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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스크랩)모음 스크랩 5/9일 주말아침에 만난 작지만 예쁜 친구들!!!
김항섭 추천 1 조회 47 15.05.09 09: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침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차는 사람들....걷는 사람들....달리는 사람들....

그리고, 타는 사람들...

요즘 붓꽃이 群鷄一鶴을 생각나게 하는 시기인것 같다..

 

위진(魏晉)시대,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瑞康), 산도(山濤), 왕융(王戎) , 유령(劉伶), 상수(尙秀) 곧 죽림 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 가 있었다. 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장(老莊)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청담(淸談)을 즐겨 담론했다. 그런데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위(魏)의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있던 혜강(瑞康) 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 그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되는 아들 혜소(瑞紹:? ∼304)가 있었다. 혜소가 성장하자 당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이부(吏部)에서 벼슬하던 산도(山濤)가 무제(武帝:256∼290,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 司馬炎)에게 상주(常住)하였다. "폐하, 서경(書經)의 강고편(康誥篇)에는 아비의 죄는 아들에게 미치지 않으며 아들의 죄는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혜강은 도륙 당했음).

 

비록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나 그 슬기나 지혜는 춘추시대 진(晉) 나라의 대부 극결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비書郞)으로 기용 하시오소서."  "그대가 추천할 만한 사람이라면 승(丞)을 시켜도 좋을 듯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무제는 비서랑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인 비서승(秘書丞)으로 혜소를 등용했다. 혜소가 처음으로 낙양(洛陽)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 (王戎)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저께 많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드높은 혈기와 기개는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群鷄一鶴]'과 같더군요." 이 말을 듣고 왕융은 대답했다. "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

 

 

부처꽃....

부처꽃이라는 이름이 된 이유는 무엇일가요?

 

바로 음력 7월의 보름 부처님게 이 꽃을 받친다하여 부처꽃이라고 불리운다고 하네요.

 

부처꽃에 대한 이야기는 옛날 마음이 곱고 불심이 깊은 불자 한명이 음력7월 보름 백중날

부처님께 연꽃을 봉양하기 위해서 연꽃을 따려 연못에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날 비가

너무 많이 내렸던 바람에 연꽃을 딸 수 없었다고 해요.

 

그러자 불자는 상심해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하면 연꽃을 따 부처님께 공양 할 수 있을지

생각을 했지만 어떠한 방법이 없었기때문에 그냥 눈물만 흘리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는데

그런 불자 앞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울고있는 사연을 들고 불심이 아주깊어 감명을 받았다며

연못가에 피어있는 자주색꽃을 가르키며 저?을 꺽어 부처님께 공양하도록 하라 말했습니다.

 

어쩔줄 몰랐던 불자는 연못가에 피어있는 자주색 꽃을 꺽어 부처님께 공양하였는데

이렇게 이 꽃으로 공양한 뒤로 이 꽃이 부처꽃이라고 불리었다 합니다.

 

노랑줄무늬 비비추도 있네요.

 

 

 

춤추는 달팽이

가만히 관찰을 해보았습니다.

두개의 지러미로 춤을 추고 있네요.

 

 

 

붉은토기풀은 九牛一毛가 생각나네요.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 때, 흉노를 정벌하러 5,000의 군사를 이끌고 이릉이 출전하여 10여일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난전중에 죽은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여 후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무제는 이릉 일족을 참형하라 하였으나 중신들은 이릉을 변호할 인재가 없었다.

 

이에 분개한 사마천이 무제에게 아뢰기를 "소수의 보병으로 수만의 오랑캐와 싸우다 흉노에게 투항한 것은 훗날 황은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함일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에 진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고 궁형(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형벌)을 내렸다.

 

세인들은 이때의 일을 '이릉의 화'라고 말한다. 이를 사마천은 친구인 임안에게 참담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법에 의하여 사형을 받아도 아홉마리의 소 중,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을 뿐이니, 나와 같은 자가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내가 이런 수치스런 일을 당하고도 죽지 않았으니 졸장부라고 여길걸세." 사마천이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가슴 아파하면서도 치욕을 무릅쓰고 살아가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태사령(조정의 기록사서)이었던 아버지 사마담이 임종시 '통사'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사기』를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서 불후의 명저로 손꼽히는 『사기』 130권이 완성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靑出於藍을 생각하게 하는 야생화.

 

'학문(學問)은 그쳐서는 안 된다(學不可以已).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靑取之於藍而靑於藍)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氷水爲之而寒於水).' 학문(學問)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므로 중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푸른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면학을 계속하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學問)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뜻인 '청출어람'이 나왔으며, '출람(出藍)'이란 말도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또 이러한 재주 있는 사람을 '출람지재(出藍之才)'라고 한다. 비록 제자일지라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스승을 능가할 수 있음을 강조한 순자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북조(北朝) 북위(北魏)의 이밀(李謐)은 어려서 공번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學問)을 했다.

 

그는 학문(學問)의 발전(發展) 속도가 매우 빨라 열심히 노력한 결과 몇 년이 지나자 스승의 학문(學問)을 능가하게 되었다. 공번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리어 그를 스승으로 삼기를 청했다. 그러자, 친구(親舊)들은 그의 용기를 높이 사고 또 훌륭한 제자를 두었다는 뜻에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칭찬(稱讚)했다. 우리 속담에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출람지재' '출람지예(出藍之譽)' 등과 함께 '청출어람'과 같은 뜻으로 사용(使用)되는 말이다.

산책로가 삭발을 했네요.

그냥 두어도 될것을....

 

 

은방울꽃, 만나기 쉽지 않은 야생화인데,...

논어 첫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Is it not pleasant to learn with a constant perseverance and application?"

"Is it not delightful to have friends coming from distant quarters?"

"Is he not a man of complete virtue, who feels not discomposure

though men may take no note of him?"

 

 

 

 

 

 

삶배나 비비추님이 생각나게 합니다.

 

知之者 不如 好之者, 好之者 不如 樂之者.”

  

"They who know the truth are not equal to those who love it,

and they who love it  are not equal to those who delight i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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