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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권위
마 21:23-32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 21:23-32 / [권위에 대한 질문;막11:27-33,눅20:1-8] 예수께서 성전에 되돌아오셔서 가르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며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는지 알려 달라고 추궁하였다. 2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질문에 먼저 대답하면 내가 알려 주겠다. 25) 요한은 무슨 권한으로 침례를 베풀었느냐? 하나님께 받은 권한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받은 권한이냐?'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였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고 하면 그런데 왜 요한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요, 26) 또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라 해도 궁지에 몰리기는 마찬가지일 것이오. 군중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알고 있으니 말이오.' 27) 결국 그들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렇다면 나도 너희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두 아들의 비유]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두 아들을 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가서 `얘야, 오늘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거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큰아들이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후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작은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작은아들은 `예, 아버지,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가지 않았다. 31) 두 아들 중에 그의 아버지에게 순종한 아들은 어느 쪽이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물론, 큰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그 말씀하신 뜻을 설명해 주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분명히 못된 짓만 일삼는다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32) 침례 요한이 너희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였을 때 세리들과 창녀들은 그 말을 들었지만 너희는 듣지 않았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이튿날,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논쟁하는 장면입니다.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3-27)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을 못마땅히 여깁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며,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답을 하는 대신, 요한의 세례의 근원이 무엇인지 반문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원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제사장이 되어야만 했던 인물이지만, 제사장의 길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일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요단 강 근처에서 광야의 선지자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요한의 권위가 하늘이라고 하면 자신들의 불신앙이 문제가 되고, 사람이라고 하면 백성들의 여론이 두렵기 때문에 답을 하지 않겠다는 이들에게 예수님도 답을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28-32) 예수님은 이어서 두 아들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맏아들에게 포도원 일을 시켰지만 맏아들은 일하러 가겠다고 말하고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에게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러자 둘째는 싫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돌이켜서 일하러 갔습니다.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질문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둘째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비유를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적용시키십니다. 아버지 앞에서는 “예”라고 대답했다가 순종하지 않은 첫째아들이 바로 대제사장들이고, 아버지 앞에서는 “아니오”라고 대답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 둘째 아들이 세리와 창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한 세리와 청년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큰아들처럼 말씀을 잘 알고, 잘 실천할 것 같지만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사는데 비해서, 세리와 창녀들은 겉보기에는 말씀과 상관없이 살 것 같지만 오히려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는 삶을 고치고 회개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누구를 더 의롭다 여기시고 복 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적용: 오늘 당신의 신앙은 첫째 아들을 닮았습니까? 둘째 아들을 닮았습니까?
기회는 어떠한 일이나 행동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나 경우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주어지는 기회를 잡으려고 우리는 매우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 기회를 놓친다면 많은 것을 잃게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얻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더 귀한 하나님의 때 그 기회가 은총이고, 축복이고, 생명입니다. 순종의 기회를 주시고 돌이킬 기회도 주시는데 고집부리다가 순종의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모으고, 다시 주신 기회를 잡고 회복의 은혜로 나가는 믿음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하늘에서냐? 사람에게 서냐?
마태복음 21:23-27 / 계강현 목사
오늘 본문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이 나온다
. v23a,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이 말씀에 의하면 누군가 듣는 자들이 있기에 가르치셨을 것이다. 누가 들었을까? 앞부분을 살펴보면 추측이 가능하다.
마 21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고, 백성들이 호산나! 찬송하며 예수님을 맞이했다. 이어서 v12에서부터는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이 나온다. 성전에서 예수님은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났다. 첫째는 장사꾼과 대제사장과 장로들인 종교지도자들이다. 둘째는 눈 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이다. 그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이 뒤를 봐주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은 그들과 한 통속이다. 제사를 이용해서 자기들의 이권을 챙기고 있는 큰 자들, 기득권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상을 다 둘러엎으시고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고 책망하셨다. 반면에 눈 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은 작은 자들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고쳐주자 그들은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또 어린아이들도 호산나 찬송하며 계속 졸졸 따라다녔다. 이런 병든 자, 죄인과 세리와 창기와 어린아이들이 작은 자들이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듣고 있던 자들은 분명히 이런 소시민들, 작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물었다. v23,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권위의 출처, 근거, 방향을 묻는 질문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예수님이 공격하는 것으로 느꼈다. 자신들의 뒷거래에 대해서 지적한 거니까 말이다. 또한 예수님의 기적과 병 고침과 가르침에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것도 이들에겐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자기들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야 하는데, 인기를 다 뺏긴 때문이다. 더구나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먹고 하는 일은 정면도전이다. 이제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이고,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터였다. 그래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심산으로 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때 예수님은 오히려 역질문을 하셨다. vv24-25,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말하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예수님은 대화중에 늘 질문을 적절하게 사용하셨고, 질문의 대가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등의 질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쟁점을 정리하셨다.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며 진퇴양난에 빠졌다. 왜냐하면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그러면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예수님에게 공격당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대답하면, 세례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백성들에게 공격당할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의논 끝에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마치 무슨 청문회에 나온 사람처럼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대답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도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권위자인데, 예수가 백성들 앞에서 무슨 권한으로 성전을 둘러엎고 안식일에 성전에서 병을 고치고 말씀을 가르치느냐고 질문하여 무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고, 비권한자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꼬투리를 잡아 가두려던 참이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의 역질문에 꼼짝달싹 못하고 벙어리가 되어서 유구 무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 부하가 나서 씩씩 거리며 돌아섰다.
결국 하늘에서냐? 사람에게 서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사실상 종교지도자들, 바로 그들에게 너희의 권위는 어디에서부터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너희가 하늘에서냐? 사람에게 서냐?라고 묻고 있다. 이 사건에서 교훈을 얻는다.
1. 종교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을 볼 때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이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 질문과 답변이 하나님에게서 기인하지 않고, 사람에게서 기인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정답인가를 고려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려했다. 진리를 추구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생각보다도,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모르겠다.”고 한 그들의 대답은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전략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기득권조차도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난 것임을 드러낸다. 대제사장직은 세습 직인데, 헬라후기 시대에 어떤 대제사장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셀루오쿠스 왕조의 지배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돈을 주고 제사장직을 샀다는 기록도 있다. 빌라도의 보고서에 따르면, 총독으로 부임 후에 ‘며칠 후 대제사장이 왔으나… 그의 거동은 엄숙하였으나 외식으로 가득 찼으며… 이방인과 먹고 마시는 걸… 율법이 금한다고 변명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신앙심 깊은 체 하는 걸 얼굴을 봐도 알 수 있으며… 자신의 벼슬과 호강을 위해서는 자신의 어머니라도 배신할 자들이었습니다.’라고 적고 있어서 당시 제사장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종교지도자들이 하늘로부터가 아니라, 사람에게서부터 왔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하늘로부터 오신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잡아 죽인 것이다. 마치 그 뒷부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원과 소작인의 비유(vv33-46)에서처럼 말이다. 집주인이신 하나님이 포도원인 하나님 나라를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 짜는 확과 망대를 세우고는 그 포도원을 농부들인 종교지도자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열매를 거두어들일 철이 되어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인 예언자들을 보냈다. 그랬더니 이 농부들인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종들인 예언자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다. 다시 종들을 더 많이 보냈더니 똑같이 했다. 마지막으로 집주인이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면서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농부들인 종교지도자들은 그 아들을 보고 ‘상속자인 그를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하면서 아들마저 잡아서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여 버렸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면서 질문을 던지신다. v40,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때 종교지도자들은 뭣도 모르고 대답했다. v41, “그 악한 자들을 가차 없이 죽이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v43,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에게 복음과 구원이 넘어가는 순간이다.
이 비유를 다 들은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비유의 말씀이 자기 자신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챘다. 그러나 회개하거나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화가 잔뜩 나서는 예수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주위에 무리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것은 무리가 예수를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지도자들은 이번에도 여론과 사람을 의식하고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나 하나님 말씀이나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인기와 돈과 권력을 누리는 기득권에 있는 것이다. 결국 자신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난 자들임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에게 와서 고침을 받은 눈 먼 자들과 저는 자들과 호산나 찬송하며 예수님을 따르던 아이들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다.
2. 우리는 어디로부터 온 자들인가?
우리는 태어날 때 엄마 뱃속에서부터 났다. 그래서 부모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대로 살면 자동 지옥행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거듭났다.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다시 태어날 때 우리가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나는 게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 뱃속에서부터 태어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배도 없고, 그렇게 안 된다. 그래서 영적으로 거듭났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이 우리 속에 쑥 들어오시므로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게 물과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의미다.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도 없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자, 우리는 하나님을 감각하고 느끼는 자가 되었다. 영적인 세계가 열려진 것이다.
요 1:12-13,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는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혈통에서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태신앙인이라고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부모가 잘 믿었다고 자식도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 부모는 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신앙을 전수할 책임이 있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게 하면 안 된다. 자녀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신앙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유아세례만 주고는 방치하지 말고 어떻게 하든 믿음의 사람으로 자식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신앙의 본을 보이며 수시로 체크해야 한다.
또한 육정에서 나는 것도 아니다. 이걸 헬라어 원어에서 직역을 해서 영어로 그대로 옮겨 쓰면 ‘the will of fresh’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육체의 의지력’으로란 뜻이다. 의지력으로,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니란 뜻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 많다. 뭘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한다. 혹시 다니엘 금식이라도 해서 구원받으려고 고행을 하려 한다면 그만 두라! 절대로 그런 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것이다. 우리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저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환영하여 영접했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예쁘게 봐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언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신 것이다. 그야말로 공짜 선물을 주신 것이다. 이걸 알고 나니 감사해서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전도도 하는 거다. 이게 감사해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지만, 아직 내 죄성 때문에 그 하나님 자녀의 능력을 만끽하지 못하니까, 좀 더 하나님 자녀답게 살고 싶은 마음에 다니엘 금식기도도 하는 것이다. 아멘?
또 사람의 뜻에서 나는 것도 아니다. 이것도 헬라어 원문을 직역해서 영어로 옮기면 ‘the will of men’ 사람들의 의지다. 무슨 뜻인가? 사람들이 의지로 시켜서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무슨 말인가? 구원받는 게 누가 시켜서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유아세례 받거나 세례 받거나 그런다고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란 얘기다. 결혼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세례 받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다.
그러면 오로지 우리가 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뭐로 구원받는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다! 바울은 이걸 다른 맥락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구원받는 것 아니다. 너희들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 아니다. 너희들이 할례를 받아서 구원받는 것 아니다.” 이게 똑같은 얘기다.
그래서 내가 가끔 물어본다. “구원 받으셨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전 모태신앙인이에요.” 이건 무슨 얘기인가? 혈통으로! 라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거 말고요. 구원받으셨어요?” 그러면 또 무슨 얘기를 하나 하면 “저는 고등학교 때 세례 받았어요.” 이리로 튄다. 이건 또 무슨 얘기냐? 사람의 뜻으로! 그거 아닌가? 그래서 내가 또 묻는다. “그거 말고요. 구원받으셨어요?”하면 그때는 뭐라고 하냐 하면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거죠.” 이건 또 뭐냐? 육정으로? 그런 얘기 아닌가? 이렇게 “구원받았냐?”는 단순한 질문에 자꾸 다른 답으로 살살 피하는 거 보니까 뭔가? 아직 예수님 영접 안한 거다. 왜 아니라는 것만 골라서 얘기하는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영접한 적이 없단 얘기다.
우리가 구원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뿐이다. 행 4:12,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들, 곧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주신다!” 이게 확실하지 않은 분은 다음 주일에 예수영접모임에 와서 영접하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살아야 한다.
3.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자들처럼 살자.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당위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늘의 권위를 가진 자처럼 살아야 한다. 전에는 사람에게서 난 자처럼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한다. 그게 마땅하다.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그렇게 바뀌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우리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면 마치 여기 종교지도자들처럼 쉽게 되어 버리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게 나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모른다. 안다고 해도 저 종교지도자들처럼 회개하거나 행동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반발하고 역행한다. 양심이 화인 맞은 자처럼 굳어졌기 때문이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생각을 공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채워서 그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내야 한다. 벧전 4:11,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내 안에 오신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가능해진다. 그래서 성령님을 통해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는 것이다. 내 사랑과 지혜와 능력은 한계가 있고, 밴댕이 소갈딱지만하고, 좁아 터졌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은 무한하다. 그래서 내가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성령 충만을 구하며 내 지배권을 그분에게 드릴 때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우리 삶에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말할 때 하나님 말씀하는 것같이 말하게 되고, 봉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자같이 하게 된다. 내가 드러나고 내가 교만하거나 낙심하거나, 자랑하거나 우울해하거나 하지 않고 주님만 드러나고 나타난다. 거만하지도 않고 긴장하지도 않고, 내가 드러나지도 않고 의기소침하지도 않고 주님만 높여진다.
