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으니
마 22:1-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14 / [결혼 잔치의 비유;눅14:15-24] 예수께서는 다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2) `하늘나라는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의 결혼 잔치를 크게 베푼 일에 비할 수 있다. 3) 많은 손님을 초청한 왕은 잔치 준비가 끝나자 신하를 보내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게 하였다. 그러나 모두 오기를 거절하였다. 4) 그래서 왕은 다시 다른 신하들을 보내서 `모든 준비가 끝나고 고기를 굽고 있으니 속히 오라'고 전하게 하였다. 5) 그러나 손님들은 그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자기 상점으로 가고 6) 또 어떤 사람들은 왕의 신하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7) 그러자 왕은 몹시 화가 나서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결혼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청받은 사람들은 올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이제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초대하여라.' 10) 신하들은 거리에 나가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11) 왕이 손님을 만나러 들어와보니 한 사람이 자기에게 준비된 예복을 입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12) 그래서 왕이 `이 사람아, 자네는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가?'하고 물었으나 그는 대답을 못하였다. 13) 왕은 시종들에게 명령하였다. `이자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14) 이와 같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
본문은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진행하는 과정을 통해 천국을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천국은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으니(1-7)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잔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 오기를 싫어하여 거절하였습니다. 임금은 다시 종들을 보내어 초청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두 번째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잔치에 초청할 때 대개 종들을 두 차례에 걸쳐 보냈습니다. 첫 번째 종은 잔치의 초대장을 전달하고, 두 번째 종은 초대받은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두 번의 초대를 모두 거절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게다가 종을 죽이는 행위는 전쟁하자고 선전포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대로(8-14) 많은 사람이 혼인 잔치의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임금은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가 보낸 종을 모욕하고 죽인 자들을 벌하였습니다. 하지만 임금은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손님 없이 치를 수 없었기에 네거리 길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의 종들이 길에 나가서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데려와 잔치 자리는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여하였습니다. 당시에 왕실이나 부자가 혼인 잔치를 하면 손님들에게 미리 초대장을 보내고, 그 인원에 맞추어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이 입을 예복까지 미리 보냅니다. 잔치에 참여하는 손님은 마땅히 받은 예복을 입고 참여해야만 합니다. 예복은 초청받은 표지였으며, 만일 예복을 입지 않으면 초청받지 않은 사람이거나 초청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무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잔치에서 쫓겨납니다. 그래서 본 단락에서도 예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은 쫓겨났습니다. 훗날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도 반드시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입니다(계 19:7).
적용: 천국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 예복을 입고 있습니까?
한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지나온 발자국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힘들었던 여정이나 가파른 고개 길에는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찍혀 있고, 낮은 평지와 편안한 길에는 마치 나란히 걷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왜 낮은 평지에는 당신께서 저와 동행하여 주시고 거칠고 험난한 길에서는 저 혼자 걷게 버려두셨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편안한 길에서까지 진실로 나를 신뢰하고 필요로 했다면 아마 그 길의 발자국도 하나뿐이었을 것이야. 그러나 너는 힘들고 험난한 길에서만 나를 찾았고, 그때마다 내가 너를 업고 다녔단다.”
< 설 교 >
임금님의 초청
마 22:8-10 / 김상수 목사
저는 여러 나라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잘 사는 나라에 가면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잘사는가?’를 살피고, 가난한 나라에 가면 ‘이 나라는 왜 이렇게 가난한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피며 분석하고 돌아옵니다.
난 봄에 네팔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그곳 수도인 카트만두와 석가모니가 출생한 룸비니를 가 보았습니다. 지금 현재도 룸비니는 세계 각국에서 사원을 크게 지어서 성지화하고 있는데 그곳에 가 보면 석가모니가 출생한 곳에 큰 나무 기둥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팔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히말라야 산맥을 끼고 에베레스트 산과 세계 최고봉들이 즐비해 있는 높은 위치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세계 유일의 힌두교가 국교인 나라입니다. 도처에는 힌두교 사원이 있으며, 마을마다 제단이 있는데 한결같이 느껴지는 것은 더럽고 불결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GNP는 200불 미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며, 현재도 계속 내전이 일어나고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도의 칼카타를 가보니 그곳의 길거리에는 많은 노숙자들이 있습니다. 아침 새벽에 나가보면 길거리에 즐비하게 잠을 자고 살고 있습니다. 갠지스 강을 가보면 힌두교들에게는 그곳이 성지이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한번 목욕을 하는 것이 그들 평생 최고의 소원입니다.
제가 그곳을 가보니 오염된 더러운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인도의 힌두교인들이 다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에 강가에 역(驛)이 하나 있는데 세계적으로 큰 역이라고 했습니다. 그 역 바닥에도 노숙자들이 많이 자고 있었습니다.
힌두교 사원을 가 보았는데 그곳에서는 살아있는 염소를 단칼에 목을 쳐서 그 피를 바치는 모습과 이렇게 제단에 바치려고 줄을 서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참으로 불결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캄보디아는 저희 교회가 선교하고 있는 곳입니다. 오랜 불교국이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10년전 폴포트라는 사람이 캄보디아인들 중 지식인들은 지식인이라는 이유만으로 200만명을 죽였고, 안경만 끼고 있어도 지식인이라고 다 죽였습니다. 프놈펜 외각을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가면 킬링필드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 기념탑을 세워놓았는데 거기에 그 당시 무더기로 죽었던 사람들의 해골만 모아서 탑을 쌓아놓았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잘못된 종교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사회를 병들게 만들며, 나라를 가난하게 만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가 보면 너무나 정돈이 잘 되어 있고 깨끗하며 모두 잘 살고 있습니다.
북극의 스웨덴과 핀란드 같은 나라는 관광객이 전 세계에서 몰려와 헬싱키와 스톡홀름을 오고가는 유람선이 얼마나 큰지 5만톤이 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큰 호텔 만큼 큽니다. 그 안에는 백화점이 있고, 자동차가 400대 정도 들어가는 배를 여러 대 운행하는데 관광객이 만원인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나라들은 어떤 나라입니까? 일찍이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입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도 복음이 들어오기 전 지금부터 120년 전에 우리의 모습도 네팔이나 캄보디아 또한 인도 같이 너무나 못살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에만 해도 놀이문화가 없어서 모두 음주, 담배,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처음 와서 보니 모두 술 먹고 길거리에 누워있으며, 초가집 오두막에 살고, 너무나 가난하고, 무지하고, 할 일이 없어서 도박하고, 관혼상제로 제사 지내느라 빚내고, 잔치하느라 빚을 사는 도탄에 빠져가는 백성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선교사님들이 처음 들어와서 선교할 때에 맨 처음 교회의 목표를 세운 것이 예수 믿으면 ‘술 먹지 말고 담배 피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그것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때에 관혼상제가 간소화되어 제사를 지낸다거나 잔치를 할 때에 최소의 비용으로 하도록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까지 우리나라는 수 천 년 역사를 통해 무지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부터 이 나라의 역사는 크게 두가지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선교사들이 새로운 문물을 도입해 왔습니다. 새로운 과학과 새로운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배재학당과 이화여전, 연희전문학교 등 지금은 일류대학들이 되었지만 이런 대학을 세우고 지방마다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나라에 개화기의 지도자들이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본 식민지 생활에 대항하다가 독립운동으로 감옥에 들어갔고, 거기서 기독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안창호, 이승훈, 조만재, 이승만, 김구 선생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다녀보면 우리 한국만큼 빠르게 발전한 나라가 없으며, 우리만큼 교회가 많은 나라가 없고, 또한 자원이 없으면서 자동차가 이렇게 홍수처럼 많은 나라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으며 인구가 많고 인구밀도가 조밀한데 이만큼 잘 산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우리는 작은 핸드폰을 들고 다니면서 핸드폰의 혜택을 많이 받습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가보니 아직도 미국 사람들은 큰 핸드폰을 가지고 다닙니다. 제 작은 핸드폰 충전기를 찾느라고 LA를 다 다녀보아도 없었습니다. 이만큼 우리가 잘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된 모든 동력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복을 받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분이 오라하는 초청에 우리가 “예”라고 응답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임금님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혼인잔치를 배설합니다. 많은 짐승을 잡아서 잔치를 배설하고 손님을 초청하는데 그들이 한결같이 바빠서 못 오고, 사업하느라 못 오고, 밭에 나가 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임금님은 화를 내며 이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고 다 버리고 길거리로 나가 할 일도 없고, 병들고, 무식하고, 가난하고,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한 사람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악한 사람도 오고, 선한 사람도 초청해 잔치를 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혼인잔치의 교훈은 임금님은 나라의 주권자로서 그 임금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혼인잔치는 오늘 여러분을 잔치에 초대한 이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혼인잔치의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초청은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옛날 임금님이 아들 혼인잔치를 하는데 신하들이 가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신하들은 당장 퇴출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임금은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지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셔서 살게 하시고 때가 되면 우리를 불러 가시는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실 때에 우리가 여기 참석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며 영혼입니다. 제가 이렇게 서서 설교를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시간 제 영혼을 불러간다면 제 몸은 시체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이 육신을 위해서 항상 바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지금 이 시간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죽는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우리교인들에게 말씀을 드렸지만 강아지 목숨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주인에게 있습니다. 강아지가 말을 잘 듣는다면 목걸이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냥 잡아먹기는 아깝고 다음 복날이 되면 잡아먹자고 생각하며 그때부터 가져다주는 고기는 잡아먹기 위해서 입니다.
강아지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70년, 80년 살지만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살고, 하나님이 오라 하면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 병원의 원장을 지내셨던 박사님은 소화기과 전문의사입니다. 이분은 자기가 소화기과 전문의사이지만 자기 딸은 위암으로 죽었습니다. 자기 딸이 죽는데 아버지가 소화기과 의사이며 위암박사면 무엇하겠습니까?
어떤 분은 독일에서 10년 동안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따서 한국 나오려고 다 준비해 놓고 일주일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인생이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사는 것이 실력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물고기가 아무리 헤엄을 잘 쳐도 그물을 쳐 놓으면 걸리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며칠 전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실력이 있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시험 준비를 할 때에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알고 그것만 공부 합니다. 그러나 실력이 없는 학생들은 아무거나 공부하며 수고는 했는데 문제는 하나도 안나옵니다. 아시겠습니까? 뭐가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아는 것이 인생의 지혜인 것입니다.
1959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국빈으로 소련 수상 후루시초프를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젠하워와가 후르시초프에게 전화를 하기를 “오늘은 주일이니 나와 함께 교회에 가자”라고 했습니다. 공산주의자가 교회에 가겠습니까? 안갑니다. 그래서 한 시간 반만 시간을 주면 내가 교회에 갔다 오겠노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다녀와서 아이젠하워가 말하기를 “그동안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라고 말하자 후루시초프는 “내가 이렇게 먼 길을 달려 여기까지 왔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핑계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붙든 사람이기 때문에 국빈을 놓아두고 교회를 다녀온 것입니다.
속초에 가면 장산 막국수집이 있습니다. 속초공항 옆에 장산 막국수집은 전두환 대통령도 다녀갔고, 정주영씨도 다녀간 유명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막국수집은 망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실로암 막국수집으로 바뀌어 생겼습니다. 제가 가보니 옆집은 텅텅 비었는데 그 집만 차를 주차할 곳이 없었습니다. 지난 주 제가 목사님들을 제주도에서 모시고 다녀왔습니다. 그 실로암 막국수집에 다녀오신 목사님들 말씀이 그 집에 수요일 저녁에 갔는데 교회에 간다고 장사를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장사가 잘되는데 수요일이라고 문을 닫고 교회를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 다수의 사람은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임금님이 많은 사람을 초청했으나 핑계가 많았습니다. 나는 바쁘다. 사업하기 때문에, 나는 밭을 갈아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 해보면 전도를 제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돈이 있어 사업하는 분들, 지위가 있고, 집안이 평안하고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 소위 말해서 세상에서 힘이 있는 사람들은 전도하면 듣지 않습니다. 바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 시간 죽는다고 생각하고 죽기 30분밖에 안남았다면 일평생 여러분이 바쁘고 수고해서 번 그 돈이 여러분의 위로가 되며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평생을 수고한 것이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분들의 임종을 지켜보며 마지막 입관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믿는 성도의 특징은 죽은 후에 얼굴이 너무나 평안하며 잠을 자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입관해 보면 팔다리가 다 움직이며 산 사람처럼 움직입니다. 불신자들은 죽으면 시신이 뻣뻣합니다. 신자는 죽으면 왜 그렇게 부드러울까요? 마지막 가는 그 순간이 편안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불신자들은 저승사자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아둥바둥했기 때문임을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사람은 힘있는 자가 아니고 힘이 없고 약한 자들 입니다. 화가 난 임금님이 종들에게 아무나 데려 오너라. 악한 사람이든지 선한 사람이든지 다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도해보면 외로운 사람과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실패한 사람, 낙심 중에 있는 사람이 전도가 잘 됩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우리 한국 개화기 초기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이 모두 교인이었던 이유 중에 모두 감옥에 들어가 앉아있을 때에 선교사들이 성경책을 넣어주어 읽고 하나님을 알게 되어 모두 기독교 신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 병든 사람,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지금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패할 수 있으며,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을 때가 되었다면 그때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메시지구나! 내가 하나님이 오라는 초청에 빨리 대답을 해야겠구나! 교회에 나와야 되겠구나!’라고 받아들이신다면 틀림없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이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하니 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당신은 이제 6개월밖에 못 삽니다”라고 해서 그분은 주님의 초청에 응답을 했습니다. 과거를 들여다보고 그동안 불편했던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화해를 하고, 가족들이 먹고살 만큼 준비도 하고, 그리고 남은 것은 사회복지기관에 다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이 되어도 죽지를 않아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다시 해보니 의사가 하는 말이 “제가 오진을 한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선생님! 오진을 했어도 괜찮습니다. 그때부터 제 인생은 새롭게 변해버렸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만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문제 많은 분들이 와야 할 곳입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하면 담배와 술을 딱 끊고 가겠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혼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잡아당겨 주어야 나올 수 있습니다.
