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인생의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 정치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지만 본래 그의 꿈은 대학 교수였다. 그에게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만큼의 재능이 있었고 실제로 꿈의 실현을 위한 준비도 착착 진행되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1974년 봄,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박근혜는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유학은 이를 기특하게 여긴 아버지 박정희의 선물이었다. 유학 생활은 청와대 생활에만 길들여진 박근혜가 대통령의 딸이 아닌 20대의 여인으로서 젊음과 낭만을 쌓아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만일 그가 유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더 넓은 곳에서 견문을 쌓으며 학자로서의 길을 가기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가 프랑스로 떠난 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그 해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서는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그것은 8. 15기념식에 참석한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육영수는 어이없게도 저격 사건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육영수는 박정희 대통령 이상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아왔던 영부인이었다. 그녀는 우아함과 검소함과 인자한 이미지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대통령을 보좌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영부인이었던 육영수에 대해서만큼은 딱히 흠잡을만한 점을 찾지 못한다. 그만큼 육영수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올바른 처신으로 적을 만들지 않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육영수가 그렇게 비명에 세상을 뜨고 난 후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그녀를 조문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자상했던 영부인을 잃게 된 당시 국민들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째서 육영수님의 서거에 내가 이렇게 슬퍼해야 하나 할 정도입니다.’
육영수 여사의 서거 이후 청와대로 밀려드는 조문 서신 중에는 이런 말도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때 프랑스에 있던 박근혜는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본 신문을 통해서야 어머니의 죽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문에 실린 부모님의 사진과 기사 내용을 보면서 저는 그것이 내 어머니에 관한 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의 어머니 육영수” 중에서)
어머니의 죽음. 얼마 전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정말 꿈이라고 밖에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는 그때 비행기 안에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린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인해 박근혜의 짧았던 유학생활은 그 길로 끝이 났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박근혜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버린 것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혼란스럽고 경황이 없는 와중이었지만 비어 있는 퍼스트레이디 자리는 누구라도 대신해야 했다. 어머니의 죽음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시간에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라는 중책까지 함께 짊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혼자가 되신 아버지와 자신보다 더 상처가 컸을 어린 동생들을 토닥이는 것도 맏딸이었던 그가 해야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박근혜 역시 너무 어린 나이였다. 20살이 넘었다면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에는 한창 예민한 나이였다. 또한 사회경험이 전무한 당시의 그로서, 나라를 대표하는 퍼스트레이디라는 중책에 떠맡기에 22살의 나이를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불과 엿새 후부터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했다. 가슴에 상장을 단 채였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퍼스트레이디의 자격으로 참석해 그 역할을 꿋꿋이 수행했던 것이다. 공인이란 그런 것일까. 우리는 기쁘면 마음대로 기뻐하고 슬프면 마음대로 슬퍼할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는 어머니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여유마저도 없었다. 대통령 딸이라는 책임에 더해 어머니의 역할이었던 퍼스트레이디라는 책임까지 짊어지게 되었으니 그는 더 독해지고 더 단단해져야만 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빈자리 때문에 청와대가 쓸쓸하고 황량하게 보이지 않도록 채우기 위해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박근혜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하지만 22살의 박근혜가 떠맡게 된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또 그때까지 한결같이 공부만 해 왔던 박근혜에게는 너무 생소한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머니의 이전 행적이 워낙 많은 지지를 받았던 터라 그만큼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을 것이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박근혜는 그때부터 정치에 대한 이것저것을 배워나갔다. 아버지 박정희도 안보와 경제발전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틈틈이 들려주었는데, 그때 들은 이야기들은 아마도 박근혜의 가치관과 사상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5년여의 퍼스트레이디 생활로 단련된 정치 감각은 지금의 정치인 박근혜를 만든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란 환상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퍼스트레이디의 생활은 분명 유익한 경험이었을 수 있으나 적어도 박근혜에게는 그리 환상적인 경험은 아니었을 듯싶다. 