먼저 생각부터 달라져야 한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고 했으니, 성령으로 내 마음의 생각을 다스려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 비판적인 생각이 들면 빨리 분별해서 성령으로 생각을 다스려야 한다. 도둑에게 자기 집 열쇠를 맡기지 않으면서 왜 마귀에게 내 생각의 열쇠를 맡기고 방치하나? 믿음 안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서냐? 사람에게 서냐? 아니면 사단이 준 생각이냐? 이걸 빨리 분별하고 버릴 것 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자들처럼 사고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다니엘 금식기도 첫 날 기도수첩의 묵상이다. 시 42:1-2,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내가 언제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 다윗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져보았나? 세상의 음식(기름진 음식, tv, 인터넷, 게임 등)을 부분 절제했을 뿐인데도 하나님이 배고파지고 하나님의 맛이 느껴지고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감지된다. 금식하며 기도하다 보면 우리 삶에 숨겨진 죄와 온갖 악한 것들을 찾아내도록 도와주신다. 그것들을 철저하게 회개하며 엎드려야 한다. 성경에서 거의 모든 금식은 회개와 관련되어 있다. 거룩해져야 한다.
또한 말이 달라져야 한다. 요즘 변화의 삶(언어의 삶) 공부를 하는 분들이 놀랍게 변화된 말을 하면서 가정이 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말의 성숙이 신앙의 성숙이다. 사람들도 공동체도 말 때문에 무너진다. 예수님도 막 9:23,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말을 그렇게 하지 말라는 얘기다! 말을 바꾸라는 얘기다!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이 말은 우리의 말을 믿음의 말로 바꾸라는 얘기다. 우리 주님이 그걸 원하신다. 말을 반드시 바꿔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말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늘의 언어를 말해야 한다.
최영기 목사의 칼럼에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이란 게 있어서 그대도 인용해서 들려주려 한다. <목회의 성공여부는 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설교도 말이고, 성경공부도 말입니다. 교인들이 담임 목사를 신뢰할지 안 할지를 결정할 때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를 봅니다. 말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말에 관해 몇 마디 조언을 드리려고 합니다.
섬기는 리더가 되려면 명령하는 듯한 표현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하기보다 “이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요청 사항이 있을 때 상대방에게 선택을 주는 표현을 사용하면 더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될까요?” “이렇게 해주실 수 없을까요?” 이런 표현을 사용할 때 상대방이 기분 좋게 요청에 응하게 됩니다.
문자나 e메일로 답신을 하거나, 웹페이지에 댓글을 달 때에 상대방의 진심이나 진정성을 의심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표현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안 믿어집니다.” 등이 예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 같으면 “다시 한 번 점검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면에, 말을 너무 완곡하게 하는 것은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오해의 소지를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단순하고 정확한 표현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고마우면 딱 부러지게 “감사합니다.” 미안하면 돌려 말하지 말고 “미안해요.” 잘못했으면 변명하지 말고 “용서하세요.” 정확하게 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유치한 표현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유행가가 인기인 이유는 유치한 가사가 감성을 터치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의 내용보다 표현 자체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멋져져!(혹은 더 예뻐져!)” 사모라면, “난 다른 목사 설교보다 당신 설교가 제일 은혜가 돼.” 목사라면, “당신 아니었다면 난 목회를 접어야했을 거야.” ‘말’이 ‘사랑의 언어’인 배우자에게는 이런 유치한 표현이 심금을 울립니다.> 아직도 말에 실수가 많다. 말이 바뀌어야 한다.
말이 바뀌면 사람이 바뀐다. 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이 바뀌면 삶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이번에 다니엘 금식기도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말을 바꿔달라고 기도하자. 짜증, 불평, 삐지고 예민한 것, 이게 다 영적 어린아이의 증거다. 회개하며 고쳐 달라 기도하자.
기도도 다름 아닌 말이다. 이번 다니엘 금식기도 제목이 무엇인가? 질병의 치유, 술 담배 끊기, 새로운 길 열림, 재정적인 해결, 기도응답 다 좋다. 그러나 꼭 기도해야 할 것이 있다. 원수의 공격을 이겨내고 영적능력의 회복을 통해 목장의 영혼구원의 물꼬가 터지고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하자. 목장에 안 믿는 남편들과 VIP를 위해 꼭 기도하자. 나라와 민족과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하자.
더 나아가서 행동을 바꿔야 한다. 금식 기간 동안 늘 물통을 가지고 다니며 마시고, 배고파서 힘이 없다고 움츠려 있지 말고, 가벼운 산책을 해보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가 용서의 말을 전하고, 미워하던 자를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작은 몸짓이라도 해보라. 얼굴 표정을 바꾸라! 기독교인은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 남이 불편해할 표정을 삼가라. 미소를 띠고 남을 편안하게 해라. 행동은 표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술 담배에 절어있던 몸, 오락과 게임과 일락과 일과 돈과 연예와 관계의 중독에 대해 “No!”라고 외치고 그렇게 행동을 바꿔 21일 동안 습관을 만들어 보라. 매일 세상 것으로 채워있던 내 마음과 몸에 주님 말씀과 기도와 찬송으로 채워보자. 그러기 위해서 부지런히 교회를 오고가자. 삶의 현장에서 배는 고프고 몸은 힘들지만,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을 찾아 구제하고 섬기자. 내 몸을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사용해보라. 내 작은 은사를 가지고 남을 섬길 때 거기서 행복이 찾아온다. VIP를 위해 기도하면서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즉각 순종해보자. 섬김과 사랑으로 문자와 전화 만남과 교제를 가져보자. 말로만 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보자. 목장을 통해 영혼구원, 제자 만들어 신약교회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부흥시키는 일에 내 생애를 드리자.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처럼 변화되는 이번 금식기도가 되게 하자. 성령께서 우리를 힘껏 도와주실 것이다. 능력과 축복과 하늘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아멘.
이름을 바꾸든지 행실을 바꾸든지
마 21:23-32 / 임현수목사
사람이 행실을 바꾼다고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행실이라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된 것 이기 때문 입니다. 위대한 교육학자인 [호레이스 만]이라는 사람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습관은 밧줄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습관이란 밧줄을 매일 짜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짜여진 습관은 절대로 파손되지 않는다.’ 습관은 고쳐질 수도 있지만, 응급 처치하는 식으로 짧은 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교회 생활의 습관도 고치기 힘이 든다는 것이 저의 목회 경험입니다. 교인의 유형을 유머있게 표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것 같습니다. 평생 인력거 교인들도 있습니다. 언제나 식구들에 의해 마지못해 끌려오는 교인입니다. 평생 꽈배기 교인도 있습니다. 교회 나와서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다,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지루하다고 몸을 비비꼬면서 안절부절하는 교인입니다. 이것도 습관화된 경우입니다.
평생 나팔꽃 교인으로 살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기분이 좋아야 아침예배에 반짝 나오는 교인입니다. 또 평소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던 사람인데 교회가 시험이 들면 갑자기 앞장서서 휘젓고 다니는 전투형 교인도 있습니다. 평생 유람선 교인으로 사람도 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 등록도 안 하고 떠 다니는 교인도 있습니다. 평생 묵상교인으로 예배시간 내내 조는 교인도 있고 무엇이 그리 기분 나쁜지 인상만 쓰고 앉아있는 저기압 교인도 있습니다. 국회의원 스타일의 교인도 있습니다. 항상 가족대표로 혼자만 나오는 교인입니다. 그런데 이런것도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 입니다. 신앙생활의 패턴 조차 바뀌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1920년 인도에서 선교하던 싱 목사님은 부부의 간증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캘커타에서 서남쪽으로 100Km 떨어진 한 작은 마을에 전도하러 갔다가 한 동굴 속에서 두 마리의 이상한 늑대를 발견하고 잡았습니다. 그런데 두 마리의 늑대를 자세히 보니 늑대가 아니라, 인간이었고, 어린 여자 애들이었습니다. 어린 것들이 어쩌다 어머니로부터 버려져 늑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고, 늑대들과 함께 살고 늑대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싱목사님 부부는 이 어린 여아들을 데려다가 한 아이는 '아마라', 한 아이는 '카마라'라고 이름을 붙여주고, 한 고아원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키우면서 인간으로 환원시켜보려고 무진 애를 쓰며 정말 애정을 가지고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끝내는 인간으로 환원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이 야생아들은 항상 네 발로 뛰어 다녔으며, 두 발로 일어서는 것은 어쩌다가 일어나는 우발적인 현상에 불과 하였고, 음식을 주면 그냥 입으로 먹었습니다.
비바람이 불면 밖으로 뛰어나가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두 아이들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렸을 때에 누구를 바라보고 자랐느냐, 누가 길렀느냐, 어떤 환경에서 자라났느냐 하는 것으로 그의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짐승속에 자라면 짐승같이 된다는 무서운 교훈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신분이 있고 행위가 있습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살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될 줄로 압니다. 그런데 성도라고 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보면 너무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보고 스스로 실망 할 때도 많습니다. 거의 습관이고 운명입니다. 우리는 성도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소행 하나하나에 따라서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기도 하고 영광이 돌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유의 말씀입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습니다. "예, 가겠습니다"하고 아주 정중하게 쉽게 대답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아들에게 가서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했더니 이 아들은 자기가 무엇이 해야할 일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못가겠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에 생각하니 잘못된 것 같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이 비유 가운데 아들이 셋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 입니다. 하나는 가겠다 하고 안가고 또 하나는 안가겠다 하고 가고 그런데 세 번째 아들이 나타나더니 '"가겠습니다"하고 가는 아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런 아들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셋째아들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정말로 합한 그런 아들은 없습니다. 이미 없습니다. 이미 망가졌습니다. 이제가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둘 중의 하나이지 셋째는 없다는 것 입니다. 그러면 이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제라도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그 둘째아들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현대인들을 향한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맏아들은 다분히 처세적입니다. 그는 체면과 위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할 때에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지 아니하려고 "네"하고 대답합니다. 아주 공손하게 말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처세적입니다.
순종하는 것 같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좋은 맏아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지식으로는 순종하였습니다. 말로써는 순종하였습니다. 형식적으로, 예절로써는 순종하였습니다.
아마, 누가 묻는다면 대답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노인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릴 수가 없어서 간다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효도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보면 한다고 하면서 하지 않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면서 거룩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봉사한다고 하나 말뿐입니다. 준다고 했지만 무엇을 준다는 말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하고 그저 허세와 허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한 것도 없는데 다 된 것처럼 적당히, 적당히 넘어갑니다. 훌륭한 것 같으나 실상이 없습니다. 내실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시겠습니까?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그 많은 날 간다 간다고만 했지, 간 일이 있느냐고, 한다 한다고만 했지 한 일이 있느냐고, 항상 맹세하고 결심만 했지 무엇을 했습니까? 이것은 아주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본문 앞에 나오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은 모습입니다.
자, 오늘 둘째아들을 좀 볼까요? 이 둘째아들은 아주 정직한 사람이고 솔직한 사람입니다. 무슨 자기가 하려고 계획했던 일이 있었던가 본데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니
까 "안가요" 그랬습니다. 정직하지 않습니까? 또 정당하기도 합니다. 안가겠다고 말하고
안가지 않았습니까? 잘못이 없습니다. 이것이 둘째아들입니다. 그러나 문제 있습니다. 이
아들은 뒤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뉘우친다는 말은 메타노이오입니다, 회개입니다. 뉘우쳤
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총주제요 핵심이 뉘우친다는 것입니다. 뉘우침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뉘우친다는 말은 생각의 발상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못 가겠다
고 했습니다. 못 가겠다고 하고 안 갔으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뉘우쳤습니다. 지금
까지 옳다고 했던 일이고 나는 정당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내 생각이고 나만 생각을 한 것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생각해야 되는데 나, 에고이즘, 에고이스트, 에고센트릭, 자기중심적이 생각이었다. "아, 그게 아니지" 뉘우쳤습니다.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생각을 바꾸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이 둘째아들은 안 간다고 했습니다. 안 갈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이고 아버지의 뜻이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뉘우치고 갔다고 했습니다. ‘뉘우치고 갔다. 뒤에 뉘우치고 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결국은 뉘우침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뉘우칩니까? 얼마나 생각을 바꾸어가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발상의 전환을 이루고 있습니까? 내 뜻에서 하나님 뜻으로, 내 생각에서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좀 붙잡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확실히 붙잡아야 될 신앙의 바탕을 먼저 확인해야 되겠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욕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기어코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어코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해야 이제 제데로 믿음의 길에 들어선 것 입니다. 내뜻이 이루어 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참 감사해야 될 것이 교회나 가정이나 이 땅이 저와 여러분의 소원대로 이루어졌다면 세상은 벌써 몇 번 망해도 망했을 겁니다. 교회도 몇 번 이상해져도 이상해졌을 겁니다. 역사를 보면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요셉이 정말 훌륭한 사람인 것은 요셉은 일평생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뜻이 서 있었다는 것 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신뢰했고 그 뜻을 기다렸고 그뜻을 추구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뜻이 중심에 있었습니다.다윗도 절실하게 고백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역대상 29장 10절부터 쭉 나와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귀와 명예와 높게 하심과 낮게 하심, 권위 힘 등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이 되는 과정에서도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주권 만을 바라보며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다윗에게 내 마음이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 보시면 교리를 쭉 설명하고, 그 교리 마지막 부분에 가서 너무 감격스러움 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찬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고백이고 찬양입니다.
사울은 이것을 몰라 가지고 일평생 고생하다가 죽었어요. 다윗은 이 사실을 진작 알았을 때에 얼마나 평안했습니까! 도망치면서도 평안했어요.