제가 추적 60분을 보니 어떤 분은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집안일도 돌아보지 않는 분도 있었습니다. 빠지면 죽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나와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런 문제가 있다고 내어 놓으시면 그때 하나님이 해결해주십니다.
담배 피우시는 분들 여러분이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시면 하나님이 담배를 끊게 하십니다. 담배 피우시는 분들을 보면 담배 냄새가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담배를 끊게 하시니 담배 냄새가 역겨워지며 어떤 분은 술을 너무나 좋아하셨는데 술만 먹으면 설사를 하고 배가 아파서 못 견뎌 할 수 없어서 술을 끊습니다. 하나님이 치료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 모두 다 오라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이 초청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오라고 하십니다.
요즈음 한국 사람들이 캐나다가 살기 좋다고 이민을 많이 갑니다. 그래서 캐나다에 가는데 비자 조건이 까다로워 졌습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가야합니다. 아니면 특별한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초청인 천국 가는 비자는 그저 “예”라고 대답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소용이 없고 병든 자라야 의사가 소용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시키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영접하고 가면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해야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갈 수 있는 비자입니다. 그 예수님의 초청말씀에 “예”라고 대답만 하면 됩니다.
2차대전 때에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이것을 본 스웨덴 정부가 안되겠다고 하여 유대인을 살리기로 하고 스웨덴 정부가 외교관 워렌버그란 사람에게 특권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가서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마다 가서 비자를 발급해 주어라. 스웨덴에 입국할 수 있는 비자를 발급해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독일, 화란, 헝가리, 체코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유대인을 찾아서 스웨덴 입국 비자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2만 5천개의 비자를 전달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의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내가 어떤 조건으로 비자를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기술자가 많고 지식인이 많았기에 비자를 내는데 조건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무 조건이 없고 이 비자를 받겠다고 서명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유대인 수송열차에 올라가서도 비자를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초청도 이와 같습니다. “예”라고 대답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요한계시록 22: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초청받은 사람은 천국가족의 일원되며, 신분이 바뀌어집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요한복음1: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신분이 바뀌게 되면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으로 살수 있는 가치관이 바뀌며, 목표가 바뀌고, 그의 인생관이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남강 이승훈 선생이 구약 20번 신약 50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오산학교 창설자인데 이분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했습니다. 그때 모든 삶의 가치관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33인 독립선언서에 도장을 찍어야 할 때에 서로 미루고 있었을 때에도 그분이 맨 먼저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분이 마지막 죽을 때에 하시는 말씀은 “나 죽거든 이 몸을 경성의전 해부학 교실에 표본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80년 전에 이 정도의 의식을 가지셨다면 엄청나게 깨어있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이 그것을 못하게 했습니다.
■ 미국의 피어선 씨는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분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큰 농장을 경영하면서 목재소도 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결혼할 때에 다행히 예수님을 믿는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부의 결혼조건은 “우리 열심히 돈벌어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삶을 살고 전부 공익사업에 기증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 피어선 씨는 신부가 하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 이 신부라면 틀림없다’라고 생각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조건을 실행했습니다. 피어선 씨 내외가 평생동안 24개 주에 있는 47개 대학을 경제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본인들은 결혼할 때에 구입한 낡은 침대에서 평생을 지내는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이름, 그들의 재물은 영원히 빛나는 것입니다.
■ 제가 칼커타에 있는 테레사 수녀의 복지원에 가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18세에 부름을 받고 응답하여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제 저는 제가 가는 길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면 저는 가겠습니다”라고 하며 칼커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키도 작고 체구도 작은 분인데 죽었을 때에 세계의 대통령과 수상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칼커타 거리에 100만 명의 시민들이 그가 가는 마지막 길을 전송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 저는 젊은 시절 톨스토이의 글을 좋아해서 그분의 책을 좀 읽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에 그분이 평소 살고 집필을 했던 집이 박물관으로 보관하고 있어서 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고향 야스나야 풀러야나에 가서 묘지에도 가 보았습니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분이어서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곳에 무덤이 있었는데 관하나 묻힐 정도의 좁은 곳에 30cm의 높이로 잔디만 입혀져 있고 묘비도 하나 없는 무덤이 그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아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그때부터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다 바칩니다. 그가 생각하기를 “나는 너무 부끄럽다. 내가 이렇게 부자로 산 것이 부끄럽다”고 하며 가족들에게 우리 재산 모두 농노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고 했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미쳤다고 하며, 부인은 모든 출판권을 자기 이름으로 다 돌려놓았습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한 톨스토이는 가출하여 조그마한 시골 기차역에서 객사하여 죽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그분이 무식해서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컵은 물을 담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컵이 깨진다면 당장 쓰레기통에 들어가지만 목적을 달성하느라고 이렇게 높은 곳에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지만 바른 인생이 됩니다. 성경은 “인생이 비록 존귀하지만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짐승은 죽으려고 열심히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왜 내가 빈손으로 와서 빈손 들고 가야하는가? 또 짐승은 다 죽으면 잡아먹어 버리는데 우리 인생은 죽으면 수의를 입히고 관에 담아서 엄숙하게장례를 치루느냐? 인생은 존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 존귀한 존재가 어떻게 살다가 가야할까요?
■ 20년 전에 부산 자갈치 시장에 50대 중반의 부인이 어물전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6.26때 월남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했고, 자녀들은 다 가르쳐 대학을 마치고 사회인이 될 때였는데 이분에게 하루는 갑자기 마음속으로부터 질문이 생겼습니다. “내가 뭐하려고 이렇게 앉아 있나?” “장사하려고 앉아 있지?” 계속 질문하에 결론에 가 보니까 죽으려고 앉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분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자기 남편에게 사정하기를 “여보, 내 소원 좀 들어 주세요”라고 하며 교회 좀 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후일에 권사님이 되어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입니까? 영원한 나라입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선택하셔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때에 개인이 바로 되고, 가정이 바로 되고, 사회가 바로 되고, 나라가 바로 됩니다.
캐나다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제 아이들이 며칠 전 전화를 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교통사고가 났다고 했습니다. 차가 미끄러져 약간의 사고가 났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냐고 물으며 어떤 분은 견인차를 불러주고, 어떤 분은 자기 짚차를 가지고 가다가 줄을 메어 당겨주어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까요?”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건강한 사회이며 복된 사회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초청에 부르심을 받으면 개인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나라가 변화되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초청에 응답해서 내 영혼이 잘되고, 인생이 잘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 다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혼인잔치
잠 15:13-15, 마 22:2-4 / 이성희 목사
최근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잘못된 생활상식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블랙박스는 검다는 것이 잘못된 상식입니다. 블랙박스는 눈에 잘 띠게 하기 위하여 형광색입니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실제 말은 봄에 살이 찐다고 합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놀기 좋은 계절이라 오히려 다른 계절보다 독서율이 떨어집니다. 셋째 딸은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고 하지만 딸이 많으면 가정이 복잡하다고 외동딸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결혼 풍습도 시대상에 따라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셋 째 딸이 아니라 모든 딸을 안보고 데려가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 모두가 보지고 않고 데려가시는 신부들인 것입니다.
최근의 결혼풍속도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결혼예식이 호화롭게 변하고, 과시적이고, 지참금을 요구하기도 하고, 혼수가 갈등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면 되는데 사랑 외에 따지는 게 점점 많아집니다. 그러다 보니 갈등도 문제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결혼보다 자녀의 결혼이 더 감동적이고 기쁘지 않습니까? 자신의 결혼 때는 얼결에 하지만 며느리나 사위를 볼 때는 부모의 기쁨이 한층 더 큽니다. 왜냐하면 흔히 말하는 내리사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손자사위나 손자며느리를 볼 때는 기쁨이 그보다 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와 같다고 합니다. 자기가 아니라 아들의 혼인입니다. 아들은 자신의 상속자이며 나라의 후계자입니다. 아들의 혼인잔치는 자신의 것보다 기쁨이 배나 더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임금은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신랑으로 오셔서 베푼 기쁨의 혼인잔치입니다.
임금은 종들을 보내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와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을 통하여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초대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청한 사람들’이란 말은 ‘케클레메누스’로 초청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복수로서 모든 사람들이 다 초청의 대상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이 일회적이 아니라 반복적이며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하자 다시 종을 보냅니다. 세례요한 이후에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전하셨고, 70인 사도를 따로 보내시기도 하셨고, 사도들이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기도 하였고, 그 후에 헤아릴 수 없는 선교사들이 끊임없이 전도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로의 초청이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어 잔치는 준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혼인잔치는 완벽한 혼인잔치입니다. 양과 질 어느 것 하나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고 완벽하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잔치입니다.
잠언 15:15에는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즐거운 곳입니다. 기쁨과 웃음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 곳은 언제나 잔치입이다. 이 잔치에 다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아이가 처음 결혼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엄마, 신부가 왜 흰 드레스를 입어?” “그건 흰색은 행복의 상징인데 오늘은 신부가 가장 행복한 날이기 때문이야.” “그럼 신랑은 왜 검은 양복을 입고 있지?” 결혼은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온통 흰 색입니다. 행복과 순결의 색입니다. 우리 모두 흰 세마포로 갈아입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혼인입니다.
마태복음 22:2에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가 혼인일까요? 왜 아들의 혼인일까요? 왜 잔치일까요? 혼인은 둘이 하나 되는 일입니다. 혼인은 언제나 즐거움이 가득한 것입니다. 혼인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혼인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모든 것이 다 함께 어우러진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혼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혼인은 귀한 것입니다. 신명기 24:5에는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고 합니다. 혼인은 귀한 것이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에 계명에도 혼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이란 한자어의 결(結)자는 실사(絲)자와 순조로운 길(吉)자를 묶어놓은 글자입니다. 두 사람을 단단히 묶어 놓아야 안심이 된다는 말입니다. 혼(婚)자는 계집녀(女)자와 저녁 혼(昏)자가 합성된 말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신부를 어둠 속에서 맞아들이던 습속을 반영한다고 합니다. 원래 이 말의 뜻은 여자를 어둠 속 묶어 놓아야 길하다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요즘과는 너무 다른 습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결혼은 신랑이 신부를 사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결혼 지참금을 내고 여자를 데리고 옵니다. 여자의 가족에게 지불할 보상금을 히브리어로 ‘모하르’라 합니다. 신부의 아버지에게 지불할 지참금입니다. 야곱이 삼촌의 집에서 많은 돈을 벌어 다시 돌아올 때에 아내들인 라헬과 레아에게 아버지를 떠나가자고 합니다. 창세기 31:5에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 버렸으니”라고 하는 말로 봐서 야곱도 상당한 모하르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신부 아버지의 지참금은 딸이 과부가 되거나 이혼하게 될 시를 위해 보관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랑이 가난하여 돈이 없으면 일로 봉사하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삼촌의 집에서 봉사하고 라헬을 얻었습니다. 한편 지참금이 없을 때는 신부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는 일도 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딸 미갈을 얻기 위해 사울은 원수를 죽이게 하였습니다.
요즘 결혼 풍속도가 많이 바뀌어 결혼비용이 남자가 여자에 비해 4배나 더 든다고 합니다. 결혼비용을 계산해 보면 평균적으로 신랑이 5천 1백만 원, 신부가 1천 2백만 원이 든다고 합니다. 중국 수나라의 왕통은 문중자(文仲子)에서 ‘혼취이논재, 이로지도야’(婚娶而論財 夷虜之道也)라고 하였습니다. ‘혼인하는데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법도이니라’는 뜻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오랑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신랑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신부를 값 주고 사기 위해서 친히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신학용어에 ‘보상설’이란 학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마귀에게 몸값을 주고 우리를 해방하였다는 설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노예들을 석방하거나 자유인이 되게 할 때 주인에게 돈을 주고 노예를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결혼하기를 원하십니다. 신랑 되신 주님이 순결한 신부를 구하십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신부를 찾고 찾으시면 혼인하십니다. 이것이 거룩한 혼인입니다. 흔히 결혼이라고 할 때 wedding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혼인예식을 할 때는 ‘거룩한 혼인’이란 뜻의 ‘holy matrimony’라고 합니다. 모든 결혼은 거룩한 혼인입니다. 모든 결혼은 귀한 것입니다. 모든 결혼은 거룩한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항상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남녀가 어쩌다가 만나서 부부가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 가운데서 만나고 아이 낳고 사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 둘이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결혼은 온전한 일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일체가 되는 곳입니다. 나와 그리스도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혼인입니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결혼은 일곱 가지 사랑의 코드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동의, 신뢰, 계약, 사회적 확증, 교회적 인가, 완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정입니다. 이런 온전함이 혼인에는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랑의 코드가 충족한 온전한 혼인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시 헤어지는 것도 없고 이별도 없습니다.
잭 하일스는 세상 가장 위대한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사이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친구일 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남편을 위하여’. ‘사람이 아내를 위하여’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라고 하셨고, 친구인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완벽한 혼인입니다. 이혼의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결혼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이혼할 이유가 많습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후회도 되고 사랑도 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혼 없는 결혼만 있습니다. 한번으로 영원한 신랑과 신부의 하나 됨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께서 신부를 데리러 다시 오시면 혼인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잔치입니다.
