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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
마 21:33-46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마 21:33-46 /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막12:1-12,눅20:9-19] 이제 이 비유를 들어라.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쳤다. 그러고는 포도즙을 짤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운 뒤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다른 나라로 갔다. 34) 포도를 거두어들일 철이 되자 그는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때려 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다. 36) 지주는 다시 더 많은 종들을 보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37) 마지막으로 주인은 그의 아들을 보내며 `내 아들이야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이 오는 것을 보자 서로 말하였다. `저기 상속자가 오는구나. 잘됐다. 저놈을 죽여 버리고 이 포도원을 우리가 차지하자.' 39) 그러고는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다 죽여 버렸다. 40) 그렇다면 포도원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 주인이 소작인들을 어떻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41) 유대인 지도자들이 대답하였다.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그 포도원은 제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세줄 것입니다.' 42)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ㄱ) `집 짓는 이 쓸모없다 버린 돌이 이제는 어떤 돌보다도 더욱 소중한 돌이 되었다. 여호와께서 이루신 이 일 그저 놀랍기만 하여라. 엄청나기만 하여라.' (ㄱ. 시118:22-23) 43)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늘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소출을 잘 내는 백성들에게 그 나라를 맡기실 것이다. 44) 이 진리의 반석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모두 깨어질 것이고 이 돌밑에 깔리는 사람은 먼지처럼 흩어지고 말 것이다.'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을 알고 46) 예수를 붙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33-40)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울타리를 두르고 포도즙을 짜는 틀과 망대까지 건설하고 농부를 고용해 세를 주어 포도원을 경작하게 하고 다른 나라로 갔습니다. 마치 세상을 창조하듯이 성전을 건축하듯이 집주인은 포도원을 위한 모든 시설을 다 만들어주고 농부들이 열매를 맺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열매를 거둘 시기가 되자 주인은 자신의 종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세를 받은 농부들은 열심히 일해서 소출의 일정 부분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소작료를 받아오도록 주인이 보낸 종들을 잡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참으로 악한 사람들입니다. 이 악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집주인은 농부들의 악한 행위를 당장 응징할 수도 있었습니다. 농부들을 징벌하고 포도원을 성실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집주인은 그리하지 않고 농부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습니다. 농부들이 자기가 보낸 종들을 심히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친 것을 알면서도,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냅니다. 그들이 돌이키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계속해서 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집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면서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 아들이 상속자이므로 그를 제거하면 주인의 재산이 자기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들마저 죽이고 맙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집주인이 “자기 종들과 아들을 죽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41-46) 종교지도자들은 상식적으로 대답합니다. 악한 농부들은 진멸하고 포도원은 다른 농부에게 세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빼앗으셔서 순종의 열매를 맺을 새 백성에게 주실 것임을 풀어서 설명하십니다(시 118:22-23). 예수님이라는 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이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을 향한 말씀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당장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따르는 무리들이 두려워서 할 수 없었습니다.
적용: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포도원 농부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삶으로 나타내는 결과를 보고서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게 됩니다. 세상 사람은 세상의 열매를 맺히게 마련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초석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천국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갈 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살고 예수님만을 바라고 살고, 예수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며 성령을 의지하여 풍성하게 천국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천국 열매를 맺는 원리)
< 설 교 >
소작료를 내고 있습니까
마 21:32-46 / 안효관 목사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집주인이 커다란 포도원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최고의 포도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포도원을 망치는 짐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견고하게 만들었고, 포도를 추수한 다음에 포도즙을 짜기 위한 즙틀도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약탈자들이나 짐승들이 침입하는 것을 막고 경고하기 위해서 높은 망대도 설치해 놓았습니다. 이 망대는 추수한 포도나 포도즙을 보관하고 저장하는 창고로도 쓰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나무를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집주인이 갑작스럽게 멀리 외국으로 떠나야 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평소 자기가 신임하던 농부들을 불러 그들에게 세를 주기로 했습니다. 농부들은 집주인과 얼마의 세를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을 인계받아 경작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땅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줄 때에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세를 주었습니다. 하나는 수확량을 일정비율로 나누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남의 땅을 빌려 소작하는 사람들이 땅 주인에게 주는 소작료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조선시대부터 경주지역에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는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를 기록한 책에 보면, 옛날에는 보통 70-80%를 소작료로 지불했다고 합니다. 쌀 10가마니를 추수하면 7-8가마니는 땅 주인에게 주고 정작 농사를 짓는 소작인들은 2-3가마니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알진 못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논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에는 5:5정도로 나누기로 하고 세를 줍니다. 쌀 10가마니가 생산되었다면 주인에게 5가마니, 경작한 사람이 5가마니를 나눠 갖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수확량에 상관없이 정해진 양의 소출을 소작료로 지불하는 것입니다. 논 한 마지기를 빌려서 농사를 지으면서 2가마니를 소작료로 주기로 약속을 했다면 그 한 마지기에서 쌀이 10가마니가 생산되었든 5가마니가 생산되었든 주인에게 2가마니를 주고 나머지를 자신이 갖는 것입니다. 요즘 점포를 세 놓을 때는 대부분 이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느냐 하는 것에 상관없이 한달에 30만원이면 30만원, 100만원이면 100만원의 월세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인과 농부들이 어떤 방법으로 소작료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농부들이 주인에게 세를 바치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을 인계받은 것은 확실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집주인은 농부들과 약속한 세를 받기 위해서 자기 종 몇 명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주인은 의당 농부들이 약속한 소작료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소작료를 주는 대신에 집주인이 보낸 종 가운데 하나를 죽이고, 하나에게는 심하게 매질을 하고, 하나에게는 돌로 쳤습니다.
여러분, 왜 농부들이 집주인이 보낸 종들에게 그렇게 했겠습니까? 주인에게 약속한 세금(소작료)을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처음 집주인에게서 포도원을 받아 소작하기로 약속할 때와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 때는 정말 집주인에게 소작료를 잘 내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그 포도원에 대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주인은 멀리 외국에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마음만 먹으면 포도원을 송두리 채 자기들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소작료를 내야할텐데도 소작료 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농부들에게 배신당한 집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의 마음과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집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내 아들은 그래도 공경하리라”고 생각하고는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집주인의 아들을 보자 농부들의 사악한 본심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38절입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악한 농부들은 집주인에게 마땅히 지불해야할 소작료를 지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포도원의 소유권을 빼앗겠다고 생각하고 서로 모의해서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비유로 하셨습니다. 비유라는 것은 다른 본질적인 사건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도 이런 의도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집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포도원에 심겨진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고, 집주인에게 포도원을 위임받은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집주인이 세를 받기 위해서 보냈던 종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이고, 마지막으로 보낸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보면 집주인이 종들을 한번만 보낸 것이 아니라 거듭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는지 모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렘 7:25-26, 25:4, 26:5, 29:19, 35:15, 44:4 참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부지런히 당신의 종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멸시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며 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누가복음 11:50-51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선지자들을 보내도 하나님의 거역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그들이 아들을 보고, 아들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걸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의 글 맨 처음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임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만유의 후사이신 독생자를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의 말은 듣고 돌이켜 회개할 것을 기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농부들이 집주인의 아들을 죽인 것처럼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을 보고서도 좀처럼 뉘우치지 않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계속된 선지자들의 외침에 대해서 무감각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한다”(행 28:26, 사 6:9, 마 13:14)는 말씀처럼,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이 깨닫지 못했습니까? 왜 그렇게 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외쳐도 깨닫지 못하고, 왜 메시야가 친히 와서 말씀을 선포해도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욕심과 교만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에 농부들이 집주인의 종들을 죽이고 심지어 상속자인 아들까지 죽인 것은 자신들을 긍휼히 여겨 포도원을 맡겨주신 주인의 은혜를 망각하고, 심지어 주인의 포도원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포도원은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것인 양, 자기들의 것을 만들려는 욕심 때문에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고 맙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의 말을 듣지 않고 심지어 메시야가 오셔서 말씀을 외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 합니까? 메시야가 자기들의 욕망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고, 자기들에게 주어진 권세를 휘두르며 맘대로 하고 살아왔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와서 자기들의 권위를 위협하고 자기들이 지금까지 누렸던 기득권에 강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메시야를 죽여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유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유업을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를 자기들의 것인 양 착각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이용해서 자기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더욱 움켜쥐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을 성실하게 지키려 하기보다는 그 율법을 사유화해서 율법으로 백성들을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자기들 앞에 와서 머리를 숙이며 존경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자리를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메시야가 오셔서 그게 잘못되었다고 고발하니까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메시야를 죽여야만 그런 권력의 자리를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인 이스라엘을 마치 자기들의 것인양 사유화해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을 죽였던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독생자 메시야를 죽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까? 그들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 말씀하신 그 말씀 듣기를 거부했습니까? 우리는 안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우리 자신을 고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악한 농부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도 너무 자주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세상적인 이익과 적당하게 바꿔치기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선물들을 마치 우리의 것인 양 자랑할 때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마치 내가 잘 나서 가진 것인 양 착각하기도 하고, 나는 마땅히 그런 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내 힘으로 얻어지거나 지켜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 생명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그 생명을 누리를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우리의 가정이나 우리의 사업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지켜주신 것입니다. 비록 많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가진 재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사실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 것인 양 착각합니다. 내 것인 양 내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가운데 1/10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립니다. 십일조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면서 마치 내가 하나님께 큰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드리고 있진 않습니까? 일하게 하셨고 소득을 얻게 하셨음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감사를 잃어버리고 아까워서 드리는 손이 떨리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가져가실 때에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의 고백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그 많던 재산 다 잃었어도, 사랑하는 10명의 자식을 한 순간에 다 잃었어도, 그 재산과 자녀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욥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하는 사업이 망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까? 통장에 동전 한 푼 남은 것이 없어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내 몸에 건강을 잃었어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까?
왜 안 됩니까? 우리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한 농부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우리 것처럼 움켜쥐고서 하나님이 되돌려 달라고 하시면 아까워하고,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하나님이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달라고 하지 않고, 그저 약속한 소작료만 달라고 하셔도 그것을 아까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와 헌금 - 그것은 우리에게 재물을 맡겨준 것에 대한 소작료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것 -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건강과 시간에 대한 소작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봉사 좀 해놓고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봉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왜 그렇게 형제 사랑하는 것이 힘이 듭니까? 사랑받기를 원하면서 사랑하지 못하고, 대접 받기는 원하면서 대접할 줄 모르는 우리들 아닙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형제를 용서하고 나를 오해하는 형제까지도 포용하는 것은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소작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일만 단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100데나리온 빚진 자기 친구를 용서하지 못한 것처럼, 엄청난 용서와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작은 용서 하나 하지 못해서 평생 원수처럼 지내거나 복수하려는 생각이 우리 마음 구석에 있지 않습니까?