아브라함도 반평생을 고생하고 난 후 이것을 깨닫습니다. 어느덧 하나님의 뜻, 그 영광스러운 역사를 바로 붙잡고 이삭을 바치고 난 후에 여호와 이레! 아브라함의 가는 곳곳마다 다 준비해놓은 사실을 보게 된 것을 우리가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위대한 음악가들도 헨델이라든가, 그 다음에 유명한 그림 그렸던 다빈치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엄청난 축복의 걸작들을 남긴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외환은행에 볼일이 있어서 갔어요. 우리 진화영집사님이 지점장으로 계시기 때문에 인사하려고 2층에 올라갔습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러면서 커피 한 잔 주셔서 잠간 얘기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왔습니다!' 하니까, 어떤 분에게 지시하니까 서류를 다 해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 되었습니다!'
몇년 전에 한국에서 비행기 타려고 공항에 갔는데 어떤 사람들이 영접 나왔어요. 알고 보니까 김포 세관장입니다. 그 분이 저를 세관장 실로 데려갑니다. 거기서 차 한잔 하는 동안 서류는 알아서 다 처리해 주더라구여. 사실은 제가 그 분의 도움을 받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매형 친구가 되어서 세관장실에 한번 들어가 본 것 인데 이런 사람을 안다는 것이 참 편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때에 뭔가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어야 됩니다. 은행 안에는 지점장이 최고입니다. 세관에서는 세관장이 최고입니다.
어느 정도 마음대로 할 수 있더라구요. 하물며 역사의 주인이시오. 지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분을 내가 아는 만큼, 그래서 주님 앞에 나갈 때에, '아, 왔냐! 가만히 있거라! 내가 다 해주마!' 이 사실을 아는 만큼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모세가 뭐라 그랬습니까? 위기 속에 있을 때에, 너무 위급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이 없어졌을 때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오늘날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구원하시는 것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리라!' 신나는 일 아닙니까! 이래도 모를 겁니까? 이래도 외면할 겁니까? 이래도 '내가 하겠다!' 그러고, 이래도 '내가 뭘 이루겠다'고... 이것보다 더 미련한 것이 없어요. 여러분 미련하다는 것이 뭡니까? 여호와를 없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성경은 미련하다! 그랬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뭐라 그랬어요? "확신하노라!"
다만 뭐만 회복하면 됩니까? 믿음의 회복입니다. 확신의 회복입니다. 관계..유명한 버나드 로너간(Bernard J.F. Lonergan) 이라고 하는 신학자의 Method in Theology라고 하는 책에서 그럼 회개란 무어냐? 세 차원에서 오는 것이다. 첫째, 지성적 회개가 있습니다. 깨달음, 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에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 다음에는 도덕적 회심이 있습니다.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것이 소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의 가치관을 바꾸십시오. 도덕적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서 성전을 깨끗이 하게 될 때에 제사장들이 우르르 나와 도전적으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데 놀랍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살아남기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당시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이 제사장 앞에서 하는 말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
이렇게 말하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세리와 창녀가 너희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 왜? 너희는 뉘우침이 없고 위선에 빠져있지만 이 사람들은 비록 세리와 창녀이지만 뉘우침이 있다. 마태는 뉘우치고 내 제자가 되었다. 삭개오도 뉘우치고 내 제자가 되었느니라.
저 창녀도 뉘우치고 제자가 되었지만 너희들은 끝까지 뉘우칠 줄을 몰라. 그런 고로 창녀와 세리가 너희 제사장들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 얼마나 굉장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얼마나 뉘우칩니까? 계속적으로 뉘우치고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평생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더라도 오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뉘우치고,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야합니다. 거기에 주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창기냐 세리냐를 묻지 않았습니다. 뉘우침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 문맥 속에 숨겨진 깊은 또 다른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없으나 원칙적으로는 마땅히 있어야 할 제3의 아들을 생각합니다. 가겠다 하고 가는 아들이 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실 이런 제 3의 아들을 기다리시는 것 입니다.
오늘 말씀은 행했느냐 행하지 아니 하였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작은 아들과 큰아들의 대답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셨던 것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해 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십니다
(약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하십니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고 하십니다
잠언 20장 7절에서는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완전히 행하는 자 그들이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믿고 행하는 자, 즉 믿음과 행함이 일치한 자가 될 때 옳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여야 할 일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장34절에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사랑은 주님의 새 계명인 동시에 최고의 계명인 것입니다.(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되 진실히 사랑해야 합니다 요일 3장 18절에서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엡 3장 17절 18절에서는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길이와 높이와 넓이를 깨달으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기를 우리에게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지 아니합니다
(요일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고 하십니다
우리의 행할 바는 거룩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나 또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는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롬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고 합니다.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과 마음 속에 틈타는 것들을 막지 못하면 결코 거룩한 자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됩니다.
(막 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막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막 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거룩함의 목표는 하나님이십니다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하시고(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시니(엡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는 말씀대로 거룩함을 이루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회 근처에 사는 슈퍼마케트 주인이 그 구세군 교회에 새로 부임한 사관님의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했습니다. 한번은 손님이 그 주인에게 "지난 주일에 사관님께서 무슨 설교를 하셨길래 말씀을 잘 하신다고 그렇게 칭찬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저는 바빠서 교회에 나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사관님 칭찬을 다 하십니까, 무슨 이야기라도 들으셨습니까?” “아니요. 그 사관님이 새로 온 후로부터 교인들이 외상값을 아주 잘 갚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바꾸던지 행실을 바꾸던지 해야 합니다. 말과 행실과 믿음과 사랑과 정절에 대해서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화과나무를 향한 기대
마 21:18-22 / 문기태목사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버틀란트 러셀이 쓴 책 가운데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무화과나무를 예수께서 저주하신 이 사건을 예로 들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꼭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분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그런 최선의 신앙이라고 우리가 말하기는 어렵다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버틀란트 러셀은 매우 탁월한 철학자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가 매우 무지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그는 성경을 이해하는 일에서 그가 실패하였습니다. 첫째는 그가 팔레스타인에서의 무화과나무의 생태를 이해하는 일에서 그가 무지했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는 예수께서 왜 이런 기적을 행하셨는가? 그 기적의 의미를 그는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가지면에 저는 그 분의 성경적 무지, 다른 면은 뛰어나지만 그 면에 대해서는 그 분이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첫째로 그는 이 무화과나무의 생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본문을 피상적으로만 들여다보면 러셀의 말이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돼요. 왜냐하면 여기 19절에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자, 무화과나무가 있고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시장했고. 그래서 나무를 향해서 접근해 가 보셨더니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절에 예수께서 나무보고 "이제부터는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하고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을 다룬 마가복음 11장 13절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무화과 때가 아니었다. '아니, 무화과나무 때도 아닌데 가서 열매를 기대했다가 열매가 없다고 그래서 이 나무에서 다시는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다니 말이나 되느냐?' 얼른 피상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 무화과나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본격적인 무화과나무의 추수기는 6월이나 7월경입니다. 그 때까지 본격적으로 무화과나무가 많은 열매를 냅니다. 그러나 이 무화과나무는 좀 더 이른 시기에, 봄철에 이른 무화과나무 열매를 맺기도 하고 좀 늦은 시기에, 가을에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이른 무화과나무의 열매의 경우에는 3월이나 4월에도 열매를 맺어요. 3월에도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얼마든지 먹을 수가 있어요. 그런가 하면 한 9월이나 10월에도 얼마든지 따먹을 수가 있습니다. 늦은 무화과나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일년에 세 차례씩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것이 무화과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 열매는 먼저 잎사귀를 냅니다. 그런데 잎사귀가 나면 열매가 있어요, 거기에. 다른 나무와 달리 잎사귀가 있으면 무화과나무는 이미 열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의 아주 독특하면서도 일반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잎사귀가 있으면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잎사귀가 있으니까, 이 때도 무화과나무 열매가 있으니까 그것을 기대한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상식적인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열매가 없었단 말이지요.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의 잎파리가 있으면 열매가 있는 법인데 열매가 없었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나무, 이것은 어쩌면 창조주의 기대를 벗어난 열매를 맺어주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나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하등의 비상식적이라고 할 이유가 없는 그런 사건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기적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이 나무를 도대체 왜 저주를 하셨느냐? 어떤 뜻을 가지고 했느냐?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기적들을 공부해 보면 그 기적은 기적 자체에 중요하지 않아요. 그 기적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기적을 가리켜서 복음서는 아주 독특한 표현을 쓰는데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기적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어떤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래 히브리사람, 이스라엘사람들은 때로는 괴팍하기조차 하는 기이한 행동을 통해서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교훈을 전달하는 민족적인 하나의 교수의 방편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기괴한 행동은, 행동 자체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행동을 통해서 저 사람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하느냐?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그런 사례가 성경에는 굉장히 많아요.
자, 예수님이 어느 날 지나가던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하셨습니다. 도대체 이 사건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는 메시지는 도대체 뭘까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세 가지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누구시냐?를 전달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자, 도대체 이 행동이 예수님의 무엇을 전달하고 있습니까? 나무보고 길거리를 지나가다 나무보고 나무여! 열매를 맺지 못할지어다. 나무가 말을 들었다는 얘기예요. 도대체 이 분이 누구예요? 이 분이 한 마디 말하면 나무도 복종하는 분, 그리고 나무에 대해서 이 분이 감정이 안 좋았단 말이지요. 정상적인 나무라면 자, 잎파리를 내고 있으면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너는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앞으로 돼도 마땅하다.' 라고 명령하시는 이 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바로 이 나무를 만드신 분, 그리고 나무를 다스리는 분 그리고 나무가 창조주의 기대를 저버렸을 때 그 나무를 심판할 수 있는 분, 메시지가 뭘까요? 예수는 창조자시다. 예수는 섭리자시다. 그리고 예수는 심판자이시다. 바로 이것이 메시지예요.
예수는 창조자요, 섭리자요, 심판자이십니다. 식물만 그랬나요? 여러분,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가다가 파도가 일어나니까 어떻게 하셨어요? 파도여, 바다여 잠잠할지어다. 파도도 바람도 이 분에게 복종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묻잖아요? 도대체 저분이 누구냐? 저 분이 뉘시기에 바람과 파도도 복종하는고? 이 바람과 파도를 만드시는 분, 그리고 이것을 다스릴 수 있는 분, 창조의 어떤 뜻을 가지고 이것을 섭리할 수 있는 분, 그는 창조자, 그는 섭리자. 이것이 메시지가 아니겠어요? 또 뿐만 아니라 어느 날, 귀신들린 사람보고서 그 안에 귀신을 향해서 명령합니다. 나와라! 그러니까 귀신이 나와요. 그 다음에 돼지떼에 들어가라! 하니까 돼지떼에 들어갔어요. 돼지떼가 막 귀신이 들어가서, 물 속에 들어가서 몰사하는 그런 장면도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죠? 도대체 영들을 부리시는 분, 그는 누구일까요? 영들을 지은신 분 그리고 영들을 심판할 수가 있는 분 그는 창조자, 그는 심판자입니다.
오늘 이 무화과나무의 사건을 통해서도, 그가 한 번 말을 하면 식물도 복종합니다. 식물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는 창조자예요. 그러나 만들고 손 떼는 분이 아니라 여전히 그 만드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분, 그리고 그 만물이 창조주의 의도를 거스릴 때 그 만물을 심판할 수 있는 분! 정신차리세요, 여러분! 우리가 이 만물을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심판하시던 그 분이 바로 나도 하나님의 의도대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을 여러분 믿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믿으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면 그런데 내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네, 그러면 우리를 심판할 수 있는 하나님이죠. 그렇지요?
심판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는 나를 창조하신 자, 나를 다스리고 섭리하는 자, 그리고 내 인생이 그 분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 나를 심판할 수 있는 분, 예수는 창조자 심판자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이스라엘의 내용없는 형식뿐인 종교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 메시지를 계시하는 거예요. 내용없는 형식뿐인 종교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제일 많이 이스라엘 민족을 비유하는 상징으로 씌여집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나무로써 씌여집니다. 자,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가 어떤 나무였어요? 잎파리가 있었어요? 네, 잎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없었어요? 열매가 없었어요. 잎파리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던 나무, 그것이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민족,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의 상태가 바로 껍데기만, 잎파리만 있었고 내용이 없었습니다.
형식이 옷이라면 내용은 몸과 같은 것입니다. 밥그릇과 밥과 같은 것입니다. 옷이 더 중요합니까? 몸이 더 중요합니까? 옷이 중요하지만 몸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아무리 비싼 옷이라도 그 옷을 사람이 입어야 멋이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신앙이 내용없이 껍데기만 있어서는 심판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남의 얘기일까요? 어쩌면 오늘 우리를 보고서 어떻게 말씀하실까? 자, 예배는 드려요. 열심히 예배는 드려요. 찬양도 곧잘 해요. 자, 설교도 곧잘 들어요. 자, 누가 보아도 우리는 종교 형식에 어느 정도 잘 적응하고 있어요. 자, 이것은 형식이예요. 여기까지는 다 형식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도 중요해요. 예배를 잘 드린 것도 참 중요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어떻게 달라지느냐?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느냐?입니다. 자,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참된 예배를 드렸냐는 것은 예배 시간 가지고는 몰라요. 예배가 딱 끝나고 나가면서, 나가면서 저 주차장에서 차를 운전하는 태도가 얼마나 달라졌느냐? 은혜 받고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나는 이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 하나님 말씀을 받았으니까 이 말씀대로 살겠다. 결심하고 돌아가면, 돌아가면서 좀 변화가 나타나야지요.