퍼스트레이디는 그저 대통령 옆에서 미소만 지어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당시 퍼스트레이디의 파워란 요즘의 퍼스트레이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만큼 대단했다. 그때까지도 군주제의 잔상이 남아 있던 터라 대통령의 아내인 영부인은 곧 국모이자 왕비라고 생각할 때였다. 민심이 그랬던 만큼 권력을 발휘하려면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육영수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녀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어렵고 소외된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국민들의 민원을 받아 정리해 대통령에게 조언도 서슴지 않아 ‘청와대 내 야당’으로 통하기도 했다. 또 국내외의 주요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그녀만의 우아함과 노련함으로 좋은 인상을 심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서민들에게 무작정 잘하는 게 좋은 퍼스트레이디의 조건은 아니다. 페론 시절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비타는 ‘당신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바친다’며 빈곤층에게 돈을 마구 뿌리고 다녔다. 그래서 서민층에게는 존경과 찬사를 받았지만 반면 경제학자들은 그녀를 나라 경제를 망친 악녀로까지 평가한다. 그만큼 중도를 지켜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퍼스트레이디로서 어디까지가 해야 할 일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인지 가늠하는 것도 역량이다. 그토록 어렵고 막중한 일이었으니,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생활이 그저 행복하거나 달콤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한층 무거운 짐을 지게 된 박근혜. 그에게는 퍼스트레이디 이외에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힘들어하는 아버지의 위로가 되고, 여전히 어머니의 손이 필요한 두 동생을 이끌어갈 책임이 있었다. 때문에 그때부터 22살 박근혜 개인의 삶은 전혀 존재할 수 없었다. 20대란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다.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시기인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그때껏 계획해 왔던 자신의 꿈을 속절없이 포기했으며, 20대의 젊은이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도 포기해야 했다. 그런 점들이 퍼스트레이디라는 최고의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보낸 세월은 18년이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서거 후 그곳을 나와 은둔의 시간을 보낸 것도 18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근혜가 대통령의 딸로 살아왔다는 사실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 시간만큼의 고통의 세월이 존재했던 것이다. 무려 18년이라는 세월이 말이다. 그 세월은 20대였던 젊은 여인을 50대를 바라보는 중년 여인으로 바꾸어 놓는 긴 시간이었다. 게다가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 시간들은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금세 자신을 추스르고 남겨진 자신의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를 나온 순간부터 정치인으로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박근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부모에 관한 일에만 파묻혀 살아왔다. 인터뷰와 추도식이며 기념사업을 하고 아버지 박정희에 관한 영화나 책을 만들고 홍보하는 등 등 18년은 오로지 부모를 위해 쓰인 세월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반드시 모든 이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부모를 잃고 그에게 남은 것은 돌봐야 하는 동생들, 그리고 엄청난 충격과 사람에 대한 불신이 전부였다. 때문에 이후의 시간들을 견디며 그는 때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 않았을까.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양 극단을 오가며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것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박근혜를 비롯한 그 자녀들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되어 날아오기도 했다.
“사실 지금까지 저의 삶은 특별했습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나랏일을 해야 했고 20대 후반에는 부모를 잃은 가장으로 부모님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1993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중에서)
게다가 그 와중에 동생 지만은 여러 번의 마약 사건에 연루되기도 한다. 아마 그도 완전히 달라진 상황을 적응하지 못하고 내면의 고통을 그런 방법으로 표출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동생 근영 또한 결혼에 실패하고 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삼남매의 삶이 온통 틀어져 버린 것이다. 어쩌면 박근혜 역시 동생들처럼 자신을 온통 놓아버리고 망가뜨리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근혜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막중한 책임과 아버지에 대한 진실과 오해를 밝혀야 할 책임이 있었다. 특별한 부모님으로 인해 안게 된 책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오히려 더 막중해진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사후 그와 관련한 논란은 계속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의 업적과는 별개로 그가 집권할 당시 미화되고 숨겨진 진실이 있었던 만큼, 잘못된 부분들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은 때로 명백한 진실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과장되고 억측인 부분도 있었다.
