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이 낳은 명재상 약포 정탁이 쓴 용만문견록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신(臣)이 전하의 명을 받아 의주(義州)에 와서
경략(經略)에서 유격(游擊)에 이르기까지 명나라 장수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전별하고 위로하였습니다. 대략은 이미 모두 서계(書啓)를 올려 아뢰었고, 그 밖에 다른 일과 오고간 이야기들을 지금 모두 기록하여 한 권으로 합쳤습니다. 이는 명나라가 장수가 오고간 일들을 듣고 본 대로 기록하는 것이 나름대로 고사도 있거니와, 하물며 이처럼 나라가 재건되는 시기에 동쪽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의 말과 행적들이 국가에 관계됨이 있음이겠습니까? 감히 예삿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삼가 이를 기록하여 바치오니, 황공한 마음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병부 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은 항주(杭州) 우위(右衛)로 절강성(浙江省) 인화진(仁和鎭) 사람이며, 호가 동강(桐岡)입니다. 명나라 만력 임진년(1592) 흠차 경략 계ㆍ요ㆍ보정ㆍ산동 등처 방해어왜군무(欽差經略薊ㆍ遼ㆍ保定ㆍ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의 품계에다 다시 한 품계를 올려서 우리나라 의주부(義州府)에 왔습니다.
계사년(1593) 안주(安州)와 정주(定州) 사이에 전진하였다가 그 해 8월 27일(무신)에 의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의순관(義順館)에 머물렀으나 얼마 안 되어 용만관(龍灣館)으로 옮겼습니다. 신이 9월 10일(신유) 아침 관대를 차리고 문 밖에 나아가 배알을 청하고 다시 전하께서 문안을 하겠다고 고하였습니다.
병부 시랑 송응창이 말하기를,
“국왕은 지금 어디에 있소?”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해주(海州)에 있습니다.”
하니, 송응창이 또 묻기를,
“해주는 한양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소?”
하여, 신이 대답하기를,
“3일 노정(路程)의 거리입니다.”
하니, 송응창이 말하기를,
“나는 조선 국왕의 후계자를 경상도에 나아가 머무르게 하겠다는 뜻으로 조선 국왕에게 자문(咨文)을 보냈소. 그런데 거듭 생각해 보니 경상도는 피폐해진 곳이어서 진실로 왕세자가 가서는 안 되오. 전라도는 아직 병화(兵火)를 겪지 않았으니 남원(南原)과 같이 편리하고 안전한 곳을 택하여 장사(將士)들을 호령하여 방비에 대한 조치를 해야 하오. 그대 국가의 존망(存亡)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어서 내가 이러한 뜻으로 두 번이나 자문(咨文)을 보내었는데, 어찌하여 오래도록 회답이 없는 것이오? 그대는 이 일을 조선 국왕에게 치계(馳啓)를 하여야 하오.”
하였습니다. 신이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말하기를,
“노야(老爺)께서 우리 작은 나라의 뒷날을 위해 계획한 것이 더없이 훌륭합니다. 그러나 왕세자께서 작년에 피난할 때 산골짜기로 다니시며 나쁜 풍토를 무릅쓰다가 장독(瘴毒)에 걸린 데다 인후의 염증이 함께 발생하여 오랫동안 앓고도 아직 낫지 않아 국왕의 어가가 옮겨갈 때도 호종(扈從)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말하기를,
“명나라 조정이 병력을 보내 그대의 나라를 회복시켜서 왜적들이 멀리 도망갔는데, 명나라 조정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계속 외국에 머무를 수 있겠소. 돌아보건대 그대 나라가 잔약하여 우리 군대에 물자조차 댈 수 없기 때문에 병력을 조금 남겨 방어하도록 하였으나, 명나라 조정에서 또 관리를 파견하여 변방의 병졸들에게 황제의 뜻을 널리 알리고자 하고 있소. 그런데도 그대의 국왕은 어찌 왕세자를 따로 파견하여 남쪽의 군대를 조련하려 하지 않소. 명나라 장수들은 저렇게 힘들게 싸우는데, 세자가 감히 혼자서만 편안코자 하는 것이오?”
하여, 신이 다시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다시 말하기를,
“왜적이 아직 남쪽 부산(釜山) 등의 여러 곳에 있는 데다 흉악하고 간교하여 행동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노야께서 군사를 회군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왜적이 그 뒤를 밟는다면 작은 나라 조선은 반드시 지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작은 나라가 노야를 우러러 믿는 것은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사모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압록강을 건너가시려 하니 절박함과 민망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시랑 송응창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방략(方略)이 있으니 왜적은 반드시 다시 올 수 없을 것이오. 그대 나라의 군왕과 신료들은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시오. 왜적이 다 돌아간 연후에야 비로소 나의 훌륭한 계책을 알게 될 것이오. 지금 배신(陪臣)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군사 기밀은 누설할 수 없기 때문이오.”
하였습니다.
