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2.0 2003.08.05 #137
피_처_1_<로보트 태권 V> 네거 필름, 27년 만에 발견한 사연
잠자던 로보트 태권 V, 마침내 빛을 보다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 V> 전편의 네거 필름이 27년 만에 영진위 직원에 의해 발견됐다. 그 우여곡절 사연을 들어본다.
지난 4월 25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국내진흥부의 김보연씨는 누군가 지나가며 던진 한마디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거 우리 창고에도 있는 것 같던데?" 김청기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 V> 필름을 찾아 사방 천지를 헤매며 고심하고 있었는데 바로 영진위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당시 김보연씨는 문화관광부로부터 애니메이션 대국민 홍보에 관한 기획 아이템을 제출하라는 공문을 받은 상태였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담아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하던 김보연씨는 전국 7개 도시에 있는 영진위 예술영화 전용관을 이용해 흘러간 국내 애니메이션 순회 상영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마루치 아라치> <로보트 태권 V> 등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들을 대중에게 다시 소개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상영 가능한 애니메이션 필름은 눈 씻고 찾아봐도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정말 꼭 한번 다시 극장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로보트 태권 V>의 필름을 찾는 건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물론 한국영상자료원과 춘천애니메이션박물관,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로보트 태권 V>의 프린트 필름이 보관돼 있긴 했다. 이 영화의 프린트 필름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도 몇몇 찾아냈다. 그러나 쥐면 바로 바스러지는 것부터 영사기에 걸 수조차 없는 것까지 한결같이 처참한 상태였다. 특히 개인소유자가 춘천애니메이션박물관에 판매한 필름은 원저작자의 허가도 구하지 않은 복제 프린트였다. 그나마 1976년 개봉 당시의 전편이 다 갖춰져 있지도 않았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프린트조차 상영은 물론 복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 상태가 심각한 상태였다.
이를 어쩌나. 한국 애니메이션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유년의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로보트 태권 V>는 기억 속의 애니메이션으로 묻혀버리고 말 것인가. 이런 와중에 스치듯 들려온 "영진위 창고에 있다"는 그 말은 김보연씨에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도 같았다.
동아줄을 내려준 사람은 같은 국내진흥부에 근무하는 박영환씨. 영진위 현상실에서 근무하다 국내진흥부로 온 박영환씨가 몇 년 전 영진위 현상실 창고를 정리하면서 작성했던 보관 작품 리스트에서 <로보트 태권 V>를 기억해낸 것이다. 김보연씨는 한달음에 바로 영진위 창고로 내려가 40여 편 중에서 마침내 '로보트 태권 V'라고 표기된 필름 8권을 찾아냈다.
하지만 영상인지 사운드인지 그 필름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내 영상 자료 보관의 허술함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김보연씨는 위층 현상실로 무작정 필름 8권을 들고 찾아갔고 현상실 주광동 기사에게 필름의 정체를 밝혀달라고 떼를 썼다. 주광동 기사는 8권 전체를 일일이 스탠백에 걸고 살피는 과정을 거쳐 듀프 네거 필름이라는 걸 확인했고 총 10벌 중 앞뒤 오프닝과 엔딩 장면 1벌씩만 빠진 본편 전체 분량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다면 <로보트 태권 V>가 맞긴 한데 과연 이 필름이 1976년 개봉한 1편이 맞는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태권 V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1편의 줄거리와 장면들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소문한 끝에 <로보트 태권 V> 1편의 베타 테이프를 구하고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1편 줄거리와 비교해본 결과, 1976년 작 <로보트 태권 V> 1편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김보연씨의 가슴엔 '꼭 복원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 솟아올랐다. 그들은 10분 분량을 테스트 필름으로 현상해 영진위 시사실에서 시사해보기로 했다. 시사실에서 10분짜리 <로보트 태권 V>를 스크린으로 보는 순간 김보연씨는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고 한다. 화질이며 사운드는 시쳇말로 '개판'이었지만 프린트화할 수 있는 네거 필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이었던 것.