마태복음 22:4에는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잔치입니다. 완벽한 혼인은 완벽한 잔치가 따릅니다. 잔치가 없는 혼인을 보셨습니까? 즐거움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는 잔치가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혼인잔치는 헬라어로 ‘가무스’인데 복수입니다. 여러 날 동안 계속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의 결혼 축제는 대개 7일이나 그 이상 밤낮으로 계속된다고 합니다.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가득 찬 축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혼인잔치는 주로 신랑의 집에서 합니다.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결혼 성립의 증인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는 신부들에게 그 잔치가 얼마나 기쁠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는 7일이 아니라 매일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즐거워야 할 잔치에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연회장의 실수로 있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례에 쓰는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셨습니다. 그 항아리는 약 35리터가 들어가는 제법 큰 항아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많은 맛있는 포도주를 만드셔서 잔치에 즐거움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잔치의 기쁨을 회복하셨습니다. 맛없는 물이 맛있는 포도주로 변한 것입니다. 재미없는 잔치가 재미있는 잔치로 변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것의 비유가 있습니다. 비유는 똑같이 잔치로 끝납니다. 세 비유는 똑같이 “즐거워하다”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잔치나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치네 먼데 죄인 돌아 왔도다.” 3절을 보세요. “천국 종을 치고 잔치 베푸네 돌아온 자 참여하도다.” 상상해 보세요. 종소리가 끊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잔치입니다. 얼마나 기쁜 잔치이길래 종소리가 끊이지 않겠습니까?
탕자의 비유에 보시면 큰아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입니다 형은 잔치가 즐겁지 않습니다. 돌아온 동생이 반갑지 않습니다. 율법주의는 항상 잔치를 망치게 합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은 포도주가 떨어지게 하고, 기쁨과 웃음이 사라지게 하고, 잔치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입니다. 사랑 없이 율법만 있으면 이렇게 되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경축하는 사람입니다. 잔치와 만찬이 끊이지 않습니다. 축제가 있고 흥겨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시 사는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카니발’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카니발은 축제입니다. 카니발이란 말의 어원은 고기를 먹는 기간이란 뜻입니다. 옛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 기간에는 금욕과 절제로 지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사순절이 끝나고 부활이 오면 고기를 먹고 다시 기쁨을 회복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이 축제가 카니발입니다. ‘카르네’라는 말이 고기라는 말입니다.
‘다모클레스의 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모클레스는 주전 4세기 시칠리아의 시라쿠스를 다스리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신하입니다. 그는 참주에게 아첨조로 행복을 기원했습니다. 디오니시오스는 자신의 신하 다모클레스를 잔치에 초대하였습니다. 잔치 자리에는 한 올의 말총으로 매단 칼 밑에 신하를 앉히고 음식을 먹게 하였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내내 다모클레스는 머리위에 있는 칼 때문에 잔치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행복과 위기가 항상 함께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의 잔치를 보세요. 문자 그대로 ‘새옹지마’입니다. 당대에 의인이었던 욥도 한참 즐겁게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에 자녀들과 재산을 다 잃었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됩니다.
최고의 잔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잔치, 영원한 잔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7에는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라고 합니다.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할 잔치입니다. 9절을 보세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어린양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유행하던 ‘목사와 거지의 공통점’이란 유머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는 대로 먹는다. 둘째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때는 많다. 셋째는 손에 뭘 항상 들고 다닌다. 넷째는 전업이 용이하지 않다. 다섯째는 출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다. 목사와 거지의 공통점은 있지만 목사가 거지 수준이란 말은 아닙니다. 옛날 잔치에는 유난히 거지가 많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잔치집은 누구에게나 후합니다. 그날만은 거지라도 거절 하지 않습니다. 잔치가 있는 날은 실컷 먹는 날입니다.
딸이 아빠와 이런 대화를 합니다. “아빠 나 결혼할래요.” “너 그 사람 사랑하니?” “죄송하지만 그건 제 일이예요.” “그럼 그 사람은 널 사랑하니?” “그건 그 사람 일이예요.” “그런데 어떻게 살려고 그래, 너는 학생이고, 돈도 없고, 집도 없잖아.” “그건 아빠 일이잖아요.” 잔치는 모두 즐거워야 합니다. 자녀들은 즐겁고 아빠는 등이 휩니다. 아빠는 등이 휘지만 즐겁습니다. 이것이 자녀의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혼인잔치를 최대한 성대하게, 즐겁게, 자녀에게 흡족하게 해 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위한 혼인잔치를 성대하게, 즐겁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며느리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며느리이기를 원합니다. 며느리가 더 많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혼인잔치가 더 기쁘고, 큰 잔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결론
얼마 전 신문에 ‘대한민국 1,000대 브랜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라면, 참이슬 등이 광복 후 한국 산업에 큰 영향력 분야별 10대 간판 브랜드라고 하였습니다. 신문에는 ‘참이슬에 취하고 신라면에 중독’이라고 썼습니다. 우리에게는 먹고 마시는 것이 역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잔치가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웃고, 즐기는 일이 많습니다. 초상집에 가도 먹고 마시는 일이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한다고 하면 거의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처녀들이 ‘시집 안 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 가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 시집가는 것도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바입니다. 영원을 추구하고 죽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분이 세상을 떠나면 다 “좋은 곳에 가셨습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갈구합니다. 좋은 곳인 것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혼인 같은 하나님의 나라, 잔치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혼인잔치에 다 참여하여 신랑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천국 잔치에 합당한 사람
마 22:1-14 / 문기태 목사
어떤 사람이 설교시간에 정신없이 졸고 있었습니다. 아주 상습적으로 조는 사람인지라 창피를 주면 다시는 졸지 않을 것이라고 목사님은 생각하여 갑자기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기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다 일어나 보시오." 그러자 교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졸 집사는 타이밍을 놓치고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깨어나 뒤늦게 옆 사람에게 물어보고는 망신살이 뻗쳤다고 생각하여 얼굴이 벌개져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도 여전히 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설교중에 "여러분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은 다 일어나 보시오." 하였습니다. 그런데 졸 집사는 앞 부분은 못 듣고 뒷 부분에 '일어나 보시오"하는 말만 듣고 '오늘은 망신을 당하지 말아야지' 하는 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킥킥거리며 웃음을 삼키자 '무엇이 잘못되었구나!' 느껴졌으나 다시 앉을 수도 없고 하여 큰 소리로 "내가 무슨 이유로 서 있는지 모르지만 목사님과 저만 서있네요."
여러분, 천국을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국에 대해서 심각하게 상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슬렘의 천국은 여성들에게는 없는 땅입니다. 왜냐하면 코란에는 천국에서는 등급에 따라서 나뉘는데 가장 등급이 높은 사람은 천 명의 여성들로 둘러 싸였다고 합니다. 그 다음 사람이 900명이구요. 글쎄 마누라 하나만도 감당하기 힘든데, 어떻게 그런 천국에서 잘 살 수 있을지 좀 상상이 안갑니다만, 코란에서 말하는 천국은 여성들과는 상관없는 땅입니다.
그런가하면 도교의 천국은 한가함입니다. 신선도를 보면 대부분 정자나무에 앉아서 바둑을 둔다든지, 또 낮잠을 자고 있는데 소년이 차를 끓인다든지... 이런 한가함으로 도교의 천국이 설계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천국은 어떠한가? 불교는 이 지상이 고통의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고통이 왜 생기는가? 욕심 때문입니다. 그 욕심이 집착을 낳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 고통을 면하는 법, 그래서 도에 이르는데 그것을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열반'이라고 하지요.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 '바나'라는 말은 '불티'라는 뜻입니다. 불길이 꺼져버린 장소, 아무 것도 없는 장소, 무상무념의 장소,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니르바나입니다. 열반이요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천국을 뭐라고 했을까요?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많이 설명되어 있는 모습이 '잔치' 입니다. 시편 23편에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주께서 나를 비웃고 조롱하는 그 모든 사람들 앞에서 상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우승했을 때 받는 상이 아니고 '잔치 상'이라는 말입니다. 옛 유대에서는 잔치자리에서 주빈들에게는 항상 머리에 향내나는 기름을 발라주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요한계시록에도 잔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 천국 잔치를 어느 정도로 아름답게 준비했는가를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마치 그 남편을 위하여 예비한 것 같더라." 한 여성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정성스럽게 자기를 꾸미는 때가 결혼의 때일 것입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합니까? 주께서 우리를 위해 천국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예비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천국을 잔치로 표현한 사람 가운데 성경의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C.S 루이스라는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는 자기 제자들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성경에 나오는 그 천국, 죽지도 못하는 영생의 땅인데 그 인생이 얼마나 지루할까요?" 하고 묻자 "여보게, 자네가 모르는 것이 많네. 권태나 지루함은 타락한 인간에게만 한한 것이네. 천국은 날마다 새롭게 만나는 첫 사랑의 잔치라네."라고 답변했답니다. 처음 사랑에 눈 떠 눈을 감아도 나타나고 눈을 뜨고 아무리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 첫 사랑과 함께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행복하지 않습니까? 천국은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나 영원히 함께 지내며 벅차 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는 첫사랑의 잔치라는 것입니다.
이 천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잔치에 사람을 초청할 때, 네 친척이나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네게 유익을 줄 사람을 초대하지 말아라. 그들이 내게 다시 갚으면 그것은 손해다. 너는 가서 네가 도와주되, 도무지 내게 아무런 이익이 될 수 없는 사람을 초청해 그 사람들을 위해서 잔치를 배설하라. 그리하면 우리 하나님의 갚음이 네게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경제원칙 속에 삽니다. 가장 적은 것을 효율적으로 투자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느냐가 이 세상의 경제법칙입니다. 사람들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마음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지혜라고도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도와준 것이 그것이 네게 이익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영원의 나라에서 불행한 것이다. 네가 다른 사람을 도와줬는데 그 사람이 네게 아무 것도 못 주었다면 하나님의 갚음이 그 날에 있을 것이다." 여러분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베풀기만 하고 되받지 못해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천국에서 다 하나님께 되받을 것입니다. 되받을 것 계산하고 베풀지 말고 무조건 베푸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설명하시며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식을 거행한 왕의 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결혼식 잔치를 잘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 자리에 빛이 나도록 종을 보내어 손님을 초청하였습니다. '우리 잔치에 참석해주소서. 소를 잡고 살찐 짐승을 여러 마리 잡았습니다. 온갖 산해 진미를 요리하여 가득 차려 놓았습니다. 오셔서 기쁨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의 예의를 다해서 초청장을 발송하고 종들을 보내어 정중히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 자리에 오기를 싫어합니다. 재차 보내었으나 돌아보지도 않고 볼 일을 보러 나갑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나는 밭으로 갔습니다.자기 상업차로 간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임금이 보낸 종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다 사양하고 거절했습니다. 그 때 그 주인이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라니' 라고 말합니다. 처음 초대받았던 사람들이 잔치집에 와서 기쁨을 누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거리에 가서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초청하여 데려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종들이 길에 나가 만나는 대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가리지 않고 다 데려 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칫집에 손님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잔치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임금님의 파티장인데 어떤 사람은 밭에서 일하다가 그대로 와서 작업복 차림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삿군 복장이고 어떤 사람은 속옷 차림입니다. 임금님의 인상이 찌푸려집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결혼식 잔치인줄 알았을 텐데 예복을 입고 왔어야지..., "여봐라, 복장 불량자들을 모두 끌어내라. "
이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1. 예수 믿는 것은 천국 왕의 잔치에 들어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마음이 있지만 예수 믿고나면 그 다음부터 재미가 다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멈칫거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초상집처럼 엄숙하고 굳은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웃어도 안되고, 함부로 말해도 안되고, 화려한 옷을 입어도 안되고 이것 저것 안되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신앙 생활은 잔치의 연속입니다. 예배도 잔치자리입니다. 부흥회도 말씀 잔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절기도 축제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잔치집에서 맘껏 먹고 노래부르고 웃고 떠들고 즐기는 것처럼 신앙생활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억지로 엄숙한 얼굴을 하지 마세요. 그런 얼굴을 경건한 모습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잔치집에 가서 화난 얼굴을 하거나 무서운 얼굴을 하거나 슬픈 얼굴을 하면 잔치에 재뿌리는 것입니다. 잔치집에서는 어떤 얼굴이 잘 어울립니까? 웃는 얼굴, 기쁜 얼굴, 재미있어 어쩔줄 모르는 얼굴이 마땅합니다. 교회 생활, 신앙생활에도 잔치집이라는 확신을 갖고 참여할 때 풍성해집니다.
