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목교회(隱牧敎會)가 생기는 이유(기독신보 2022,5,2 제498호)
폼페이 성은 한 집 건너 술집과 유흥가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의 타락상을 연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러나 서구 교회들은 부흥기를 지나서 이제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예배당을 매각하는 곳이 더러 있고 매각된 예배당이 술집으로 둔갑하는 서글픈 일이 있는 가운데 다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예배당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록에 나타난 교회는 일곱교회였는데 지금은 세계적으로 교회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은 복음이 땅끝까지 널리 증거되었다는 뜻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양적(量的)인 면에서는 부흥이 되었는데 질적(質的)인 면에서는 초대교회와는 양상이 달라졌다는 점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한국에 교회가, 부흥되어서인지는 몰라도 한 건물에 교파가 다른 교회가 4 교회나 들어서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아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복음을 전하여 뭇 영혼을 살리겠다는 의욕은 주님이 알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요소도 더러 있어 옥에 티와 같이 부작용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은목교회(隱牧敎會)까지 설립이 되어 어떤 이들은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교회 교파만 해도 수백이나 되는데 거기다가 은목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은퇴한 목사들만 모이는 교회로 전국적으로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 비판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진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비판 이전에 은목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은목교회가 지역마다 세워지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은목교회 모이는 목사들은 평생 목회를 하고 은퇴(隱退)하니 법적으로는 원로(元老) 목사는 교회 형편에 따라서 생활비 얼마라도 주면서 목회하던 교회에 출석할 수 있다.
그러나 원로 목사로 추대받아도 정해진 생활비는 드리고 원로 목사로서의 예우는 해주겠지만, 교회 출석은 하지 말아 달라는 정중한 요청이 있어 어느 원로 목사는 교회 출입은 삼가라는 요청의 부탁을 받아
시무하던 교회와 거리가 먼 곳으로 이사하여 평생 시무하던 교회를 은퇴와 함께 교회 모습과 아끼고 기도해 주던 성도들과 다시는 만날 수도 없고 대화도 못 하는 처지가 되고 보니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전염병 환자인가? 왜 만나지도 대화도 못 하게 하는가? 생각하고 한숨짓는 목사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다.
교회에서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줄 안다. 원로 목사나 은퇴 목사가 목회윤리를 벗어나 교회와 후임자에게 덕을 세우지 못하고 교회에 부덕을 끼쳤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원로 목사나 은퇴 목사를 같은 기준으로 보는 것은 성경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시무하던 교회에 덕을, 세우느냐 못 세우느냐는 전적으로 원로 목사나 은퇴 목사의 처신 여하에 좌우되는 것인데 원로 목사나 은퇴 목사를 격리(隔離)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로(元老) 목사와 은퇴(隱退) 목사는 주일에 교회는 가야 하겠고 하여 주변에 모르는 교회로 갔는데 처음에는 환영하고 예의를 갖추어 대하였지만, 한두 번 나가니 정중하게 대하여 주면서 다음, 주일부터는 우리 교회 출석하지, 아니하였으면 좋겠다고 출입 금지 통보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은퇴하신 목사가 되에 앉아 계시니 설교가 하기가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말도 아니 되는 이유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교회를 못 나가게 되어 다시 다른 교회를 찾아갔더니 여전히 같은 이유로 갈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원로 목사는 같은 이유로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교회로 예배를 드리려고 갔는데 예배 마친 후에 담임 목사가 예배 후에 새 신자 실로 안내하여 갔더니 “장로십니까? 목사십니까?” 물어서 은퇴 목사라고 하였더니 “다음 주부터 우리 교회에 오지 마세요. 이유는 원로 목사님이나 은퇴 목사님이 뒤에 앉아 계시면 강론하기가 매우 부담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니 원로 목사나 은퇴 목사가 예배는 들여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목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예배 처소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늙은이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심하게 말하면 토사구팽(兔死狗烹)당한 격이다. 이 말은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게 되어 주인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을 때는 버리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 생각나서 사람인지라 섭섭한 감정을, 자제하기가 어렵다.
그러고 보니 어찌하겠는가? 원로 목사나 은퇴 목사들이 모여서 예배할 장소를 마련하고 보니 은목교회(隱牧敎會)라는 교회가 설립되게 되었으니,
비판만 하지 말고 불효자식이 노인들을 서운하게 하여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여 노숙하는 어른들을 생각하고 은퇴한 목회자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한 결과로 생긴 은목교회를 비판하지 말고 관심을, 갖고 위로할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고 바람직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원로나 은퇴 목사들이 품위를 지키지 못하여 교회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푸대접을 받는 것은 원로나 은퇴 목사의 책임이라고 치자 그러나 교회나 젊은 목사들도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은퇴한 목사들을 전염병균(傳染病菌)과 같이 취급한 행위는 결코 정당하다고 할 수 없으니
하나님 앞에서 취할 태도가 무엇인지 반성해야 할 것이고 젊은 목사들도 70 정년 눈 깜짝할 사이에 온다는 것도 잊지 말며 심은 때로 거둔다는 진리를 명심하고 은퇴한 목사를 서운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은목교회(隱牧敎會)가 생기는 이유는 교회와 젊은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도 알고 은목 교회(隱牧敎會) 설립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모세는 말하기를 “우리의 모든 날이 평생이 잠깐만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팔십이라도 그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하였으니 교회와 은퇴 목사들도 곱게 살고 곱게 늙고 곱게 죽을 수 있도록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부언(附言)으로 좋은 교회와 좋은 목사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원로 목사를 부모와 같이 섬기는 교회와 목회자가 있는가 하면 원로 목사를 아버지처럼 모시는 후임 목사도 있음을 말해두는 것이다.
이는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주님의 말씀과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갚으심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기왕이면 교회와 젊은 목사들은 마리아와 같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면 하고 은목교회 설립을 비판하는 것은 삼가기를 바랄 뿐이다. 속담에 “동냥은 못 주어도 쪽박은 깨지 말라”라고 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