주차장에서 옛날보다 좀 더 친절하고 감사할 줄 알고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운전하며 돌아가다가 누가 갑자기 살짝 끼어듭니다. "어 저새끼 죽을라고 환장을 했나?" 하고 욕이 튀어 나오면 예배를 드린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양보해 주고 손을 흔들어 주면 예배를 드린 효과가 만점인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신앙 생활이 제대로 되야 합니다.
그 다음에 집에 돌아가서, 가정에서 남편을 향해서, 아내를 향해서 어떤 태도로 대하십니까? 은혜받은 사람답게 내가 내 아내 사랑해야지, 남편 사랑해야지, 내가 자녀를 더 사랑해야지, 내가 먼저 용서해야지, 내가 더 많이 이해해야지, 우리 가정을 진리의 말씀위에 세워야지 하십니까? 거기서 나타나십니까? 예배의 결과가?
또 내일 아침 직장에 가십니다. 오늘 주일 날 와서 은혜받았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답게 나는 비전을 얻고 용기를 얻고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직장 생활할 때 태도가 달라져야지요.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빛을 드러내고 소금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직장생활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내용이예요. 그것이 없다면 뭡니까? 잎사귀뿐. 잎사귀뿐. 그러면 어떡할까요? 하나님이 보시면서, 너는 맨날 잎사귀만, 잎사귀만 만드는구나. 내용이 없구나. 어떻게 할 수가 있어요? '너 인생 끝내라!'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심지어는. 주님의 기대대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의도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것이 이스라엘 종교의 모습이예요.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신앙의 본질, 예배의 본질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결과로써 내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안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얼마나 주 앞에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느냐? 입니다. 저는 저의 가장 커다란 관심이 우리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삶이 얼마나 변화되는가?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하나님의 변화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대로 사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의 유일한 관심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우리의 삶이 만약 껍데기만 내비치는 다시 말해서 무화과의 잎파리만 무성한 삶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엄숙한 경고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용없는 형식뿐인 종교, 그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이 말씀속에서 사랑하는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아픈 마음으로 전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의 행태속에서는 어떨까요?
형식은 있어요. 이미 예배당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여러분들에게 형식은 있습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얼마만큼 우리는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예배를 드리는 형식속에 얼마나 경건함이 담겨 있나요? 직분을 받아 봉사하는 형식속에 얼마나 겸손과 사랑이 담겨 있나요? 기도를 드리는 형식속에 얼마나 믿음이 담겨 있나요? 드려지는 헌금속에 얼마나 주님을 향한 감사가 담겨 있나요?
3. 제자들에게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시각적으로 별로 아름다운 나무가 아닙니다. 별로. 또 이것은 무슨 땔감이나 재목용, 건축용으로는 전혀 씌여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꽃도 별로예요. 무화과나무는 꼭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무엇일까요? 열매입니다. 열매를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자, 저와 여러분. 크리스챤들이 존재하는 목적,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는 목적, 우리가 살고 있는 유일한 목적은 꽃을 위해서가 아니예요. 폼 잡을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뭘까요?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열매, 그 열매를 통해서 주께 영광을 돌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열매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지요. 용서받았으면 용서의 열매를 맺어야지요. 긍휼하심을 입었으면 긍휼의 사람이 되어야지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으면 겸손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어야지요. 열매는 다 어디 갔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간곡하게 말씀한 바 있습니다. 10,000달란트라고 하는 빚을 진 사람이 있더라. 아무리해도 갚을 길이 없어서 어려운 것을 알고, 그 주인이 탕감해 주었대요. " 탕감해 주노라." 이 분이 감사, 감사 해가지고, 감지덕지하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가는데 자기에게 빚진 사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대요. 이 사람을 붙들고 "갚으라" 갚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겠다고 감옥에다가 쳐 넣었대요. 이 소식을 이 주인이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가 10,000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는데, 네가 그 100데나리온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 내가 너를 긍휼히 여겼으면 너도 남을 긍휼히 여기는 열매를 맺어야 될 것이 아니겠느냐?" 10,000달란트는 백억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100데나리온은 2만원정도에요. 그건 오십만분의 일이요. 이 엄청난 죄를 용서받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누구를 정죄하는 것이요? 누구를 비판하겠다는 거예요? 긍휼하심을 얻은 사람은 긍휼의 열매를 맺어야지요.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원수사랑을 받고 내가 구원을 받았거든 내가 어떤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겠단 말이에요? 당연히 용서하는 열매를 맺어야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오늘 내 신앙이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교회 나온지 몇 년 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어떻게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신앙생활의 연륜은 계속되고 있지만 열매맺지 못하는 사람, 무력한 삶,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을 사는 내 모습은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 실패하고 또 넘어지고 왜 이렇게 무력할까요? 왜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김익두 목사님이 여름에, 초여름에 모내기 할 때, 어떤 마을을 지나가노라니까 모내기하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는 거예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분입니다. 가까이 가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랬대요. 밥먹던 청년 하나가 나오더니 "목사님, 이 마을에서는 전도 안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요?" "몇 일 전에 비가 오고 바람이 치고 벼락을 때렸는데, 이 동네 한가운데 있는 서낭당 나무를 때렸어요. 저 가지가 부러졌어요, 불타고. 또 바위를 때려서 바위가 무너지고요, 논바닥을 때려서 논바닥이 푹 패였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아니, 나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 바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왜 저건 때렸습니까? 아, 하나님이 안 계시던지 계시다면 장님이든지 그럴 거"랍니다. 아, 목사님이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요. 그래서 돌아서서 본인이 기도를 했대요. '하나님, 지혜를 주십시오'했더니, 하나님이 지혜를 주더랍니다. 그래서 "자네 학교 다닐 때 서당에 다녔나? 학교 다녔나?" "학교 다녔습니다." "선생님의 손에 무엇이 있던가?" "아, 막대기가 있지요." "그 막대기는 무엇에 쓰는 것인가?" "아니, 흑판도 땅!땅! 때리고, 책상도 땅!땅! 때리고 뭐, 그런 거죠." "흑판이 무슨 죄가 있나?, 책상이 무슨 죄가 있기에 책상을 치나?" "아 그거야 졸지 말라고……." "이놈아! 지금은 바위를 때렸다만은 다음에는 네 머리를 친다" 그랬더니 "아이고, 아이고,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 청년이 예수를 믿고, 그것이 중심이 되어서 거기에 교회를 세우고, 그 사람이 장로가 되었답니다.
여러분, 대신 친다는 걸 잊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람, 당신을 칠 것인데 열매 없는 당신을 쳐야 할 것이지만은 지금 간접적으로 누군가를 쳤어요. 내 대신 누군가가 매를 맞고 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열매 없는 세계를 향해서 말입니다. 길가에서 잎만 무성해서 많은 사람에게 실망을 주고 있는 무화과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어요. 위선이 심판을 받는 시간입니다.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무서운 경고를 듣고 우리는 새롭게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충성과 진실, 감사에서 감사로, 사랑에서 사랑으로, 은혜에서 은혜로, 아름다운 열매를 이제는 맺어야만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열매 없는 우리를 향하여 오래오래 참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원컨대 이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인격에 생활에 사회에 확실하게 그 크신 은혜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게 하소서. 모든 실망을 거두고, 이제는 충만함과 감사와 은혜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확신에 찬 믿음의 기도
마 21장 21절-22절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확신에 찬 믿음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항상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성전에 나온 성도들의 특권이요 의무인 것입니다. 옛날에 제사장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일을 맡았는데 예수 믿는 우리들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마땅히 우리의 생활 전체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을 생활의 습관으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많으므로 응답받는 기도를 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우리가 하겠다고 결심하면 언제나 하는데 응답받는 기도는 꼭 응답을 받아야 되므로 마음속에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응답받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무신론자나 인본주의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함으로 기도하지도 않고 기도해도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갑자기 급하면 아이구 하나님, 날 도와주소. 그렇게 외치는데 그것은 수식어에 불과하고 아무 도움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시편 10편 4절에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야훼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안 믿는 사람 생각 속에 하나님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고 하나님은 아무 관계가 없는 상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지 않습니다.
시편 53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신본주의자만이 참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돌보시는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가운데 우주 만물을 변경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값 주고 사신 존재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였고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문제를 감당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께 나가서 일을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 일을 만들어 성취하는 야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만 일한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지을 때만 하나님이 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고통당할 때 그 일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의 자질구레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못할 일이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만사형통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는데 믿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가 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해요.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모르겠다. 이렇게 희미한 태도를 취하면 안돼요.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시고 그를 찾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이시라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97편 9절에 “야훼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
모든 신보다 위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왜 가지고 계십니까? 주님이 그냥 가지고 놀려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돕기 위해서 권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주의 백성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주님이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미래도 알고 계시며 우리 마음속에 깊은 것까지도 다 살펴서 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일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며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생각하면 기적의 하나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4백 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 아무 군대도 없고 아무 수단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애굽의 수많은 군사들과 병거를, 그 압제를 피해서 나올 수 있도록 홍해수를 갈라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강이 갈라집디까? 한강이 저절로 쫘악~ 갈라진다면 중대한 사건이지요. 그런데 홍해바다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런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르광야에 왔을 때 사흘 길을 걸어가다 물을 얻지 못하고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한 두 사람 위한 것이 아니라 3백만이 물을 마셔야 되는데 그 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마라에 왔을 때 물을 발견했는데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부 물을 마셨으나 써서 토하고 뒹굽니다. 그때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이 나뭇가지를 지시하신지라 그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저는 이 성경구절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쓴물이 달아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던지니 물이 달아졌더라. 우리 오늘날 인생을 살면서 너무나 쓴물을 많이 마십니다. 미움, 분노, 질투, 시기, 분노, 절망, 좌절 이런 분노가 우리 몸속에 들어왔는데 이것을 삭이지 못해요. 사람들이 마음에 분노를 가지면 이것을 삭여야 되는데 삭이지 못해요. 그 분노를 가슴속에 품고 있으니 쓴물이 자꾸 솟아오릅니다. 그 쓴물을 마시고 나니까 점점 더 마음이 악화되고 미워지고 낙심되고 좌절됩니다. 그래서 가정이 파괴되고 생활에서 서로 물고 찢는 것입니다. 이 쓴물을 달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나무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끌어안고 기도하면 마음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해보시면 압니다. 저는 마음에 분노가 생기면 성경 말씀에 분을 내어도 그 분을 하루 종일 품지 말라고 말했었습니다. 해가지기까지 분노를 품지 말라고 말했었습니다. 꼭 예수 십자가 밑에 나가서 고백하고 하나님 도와달라고 하면 마음에 쓴물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분노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쓴물을 달게 만들어서 마시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 또 보십시오. 3백만이 광야를 지나가는데 40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고 거두어드릴 것도 없는데 먹고 사는 것은 매일마다 양식이 하늘에서 비와 같이 쏟아졌습니다. 이것 믿지 않는 사람은 미친 소리 같습니다. 매일 아침에 만나가 비와 같이 쏟아져서 그것을 거두어서 하루 동안 먹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40년 광야생활 동안에 만나가 쏟아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추라기도 와서 비와 같이 진중에 떨어져서 고기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 그들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목이 마를 때 바위를 치니 바위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리고성을 엿새 동안 돌고 일곱 번째 고함을 치니 무너졌습니다. 요단강도 갈라졌습니다. 이러한 기적의 하나님을 우리는 알아야 우리 기도가 응답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에 비교하면 우리의 간구는 요것만합니다. 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은 조그마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으로 진행되고 믿음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육감인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믿음을 가지고 태어났어요. 믿음을 사용할 때가 오면 사용해야 돼요.
