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 간다 서너 채의 그 집은 그 골목의 오래된 주석 큰 미루나무 세 그루를 지나서 간다 도서관을 지나서 간다 운이 좋은 날에는 미루나무 정수리에서 초록 난파선을 보기도 한다 엊그제는 개똥 옆 석류꽃 그제는 남새밭 도라지꽃이 나를 붙들고는 우두커니 말이 없었다 담장은 허름한 대로 라일락이나 늦여름까지 오는 박꽃을 받아 준다 박꽃에서 몇 발짝 들어가면 구부정한 몸을 글썽거리는 나무 한 그루 접근 금지라는 붉은 말을 못 박고 글썽이는, 감나무 한 그루 있다 애꿎은 심중에 박힌 아홉 개의 못대가리를 또 헤아려 본다 통증과 불화를 쓰다듬기란 연민의 나쁜 기분이다 나무는 봄날 찾아온 감꽃의 뽀얀 잠을 이파리 아래 재웠다 뒷산 뻐꾸기 울음 탁란은 오늘도 기꺼이 받든다 산삐들기가 구욱국 저녁을 신호할 때는 수상한 애잔함에 굽은 목을 들어 올린다 나무도 나도 물씬 눈썹 젖는 여름날이다
-『김포신문/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2023.07.04. -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엔 서사가 있다. 행적이나 그림자, 기억과 더불어 상처도 존재하는 곳을 서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골목, 유년의 골목은 넓고 길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왜 그리 먼지. 성인이 돼서 다시 찾아간 골목은 좁디좁은 골목이 되었다. 담장을 넘은 라일락 잎과 감나무는 어디에도 없다. 퀭한 길고양이 눈을 닮은 골목의 끝만 저 끝에 보일 뿐이다.
골목의 서사가 지워지기까지 불과 한나절이라고 생각한 몇십 년이 지났다. 나의 서사도 글썽거리는 나무와 노을의 수상한 애잔함과 더불어 깊이 젖는다. 계절 때문인지, 서사의 실종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의문들만 파란 잎들을 떨굴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