이날 원접사(遠接使) 윤근수(尹根壽)ㆍ황신(黃愼)ㆍ이정귀(李廷龜) 등이 모두 함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시랑 송응창은 황신과 이정귀에게 먼저 나가라고 명하고서는 유독 신과 윤근수를 남게 하여 차를 대접하였으며, 또 절을 하지 말고 나가라고 명하였습니다.
다음 날(임술 11일) 시랑 송응창이 자신의 집안 일꾼들에게 연회를 준비하라 명하고 도감청(都監廳)에서 신들에게 향연을 베풀었습니다. 이날 그 쪽 아랫사람 마문괴(馬文魁)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제
중양절(重陽節), 시랑 송응창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ㆍ원외랑(員外郞) 유황상(劉黃裳)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제독이 ‘배신들이 전별연을 청하고 있는데, 노야(
송응창)께서 허락하실 것입니까?’하고 묻자,
시랑 송응창이,
‘비록 연회를 베푼다고 하나 자문(咨文)이 오지 않아서 받아들일 수 없소.’라고 답하였습니다.
이에 제독 이여송이 말하기를,
시랑 송응창이 말하기를,
‘국왕이 당초 명나라 군대가 오기를 바랄 때에는 빈번하게 찾아오더니, 지금 회군을 하려니 와서 볼 생각이 없는 것 같소. 나는 조선의 배신(陪臣)을 데리고 가서 1년이든 반년이든 혹 4, 5개월이든 구애받지 않고 일이 완결되고 병마가 다 철군하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배신들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겠소.’ 하였습니다.”
이에 청사리(廳事吏)가 또 말하기를,
“대인(송응창)께서는 국왕이 자문(咨文)을 보내야 연회를 베풀 수 있지, 자문이 오지 않았는데 연회를 어떻게 베풀 수 있겠는가. 만약 자문이 온다면 나 또한 자문을 보내 고맙다고 표할 것이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다음 날(계해 12일) 신(臣)이 어제 베풀어 준 연회 때문에 아침 일찍 시랑 송응창의 아문(衙門)에 이름패를 올리고 고마웠다는 인사를 한 뒤 다시 전별연을 청하였으나 “국왕이 자문(咨文)을 보내지 않아서 받아들일 수 없소.”라고 답하였습니다. 이날 밤 삼경(三更)에 왕자 임해군(臨海君)께서 행재소에서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9월 13일(갑자)에, 신이 윤근수(尹根壽)ㆍ오억령(吳億齡)과 함께 왕자를 모시고 일찍 시랑 송응창의 아문에 가서 시랑을 만나 보니, 시랑이 말하기를,
“우리 명나라 군은 이미 평양을 돌파하고 또 왕경을 수복하였으며, 게다가 호남과 영남의 두 도(道)를 보존했소. 왜적이 비록
서생포(西生浦)에 있다 하나 팔도가 이미 수복되었고, 또한 병력을 남겨 방비하고 있소. 그대 나라 조선이 정예병을 선발하고 모집하여 먼저 부장(副將) 유정(劉綎
명나라 장수)의 군영에 보내어 훈련을 받게 한 연후 각 군영에 나누어 보내되, 경상도는 대구 일대에, 전라도는 남원 일대에 보내어 각기 지세가 험하여 방어하기 좋은 요충지를 지킨다면 왜적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소. 유정은 용장(勇將)이며 다른 장수들도 대부분 용사(勇士)들이오. 그들 부대 1만이면 다른 군대 10만을 당할 수 있소. 만약 그대 국가의 병력과 합세하여 3만 명쯤 된다면 적을 충분히 섬멸할 수 있소. 나는
기미(羈縻)의 방법을 가지고 있어서 왜적이 함부로 공격해오지 못할 것이고, 12월 말에는 반드시 모두가 물러갈 것이니, 마땅히 곧바로 국왕(國王)에게 장계를 올려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도록 하여야 하오. 내가 지금 비록 압록강을 건너더라도 요동(遼東) 등지에서 머무를 것이며, 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기다려서 비로소 황제 앞에 복명할 것이오. 적이 만약 물러나지 않는다면 명나라 조정에서 반드시 왜를 완전히 없앨 것이오. 왜적이 나의 절제(節制)를 따를 것 같지 않으면 지난날 왜적이 호남을 공격할 때 어찌하여 명나라 군대를 보자마자 퇴각했겠소? 그리고 예물단자는 받을 수 없고, 전별연은 외관(外館)에서 베푸시오. 지나가는 때에 잠시 들러서 국왕의 성의를 받겠소. 왕자는 잠시 돌아가지 말고 이곳에 머무르시오. 내가
탕참(湯站)에 도착하면 자문(咨文)을 마련하여 왕자에게 보낼 것이니 왕자가 이것을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고는 이어 곧장 출발하여 지나가는 길에 의순관(義順館)에 들러 왕자와 신들을 만나지 않은 채 다만 전별연을 받고서 이를 마치자 곧바로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신이 왕자를 모시고
중강(中江)으로 가 길가에서 기다렸더니 시랑 송응창이 “멀리 나와 전송할 필요가 없소.” 하여 신이 왕자를 모시고 물러나왔습니다.