미국 어느 지방 도시에 비가 안 왔습니다. 날이 매일같이 맑고 해가 비치니 곡식이 다 말라 죽고 채소가 다 말라 죽고 주민들이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들이 다 울고 불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아무 효과가 없어서 목사님이 온 동리의 사람들을 다 교회로 청해서 비 오기 위한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는데 엘리야가 기도하니 갈멜산에서 비를 내린 것처럼 비를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께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비를 줄 것이니 믿음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온 동리 사람이 다 나왔어요. 나와서 하루 종일 하나님께 엎드려서 기도를 했는데 아 오후가 되니까 하늘에 먹장 구름이 덮더니 번개가 치고 뇌성이 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부 다 박수를 치고 할렐루야를 하고 그런데 집에 돌아가려고 밖에 나오니 비가 그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중에서 조그마한 교회학교 어린 소녀가 우산을 쫙 펴더니만 딱 들고서 혼자서 걸어갑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하는 말이 오늘 이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 저 소녀밖에는 믿음으로 기도한 사람이 없다. 전부다 비가 올 줄 알았으면 우산 준비하고 와야 되는데 한 사람도 우산 준비하지 않는 것은 정말 비가 올 것이냐 안 믿었다. 그런데 저 소녀는 믿고 왔다. 그래서 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우산을 가지고 왔지? 목사님이 비 온다고 했잖아요. 비 오면 옷 젖으니까 우산 가지고 왔지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날 비가 온 것은 그 소녀 한 사람 때문에 비가 왔지 다른 사람들 때문에 비를 준 것은 아닙니다. 믿으면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적인 신앙을 회개하고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 내가 모든 일을 해결하겠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이 기적을 행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했는데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라. 악한 길이 뭡니까? 악한 길은 자기가 자기 주인 노릇하는 것이 악한 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반역해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지배하며 살겠다고 하는 것이 악한 행동인 것입니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다. 복 있는 자는 인본주의적으로 서고 자기 중심으로 서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여러분 악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하고 하나님처럼 자기 인생을 자기가 지배하고 살겠다고 하면 악한 것입니다. 이것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만유와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너 인생이 무엇이냐 태어났다 살다 죽었다. 그 이후에 가지고 가는 것 아무것도 없어요.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소유하지 우리는 소유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나의 삶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하세요.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일의 시작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일을 완성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일을 만들었지 우리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책임 안 지시려면 안 만드셔야지요. 좌우간 좋게 되었으면 좋은데 나쁘게 되었어도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혹하게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만드셨으면 하나님이 책임져야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몸 찢고 피를 흘려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당하게 하신 것은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책임 안 지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이 책임지시므로 하나님께 내어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우리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길을 베풀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신발을 벗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발이란 우리 소유권을 말하고 행위의 주권을 말하는데 내가 무엇이든지 내 힘으로 하겠다고 소유를 하고 내 행위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신발을 벗어서 던지고 하나님, 주님께서 내 모든 것을 소유하셨으니 나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께서 마음대로 하소서. 맡기면 주님이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 강제로 이끌어가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께 내어 맡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확신에 찬 기도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돌보아 주실까? 정말 사랑할까? 그렇게 흔들리면 확신에 찬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어떻게요?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것은 특별한 사람이지요? 아니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남녀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주시는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은 여러분을 차별함이 없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사랑하신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기 때문에 내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내 생활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관심을 가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반역했으나 나중에 회개하고 니느웨성에 와서 복음을 증거하고 난 다음에 성에 앉아서 하나님이 니느웨 성을 파멸 안 시킨다고 원망했을 때 요나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호박넝쿨도 나오게 하시고 벌레를 보내어서 그를 싹뚝 깎아 먹어 죽게도 하시고 햇빛을 비추어서 뜨겁게도 하시고 온갖 것을 다 동원해서 교육시켰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관심을 여러분보다 더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7장 7절로 11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얼마나 강력한 말씀인 것입니까? 너희 자식이 떡을 달라하면 돌 줄 사람 한번 손들어 봐 주십시오. 안주지요. 생선 달라 하는데 꿈틀꿈틀하는 뱀을 줄 부모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근본적으로 악한 자들인 것입니다. 왜, 인본주의적으로 자기중심으로 사는 이기주의자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악한 자가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 줄 줄 아는데 하물며 천부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 무엇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구하지 않기 때문에 안 준다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농담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신에 찬 기도를 하라고 이렇게 우리에게 격려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이면 하나님은 책임을 져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실력이 없으면 우리가 구해도 소용이 없지만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10장 17절에 “너희의 하나님 야훼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누가복음 1장 37절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스바냐 3장 17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결혼하고 오랫동안 어린애를 낳지 못하다가 나중에 어린애를 얻으면 그 부모님이 그 어린애를 보면 잠잠히 바라보고도 마음이 기뻐서 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잠잠히 사랑하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아이구 내 자식아~ 아이구 내 새끼야~ 즐거이 부르는 것이 그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할머님이 기분이 좋은 날은 나에게 와서 나를 끌어 안으면서 아이구 내 새끼야~ 아이구 내 자식아~ 그것 귀에 늘 쟁쟁해요. 그때는 그 말이 싫었어요. 내가 뭐 강아지 새끼인가? 날 보고 내 새끼야 하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랑의 본성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이름 가운데서 찾아와서 아이구 내 새끼야~ 아이구 내 자식아~ 기뻐 견딜 수가 없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좀 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로다. 그가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므로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나의 일과 짐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하나님은 소유된 자식일 뿐 아니라 여러분 소유된 백성입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백성을 잘 입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책임입니다. 백성을 못 먹이는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백성들은 배가 고파서 죽어가는데 원자탄이나 만들어서 터뜨리고 로켓트나 쏘고...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 백성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배고픈 사람에게 원자탄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로켓트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밥 먹는 것이 중요하지. 백성들을 오래 굶주려 놓으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거린다고 백성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사실은 북한의 지도자들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살려 놓으면 그들이 일어나서 그 지도자를 둘러싸고 지키고 보호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굶주려 놓고 헐벗고 못살게 만들어 놓으면 어려움을 당할 때 다 뿔뿔이 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지도자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이시므로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권세가 있습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은 우리를 더 깊이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짐 주님께서 맡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 주님께서 해결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께로 나오라고 말하는데 왜 안 나갑니까? 우리가 가만히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너무나 신앙이 없고 너무나 헌신이 부족합니다. 우리 하나님 뜻대로 우리가 주님께 나가서 맡기면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없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기도를 드려야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우리가 잘못 구하지 않고 올바르게 구하면 주님께서 응답하고 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많은 권세와 능력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채워 주시고 바로 오늘 이 시간에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이 예배당을 떠나기 전에 구하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3절로 24절에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오늘 다 구하여서 받고 나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맡기고 의지하는 믿음을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으니까 구해야지요. 못하면 구할 수가 없습니다만 구하면 응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 이름으로 구하고 응답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1절로 22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세상에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면 산이 바다로 옮겨지고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너무 주님이 큰소리 하시는 것 같이 보이지만 얼마나 우리 보면 안타깝겠습니까? 우리는 전부 쥐새끼처럼 되어가지고서 용기와 힘을 다 잃어버리고 그저 짹짹짹하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고 하여도 된다고 했으니 베짱있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베짱있게 믿어라.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먹을 것 입을 것 가질 것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 모두다 주님이 응답하시겠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한 일을 너희가 꼭 한다. 그보다 더 큰일도 한다. 그러니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 보통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실력의 10%도 사용 못합니다. 굉장히 큰 은혜를 주셨는데 은혜의 10%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니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 너무 빈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분 자신을 못하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나는 기도할 수 있다. 나는 믿을 수 있다. 나는 응답 받을 수 있다. 나는 승리할 수 있다. 영혼이 잘 될 수 있다. 범사에 잘 될 수 있다. 강건하게 될 수 있다. 나는 영혼이 잘되고 강건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여러분 할 수 있는 실력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베이커라는 선장이 대서양에서 배를 몰고 가다가 침몰하고 말았었습니다. 그래서 선원들과 함께 뗏목에 탔는데 파도가 세니 뗏목이 언제 넘어질지 모르고 햇빛이 비치니 낮에는 더워서 견딜 수가 없고 밤에는 추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상어떼들이 줄을 지어서 잡아먹으려고 따라오고 기가 막혔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선장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고 전부다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그 선장이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이시여 주님께서는 내가 물을 지날 때 함께 하시고 강을 건널 때 강물이 침몰하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셨고 불을 지날 때 타지 아니하고 불꽃이 나를 사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셔서 나를 도와주시고 선원들을 도와주시옵소서. 그는 주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먹을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선장이 기도를 하고 나니까 갈매기가 날아와서 선장 머리 위에 앉아서 쫓아도 안가요. 그래서 한 마리 두 마리씩 잡았습니다. 그래서 털을 뜯어서 그 선원들이 배불리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비가 내려옵니다. 그 빗물을 받아서 잘 마셨습니다. 갈매기 고기도 먹었겠다 빗물도 마시겠다 용기와 힘이 생기니까 그 남은 사람들도 선원들도 따라서 야~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우리도 합쳐서 하나님을 믿자. 회개하고 믿고 기도하니까 지나가는 배를 만나서 다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20일 동안이나 기적적으로 그렇게 살고 건짐을 받았냐고 하니까 선장이 하는 말은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왜 믿음으로 기도하면 당장 하루 만에 구하지 않으시고 20일이나 기다리게 했나요? 하나님은 20일 동안 기다리게 하시므로 능력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고 나와 함께 땟목 탄 사람들이 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나 혼자 믿었는데 구조 받을 때는 뗏목에 탄 사람이 다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라고 그는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항로 중에서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야훼께서 내 아버지가 되심을 알고 믿고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의 친아버지보다 여러분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의지해서 확신에 찬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니 우리에게 무엇을 주지 않겠습니까? 사랑하시고 또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니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고 하나님 능력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믿으면 하나님이 여러분께 역사해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죠지 뮬러의 일생을 참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영국이 죠지 뮬러는 혼자 기도해서 6천명의 고아를 먹이고 입히고 대학공부까지 다 시켰습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엎드려서 기도만 했는데 그 일생에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저녁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총무가 와서 원장님, 먹을 것이 없습니다. 바닥이 났습니다. 애들에게 먹을 것을 저녁에는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뮬러 목사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마라. 전부 애들을 식당으로 모으고 접시들을 앞에 내놓고 숟가락을 준비하라. 아무것도 없는데요? 아 이 사람아 하나님이 계신데 뭐가 아무것도 없냐. 그래서 애들을 다 모아놓고 냅킨을 묶어주고 숟가락을 놓고 젓가락을 다 놓고 뮬러 목사님이 나가서 자,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받았으니 기도하자고 하니까 애들이 수군수군합니다. 음식이 어디있어? 빈 사라밖에 없는데... 그러나 목사님이 기도하자고 하니까 다 고개 숙였습니다. 뮬러 목사님이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 좋은 만찬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먹고 입고 산 것은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서 하신 것인데 오늘 저녁에도 주님이 만찬을 준비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나니까 문이 열리더니 트럭이 여러대 와서 아주 음식이 오는데 최고의 음식이 오는 것입니다. 애들에게 전에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 왔습니다. 그래서 뮬러 목사님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웬 음식이냐? 어떻게 해서 이런 음식이 왔느냐. 보니까 그날 부자들이 모여가지고서 파티를 했는데 음식을 너무 많이 해가지고서 음식을 조금만 먹어가지고서 파티에 음식이 전부 남았어요. 그래서 이 음식을 어떻게 처치할꼬? 뮬러 목사님의 고아원에 갖다주자. 그래서 트럭에 음식을 싣고 음식 먹을 시간에 도착을 해서 아주 큰 잔치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비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불광동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아직 초년병이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단칸방에서 매일 엎드려서 성경을 읽고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그 자리에서 잠자고 하니까 너무나 괴로워요.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시고 하늘의 별들도 많고 초목 곤충들도 다 지으셨는데 나에게 책상, 걸상, 자전거 한 대만 주십시오. 책상이 있고 걸상이 있어야 편히 앉아서 성경 읽고 기도할 수 있고 늘 걸어다니니 다리가 아파서 못 견디겠으니 자전거 한 대 주십시오. 그리고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것도 안와요. 그러니 가난한 산촌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믿으라고 할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하루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지금 6개월이 넘도록 책상, 걸상, 자전거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므로 기도를 응답하시는데 내 책상, 내 걸상, 내 자전거는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서 기도를 하다가 졸았는데 비몽사몽간에 내게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너 걸상, 너 책상, 너 자전거 다 준비 되었는데 너가 주문을 잘못했다. 어떤 걸상을 원하느냐. 사장 걸상을 원하느냐. 학생 걸상을 원하느냐. 책상을 원하느냐. 걸상 종류를 말해야지 무조건하고 걸상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리고 자전거, 자전거도 고물 자전거도 있고 새 자전거도 있고 일본제도 있고 미제도 있고 한국제도 있고 온갖 종류가 다른데 어떤 자전거를 원하느냐. 내 백성이 기도를 하면서 막연한 기도를 하는 것은 응답받을 준비를 안하고 하기 때문에 요행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에 그렇다. 확실히 자기에게 올 것을 기도하면 알고서 기도를 해야지 너가 시장에 가서 물건 살 때 가구점에 가서 책상 주세요! 걸상 주세요! 그러면 가구점 주인이 뭐라고 말하겠느냐. 어떤 책상을 원합니까? 어떤 걸상을 원합니까? 아무거나 주세요. 그러면 당신 이렇게 돈 사람이 아닙니까? 그럴거 아니에요. 자전거포에 가서 자전거 주세요. 어떤 자전거입니까? 새거입니까? 중고품입니까? 일제입니까? 한국제입니까? 미국제입니까? 아무것이나 알아서 주세요. 그렇게 해서는 물건을 못 사지 않느냐. 너 여태까지 기도를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기다리고 있다. 그 내용의 계시가 내 마음속에 와서 제가 잠을 퍼뜩 깨니까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못 기도를 했구나. 하나님은 훌륭한 하나님, 능력 있는 하나님,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시지만 내가 기도를 잘해야 응답하시는구나. 그래서 종이를 내서 적었습니다. 하나님, 책상은 너무 좋은 것은 싫고요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책상만 있으면 됩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책상, 걸상도 등에 걸칠 수만 있는 그런 간단한 것을 주십시오. 좋은 것 주셔도 내 방에 갖다 놓을 자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는 아무래도 미제가 좋고 기왕 주실 바에는 기아까지 달린 자전거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얼마있지 아니하여 어떤 사람이 와서 자기가 쓰다가 이사를 가는데 책상과 걸상을 처치하고 싶은데 혹시 필요하면 가져가래요. 그래서 가보니까 내 책상, 내 걸상이 거기 있잖아요. 내가 구하는 대로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책상, 걸상은 왔는데 왜 자전거는 안 옵니까? 그런데 얼마있지 아니하여 선교사가 한국에 있다가 미국으로 안식년으로 가는데 나보고 와서 자기 아들이 타던 자전거가 있으니까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그래요. 가서 보니까 미국에서 온 새로운 자전거인데 기아가 옆에 달려있고 멋있는 자전거에요. 그래서 내가 그 자전거를 타고서 오니까 온 동리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고 아주 깃발 날리고 그날부터 그 책상에 그 걸상에 공부도 하고 논문도 쓰고 설교도 준비하고 그 다음 그 자전거타고 아주 신바람나게 동리를 돌아다니면서 심방을 했는데 자꾸 자전거가 들어오면 종종 없어져요. 박종선 목사님이 우리 교회 교인이었는데 이 사람이 자꾸 타고 나갑니다. 그러니 내가 아주 기분이 나쁘고 싫지만 타지 말라고 못하는 것은 교인 잃어버릴까 싶어가지고서 그때는 그래도 남자 청년이 그 사람하고 몇 사람 밖에 없는데 자기 자전거처럼 타고 다닌다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말은 못하고 하루는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박종선이가 내 자전거를 자꾸 타는데 좀 못타게 해주시옵소서. 기도를 내가 잘못했어요. 자전거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내가 박종선 목사만 만나면 내 자전거 내놔. 교회 종은 팔아 먹었지만 내가 자전거는 안팔아 먹었습니다. 네가 타고 다니다가 없어졌으니까 내놔! 오늘도 아마 박종선 목사님 내 설교 듣고 있을 것입니다. 박종선 목사 내 자전거 내놔! 내가 사랑을 가지고 박종선 목사하고 자전거를 나누어 탔었으면 하나님이 안 가지고 가셨을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욕심을 내니까 박종선 목사님이 가지고 간 것 같은데 안가지고 갔다고 하니까 아마 도둑놈이 가져간 것 같습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기도를 해야 돼요. 막연한 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이 시간에 하나님께 구할 것은 정확하게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문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정확하게 기도 구하면 그리고 믿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주기를 원하시고 구하기 전에 이미 주기를 원하시고 능력이 한이 없으므로 못할 일이 없으므로 어떤 때는 시간이 좀 늦을 때도 있고 시간이 좀 걸릴 때가 있을지는 몰라도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신바람 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하며 희망찬 꿈을 가지고 믿습니다를 외치고 기도하며 긍정적인 선언을 하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다 같이 고개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한 사람