그 모든 일이 박근혜가 조금 나이를 먹은 후에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사람들의 냉대와 차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했다. 그가 그러한 모든 것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 그것도 비범하신 아버지를 모셨고, 생전이나 서거하신 후나 평범하지 않은 관심과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 자신 또한 평탄하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너무나 끊임없이 겪게 되는 어려움들이라 이제는 어느 정도 만성이 되었다. 옛날 같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고통일 텐데도 지금은 눈물 한 방울 없이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1989년 11월 5일자 일기 중에서)
항상 폭풍우, 비바람, 번개 등 바람 잘 날 없이 불안하고 위태위태하여 마음 한번 푸근하게 가져보기 힘든 것이 내 운명인가 하고도 생각해 본다. (1989년 11월 29일자 일기 중에서)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얻지 않으면 그는 너무 많은 짐과 고통 속에 짓눌려,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그의 일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박근혜는 일정한 종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시기만큼은 불교사상에 많은 부분을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는 것, 아마도 그것만이 그를 지탱해 주는 힘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박근혜의 18년 세월 속에서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란 조금도 엿볼 수 없다. 그는 행복이나 기쁨과 같은 삶의 요소조차 모조리 비워 버렸다. 그런 감정도 사치라고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감정을 느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심지어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도 결혼도 모두 제외시켜 버린 박근혜였다. 그런데 사랑이 빠져버린 삶은 바람 빠진 풍선과도 같지 않을까. 혹여 내보이지 않은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알려진 바로는 그에겐 그 흔한 로맨스 하나 없다. 하긴 대통령의 딸로 살아가면서 그 흔한 미팅 한번 제대로 했을 리 만무하다. 그도 여자이니 분명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었겠지만 평범하지 못한 삶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도 중매를 통한 결혼조차 하지 못했으니 그의 삶은 참으로 팍팍하기 그지없었으리라. 어릴 때부터 평범한 사람으로 살지 못했던 그는 가정을 꾸리고 어머니로서 살아가는 평범한 여자의 삶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혹은 조금만 그 시기가 늦춰졌더라면 박근혜는 결혼한 여자로,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가게 되었을지 모른다. 박근혜의 대학 졸업 즈음에 실제로 어머니 육영수에 의해 박근혜의 결혼이 추진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 일은 자연스레 무산되었고 그로 인해 떠맡게 된 퍼스트레이디 생활은 결혼을 생각할 여유를 더더욱 만들어 주지 않았다.
물론 그 이후에도 아버지 박정희를 비롯해 주변사람들로부터 결혼 이야기는 왕왕 나오곤 했다. 우선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시절에도 아버지가 여러 차례 결혼을 권유한 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한사코 마다했다. 아마도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를 차마 혼자 남겨 둘 수 없었던 맏이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이번엔 친척들이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정작 결혼한 사람은 박근혜가 아니라 동생 서영이었다. 사촌 오빠 박재홍이 말하길, 박근혜는 결혼 얘기만 꺼내면 난색을 표시하며 말을 잘라버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독신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앞서 여러 번의 결혼 기회는 그때마다 때가 아니었고, 나중에는 잇단 불행의 덫이 가져온 충격으로 결혼 생각은 아예 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지나간 40년을 돌이켜 보면 그 많은 보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가져다 준 고통과 슬픔이 너무나도 컸기에 고통스럽게 추억될 뿐이다. 그런 생을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 모른다. 지난 세월은 태어났기 때문에, 사명과 의무가 있기 때문에 산 것이다. 태어나서 삶을 누린다는 것에 이런 즐거움도 있구나 하고 느낀 기억이 별로 없다. 보람이 있었다고는 하나 너무나 큰 고통이 그것을 짓눌러 버려 그 보람을 느낄 여유조차 없곤 했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것이 생이라면 새 생명을 또 탄생시킨다는 일은 그 아기에게 끔찍한 짐을 지워주는 일이 될 것이라고도 생각했었다. (1992년 5월 21일자 일기 중에서)
삶의 고통은 결혼과 함께 이어지는 또 다른 탄생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이어졌을 것이다. 굳이 새 생명을 만들어 인생의 고통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을 만큼 그의 삶은 그토록 외롭고 처절했던 것일까. 혹자는 박근혜의 고통을 어찌 서민들이 흘린 눈물에 비할 수 있겠냐고 말한다. 독재자의 자식이면서도 부모가 돌아가신 뒤 6억원 가까이나 되는 재산까지 남겨졌으니 고통이라는 말조차 ‘사치’라는 얘기다. 그러나 한 개인의 고통과 슬픔을 어찌 타인이 측량할 수 있으랴. 그것도 20여 년간이나 지속된 고통을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박근혜는 그 깊은 고난의 시간들을 꿋꿋이 이겨냈고 나아가 그 시간들을 자기 성숙의 계기로 만들었다.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고난도 ‘주어지는 것’이다. 다만 태풍은 자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배신은 그것을 행한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축복스런 기간에 인간은 기뻐하고 고난의 기간 동안 인간은 성숙하는 것이다 …… (중략) 슬픔이 와도 기쁨이 와도, 사회적으로 큰 일을 하건 평범한 일을 하건 지위가 높건 낮건 간에 마음을 비운 사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능히 감당할 수 있다. (1991년 12월 28일자 일기 중에서)