시랑이 스스로 큰 공이 있는데도 국왕이 신하만 보내 송별연을 연다고 여기어, 자신의 뜻에 만족하지 않음을 여러 차례 말하는 사이에 언급하였으니, 만약 왕자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송별연에도 참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송응창이 “내가 이제 떠나가려 하는데도 국왕은 어찌 한 마디 글을 써서 부쳐 오지 않소? 조금이라도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라고 말하였으며, 제독 이여송 역시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는 시(詩)를 구하였으나, 조정에서 요구에 즉시 응하지 않아서 마음속으로 매우 불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신이 송응창의 행차에 삼가 근체시(近體詩) 두 수를 지어 역관
표헌(表憲)을 통해 올리도록 하고, 아울러 제독 이여송의 행차에도 올리도록 하였더니 모두가 기뻐하였다고 말합니다.
시랑 송응창에게 올리는 제2편의 시 말단에 왜적과 강화(講和)하고 병사를 퇴각한 것 등의 일을 은근히 언급했는데,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싶었으나 말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은 것은 대개 옛사람들이 시를 빌려 은근히 풍자한 뜻이고, 역시 그의 분노를 부추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군도독부 도독(中軍都督府都督) 이여송(李如松)은 철령위(鐵嶺衛) 사람이며, 호가 앙성(仰城)입니다. 만력(萬曆) 임진년 흠차 제독 계ㆍ요ㆍ보정ㆍ산동 등처 방해어왜군무 총병관ㆍ태자소보(欽差提督薊ㆍ遼ㆍ保定ㆍ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摠兵官ㆍ太子少保)로서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에 와서 왜적을 토벌하였습니다.
계사년(1593) 8월 28일(기유)에 용천(龍川)에서 의주(義州)로 돌아와 연춘당(延春堂)에 머물렀습니다. 늦가을인 9월 10일(신유)에 전별연에 참석하기를 청하자 “송 경략이 연회에 참석할 때 같이 참석하겠소.”라고 말하고, 9월 12일(계해)에 다시 청하자 “경략도 전별연에 참석하지 않거늘 내가 어찌 홀로 연회를 받는 일이 있겠소!”라고 답하였습니다. 다음 날(갑자 13일)에는 경략 송응창이 전별연에 임하였기 때문에 중강(中江)에 와서 또 연회를 베풀기를 허락하여 조용하게 마쳤습니다.
이날, 신이 왕자를 모시고 시랑 송응창을 중강에서 환송하고 돌아오는데, 아직 압록강을 건너지도 않았을 때 제독 이여송의 행차를 바라보니 예기치 않게 벌써 강나루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신이 왕자님께 아뢰어 잠시 강안에 머물러 그의 행차를 기다릴 것을 청하고 역관 한윤보(韓允輔)를 시켜 “왕자께서 어젯밤 늦게 도착하시어 오늘 처음 경략을 뵙고 인사하고 배웅한 다음, 곧장 존전(尊前
이여송)에 나아가 배알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노야의 행차가 매우 바삐 움직이시어 지금 노야를 여기에서 뵙게 되니 무척이나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제독 이여송이 급히
가정(家丁)을 시켜 배 안에 양탄자를 깔게 하고 상견례를 하자고 청하며 제독이 말하기를 “저번에 경략 송노야를 보고 ‘국왕이 배신을 파견하여 전별연을 베풀고자 하였는데 노야께서는 허락하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국왕이 자문을 보내지 않아서 받아들일 수 없소.’라고 답하였소. 그래서 내가 ‘국왕께서 노야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자 하는데, 비록 자문이 없다고 하더라도 배신이 이미 여기에 왔으니 잔치를 베풀도록 허락하는 것이 무어 나쁘겠습니까? 노야께서 강가에 도착하셔서 잔치를 받으시지요.’라고 말하였소. 그런데 지금 다행히 왕자께서 오시어 송경략의 전별연에 나아갔으니, 이 때문에 나와 곧바로 상견하지 못한 것은 형세가 당연한 것이오. 왕자께서 마음을 놓아도 되오.” 하였습니다. 이에 왕자께서 물러나겠다고 고한 다음 먼저 출발하시고, 신은 나중에 뒤좇아 갔습니다. 역관 현응기(玄應期)로 하여금 “왕자께서 감히 물러가지 못하시고 노야를 전송하러 여기까지 오셨습니다.”라고 고하게 하였더니, 제독 이여송은 말에서 내려 곧 군막으로 들어갔으며, 신은 이덕형과 함께 왕자를 모시고 따라 들어가 술을 잔에 따라 돌리며 예를 행하고 조용히 담소를 나눴습니다.