왕의 아들이 결혼을 하여 왕이 베설한 잔치라면 얼마나 풍성하겠습니까? 본문에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오소서 하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며 감동을 줄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갖추셨습니다. 예수믿으면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믿으면 참된 화목이 있습니다. 예수믿으면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기다리십니다. 초청에 응하여 왕의 잔치에 참여하고 참 만족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왕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은 잔치에 합당치 않은 사람입니다.(5)
아이러니한 것은 왕의 초청을 사람들이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왕의 초청을 하나같이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싫어하고 거절했습니다.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고 잔치자리에 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밭에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러 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을 욕보이고 죽이고 말았습니다. 왕의 반응이 어떻게 나왔을까요? 화가 나서 진멸하고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왕이 한 말이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라고 했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잔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왕의 호의에 대한 거절은 곧 왕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먼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오셔서 저들이 보는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저들에게 성령 강림의 사건이 임하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약속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저들은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고집을 버리지 않고 계속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다시 종들을 거리에 보내어 닥치는대로 다른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가리지 않고 초청했습니다. 왕과 아무 친분이 없는 자들을 초청했습니다. 왕을 위해 공로가 없는 자들을 초청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깊은 은혜를 마음속으로 누렸는지 모릅니다. 천국이 축구 월드컵 개막식 입장권처럼 한정되어서 프리미엄을 주어도 못산다고 한다면 천국 가기가 불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자리가 많다니까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그래서 내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준비를 해놓았는데 거절하는 사람의 거절은 우리 인생을 살면서 거절하기 쉬운 조건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시시한 자기의 사사로운 일을 핑계로 거절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사람들은 공연히 바쁘다는 핑계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초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격에 대한 아무 조건없이 초청되고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또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거절하는 사람은 천국 잔치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종들을 보내어 간곡하게 하시는 초청에 응하는 사람만이 천국 잔치를 먹으며 즐기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항상 하나님의 초청에는 즉각적으로 응하시는 복된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예복을 입은 사람만이 왕의 잔치에 합당한 사람입니다.(12)
그런데 어떤 사람은 너무 급하게 잔치에 참석하느라고 옷을 갈아 입지 않았나 봅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왕이 그를 발견하고는 묻습니다. 친구여, 어지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그 사람이 유구 무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무엇이라고 변명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잔치를 맛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자리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복은 무엇입니까? 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번 하나님앞에서 서기 위해서는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초청을 받아 교회에 왔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누더기같은 자기의 의를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나왔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입고 잇는 옷을 갈아 입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의 공로와 행실을 앞세워 나아가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러나 나는 부족하나 그리스도로 옷입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래 너는 내 잔치에 참석할 합당한 사람이다. 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복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예복을 입고 잔치 자리에 나아 가고 있습니까? 그 자리에 초청받은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파티장에 들어가면서 준비해 놓은 예복으로 갈아 입는 것은 주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갈아 입을 아름다운 예복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믿음으로 갈아 입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까지 입고 있던 구습을 쫓는 옷을 벗어버리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가는 옷을 벗어 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롭게 지으신 옷을 입으십시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엇으나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한 자로 여겨져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큰 흉년이 다가오는 위기의 애굽의 총리의 직분을 맡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았습니다. 합당한 자에게 하나님은 천국의 잔치에 참여할 특권을 주십니다. 천국 잔치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는 것은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고 그리스도께서 준비해 놓으신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천국 잔치의 귀빈으로 합당하게 여김받기 바랍니다.
왕 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마 22:1-14 / 김창인 목사
오늘은 마태복음 22장 1절에서 14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왕 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왕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왕이라면 나쁠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인 하나님은 만 왕의 왕이십니다. 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왕이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미 초청한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내어 오라고 했더니 일제히 사양하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그리고는 네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데려와서 잔치자리를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데리고 왔더니 잔치자리가 만석이 되었습니다. 왕이 손님을 보러 들어왔을 때 어느 한 사람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있어서 내쫓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 먼저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일제히 복음을 거절하고 사양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유대인의 동네 예루살렘을 멸망시켜 불사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네거리에 나가 즉 세계로 나아가 이방인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더니 광성교회가 꽉 찼다는 것입니다. 유대나라에는 잔치자리에 가게 되면 자신이 입고 온 옷은 벗어놓고 주인이 주는 예복을 입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끝까지 예복을 입기 싫다고 하여 자신의 옷을 입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왕이 보고 쫓아낸 것입니다. 잔치자리, 즉 하늘나라는 나의 옷, 나의 공로, 나의 의라는 옷을 입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주시는 의, 즉 예수님의 의를 입고 갈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왕 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해주시는 일이 무엇인지 본문에 의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끼워주시는 왕 (1-3)
어디에 끼워주십니까? 축에 끼워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친구들의 축에 끼지 못한 사람을 “왕따”라고 하지 않습니까? 왕따 당하는 학생이 너무 속상해서 학교에 가기 싫어하고 더 심하면 자살을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축에 못 끼면 이렇게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왕이 못 땅한지라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어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왕을 예선하라고 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왕으로 등극을 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아들들을 다 불러오라고 했더니 일곱명이 왔는데 기백이 있고 기골이 장대합니다. 첫째를 왕으로 세우실 거라 생각하고 기름을 부으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까지 모두 시도했는데 모두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볼 때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새의 아들 중에서 왕을 예선하신다고 하셨는데 왜 모두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이새에게 아들이 더 없느냐고 묻자 막내가 들에서 양떼를 치고 있는데 부르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즉 축에 끼워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예선이 됩니다. 축에 끼워주시지 않았던 것을 알았던 다윗이 먼 훗날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시 27:10). 앞으로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언제 다윗을 길에 버린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축에 안 끼워 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속이 상해서 오랜 후에도 잊지 않고 부모는 날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나를 축에 안 끼워 주었으나 하나님은 나를 기어이 찾아내서 축에 끼워주었다는 것입니다. 축에 끼워준다는 것이 이만큼 복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첫 번째 장면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한번은 왕이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제한된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냅니다. 잔칫날이 되자 종들을 보내어서 이미 초청한 사람들을 모셔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초청 받는 사람은 세상 백성들 전부가 아니었고 그 중에서 적은 수만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축에 끼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복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초청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거절을 하였습니다. 거절한 이유를 누가복음 14장의 말씀과 종합해 보면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사람은 장사가 너무 잘 되어서 눈코뜰 사이가 없을 정도로 바빠서 죽고 싶어도 죽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가하게 왕의 잔치 자리에 가서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왕이 나라를 잘 다스려서 백성들이 살기 좋게 경제가 부흥되어 장사가 너무 잘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감사함으로 왕의 잔치에 참여해야하지 않습니까? 감사해야 할 조건을 오히려 거절하는 조건으로 삼은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예전에 밥 세끼도 제대로 못 먹을 때 하나님께서 물질의 축복을 해주시면 목숨 바쳐 헌신하고 충성하겠다고 하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가용이 생기고 월급이 오르자 더 열심히 충성할 조건이 아닙니까? 어떻게 답답하게 주일날 교회에만 나아가 앉아 있겠느냐고 하며 주일날 설악산에 갑니다. 이런 사람이나 오늘 본문의 장사가 잘되어서 왕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뭐가 다릅니까? 주일에 하나님의 잔치, 즉 예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장사 잘된다고 거절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성경은 옛날 얘기로 들으면 안됩니다. 성경을 무엇 하러 가지고 다니며 도대체 무엇을 믿자는 겁니까?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농사꾼이었는데 본래 밭을 살수 없어서 가난하여 소작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또 소를 못사니까 사람이 어깨에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다가 왕이 나라를 잘 다스려 부자가 되었습니다. 농토를 사고 소도 샀습니다. 그런데 새로 사놓은 농토도 가봐야 하고 소를 실험도 해봐야 하니까 못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왕의 잔치에 참석 못할 조건입니까? 더 열심히 참여해야할 조건입니다. 우리가 큰집에서 살고 사업도 제법 잘 하면서 자가용을 가지고 사는데 주일날 예배에 초청하는 하나님의 잔치에 그것이 못 갈 조건이 됩니까? 그런데 이들은 못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잘살도록 해줄수록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됩니까? 정신차려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장가를 갔으니 아내를 기쁘게 해줘야 하기 때문에 못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내와 함께 금강산에 놀러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놀러갈 날이 없어서 주일날 갑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이 포기하고 그 동네에 불을 놓았습니다. 그 동네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나에게 웃기는 소리냐고 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왕은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그 왕이 국민 전체를 초청했는데 날 끼워줬다면 감사할 것도 없지만 소수를 청하는데 날 끼워줬다면 이것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초청하는 자리에는 빠짐없이 참여하십시오. 소수의 무리 축에 끼워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5천만명 전부를 자기의 아들 딸로 삼아 주셨습니까? 지금 기독교인이 천이백만명이라고 하지만 사실 천만명밖에 안됩니다. 소수를 선택하셔서 아들 딸로 삼아 주셨는데 나를 그 축에 끼워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의 아버지, 왕 되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좋은 자리에, 축복의 자리에, 귀한 자리에 끼워주심을 항상 감사함으로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준비하시는 왕 (4-8)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서 에덴동산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을 위해서 아담을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생각에는 아담을 첫날에 창조하신 후에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공중에 새가 날으라 하시니 각종 새들이 나는 것을 봤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바다에 물고기들이 뛰어라 하시니 물고기들이 바다에서 뛰는 것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후에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시는 것을 하나도 못 보게 하고 가장 마지막에 지으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그리 하셨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리 하셨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되니까 그리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날에 아담을 만드셨다면 아담이 어디에 발붙이고 살 수 있었겠습니까? 공중에 매달려서 살겠습니까? 바다에 떠서 살겠습니까?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먹고 살 것이 없습니다. 에덴동산에 없는 것 없이 좋은 것으로 갖춘 다음에 아담을 만들어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아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모리아산에 하나님께서 양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제물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삭을 대신해서 제물이 될 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삭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양이 이삭을 대신해서 죽습니다. 이삭을 위하여 양을 준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2천년 전에 보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뿐입니까? 우리들에게는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정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가정 없이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합니까? 또 태어나기 전에 교회를 먼저 준비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하나도 없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디서 듣고 배우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께서 말도 못하는 나를 업고 교회에 나오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챙겨주사 교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영원히 살 하늘나라를 이미 오래 전에 준비해두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위해서 전부 챙겨주시고 미리 준비하시고 때가되면 베푸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준비하시는 왕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두 번째 장면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초청 받은 백성을 불러오라고 할 때 왕이 뭐라고 말합니까? “아들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온갖 것을 갖추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온갖 것을 준비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준비하였으나”라고 합니다. 왕이 준비했다면 어느 정도입니까? 최고로 준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시한 것을 주지 않으십니다. 항상 최고로 주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남편을 주시는데 여러분들의 남편이 제일 못났습니까? 아닙니다. 남자들 중의 최고의 남자를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내는 여자들 중의 최고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북한에서 피난을 못나왔다면 제 아내는 아직 결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남쪽에 여자와 모든 것을 준비하고 이곳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주면서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아내를 돈주고 산 것입니까? 공로를 세우고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최고의 아내를 주신 것입니다. 남편도 남자 중에 최고의 남자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고를 준비해 주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발간된 광성지에서 “눈이 하나밖에 없는 엄마”라는 글 보셨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 준비하면서 또 울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살았습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에는 몰랐는데 자라면서 보니까 어머니의 눈이 하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의 어머니는 두 눈을 가지고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예쁜데 반하여 내 어머니는 왜 쪽팔리게 눈이 없냐고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어머니는 번듯한 점포에서 장사하고 있는데 내 어머니는 시장 길거리에서 나물이나 파는 것이 너무 쪽팔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번은 운동회 때 엄마가 아들이 보고 싶어서 찾아갔더니 아들이 왜 왔느냐고 하면서 도망을 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이 네 엄마는 애꾸눈이라고 놀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고학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여자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엄마에게는 찾아갈 필요도 없었고 엄마 꼴을 안보니 좋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어느 날 저녁때 엄마가 찾아왔습니다. 아기가 울고 있으니까 누가 우리 예쁜 아기를 울리냐고 큰소리하면서 들어왔습니다. 들어갔더니 그 집 아기 엄마, 즉 그 아들의 아내는 이 여자가 도대체 누구냐고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남편이 내 엄마는 죽었다고 했기에 아내는 어머니가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도무지 모르는 여자라고 하며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머니가 눈치가 없습니까? 집을 잘못 찾아 왔나봅니다 라고 얘기한 후에 돌아서서 나가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는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서 아들이 다닌 고등학교의 동창회가 열려서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엄마가 어떻게 사나 한번 들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가보았더니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편지쪽지를 하나 주었는데 이 부분은 광성지에서 빠졌습니다. 편지 내용은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아기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아서 밖에 나가보았더니 네가 버림을 받았더구나. 그래서 내가 너를 그 날로 아들을 삼아서 네가 생일로 지키는 그 날이 네가 버림받은 날이요, 네가 내 아들이 된 날이란다. 네가 조금 더 큰 후에 그만 자동차 사고가 나서 눈이 하나 멀어버린 것을 내 눈을 너에게 이식했단다. 다시는 내가 서울에 찾아가지 않으마. 이번에도 고등학교 동창회라고 해서 너희 학교에 가보고 싶었지만 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가겠다. 그러나 내가 죽거든 절대 울지는 말거라”고 써있었습니다. 아들이 이 사실을 그 전에 몰랐었습니다. 어머니의 눈이 저렇게 된 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엄마라 부르지도 않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안했던 이 아들이 얼마나 어머니를 부르며 사랑한다고 했는지 모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나를 낳아준 친부모님은 나를 비록 버렸을지라도 길가에 버림받고 살았을지 죽었을지도 모를 나를 위해 하나님은 친부모님보다 열배나 더 귀하고 훌륭한 어머니를 미리 예비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최고로 준비해 주신 하나님아버지입니다.
내가 불행하다 싶어도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지나고 보면 하나님은 항상 최고로 준비하시고 때가 되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기회주시는 왕 (9-14)
부자에게 하루에 몇 시간이 주어집니까? 24시간입니다. 가난하디 가난한 사람에게는 하루에 몇 시간입니까? 역시 24시간입니다. 시간 없는 기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루에 25시간을 살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서 돈주고 살 수 있습니까? 어디서도 살 수 없습니다. 또 내가 돈이 아쉬워서 내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습니까? 절대 팔 수 없습니다. 돈 가지고 사지도 팔지도 못하는 귀한 시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짜로 주셨습니다. 시간없는 기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세도가 있거나 없거나 똑같이 골고루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아버지이십니다.