열반이란 자기 안의 모든 감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라고 한다. 이 불꽃들은 인생 고해의 원인이 된다고도 하겠지만 해탈과 열반의 길로 밀어주는 역할도 할 것이고, 하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을 갈고 닦아 더욱 빛나게 해주기도 하고, 어떠한 삶을 지금 살고 있는가 하는 시금석의 역할도 할 것이다. (1982년 5월 31일자 일기 중에서)
박근혜의 삶은 결코 그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삶이 아니었다. 물론 대통령의 딸에서 퍼스트레이디까지 빛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로 인한 대가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책임과 희생이 뒤따랐다. 그의 삶은 인간이 과연 얼마만큼의 고통과 외로움을 감수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시험대에 오른 것만 같았다. 물론 세상에는 그보다 더한 고통과 시련을 받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을 되짚어 보면서 우리가 대통령의 딸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박근혜가 결코 평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지나왔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내공을 쌓아왔다는 것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것은 결코 헛된 작업이 아니었길 바란다. 그 세월을 알아야 박근혜라는 인물을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될 테니 말이다.
박근혜는 인생의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 정치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지만 본래 그의 꿈은 대학 교수였다. 그에게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만큼의 재능이 있었고 실제로 꿈의 실현을 위한 준비도 착착 진행되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1974년 봄,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박근혜는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유학은 이를 기특하게 여긴 아버지 박정희의 선물이었다. 유학 생활은 청와대 생활에만 길들여진 박근혜가 대통령의 딸이 아닌 20대의 여인으로서 젊음과 낭만을 쌓아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만일 그가 유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더 넓은 곳에서 견문을 쌓으며 학자로서의 길을 가기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가 프랑스로 떠난 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그 해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서는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그것은 8. 15기념식에 참석한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육영수는 어이없게도 저격 사건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육영수는 박정희 대통령 이상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아왔던 영부인이었다. 그녀는 우아함과 검소함과 인자한 이미지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대통령을 보좌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영부인이었던 육영수에 대해서만큼은 딱히 흠잡을만한 점을 찾지 못한다. 그만큼 육영수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올바른 처신으로 적을 만들지 않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육영수가 그렇게 비명에 세상을 뜨고 난 후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그녀를 조문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자상했던 영부인을 잃게 된 당시 국민들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째서 육영수님의 서거에 내가 이렇게 슬퍼해야 하나 할 정도입니다.’
육영수 여사의 서거 이후 청와대로 밀려드는 조문 서신 중에는 이런 말도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때 프랑스에 있던 박근혜는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본 신문을 통해서야 어머니의 죽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문에 실린 부모님의 사진과 기사 내용을 보면서 저는 그것이 내 어머니에 관한 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의 어머니 육영수” 중에서)
어머니의 죽음. 얼마 전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정말 꿈이라고 밖에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는 그때 비행기 안에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린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인해 박근혜의 짧았던 유학생활은 그 길로 끝이 났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박근혜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버린 것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혼란스럽고 경황이 없는 와중이었지만 비어 있는 퍼스트레이디 자리는 누구라도 대신해야 했다. 어머니의 죽음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시간에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라는 중책까지 함께 짊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혼자가 되신 아버지와 자신보다 더 상처가 컸을 어린 동생들을 토닥이는 것도 맏딸이었던 그가 해야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박근혜 역시 너무 어린 나이였다. 20살이 넘었다면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에는 한창 예민한 나이였다. 또한 사회경험이 전무한 당시의 그로서, 나라를 대표하는 퍼스트레이디라는 중책에 떠맡기에 22살의 나이를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불과 엿새 후부터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했다. 가슴에 상장을 단 채였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퍼스트레이디의 자격으로 참석해 그 역할을 꿋꿋이 수행했던 것이다. 