이여송이 하는 말에는 원망하고 분개하며 의분이 북받친 말이 많았는데, 말에 담긴 뜻이 대개는 다른 사람(
송응창)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여서 이번 출동에 그다지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여송은 국왕의 후의에 매우 감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들은 왕자를 따라 인사의 말을 하고 물러나왔습니다.
중영좌부장 도독첨사(中營左副將都督僉事) 양원(楊元)은 정요좌위(定遼左衛) 사람이며, 호가 국암(菊巖)입니다. 만력 임진년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와서 왜구를 토벌하였습니다. 1593년 8월 26일(정미)에 동로(東路)에서 의주로 돌아와 처음에는 품관(品官) 최척(崔陟)의 집에 머물다가, 이후 청심당(淸心堂)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가 도착한 다음 날 신이 몸소 머무르고 있는 집 문밖에서 문안을 하니, 부장 양원이 즉시 관대를 착용하고 나와 보았습니다. 신이 앞으로 나아가 두 번 절을 올리고 읍(揖)을 하고 이에 우리 임금께서 문안한다고 고하니,
양원이 답하기를,
“국왕의 안부는 어떠하시오? 배신은 어느 날 여기에 오셨으며, 어느 날 돌아갈 것이오?”라고 하여
신이 답하기를,
“저희 전하의 기체(氣體)는 별다른 일 없이 대체로 편안합니다. 배신은 노야의 행차를 위해 우리 전하의 명을 받들고 며칠 앞서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곧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부장 양원이 말하기를,
“배신이 돌아가는 날 국왕에게 잘 고해주시오. 전 어사(前御史) 진효(陳效)가 순안(順安)을 지날 때, 어떤 서생이 일로(一路)의 명나라 군졸들이 조선 사람의 소와 말을 빼앗아 가고 사람들에게 해를 입혔다는 등의 일로 소장을 올렸소. 나의 부하들이 어찌 이러한 일을 하였겠소. 이는 필시 행상(行商)들이나 잡류(雜類)들이 저지른 것일 것이오. 나의 부하들이 이러한 일을 반드시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명나라 군대는 그대 나라의 변고 때문에 사상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소. 게다가 명나라 군량을 운반하느라 수많은 금액을 소비하였소. 설령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소(訴)까지 올린다면 일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소. 배신이 돌아가서 국왕 앞에 고하여 이같은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오.”라고 하여
신이 답하기를,
“배신이 지금 노야의 말씀을 듣고 보니 놀라운 마음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천조에서 우리나라를 위해 천자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적(大賊)들을 무찔러 평정하게 하고 삼한(三韓)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또 장군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먼 길을 무릅쓰고 정벌을 오셔서 추위와 더위의 계절이 바뀌기까지 하여 노고가 갑절이나 심하였습니다. 은덕이 망극하여 소방의 신민(臣民)들은 감사히 여기고 하늘과 같이 우러르며 보답할 길을 생각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떤 어리석은 백성이 감히 이와 같은 짓을 하겠습니까? 배신이 삼가 돌아가 우리 임금께 고한다면 임금께서도 들으시고 역시 놀라실 것입니다.”
양원이 말하기를,
“이 일은 내가 경략(經略 송응창)과 의논하여 처리할 것이니 배신 또한 돌아가서 국왕께 고해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삼가 마땅히 명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위연(餞慰宴)을 거행할 것을 청하니,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함께 받을 것이오.” 하여 신이 앞으로 나아가 두 번 절하고 일어나 읍을 하고 물러났습니다.
9월 5일(병진)에, 부장(
양원)과 좌영부장ㆍ도독첨사(左營副將ㆍ都督僉事) 이여백(李如栢), 좌영부장 도독지휘사(右營副將都督指揮使) 장세작(張世爵)이 예기치 않게 같은 날 길을 떠나서 신이 소식을 듣고 의순관(義順館)에서 송별연을 베풀려고 먼저 참석을 간절히 청한바, 모두가 이미 허락하였으나 부장(副將) 장세작(張世爵)이 먼저 지나가며 들어오지 않고 “행차가 바빠서 들어가지 못하나 국왕의 성의(盛意)에 매우 감사하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양원과 이여백 두 부장은 관대를 갖추고 함께 대청으로 들어와 읍례(揖禮)를 행한 후, 말하기를,
“국왕이 멀리 재신(宰臣)을 보내서 송별연을 베푸는데 우리들이 들어가지 않으면 예에 온당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에 감히 들어오지 않을 수 없지만, 국왕의 성의(盛意)를 이미 받았으니 꼭 머물러 술을 마실 것은 없소.” 하고 이에 곧 나가면서,
“여기는 곧 일가(一家)같은 나라로 배신이 조정을 왕래할 것이니 어찌 다른 날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겠소.” 하였습니다.