의당 소작료를 내야 함에도 소작료를 내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주인의 포도원까지 빼앗으려 했던 악한 농부는 비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악한 농부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악한 농부가 자신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4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그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깨달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깨닫긴 깨달았는데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불행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긴 깨닫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오늘 본문의 종교지도자들도 말씀을 듣고 깨닫긴 깨달았는데 회개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깨닫고 자기들의 잘못이 드러나면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으니까 메시야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회개에 이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강퍅해져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50여일 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50여일 전에 너희가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던 그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야요,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너희들이 죽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다.” 그렇게 외쳤습니다. 그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찔렸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어떻게 하면 이 엄청난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새 생명 얻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그들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백성들처럼 ‘어찌할꼬’ 탄식하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똑같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는데 백성들은 회개하고 영생을 얻은 반면, 정치지도자들은 이를 갈며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맙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책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이 오고 마음에 찔림이 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할 때에 용서가 있고, 회개할 때에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깨달았음에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종교지도자들처럼, 또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산헤드린 공회의 정치 지도자들처럼 회개하지 않으면 형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죄를 용서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또 다른 죄를 짓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지만 회개하지 않음으로 예수님을 죽이고 맙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정치지도자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지만 회개하지 않음으로 스데반을 죽이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깨달음으로 회개에 이릅니까? 마음에 찔림을 받아도 회개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강퍅한 마음으로 변해갑니까?
소작료 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인의 포도원까지 빼앗으려 했던 악한 농부가 우리 자신이라는 말씀 앞에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든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소작료 내기를 거부하거나 싫어했던 우리의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고 축복의 자리로 들어가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이후로 우리의 삶에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로 소작료를 하나님께 기쁘게 드리시는 충성스러운 농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응당한 진노
마태 21:33-22:14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다 알지만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모르던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반드시 진노의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녀를 파괴하는 것이나 사람이 있을 때에 그러한 대상에 대하여 분노할 것입니다. 분노가 없다면 그 사랑이 참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이 건강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만 생각하지 하나님의 엄중함을 잊었기 때문인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상고할 두 비유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건강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상고할 것이 포도원 비유입니다.
어떤 집주인이 포도원을 일구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떠났습니다. 추수철이 되어서 주인이 세를 받기 위하여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세를 바치기를 거부했을 뿐만이 아니고 이들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법에 의하면 농부가 누구에게도 세를 바치지 않고 3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 그 땅은 무소유의 땅으로 인정받고 그 땅은 경작한 사람의 것이 됩니다. 농부들을 이것을 노리고 세를 바치는 것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감히 박대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농부는 주인이 죽었거나 토지 소유를 아들에게 넘겨준 것으로 오해했을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면 땅이 자기들 차지가 되니까 그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서 는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비유를 들은 사람은 대답했습니다. "악한 농부들을 죽이고 소출을 잘 바칠 사람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시편 118편 22, 23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말씀하시는 순간 이 비유의 의미가 뚜렷해졌습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악한 농부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자신들이고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처형할 결심을 했지만 백성들이 두려워서 못했습니다.
Ⅰ.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할 때에 진노하신다
이 비유에는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언적인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아죽였고 약 40년 후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나라가 망하고 유대인들의 2000년에 걸친 유랑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농부들의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주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2000년 전 유대 지도자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실수는 특별히 목회자가 저지르기가 쉽습니다.
(1) 교회
목회자는 목회 비전이라는 고상한 단어를 붙이지만 결국은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목회를 통하여 이루어보려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교회가 나의 것, 우리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합니다. 제가 서울 침례 교회에 부임하였을 때에 집사님들에게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집사회의를 하는 것은 우리의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같이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보지 않았으면 발언하기 마시기 바랍니다." 집사님들이 제 의도를 이해해주시고 분명한 관리인의 자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평안하게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 목장
목자들은 지나치게 목장 부흥으로 인하여 압박감을 느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압박감은 자신을 목장 관리인이 아니라 소유주로 보기 때문에 생기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보면 주인은 울타리를 치고 망대를 높이고 정성을 쏟습니다. 주인은 반드시 수확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계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포도가 잘 영글어서 좋은 포도주를 만들려면 4-5년이 걸립니다. 주인에게 의지하고 열심히 성실하게 섬기면 목장에서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종으로서 할 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목장 식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5명의 전도 대상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1년에 1명 이상 허그식 할 것을 위해 기도하고, 안 믿는 자를 보내주시면 정성껏 섬기고 사랑하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실제로 보내주시면 섬기고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으실 것입니다.
(3) 직업과 자녀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성향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하나님의 사업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에게 의지하여 시작했다가 사업이 번성하기 시작하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에 의존하여서 사업을 하고 하나님에게 바칠 물질도 자신이 적당히 이곳저곳에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면 이 시간에 결심하시고 첫 번째 약속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나았을 때에는 하나님이 주셨다고 감사하기도 하고 헌아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키우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장성한 후에는 신앙 교육은 소홀히 하고 무조건 공부만 잘해야한다고 강요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주신 탈란트를 살리기보다 이웃에게 자랑할 수 있는 전공을 택하도록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은 다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시고 아기 낳았을 때의 자세로 되돌아오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할 때에는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가 따릅니다.
교회도 교회의 머리가 주인이라는 것을 잊고 목사의 것, 지도자의 것, 교인들의 것처럼 사역을 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따릅니다. 주님이 촛대를 옮기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2:5에 보면 주님이 소아세아에 있는 교회에 여러 가지로 경고를 하시고 경고를 좇지 않을 때에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촛대는 성령과 하나님의 임재함을 의미합니다. 촛대가 옮겨진 교회는 어떨까요? 여전히 사람도 많이 모이고 어쩌면 교인 숫자가 증가할지도 모르지만 그곳에는 이미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믿게 되는 역사도, 변하지 않을 사람이 변하지 않는 역사도, 응답 받지 못할 것 같은 기도 제목이 응답 받는 역사도 일어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 지도자, 성도들은 예수님을 교회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셔야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무시하면 개인적으로도 부정적인 결과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요 14:6). 이러한 주님이 떠난 인생이 어떠하겠습니까? 길이신 주님이 없으니까 길을 몰라 방황하게 됩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없으니까 지적인 혼동이 옵니다. 생명이신 주님이 없으니까 기쁨이 사라지고 좌절과 절망이 깃들입니다. 혹시 이러한 삶을 살고 계신 분이 계시면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보고 그렇다는 결론이 내려지면 회개하고 주님이 소유권을 인정하여 다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되찾으시기를 바랍니다.
Ⅱ. 초청을 무시할 때 진노하신다
하나님을 무시할 때에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두 번째 비유의 내용을 이런 것입니다. 어떤 임금님이 아들 혼인 잔치를 베풀고 손님을 청했는데 초청 받은 사람들이 다 바쁘다고 초청을 무시해서 임금님이 진노해서 그들을 멸망시키고 시장 바닥에 가서 초청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잔치 자리를 채웠다는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은 잔치에 초청하신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초청을 무시할 때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이냐는 것이 초점이지만 배경에 깔려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잔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늘나라는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왕과 같다"라는 말로 비유를 시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에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곳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복음을 전하면 나중에 믿겠다고 미루는 분들이 있습니다. 늙어서 혹은 죽기 전에 믿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예수님 믿는 것이 잔치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가 잔치라는 것을 모르니까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는 하지만 복음은 전하는 사람 쪽으로는 안타깝습니다. 오래 동안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배고파하는 사람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서 갖다주었더니 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자기는 굶어죽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먹겠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잔치라는 것을 안 믿는 사람들이 모르는 이유는 결국은 이미 믿는 사람들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삶이 잔치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크리스천의 첫째 의무는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행복할 때에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첫째 이유요 그래야 전도가 된다는 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이 잔치라고 해서 물론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실망도 있고 좌절도 있고 낙심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쁘지 않는데 기쁜 척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잔치를 즐겁게 하는 요인들이 됩니다. 배고픈 것을 모르는 사람이 음식 맛을 즐길 수 없듯이 아픔이 없는 삶에서는 진정한 잔치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많은 전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성도들의 삶에서 잔치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환경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쁨 가운데에 사는 분들을 볼 때에 안 믿는 사람들이 끌리는 것입니다.
2. 초청은 특권이면서 의무이다
임금님이 혼인 잔치에 초청을 했는데 사람들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당시 중동 풍습은 큰 잔치에는 초청을 두 번 받아야간다고 합니다. 첫 번 초청이 잘못 전달된 것일 수가 있기 때문에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임금님이 두 번째 초청을 했는데 이들은 아예 무시하고 자기 볼일만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초청의 말을 전하기 위하여 온 종들을 박대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청중들도 그렇게 이해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초청을 무시한 사람들을 임금님은 군대를 보내어 멸망시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그러할 때에 중대한 결과가 생길 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무시할 때에 중대한 결과가 생기리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습니다. 초청에 응했다 안 했다는 자체보다 초청한 사람을 무시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회장님을 생각하십시다. 학생이라면 총장님을 생각하십시다. 회장이나 총장이 개인적으로 여러분을 집에 초대했다면 엄청난 영광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이유도 대지 않고 참석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진노를 살 것입니다. 그리고 진노를 사도 주위 어느 분도 이유도 없이 초청을 무시한 사람을 나무라지 회장님이나 총장님이 진노하는 것을 나무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잔치의 초대를 무시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당연하기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면 진노가 따릅니다. 좋은 예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셔서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요단강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줄 테니 강을 건너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잔치로의 초청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저하고 강을 건너기를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한 그 세대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무시할 때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제가 오늘 주보함에 썼습니다만 20에이커의 땅을 사려다가 포기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땅을 사고 거기에 건물을 지으려면 많은 희생이 요구됩니다. 거의 다가 초신자인 우리 교인들에게 희생을 감수할 것인가? 또 요즈음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은 갓 이민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신분도 불안하고 생활도 안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희생을 각오하더라고 금전적으로 도울 능력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땅을 사기로 결정했던 이유는 당시 여러 가지 여건을 보아서 하나님의 초청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이 분명하다면 그것을 무시했을 때에 생길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땅을 사지 않기도 결정을 보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이삭을 잡아바치라고 하셨듯이 우리를 시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결의를 확인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모험도 하겠노라 는 우리의 각오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우리 교회는 계속하여서 하나님께 쓰임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초청이 있을 때에는 응하기 바랍니다. 그곳에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초청을 거절했을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경홀 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쁨으로 받아드리셔서 잔치의 기쁨을 맛보도록 하십시다.
3.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옷 입는다
이 비유에 보면 임금을 무시한 또 하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초청 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까 임금님은 큰길에 가서 아무나 다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큰길이라면 도시에서 주위 마을로 연결되는 길이니까 가난한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이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보통 같으면 임금님에게 초청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계제가 혼인 잔치인 만치 임금은 그들에게 옷을 공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공급된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사람이 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지 등에 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임금이 준비한 것을 무시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14절에서 부름 받는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라고 말한 것은 구원받는 사람의 숫자가 소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물론 소수가 될 수도 있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부름을 받았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말로 바꾸면 교회 다닌다고 다 구원 얻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한 것을 무시할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따릅니다. 하늘나라는 잔치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옷을 입어야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롬 4:5).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응답 받을 것을 믿으면 기도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를 죄 없다고 인정해주시고 의롭게 사는 사람처럼 인정해주십니다.
