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일본 아이돌 모 그룹의 S 멤버가 한국에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격양된 마음으로 그의 부모님이 직접 한국에 발걸음 했다는 사실이 커다한 이슈가 되어 대한민국의 여성 팬들의 마음을 혼잡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꿈을 말이다. 「아네고 대따 밉거든요.」 그 문자를 마지막으로 도통 연락이 취해지지 않는 쿄헤이에 대한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다 보니 그의 꿈을 꾸고 말았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떴다. 찌뿌등한 몸을 두드리며 기지개를 폈다. 자리에서 일어나 냉수 한 잔 들이키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는데, 작은 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측면으로 돌렸다. 그리고 유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순한 꿈이라고 생각했던 그 커다란 연예 뉴스화는 현실이 되어 모니터 화면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어제 그녀는 자정 내내 쿄헤이의 정체를 낱낱히 파헤치기 위해 일본 공식 사이트를 방문하거나, 일본 아이돌 그룹을 숭배하는 수 많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심코 발견한 기사에 쉬이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그것이 바로 쿄헤이에 관한 것이었더라. “아, 참. 꿈이 아니었지…….” 허망한 꿈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아 남아있었지만 모든 것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젯밤 굳게 마음을 먹고 쿄헤이에게 수 십번씩 연락을 취하던 그녀의 행동도, 수십 개의 문자 메시지를 전송 시킨 그녀의 다급한 마음도 모두가 현실이었다.
“휴…….”
착잡한 마음의 유진은 어기적 어기적 거리며 냉수를 꺼내 마셨다. 컵을 거머쥔 채로 거실로 나와 철푸덕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소파 뒤로 몸을 묻고 눈을 감자 어김없이 떠오르는 바보같은 쿄헤이의 미소에 괜스레 현재 자신의 처지가 아련하게 느껴진다. 제 나름대로 쿄헤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고 생각했건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늘 혼자이길 바랐던 집 구석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저로 인해 상처 받았을 쿄헤이가 안타깝기만 하다. 한참동안 유진은 눈을 감은 채로 상념에 빠졌다.
지금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제대로 된 아침 상 한 번 차려주지 못했던 것이 이토록 한이 될 줄이야.
별안간 유진은 눈을 부릅뜨고 핸드폰 플립을 열었다.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던 엄마의 번호를 꼭꼭 누르고 통화버튼을 누르자 짧은 신호음과 함께 곧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거세게 몰아쳤다.
ㅡ네가 왠일이니?
전화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냥, 잘 지내나 해서.”
ㅡ네 연락이 없는 동안은 아주 잘 지냈지.
“무슨 말이야? 내가 연락하니까 잘 못지내겠다는 거야?”
ㅡ그래, 오장육부가 뒤틀려서 밥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유진은 수화기에 입술을 가져다 댄 채 혀를 낼름 거렸다. 덧붙여 입술을 삐죽이는 것 또한 잊지 않고서 말이다.
ㅡ무슨 일인데?
“아, 그냥.”
ㅡ그냥? 네 목소리가 그냥이 아닌데?
“아, 엄마. 그 있잖아…….”
ㅡ응?
“그 한달간 나랑 같이 살았던 일본 남자 있잖아. 사카모토 쿄헤이라고 했던가…….”
애써 모르는 척 그의 이름을 입술 위로 곱씹었는데, 무심코 그의 이름을 흘리는 순간 유진은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엄마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톡 터져나왔다.
ㅡ그래, 네가 내쫓은 그 남자 말이지? 곧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
“지, 진짜?”
ㅡ그래! 대체 무슨 일이니? 잘 지내다가 느닷없이 쫓아버리는 게 어디 있어?
“뭐, 딱히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런데 엄마 나 속였더라?”
ㅡ무슨 말이야?
“그 남자 연예인이잖아, 그리고 나랑 그 사람이랑 잘 엮어서 애를 낳느니. 뭐 이런 조건을 걸었다고…….”
ㅡ너 몰랐니? 그 남자 일본에서 유명한 사람이잖아. 어쩜 요즘 애가 되가지고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니? 됐다, 일단 끊자. 네 아빠가 밥상 내 오라고 성화다. 끊는다.
뚝.
허탈한 마음이 깊숙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처구없니 끊겨진 전화기를 내려다보며 유진은 작은 실소를 터뜨렸다. 분명 어머니는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혹여나 저가 자신을 추궁하지는 않을까, 하는 억측을 품고 있기에. 유진은 플립을 닫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총총 걸음으로 침대 위로 엎질러져 그대로 배게에 얼굴을 묻었다.
“……아, 어쩌나.”
진짜 돌아가면 어쩌지? 아니, 혹시 그 여자랑 함께 동행하고 있으면 어떡해?
아이를 말한다. (愛 語)
전화를 끊고 어머니는 한숨 돌렸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마마, 아네고에요?”
