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삼국지의 번역은 사랑방(http://krighty21.blog.me/)에 올라온 번역본을 주로 참고하였고, 삼국사기는 인터넷에서 구한 '진갑곤'이라는 분이 배포한 자료를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글 모두 같습니다.
야생적인 표현이나, 갑자기 한 부분을 건너 뛰고 결론을 말하는 등 flight of idea(날라다니는 생각) 오류가 있는 부분들은 양해 바랍니다. 고치고자 해도 고치기 힘든 저자의 습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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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초기 역사에 있어 부여, 낙랑, 마한, 예맥, 말갈, 왜 등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집단의 존재는 무수한 논란을 야기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많은 소국들이 난립한 저급한 민족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인식하게 하는 주된 이유가 된다. 이는 고려시대에 작성된 역사서가 우리의 최고 역사서라는 한계와 중국사서의 주변민족에 대한 폄하와 소략한 기술이 주된 원인의 하나이나,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모화사상에 기초한 역사관과 일제로부터 시작된 역사관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여 사서를 정확히 분석하지 못한 현대의 역사가들에게도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 논고에서는 우리에게 많은 의문점을 야기하는 마한과 말갈을 중심으로 낙랑이라는 실체를 분석하고자한다.
1. 마한의 멸망과 낙랑-마한-말갈 연합의 탄생.
건국한지 13년 만인 기원전 6년, 백제는 낙랑과 말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마한과 낙랑이라는 두 집단 사이의 공간을 대부분 장악하였다. (삼국사기;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마한의 동의를 얻어 건국한 백제의 성장은 당연히 말갈을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말갈의 심한 반발을 야기하였다. 한편 한(韓)의 성장을 적절히 방해해 오던 낙랑으로서는 나날이 발전하는 백제를 더 이상 묵인 할 수 없었을 것이나 본국(漢)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기 어려운 현실에서 마땅한 대응책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낙랑은 동일한 적을 둔 말갈과의 연합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중국의 전통적 지배방식 이이제이를 택한 것이다. 남쪽의 마한과 북쪽의 낙랑-말갈 사이에 국한되어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는 백제로서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북쪽은 낙랑이 한의 군현으로 아마도 예맥족으로 생각되는 말갈과 연합하여 백제를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방향은 오직 하나 남쪽의 마한을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백제는 온조 26년(서기 7년) 10월부터 다음해(8년) 4월까지 마한을 완전히 병합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연한 결과로 마한의 백성을 근거지로부터 한산 이북으로 옮겼는데 이는 새로이 개척한 땅인 패수 대수 사이를 경영하기 위한 정책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정책은 온조왕의 커다란 실수였다.
멸망한 마한 지도자들의 선택은 3가지였을 것이다. 첫째는 적국인 백제에 수용되는 것, 둘째는 신라, 가야 등 마한의 지배를 받던 신흥국가로 이주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제와 쟁패하고 있던 낙랑으로 이주하는 것. 그리고 마한의 대다수 지배 세력은 자신에게 부용하던 백제, 신라, 가야 등에 빌붙기보다는 원수의 나라인 백제와 싸우고 있고, 또 맞설만한 힘을 갖고 있던 낙랑으로의 이주를 선호하였을 것이고, 신흥세력인 백제와 신라로 주민들을 빼앗기고 있던 낙랑-말갈은 이를 당연히 환영하였을 것이다.
마한 멸망 당시에 낙랑-말갈로 이주한 마한의 지배세력은 한산 이북으로 강제 이주당한 마한 주민과의 연결을 통해 마한의 재건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그 근거가 바로 다음의 기록이다.
온조왕 34년 (15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아마도 우곡성은 마한 주민이 대규모로 이주당한 지방을 관장하던 거점으로 생각되는데, 이 반란은 온조왕이 직접 출전할 정도이니 대규모의 조직적 반란이었을 것이다. 비록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대단히 컷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온조왕 37년(18년)의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수의 동북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흉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패수 대수 사이에 사람이 살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반란에 실패한 후 마한유민이 고구려나 북쪽의 낙랑으로 이주해 간 것이 아닐까? 마한유민이 이주를 실행하였다면 생소한 고구려보다는, 먼저 이주해간 지배세력이 있는 낙랑-말갈로 이주하는 것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규모는 고구려로 간 1천여 호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 당시의 마한 유민의 탈출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韓)전의 염사착의 일화로 각색되었다고 생각한다.
“王莽의 地皇 연간(20-22년)에, 廉斯鑡이 辰韓의 右渠帥가 되어 樂浪의 土地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우리들은 漢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戶來이다. 우리들 천 5백명은 材木을 벌채하다가 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만 5천명과 弁韓布 만 5천필을 내어놓았다.
이 염사착의 일화는 비록 漢과 辰韓으로 표현되어있지만 地皇 연간(20-22년)이라는 시기, 그리고 포로를 구출하였다는 점 모두 마한유민의 탈출과 일치한다. 진한에서 동족 15000명을 내어놓았다고 하였는데 15000명은 2000-3000호에 해당하는 숫자로 고구려로 탈출한 사람들보다 많은데 결코 진한이 내놓을 수 있을만한 숫자가 아니다. 따라서 이 15000명은 바로 패수, 대수 사이의 마한유민이라고 생각한다.
지속적인 마한유민의 유입으로 세력이 강대해짐으로써 낙랑-말갈은 남해왕 11년(14년) 신라를 침입하고, 온조왕 34년(15년) 우곡성의 반란을 일으키고, 온조왕 37년(18년)부터 패수 대수 사이의 마한유민의 탈출을 지원하고, 온조왕 40년(21년) 드디어 백제를 두 번이나 공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주근이 반란을 일으킨 우곡성인데, 이 우곡성은 다루왕 29년(56년) 말갈을 대비해 성을 쌓고, 기루왕 32년(108년)과 구수왕 16년(229년)에 말갈이 계속 침입했던 곳이다. 따라서 우곡성은 말갈과의 경계에 위치해있던 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백제가 온조왕이후 구수왕 때까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우곡성을 말갈과의 경계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은 우곡성의 북쪽에 백제가 도모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집단을 저자는 낙랑-마한-맥(말갈)의 연합세력으로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마한은 분명 온조왕 26년(7년) 백제에 멸망하였다. 한 소국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 마한 전체가 멸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낙랑-마한-맥(말갈)의 연합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