가끔가다가 자신은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여한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옷 입지 않으면 자신의 자격과 거룩함으로 옷 입겠다는 것인데 그것 같고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표현대로 밖에 쫓겨나서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가끔 가다가 구원의 확신이 흔들린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만일 죄 때문에 그렇다면 죄를 회개하여야합니다. 죄를 지으면 영적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의 확신을 흔들어 놓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죄가 특별히 없는데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옷 입지 않고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를 생각하여야합니다. 자신의 의로 앞에 서려고 하니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오로지 예수님으로 옷 입고 그가 공급해주시는 의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마 21:33-46 / 윤영택목사(옥스포드교회)
하나님 나라의 백성 이스라엘이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군왕들에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로마는 본래 잡다한 신들을 섬기는 국가였기 때문에 식민지 국가의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다신교 정책을 쉽게 운영했습니다. 이런 정책 아래 예루살렘 성전제사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았습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관리인들은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교적인 행사와 자치권 행사의 자유도 보장받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댓가로 자리를 보장 받는 정치적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허수아비 대제사장에게 협력하며 종교권력을 행사하였으니 은연 중에 로마제국의 지배구조를 인정하고 동조하는 권력집단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종교권력자들은 무늬만 유대인이지 배후에 로마제국의 세력을 업고 힘없는 백성의 고혈을 이중삼중으로 빨아먹던 정치적 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임명한 분봉왕의 통치를 받던 백성들은 로마 황제와 분봉왕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바쳐야 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관장하는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에게는 성전세와 십일조와 헌물을 따로 바쳐야 했습니다. 분봉왕들은 세리들을 앞세워 악랄한 세금 착취를 하였고 빚을 진 농부들은 땅을 담보하여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가중되는 경제적 압박과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고리 이자를 갚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땅을 빼앗겼습니다. 분봉왕 헤롯의 아들들과 그의 가족들, 로마제국의 꼭두각시 귀족들은 이런 식으로 백성들의 땅을 가로채 토지를 늘려갔고 대지주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땅을 잃은 가난한 농부들은 노예나 빈곤층으로 전락하여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며 근근히 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이 식민지 백성들이 겪는 이중삼중의 고통이었습니다. 가족 공동체 농촌사회였던 이스라엘은 경제적 압박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고 혈연간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깨어졌으며 이스라엘의 상호부조 정신은 붕괴되고 사회는 갈수록 거칠어져 갔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런 사회 환경 배경에서 나온 이야기였습니다. 그 당시 외지에 거주하는 부유한 유대인이나 로마 사람들이 팔레스틴의 농지에 투자하여 지주 노릇을 했습니다. 이런 지주들은 과도한 세금에 지친 농민들의 반란이나 거친 행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먼 지방이나 외국으로 나갔고 농장은 세를 주고 소작료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그 시대에 흔하게 있었던 부재지주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상황 설정은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포도원을 완벽하게 가꾼 주인은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다른 나라로 갔습니다.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났으니 당분간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실과를 거둘 때가 되었을 때 주인은 자기 몫을 받으려고 종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환대하지 않고 심히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주인이 장기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농부들의 마음이 돌변했습니다. 주인이 직접 왔더라면 혹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인 대신 종들이 왔을 때 농부들은 마음을 바꿔 주인에게 돌려야 할 세를 바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당시 사회가 평안하지 못하기 때문에 먼 나라로 나간 주인이 죽었거나 당분간 돌아올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흔히 발생했습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농부들도 이런 경우를 기대하고 이 기회에 우리 몫을 더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농부들의 반란소식을 들은 주인은 또 다른 종들을 더 많이 보냈지만 농부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직접 찾아가지 않고 이번에는 그 위험한 곳에 아들을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이 왔을 때 ‘저 사람은 상속자이니 그의 아들을 죽이고 우리가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하고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고 나가 거기서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이 포도원의 농부들은 보통 강심장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은 속으로 부르르 떨며 이런 악한 농부들이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고 분노하는 중인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 그들은 거침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이 악한 사람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주어야 합니다’ 유대사회의 고위층 인사들이었고 어쩌면 많은 소작농을 거느리며 넓은 포도원을 경영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당연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런 나쁜 농부들은 가차없이 처벌해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악덕 지주들과 권력자들에게 착취당하는 가난한 농부들에게 하셨을 때도 똑같은 대답이 나왔을까요? 물론 포도원의 주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던 팔레스틴의 가난한 농부들의 입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또 대토지를 소유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같은 부자들과는 다른 대답이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를 알지 못했던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입장에서 흥분하며 대답하였습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악한 농부들이 설마 자기들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라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이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십니다.
성경박사들이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시편 118편22절에 나오는 이 구절을 전에도 여러번 읽고 들었지만 그 말씀이 자신들에게 이런 식으로 적용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입에서 나온 그 다음 말씀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분노를 하늘까지 치솟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향한 책망인 줄 그제서야 깨닫고 부르르 떨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소? 누가 당신에게 허가를 내주었소?’ 하며 예수님을 무허가 집회 선동자나 사이비 종교인으로 몰아 내쫓으려던 성전 지도자들이 거꾸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습니다. 자기들 맘대로 호령하는 권력의 중심지 성전에서 도리어 책망과 경고를 받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즉시 체포하려 했지만 거기 둘러 있던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유월절을 지내러 성전 모인 순례객들이 모두 예수를 선지자로 알고 따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농부들은 주인에게 돌려야 할 소작료를 가로채고 주인이 보낸 종들은 물론 그의 상속자인 아들까지 죽인 못된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자기 입으로 인정한 것처럼 그 농부들은 진멸당해 마땅한 사람들이며 그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들은 주인의 입장에서 분노하고 그 악한 농부들을 성토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농부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악한 농부들처럼 하나님의 종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내어 쫓았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 나라를 완성하시려 오셨는데 그의 왕권을 거절하고 죽음에 넘길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책망을 받은 후에야 뒤늦게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지만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분노하며 이를 갈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어내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자신들의 입으로 말한 것처럼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맡겼던 복음의 열매 맺는 사역을 그들의 손으로부터 박탈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백성에게 복음 전하는 특권과 사명을 대신 맡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일하던 악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빼앗겼으며,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취급받았던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새로운 이스라엘을 한 몸으로 연결시키셨습니다.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교회는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이어받아 하나님 나라의 포도원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농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지난 시간 세 번에 걸쳐 소개한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 포도원과 연관되었습니다.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포도원으로 보냄 받은 두 아들, 그리고 오늘 읽은 포도원의 농부들입니다.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며,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는 신앙인을 상징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께 불순종하였다가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으로 버림 받은 세리와 창기들을 의미하는 동시에 회개하고 돌아온 이스라엘 나라 밖의 이방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 등장하는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빗대어 하신 말씀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던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과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가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 질문해야 하고 거기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 포도원으로 부르십니다. 거기 들어올 자격이 없는 우리를 불러 그 밭에 심어주셨고 오래 참음으로 열매를 기다리십니다.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하고 실제로는 불순종을 일삼는 아들보다는 처음에는 무례하고 괘씸하게 행동했지만 나중에 깨닫고 돌아와 순종한 아들처럼 뒤늦게라도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그 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처음부터 그 나라의 일군으로 선택받지 못하였지만 주인의 기대에 어긋나고 대항하던 악한 농부들을 대신하여 뜻밖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거절한 유대인들을 대신하여 그 포도원의 일군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 속에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뜻밖의 특혜를 얻은 우리는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들을 때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며 또 대답도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았으니 표리가 부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지적을 받고 발끈하여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던 행동은 그들이 얼마나 모순된 삶을 살고 있는지 말해줍니다. 그들의 영안은 그만큼 어두웠고 그들이 손에 거머쥔 세상의 권력과 명예는 눈앞에 와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끝내 배척하고 거절할 만큼 매혹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 생활을 하지만 사람이 변하고 삶이 변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환경과 조건이 변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신앙이 쉽게 변질되고 삶에 선한 열매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람 그 자체가 변화합니다. 생각이 바뀌고 태도가 변하며 인생관에 극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때 비로소 성령의 열매가 그의 삶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하나님 나라 시민의 모습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도래와 함께 이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대했지만 그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한 본질적인 신분 변화 보다는 삶의 질이나 안전, 풍요로움과 강력한 국가 권력에 시선을 집중하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일반 백성들이나 종교 지도자들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보다 경제적으로 좀 더 부유하고 율법적으로 조금 더 고상한 위치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을 기대했을 뿐입니다. 이땅에서 가진 지위와 재력과 땅과 권력 등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일은 전혀 관심이 없었던 세속적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주님이 오셨고 가장 먼저 선포하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지 그들이 기다리던 정치적 해방이나 경제적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원하며 꿈꾸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주인이며 왕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영광스런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에 오셨을 때 이미 그 나라는 시작이 되었고 주님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만국의 백성들을 그 나라로 부르셨으며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며 열매를 거두고 계시는 주님은 지금도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기를 소원하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자녀들을 시민으로 받으십니다.
우리를 그 나라로 부르신 포도원의 주인은 주님의 삶을 본 받는 사랑과 자기 희생적인 섬김과 겸손의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나를 포도원의 일군으로 부르신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며 내가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고 있다면 그것이 곧 그 포도원의 열매를 주인에게 돌려드림이 됩니다. 나에게 주신 그 무엇이든지 건강이나 물질이나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나 시간이 주의 나라를 위하여 선한 목적으로 기쁘게 드려짐이 되었을 때 거기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선하신 주인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 사명을 거절하거나 주인에게 돌려야 할 열매를 내것으로 가로채는 어리석음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소유를 맡아 일하며 주인이 주시는 분깃을 감사함으로 나누는 선한 청지기로 살아야 합니다. 주인은 꼭 다시 오십니다. 선한 일에 충성을 다한 농부에게는 그 수고의 열매를 상급으로 나누시기 위해 오시고, 주인의 포도원을 탐내며 스스로 주인 노릇하고 주인을 거역한 악한 농부들에게는 심판을 위해 오십니다. 세상에는 교회도 많고 교인도 많으며 일군도 많습니다. 주인이 오셔서 주인의 뜻을 따르는 겸손하고 충실한 일군을 찾으실 때 나는 어떤 자리에 서게 될까요?