공인이란 그런 것일까. 우리는 기쁘면 마음대로 기뻐하고 슬프면 마음대로 슬퍼할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는 어머니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여유마저도 없었다. 대통령 딸이라는 책임에 더해 어머니의 역할이었던 퍼스트레이디라는 책임까지 짊어지게 되었으니 그는 더 독해지고 더 단단해져야만 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빈자리 때문에 청와대가 쓸쓸하고 황량하게 보이지 않도록 채우기 위해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박근혜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하지만 22살의 박근혜가 떠맡게 된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또 그때까지 한결같이 공부만 해 왔던 박근혜에게는 너무 생소한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머니의 이전 행적이 워낙 많은 지지를 받았던 터라 그만큼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을 것이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박근혜는 그때부터 정치에 대한 이것저것을 배워나갔다. 아버지 박정희도 안보와 경제발전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틈틈이 들려주었는데, 그때 들은 이야기들은 아마도 박근혜의 가치관과 사상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5년여의 퍼스트레이디 생활로 단련된 정치 감각은 지금의 정치인 박근혜를 만든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란 환상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퍼스트레이디의 생활은 분명 유익한 경험이었을 수 있으나 적어도 박근혜에게는 그리 환상적인 경험은 아니었을 듯싶다. 퍼스트레이디는 그저 대통령 옆에서 미소만 지어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당시 퍼스트레이디의 파워란 요즘의 퍼스트레이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만큼 대단했다. 그때까지도 군주제의 잔상이 남아 있던 터라 대통령의 아내인 영부인은 곧 국모이자 왕비라고 생각할 때였다. 민심이 그랬던 만큼 권력을 발휘하려면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육영수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녀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어렵고 소외된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국민들의 민원을 받아 정리해 대통령에게 조언도 서슴지 않아 ‘청와대 내 야당’으로 통하기도 했다. 또 국내외의 주요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그녀만의 우아함과 노련함으로 좋은 인상을 심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서민들에게 무작정 잘하는 게 좋은 퍼스트레이디의 조건은 아니다. 페론 시절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비타는 ‘당신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바친다’며 빈곤층에게 돈을 마구 뿌리고 다녔다. 그래서 서민층에게는 존경과 찬사를 받았지만 반면 경제학자들은 그녀를 나라 경제를 망친 악녀로까지 평가한다. 그만큼 중도를 지켜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퍼스트레이디로서 어디까지가 해야 할 일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인지 가늠하는 것도 역량이다. 그토록 어렵고 막중한 일이었으니,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생활이 그저 행복하거나 달콤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한층 무거운 짐을 지게 된 박근혜. 그에게는 퍼스트레이디 이외에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힘들어하는 아버지의 위로가 되고, 여전히 어머니의 손이 필요한 두 동생을 이끌어갈 책임이 있었다. 때문에 그때부터 22살 박근혜 개인의 삶은 전혀 존재할 수 없었다. 20대란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다.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시기인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그때껏 계획해 왔던 자신의 꿈을 속절없이 포기했으며, 20대의 젊은이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도 포기해야 했다. 그런 점들이 퍼스트레이디라는 최고의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보낸 세월은 18년이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서거 후 그곳을 나와 은둔의 시간을 보낸 것도 18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근혜가 대통령의 딸로 살아왔다는 사실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 시간만큼의 고통의 세월이 존재했던 것이다. 무려 18년이라는 세월이 말이다. 그 세월은 20대였던 젊은 여인을 50대를 바라보는 중년 여인으로 바꾸어 놓는 긴 시간이었다. 게다가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 시간들은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금세 자신을 추스르고 남겨진 자신의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를 나온 순간부터 정치인으로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박근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부모에 관한 일에만 파묻혀 살아왔다. 인터뷰와 추도식이며 기념사업을 하고 아버지 박정희에 관한 영화나 책을 만들고 홍보하는 등 등 18년은 오로지 부모를 위해 쓰인 세월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반드시 모든 이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부모를 잃고 그에게 남은 것은 돌봐야 하는 동생들, 그리고 엄청난 충격과 사람에 대한 불신이 전부였다. 때문에 이후의 시간들을 견디며 그는 때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 않았을까.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양 극단을 오가며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것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박근혜를 비롯한 그 자녀들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되어 날아오기도 했다.