1976년 7월 24일 서울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로보트 태권 V>는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의 부흥을 가져왔던 작품이다. 국내 최초의 장편 컬러 애니메이션은 1967년 1월 21일 개봉한 <홍길동>/ 신동우 화백의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형인 신동헌이 감독, 신동우가 구성을 맡은 작품이다. 선녹음 후작화 기법인 프레스코 방식의 풀 애니메이션으로 당시로선 탁월한 완성도를 이뤄냈을 뿐 아니라 서울에서만 30만에 달하는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필름이 소실되고 지금은 찾아볼 수조차 없는 형편이다. <홍길동>의 성공으로 국내엔 애니메이션 제작 붐이 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TV 보급의 확대로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타격을 입게 됐다. 방송사에선 창작 애니메이션 지원보다 값싸고 경쟁력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 방송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이 제작하고 신인 김청기 감독이 연출한 <로보트 태권 V>는 태권도를 주무기로 한 로봇을 내세워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실제 배우의 동작을 촬영한 뒤 작화로 분석해 애니메이션화하는 로토스코핑 기법을 도입하고 국내 최초로 OST를 제작하는 등 혁신적인 시도를 선보였다. <로보트 태권 V>는 그해 한국 영화 중 최고, 전체 영화 중 2위라는 애니메이션으로선 전무후무한 흥행 기록을 수립했다.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의 한창완 교수는 <로보트 태권 V>에 대해 "한국 애니메이션계에 김청기 감독이란 스타 시스템을 구축한 시발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까지 <로보트 태권 V>란 작품 자체를 아예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초반에 출시된 60분 분량의 비디오 버전과 미국에서 출시된 영문판 <태권 V>(<무적의 볼타 Voltar the Invincible>란 제목으로 감독명, 제작 연도, 국적을 바꿔 출시된 버전으로 김청기 감독은 스토리와 장면 편집이 달라진 영문판을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개인이 소장한 여러 형태의 편집 버전이 있었지만 어느 것도 오리지널 버전은 아니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로보트 태권 V>의 필름을 찾거나 이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동안 VCD나 DVD 타이틀로 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오리지널 버전을 완전 복원한 것이 아닐 뿐더러 비디오 소스 등을 짜맞춘 탓에 화질과 사운드 등이 매끄럽지 못한 상태다. 이번에 영진위에서 발견된 <로보트 태권 V>의 네거 필름이 의미를 갖는 건 1976년 개봉 당시의 버전으로 온전히 복원할 수 있게 됐다는 점. 영진위 영상기술부는 "상영 가능한 상태로 복원하는 건 거의 새로 만드는 작업에 가깝지만 영진위 기술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주광종 기사도 "지금 남아있는 필름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로보트 태권 V>를 드디어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얘기? 물론 가능성은 훨씬 커졌다. 그러나 복원 작업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한창완 교수에 의하면 애니메이션 필름의 복원 작업이란 "단순히 필름을 깨끗이 닦고 매끄럽게 잇는 게 아니다". 그는 월트 디즈니의 고전이자 세계 최초의 장편 컬러 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1957년 개봉)를 예로 들며 "원래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이전의 원화, 동화에 새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애니메이션 복원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영진위 측은 극장 상영 수준으로 완벽하게 복원하는 데엔 최소 5억 원에서 최대 10억 원의 초기 비용(상영을 위한 홍보 비용 등 부대 비용을 제외한 복원 작업에 소요되는 비용)과 8개월~1년의 작업 기간, 7명 이상의 이미지, 사운드 분야 전담 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7년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로보트 태권 V>가 넘어야 할 산은 이것만이 아니다. 영진위가 복원 주체로 나선다고 해도 원저작자인 유현목, 김청기 감독과 작품 활용 권리를 소유한 신씨네의 동의를 얻어야 복원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현재 영진위는 원저작자의 동의를 얻은 상태이며 신씨네와 '긍정적인 방향'으로 의사를 교환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로보트 태권 V>의 네거 필름을 발견한 김보연씨는 "요즘 어린이들에게 큰 관심을 끌 수는 없겠지만 30대에겐 엄청난 향수를 불러올 거라고 생각한다"며 "아톰이 탄생 50년 만에 부활한 것처럼 한국에도 불멸의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사 영화를 제작해온 신씨네의 제작, 마케팅 노하우가 더해진다면 <로보트 태권 V> 복원이 현재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의 불황을 타개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고 밝힌 한창환 교수 역시 "386 세대 이상도 알고 있는 친숙한 작품 <로보트 태권 V>의 가치를 복원하자"고 강조했다. "<로보트 태권 V>의 보원 작업이 순조롭게 성사되면 <로보트 태권 V 제2탄:우주작전> <로보트 태권 V 제3탄:수중특공대>는 물론 다른 애니메이션이나 실사 영화의 복원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김보연씨의 희망이 비단 그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김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