끝이 좋은 인생이 되려면
마 21:33-46 / 송기성 목사(정동제일교회)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라는 독일 격언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작도 좋고, 과정도 좋아야 하겠습니다만 끝 마무리를 잘 해야 모든 것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물론이거니와 부부생활이나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주의하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막12:1~12;눅20:9~19). 이를 달리 말한다면 악한 농부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 농부, 곧 악한 농부는 그 인생의 끝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범법자나 전과자 등을 악한 농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악한 농부의 비유를 ‘들으라’(Listen)고 명령조로 말씀하신 대상은 뜻 밖에도 성전에 있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마21:23,45).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막중한 사명을 맡은 그들이야말로 끝이 좋은 인생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에 그들은 결코 끝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끝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끝이 좋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요? 주님의 말씀을 통해 교훈과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1. 자기의 분수와 본분을 끝까지 잘 알고 지켜야 한다.
어느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포도원을 망치는 야생동물을 막기 위하여 울타리를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까지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열매 거둘 때가 되어 주인은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열매를 보내기는 커녕 주인이 보낸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또 한 사람은 죽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돌로 쳤습니다. 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인의 아들까지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습니다. 그것은 주인과의 관계와 약속을 비겁하게 깨뜨려버린 배신이며 배은이었습니다.
포도원 농부, 그들은 결코 포도원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포도원은 결코 그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주인의 아들 곧 상속자를 죽여도 그들은 포도원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진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주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분수와 본분을 망각한 채 교만을 떨며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그 인생의 끝이 결코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농부로서의 자기 분수와 본분을 끝까지 잘 알고 지키는 사람은 결코 진멸을 당하지도 않고 포도원을 빼앗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제 때에 열매를 맺고 드림으로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고 주인의 신임과 인정을 받으며 끝이 좋은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2014년 11월「심장이 뛴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 정수영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1949년 대구 출생으로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78년 미국으로 간 그는 현재 플로리다 주에 있는 오칼라 심장센터의 시니어 심장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 시절 기독교를 부정하며 술통을 끼고 살았던 그가 미국에서 아내의 간청으로 마지못해 교회에 갔을 때 너무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고 두 손을 들고 “주여, 주여” 부르짖는 모습은 그에게 정말 집단 정신병자들 같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신이 있다면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성경공부 모임에 간 아내를 데리러 밤 10시쯤 갔다가 새벽 4시까지 붙들려 전도를 받은 그는 요한복음5:25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그에게 오셔서 초자연적으로 임재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죽은 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죽은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대로 새 생명을 얻은 그는 말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넘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아 이것이 천국이구나’라는 황홀경까지 체험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한 훈련을 했습니다. 매년 두 번씩 북한을 방문해 심장병 환자들에게 제2의 인생을 선물해 주는 정수영 박사는 “수술실은 내게 아주 특별한 예배 장소다. 내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이다.”라면서 자기의 분수와 본분을 끝까지 잘 알고 지키고자 하는 그의 자세를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넘어지고 나태하고 불성실하고 깊이를 모를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사랑과 인내와 능력으로 나의 삶을 인도해 주셨다. 구원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그분이 우리 삶의 실질적인 주인이시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가짜’다. 우리 삶에 매일 세례식이 일어나야 한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성을 매일 십자가 앞에 못 박고 부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아멘!
갈라디아서2:20에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가 주인 노릇하며 살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분수와 본분을 끝까지 잘 알고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 예수님이 그의 삶의 주인이시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진짜 성도로서 끝이 좋은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의 분수와 본분을 끝까지 잘 알고 지킴으로써 포도원의 악한 농부가 되지 말고 착한 농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포도나무에 열매를 맺게 할 뿐 아니라 그 맺은 열매를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진멸을 당하지도 않고 포도원을 빼앗기지도 않으며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기까지 끝이 좋은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주님의 자비와 공의를 이제라도 잘 깨닫고 따라야 한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포도원은 이스라엘 또는 신앙 공동체, 농부는 종교 지도자들, 종들은 선지자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풀이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율법을 울타리로 두르시고 예루살렘을 포도즙을 짜는 틀로 만드시고, 성전을 망대로 세우셔서 예배를 통해 은혜의 포도즙을 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대제사장과 장로 등 종교 지도자들에게 포도원을 맡겨 놓고 믿음과 의의 열매가 풍성히 맺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의 종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렸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라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된다고 하셨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오래 참으시는 자비와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공의 앞에 회개하기는 커녕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무리를 무서워하여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리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공의를 무시한 채 회개하지 않고 열매 맺지 않는 사람은 그 인생의 끝이 결코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와 공의를 이제라고 잘 깨닫고 따르는 사람은 결코 진멸을 당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고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도 받는 끝이 좋은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27년 간의 옥고를 치르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한 넬슨 만델라가 진실화해위원회를 구성해 복수의 연쇄 고리를 끊어버리는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이 정책의 핵심은 자기 죄를 정직하게 밝히고 용서를 구하면 형사 처벌을 면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청문회에 반 드 브렉이라는 경찰관이 나와서 자신이 18세 흑인 소년을 죽이고 8년 후 그 소년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의 아버지마저 죽인 사실을 밝히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법정은 그의 손에 아들과 남편을 잃은 노부인에게 “반 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브렉 씨가 도와주면 좋겠어요. 둘째, 나는 그와 함께 나눌 사랑이 아직 있기에 한 달에 두 번 그가 내 집으로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 주기를 원해요. 셋째, 그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진심으로 용서했다는 사실을 그가 알도록 그를 안아 주고 싶어요.”
노부인이 반 드 브렉을 향해 그를 안아주려고 걸어가는 동안, 누군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29:11~13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생각과 계획이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주님의 자비와 공의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자비로 우리에게 평안과 미래와 희망을 주시고자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그 공의로 재앙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끝이 좋은 인생이 되느냐 아니면 끝이 좋지 않은 인생이 되느냐는 주님의 자비와 공의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자비와 공의를 이제라도 잘 깨닫고 따르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미래와 희망 속에 끝이 좋은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자비와 공의를 이제라도 잘 깨닫고 따름으로써 제 때에 열매를 맺고 드리는 착한 농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빼앗기지도 않고 하나님의 나라도 빼앗기지 않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미래와 희망 속에 끝이 좋은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며칠 전에 은퇴하신 지 10년 쯤 되신 어느(백형부) 목사님께서 “은퇴한 후 신앙이 더 성숙되는 것을 느낀다”고 말씀하셔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성장과 성숙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곧 끝이 좋은 인생의 모습입니다. 끝이 좋은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의 분수와 본분을 끝까지 잘 알고 지키며, 주님의 자비와 공의를 이제라도 잘 깨닫고 따름으로써 포도원의 착안 농부로서 끝이 좋은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태복음 21:33-46 / 정용섭 목사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압축한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원수 사랑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모든 사람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야겠지요. 그런데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과 평화로이 지내지 못했습니다. 평화로이 지내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당신들은 위선자라.’고 그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신 적도 많습니다. 예수께서 삼십 대 초반의 나이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데에는 그들과의 갈등과 대립이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수께서 불교 창시자 싯다르타처럼 그들에게 좀 더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런 고초를 겪지 않았을까요?
포도원 농부 비유
오늘 설교 본문은 예수께서 겪은 갈등과 대립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 21:33-41에는 ‘포도원 농부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포도원 울타리를 치고, 즙 내는 기계를 설치하고, 들짐승을 감시하는 망대를 세웠습니다. 그는 농부들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농부와 주인에게 돌아가는 몫이 4대6인지, 5대5인지, 6:4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주인은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당시에 흔했던 부재지주입니다. 포도를 거두는 시기가 되자 주인은 계약한 대로 자기 몫을 받으려고 하인을 포도원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하인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주인은 더 많은 하인을 농부들에게 보냈으나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두려워해서 계약 건을 정상으로 처리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농부들은 상속자인 그 아들을 제거하면 자신들이 유산을 차지할 수 있다고 작당했고, 그대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 포도원 농부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무엇에 대한 비유인지 알게 됩니다. 주인이 두 번에 걸쳐서 보낸 하인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선지자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비유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는 산헤드린 재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들이 대제사장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태가 활동하던 시절의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들은 바리새파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도 모자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제거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인물들이라고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류 역사가 점점 더 선한 쪽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퇴행하거나 제 자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비유에 나온 농부들의 그 욕망과 난폭성이 21세기 인류 역사에서도 반복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인류 역사에 대해서 비관적인 편입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살게 되어도 우리는 만족할 줄 모르거든요. 승부 욕망이 우리를 자극하고 지배하거든요.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는 일들이 오늘도 반복되는 겁니다. 아벨이 먼저 문제를 일으켜서가 아니라 가인의 내면에서 끓어오른 질투심이 그런 존속살인을 저지르게 한 겁니다. 언젠가 지구 생명체와 인류의 멸망은 인류 자신에 의해서 일어날지 모릅니다. 인간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핵무기와 핵발전소와 인공지능 등등, 인류 멸절을 가능하게 할만한 수단들만 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철부지 아이가 폭탄을 손에 든 형국입니다. 인류 자체를 보면 비관적이나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저는 여전히 낙관적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현실이 되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41절이 말하는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이겠지요. 이 다른 농부들은 원래 계약을 맺었던 농부들을 대신해서 새롭게 포도원 운영을 책임 맡게 될 것입니다. 43절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대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다시 강조했습니다. 그 열매 맺는 백성은 곧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누군지를 정확하게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곧 본문이 말하는 열매이기도 하고요.
이게 말이 될까요? 뭔가 보람된 일을 하고, 공부도 잘하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데서 메달 따는 걸 우리는 삶의 열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바울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갈 5:22-23)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열매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런 열매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건전한 인격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해야 할 일들이라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 운운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도 실제 삶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거나 욕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일들로 복음 전파가 지장을 받으면 안 되니까요.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자체입니다. 오늘 비유로 말하면 주인의 아들을 존대하는 것(37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제대로 믿듯이 말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
우선 본문을 따라갑시다. 42절에서 예수께서는 구약 시 118:22, 23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Κυρ?ο?)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요즘도 돌이 건축 재료로 중요하나 옛날에는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명 건축물은 모두 돌로 지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잉카문명의 마추픽추 토목과 건축물이 그렇습니다. 목조 건물에도 머릿돌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돌을 다루는 사람은 돌을 적재적소에 놓습니다. 쓸모없는 돌은 폐기해야지요. 본문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오히려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의 잘못을 짚으시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갇혀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습니다.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앞 구절인 마 21:23절 이하에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께서 매매하는 사람과 환전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을 내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마 21:13)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에게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위로, 즉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는지를 먼저 대답하면 자기도 대답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눈치 보느라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한 세례 요한을 믿지 않았으나 세리와 창녀는 믿었기 때문이라고(마 21:32)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었던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예수님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이라는 건축물을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주는 머릿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 성전과 바리새인들의 자랑거리인 율법을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으니까요. 당시에 예수는 말 그대로 건축자의 버린 돌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축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께서는 피고인으로 섰습니다. 신성모독자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신성모독자는 죽어야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자신들에게 사형 집행 사법권이 없어서 로마 총독에게 예수를 넘겨버렸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었던 예수가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게 실제로 말이 될까요? 이런 표현은 문학적이고 종교적인 수사에 불과한가요? 마태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한 것일까요?