마 21:28-32 / 곽선희목사
아주 옛날 마케도니아의 황제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왕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의 사병 중에 알렉산더 대제와 꼭 같은 이름을 가진 졸병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동명이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졸병은 아주 문제가 많은 졸병입니다. 사고뭉치였습니다. 그래서 이 졸병의 잘못된 행실로 인하여 왕의 이름에 누를 끼치게 되고 또 욕이 돌아가게 되곤 했다고 합니다. 이 졸병이 실수할 때마다 상관들이 기합을 주면서 "이 알렉산더, 이놈!"하고 매질을 하니까 그 이름으로 인해서 왕에게 늘 불명예가 돌아가곤 했습니다. 이 사실을 오랫동안 들어오던 황제께서 조용하게, 은밀하게 막사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마침, 그날도 이 사병은 술이 만취되어 주변의 물건을 때려부수고 행패를 부리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어서 "자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알렉산더 대왕 앞에 벌벌 떨며 인사를 드렸는데 그때에 알렉산더 대왕은 묻기를 "자네 이름이 분명히 알렉산더인가?" "예,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저의 아버지가 제 어렸을 때부터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제가 알렉산더가 분명합니다." "자네의 그 이름 때문에 내게 누(累)가 돌아오고 내 이름이 욕되게 될 때가 많은가 보더군." 그리고 끝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네게 명령을 한다. 네 이름을 바꿔라. 만일 그렇지 않거든 행실을 바꿔라."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름을 바꾸든지 행실을 바꾸든지 그래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성도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소행 하나하나에 따라서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기도 하고 영광이 돌아가기도 합니다. 뭐, 어렸을 때는 그렇다 하더라도 또 처음 믿을 때는 그렇게 여유 있게 생각해 줄 수도 있겠지만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름에 합당한 인격, 합당한 성품, 합당한 생활철학, 합당한 가치관, 합당한 행위를 해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인격으로 성숙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신분이 있고 행위가 있습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살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될 줄로 압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습니다. "예, 가겠습니다"하고 아주 정중하게 쉽게 대답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아들에게 가서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했더니 이 아들은 자기가 무엇이 해야할 일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못가겠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에 생각하니 잘못된 것 같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들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가겠다 하고 안가고 하나는 안가겠다 하고 가고, 이 둘 다 좋지 않습니다.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가겠습니다"하고 가는 아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 아들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셋째아들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정말로 합한 그런 아들은 없습니다. 이미 없습니다. 이미 망가졌습니다. 이제가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제라도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그 둘째아들이, 그 둘째아들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현대인들을 향한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맏아들 다분히 처세적입니다. 그의 맹세는 허상입니다. 체면이고 위선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할 때에 아버지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불편하게 해드리지 아니하려고 "네"하고 대답합니다. 아주 공손하게 말입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지극히 처세적입니다. 순종하는 것 같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좋은 맏아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지식으로는 순종하였습니다. 말로써는 순종하였습니다. 형식적으로, 예절로써는 순종하였습니다. 아마, 누가 묻는다면 대답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노인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릴 수가 없어서 간다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겠지요. 이렇게 예절적인 효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보면 한다고 하면서 하지 않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면서 거룩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봉사한다고 하나 말뿐입니다. 준다고 했지만 무엇을 준다는 말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저 허세와 허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한 것도 없는데 다 된 것처럼 적당히, 적당히 넘어가면서...... 훌륭한 것 같으나 실상이 없습니다. 내실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 많은 날, 봉사한다고 했지만 여러분, 심판대 앞에 서서 물어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봉사했습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시겠습니까?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그 많은 날 간다 간다고만 했지, 간 일이 있느냐고, 한다 한다고만 했지 한 일이 있느냐고, 항상 맹세하고 결심만 했지 무엇을 했습니까? 이것은 아주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피터 드러커라고 하는 유명한 교수가 있습니다. 경영학자이며 미래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지금 93세입니다. 작년에 유명한 글이 나왔었습니다.
어느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 선생님께서 쓰신 사십 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좋은 책이 어떤 책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피터 드러커가 대답하기를 "다음에 쓰는 책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92세 때. 그런데 지금 93세인데 방금 나온 책이 있습니다. 『Next Society』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미래를 내다봅니다. '먼저 가보는 미래'를 말했습니다. '앞에 어떤 일이 있을까?'하고 93세에 해박한 노교수가 앞을 전망해봅니다. 앞으로 확실한 것은 지식 근로자가 노동력 근로자를 우월했습니다. 지식의 세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는 많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보다도 권력보다도 더 쉽게 이동하는 것이 지식입니다. 이젠 인터넷이라는 것을 통해서 지식이 제한 없이 마음대로 오고갑니다. 적어도 지식의 세계에서는 국경이 없는 세상이 된다. 그렇습니다. 국경이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국경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육개방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에 상승이동을 해서 신분상승으로 말미암아 종래의 질서가 곤두박질하고 깨지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2020년이 되면 이제 소위, 물건을 만드는 제품생산적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인구의 7%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높은 지식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들만의 세상이 됩니다. 이제 신분의 문제가 아주 혼란해집니다. 조금, 100년 전만 돌아가 보아도 공부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족이 하고 권세자가 하고 그런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나 공부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들만 공부시키고 딸은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형님이나 하고 동생은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다 공부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우수한 사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대로 신분상승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래의 모든 질서는 아주 혼란스러워지고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예전에 저의 아버지가 저를 가르치시면서 아무하고나 놀지 말고 모든 사람하고 화해하지만 가려야 한다고, 그것은 아버지께서 잘못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을 가르쳐주시는데 5성을 가르쳐주시고 "이것은 상놈이다, 이것은 백정이다, 이런 성을 가진 사람하고는 놀지 말아라" 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니까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상놈들이 장관 되어 있었습니다. 재벌도 되고 무엇이든 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보면 기절할 노릇입니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 모양이 되었는가. 이게 말세라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생각하면 말세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혼란해지고 맙니다. 위계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무너진 것은 인정을 해야합니다. 붙들고 있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그런가 하면 전공을 쉽게 얻어서 쉽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쉽게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실패하고 성공하는 주기가 더욱 짧아집니다. 하루아침에 재벌 되었다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됩니다. 하루아침에, 존경받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감옥에 갑니다. 이 난리를 치는 통에 결국에는 불안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믿어볼 것이 없습니다. 불안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안정이란 없습니다. 신분에도 없고 권력에도 없고 재벌에도 없고 지식에도 없습니다. 이런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바꿔야합니다. 옛날 생각대로 가지고 있다보면 어쩌면 기절해서 죽을 것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이런, 세상이 있는가!"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봉건문화에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가 우리 앞에 다가올 때에 이것을 감당하지를 못해서 지금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신 분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둘째아들을 좀 볼까요? 이 둘째아들은 아주 정직한 사람이고 솔직한 사람입니다. 무슨 자기가 하려고 계획했던 일이 있었던가 본데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니까 "안가요" 그랬습니다. 정직하지 않습니까? 또 정당하기도 합니다. 안가겠다고 말하고 안가지 않았습니까? 잘못이 없습니다. 이것이 둘째아들입니다. 그러나 문제 있습니다. 이 아들은 뒤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뉘우친다는 말은 메타노이오입니다, 회개입니다. 뉘우쳤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총주제요 핵심이 뉘우친다는 것입니다. 뉘우침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뉘우친다는 말은 생각의 발상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는 "내가 할 일은 내가 하고 아버지가 할 일은 아버지가 해야합니다. 나는 내 할 일 합니다" 정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못 가겠다고 하고 안 갔으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뉘우쳤습니다. 지금까지 옳다고 했던 일이고 나는 정당하다고 했지만 아니, 그것은 내 생각이고 나만 생각을 한 것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생각해야 되는데 나, 에고이즘, 에고이스트, 에고센트릭, 자기중심적이 생각이었다. "아, 그게 아니지" 뉘우쳤습니다.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못 바꾸면 이 세상에 못삽니다. 제가 요즘에 결혼주례 할 때마다 종종 그 이야기를 아주 심각하게 합니다. 그러면 신혼부부들이라던가 결혼한 사람들이 와서 "목사님, 그 말씀 두고두고 진리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래 재미가 나서 또 합니다. 그게 무엇인줄 아십니까? 밥투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하지 말아라, 그것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만 잊지 말아라." 신랑보고 이야기합니다. "압록강을 건너가면, 중국에 가보니까 13억이라고 하는 엄청난 인구가 산다. 그런데, 그 13억 인구는 전부 남자가 밥을 한다. 알았냐?"하고 꼭 확인을 합니다. 그것을 잊지 말라고.
바로 뒤에 있는 시어머니 보고 제가 이야기를 합니다. 시어머니 정신차리라고. 이제 이 아들이 장바구니 들고 따라다닐 거요, 자신이 부엌에서 일 할거요. 그럴 때에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럴 수 있느냐?"라는 그런 말을 하지도 말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못산다고 말입니다. 알았습니까?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그런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직장을 그만 두셨습니다. 그리고 살아야 되는데 그 부인이 직장에 나가십니다. 살아야겠으니까. 그 부인이 직장에 나가고 남편은 직장을 못 나갑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왔더니 남편이 부엌에서 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다 만들어 놓았더랍니다. 생전 처음 부엌에 한 번 나와 본 일이 없는 경상도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밥을..... 부인이 깜짝 놀라서 "여보, 죄송하고 미안해서... 어떻게 당신이..." 그러니 남편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 동안 당신이 나를 위해 한평생 일했는데 이제 내가 오늘 당신을 위해 밥을 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없잖아?" 그분 괜찮은 남자입니다. 생각을 바꾸세요. 생각의 전환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둘째아들은 안 간다고 했습니다. 안갈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이고 아버지의 뜻이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뉘우치고 갔다고 했습니다. 뉘우치고 갔다. 뒤에 뉘우치고 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결국은 뉘우침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뉘우칩니까? 얼마나 생각을 바꾸어가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발상의 전환을 이루고 있습니까? 내 뜻에서 하나님 뜻으로, 내 생각에서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유명한 버나드 로너간(Bernard J.F. Lonergan) 이라고 하는 신학자의 Method in Theology 라고 하는 책에서 그럼 회개란 무어냐? 세 차원에서 오는 것이다. 첫째, 지성적 회개가 있습니다. 깨달음, 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에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 다음에는 도덕적 회심이 있습니다.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것이 소중했습니다. 아, 이제는 그것이 소중하지 않아, 이것이 소중합니다. 선과 악의 가치관을 바꾸십시오. 좋은 것과 나쁜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즐길 수 있는 것과 즐겨서는 안 되는 것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도덕적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유명한 무디 선생님에게 어떤 짓궂은 교인이 찾아와서 목사님이 읽으시는 성경책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성경책 오래 된 것 하나,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 책은 다 헤어졌지만, 몇 번 몇 번 고쳤습니다만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낡은 성경책을 보기를 좋아하는데, "목사님의 그 낡은 성경책, 그것을 보고싶습니다." 목사님이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요. 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에 줄치고 여기에 마크하고 여기에 글을 써놓고 성경책이 얼마나 복잡한지... 그런데 가끔 보니까 무어라고 쓰여있느냐 하면 "T.P."라고 써놓은 것이 많았습니다. T.P. 큰 글자로 T.P. "이것은 무엇입니까?"하고 교인이 물었더니 무디 선생께서 "Tried. Proved." 내가 이 말씀을 듣고 보고 생활 속에 실천을 하고 그래서 이것이 진리임을 확증했다고. 시험해보고 입증한 것이라고, 내 생활 속에서 입증한 것이라고. 여러분, 성경구절 하나하나를 생활 속에서 입증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 얼마나 순종했습니까? 얼마큼 순종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서 성전을 깨끗이 하게 될 때에 제사장들이 우르르 나와 도전적으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데 놀랍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살아남기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당시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이 제사장 앞에서 하는 말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 이렇게 말하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세리와 창녀가 너희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 왜? 너희는 뉘우침이 없고 위선에 빠져있지만 이 사람들은 비록 세리와 창녀이지만 뉘우침이 있다. 마태는 뉘우치고 내 제자가 되었다. 삭개오도 뉘우치고 내 제자가 되었느니라. 저 창녀도 뉘우치고 제자가 되었지만 너희들은 끝까지 뉘우칠 줄을 몰라. 그런 고로 창녀와 세리가 너희 제사장들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 얼마나 굉장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얼마나 뉘우칩니까? 계속적으로 뉘우치고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평생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더라도 오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뉘우치고,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야합니다. 거기에 주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창기냐 세리냐를 묻지 않았습니다. 뉘우침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많은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순종하는 것 같으나 순종함도 없고 가겠다고 하면서 가지도 않고 항상 마음에 결심을 하면서도 실천이 없는 그런 많은 시간을 살아왔습니다. 주여, 바라는 것은 이제는 깊이 뉘우치고 아버지의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고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그런 삶으로 이제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왜 이런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까?