마침 자신의 전세 집에 한동안 은신하고 있기로 굳게 다짐한 일본 남자, 지금까지 전화상에서 유진이 애타가 찾아헤매이던 그가 불쑥 튀어나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그래, 그래. 네 아네고가 널 찾는다.’ 라고 대답하며 그의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쿄헤이는 아이, 이러지 마세요. 하면서 귀엽게 어머니의 손길을 피했다.
“그런데 있자나요. 아네고, 나 걱정 해요?”
“그래, 혹시라도 네가 일본으로 떠난 건 아닐까. 목소리를 들어보니 걱정이 많은가 봐.”
“아, 그러쿠나…….”
“그래도 아직은 아니야. 곧 너희 부모님 출국 시간이니까, 공항에 들려서 모시러 다녀오자. 아줌마 말 알았지?”
“하잇.”
어머니는 쿄헤이의 보드라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집 구석에 처박혀 쿄헤이를 그리워하고 있을 자신의 딸 아이를 생각하며 사악한 미소를 얼굴 표면 위로 떠올렸다. 이 모든 것들이 단순한 계략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마음 고생을 하고 있을 유진이 애처롭기도 했으나, 거진 한달이라는 기간동안 아무런 발전도 없는 두 사람의 관계에 성난 어머님의 마음도 어지간하면 헤아려주겠지.
아이를 말한다. (愛語)
지금껏 말해왔듯이 쿄헤이는 이미 그녀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사실 어떻게 그녀의 성질을 돋궈 자신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겨줄까, 고민했는데 굳이 그가 머리를 굴려 고민하지 않더라도 사치코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감춘 제 누이의 행동으로 인해 바짝 약이 올라 저 스스로 이런 상황을 만들었더라.
다행이라며 안심하기도 했지만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분명 그녀는 사치코로 인해 토라져 자신에게 그런 모진 말을 건넨 것이 틀림없는데, 사실은 그 모든 말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아아, 거실 밖에서 들려오는 누이와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쿄헤이는 푹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요, 그래요. 이 결혼은 이렇게 하는 거에요. 아이디어가 참신한 데요?”
게다가 잔뜩 신이 난 누이는 사실 한국어에 몹시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 남편을 두고 애가 셋이나 딸린 여자였으니 말이다. 쿄헤이는 제 조카의 얼굴을 하나, 하나 눈 앞에 그리며 그 위에 저와 유진의 모습을 덧붙였다. 생각만으로도 행복의 여운이 몰아닥치는 게 정말이지,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사랑이 확실한 모양이다.
사랑, 사랑, 사랑.
17
“혹시 쿄헤이 등교했니?”
그가 재학중인 대학 앞을 어슬렁거리다 1학년이라 추종되는 학생들에게 수차례 물었으나, 그의 등교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허송으로 떠넘기다보니 어느덧 시간은 2주일이나 훌쩍 지난 뒤였다.
‘쿄헤이, 연예인이라면서요. 이번에 제 친구가 일본으로 유학갔다가 돌아왔는데, 한국으로 출국한 부모님이랑 일본으로 떠날 준비하고 있다고 그러던데요. 그래서 지금 일본 사람들 난리도 아니래요.’
아울러 매번 들려오는 아이들의 싱그러운 목소리는 하나같이 같은 뜻을 품고 있었다. 그래, 그는 곧 돌아간다. 허나, 그녀에게 조금의 기회를 부여하자면 현재 그는 일본으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고 있을 뿐, 완전히 한국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초라한 낯짝으로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유진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쿄헤이에게 문자 메시지를 전송시켰다.
보낸 이가 저, 자신이라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저도 모르게 메세지 창에 드리운 글자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뜻을 해석하고 나서 또 한 번 놀랐다. 내가 정말 애가 타긴 타는 모양인가 봐, 이 일본놈에게 이런 내용의 문자를 보내기까지 하고 말이야.
「야, 거짓말 아니야. 나 너 진짜 보고 싶어.」
아이를 말한다. (愛語)
현재 그의 부모님은 도심 인근의 호텔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어째서 그들이 이토록 먼 거리에 놓인 한국에 직접 방문했는가 하면 그것 또한 묘미이다. 다름 아닌 저와 유진의 겨, 겨, 겨…….
“그러니까 쿄헤이, 한국 여자들은 프러포즈에 약해. 내 말 알겠어?”
이번에는 제 누이를 대신해서 유의와 동화를 앞에 두고 앉은 쿄헤이는 그들의 연설을 귀담아 들었다.
“프러포즈는 어떠케 해요?”
“비싼 반지를 선물한다던가, 꽃다발을 선사한다던가. 뭐, 여러가지가 있지.”
“아니야. 그건 너무 식상해. 그리고 요즘 같은 시대에 꼭 남자가 돈을 많이 써야한다는 관념은 없지.”