가루로 만드는 힘
대답을 찾으려면 모퉁이 머릿돌이 무슨 뜻인지를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44절이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이 머릿돌은 깨고 부수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것들을 박살 내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은 바로 신적 능력입니다. 칼 라너는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 185쪽에서 “모든 것을 파멸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느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로 앞 구절인 43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 ”라고 일갈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빼앗긴다는 말은 하나님에게서 배척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비유에는 이처럼 강한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3) 하나님 나라에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지옥 표상도 이런 하나님 나라 속성에서 나온 겁니다. 삶과 역사의 신비를 맛보라고 말해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도 거리가 멉니다. 지금처럼 깊은 가을에 독보적인 빛을 발하는 ‘벌개미취’에도 마음의 감동이 없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빼앗기는 것이고, 쫓겨나는 것이고, 이를 갈며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가루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조금 더 직접적인 이야기로 바꾸면, 돈에만 정신을 파는 사람의 인생은 가루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했습니다. 유명 무형의 권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세상살이는 원래 그런 거야 하고 지나칩니다. 예수께서는 모른척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행태가 하나님 신앙을 왜곡하고 훼손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대목에 예루살렘 성전 정화사건이 벌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전이 시장판이 된 것입니다. 그런 성전 체제에 길들면 그게 왜 문제인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를 빼앗긴다는 뜻이고 가루가 된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율법 자체를 잘못이라고 하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도 제사를 바르게 드리고 기도하는 기능이 있는 것처럼 율법도 경건 생활을 유지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길들어서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전 중심주의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게 교회 현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저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잠시 경험한 독일 교회와 비교해서 한 가지만 짚겠습니다. 독일 교회는 크기가 비슷합니다. 역사가 오랜 교회와 얼마 안 된 교회가 있긴 하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극과 극입니다. 건물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하 월세를 면치 못하는 교회당이 있고, 예술문화회관 못지않게 화려한 교회당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당을 노골적으로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신약시대에 성전은 없습니다. 좋게 봐서 회당만 있을 뿐입니다. 한국교회가 성전 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성전 중심주의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행태가, 그것이 왜 문제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는 것이고 가루가 되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중이라고 주장하겠지만요. 그런 마인드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작당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가루가 되는 은총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하나 남았습니다. 모퉁이 머릿돌이 가루로 만든다는 말씀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이라는 특정한 이들을 향한 비판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행태가 똑같이 나타나거든요. 모퉁이 돌은 우리의 그런 행태를 가루로 만듭니다.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것을 가루로 만듭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절대화하던 대제사장처럼 우리가 목에 힘을 주고 붙들었던 것들, 바리새인처럼 자기 옳음에 묶였던 우리 삶의 행태가 무너집니다. 사람들에게 자랑할만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과 다른 사람들이 선하고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예컨대 노벨 문학상도 가루가 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희생 봉사도 가루가 됩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자기를 나타내려고 힘을 주지는 않겠지요.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섭섭하거나 불안하지도 않겠지요.
이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런 자랑거리에 치우치는 행태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요즘 장관 후보자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이런 청문회는 우리 국민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관대작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그렇게 철면피하고 위선적이라는 사실을, 온갖 뻔뻔스러움의 민낯을 확인하게 되니까요. 차라리 청문회 거치지 말고 대통령이 자기 마음대로 고르게 하고, 나중에 선거로 심판하는 게 좋은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사실은 청문 대상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몸담은 이 세상이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니까 개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든 겁니다. 제 생각에 우리를 가루로 만드는 모퉁이 머릿돌과 부딪치는 게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을 때만 우리는 삶의 실체를 직면하고,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겠지요.
이런 점에서 모퉁이 머릿돌이 우리를 가루로 만든다는 사실은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가루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니까 문제이지 순순히 가루가 되면 우리 삶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돈도 가루가 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안다면 마음 편히 돈을 나누면서 살아가겠지요. 친구와 가족이 많아서 즐거운 사람은, 그것도 결국에는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 가루가 되는데,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겠지요. 인생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겁먹지 말고 부딪쳐보십시오. 가루가 됨으로써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자유와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누가 천국을 받을 수 있나요?
마 21:33-46 / 김영현 목사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복음 21장의 포도원 비유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때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한 이후 예루살렘을 다섯 번쯤 방문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사역의 본거지를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가버나움에 두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자주 오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다섯 번쯤 예루살렘에 오셔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을 것이라는데 많은 분들이 동의합니다.
다섯 번째, 다시 말하면 마지막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매우 다른 행동을 보이십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지를 않나, 성전을 깨끗이 하시기 위해 장사를 하거나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시고 내모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호통을 치시지를 않나, 무화과나무를 꾸짖어 말라죽게도 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대제사장들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들어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봉독한 대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너그럽고 인자한 모습의 예수님이셨는데 21장에 와서는 매우 거칠고 혁명가적인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죽음이 임박하셨음을 알고 서둘러 하실 일을 마치셔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포도원 비유는 이렇습니다. 어떤 부자가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울타리도 치고, 포도즙 짜는 틀도 들여놓고, 망대도 세웠습니다. 완벽한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다는 말입니다. 주인은 타국에 가면서 그 포도원을 여러 사람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포도를 수확할 때가 되어 주인은 종들을 세를 준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당연한 삯으로 포도열매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농부들이 세를 받으러 간 주인의 종들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돌로 치기도 했습니다. 더 많은 종들을 보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안 주인은 아들을 직접 보냈습니다. 주인의 아들이니 농부들이 잘 대해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들의 것이 될 것이라는 욕심에 눈이 멀어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고 맙니다. 분노한 주인은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제때에 세를 잘 낼만한 농부들에게 다시 포도원을 빌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처럼 이미 천국을 얻었다고 믿었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 천국을 빼앗을 것이며, 둘째로 신앙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마침내 천국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고 오래 예수 믿었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믿음의 열매를 맺어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로 종교적 냄새를 많이 풍긴다고 해서 그들이 곧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외형적 종교행위를 통해 알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종교행위가 곧 믿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꾸짖고 계시는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교라는 오랜 종교체제가 바리새인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까지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종교적이었습니다.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the most religious people who ever lived)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느냐?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종교적 전통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hypocrites”(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위선자”란, 말과 행동이 다른 자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행동은 다르게 하는 사람들’(Saying one thing and doing another)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쁜 사람들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말과 행동이 다른 종교적 인물들이라는 말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대단한 듯 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당할 자가 없을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적 의인’(legalistic righteousness)이었습니다(빌3:5-6 참조).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진실로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백성들보다 그들의 전통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율법이 있지, 율법을 위해 사람들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는지 몰랐습니다. 결국 바울은 예수님의 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회심 전의 바울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외치며 전통을 지키는 일에는 열심이었으나 율법과 전통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Bible thumper”(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thump라는 말은 “~을 탕탕 치다”, “~에 쿵 부딪치다”, “쿵쾅거리며 걷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Bible thumper는 그의 자신의 의(Self-righteousness)를 너무 많이 들어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신을 율법적 모범으로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자기의 개인적 종교 아래 예속시키려 합니다. 성경을 들고 큰소리치며 위선적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그들의 말처럼 살지 못하는 그들을 Bible thumper라고 합니다. 지극히 종교적(Super-religious)이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종교를 이용할 뿐 자신들은 그 종교 뒤에 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
종교적 전통에 익숙한 자요, 사람보다 전통을 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율법주의자에 불과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바울은 자신을 울리는 꽹과리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대부’(God-Fathe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마피아 두목 돈 코르네오네 가족을 중심으로 한 범죄영화입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사일자를 잡습니다. 자신의 가족이 성당에 가서 유아세례를 받는 날로 잡았습니다. 세례를 받는 동안 동료들은 원수들을 잔인하게 학살합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감상해 봅시다(유아세례예식과 원수 살해장면을 보여줌). 여기 유아세례라는 종교행위와 경쟁자를 잔인하게 학살하는 마피아 두목의 가슴에는 진정 하나님이 계실까요? 하나님은 마피아 두목의 세례예식을 보시며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까요? 대강절, 또는 대림절(The Advent)을 앞에 두고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합니다. 종교적 행위를 잘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잘 믿느 것도 아닙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가?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있는가? 오늘의 질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는다 함은 믿음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열매 없는 신앙은 껍데기 신앙이요, 죽은 신앙입니다. 야고보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배가 고프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무화과나무로 가까이 가서 열매를 얻으려 했으나 아무 열매도 못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 21:19)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신앙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자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화과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아무리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선행이 우리의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Good works are not a matter of earning our salvation). 그러나 선행은 분명히 우리 구원의 열매입니다(Good works are the fruit of our salvation).
구원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2에서 성령의 열매라는 말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 5:22-23)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9가지를 성령의 열매(the fruit of the Spirit), 또는 구원의 열매(The Fruit of our Salvation)라고 말합니다. 이 열매들은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심장으로부터 넘쳐나는 것들입니다(They are the outpouring of a heart that is filled with God).
빌 올(Dr. Bill Orr)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예수님의 제자답게 사셨는지 그의 제자들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빌 올 박사는 조직신학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조직신학으로 사셨습니다.”(Dr. Bill Orr didn't just taught it, he lived it) 어느 추운 날 집에서 코트를 입고 나간 그가 교실에 들어올 때 보니 코트가 없었습니다. 출근을 하다가 추운 곳에서 떨고 있는 불우한 사람에게 벗어주고 온 것입니다. “코트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자가 묻자 “네, 집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올 박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업을 계속하곤 했답니다. 신학을 가르친 분이 아니라 신학을 사셨던 빌 올 박사님, 그분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Faith was made complete by what he did)는 사실을 아신 분이셨고 몸으로 가르치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말한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위선자들은 아무에게도 영향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에 매우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종교를 보여주는(the appearance of religion) 사람에 불과 했지 믿음의 열매를 맺는 지도자들이 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에게서 천국을 빼앗아 열매 맺는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들어야 할 경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Bible thumper, 즉 소리만 내는 종교인들에게서 천국을 빼앗아 열매 맺는 사람들에게 주시겠다는 경고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의 집에 와 있습니다. 이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잘 알고 계십니까? 그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의 심장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심장 소리가 들려옵니까? 이웃에서 슬퍼하는 소리를 듣고 안타까워하는 예수님의 심장 소리가 들립니까? 동료의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아픔을 나누려는 예수님의 심장소리가 들립니까? 실패의 늪에서 통곡하는 사람과 함께 통곡하는 예수님의 심장소리가 들려옵니까?