본문의 세 번째 장면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의 꼴을 더이상 보기 싫어서 그 동네에 불을 놓았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 터도장군에 의해서 폐허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주의 종들을, 즉 선교사들을 전 세계로 파송하셔서 이방인들을 초청한 결과 이방인들이 차고 남쳐서 교회마다 만원사례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유대인에게만 주었던 기회를 이방인 누구에게나 골고루 똑같이 시간과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24시간, 부자에게도 24시간, 대통령에게도 24시간, 일반 백성들에게도 24시간으로 똑같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회도 똑같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신 기회를 잘 활용하면 다섯달란트 맡은 종처럼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회를 우리들에게도 약속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미국 콜로라도주에 바바라 하그로프라고 하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이 아가씨는 농사꾼의 딸로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졸업하자마자 농사꾼에게 시집을 가서 자녀 넷을 낳았는데 얼마 후에 남편이 죽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열심히 키웁니다. 미국은 대학교에 가면 스스로 공부합니다.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이 여자의 나이가 38세였습니다. 내 인생을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대학교에 들어갑니다. 42세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과 견주는 예일대학 신학부 신대원에 들어가서 3년 후에 졸업했습니다. 대학교 4년, 신대원 3년, 그리고 석사 2년, 박사 5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즉 14년 만에 농촌에서 자녀 넷을 키우며 농사밖에 모르던 여인이 예일대학 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여성신학의 대부가 됩니다. 그리고는 예일대학 신학부에서 12년 동안 교수로 봉직하다가 64세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비석에 무엇이라고 써있는지 아십니까? “겉은 연약했으나 속사람은 강건하였다”고 써있었습니다. 누가 그 여자가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겠습니까? 주신 기회를 썩히지 말고 최선을 다하시면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24시간, 일년에 365일이 똑같이 주어진 시간, 그리고 기회를 가지고 도전하고 삶을 개척해 나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똑같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때가 위기라고 하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짓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첫째로 우리를 축에 끼워주시는 왕이십니다. 다윗은 왕을 예선할 때 아버지가 자기를 끼워주지 않았으나 하나님이 기어이 불러 끼워주심을 항상 감사했습니다. 소수를 불러 자기의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축에 끼워 주셨습니다. 둘째는 준비해주시는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최고를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때가되면 베풀어주시는 왕이십니다. 왕이 잔치를 최고로 준비하고 불러주시듯 말입니다. 셋째로 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왕이십니다. 잔치를 준비한 왕은 네거리에서 누구나 초대하듯 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왕처럼 말입니다. 그 기회를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입니다.
추수감사 천국잔치
마 22:1-14 / 조재호 목사
그제 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할머니, 젊은 부부, 자녀 초등학생 2명이 주차된 자기네 차 앞에 모여 있었습니다. 할머니 모시고 어디 다녀오는가 보다했는데 지나가다 보니 새 차 앞에 작은 상이 놓여 있었고 상위에 촛불이 켜져 있었으며 초 앞에 물, 과일 또 다른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 젊은 부부가 일어나고 아이들이 그 앞에 넙죽 엎드려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를 새로 사고는 안전 운행을 위해서 무엇인가에게 잘 봐달라고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기도를 나오면서 절 받은 차를 다 보고 ‘너는 참 팔자도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잘 가시지 않은 불안이 있습니다. 좋은 차를 구입하고 보험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불안해서 그는 가족 모두를 동원해서 차 앞에서 북어 대가리 놓고 무작정 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는 세상의 불안대신 하늘의 평안이, 삶의 두려움대신 믿음의 용기가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한 젊은이가 22살 때 아주 무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에게 늘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친구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숲 속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벼락이 그들에게 떨어져 혼비백산했는데 나중에 정신차리고 보니 친구가 숯처럼 타서 죽어 있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자 그는 하늘을 향하여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이 지났지만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는 여전했습니다. 그는 바로 마틴 루터였습니다. 결국 신학을 공부하고 신부가 되었어도 하루 일곱 번 기도와 규칙적인 금식, 참회와 금욕생활, 철저한 종교생활을 했지만 그렇게 애써도 그에게서 하나님은 멀리 계셨고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시편에서 인간의 연약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되었으며 어느 날 로마서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자 더 이상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고 세상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나서 성경대로 믿지 않고 인간의 의를 내세웠던 거대한 천주교 세력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개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은 돈으로 면죄부를 사고 파는 것을 비판하며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성 교회 정문에 95개 비판 조항을 내다 걸었고 그 때부터 중세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 가다보면 잘못된 길로 가기 일수입니다. 영등포에서 고척동으로 운전해 오는데 아무 생각 없이 운전을 하다가 오류동을 지나 부천까지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하고 표지판을 보니 부천역이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부천역이 개봉역 옆으로 이사왔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적지인 고척동으로 되돌아 갈려면 핸들을 돌려 방향을 180도 바꾸어야 합니다.
개혁은 자동차의 운전핸들을 돌리는 것입니다. 개혁이 없이는 바른 길을 잡아 나갈 수 없습니다. 개혁은 개인적으로 거 교회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일부 왕들을 통해서 신앙을 개혁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 학개, 스가랴, 말라기, 다윗, 히스기야, 요시아는 개혁자들이었고 예수님도 개혁자이셨으며 예수님의 제자들로 개혁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세시대의 루터, 칼빈 ,쯔빙글리도 개혁자였습니다.
개혁은 과거에만 있는 일은 아니고 지금도 관례적으로 벗어난 길, 믿음에서 벗어난 길,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 길을 돌이키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혁에는 반대가 존재합니다. 핍박과 고난이 따릅니다. 무엇을 고치려고 하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개혁은 어느 한 시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고치고 개혁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것이고 신앙을 신앙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바르게 잘 하려면 우리는 3가지를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뒤를 잘 돌아다보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잘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결국은 바르게 고쳐 가는 것이 사는 길임을 성경과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만 좋은 교회가 아니라 내일도 좋은 교회, 날로 더 좋아지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다음 주일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성경에서도 추수감사절을 말씀하고 있는데 구약에서는 수장절, 장막절이라고 부릅니다.
한 해의 농사와 삶을 마감하면서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시고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잔치와 같은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국적으로 잔치를 벌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잔치에 관한 말씀이 특별히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애 가운데 처음으로 기적을 베푸신 것은 혼인 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잔치의 흥이 깨지기 쉬울 때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가 잔치답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잔치의 초대손님으로 오셨지만 실상은 주인공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계시는 잔치는 생명잔치입니다.
오늘 말씀도 천국을 비유하시되 어느 나라의 왕자 혼인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왕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장가들게 되었어 초청장을 보내어 잔치로 초대했습니다. 소와 돼지를 잡고, 국수, 과일, 생선전, 도토리묵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잔치 날, 그 날에 오기로 했던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회피하자 임금이 몹시 화가 나서 아무나 데려 오라고 하셨습니다.
성석제라는 42세의 젊은 소설가가 있습니다.「호랑이를 봤다」,「재미나는 인생」 등을 읽어보았습니다. 해학과 기지 풍자가 아주 뛰어난 작품들입니다.「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단편소설로 올해 동인문학상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소설 속 주인공 황만근은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지만 그가 없으면 동네 일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변소 치는 일, 구덩이 파는 일, 벽돌 만드는 일, 담쌓는 일 등을 하였습니다. 황만근은 어떻게 알았는지 이웃 동네 잔치만 있다고 하면 기가 막히게 알고 달려와 제일 늦게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잔칫날 황만근은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고 영양 보충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도 다음 주 11월 3일에 추수감사주일 천국잔치를 베풀려고 합니다.
잔치에는 꼭 있어야 하는 3가지가 있습니다. 음식과 가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등록된 고척 가족 모두를 인도합시다. 가족들의 신앙을 살펴보고 남편, 자녀들 믿음생활을 도와주십시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예배와 잔치로 강권하여 초대하십시오.
교회학교 부서 반 학생들의 신앙상태를 살펴보고 믿음생활을 도와주고 최고의 선물을 주십시오.
교구, 지역, 구역의 믿음의 식구들의 신앙상태를 살펴보고 그들을 도우며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외부 강사 목사님의 설교 중 교회에 오는 성도들 중에는 2가지 물건 중 하나를 가져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저울을 가지고 온다고 했습니다. 저울 교인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왜 이 사람은 이렇게 무거워?” “왜 이 사람은 이렇게 가벼워”하며 자기 저울로 잽니다. 이런 사람과 만나면 자꾸 저울질 당하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둘째는 부삽을 가지고 오는 교인이 있습니다. 교회에 올 때 마음 속에 삽을 가지고 와서 설교를 들으면서 “이 말씀은 누군가 꼭 들었어야 하는데!”하고 은혜 받고 자기에게 향하신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가지고 온 삽으로 자꾸 퍼서 다른 사람에게 뿌립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저는 소쿠리 교인을 생각했습니다. 소쿠리 교인은 교회 올 때 소쿠리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소쿠리는 담는 것으로 소쿠리는 주머니하고 다르고 그릇하고 다릅니다. 주머니는 들어가면 안보이지만 소쿠리는 담아 놓아도 보입니다. 부침개, 나물 볶음, 떡, 과일 잔치 집에는 소쿠리가 많습니다. 소쿠리에 대접할 음식 만들어 놓는 것이다. 오가며 집어먹습니다. 교회에 올 때 저울이 아니라, 부삽이 아니라 소쿠리를 가져오면 좋은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소쿠리를 가져오면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 말씀과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담아 갈 수 있습니다. 소쿠리는 큰 것일수록 좋습니다. 교회 올 때 큰 소쿠리를 가져오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와 사랑과 복을 담을 소쿠리를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큰 것을 가져오십시오. 낡아서 뚫어진 것이 아니라 튼튼한 것을 가져오십시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지난 한해 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무슨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어떤 주님의 은혜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신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며 최고와 최상의 감사헌금을 준비해 가지고 나와 천국잔치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만나는 대로
마 22:1-14 / 박지온 목사
제목을 "만나는 대로" 그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지난주간에 어린이 주일이고, 오늘 또 어버이 주일! 저희 어릴 때는 '어머니 주일'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마 아버지들이 섭섭하다 그랬는지 어머니, 아버지 합쳐서 어버이라 그렇게 삼았습니다. 이런 주일이 있다는 것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우리 류 목사님 메시지 속에서 고아원이 있다는 것이 뭐가 있다는 겁니까? 고아가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어버이 주일이 생겼다는 것이 이 어버이에 대한 어떤 바른 개념이 안 되어있다! 그런 이야기이고, 어린이 주일이 있다는 것이 어린이들에 대한, 후대들에 대한 바른 개념이 안되어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워낙 어린이들을, 유교사상에서 어린이를 마치 자기 소유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늘 어른 중심이고, 어린이를 무시하는 이런 일이 있으니까! 어린이 날! '하루라도 어린이들에게 잘 하자!' 그런 이야기인데, 우리는 '하루라도 어린이들에게 잘하자!' 그런 배경이 아니거든요. 어린이다! 그럴 때에, 정말로 우리와 우리 후대들이 이 땅에 소망과 희망이 후대를 살리는 일이다. 여기에 진정한 어린이 주일에 대한 사명이 있죠.
그리고 '5월 달은 가정의 달이다!' 그랬는데, 사실은 언제나 가정을 중심으로 해서 가정의 행복과 축복을 중심해서 사는 것이다! 5월 달만 하자는 것이 아니거든요. 워낙 자꾸 요즘 가정이 소홀해지고, 가정이 파괴되어지고, 가정이 어려워지니까 가정의 달을 만들어서 가지고 '가정의 달!'이라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안 되는 배경이 몸부림입니다. '여러분,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별로 대답이 없어요. 70%가 억지로 산다나요... 여러분과 저는 정말 100%로 감사함으로 살아야 되죠. 한번 받아합시다. "내 아내가 제일이다! 내 남편이 제일이다!" 어디에서? 주안에서입니다. 가정의 달!
오늘 계속해서 말씀을 강해하는 도중에 이 가정에 달에, 또 어버이 주일에 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혼인 잔치에 비유입니다. 혼인잔치에 비유인데, 혼인 잔치를 열어 놓으신 분은 임금입니다. 거지가 혼인 잔치를 열어놓은 게 아니고, 어떤 지나가는 과객이 열어놓은 것이 아니고, 그 나라와 그 땅을 완전 지배하고 있는 임금이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를 예비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를 열어놓고, 혼인에 청한 손님들은 핑계를 대고, '나는 밭에 나가야 되겠다! 나는 상업 차 가야 되겠다!' 하나도 안 오고, 오히려 보낸 일꾼들을 그 핑계 대고 나간 사람말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보낸 그런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노를 발해가지고 그 고을과 그들을 진멸시키고, 그리고서는 다시 종들을 보내어서 아무데나 나가서 선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닥치는 대로, 만나는 데로라는 말이, 닥치는 대로 아닙니까! '닥치는 대로 내 혼인 잔치에 참여하도록 권고해서 참여시켜라!' 그래서 가득 참여가 되었는데, 임금이 가보니까 가득 찬 면에서 너무 흡족한데, 또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요. 뭐냐하면, 혼인에 들어오면 예복을 입어야 되는데,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또 묶어 가지고 밖에다가 내어 던졌다! 그것이 오늘 배경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뭘 말하느냐 하면, 혼인을 연 임금 중에 임금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그 다음에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 그 다음에 그 혼인 잔치에 초대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유하면서 그 다음에 그 혼인 잔치에 초대한 그들을 죽이고, 멸망시킨 것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렇게 비유를 또 들고 있습니다. 거듭해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주었으나 복음을 막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오는 저주와 재앙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여기서 더 말해주는 것은, '복음을 방해할 때 오는 엄청난 저주와 재앙들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과 제게 뭘 말씀하느냐 하면, 혼인하는 당사자가 예수 그리스도! 말하자면 신랑을 예수 그리스도로, 신부를 여러분과 저로, 성도들로 그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여기에 참여한 자들, 다 말씀을 해서 복음으로 그렇게 묶어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저는 복음의 초청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복음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고, 복음의 축복을 받았으나 받은 자리에서 복음은 누리지 못할 때에 반사적으로 지난 주일에도 조금 강조했습니다 만은, 이런 저주가 돌아온다. 그런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하면 더 큰 저주 속에 빠집니다.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교회 나와 있습니다 만은, 교회 나와있는 자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약속을 말씀대로 받지 못하면, 그 축복을 받지 못하면, 반대로 뭐가 온다 그랬습니까? 저주가 따라온다! 그런 배경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듣고, 말씀 듣는 중에 말씀 속에서 주신 하나님의 축복과 메시지를 잡지 못하면, 반사적인 작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그런 문제들을 오늘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말씀하고 싶은 것은, '혼인에 초청한 분이 누구냐?' 이겁니다. 혼인에 초청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초청에 여러분과 저는 초청 받은 자들이요, 또 그 초청 속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복음 속에 들어온 자들이죠.
