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 하느님을 위로하는 사람들
대홍수가 끝나고 마른 땅이 드러나자,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하느님은 그 향내를 맡으시고 다시는 사람들 때문에 다른 생물들을 파멸시키는 일은 하시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셨다.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는데, 그 아픈 마음이 위로를 받으셨다.
악으로 가득 차고, 악행만 있는 거 같은 세상 속에 하느님 마음을 위로하는 정결한 짐승과 새가 있었던 거다. 사실 짐승과 새가 무슨 죄가 있었겠나. 사람이 나빴지. 그 향내를 맡으시고 하느님도 현실을 똑바로 보시게 된 거 같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창세 8,21).” 사람만 회개하면 된다. 그러면 세상은 평화롭고 본래 아름다운 모습이 회복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먼 이를 만나 볼 수 있게 해주셨다. 그런데 다짜고짜 그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다. 그는 그가 의지하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보게 된 다음에 예수님이 다시 그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걸 보면 그는 그 친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몰랐다. 시력이 회복되었고, 마음의 눈도,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능력도 되찾은 거다. 군중 속에 파묻혀 익명성 안에 자신을 숨기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지 않고, 무엇이 옳거나 그른지 또 어떤 게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인지 식별할 수 있게 된 거다.
진리는 힘이 센 순서도, 다수결로도 정해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함께 무리 지어 다니고 그 무리가 위세 등등한 거처럼 보여도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날 그들 중 하나도 내게 남아있지 않는다. 하느님과 나 단둘이 내 삶을 두고 셈을 하는 거다. 그 자리에는 부모도 가족도 없다. 그리스도인인 나도 하느님은 처음 뵙겠지만 그 오른쪽에 계시는 예수님은 금방 알아볼 거다. 긴 곱슬머리에 파란 눈동자의 잘생긴 아저씨가 아니라,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아름다운 사람, 억울하게 죽기까지 하느님 뜻에 헌신했던 거룩한 사람, 그리고 그가 믿었던 대로 부활했던 영광스러운 사람이다. 그분이 늘 내 마음 안에 계셨으니 단번에 알아볼 거다. 아니 그러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이니 소란과 소동이 끊이지 않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악을 쓰고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욕설을 퍼붓고,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거짓말을 한다. 그러게, 사람이 본래 그렇다. 이런 세상 속에서도 내 삶이 하느님 마음을 위로했던 그 번제물의 향기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 주님만 계시면 충분합니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제게는 빵 딱 한 개, 주님만 계시면 걱정이 없습니다. 사실 제 걱정의 거의 다는 쓸데없는 것인 줄 압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 자녀들을 보호해 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