셜리라는 사람은 외롭게 사는 과부였습니다. 다른 때보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더 많은 외로움과 고독을 느꼈습니다. 11월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나면 성탄장식들을 찬란하게 꾸밉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셜리도 성탄트리를 거실에 장식하려고 백화점엘 갔습니다. 이것저것 쇼핑을 해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계산대 앞에 오니 긴 줄이 서있었습니다. 꽤 오래 기다리다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두 아이가 황금색 실내화를 사려고 하는데 돈이 모자라는 모양입니다. 계산대 아가씨는 돈이 모자라니 다음날 오라며 그 실내화를 거둬들였습니다. 여섯 살쯤 되는 동생이 사정을 합니다. “내일도 돈은 없어요. 하지만 나중에 꼭 갚을게요. 오늘 갖고 가게 해주세요.”, “안돼요. 회사규칙상 외상은 안돼요.” 그러자 초등학교 2학년쯤 되는 형이 동생을 달랩니다. “가자. 엄마도 이해하실거야. 한 달이나 알루미늄 캔을 모아 팔았는데 절반 값밖에는 안되잖니? 어서 그냥가자. 엄마는 이해하실거야!” 뒤에 서있던 셜리 부인은 자초지종을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동생이 얼른 대답합니다. “우리 엄마 아파요. 의사는 오늘밤에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런데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 천국은 황금 길로 되었다고 하셨어요. 엄마도 천국가면 예수님과 함께 황금 길을 거니실 텐데! 천국 가는 엄마에게 어떤 신발을 사드리나 우리들이 의논하다가 여기서 저 황금신을 보았어요. 우리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알루미늄 캔을 모아 팔았어요. 그런데 엄마가 오늘 밤을 못 넘긴데요. 아주머니 좀 도와주세요. 꼭 갚을게요.” 셜리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얼른 값을 치러주고 그 아이들의 가슴에 황금색 실내화를 안겨주었습니다. “어서 가려무나. 엄마가 기다리겠다.” 몇번이나 고맙다고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 두 형제는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이라도 엄마가 하늘나라 가시면 어떻게 하나 염려되어 더 뛰었을 것입니다. 셜리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에서야 예수님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사랑의 열매로 오시는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열매를 맞는 성도들을 예수님은 만나시려 하실 것입니다.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요? 아멘
열매맺는 백성
마 21:33-45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열매 맺는 백성" 그랬습니다. 4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아멘. 오늘 본문을 보면서 굉장히 좀 두려운 마음도 있고, 자신을 살피게 되는 그런 마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축복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상당히 강조하고, 또 실제로 '복음 받는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못 받는 사람들이 받는 이면에 문제는 반사적으로 강조를 안 했어요. 강조를 하는 것보다 이것만하면 된다 싶어서 안 했는데, '내가 복음 받는다!' 하는, 반면에 복을 못 받게 되면 반면에 뭐가 나옵니까? 저주가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교인의 자리라는 것이 참 중요한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섰다! 복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축복의 자리에 서서 복을 못 받으면 뭐가 됩니까? 저주가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배경에 엄청난 그런 그늘 진 배경을 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는 말 이면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안 되었다!' 그럴 때는 뭡니까? 사단의 백성이에요. 이 반대 부분을 보면, '얼마나 복을 받았느냐?' 하는 반면에 이 복을 받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복을 못 받는다! 이것은 불행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제일 불행하다!' 그러면,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 교회에 주신 약속과 축복을 못 받고, 못 누린다! 이것만큼 불행이 없다! 그런 어떤 배경을 여러분 구체적으로 보셔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이스라엘에 지도자들,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 향하신 메시지입니다 만은, 그 메시지가 좋은 쪽에 메시지가 아니에요. 축복의 자리에 세웠지만, 그 축복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에, 축복은 다 빼앗겨버린다! 그랬습니다. 다 빼앗겨 버리고, 그리고 뭐라 그러느냐? '열매 맺는 백성에게 이 축복을 주시겠다!' 그 약속이에요. 그 약속인데, 실제로 약속을 할 때에 뭐냐하면, 유대국가의 죄와 파멸을 예언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유대나라의 지도자와, 지도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의 자리에 세웠지만, 바로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멸을 예언하신 장면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로 통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포도원이라 그랬을 때는, 이 포도원이라는 것은 좁게는 유대나라! 더 좁게는 유대교! 그 다음에 여기에 일꾼 그럴 때는, 농부라 그랬을 때는 뭐냐하면, 좁게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조금 더 넓게는 유대인들!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대교라는 포도원을 유대나라 지도자들에게 맡겼습니다. 그 다음에 넓은 의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이라는 것은 세상 전체를, 세계 전체를 하나님이 포도원으로, 그 다음에 이를 위해서 유대나라를, 이것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말하자면 잘 가꾸어 갈 수 있도록 제사장 나라로 세웠습니다 만은, 이 사역을 못했어요.
그래서 먼저 지도자들에게, 그 다음에 유대나라에게 하나님께서 뭐냐? 파멸을 선고한 말씀이 오늘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여러분과 제게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이 땅을 여러분과 저에게 맡겼습니다. 교회에 맡겼습니다. 이 사역을, 엄청난 축복과 은혜의 사역을 맡겼는데, 감당하지 못하면 축복을 빼앗겨 버려요. 감당하면 엄청난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이 약속이에요. 그래서 말세에 정말 주님이 오시기 전에, 세상을 맡기시고 세계 복음화라는 이 명제를 가지고 여러분과 제가 이 축복된 사역을 감당하게 되면 엄청난 열매를 맺게 될 뿐 아니고, 여기에 하나님의 큰 영광이 축복으로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조금 상세히 뭔가 이 성경 내용에서 뭔가 좀 드리려고 하니까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우선 몇 시간으로 나누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개괄적인 면으로 오늘 먼저 좀 드리고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먼저 말씀 속에서 뭘 보느냐 하면, '하나님이 포도원을 심었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먼저 붙잡아야 되겠어요. 포도원을 심고 타국으로 떠났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죠. 그 주인이 바로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심고 그 다음에 떠났습니다.
여러분 포도원 그럴 때에, 이것은 확실하게 '포도원' 그러면, '포도원이 주로 뭘 가르치느냐?' 그럴 때에, 제일 여기서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이 포도원은 교회를 가리켜서 말합니다. 유대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은, 교회를 가르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가르쳤다. 그 다음에 더욱 교회를 가르쳐서 말할 때에 중요한 것은, 보이는 교회보다도 더 원천적인 교회에 대한 성경에 중심적인 내용이 뭐냐?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교회가 보이는 송현 교회 건물 이겁니까?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교회 이름을 짓는 것을 광고하고 있는데, 뭐 여러 가지 이름이 들어왔어요. 참여 못한 분도 있지만, 참 이름이 들어올 때에 어렵더라 구요. 지금 이 심사위원들이 있는데, 세계를 품는 이름이라 그러니까, 뭐 이상한 이름도 나와 있어요. '비젼, 드림' 뭐 이런 것들이 나오고, 그러니까 실감이 별로 안 나요. 제일 좋은 게 또 이렇게 지역 이름을 해놓으면 제일 좋은데, '송현 교회' 그랬다가 상인 지역으로 가니까, 또 이름을 바꾸어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뭐 세계를 품는 거라 그래놓으니까 이것도 좀 그렇고...
또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일이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저기도 교회가 너무 커져 가지고 교인들이 앉을 자리가 없으면 또 어디로 가야 됩니까? 넓은 곳을 또 찾아가야 되는데, 그때 또 다른 동네에 가면 또 이름 바꾸어야 되거든, 그러면 또 이름 공모한다고 애를 쓸 거고, 그것도 생각하니까 여러 모양으로 그렇고... 그럴지라도 문안하게 지역으로 해야 되느냐? 상당히 여러 가지 지금현재... 위해서 기도 많이 해주세요. 심사 위원들 굉장히 갈등이 많아요. 이렇게 해야 될까, 저렇게 해야 될까! 상당히 갈등이 많습니다.
어쨌든 우연히 되어지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세웠다!' 그럴 때에, 이게 사람 힘으로 안 되는 겁니다. 교회를 누가 세웁니까? '하나님이 세웠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교회 세우는 것 간단하게 세우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저기 갑니다. 무슨 교회가 될지 아직 이름까지는 결정 안 했습니다. 일단 송현 교회가 저기 갑니다. 저곳으로 가는 것 여러분 혹시 뭐 흔히 생각할 때에, 사람이 간단하게 그렇게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심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이걸 지금까지 쭉 이어온 것이, 뭐 건축위원회에서 여러 가지 의논하고 부댖기고 많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처음에는 천 몇 평하자! 처음 우리가 헌금할 때에 1,000평 중심으로 해서 헌금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얼마나 불었느냐? 3,500평정도 불어났는데, 이렇게 불어난 과정을 가만히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전부 하나님이 역사 하시지,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또 교회 건축에 있어서 일단 뭔가 이해 관계를 떠나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우리 교회 교인들 참여하지 않겠다!' 이래가지고 건설 회사를 선택해 놓으니까 양문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양문 건설 이렇게 기도하니까,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니고 이러니까 조금 이게 희미해지는 것 같아요. 여러분 진짜 집중기도 해야됩니다. 양문 건설 그래놓고, 또 어떤 사람은 뭐냐하면, 건축위원장한테, '어쩌면 우리 교회에 건축하는 사람 많이 있는데 양문 건설을 해 가지고 또 그러느냐?'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이걸 붙잡아야 돼요. 양문 건설을 선택하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나도 그런 마음이 들어요. '참나, 내가 양문 건설말고 우리교회 아무개 할 수 있었다!' 그러고 했다 그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또 아니라! 이래서 아예 어차피 그럴진대, 뭔가 기준을 좀 세워야 되겠다 싶어서, '우리교회 건설업자들은 참여하지 마라!' 왜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중심으로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자! 동기 갖지 말고 그래서 건설업체를 선정을 했는데, 양문 건설을 선정했습니다.
선정하면서 뭘 깨달았느냐? 이렇든, 저렇든 사람을 통해서 하든지, 하나님이 어디에다가? 지금 저기 상인동에다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게 확실히 확인 되어야됩니다. '사람이 한다!' 아닙니다. 나는 쭉 진행된 과정을 보고 오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교회가 건축되고, 교회가 확실히 세워지는 것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그 과정이 어떻게 되든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바로 좀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면 이사야 61장 3절에 보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가 심어요? 의의 나무를 누가 심어요? '하나님이 심는다!' 그랬습니다. 여기에 배경이 설명하자면 많이 있습니다 만은, 여러분과 제가 정말 슬픔으로, 그 다음에 저주와 멸망으로, 죽음의 재에 앉아서 티끌을 날리고 앉았던 그런 인생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바꾸어서 희락으로, 기쁨으로, 찬송으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런 자들로 삼으시고자 심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된 교회를 심는다! 그래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말씀하느냐? 이 교회를 심는다는 말씀 속에서 교회를,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셨다!' 그런 말씀까지 하셨어요. 그런데 이 교회를 간단하게 그냥 보이는 교회로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진짜 교회를 성경은 뭐라 그랬느냐? 누구를 가리켰습니까? 받아합시다. "진짜 교회는 나 자신이다!" 손을 들고 한번 해 보세요. '나 자신이다!' 진짜 오늘 축복 받으세요. 우리 송현 교회가 백 번, 천 번 크게 된다! 상관없어요. 자기 교회가 건축이 안되면 다 헛일입니다.