그러면 이 관계를 조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혼인 잔치 때에는 풍성합니다. 거지가 잔치를 열어도 그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굶주리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풍부하고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잔치라는 속성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여기에 초청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임금입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니까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혼인 자리를 배설하고, 잔치를 열고 초청을 했습니다. 그 초청에 들어가지 못해서 문제이지, 들어간 자들의 충만함을,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에 여러분과 제가 초청이 될 뿐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하실 것은, 먼저 참여했다가 그 초청을 받은 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다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참여하지 못했는데, 여러분과 저는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참여한 주제들이 파악이 되어야 돼요. 뭐냐하면 초청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 정식 초청을 받은 자들이 아니고, 워낙 초청을 받은 자들이 혼인자리를 거절하니까, 그 초청하신 주인이 뭐라 그랬습니까? '종들을 보내 가지고 닥치는 대로 불러오너라!' 그래가지고 온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악한 사람들이나, 선한 사람들이나, 그저 닥치는 대로 불러오너라!' 그 이야기입니다. 받아합시다. "만나는 대로 불러오너라!" 자격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왜? 이 축복과 은혜가 너무 엄청난 자리인데도 닥치는 데로 불러왔어요. 그것도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마구잡이로 불러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마구잡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여기 있어요. '교회 오면 착한 사람이 되고, 교회 오면 선한 사람들이 온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교회는 마구잡이가 왔습니다. 여기에는 착하다 선하다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보면서, 이런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참 맞다. 어쩌면 이렇게, 이것을 몰랐을 때에 교회 와서 시험 들게 되거든요. 그래서 뭐 흔히 보면 교회 다니다가 안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뭐, '누구 때문에, 뭐 때문에...' 당연합니다. 왜? 마구잡이로 불러왔는데, 그게 부닥쳐 가지고 그런 어떤 교회를, 사람을 보고, 인간을 보고, 어떤 인간적인 모임을 봤을 때는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왜? 절대로 실망을 줄 수밖에 없는 자들이 모일수도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시험 들고, 교회 안에서 삐치고, 교회 안에서 이상하게 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어요. 다만 바로 알아야 될 것이, 여러분이 이 초청을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온 자리가 어떤 자리냐? 임금이 초청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제대로만 눈뜨고 우리가 누리게 되면 풍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 혼인 잔치에 와서 배고프게 됩니까? 혼인 잔치에 와서 불만합니까? 아니죠. 혹시 와서 배고픈 자라도 지나가는 종들에게 그저 손만 들면 가져옵니다. '여기에 떡 한 접시, 여기에 돼지고기 한 접시...' 그러면 자꾸 가져옵니다.
그런데 보니까 달라고 그러는 사람들을 대게 보면 잔치 상에 수북히 놔두고, 자꾸 달라고 하더라 구요. 그래도 갔다가줍니다. 잔치 상에 풍성입니다. 더군다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잔치입니다. 당신의 독생자이신 아들 한 분뿐인 아들의 잔치입니다. 풍성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믿음이 없어 잔치를 누리지 못해서,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렇지 입만 열면 갔다가줍니다. '보아라, 두드리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런데 이게 믿어지지 않아, 못 믿어, 이 축복된 자리에 왔으나 이 사실이 눈이 열리지 않으니까, 입다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입 다물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누리지 못하니까 뭐가 나옵니까? 이 풍성함 속에서 불평하고, 불만하고, 배고프고, 굶주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속에서 교회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못 누리는 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어요. 마치 늘 우리는 그런 말을 하죠. '창고 속에서 굶주려 죽은 쥐새끼'와 똑같습니다. 제가 이 쥐새끼라는 말을 좀 써서 미안합니다 만은, 교회 와서 이 축복과 풍성을 못 누리면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느냐? 그건 말로 할 수 없죠. '모르고, 안 보고, 못 보니까!' 이건 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조금만 사실을 보고, 조금만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면 너무 축복과 풍성을... 그래서 우리는 이 약속을 알고 있는 우리 선진들의 고백을 보게 되거든요. '너희가 입을 넓게 열라! 세우리라!' 약속하신 겁니다. 그분이 거지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 있으면서 말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풍성과 충만을 구체적으로 느끼며 말했던 부분임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에 오셨다! 마구잡이로, 닥치는 데로 왔거든요. 와보니 엄청난 자리다! 바로 이것이 먼저 우리가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그런 기도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니, 하나님의 자녀로 통해서 오신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잔치 속에 초청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속에 들어갔다! 그 이야기는 잔치 속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왜? 그 분속에서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문제 해결 받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이 로마서 11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한번 받아합시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오, 깊도다!' 원래 원문은 '오, 깊도다!' 여기에 감탄사가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부유함이여...' 이렇게 나와야 되거든요. 한번 받아합시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부유함이여!" 이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오, 깊도다!' 이게 정말 이 축복과 은혜를 조금만 누려도 바울에게는 너무 너무 위대한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가히 측량할 것이냐!' 바울이 축복된 역사를 보고서 고백한 것이 있잖아요.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것이로다!' 그랬습니다.
늘 그런 고백을 더러 하고 있습니다 만은, 가끔가다가 기도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그 영광이 조금만 내게 성령으로 체험되게 될 때에, 마치 뭐 공중에 뜬다는 생각으로도 안 되는 것이죠. 표현이 되지 못할 정도로, 그 기쁨이 밀려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비로소 변화가 따라 옵니다. 여러분의 변화는 초청 받은 자의 부유함 속에서 배경이 되어야 변화가 옵니다. 이것이 배경이 안되면 진짜 변화가, 기독교인의 변화가 나올 수 없어요.
예를 들어서 아침에 돈 한푼 없이 나오는 사람의 표정과 걸음걸이는 다릅니다. 여러분 그 남편들이 아내에게 용돈 좀 달라고 그래가지고 용돈을 받아 나오는 표정과 그 걸음걸이하고, 용돈 달라고 그랬다가 거절당한 표정과 걸음걸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 내가 1원을 가지고 있는 자의 걸음걸이와, 1억을 가지고 있는 자의 걸음걸이는 다릅니다. 표정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폼도 다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 하면요, 진짜 변화는 하나님의 부요가 내게 체험되고, 하나님의 부요가 내게 있어야 여러분 얼굴이 바꾸어집니다. 걸음걸이가 바꾸어집니다. 생각이 바꾸어집니다.
제가 가끔 건강이 좋지 못하니까, 이 감정에 기복이 좀 있더라구요. 제가 이 감정이 뭔가 건강이 약간 좀 좋아지고, 회복이 되고, 뭔가 이 좀 기분이 좋아졌을 때는 집에서 뭐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 다 수용이 됩니다. 그 다음에 뭐 심지어 돈을 좀 달라고 그러면, '그것가지고 되겠냐?' 그러는데, 내가 좀 기분이 나쁘고, 뭐 이럴 때는 돈 달라고 하는 것도 짜증스럽고, 옆에서 일하는 것도 짜증스러워요. 그래서 내 표정도 얼굴도 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가 그리스도로 영접이 되고, 하나님의 풍요한 이 축복의 자리에 초청이 되었다! 그 다음에 내가 지금 현재 하나님의 부요를 먹고 마시고 누리고 있는 중이다! 여러분 얼굴이 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와서, 하나님의 기쁨이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격이 여기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궁색한 얼굴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부족한 얼굴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수용하고 용서하는 얼굴로 풍성함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판단과,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실제적인 배려가 나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도 여러분과 저를 풍성한 자리에 불러서,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을 받아 왔습니다 만은, 이 사실을 실제로 누려야 합니다. 실제로 누려야 됩니다. 여기에 사실적인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말로만 아니라, 얼마나 부요 하고 충만한 것을 깨닫고 알 때마다 내 행동과 내 모습과 내 표정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우거지상을 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예수 믿고 부부간에 맨 날 이상하게 싸운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복음에 본질이 안되어 있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믿었는데, 가정에 부모자식간에 이상한 문제가 왔다! 가정이 이상하다! 그것은 근본 본질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달이다! 그 다음에 어버이 날이다! 뭐 어린이 날이다! 할 것 없어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 받은 자가 됐습니다. 어떤 면에서 초청 받은 자가 아니라, 자격이 없는데도 막무가내로 불러 들여서 이 축복과 역사 속에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족할 때마다, 아니 연약할 때마다 손만 대면되는 겁니다. '여기도 한잔, 저기도 한잔!' 이 한잔은 술 한잔이 아니고, 감주한잔! 이 기쁨과 즐거움이 대화 속에서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고, 여기에 무슨 불평이 있고, 불만이 나올 수 있으며, 여기에 무슨 허물이 나오고, 무슨 것이 나옵니까! 이것이 안되었을 때에 나오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가 성경대로 못 누리면, 반대로 성경대로 뭐가 나옵니까? 저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에 우리 눈이 열려야 됩니다. 정말 우리가 이 사실을 오늘 좀 붙잡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속에서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시편 2편 1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여러분 정말 예수 믿는 기쁨이 있습니까? 정말 예수 믿는 감격이 있습니까? '어쩌다가 내가 이런 자리에 있느냐?' 이것이 와져야 합니다. 이것을 말로만 아니라 사실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보면, 여기에 거절하는 이유가 무슨 이유냐 하면, 22장 4절에,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여기에 뭐라 그랬느냐 하면, 주인이 임금이 살찐 소를 잡고,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이것은 뭐 일부가 아니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그랬는데, 이 축복과 이 은혜의 가치를 전혀 몰라요.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랬습니다. 이건 뭐 전혀 이해 못했습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여러분 교회 나와 있습니다 만은, 이 축복된 은혜를 돌아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말씀들을 때에, '말씀! 참, 정말 감사하구나!' 이것이 돌아보지도, 깨달아 지지도 않아요. 이 느낌조차도 없어요. 그러니 항상 뭐가 앞섭니까? 내 육신의 일이 앞섭니다. 육신의 생각이 앞섭니다. 그래서 자기 육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사는, '밭으로, 상업 차로 갔더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닥칠 때마다, 문제를 당할 때마다 깨닫는 것이 있어요. '창세기 3장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정이라 그럴 때에, 누가 가정에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가정에 자녀들이 실패되기를 원합니까! 누가 부부간에 실패되기를 원합니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지금 어려운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가정에, 가문에 저주와 재앙들이,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 찾아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고, 그리고 열심히 뭔가 복을 받고 싶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부분을 몰랐어요.
진짜 오늘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실패하고 저주와 재앙 속에 빠지게 하는 뭐가 있습니까? 창세기 3장에 사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가 바로 봐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이, 우리 가정이 정말 평화롭고 아름답고 뭐 가정의 달을 만들 필요 없이 영원토록, 아니 이 땅에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이 축복과 은혜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씀합니다. 가족과 가정이 하나님의 손에 있으면,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잔치 속으로 들어가면 다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디로 가느냐? '사단의 손에 빠졌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지만, 그래서 자꾸 저주를 받게 되고, 재난을 받게되고,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죄를 짖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살인하고 자기가 감옥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자녀들이 잘못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이, '그렇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누가 병들기 원하고 누가 가난하기를 원합니까! 그렇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단이라 그랬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단 혹은 마귀라 안 그럽니까!