당초에 연회를 청할 때 예단(禮單)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일에 미진함이 있을까 하여 이덕형(李德馨) 일행이 가져온 명주ㆍ모시ㆍ종이ㆍ부채ㆍ도검 등의 물건을 사람 수에 맞추어 강변으로 뒤따라 보냈으나, 부장들이 다만 종이와 도검만 받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또한 소첩(小帖)을 지어 보내왔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귀방(貴邦)에 정벌을 나갔다가 병사들이 조심하지 않은 것은 병사들을 통제하는 자의 과실이 많습니다. 따로 교외로 와서 은근히 전별연을 열어 주시고 이에 또 전별의 선물을 함께 주시니, 이미 종이와 도검은 받아들였으나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냅니다. 강변에서 노를 저으며
사수시(四愁詩)의 구절을 본받아
〈식미(式微)〉의 문장을 외니 마음속 깊이 감상에 젖습니다. 거치나마 두 수를 써서 보이니 고의(古義)에 맞지 않고 운율에 맞지 않으며 문평(文評)에 맞지 않을 것이나, 잘 이해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통령 계부이영 거병유격 도지휘(統領薊府二營車兵游擊都指揮) 척금(戚金)은 사람됨이 절약하고 검소하며 타인을 사랑하고, 도의(道義)를 스스로 견지하였습니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왜적을 정벌하러 동쪽으로 올 때, 그 역시 병사를 거느리고 따라왔습니다. 그의 행장은 아주 초라하였으며, 그는 지나가는 곳마다 조금도 범하지 않았고 병졸들을 엄히 단속하여 지방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옛 장수의 풍모를 깊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계사년(1593) 늦가을 동로(東路)에서 돌아와 용만(龍灣)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관(館)에서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말이 시사(時事)에 이르자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본(奏本)을 갖추어 강화(講和)를 허락할 지의 여부를 논한 사람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심유경(沈唯敬)ㆍ사용재(謝用梓)ㆍ서일관(徐一貫)이나, 심유경을 포함한 세 사람은 뇌물을 받고 강화를 한 죄를 논하여 법에 따라 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황상의 뜻이 어떠하신지 알지 못하오. 귀국(貴國)의 일이 매우 긴급하니 전쟁이든 강화이든 간에 오직 속히 결론을 지어 하루라도 빨리 민생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풀어 줄 따름이오. 의론이 분분하지만 준봉(準封)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내가 지금 평양에 가서 왜장(倭將)에게 잔치를 열어 상을 주고 왜노(倭奴) 한 사람을 차출하여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모두 대마도(對馬島)로 철군하게 하고, 관백(關白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조공을 바치겠다는 표문(表文)도 부쳐오라고 하였으니, 내가 곧 북경으로 가면 조정에서는 비로소 문신(文臣)이나 무신(武臣) 가운데 한 사람을 차출하여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의 옛길을 통해 보내 관백을 왜왕(倭王)으로 책봉할 것이오. 공물의 경우는 10년을 기다려 보아서 조선을 침공하지 않고 중국을 배반하지 않은 연후에야 비준을 허락할 것이오. 이는 지난날 우리 병부의 편지가 왔을 적에 조정의 의론이 이러하다는 것을 익히 알았으니, 아마 내년 봄쯤이면 바야흐로 일이 끝날 것이오. 왜노가 만약 겉으로는 항복을 구하고도 속으로 엉큼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표문(表文) 역시 황제에게 올릴 수 없으므로, 이미 남병(南兵) 수만 명을 동원하여 이 적들을 모두 섬멸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소.”
이어 대화가 적의 숫자가 얼마인지에 미치자 유격(游擊) 척금(戚金)이 분에 북받쳐 말하기를,
“평양을 공격할 때 내가 소서문(小西門)을 따라 성에 먼저 올라 성 안의 적이 얼마인지 일일이 살펴보니 4천 명을 넘지 않았으며, 황해도 각처 적의 소굴도 내가 높은 곳에 올라 살펴보았는데, 방어 시설과 부엌 축조의 형세로 계산해 볼 때 적은 것은 1백이 넘지 않고 많은 것도 2, 3백을 넘지 않았으니, 이를 합쳐 말하여도 대강은 알 수 있소. 그런데도 심유경(沈惟敬)은 ‘평양의 적은 6만이 넘고 각처의 적이 매우 많아 대적하기 힘들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대개 강화를 주장하여 공이나 탐내는 것이오. 이어서 제독이 진술한 보고(報告)로 말하기를 ‘부산은 적이 많아서 거의 60만에 이른다.’라고 하여 우리 조정에서 그 말을 믿고 출병하여 격파하려 하면서 오직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대적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하오. 직지사가 온 것은 자못 일의 형편을 자세히 기찰하고자 온 것인데도 귀국이 분명하게 글로 써서 아뢰지 않으니, 매우 아쉬운 일이 되었소. 배신 윤근수(尹根壽)는 부장(副將) 유정(劉綎)의 병사 1500명으로 하여금 경주를 지켜내려 하였으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께서 품첩(稟帖)을 보시고는 달갑게 여기지 않으시고 ‘이것은 일의 요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부장 유정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맡겨 두라.’라고 말씀하셨소. 이 일이 만약 긴급하다면 속히 국왕에게 아뢰어 부장 유정의 군영에 자문(咨文)을 보내시오. 나 역시 머지않아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니 부장 유정과 협력하여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할 것이오. 지금은 경략과 제독이 이미 돌아갔고 권한은 부장 유정의 수중에 있으니, 할 만한 일이라면 반드시 견제할 우려가 없을 것이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경성(京城)에 있을 때, 경성의 백성들이 날이 갈수록 죽어 흩어지는 것을 보았소. 국왕께서는 어떻게 구원하시고 살리려는지요? 백성들이 죽는다면 몇 년 동안은 어떻게 해볼 수도 없어서 나라의 근본이 기울 것입니다. 백성을 구휼하고 병사들을 훈련하며 화기(火器) 등을 많이 제조하는 일을 귀국에서 가장 먼저 빨리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알지는 못하겠으나, 귀국의 임금과 신하가 어떻게 뒷마무리를 잘할 수 있을까요?” 하였습니다.