여러분 저기에 옮겨지면서, '하나님, 먼저 내 교회가 건축되게 하옵소서! 내게 하나님의 사실이 있게 해 주옵소서!'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걸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시고 체험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어떤 면에서 연단 하실 수도 있어요. 인도 받아야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구나!' 이것이 이루어져야 되죠.
그래서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교회다! 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될 때에 누가 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뭡니까? 성전입니다. 뭐로 오셨습니까? 성령으로 여러분과 제게 함께 하십니다. 믿습니까! 진짜입니까! 거짓말 아닙니까? 진짜 여러분 이걸 딱 붙들어야 됩니다. 붙든다는 정도가 아니고 체험되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저는 계속 요즘 그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몸이 막 안 좋으면, '오늘 뭘 계획한다!' 생각했던 것을, '아이고, 못하겠네... 못하겠네...' 이렇게 돌아갑니다. 그러다가도 커피 한 잔만 마시면 기분이 이상하게 상쾌해 져요.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힘을 얻어 가지고 '뭘 해봐야 되겠네, 뭘 해야 되겠네...' 계획이 딱 서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참 생명을 바로 붙들면 먼저 누구에게? 여러분에게, 기쁨과 감사와 새 힘을 약속했습니다. 여기에 다 있습니다.
뭐 힘이 없어 어려울 때에, 자기 문제에 눌려 가지고 못하겠다고 하다가도, 하나님의 생명을 확인하는 순간에 너무 기쁘다! 감사하다! 뭘 할 줄 몰라서, '아버지, 내가 하겠습니다!' 개 코도 없는 사람이... 좀 사투리를 써서 미안합니다 만은, 강조하다 보니까 이 말이 나와요. 아무것도 없는 게 뭐든지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겨 버립니다. 여기서부터 헌신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뭡니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교회가 실제적으로 회복이 안되면 예수 믿는 것 진짜 어렵습니다. 이게 되면 그 다음에 다 해결돼요.
여러분들에게 제가 이 부탁을 드리는 것 보다도 한번 여러분 마음에 점검을 하시면서 기초로 돌아가세요. '주여, 내게 구원의 참 기쁨과 활력을 주옵소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해결되는 겁니다. 여러분 바울이 간질을 비롯해서, 눈병을 비롯해서 병 투성이 아닙니까! 빌빌 돌아다녀도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시니까!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 돌아다니면서 간증하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뭐라 그랬느냐? '힘들다!' 소리 안하고, '감사합니다! 찬송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를 했어요. 왜? 너무 어렵고, 감사는커녕 불평밖에 안 나오는 일인데, 바울이 그랬습니다. 왜? 내 영혼이 너무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에 만족하니까! 여기에서 바울은 세계를 바꾸는 환경과 사건과 상관없이, 세계를 바꾸는 위대한 역사를 남겼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교회에 섰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사실을 오늘 좀 붙잡아야 됩니다. 붙잡는 것이 아니라 누려지기를 바랍니다. 체험해 버리면 여기서 모든 것이 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류 목사님 초기에 뭔가 이 낚시 놓는 것을 매일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이 뭔가 낚시 놓는 일에 대해서, 어릴 때에 초등학교 다닐 때에 비가 오면 큰물이 시골에 나거든요. 큰물에 나가다가 비가 좀 멈추어서 약간 개면 낚시를 하는데, 낚시를 살 돈이 없어 가지고 바늘을 불에 달구어 가지고 이렇게 갈고리를 만들고, 거기다가 미끼는 집에 파리가 많으니까, 파리 잡아서 끼워 가지고 이제 낚시를 놓으러 가는 겁니다. 그것도 뭔가 뽕나무 회초리 여기다가, 대나무는 없으니까!
거기다가 매어 가지고 낚시를 놓는데, 물이 내려가면서, 물이 한 바퀴 빙 돌아서 나가는 물가 쪽에 아주 그런 조용한 장소가 있어요. 그 장소에 낚시 대를 던졌는데, 던지자 말자 팔뚝만한 게 물렸어요. 시골에서 이만한 것은 놀랄 일입니다. 그게 피라미가 좀 커진 거, 왜 뻘건 색깔을 띤 그걸 가지고 시골에서 '불가리'라 그러고... 학명으로는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게 하나 물렸어요.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 후로 지금까지 이렇게 물이 돌아 가지고 나가는 데만 보면, '저기 고기가 있을 건데...'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하느냐? 한번만 체험해 버리면, 여러분들이 한번만 체험해 버리면 그 체험의 역사가 계속 원천이 됩니다. 예수 믿고 감격과 기쁨이 체험이 안되니까, 늘 멍청하게... '예수 그리스도!' 그래도 멍청하게... 그 기쁨과 감사의 맛을 봐야 알지! 여러분 진짜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축복과 감격이 사실이 되기 원합니다. 정말 그 기쁨과 감격이... 그래서 나도 모르게 '와!' 소리지르고 싶었던 감격과 기쁨이 여러분 사실로 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 붙들기만 하면, 문제나 사건이, 어려울 때마다, 힘들 때마다! 왜? 내가 알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만 불러도 뭐라 그랬습니까? '구원을 얻으리라!' 해결 받게 되는 축복과 역사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에게 사실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기반이요. 교회 축복에 가장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심을 때에,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이 심을 때에, 보통 품질을 심은 게 아닙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을 이사야 5장 2절에 말씀했더라 구요.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받아합시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 하나님은 심으실 때에 품질이 나쁜 건 안 심습니다. 어떤 품질? 극상품 포도나무입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극상품 포도나무다! 하나님이 나를 심었다!" 최고의 품질로 심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이상한 열매를 맺고, 이상한 열매라는 것은 품질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고, 과정에서 이게 잘못되었어요.
그래서 그 이사야 선지자가 계속해서 조금 가보면,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 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뭘 맺었느냐? "들 포도를 맺혔도다" 품질이 나쁜 것이 아닌데, 극상품을 심었는데, 과정이 이상해 가지고 들 포도나무를 맺었다! '들 포도 열매를 맺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심어놓고 뭘?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놓고, 뭘 맺도록 원하시느냐? 극상품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여러분 확신하셔야 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정말 바로 붙잡고 복음에 뿌리를 내리고 확실히 서 있다면 영 육간에 극상품 열매를 맺습니다. 반드시 그런 열매가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정말 복음의 뿌리를 바로 내리면 축복 받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교회에 은혜 주셔서 복 받습니다. 가정이 영육 간에 치료받습니다. 극상품 열매 맺도록 하나님이 계획되어져 있습니다. 복음이 바로 안되어서, 다른 것이 와서, 그래서 막 잡초가 자꾸 생겨서, 그래서 벌레가 비루먹어 가지고, 막 이상한 게... 하나님의 원하시는 역사를 우리가 바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놓고, 이 심기까지 뭘 기억하셔야 되느냐? 많은 비용을 들이셨습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이 뭐 은혜는 공짜로 얻었다 그러니까 비용이 안 들었는 줄 아는데, 많은 비용을 들였습니다. 여러분 포도나무를,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서 주인이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였습니까! 그것도 종자를 극상품 포도! 일일이 심고, 그 다음에 거름을 주고, 울타리를 만들고 이렇게 해 가지고 많은 비용을 들여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먼저 정말 감사해야 됩니다. 이 자리에 앉기까지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구원은 성격상 은혜로 밖에 안되어요. 왜? 우리가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확신하든, 안 하든 사실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 서기까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죽을 뻔한 고통도 몇 번 있었고, 비용이 들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떤 사람은 살림 전체가 완전히 망해버리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 다 나가 버렸고, 어떤 사람은 가정이 다 깨어져 버리고,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여러분 정말로 이 자리에 앉기까지 얼마나 어려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러면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이 구원의 축복 속에, '참,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기까지 많은 비용을 들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여러분 개개인이 계산한 그런 내용입니다 만은, 여기서 조금만 더 넓혀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이 자리에 세우시기 위해서 비용 든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비용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여러분과 저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죽음에서 구속하셨습니다. 대 속물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엄청난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극상품 포도나무로 이 자리에 세우시기까지 비용 들었다는 정도가 아니거든요. 한번 상상 해보세요. 여러분 케냐에 가 가지고 한 두시간 정도 그 케냐 수도에서 마사이족들이 있는 곳에 한 번 가 봤습니다. 전에 한번 설명을 했습니다 만은, 소똥을 이렇게 발라 가지고 집을 만들어 놓고, 들어가니까 소똥 냄새가 얼마나 나는지 모르겠어요. 거기다가 이제 뭘 했느냐 하면, 밤에는 춥고 낮에는 덥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추운 것에 대해서 해결하려고 모닥불을 이렇게 집을 움막처럼 만들어놓고, 소똥을 발라가지고, 그것도 안팎으로 발라요. 발라 가지고 해놓았는데, 그런데 그 연기가 안 빠져나가요. 그래서 그 연기가 빠져나가면 될 건데, 연통 하나만 만들어 버리면 될 것인데, 왜 그러냐 그러니까? 그게 연기 나가도록 연통을 만들어버리면 열기가 같이 빠져 나가버려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연기를 그대로 이렇게 가두어 놓아요. 거기서 자요. 그 사람들이 침대는 이상하게, 거기는 또 침대생활을 하더라 구요. 뭔가 이렇게 볕 짚 같은 걸 만들어 가지고 침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래서 제가 가서 보니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눈이 발갛게 해있어요. 나는 원래 씨족이 발갛게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이게 뭡니까? 연기를 계속 쐬니까! 여러분 연기를 씌우면 눈이 이상해지잖아요. 그래서 눈이 발갛다고 그래요.
그래서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참, 우리 아이들 한 1주일만 여기 왔다 가면 정말 가정에서 고맙다! 감사하다! 그러고 부모들한테 꾸벅 열 번, 천 번 절할 것 같은데...' 일주일은 길 것 같아요. 왜? 일주일 놔두면 죽을 것 같아요. 그렇게 열악합니다. 그곳에 나는 한 주간, 두 주간도 이건 뭐 상상을 못해요. 불과 잠깐 보는데도, 잠깐 소똥 소굴에 들어가 가지고 냄새 맡으면서 연기한번 맡으니까, 이건 뭐 덧정 없어요. 속된말로...
그래서 선교사들이 위대하게 보이더라 구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선교사들이 같이 그런 환경에 사는 게 아니고, 집 지어 가지고 현대식으로 잘 살더라 구요. 같이 안 살아요. 왜, 제가 이런 표현을 하느냐? 문화권에서 산다는 이유 때문에, 소똥 집에서 산다고만 생각해도 못삽니다. 이 희생도, 여러분 생명과 바꾸어도 못삽니다. 그런데 영광의 나라! 하늘나라! 그 영광을 비워두시고, 여러분과 제가 사는 이 세상, 똥 통속에, 양심이나 바르나, 이상한 이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여러분 이 자체가 지옥입니다. 이 희생이 얼마나 엄청난 희생입니다!