중요한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도 원치 않는데도, 우리 자신들이 빠져있는 본래의 모습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나면서부터 이 저주와 재앙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바로 여기에서, 여러분 길거리에서 사악하게 돌아다니는 우리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 가지고 혼인자리에 출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기에서 전혀 깨어나지를 못해서, 이게 이해가 안되고, 이 초청의 가치를 몰라서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역시 여전히 저주와 죽음으로 달음박질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나를 인도하는 흑암에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그렇게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이해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바로 기억하실 것은, 우리를 죄악으로, 우리를 죽음으로, 우리를 멸망으로, 가정과 가족을 끌고 가는 배경이 사단이라면, 여러분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열심히 애를 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돈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지식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땅이 과학 문명이 발달되었습니다. 과학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자동차 탄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저주와 재앙의 세력을 완전히 꺾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분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초청하고, 내가 그분의 역사 속에 들어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혼인자리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왕권 속에 들어가는 그 속에, 비로소 우리에게 참된 부요와 축복이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이해가 될 때에, 여러분들에게 구체적으로 이 축복과 역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실적으로 될 때에, 생각과 마음이 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뭡니까? 여러분들이 너무 참여해 보니까! 흡족하니까! 너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에 충만하게 되니까! 나도 모르게 내게 이루어진 사실을, 너무 풍성한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입니다. 이때부터 뭐입니까? 만나는 대로 뭐가 이루어지느냐? 전도가 이루어지고, 만나는 대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뭐가 이루어져야 되느냐? 나도 모르게 문제가 닥칠 때마다 내 밭으로 내 상업으로 아니고 문제가 닥칠 때마다 어디로? 하나님의 잔치 속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여기에 모든 해결이 이루어지죠. 바울은 그랬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뭘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생각이 그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지금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우리는 무엇이 생각되는 데로 뭔가 일이 터지면 뭡니까? 상업 차로, 육신의 것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는 참 축복의 배경인, 나를 아시고, 내게 축복하신, 내 모든 장례를 아시는 그 하나님의 초청의 자리로 가는 게 아닙니다. 돌아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느냐? '자기 상업 차로, 자기 욕심으로, 육신의 돌아갔더라!' 그랬습니다. 교회 나와서 집에 돌아갔습니다. 흔히 그렇잖아요. 처음 예수 믿고 교회 와서 집에 돌아가면 도적이 들어왔거든요. 그러면 당장 돌아가는 것이, '교회 갔더니만 이렇게 되었네!' 이런 식으로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초청 장소로 들어가게 될 때에, 거기에 풍성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게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마음이 들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랬거든요. 그렇게 하면 뭐라 그랬습니까? '모든 것을 풍성의 자리로 인도 해주신다!'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이 축복된 역사를 흔히 우리가 '기도하라!' 뭐 이렇게 말씀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여러분과 제가 생각기도라 그랬는데, 생각기도도 뭔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 구체적으로 내가 누리는 사실이 있어야 생각기도가 나오지, 맹탕 우리 생각이 내 상업 차로, 맹탕 내 밭으로 여기에 항상 있는데, 그리고 지배하는 지배자가 그게 다른 게 지배하고 있는데, 생각으로 갈 수 없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아마 신앙생활 속에서 이 일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게 조용하게 얼마간만 이루어져도 아마 여러분 달라질 것입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예를 들어서 제가 옷을 한번 입었습니다. 맞추어 입었습니다. 그러면 옷을 입고 나가게 될 때에, 나도 모르게 옷을 입는 순간에, '이 옷을 입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어디에 가느냐? '이 옷을 입고 내가 육신적인 욕망을 채우는 곳으로는 안 가야 되겠다!' 나도 모르게 이게 와 지잖아요. 그러면서 제일 처음 이 옷을 입고 나갈 때에, 뭐 하는데? '예배할 때에 이 옷을 입고 나가야 되겠다!' 저는 옷을 맞추면 거의 대게 예배할 때에 제일 먼저 입고 나옵니다.
그 다음에 이 만 연필을 하나 사왔어요. 샀는데, 이게 어디에서 사 왔느냐 하면, 벌써 조금 되었어요. 미국 가서 샀거든요. 딱 사고난 후에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나님, 이 만 연필로 하나님이 영광 되는 일에 쓸 수 있는 만 연필로 사용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돌아갑니다. '잘한다, 못한다!' 이전에, 제가 막 '많이 누린다, 잘한다, 못한다!' 이전에 최소한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축복의 초청에 참여했다! 그러면 모든 일, 닥치는 일마다 어디로 갑니까? 생각이 하나님께로 가게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생각기도'라 그랬는데, 생각 기도의 배경이 이게 안되면 생각 기도가 안 나와요.
여러분 당장 문제가 생기면, 그래서 흔히 그렇잖아요. 사단에 빠진 사람들도 자동차 사면 돼지 대가리 끊어놓고 절하더라 구요. 이 자동차로 돼지를 기쁘게 해 달라고 절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절하더라 구요. 여러분 자동차를 사도 교역자를 초청해서 예배를 안 드려도 좋습니다. 여러분 예배드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이것을 허락하신 주님, 자동차를 탈 때마다 하나님 내게 이 축복된 은혜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뭐 '사고나지 말게 해달라!' 이런 배경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동차 탈 때마다, 핸들 잡을 때마다, '하나님, 사고나지 말게 해 주옵소서!' 그것은 사고나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사고 날 이유가 뭐 있습니까! '하나님, 이 자동차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고, 그 뜻을 따라 살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게 안 돌아갔다! 그러면 여러분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돌아보지도 않고 상업 차로 갔습니다. 누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사단이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여러분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주인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흑암의 세력이다! 그러면 내가 지금 잘 된다!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저주와 고통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가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현재 오늘 잠깐 말씀한 것처럼, 무슨 일이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영광,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역사!' 여기다가 초점을 맞추고, 내가 모든 일에 이렇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위대한 축복이라는 말의 배경이 뭐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나를 초청해서 내가 이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요를 누리고 있는 자리다! 이겁니다.
여기에 조금만 체험이 되면 그로 말미암아 엄청난 기도가 쏟아져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워낙 안되니까, 돌아보지도 않고 어디로 갑니까? 나의 밭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내 개인의 욕심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다른 짓으로 나갑니다. 잘못 되었다, 안 되었다! 그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배경 때문에 문제라 그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 생각과 마음이 정말 여기에 뭐 기도응답이 '뭘 해서 응답 받았다!' 그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 그 마음과 생각이 지금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 하나님의 초청된 풍성함 속에 있다! 아마 이렇게 살아갈 때에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확실히 믿는 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주안에서...' 이 사실이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모든 마음과 생각 속에서, 지금 뭐 때문에 잘되었다는 배경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축복된 사실이 구체적으로 체험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귀한 약속을 주시고 그리고 마지막 말씀을 맺으면서, '만나는 대로'라는 것에는 이제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벌써 다 예배해 놓았습니다. 만나는 대로 하나님의 계획이 여기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계획이 있고, '만나는 대로'라는 약속이 있죠. 그리고 그 만나는 대로 그들은 비로소 뭡니까? 악한 자로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하나님의 초청의 자리에 초대할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이 축복과 역사가 여러분과 저의 교회의 역사요, 이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과 제게 향한 역사입니다.
오늘 '예수 믿어라!' 말한다고 전도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런 배경에 서 있는 여러분 나의 풍성을,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충만히 증거하되, 만나는 대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상관없습니다. 이 복음 들고 나갈 때에 주님께서 이미 나와 여러분에게 계획이 있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은 그 배경을 계획 속에서 성취하여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혼인잔치의 비유
마 22:1-14 / 박덕기 목사
금년은 윤년과 윤달의 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윤년 윤달의 해에 수의를 만들어 놓으면 오래 산다고 해서 수의 업계는 호황을 누리고, 반면 윤년 윤달에는 사람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경향이어서 웨딩업계는 울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교회도 금년 봄에 결혼한다는 소식이 아직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터무니없는 미신을 믿는 일이 결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결혼을 해야 할 청년들을 위해서 열심히 중매도 하고, 기도하는 일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 중 ‘혼인잔치의 비유’를 상고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혼인 잔치 비유의 의미
이 비유에 등장하는 임금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의 구주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를 통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 잔치에 참여할 것을 온 인류에게 명하고 계십니다. 이 명령은 만왕의 왕 되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절대적인 것입니다. 오고 싶으면 오고, 싫으면 오지 않아도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거절하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인생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지켜야 할 절대 절명의 명령인 것입니다.
혼인 잔치 비유는 일차적으로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마저 배척하며 죽인 유대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특별한 선민으로 택하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어 구원의 잔치에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대신, 자기들의 세속적인 일에만 몰두하였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초청을 알리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아가서는 천국 구원의 기쁨을 가져다주실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운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거부하였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거부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할 자유는 있지만, 그 결과까지 거부할 자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종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천국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오도록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응하든지 응하지 않든지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영접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한 결과까지도 거부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초청을 거부한 자에게는 멸망 곧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도록 작정하셨습니다. 누구도 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며,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초청에 응하는 자가 영생에 들어가고, 초청에 응하지 않는 자가 영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가 무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이렇듯 지극히 제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 자유를 선용하여 다 천국 구원에 이르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천국 혼인 잔치의 성격
1)즐거운 잔치
잔치하면 다 즐겁습니다. 돌 잔치, 생일잔치, 결혼 잔치 등 잔치 하면 모두가 즐거운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인륜대사인 결혼 잔치야말로 잔치 중의 잔치요 최고로 즐거운 잔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을 왜 혼인 잔치에다 비유할까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기쁨과 즐거움에 있기 때문입니다. 롬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대는 고난과 한숨, 땀 흘림과 고통의 자리에서, 기쁨과 풍요로움, 안식과 영광의 자리에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대는 마치 풍랑이 일어난 바다위에서 고통당하는 자에게 평안을 허락하시고, 이 땅의 모든 번민으로부터 해방되는 초대,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초대, 불완전 세상에서 완전한 세상에로의 초대, 죽음과 저주에서 생명과 영광에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2)성의를 다한 잔치
임금은 잔치를 베풀되 온갖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 잔치를 배설하기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종 선지자들을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절하는 백성들에게 다시금 종들을 보내어 간청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시키면서까지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받아들일 것을 간청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성의마저 거절하는 인생은 참으로 무지몽매하고 불행한 인생인 것입니다.
3)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
“준비하되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점이 기독교의 구원의 특성입니다. 사람은 다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준비하신 은혜에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죄 사함 받는데서 장차 영화롭게 되기 까지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주도하십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인간이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 아들을 속죄 제물로 삼으사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으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인간들이 만든 여타 종교가 따라 올 수 없는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뛰어난 점입니다.
3. 청함을 거절한 자들
임금님은 온갖 성의를 다하여 잔치를 준비해 놓고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오라고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잔치 자리에 오기를 싫어했고, 심지어 임금이 보낸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1)그들은 혼인 잔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혼인 잔치보다 더 마음을 쏟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가고,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주요 관심사와, 그들이 힘써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현실적인 것들만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영혼이나 내세보다는 현실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소위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적인 일과 이익에의 집착은 인생들이 그리스도와 천국을 가까이 하는데 있어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육적 삶의 일시적 가치만 알고, 영적 삶의 영원한 가치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땅의 것만 알고 하늘의 것은 모르며, 순간의 즐거움은 알되 영원한 즐거움은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구원의 초청을 거절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그들은 임금의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밭으로 가고, 상업 차 떠나고, 남은 자들이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인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훗날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 그리고 숱한 성도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초청을 거부하거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죄를 범한 유대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많은 성도들을 계속해서 능욕하고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3)거절의 결과
임금은 대노하였습니다. 그들이 잔치에 오지 않는 것만 가지고 노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잔치를 거절하고 임금의 종들을 능욕한 것만의 이유도 아닙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임금을 임금으로 섬기기를 싫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반역자들을 보고만 있을 임금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군대를 보내어 대 심판을 내리고 맙니다. 그 결과 유대인은 A. D 70년경 로마의 디도 군단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고 세계의 유랑민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역사상 일찍이 그보다 더한 파멸과 비참한 멸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기 위하여 택한 거룩한 도성이었지만, 큰 심판이 이르러 다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폐허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반대하는 모든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본보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반역하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반역 의지를 드러내는 이들은 누구라도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인데, 기준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하는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흠잡을 게 없다고 해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며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분은 단지 인류에게 유익을 끼치신 분 정도가 아니라 우리 생명의 구주이십니다. 그분에 대한 영접여부가 각 사람의 운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이나 혹은 종교의 창시자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분명히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구주이십니다. 우리든 혹 다른 사람이든 예수님을 거부하고서는 하나님과의 평화는 불가능하며 그분에게로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구원을 위한 유일한 통로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뿐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라도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4. 예복을 입지 않는 자들