말이 매우 간곡하고 줄곧 반복하여 그만두지 않았으니 척금(戚金)의 사람됨이 대단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본군의 남쪽에 주둔한 장수에게는 전송(餞送)을 하는 의례가 없었으므로, 신이 전별연에 오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척금은 용만에 머무르다가 얼마 안 되어 동로(東路)로 돌아갔습니다.
방수강구관전부 부총병(防守江口寬奠府副摠兵) 동공(佟公)은 이름이 양정(養正)이며, 호가 몽천(蒙泉)이니, 요동(遼東) 정요위(定遼衛) 사람입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데다가 천성(天性)이 자애롭고 온화하여, 줄곧 남을 구제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바름〔正〕으로 스스로를 지켜서 관하(管下) 아문(衙門)의 높고 낮은 인원들이 모두 경외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만력(萬曆) 임진년 여름 왜노(倭奴)들이 우리나라를 노략질 할 때 천자(天子)께서 장수들에게 명하여 동방을 평정하라고 하시므로, 병부 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과 제독 중군 좌도독(提督中軍左都督) 이여송(李如松)이 실로 함께 화합하여 일을 잘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에 도독첨사(都督僉事) 양원(楊元) 이하의 여러 장수들과 총병(摠兵) 및 유격(游擊) 등이 각기 자신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다 같이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의 지휘를 받아 합세하여 적을 토벌하였습니다.
이때 동양정(佟養正)은 본부(本府)
주진(主鎭)의 총병(總兵)과 군대의 기무(機務), 그리고 병사들과 말의 식량과 꼴을 대는 등의 일을 모두 관장하였는데, 온 심력을 다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미 명나라 조정에 청하여 우리나라 경내에서 시장 여는 것을 허가하여 물자와 재화가 잘 유통되도록 힘을 썼고 또한 명나라 장인(匠人)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경내에서 은(銀)을 채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니 이는 모두 우리나라를 위하여 위급한 상황을 변통한 좋은 계책이었습니다.
명나라 원외랑(員外郞) 유황상(劉黃裳)이
공장(供帳)이 오지 않았다고 화를 내며 갑자기 정주(定州
평안북도)에 들렀을 때에도, 간곡하고도 자세하게 곡절을 설명하고 따로 술과 안주를 차려
유황상의 마음을 풀었습니다.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ㆍ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ㆍ주사(主事) 애유신(艾維新) 등의 여러 장수가 조선 음식을 좋아하지 않자 중국산 닭ㆍ돼지ㆍ오리ㆍ야채를 지극히 갖추어 공급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였습니다. 산동 포정사(山東布政司) 한취선(韓取善)과 순안 어사(巡按御史) 주유한(周維翰)의 행차가 의외로 나와서 일시에 함께 본부(本府)에서는 지공(支供)을 할 도리가 없었으나, 총병 동양정이 특별히 본진(本鎭)에 보관해 두었던 다음과 같은 물건을 빌려다 차례대로 올렸습니다. 당자기(唐磁器), 탕 보시기 서른 좌(坐), 찻종지 열 개, 병 하나, 대홍색(大紅色)의 필단(匹段), 수안갑건(手案甲巾) 각 두 장, 청아(鴉靑) 초록(草綠)의 천으로 만든 요 두 채, 대홍(大紅) 초록(草綠)의 침장(寢帳) 두 벌, 아청색 초문장(綃門帳) 한 부, 주홍색 높은 다리 상 네 개, 의자 두개, 홍색 양탄자 다섯 장, 백금으로 만든 필산(筆山) 두 개, 홍흑색 벼루갑 두 개, 난간이 있는 평상, 또 백지청화자기(白地靑花磁器) 접시 서른 개, 대유촉(大油燭) 쉰 개를 증정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탕패(蕩敗)하여 긴박할 때 살 물품이 없는 사정을 특별히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군사를 일으킨 이후로 명나라 군사라고 말하는 자들이 수 없이 여염집에 드나들면서 남의 소와 말을 빼앗는 일이 있었는데, 특별히
야불수(夜不收) 5, 6명을 파견하여 일체 금지시켰으며, 특별히
천총위관(千摠委官)을 압록강과 중강(中江) 등지에 두어서 자세히 검찰하게 하고, 강 건너편 압록강 강안에서 탕참(湯站)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검색을 하여 빼앗긴 소와 말들을 찾아내어 앞뒤로 되돌려 보낸 것이 무려 40여 두에 달하였습니다.