“사실 지금까지 저의 삶은 특별했습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나랏일을 해야 했고 20대 후반에는 부모를 잃은 가장으로 부모님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1993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중에서)
게다가 그 와중에 동생 지만은 여러 번의 마약 사건에 연루되기도 한다. 아마 그도 완전히 달라진 상황을 적응하지 못하고 내면의 고통을 그런 방법으로 표출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동생 근영 또한 결혼에 실패하고 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삼남매의 삶이 온통 틀어져 버린 것이다. 어쩌면 박근혜 역시 동생들처럼 자신을 온통 놓아버리고 망가뜨리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근혜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막중한 책임과 아버지에 대한 진실과 오해를 밝혀야 할 책임이 있었다. 특별한 부모님으로 인해 안게 된 책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오히려 더 막중해진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사후 그와 관련한 논란은 계속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의 업적과는 별개로 그가 집권할 당시 미화되고 숨겨진 진실이 있었던 만큼, 잘못된 부분들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은 때로 명백한 진실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과장되고 억측인 부분도 있었다.
그 모든 일이 박근혜가 조금 나이를 먹은 후에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사람들의 냉대와 차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했다. 그가 그러한 모든 것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 그것도 비범하신 아버지를 모셨고, 생전이나 서거하신 후나 평범하지 않은 관심과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 자신 또한 평탄하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너무나 끊임없이 겪게 되는 어려움들이라 이제는 어느 정도 만성이 되었다. 옛날 같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고통일 텐데도 지금은 눈물 한 방울 없이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1989년 11월 5일자 일기 중에서)
항상 폭풍우, 비바람, 번개 등 바람 잘 날 없이 불안하고 위태위태하여 마음 한번 푸근하게 가져보기 힘든 것이 내 운명인가 하고도 생각해 본다. (1989년 11월 29일자 일기 중에서)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얻지 않으면 그는 너무 많은 짐과 고통 속에 짓눌려,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그의 일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박근혜는 일정한 종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시기만큼은 불교사상에 많은 부분을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는 것, 아마도 그것만이 그를 지탱해 주는 힘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박근혜의 18년 세월 속에서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란 조금도 엿볼 수 없다. 그는 행복이나 기쁨과 같은 삶의 요소조차 모조리 비워 버렸다. 그런 감정도 사치라고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감정을 느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심지어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도 결혼도 모두 제외시켜 버린 박근혜였다. 그런데 사랑이 빠져버린 삶은 바람 빠진 풍선과도 같지 않을까. 혹여 내보이지 않은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알려진 바로는 그에겐 그 흔한 로맨스 하나 없다. 하긴 대통령의 딸로 살아가면서 그 흔한 미팅 한번 제대로 했을 리 만무하다. 그도 여자이니 분명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었겠지만 평범하지 못한 삶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도 중매를 통한 결혼조차 하지 못했으니 그의 삶은 참으로 팍팍하기 그지없었으리라. 어릴 때부터 평범한 사람으로 살지 못했던 그는 가정을 꾸리고 어머니로서 살아가는 평범한 여자의 삶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혹은 조금만 그 시기가 늦춰졌더라면 박근혜는 결혼한 여자로,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가게 되었을지 모른다. 박근혜의 대학 졸업 즈음에 실제로 어머니 육영수에 의해 박근혜의 결혼이 추진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 일은 자연스레 무산되었고 그로 인해 떠맡게 된 퍼스트레이디 생활은 결혼을 생각할 여유를 더더욱 만들어 주지 않았다.
