같은 예배가 아닙니다. 더 나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 같은 목회가 아닙니다. 더 나은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성공이나 물리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롬 12:11에 있는 말씀처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과 그의 몸 된 교회를 잘 심기도록 하십시다.
신약시대에도 대단한 성도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눅 7:9). 그는 이름도 없는 이방인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그런데 그의 별명? 예수님을 놀랍게 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국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입니까? 그는 왕으로 선출되었을 때에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평가는 성경에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 이게 이해? 하나님에게 후회가 있을 수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마음이 아프셨으면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저는 목회 30년 하는 동안 늘 이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내가 너를 서목사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 그러면 끝장나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의 눈 밖에 벗어나도 끝장나는데, 하나님의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됩니까?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신 것을, 자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을 팔았고 버림을 당하는, 비극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는 마땅히 욕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에게도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를 욕하기 전에 내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면서, 저 사람은 차라리 장로, 목사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으로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미화 집사 개그우먼 묘비- 웃기다가 자빠져 죽은 사람. 유언장- 묘비에 쓸 글. 예수님 닮기를 흉내 내다 간사람 여기 잠들다. 5
제 목양 실에 은퇴 시까지 걸려있던 성구가 두 개있습니다. 하나는. 잠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또 하나는 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무슨 설교를 할까? 고민하다가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길 때에, 수고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면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줄 주님을 기대하고 사모하면서,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진=조규정 전남동부극동방송 홍보실장, 글=정우평 목사, 010-2279-8728 【교계소식/25데스크】문서선교후원계좌 우체국 500314-02-264196 정우평 yjjw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