마 21:28-32 / 김삼환목사
오늘 봉독해 드린 말씀은 지금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고 또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키포인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중요한 사건과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이 왜 은혜를 받지 못하고 구원함을 받지 못하는가?'입니다. '왜 유대인이 세계에 이렇게 흩어지고 또 왜 유대인이 이렇게 유리 방황하며 고생하며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가?' 오늘 본문이 거기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나라에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이 사역하신 땅이 어느 나라입니까? 예수님께서 어느 혈통을 빌려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유대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유대인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못 받습니다. 그리고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생각지 않았던 이방인들입니다. 예수님이 계셨을 때도 그분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리와 창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마리아와 같은 여인이, 사마리아 여인이, 세리 삭개오가…. 또 세리 마태가 주님의 제자가 되지 않습니까? 유대인이 만약에 예수를 잘 믿는다면 우리보다 몇 배나 더 잘 믿겠죠. 우리가 유대인을 못 따라 가니까요. 우리는 10년이면 믿음이 변합니다. 100년도 우리 믿음을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보십시오. 적어도 3,500년 동안 어떻게 하면 저렇게 안 변하고 잘 믿을 수 있습니까? 저런 기도를 우리가 못하잖아요. 하루 세 번씩 하는 기도를 우리가 어떻게 따라갑니까? 저렇게 율법을 어떻게 저렇게 철저하게 지킵니까? 십일조를 어떻게 몇 천년을 저렇게 철저하게 할 수 있고 안식일을 어떻게 하면 몇 천년을 저렇게 철저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전화도 안 합니다. 할아버지 때에는 그래도 아들 대에만 되어도, 손자 대만 되도 변할텐데 유대인은 어떻게 3500년 동안 저렇게도 안 변하고 잘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니, 저런 민족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예수 잘 믿는다면 아마 세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텐데 잘 믿어야 할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제가 워싱턴에 가니까 큰 교회가 있어서 그 교회를 꼭 보고 가라고 해서 가보니까 세상에 목사님이 유대인이에요.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아도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유대인이 성령 받으니까 야단나는 거예요. 일 나는 거예요. 몇 만 명이 모이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 우리보다 10배는 더 열심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마지막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 주님께로 돌아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역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유대인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이유는 하나입니다. 원인이 하나예요. 그게 뭐예요? 교만입니다. 교만! 무슨 교만이에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거예요. 할례 받았다는 거예요. 우리는 율법을 지킨다라는 거예요. '어려서부터, 태어나서부터 이렇게 철저하게 지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뭐? 예수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아?' 안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 웃기는 일이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면 죄가 다 없어져? 죄를 안 지어야 되는 거지. 어떻게 죄가 믿기만 하면 용서함 받는단 말이냐.' 유대인은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유대인이 은혜 받지 못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만은 뭐예요? 교만의 배후는 사탄이 역사 하는 거예요. 간단하게 말하면 교만의 배후는 무지한 거예요. 무지! 무식한 겁니다. 교만한 사람들이 다 잘났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건 다 무지한 결론이에요.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이에요. 출발이 겸손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이에요? 보여주신 삶이 무엇이에요? 기독교의 출발은 겸손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마굿간에 태어나시고 옷도 한 벌로 입었어요. 나라이면서 군인도 없고 나라이면서 돈도 없고 세금 낼 돈도 없으셨어요. 아주 막강한 내각을 구성해야 될 텐데 어부들을 가져다가 구성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나귀를 타고 가셨어요. 겸손하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모두가 다 겸손이에요. 이 세상에 겸손을 귀히 여기고, 겸손 위에 나라를 건설하고 겸손해야만 된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어요. 어떤 철학에도 겸손을 예찬하지 않아요. 아리스토텔레스도 "겸손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어요. 유명한 프레데릭 니체도 말하기를 "사도바울의 이 겸손을 주장하는 것은 노예근성에서 나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겸손을 가르치고 겸손을 주장하는 사상이나 종교나 지식이나 철학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종교는 한마디로 교만입니다.
우리나라의 유교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아세요? 여자를 사람 취급을 안하고 상놈을 사람 취급을 안하고…. 저희들이 어렸을 때 제사 지낼 때도 저희들도 다 그런 것 많이 보고 왔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들이 물을 이고 오다가 학교 갔다고 오는 저희들과 마주치면 옆으로 비켜서서 우리들이 지나갈 때까지 그 무거운 것을 이고 이렇게 섰다고요. 여러분, 여자를 귀히 여기는 종교가 이 프로테스탄트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 이외에는 여자를 귀히 여기는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아멘도 안 하네. 보십시오. 오늘 유교가 500년 동안 여자들을 얼마나 어렵게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힌두교도나 지금 중동에 있는 종교나, 아니 어떤 종교도 다 마찬가지예요. 사람 차별합니다. 요사이 '여인천하'나 이런 데 보세요. 어느 뭐 윤씨가 뭐 한다 그러면 "그 어디 감히 어디서…" 교만입니다. 감히 누구냐 말이에요. 교만이 꽉 차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우리 기독교만 자랑하지 않습니다. 뽐내지 않습니다. 내가 제일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 가운데 표시하지 않고 다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힌두교도도 머리에 표시를 하고 어디를 가도 다 자기가 최고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슬람도 다 두르고 다닙니다. 여러분, 태국이나 버어마, 이런 데 가보십시오. 아침부터 스님들이 전부 누런 도포를 입고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닙니다. 기독교도인 걸 드러내지 않고, 교회 다니면서 드러내지 않는 종교는 이 세상에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조그마한 우상 종교도 다 드러냅니다. 여러분, 미국 가보십시오. 한여름인데도 유대인들은 다 정장하고 검은 옷 다 입고 다닙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여기에 수염을 기르고 다 머리를 닦아 가지고 내리고 다닙니다. 미국 안 가보니 알 수가 있어야지요. 모자 쓰고 한여름인데도 오바까지 다 입고 다닙니다. 그래서 내가 '야, 저렇게 더운데도 입고 다니니 정말 지독하다'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종교든지 내가 최고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겸손해야 주님을 만납니다. 구원의 은혜가 내 공로로, 내가 최고여서 내가 잘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은혜를 받는 거예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그러면 왜 창녀와 세리가 먼저 은혜 받았느냐? 내놓을 게 없거든요. 죄인이거든요.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 존재가 없으니까 빨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멈출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와서 오래 기다릴 수 있습니까? 영접하는 자에게, 문이 열리는 자에게 바로 복음이 들어가는데 '나'라고 하는 유대인은 문을 열지 않습니다. '내가 잘났다'라고 하는 사람은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창녀들에게 먼저 복음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방인들이 먼저 은혜를 받고 복음이 유대나라를 떠나 로마로 건너가게 되고, 영국으로 건너가게 되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이방인 땅을 이렇게 풍성하고 충만하게 한 것은 그들이 잘해서 복음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다 겸손하니까 부족하니까 복음이 바로바로 전해졌던 거예요.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는 겸손한 자들을 찾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개인이나 권력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지도자나 어떤 분야의 사람이든지 겸손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수천 대를 관리할 수 있고, 넘어뜨리지 않고 보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다 잃습니다. 빼앗깁니다. 떠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데도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가장 낮아지셔서 종이 되시고, 낮아지시고 낮아지신 주님이 오늘날 온 인류를 다스리시고 세계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힘이 어디 있느냐? 겸손에 있습니다. 주의 나라는 겸손하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 가 보면 예수님 탄생을 기념하여 예수님이 누우신 말구유의 자리에 세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가 우리 교회보다 몇 배 큽니다. 그런데 문은 하나입니다. 그 큰 교회에 들어갈 때, 문이 여러 개 있어야 될 텐데 하나입니다. 하나 마저도 한 명밖에 못 들어갑니다. 한 명 들어가는 것도 머리를 들고는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고개를 숙여야 들어갑니다. 세계에 있는 지도자들이 오고 전 세계 기독교 국가 대통령이 와도, 왕들이 와도, 황제가 와도 문의 높이가 1미터 40 정도여서 다 고개를 숙여야 되는 거예요. 궁궐 치고 크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궁궐들이 다 어마어마한 대문을 만들어 놨는데 하나님의 나라 대문만은 소문(小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문만이 좁은 문입니다. 천국은 누가 들어갑니까? 겸손한 자가 들어가는 거예요.
♬겸손한 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찬송가도 밑바탕이 전부 겸손이에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다 밑바탕이 겸손한 사람이 부르도록 되어 있어요. 겸손해야 은혜가 되요. 낮은 마음으로 불러야 하나님께 은혜가 되는 거예요. 겸손해야 주님을 만나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다 겸손이에요. 겸손한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이에요. 겸손한 것을 아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에요. 참으로 지식이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에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교만이 어디에서 왔느냐? 무지에서 온 거예요. 교만은 종교들이 다 교만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거예요.
지금 9월 11일 테러를 일으킨 사람이 '라덴'이라고 합니다.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라덴이 교만한 데서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이슬람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오마르'라는 사람과 함께 탈레반 정권을 아프가니스탄에 1996년 건설합니다. 성공합니다. 그 땅 위에 아프가니스탄 나라를 완전히 회교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켜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를 이슬람 국가를 만들기 위해 그곳에 이슬람 전사 3만 명을 데려다가 테러 훈련을 지금까지 시켰습니다. 그 나라 지도자인 오마르를 완전히 마호메드 후계자로 추앙을 해주면서, 나아가서는 이제는 온 세계를 이슬람 국가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교만에서 나오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교만이에요.
그래서 이 세계를 잡고 있는 큰 대적을 미국으로 알고 미국을 넘어뜨려야 된다는 거예요. 미국은 힘으로는, 정면으로는 안되니까 테러를 통해서 그 안의 건물을 무너뜨리고 약을 뿌렸어요. 며칠 전에는 큰 풍선을 띄워 가지고 비행기로 부딪혀 가지고 전 미국 시민을 다 죽이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운 거예요. 얼마나 교만이에요? 다른 모든 세계 인류는 무지하고 한심하고 저주 아래 있고 거기에서 해방되어야 복을 받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을 지상의 최고의 나라로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보면 지옥인데. 아프가니스탄은 집안에 텔레비전도 없게 하고 카메라도 사진관도 다 없애버렸어요. 왜? 우상이라는 거예요. 사진을 찍으면 얼굴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마르가 사진이 한 장 없어요. 오마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여자들은 공부도 안 시키고 직장도 안 보내고 얼굴도 드러나면 안되고요. 병원에 가서는 아픈 데만 보이는 거예요. 사실 아픈 데가 문제가 아니거든요. 머리가 아프면 다른 데가 문제가 있는데 여기만 딱 보게 하니까 어떻게 치료가 되겠어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너무 한심해요. 누구보다도 여자들 지옥으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아기를 낳다가 산모가 죽는 경우가 15%예요. 열 명 가운데 1명반은 아기를 낳다가 죽는 거예요. 왜? 병원에도 갈 수 없고 일절 그런 치료를 못 받는 거예요. 도움을 못 받게 하니까 그냥 죽는 거예요. 애들도 5살 이하로 거의 다 죽고…. 이걸 지상의 낙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을 세계를 향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느냐? 교만이 여기까지 꽉 찼어요. 다 온 인류를 아주 불구자로 알고 생각하니 이 얼마나 교만이냐 말이에요. 모든 종교가 다 교만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문화유산인 석불도 지난 3월 달에 그림도 다 망치고 좋은 문화재, 조각품들, 그림들 다 불태워버리고… 왜? 이거 다 우상이라고 생각하고 불태워버리는 거예요. 설 명절도 없애버리고. 설날 논다고 그래서 다 없애버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무식해져요. 물론 자기들은 최고라고 하지만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겸손하지 아니하면 그건 무식한 거예요.