그렇지 만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이 자리에 세우셔서 극상품 포도원으로 만들어 놓으시고자! 여러분과 저를 심어 놓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함께 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고, 또 하나님의 나라 우편에 가셨다가 또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되니까, 다시 또 똥 통속에 들어와 가지고 어디에? 여러분과 제가 똥통이지 뭡니까! 생각하는 것도...
나는 그 신앙생활하면서 예수 믿으면 깨끗해 질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예수 믿어도 점점 더 더럽더라 구요. 왜? 더러운 것을 발견하니까 더 더럽잖아요. 옛날에는 더러운 걸 몰랐는데 율법이 없고, 법이 없으니까! 몰랐는데, 깨닫고 나니까 전부... 그래서 예수 믿고 회개라는 것을 비로소 진짜 안 합니까! 눈물로 안 합니까! 더 더러운 내 안에 오셨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지금 여러분과 저를, 많은 비용 정도가 아닙니다. 희생하시면서 세워놓았습니다. 이래서 감히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누가 권세를!' 안 했습니까! 감히 보좌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감히 주님 앞에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축복과 역사! 말해도 모른다! 기가 찰 일이죠. 여러분 세상에 제일 기가 찬 일은 이것입니다. 감기 걸려서 기가 막혀서 기가 차는 게 아니고, 진짜 이것 모르고 알지 못한다면 첫 번부터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말씀 속에 극상품 포도열매라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 깨닫고 고백하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 자체가 안되면 일이 안 되어요. 아니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옵니다. 영적 문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뭐가 이해 안됩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걸 몰라요. 혹시 여러분 여기 오신 분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 참 듣기 싫다!' 이러면 심각한 문제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또 이런 사람은 자기 문제 있는지 조차도 몰라요. 또! 듣기 싫다 싶으면서도 자기는 몰라요. 이것이 '아, 정말 필요하다!' 그러면 '병든 자에게' 라야 누가 필요합니까? 의원의 필요를 느낍니다. 모르면 그것도 필요를 못 느껴요. 그래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 여기에 모든 것이 있구나! 극상품 포도열매의 기초입니다. 이게 바로 여러분들이 이해하셔야 되죠.
그리고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기 위해서 또 뭐라 그랬느냐? 많은 비용을 들였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래놓고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21장 33절에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 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그랬는데, 중요한 것은 뭐냐? 주인이 포도 원을 만들고 뭘 했어요?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포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울타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별게 다 들어옵니다. 개도 들어와서 오줌싸고, 여우도 와서 끓어대고, 별게 다 들어옵니다. 못 들어오도록!
여러분 나는 그 사과를 심어놓고 철저하게 울타리를 만드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뭘 했느냐 하면? 도저히 뭔가 개새끼 한 마리 못 들어가도록 딱 해놓았는데, 제가 보니까! 나는 처음으로 그 사과 울타리를 보고 놀랐던 것이, 가시가 손가락 만한 게 꽉 우거져 있어요. 그게 뭡니까? 탱자나무죠.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철저하게 쳐 놓았습니다. 보호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 말씀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 '주여,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워놓고, 여러분과 저를 극상품 포도열매 맺도록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철저하게 보호하시는데...' 인도하시는 겁니다. 염려가 여기서 다 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받아합시다. "염려는 끝이다!" 왜?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울타리를 쳐 놓고 보호하십니다.
그런데 그 울타리가 뭐냐? 많은 주경 학자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울타리가 제일 먼저 쳐놓은 울타리가 뭐냐하면 교회라는 울타리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호하시기 위한 울타리입니다. 열매 맺도록, 교인 한사람 한사람에게 축복과 열매를 맺도록 보호하시는 울타리다!
저는 교회를 통해서 많은 것을 느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뭐냐하면, 교회를 딱 와서 등록하고는 전혀 어떤 교회의 여러 가지 일에 참여를 안 하더라 구요. 왜 그러냐? '교회는 깊이 들어가면 시험 든다고... 목사님하고 가까우면 더 시험 든다고... 장로와 가까워도 시험 드는데 목사와 가까우면 더 시험 든다고...' 그래서 멀찌감치! 그래서 교회는 너무 멀리도 가지말고 너무 가까이도 가지말고 멀지 감치 그러면서 멀리서 이렇게 보고, 눈을 옆으로 흘겨보고 따라가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 구요. 여러분 교회 적응하세요. 여러분 교회라는 울타리가 여러분을 축복 받도록 보호하십니다!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보호하기는커녕, '아무개, 집사 때문에 내가 심정이 상해서 못 가겠는데...' 여러분 그때일수록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이 정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뭐냐하면, 특별히 교회 속에 들어와 가지고 부딪겨야 됩니다. 삐치기도 하고, 상하기도 하고 이게 자꾸 계속 되어야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요즘 사회가 진짜 문제되는 것이, 점점 어려운 상황이 되고 가정이 점점 깨져나가는 문제의 배경이 뭔지 압니까? 아이를 적게 나아서 그래요. 아이들 많이 놓으세요. 옛날에는 서로 형제들끼리 다투고, 이렇게 되어 가지고 성질이 괜찮아요. 이 뭔가 인격이 형성이 잘 되는데, 지 혼자만 낳아놓으니 오냐오냐해 놓으니까! 걸핏하면 삐치고 걸핏하면... 인간이 안 되어요. 이래서 사회에 보내니 뭐가 됩니까! 점점 사회가 문제 중에 문제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부딪기고, 삐치고, 또 부닥치고, 또 웃고, 또 싸우고, 또 그래서 화해하고, 또 주님 앞에 회개한다고... '어제 저녁에 싸운 것 용서해 주옵소서!' 이래서 또 엉덩이를 하늘로 쳐 박고... 여러분 이 속에 하나님께서 귀한 생명으로 여러분 열매 맺습니다. 이게 교회라는 겁니다. '조금 힘들다!' 핑~ 다른 데로 가버리고, 그래서 교회 자꾸 옮기는 것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그것도 혹시 다른데서 옮겨온 여러분들은, '복음 때문에 옮겨왔다!' 이해가 됩니다 만은, 뭔가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이건 정말 문제 있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가 엄청난 하나님께서 열매맺게 한 귀중한 울타리입니다.
그리고 교회 속에 들어와서 함께 부딪기세요. 그래서 흔히 말합니다. '목사님, 이 교회는 이상한 사람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상한 사람이 다른데 가면 고칠 수 없어요. 그러니 교회 들어와야 될 것 아닙니까! 교회에 와서 고쳐야 되니까, 들어오자 말자 못 고쳐지니까, 첫 번에는 이상하게 느껴지죠. 이상한 게 많은 수록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이 사실을 조금만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나를 심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통해서 축복하시기 원하신다! 교회가 울타리구나! 감사합니다!' 바로 붙드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 뭐가 울타리냐? 시간이 없어서 제가 이 준비한 것을 말하려고 하니까, 벌써 시간이... 오늘 1부도 15분이나 길어져 버렸어요. 2부도 한 15분 정도 길어야 되겠습니다. 뭐냐하면, 교리가 울타리입니다. 교리라는 게! 전도는 구원 메시지가 전도입니다. 여러분 교리라는 것은, 내가, 예수의 생명을 받은 내게 해당이 됩니다. 받은 내가 그 생명을 가지고 성장하는데 다른 길로 못 가도록 인도해 주고, 막아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 교리라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주권! 계획이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주권이 내게 해당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계획이 해당됩니다.
내가 아파서 누웠습니다. 괴로움 속에 누웠습니다. 그럴 때에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지 만은, 교리 배경이 안되면, '왜, 내가 어려우냐? 이게 잘못했구나! 내가 잘못 믿는 게 아니냐!' 이래가지고 다른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흔히 고통 속에 있을 수 있고, 괴로움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계획! 알아듣겠죠. 그러면 보호가 됩니다.
그런데 금방 전도하러 가 가지고, 아파 누운 사람한테, 자기가 해당되는 일들을 감동을 받았으니까 여기도 감동 받을 줄 알고, '당신이 아파 누운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러면 아파 누워서 뭐라 그러는 줄 압니까? '하나님의 계획 좋아하네! 하나님의 무슨 계획이 아파 누운걸 좋아하냐? 나는 안 아픈 계획이었으면 좋겠다!' 이해가 안되어요. 그때는 뭐라고 그래야 됩니까? 구원의 메시지를 줘야 됩니다. '당신이 이 자리에서 오늘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라! 하나님의 자녀 된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때 이후에, '하나님께서 자녀 된 당신에게 축복 주신다! 건강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이래야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막 '아픈 게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러고 덤벼들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들어온 구원의 백성은 도리어 은혜를 받지만, 구원의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에게는 시험 들어요.
오늘 제가 말씀한 것은, 여러분들은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와 축복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교리라는 것이 여러분 보호합니다. 빚나가지 않고, 다른데 가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말씀을 성취하는데, 계속해서 설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리라는 것이 성경은 어렵지만 이걸 듣고 배우고 이러는 겁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물질과 명예도 울타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말 바른 복음 갖고 있다면, 물질과 명예와 건강도 울타리로 주신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이에요. 오늘 내가 왜 복 받았느냐! 들 포도를 맺고 있으니까, 안 되는 겁니다. 정말 극상품 포도 열매를 한번 맺어보세요. 아니 그들을 향해서 나가 보세요. 하나님이 맺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욥기서 1장 10절에 보면,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뭐라 그랬습니까? '욥에게 하나님께서 부와 명예를 울타리로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 잘 믿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다 하나님을 더 깊이 잘 믿고, 더 은혜롭게 잘 믿을 수 있는 울타리 중에 하나가, 여러분과 내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축복입니다. 사실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부와 명예와 예수 그리스도 이름 때문에...
그래서 저는 뭘 느끼느냐하면, 제가 어려울 때에, 늘 힘들 때마다 뭘 기도했느냐 하면, '주의 이름을 위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시편 23편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께서 극상품 포도나무로 만드시고, 그리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명예로 세워놓고,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의 이름을 걸어 놓았어요. 워낙 다른 짓을 하니까! 욕심과 정욕과 이상한 것으로 자꾸 나가니까! 그러니까 뭐냐? 들 포도를 맺는 거죠.
하나님의 명예가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하나님은 그걸 원치 않거든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예를 거시고,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도록 여러분과 제게 산울로 두르셨습니다. 명예와 부와 풍성으로 주셨습니다.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보셔야 합니다. 방향 바로잡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이제 여러분 통해서 세계를 바꾸는 엄청난 역사를 주실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이 일에 여러분과 제게 오늘 중요한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입니다. 후대를 살릴 열매입니다. 우리에게 교회 주신 것, 부 주신 것, 여러분 가정 주신 것, 이런 모든 것이 후대를 살려서, 정말 저들로 통해서 세계 복음화에 귀한 일꾼으로 삼으실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이 열매맺고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