또 독운사(督運使)로 하여금 강변에서 법을 범한 자들을 아울러 감찰하도록 한 것도 모두 총병의 계획이었습니다. 명나라 병사 중에 말이 병든 것이 있었는데 그 말이 폐사하자 스스로 원외랑(員外郞) 유황상(劉黃裳)의 가정(家丁)이라 칭하면서 병을 치료하는 사람에게서 말을 빼앗았습니다. 총병이 이를 듣고서 곧장 그 병사를 불러들여 이치에 따라 엄중히 책망하고 즉시 본래 주인에게 말을 돌려주도록 명령한 다음, 이를 원외랑에게 통보하여 도사(都司) 장삼외(張三畏)의 군전(軍前)으로 체포 송치하여 죄책을 엄히 가하여 본진(本鎭)으로 축출하여 돌려보냈습니다. 또 명나라 병사들이 인가(人家)에 기숙하면서 제멋대로 능멸과 횡포를 가하고 더러는 그릇을 부수고 더러는 재산을 약탈하여 사람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는데, 총병이 자세히 물으시고 보는 대로 끝까지 다스렸으니, 본부(本府)의 사람들이 오늘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총병의 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매번 원외랑(員外郞) 유황상(劉黃裳)ㆍ주사(主事) 애유신(艾維新)ㆍ도사(都司) 장삼외(張三畏) 등 제공(諸公) 및 함께 다녔던 장사(將士)들도 대화를 하다가 말이 우리나라 사정에 이르면 말하는 투가 애달파했기에 사람이 듣고 감동하기에 충분하였으니, 본부(本府)가 시종 큰 견책을 면하게 된 것도 모두 그 사람 덕분입니다. 중국의 상부 관청에서 으레 우리나라의 토산물을 본진(本鎭)에 요청하는 경우가 많고 본진 역시 반드시 우리나라에게 그러한 것을 내어 놓으라고 하는데, 동양정 총병은 스스로 그 본진에다
재가(齎價)를 넉넉히 갖추고 토산물을 무역하여 그 요구에 응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산물은 비록 예물로 보내는 것까지도 일체 받지 않았으니, 그러한 청렴과 절개는 앞뒤로 듣기가 참 드뭅니다.
평양 전투에서는 관하(管下)의 5백 기병을 징발하여
고원(高原)과 양덕(陽德) 두 고을의 경계에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이는 북로(北路)의 적을 방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철산(鐵山)의 구가산(丘家山)에 따로 봉화대를 설치하고 명나라 군사 네댓 명을 남겨 망루를 지키게 하고, 아울러 기마병 두 명을 배치하여 봉화대에서 북쪽 의주진(義州鎭)까지의 길 50리에 세 곳의 쉼터를 나누어 두어서 변고가 발생하면 곧장 보고를 하도록 하였으니 그가 전쟁에 임하여 일을 다루는 주밀함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가 항복한 왜적을 불러 추문(推問)할 적에는 질서가 있게 일을 처리해 조금의 흠결도 없이 적정(賊情)을 캐냅니다. 그 밖에 세세한 일들은 모두 기록하기가 어려워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일들만 기록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차비(差備) 김응운(金應雲)이 한 말도 떠도는 소문들로 입증해 보면 거의 다름이 없으니 과연 그의 말이 과장되지 않았음을 믿을 만합니다.
총병 동양정이 경성(京城)에서 이번 8월 27일 의주로 와서 신이 전위사(餞慰使)로서 송별연을 청하자 “국왕의 성의는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러나 군사들은 귀국의 지방에 폐를 끼쳤고 나는 진보(鎭保)한 힘도 별로 없는데, 어떻게 성대한 송별연의 예를 감히 받겠소.”라고 답하며 끝내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상에 술과 안주를 차려 보내드려도 받으려 하지 않다가, 역관 곽소전(郭紹全)에게 거듭 청한 뒤에야 비로소 받았습니다. 역관(譯官) 김응운(金應雲)은 총병의 차비 통사(差備通事)로서 총병을 모신 이후 근신하며 받들어 모시어 시종일관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병이 늘 칭찬하였습니다.
운량요동관둔도사 도지휘(運糧遼東管屯都司都指揮) 장삼외(張三畏)는 정료후위(定遼後衛)의 사람으로, 호가 경밀(敬密)이며, 천성이 평이하고 너그러워서 구차하게 남과 절교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래 군량의 운반을 총괄하면서 한 지방에 큰 공을 세워 온 나라 사람들이 힘을 입었습니다.