우리나라도 이슬람에 대해서 이제 처음 눈을 떴습니다. '이슬람이 이런 줄 몰랐다' 이슬람도 알아야 되지만 힌두교도 알아야 됩니다. 힌두교도도 인구가 10억이 넘습니다. 세계에 어마어마한 세력이 있는데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 교만이에요. 힌두교도는 주로 어디 있냐 하면 인도를 중심으로 해서 믿습니다. 인도는 인구가 10억인데 90%가 다 힌두교도입니다. 각 종교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것은 갠지스 강에 와서 목욕하고 그 물을 먹는 거예요. 그것이 그들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갠지스 강이 어떤 강이냐 하면 수천 킬로미터를 흘러내리는 4대문명의 발상지인 큰 강입니다. 인도의 10억 인구가 어디에 분포되어 있냐 하면 강가에 분포가 다 되어있는 거예요.
저도 일부러 가서 자세히 본 일이 있어요. 인도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장사를 지내느냐 하면 100%가 화장입니다. 화장을 할 때에 어떻게 화장을 하느냐 하면 돈이 있는 사람은 나무를 가져다가 화장을 합니다. 나무가 한 1톤 정도 됩니다. 사람이 다 타고나면 그걸 가루를 만들어서 어디에 뿌리느냐? 거룩한 강인 갠지스 강에 뿌립니다. 그 강에다 뿌립니다. 그리고 돈 많은 사람은 나무로 하지만 인도 사람의 95%가 가난하기 그지없습니다. 전 세계의 제일 거지가 인도사람입니다. 그 95%는 가난한데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화장하느냐 하면 소똥을 말려 가지고 소똥 위에다가 사람을 올려놓고 그래서 화장을 합니다. 저도 수백 구를 화장하는 터에 가봤어요. 너무너무 무시한데, 여기도 타고 저기도 타고…. 뉴델리 안이 그렇습니다. 막 타고 있는데 어떤 데는 다리가 타고 어떤 데는 발이 타고 몸이 타는데 보니까 가슴이 제일 늦게 타더라고요. 여기에 제일 기름이 많으니까 마지막에 타더라고요. 그런데요 소똥을 가지고 태우는 화장은 반도 안 탑니다. 그렇지만 반만 타도 반드시 어디 버리느냐 하면 거룩한 강, 갠지스 강에 뿌립니다. 인도 인구가 10억 정도니까…. 그러니 뼈들이 그 밑에 다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수천만 명의 인도사람들은 몇 달을 걸어서 그곳에 와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있는 갠지스강의 그 물에 목욕하고, 그 물을 전부 마시면서 '오, 거룩한 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 안 먹고 구경하는 우리를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저 불쌍한 세계의 민족!' 얼마나 세계인류를 불쌍하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 인구가 10억입니다. 자기들이 요만큼이라도 여유가 있느냐? 교만이 꽉 차있어요.
이슬람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줄 압니까? 이번에 한 선교사님이 제게 와서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내가 여기 끝나는 날까지 한 가정이라도 전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세요." 문을 열지 않습니다. 왜? 교만한데 교회에 나올 리가 있습니까? 이슬람 사람들은 세계의 성지가 세 곳이 있는데 그 중에 첫째가 어디냐 하면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라고 하는 곳입니다. 온 세계의 이슬람 사람들은 '메카'에 가서 한 번 참배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입니다. 돈 모아 가지고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비행기 타고 가면 안됩니다. 자동차 타고 가면 안됩니다. 몇 달이고 걸어 가지고 그곳으로 갑니다. 그 힘들고 힘든 길을 식구들하고 걸어서 메카에 갑니다. 왜 메카에 갑니까? 거기는 마호메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은 곳입니다. 몇 백만이 모입니다. 작년에도 몇 백 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거기 들어가려고 하다가 앞에 사람이 넘어진 것도 모르고 그냥 그대로 타고 넘어갑니다. 수백 명이 압사를 당했습니다. 아마 금년에도 수백 명이 죽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쪽을 향하여 오면서 온 인류를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이게 어디에서 나오느냐? 교만에서 오는 거예요. 교만! 기독교는 절대로 누구를 향해서 교만한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겸손해야 됩니다. 기독교는 여자를 낮추어 본다든지 남의 나라를 아주 낮추어 본다든지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돼요. 다 모두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차별하지 않고 존경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이고 보여주신 본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겸손해야 기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의 동작인 '고개를 숙인다, 눈을 감는다, 손을 모은다'는 것, 하나님을 향하여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것, 느 것 하나도 겸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져 있습니다. 겸손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겸손입니다. 봉사도 겸손입니다. 감사도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감사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기쁨도 어디에서 오느냐? 겸손에서 오는 거예요. 이사야 29장에 보면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다 겸손한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 사람도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자가 순종합니다. 겸손한 자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집에 들어갈 때도 겸손하게 들어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여봐라" 그러면 행복이 없습니다. "뭐하고 있냐? 문열어라" 그러면 행복이 없습니다. 교회 문을 열 때에도 겸손하게 문을 열고 "죄인입니다"하고 들어오면 행복한 교인이 되는 거예요. 은혜 받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다른 성경보다도 이 성경은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잠언 22장 4절. 집에 액자를 해서 꼭 걸어놨으면 얼마나 좋겠나 늘 생각하는 말씀이에요. 다같이 읽겠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해도 겸손하지 않은 분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이에요. 어떤 분은 겸손해도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해야 돼요. 겸손하고 예수를 잘 믿어야 돼요. 그런 사람은 세 가지를 주세요. 뭘 주시느냐? 재물을 주시고 이 세상에 물질의 복을 주십니다. 겸손한 사람이 잘 삽니다. 겸손해야 부지런하거든요. 겸손한 사람은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니까 잘살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 두 번째는 뭐냐? 영광이 와요. 명예가 따라와요. 지위가 와요. 축복이 오는 거예요. 세 번째는 생명이 주어지는 거예요. 영원한 생명. 겸손한 사람은 다치지도 않아요. 왜? 겸손하게 사니까 그 생명이 땅에서 복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 22편 2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이 영원히 살지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에요.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라 그랬어요. 겸손하면 찬송이 저절로 나와요. 샘솟는 기쁨이 나올 줄로 믿습니다. 겸손이 생명이에요. 겸손이 귀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고생하는 것,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믿지 못하고 온 세계 흩어져 고난받는 이유는 딱 하나예요. 교만이에요. 교만은 유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개인이든지 권력이든지 교만하면 끝나는 거예요.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밖에 있는 적이 그 나라를 망치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에 있는 교만이 그 나라를 망치는 거예요. 밖에 있는 군사 때문에 망하지 않아요. 교만 때문에 무너지는 거예요. 교만은 바벨탑이에요. 인류 역사의 모든 나라의 문화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면 그 나라는 망하는 거예요. 아프가니스탄도 보세요. 교만해서 자기 나라를 다 망친 거예요. 그 교만한 지도자 하나가 들어와서 그 나라를 완전히 파괴시키는 거예요.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하던 알렉산더의 말도 다 교만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교인이 천가지 은혜를 받아도 교만하면 은혜가 다 떠나가는 거예요. 은혜가 떠나가요. 좋은 것이 떠나가요. 교만은 문을 닫아요. 다 닫고 좋은 것이 돌아가요. 사람도 교만한 사람을 만나보세요. 누가 가까이 하는 줄 아십니까? 가까이 안 합니다. 겸손해야 친구가 많이 생기지 교만하면 다 떠나가는 겁니다. 교만하면 나라가 망해요. 축복이 떠나가요. 기쁨이 떠나가요. 음식을 먹어도 밥맛도 떠나가요. 겸손해야 밥맛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저 호빵 하나 먹어도 맛있게 먹어야 행복한 거예요. 뭘 걸쳐도 그저 이런 것 없는 줄 알고 입어야 그 사람이 행복한 거예요.
우리나라 선거를 앞두고 꼭 하고싶은 말이 있어요. 하도 우리나라 대통령 하겠다는 분이 많이 나와서 지금 너무 어리둥절해요. 너무 많이 나와요. 전부 다 하겠대요. 이거는 좋아요. 그런데 이분들이 하나같이 뭐가 있는 줄 알아요? '나는 대통령 되면 이런 식으로는 안 한다'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의 이런 정치는 교만이에요. 내 생각으로는 지금 나온 분들 중에서 DJ만한 분이 한 분도 없어요. 앞으로 우리나라도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윤보선 대통령을 존경하고, 김영삼 대통령을 존경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는 이런 지도자가 나와야지 위에 사람은 다 집어넣고 파괴하고 '내 혼자 최고다'라고 하는 이런 지도자가 나오면 그 나라가 망하는 거예요. 항상 고생해요. 왜 우리나라는 나 혼자만 잘났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몰라요. 지금까지 했던 것 다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안 쓰세요. 은혜를 안 주셔요. 겸손해야 비가 스며들듯이 은혜가 들어가는 거예요. 축복은 위로부터 와요. 아래 있는 인간은 겸손해야 이 은혜를 받는 거예요.
우리 교회 집사님 가운데 참 좋은 분이 있어요. 그런데 이 집사님이 저한테 와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거예요. "아유, 집사가 얼마나 좋은데… 이 목사가 쉽지 않은데… 진짜 목이 빠지라고 어려운 게 목사인데… 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왜 목사를 하려고 하는가…" 그런데도 기어이 하겠대요. 이분은 3급 고위 공무원으로 있었는데 결국 서울장신을 거쳐서 그 어려운 장신대를 들어가서 신학을 했어요. 그리고는 교회 개척을 했어요. 그런데 목사가 되고 두 달만에 죽었어요. 아까운 젊은이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천하에 내가 최고라는 거예요. 목사가 되어서 교만한 거예요.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시겠어요? 쓰시겠어요? 그래서 너무 아까워요. 그냥 집사로 있었으면 좋은 장로가 되고도 남을 텐데… 글씨도 명필이에요. 영어고, 독어고, 한문이고 척척척 해요. 그런데 '내가 목사 되겠다'고. 그래서 목사 되던 날 같이 있던 목사님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니까 선배 목사님들을 우습게 알더라는 거예요. 말을 당장 놓더라는 거예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물론 세상으로 보면 훌륭하지만 목사가 되면 선배 목사님들도 존경하고 그래야지 내가 잘났다고… 안 됩니다. 교만하면 안돼! 능력이 없어서 목사를 못하는 게 아니에요. 교만하니까 버림받는 거지. 우리나라에서 은사 많은 목사가 제일 많이 넘어져요. 부족한 목사는 끝까지 살아요. "하나님 은혜 주세요. 도와주세요."
우리나라가 앞으로 조금만 더 겸손하면 은혜를 받아요.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이 있는데도 우리가 너무 교만해요. 교회도 교만해요. 밖에도 교만해요. 일본을 우리가 배워야 해요. 일본은 다른 건 몰라도 일본 국민이 얼마나… 미국 앞에 '껌뻑'하고 겸손해요. 미국이 하라는대로 해요. 지금 벌써 함대 100대를 벌써 현장으로 보내서 미국을 다 돕고 있어요. 독일도 그래요. 영국 수상은 마치 자기 나라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가서 돕고 있어요. 어제 신문에 난 걸 보니까 폴란드도 가서 미국을 돕는다는 거예요. 사실 일본은 미국을 도울 필요도 없는 원수 나라예요.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와서 원자탄을 떨어뜨려 몇 십만이 그 자리에서 다 죽은 나라가 일본이에요. 그런데도 미국 앞에 저렇게 잘할 수가 없어요. "하이!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모든 일에 OK야. 그냥. 뭐든지 미국이 하자는 대로. 뭐 비행기, 군사 무기 사도 100% 미국에서 사요. 알래스카에서부터 하와이까지 미국에 있는 국공채 30%를 일본이 다 가지고 있어요. 저 유럽에서부터 세계의 돈을 다 일본이 가지고 있어요. 중국에 있는 저 많은 빌딩을, 인도네시아에 있는 빌딩을 일본이 다 가지고 있어요. 저런데도 미국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예요. "말씀만 하옵소서" 독일도 그래요. 영국도 그래요.
미국보고 큰소리 치는 나라가 세나라 밖에 없대요. 아프가니스탄, 북한, 그리고 우리나라. 몇 년 전에 필리핀이 와서 지키고 있는 미국군일들을 기어이 쫓아내서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잖아요. 일본도 지금 몇 만이 지켜주고 있어요. 우리는 진짜 미국한테 잘해야 해요. 선교도 그들이 했어요. 우리 교육도 미국이 했어요. 우리는 미국이 Stop하면 하나도 없는 나라예요. 하나도 못살아요. 그래도 미국보고 큰소리치는 거예요. 언론계에도 많이 있어요. 뭐 알고 좀 말해요. 교만은 무식에서 나오는 거예요. 어디에다 대고… 아프가니스탄 닮아가요? 우리나라를 여기까지 올려준 나라가 어느 나라예요? 교육이라든지 병원이라든지 민주주의라든지 은혜를 안 받는 분야가 하나라도 있나요? 큰소리 쳐요? 교만이에요. 교만은 무식에서 나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교만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늘 겸손하게 살면 팔자를 고치는 거예요. 안 되려고 그래도 잘돼요. 교만하면 잘 되려고 그래도 안돼요. 절대로 안되게 되어있어요. 이 법칙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겸손이에요. 겸손한 우리의 구세주 예수를 따라 길이길이 겸손하여 만대에 축복 받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