물론 그 이후에도 아버지 박정희를 비롯해 주변사람들로부터 결혼 이야기는 왕왕 나오곤 했다. 우선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시절에도 아버지가 여러 차례 결혼을 권유한 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한사코 마다했다. 아마도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를 차마 혼자 남겨 둘 수 없었던 맏이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이번엔 친척들이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정작 결혼한 사람은 박근혜가 아니라 동생 서영이었다. 사촌 오빠 박재홍이 말하길, 박근혜는 결혼 얘기만 꺼내면 난색을 표시하며 말을 잘라버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독신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앞서 여러 번의 결혼 기회는 그때마다 때가 아니었고, 나중에는 잇단 불행의 덫이 가져온 충격으로 결혼 생각은 아예 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지나간 40년을 돌이켜 보면 그 많은 보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가져다 준 고통과 슬픔이 너무나도 컸기에 고통스럽게 추억될 뿐이다. 그런 생을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 모른다. 지난 세월은 태어났기 때문에, 사명과 의무가 있기 때문에 산 것이다. 태어나서 삶을 누린다는 것에 이런 즐거움도 있구나 하고 느낀 기억이 별로 없다. 보람이 있었다고는 하나 너무나 큰 고통이 그것을 짓눌러 버려 그 보람을 느낄 여유조차 없곤 했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것이 생이라면 새 생명을 또 탄생시킨다는 일은 그 아기에게 끔찍한 짐을 지워주는 일이 될 것이라고도 생각했었다. (1992년 5월 21일자 일기 중에서)
삶의 고통은 결혼과 함께 이어지는 또 다른 탄생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이어졌을 것이다. 굳이 새 생명을 만들어 인생의 고통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을 만큼 그의 삶은 그토록 외롭고 처절했던 것일까. 혹자는 박근혜의 고통을 어찌 서민들이 흘린 눈물에 비할 수 있겠냐고 말한다. 독재자의 자식이면서도 부모가 돌아가신 뒤 6억원 가까이나 되는 재산까지 남겨졌으니 고통이라는 말조차 ‘사치’라는 얘기다. 그러나 한 개인의 고통과 슬픔을 어찌 타인이 측량할 수 있으랴. 그것도 20여 년간이나 지속된 고통을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박근혜는 그 깊은 고난의 시간들을 꿋꿋이 이겨냈고 나아가 그 시간들을 자기 성숙의 계기로 만들었다.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고난도 ‘주어지는 것’이다. 다만 태풍은 자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배신은 그것을 행한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축복스런 기간에 인간은 기뻐하고 고난의 기간 동안 인간은 성숙하는 것이다 …… (중략) 슬픔이 와도 기쁨이 와도, 사회적으로 큰 일을 하건 평범한 일을 하건 지위가 높건 낮건 간에 마음을 비운 사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능히 감당할 수 있다. (1991년 12월 28일자 일기 중에서)
열반이란 자기 안의 모든 감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라고 한다. 이 불꽃들은 인생 고해의 원인이 된다고도 하겠지만 해탈과 열반의 길로 밀어주는 역할도 할 것이고, 하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을 갈고 닦아 더욱 빛나게 해주기도 하고, 어떠한 삶을 지금 살고 있는가 하는 시금석의 역할도 할 것이다. (1982년 5월 31일자 일기 중에서)
박근혜의 삶은 결코 그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삶이 아니었다. 물론 대통령의 딸에서 퍼스트레이디까지 빛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로 인한 대가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책임과 희생이 뒤따랐다. 그의 삶은 인간이 과연 얼마만큼의 고통과 외로움을 감수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시험대에 오른 것만 같았다. 물론 세상에는 그보다 더한 고통과 시련을 받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을 되짚어 보면서 우리가 대통령의 딸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박근혜가 결코 평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지나왔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내공을 쌓아왔다는 것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것은 결코 헛된 작업이 아니었길 바란다. 그 세월을 알아야 박근혜라는 인물을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될 테니 말이다.
첫댓글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고난도 ‘주어지는 것’이다. 다만 태풍은 자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배신은 그것을 행한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축복스런 기간에 인간은 기뻐하고 고난의 기간 동안 인간은 성숙하는 것이다 .이글을 보는이는 왜 박근혜인가를 세삼 생각하게하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 모든 고통과 인내가 오늘의 박근혜를 낳게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하며 2012년에는 기필코 대통령이 되어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태사공 후손님 좋은 글을 올려주셨내요 잘 읽었습니다.
첫댓글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고난도 ‘주어지는 것’이다. 다만 태풍은 자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배신은 그것을 행한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축복스런 기간에 인간은 기뻐하고 고난의 기간 동안 인간은 성숙하는 것이다 .이글을 보는이는 왜 박근혜인가를 세삼 생각하게하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 모든 고통과 인내가 오늘의 박근혜를 낳게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하며 2012년에는 기필코 대통령이 되어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태사공 후손님 좋은 글을 올려주셨내요 잘 읽었습니다.
보통사람은 아닌듯 합니다 한여자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존경 합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