일찍이 1593년 8월 29일(경술)에 전별연을 청하였고, 9월 3일 다시 전별연을 청한 바 “처리할 일이 복잡하여 연회를 받을 겨를이 없소.”라고 대답하여 9월 12일(계해)에 다시 청하였더니 “나는 계속 남아 군량을 공급해야 하니 연회에 참여하지 못하오.”라 말하였습니다. 9월 17일(무진)에 그가 길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금 청하니 “우리 명나라의 군마가 그대 나라의 지방들을 많이 짓밟아서 마음이 매우 편치 못하여 감히 연회를 받을 수 없소.”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역관(譯官) 이응상(李應祥)으로 하여금 간절히 청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이래 대인께서 군량 운반을 관할하시며 기쁘고 편안한 정책을 펼쳐 작은 나라 조선에 큰 혜택이 있었습니다. 소방(小邦)이 어찌 감히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임금께서 배신(陪臣)을 보내어 삼가 변변치 못한 음식이라도 차려 대인께서 가시는 길을 위로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대인께서는 힘써 와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더니 이에 장삼외가 답하기를 “전별연을 받기는 미안하나 국왕께서 이처럼 마음을 써 주시니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마침내 전별연에 임하였고 신시(申時)에 예를 행하기 시작하여 밤이 깊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민여경(閔汝慶)과 부윤(府尹) 김신원(金信元)이 실제로 참석하였는데, 도사(都司) 장삼외가 첫 자리에서 만나 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함께 나아가 참석하였습니다.
밀운영 영병도사 도지휘(密雲營領兵都司都指揮) 방시휘(方時輝)는 1593년 9월 20일(신미)에 용만관(龍灣館)에 와서 머무르고 있어서 아울러 전별연의 예를 행할 것을 청하고 우리 임금께서 문안을 드린다고 고하자 “국왕의 성의(盛意)에 매우 감사드리오.”라고 대답하였으며, 연회가 베풀어졌을 때에는 서로가 예양(禮讓)하며 매우 차분하였습니다.
연회가 끝날쯤 데리고 있던, 나이 겨우 10세 되는 조그마한 아이를 보여 주며 “이 아이는 평양 전투에서 얻었소. 돌아갈 곳도 없이 구덩이에 파묻힐 것이 애처로워서 행영에 머무르도록 하고 옷과 먹을거리를 주며 여기까지 왔소. 지금 강을 건너게 되어서 배신께 아이를 부탁하는 것이오.” 하며, 홍전(紅牋) 1첩에다 그 전말을 기록하여 보여 주었습니다.
아침 자신의 가정(家丁)을 시켜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아울러 백전서(白牋書) 한 통을 보내와 신에게 치사하여서 신 또한 소첩(小帖)을 올려 감사하다고 하고, 곧장 그 아이를 본부(本府)로 보내어 양육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어 양육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 유격장 방시휘가 강을 건넌다고 하였습니다.
호 상공(胡相公)은 이름이 환(煥)이고, 호가 승천(承川)이며,
남창(南昌) 사람입니다. 중국 조정에서는 유사(儒士)로서 관직이 없는 사람을 상공(相公)이라 통칭합니다. 사람됨이 나이가 많고 학력(學力)이 있으며, 말을 하는 데 구차함이 없어서,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예양(禮讓)이 있습니다. 또 말이 왜적을 정벌하는 일에 이르면 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총병(摠兵) 유정(劉綎)이 일찍이 스승으로 섬겨서 높이 받들어 매우 존경하고 하는 말은 반드시 따랐다고 합니다. 황제의 군대가 동쪽으로 올 적에 상공(相公) 호환(胡煥)이 이를 따라 의주(義州)에 왔다가, 병 때문에 머물러 조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총병 유정의 군영에 따라가 있을 것입니다. 부윤(府尹) 김신원(金信元)과 서로 익히 잘 알고 있어 김신원이 신에게 만나 보기를 청함에 신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한 번 만나자마자 바로 서로의 속마음을 열었고 일을 논할 즈음에는 통역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 그때마다 문자를 써서 서로 보여 주셨으니, 드러내서 안 될 비밀스런 일에 대한 치밀함을 여기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 스스로 말하기를 “근래에 남쪽으로 가서 그 막부에서 총병을 따라야 할 것이니, 공들이 말할 일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모두 말하시오. 내가 가면 총병에게 당부할 것이니 아마 천분의 1이라도 보탬이 있을 것이오.” 하였습니다. 신들이 그 말을 듣고 나서 마땅히 알려야 될 것이 있어 그때마다 숨김없이 말한 것이 무려 수백 마디나 되었으나, 상공 호환이 기꺼이 들었으며, 서로 주고받기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공이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삼가 오고간 말들을 기록하여
아래에 열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