유의의 말을 가르고 동하가 잽싸게 말했으나, 쿄헤이는 오리무중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만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이끌 수가 있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하다 그 무거운 잡념에 빠진 쿄헤이는 불안한 듯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참, 그런데 반지는 쿄헤이네 부모님이 미리 준비해뒀다고 하지 않았나?”
“어, 맞아. 맞아!”
“그럼 걱정이 반으로 줄어든 거 아니야?”
“그렇네! 다행이네. 그럼 내가 지금 유진이한테 전화할게.”
그리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유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쿄헤이는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다 잘 될 거야. 유진이 지금 너 때문에 반쯤 미쳐있다니까? 라며 나름 응원의 말을 남기는 동하 때문이라도 내색하고 싶진 않았으나, 얼굴 위로 드러난 근심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휴.
아이를 말한다. (愛語)
유진은 화들짝 놀랐다. 느닷없이 언니에게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도 모자라 그녀의 말이 다름 아닌 쿄헤이와 관련되어 있는 귀중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ㅡ너 당장 꾸무적거리지 말고, 공항 옆에 있는 모맨토 레스토랑으로 달려와. 쿄헤이 출국 시간까지 1시간도 안 남았다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진은 집 밖으로 달려나와 정류장으로 향했다. 택시를 잡아탈까도 생각했지만 지갑 속에 잔존하는 지갑의 액수를 확인하고는 그저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이 나를 죽이는 구나.
잠시 후 연거푸 탄식을 흘리는 그녀가 다섯 번째 숨을 몰아쉬려는 찰나 인천 공항 행 버스가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한 유진은 부리나케 버스에서 뛰쳐나와 인근을 살폈다. 공항의 주변이라고 한다면 멀거니 떨어진 저 5층짜리 건물이 고작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그녀의 시선에 조금 전 유의가 말했듯 ‘Momento.’ 라고 적나라하게 적힌 커다란 레스토랑 간판이 부딪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몸뚱이가 자연스레 레스토랑을 향했다. 건물 안으로 달음박질하여 도착하자마자 유진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그제야 그 앞에서 바쁜 발짓을 정지했다. 줄곧 쌓아오던 거친 호흡을 한 번에 몰아쉬려고 하자 그것도 어지간히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아니꼬운 것은 4층에서 정지한 엘리베이터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0초가 흐르고 20초가 흘러도 말이다.
1분 1초가 아깝기 그지 없는 급급한 유진은 결국 엘리베이터에서 돌아서 비상 계단을 밟고 잽싸게 5층으로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탓에 중간, 중간 도중 하차를 하기도 했지만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유진은 유의가 말했듯이 레스토랑 입구 앞에 멀거니 서서 그 내부의 현장을 샅샅히 살펴보았다.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골적으로 요리조리 눈동자를 굴려댔다. 허나, 낯익은 얼굴이나 익숙한 쿄헤이의 모습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뭐야.”
삽시간에 분노의 감정이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감정이 새까맣게 전소되었다.
“지금 나 가지고 장난 친 거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기에 유진은 화를 낼 가치도 없다는 양 고개를 떨어뜨리곤 엘리베이터 앞에 우뚝 섰다. 이번에야말로 침착하게 기다려보겠노라, 다짐했는데, 조금 전과 다르게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5층에 도착했다. 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그 내부의 모습이 문득 그녀의 시야 한편에 살며시 다가왔다.
발걸음을 떼고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실으려는데,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잇, 도착 지금 했어요.”
눈물 겨울 정도로 사랑스러워 그녀를 괄목하게 하는 그 목소리가 말이다.
초조한 마음이 엄습한 그녀의 맥박이 짙게 움직이는 동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타인의 발소리가 정지했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이 떨어지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제 눈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며 헉, 놀라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생각을 했더라. 혹시나 놈을 다시금 만나게 된다면 신나게 두들겨 패줘야지, 하는 생각도 했었고. 그래, 가버려. 쿨하게 보내주기로 마음을 굳히기로 다짐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해서 즐거웠던 추억들이 없지 않아 남아있었기에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스쳐지나가는 솔바람이라고 치부하지는 않았으나, 분명 그는 제 곁을 맴도는 몇 안되는 남자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 판단도 했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헤어질 것이라며 매일 밤마다 죠세핀을 보며 누누히 말해왔었는데…….
“야…….”
“아, 아네고?”
“너!”
이상하게도 굳건한 마음과 다르게 눈물만 펑펑 터져나온다.
“네가 어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 나쁜 자식아!”
TV속에서나 볼법한 처량한 모습으로 그의 가슴을 쿵쿵 내려치며 유진은 소리쳤다.
“아네고, 그게 아니라요. 아네고 왜 울어요?”
“너 때문에 우는 거잖아, 이 멍청한 자식아! 너 때문에!”
“헉. 진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