종의 보고를 들은 임금은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청하여 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즉 전에는 미리 선택된 자만 초청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초청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 섭리가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 민족적 제한성을 탈피하여, 범세계적 범민족적으로 개방될 것임을 사사해 줍니다. 하나님께 대한 선민 이스라엘의 반역과 복음 배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제한 없이 확대된 것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인류에게 보내는 주님의 초청의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주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어떤 조건이나 자격도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면 누구나 오라는 것입니다. 죄의 짐을 지고 고뇌하는 사람, 실패라는 짐을 지고 절망에 빠진 사람, 병들고 소외되고 버려진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나 오라는 것입니다. 세리나 창기와 같이 당시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도 이 초청에서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지금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예수님께로 나아오기만 하면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종들은 임금의 명령대로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할 것 없이 사람을 만나는 대로 데려다가 혼인 잔치에 참석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잔치 자리에 손님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잔치에 참석한 사람 하나가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고대 근동 국가의 왕실이나 부자 집에서 혼인 잔치를 배설할 때는, 잔치를 배설하기 전에 미리 손님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의 수에 맞는 음식과 기타 여러 가지를 준비하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손님들이 입을 예복이었습니다. 즉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의 예복을 손님들이 아닌 혼주가 직접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은 자신이 예복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으나, 그러나 잔치 자리에서 반드시 예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만일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예하는 사람이 있게 될 경우, 그 사람은 주인에게 무례를 행한 것으로 간주되어, 본문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과 같이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잔치 석상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심판의 자리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예비하신 천국 예복은 무엇입니까? 바로 ‘칭의’라는 예복입니다. 우리는 이 예복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로 천국 구원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죄인들을 대신해 죽게 하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 칭하여 주시므로 그들로 천국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임금은 많은 무리 가운데 섞여있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참된 신앙과 가식적인 신앙을 분명히 가려내십니다. 임금은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임금의 이와 같은 호령은 매우 큰 수치감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은 언젠가 이러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 16:15에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그는 임금의 추궁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내리시는 심판에는 여하한 변론의 여지도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구원의 기회를 거부하고 포기한 자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묵묵히 감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향하여 사환들에게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죄인은 먼저 그의 수족을 결박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유를 상실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또 수족이 모두 결박을 당하게 된 것은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형벌에 대항하여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뜻합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슬피 우는 것은 회한의 눈물입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를 가는 통한의 눈물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구원의 문은 닫히고 하나님의 심판은 번복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주님의 ‘혼인 잔치의 비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초대받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택함을 입은 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자로서 ‘정선된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초청을 받은 자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음으로 구원에서 제외될 사람들이 많을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눈에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란 사실만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자들에게, 그들 자신도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실로 충격적인 경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초청에 응할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합당한 예복과 같은 참된 믿음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로서 그 사명을 신실하게 수행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먼저 사랑하는 나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나의 자녀들에게 이 기쁜 하늘나라 잔치의 초청장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다음은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이 초청장을 반드시 전해 주어야 합니다. 만일 초청장을 전달하라는 임금님의 명령을 묵살해 버리는 종들은 엄한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금년에도 4월 한 달 동안 전도 대상자를 기도하면서 선정하고, 5월 달에는 총동원 전도 주일로 지킬 것인데, 천국 잔치와 같은 전도 주일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장차 배설될 하늘나라의 잔치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참여하여, 세상 고생 꿈에 본 듯이 잊어버리고 세세토록 기쁨을 맛보고 즐거움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거절당한 천국
마 22:1-14 / 류영모 목사
1. 거절감
인생은 꼭 한번 주어졌다고 하여 "일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주어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목적대로 성공하고 또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도록 실패하고 불행한 삶을 살도록 유혹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는 전략가운데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상처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 속에 갇혀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상처 가운데 가장 흔한 상처가 거절감입니다. 또 가장 독한 상처가 거절감입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로부터 거절을 경험합니다. 거절감을 경험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게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하며 사역을 감당하더라도 건강하게 사역을 감당하기가 힘이 듭니다. 또 내가 다른 사람을 거절하게 됩니다. 내가 축복의 통로가 아니라 저주의 통로, 상처의 통로가 되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행복해야 될 가정 생활, 교회 생활, 직장 생활이 늘 불행하고 불만으로 가득차고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절감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으로부터 받는 것만은 아닙니다. 부모들도 자식으로부터 거절을 경험하고 선생님들도 제자들로부터 거절을 경험합니다. 사장들로 사원들로부터 거절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도 우리 인간들로부터 거절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거절을 경험합니다. 성령님은 수도 없이 거역을 당하고 거절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거절하지 말라, 성령을 거역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면 거절감의 상처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거절감의 상처는 세월이 흐른다고 저절로 치료되지 않습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기다린다고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치료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되고 나는 치료받은 건강한 사람이다 선언해야 됩니다. 또 내가 상처를 받은 것만큼 언제나 나도 상처를 줄 수 있고 또 주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거절보다 행여 내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거역하지나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배설하고 손님을 청했습니다. 청함받은 사람들로부터 이 왕은 한결같이 거절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심부름 보낸 종들이 모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이지요.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다면 상당히 가까운 사람들이었을 텐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절당한 임금이 노하여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온 동네를 불살라 버립니다. 임금은 사환들을 다시 보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다 잔치집을 채우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는 자들은 손발을 묶고 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슬피울게 만듭니다. 택한 받은 자들만 이 잔치를 맛보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대략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참 희한한 잔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것이 천국이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이해가 되십니까? 이게 천국이야기라면 천국을 거절했다가 천국으로부터 거절당한 인간의 이야기들이지요. 메시야를 거절했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쫓겨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잔치는 보통 잔치가 아닙니다. 오늘 아침 말씀은 우리가 함께 경성하여 귀를 기울여 들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II. 왕의 마음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22장 1절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여기 "다시"란 말이 무슨 말일까요? 바로 앞 21장 마지막에 보면 "거절당한 포도원 주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33절 "한 비유를 들으라" 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한 비유와 오늘 본문의 "다시 비유로" 라는 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21장 "포도원 주인 비유"와 22장 "잔치집 왕의 비유"는 한 쌍을 이루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잔치를 배설했다가 거절당한 임금은 하나님입니다. 혼인잔치의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당시 혼인잔치는 일차 하객들에게 잔치 사실과 일자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잔치가 모두 준비되면 다시 하객들을 초청하게 됩니다. "천국은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으니" - 얼른 생각하면 "천국은 잔치와 같으니" 그럴 것 같은데 "천국은 초청과 같으니" 그럴 것 같은데 "천국은 임금과 같으니" 그랬습니다. 임금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왕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왕의 마음일까요? 천국은 왕이 준비한 잔치에 초청받은 모든 사람들이 와서 즐기기를 기다리는 왕의 마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잔치에 일차로 초대된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은 그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왕의 잔치 메시야 왕국을 오랜 시간동안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인 예언자들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천국으로 초대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 그 아들을 보내 천국잔치를 알렸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오소서" 하라. 성경에 "오소서" 라는 초청이 무려 1900번 이상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청의 역사, 우리 기독교는 초청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III. 천국을 거절한 사람들
천국을 거절한 사람들, 임금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5절-6절 "그들이 돌아보지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첫 번째 두 사람은 일과 사업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주색잡기에 빠져 못 온 것도 아닙니다. 발등에 떨어진 급한 일을 해야 하겠기에 오지 못한 것입니다. 급한 일에 쫓겨서 중요한 일을 잃어 버렸습니다. 일시적인 일에 쫓겨서 영원한 일을 상실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일들에 매여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몰랐습니다. 세상일에 귀 기울이다가 하나님의 초청, 우리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차선의 일들에 사로잡혀서 최선의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보다는 현실이 좋았고 영적인 세계 보다는 당장의 필요를 채워주는 물질이 전부인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취미와 여흥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했습니다.
골프에 미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골프를 배우다 보니 너무 너무 재미있더랍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전부 골프경으로 보이더랍니다. "골프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골프가 나를 푸른 풀밭 잔잔한 시내로 인도하시는도다. 골프공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질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다양한 골프채가 내게 있음이로다." 끝나고 나면 트로피 상도 있고 저녁상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천국에도 골프장이 있습니까? 천국에 골프장이 없으면 골프장 하나 건설해 주세요." 하나님의 즉각 응답이 왔습니다. "종아 염려하지 말아라. 기가막힌 골프장들이 있다. 한달 후에 베드로와 네가 부킹되어 있단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 보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환경에 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 허둥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비전에 집중하여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급한 일을 먼저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먼저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냉혹하게 임금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보다 훨씬 폭력적인 제3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심부름 온 사람들을 모욕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보통 결혼식이면 안가면 그만이지 심부름 온 종들을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핍박받고 있는 마태교회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거절하되 대단히 공손하게,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18절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하고" 했습니다. 그다음 소를 산 사람도 정중히 양해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마태는 유대인들과 유대지도자들이 냉혈인간들처럼 잔혹하게 예수를 거절했고 교회를 핍박했는가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정당한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D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모든 사람을 죽이고 성전을 불태우고 성을 무너뜨립니다. 돌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만큼 철저히 진멸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마태는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IV. 천국잔치는 중단되지 않는다
당시 중동지역에서 임금의 초청에 흔쾌히 응답하는 것은 백성의 당연한 의무요 예의였습니다. 구태여 중동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만약 임금의 초청을 거절했다면 이는 임금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사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잔치의 주인공인 왕자가 축하받을 자격도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졌습니다. 이는 자신이 이 결혼에 동의할 수 없음이요 더 이상 임금에게 충성할 마음도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얼음집을 짓고 사는 에스키모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던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잘 사는 문명국에서 온 줄 알고 한 추장이 선교사를 초청해서 저녁에 거대한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추운 지방이었으니 밤에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잠자리에 들게 되었는데 추장의 부인들 가운데 한 예쁜 부인이 침실로 찾아들더랍니다. 에스키모 사람들은 자신의 부인을 손님에게 내어주는 것이 손님에 대한 정당한 예의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거절했다가 선교사님은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요. 침실로 찾아든 부인을 거절한 것은 추장에게 적대감을 가진 사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너희 부족은 더러워서 상대할 수 없다는 태도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음행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존재를 거절한 것으로 부족과 추장을 거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풍습을 거절했다가도 죽을뻔 했습니다. 더구나 지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의 신랑으로 묘사되어졌습니다. 신랑을 거역하고 음행의 자리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4절)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천국 구원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이것을 거절한 것은 왕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정도가 아닙니다. 예의가 없다는 차원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성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먼저 초청받은 자들이 이 초청을 거절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잔치가 취소되는 것 아닙니다. 천국잔치가 중단되는 것도 아니고 포기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누가 거절하고 핍박하고 방해해도 천국 구원잔치는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임금의 강력한 의지를 보십시오. 이어지는 본문 9절과 10절입니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라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잔치에 손님이 가득한 지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14장 21절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어지는 23절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여기 "강권하여 데려다가" 이 말은 영어 성경에는 팔을 비틀어서라도 데려오라는 뜻을 가진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팔을 비틀어서라도 당신의 백성을 찾아서 잔치집을 채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임금의 마음이요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왕과 같으니" 왕의 마음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유대인의 왕국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습니다. 천국은 건강한 자들의 왕국이 아닙니다. 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도 거기 들어갑니다. 천국은 많이 배운 자들의 왕국이 아닙니다. 못 배운 자도 거기 들어갑니다. 「낫 놓고 ㄱ자를 모르고, 공차면서 ㅇ자를 모르고, 지게지고 A자를 몰라도 예수 믿으면 거기 들어갑니다. 」"천국은 우리 같은 이방인들로 가득한지라""천국은 나 같은 죄인들로 가득한지라" 마음씨 착한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악한 자도 데려오라. 그도 회개하고 예수님 영접하면 천국 간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도 용서받았습니다. 평생 강도짓을 하고 살았던 오른편 강도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의 왕국에 들어갔습니다. 세리 삭개오도 그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용납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고 세상 모두가 당신에게 돌을 던지고 있습니까? 그래도 주님 앞에 돌아오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분의 초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면 당신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V. 예복 입고 오너라
왕의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의 마지막 자격 한 가지가 11절로 13절에 나옵니다. 물론 그 나라 왕국의 잔치에 참여했으면 감사함으로 신랑을 칭찬하며 잔치집에서 마음껏 즐기며 살아야겠지요.
탈무드에 보면 두 가지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 할수록 좋다는 거짓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남이 일단 산 물건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아라. 무조건 참 좋다고 이야기 하라. 둘째, 혼인 잔치집에 가서 신랑 신부가 아무리 못생겨도 못생겼다고 정직하게 말하지 말아라. 참 잘생겼다고 참 예쁘다고 천생배필이라고 얘기해라. 이 거짓말은 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고 들어가는 것이 마지막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왕은 말합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데 내 던지라 거기서 슬프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여기 "친구여" 이 말은 좋은 의미로서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여" (eJtai're 헤타이레) - 이 말은 마태복음에서 언제나 불순종하는 자들, 위선적인 거짓제자들을 지칭할 때 쓰여지는 말이었습니다. 어찌하여 - 마태복음에 14번 나타나는 의문부사로서 주로 놀라움을 표현하는 단어로 등장합니다. 중국에 이 큰 지진이 났을 때에 너무 놀라서 우째 이런 일이 이런 이야기입니다.
"슬피 울며 이른 간다"는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늘 최후 심판에서 버림받은 상황을 표현할 때 쓰여지는 문장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중요한 자격이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을 알현하려는 한 사람이 왕이 준비한 예복은 거절하고 자기 옷에 먼지나 좀 털고 옷 매무새나 바로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도 마음가짐이나 좀 반듯하게 하고 행동이나 좀 깨끗하게 하고 착한 일이나 세상에서 하지 않던 것 한 두가지 하면 천국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예복"이 무엇일까요?
1) 지금 왕의 잔치집에 들어온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실패한 그것이 예복일 것입니다. 어떤 주경학자들은 예복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성경학자들은 성경 전체의 조화속에서 특히 사도바울 신학과 마태 신학의 조화라는 차원에서 예복을 "칭의" -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예복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고 믿는 고백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신앙의 열매" "크리스챤다운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으면 예수 믿은 정당한 열매가 있어야 된다. 그것을 예복이라고 마태는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본문이나 마태신학 안에서 본다면 옳은 해석입니다. 교회안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입술로만 주여 주여~ 말하고 전혀 삶이 바뀌지 않는 사람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 가치관이나 태도가 바뀌지 않는 위선자들을 향하여 "예복을 입지 않은 자"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복을 종합적인 성경 전체의 안목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3) 옷이 무엇일까요? 욥기서 29:14절, 시편132:9절에 보면 "의의 옷"이라 얘기했습니다. 이사야 61:10절 "구원의 옷" 로마서 13:14, 갈3:27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라는 말입니다. 이제 왕의 나라에 들어왔으면 저 세상 나라에서 자랑하고 입고 다니던 내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자랑하던 옷을 부끄럽게 여기고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 보혈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 옷을 입은 자는 그 나라 백성으로서의 언어를 말하며 살아야 됩니다. 천국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천국 인생으로서의 목적을 가지고 천국 열매를 맺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VI. 맺으며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받은 거절 상처에 묶여 살지 마십시요. 자칫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영광마저 거절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내가 천국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거절했다고 그 천국이 거절당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거절했다고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입니까? 결국 나만 불쌍하게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잔치 은혜의 잔치에 우리가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쁨으로 참여하여 마음껏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것이 천국의 마음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올때 마다 예배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말씀을 들을때 마다 이 말씀을 즐기는 주인공이 되십시오. 이 교회를 통하여 부어지는 축복이 여러분을 향한 축복임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천국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임금의 마음입니다.
인간이 천국을 거절했다고 천국 잔치가 포기되어질까요? 중단되어질까요? 천국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곳은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들어갑니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초청에 응하고 예복을 입으면 들어가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부름받은 왕국입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준비된 곳입니다.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갈 때 내 자랑하던 옷, 내가 지어 만든 의의 옷 모두 벗어던지고 예수님께서 친히 피흘려 지으신 예복을 입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지은 옷 입은 자만 들어오너라. 성령의 은혜로 맺은 열매만 안고 들어오너라. 그 영원한 나라가 너를 위하여 준비되었다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