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진 양은 그릇에 옛 고향이 담겨 있는 곳.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 막걸리잔 속에 추억이 가물거린다.
찌그러진 양은 그릇에 담긴 맛갈스런 밑반찬을 안주 삼아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먹고 있으면 어릴 때 고향 마을이 떠오른다.
바늘처럼 쏟아지는 땡볕 맞으며 거머리 우글거리는 논을 메던 아버지...
아버지께서 잠시 논두렁에 앉아 순식간에 쭈욱 마시던 그 뽀오얀 막걸리가 생각난다.
땡볕에 어찌나 많이 그을렸던지 얼굴이 컴컴해 보이던 아버지.
그때 아버지께서 마시던 그 막걸리잔도 이리저리 마구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잔이었다.
휴우~ 땅이 꺼져라 한숨 내쉬던 아버지께서 마지막 한 방울 남은 막걸리까지
따르던 그 주전자도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 주전자였다.
아버지께서 안주 삼아 손으로 한 점 집어먹는 물김치가 담긴 그 냄비도
찌그러진 양은 냄비였다.
그때 나와 친구들이 송사리, 송어, 가재, 미꾸라지를 잡으러 도랑에 나갈 때
들었던 그 바께스도 찌그러진 양은 바께스였다.
배가 고플 때마다 탱자나무 가시로 열심히 파먹던 삶은 다슬기가 담긴
자그마한 그릇도 찌그러진 양은 그릇이었다.
잊을만 하면 가위질을 해대며 마을에 나타나는 그 엿쟁이와 엿을 바꿔먹던
쇠붙이도 다 찌그러진 양은 그릇이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 초가집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있었던 우리 마을에서
찌그러지지 않은 반듯한 그릇은 아예 없는 것만 같았다.
우리 마을 사람들의 삶도, 아버지 어머니의 삶도 온통 찌그러져 있는 것만 같았다.
앉았다 일어서면 양은 그릇처럼 노오란 별들이 반짝거렸다.
나와 친구들의 삶도 가난과 함께 이리저리 찌그러져 있었다.
울퉁불퉁한 양은 막걸리잔 속에 듬뿍 담긴 젖빛 막걸리
이리저리 마구 찌그러진 양은주전자 주둥이를 타고 찰랑찰랑 넘쳐 흐르는
노르스럼한 막걸리...
우리네 가난한 서민들의 힘겨운 삶처럼 울퉁불퉁한 양은 막걸리잔에 뿌옇게
따라지는 젖빛 막걸리...
고향의 흔적과 어머니의 손맛이 듬뿍 묻어나는 밑반찬,
동그란 양철 탁자 위에 듬성듬성 놓인 맛갈스런 밑반찬 또한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
그릇에 담겨 있다.
장독에서 오래 묵어 약간 시큼한 맛이 나는 물김치 한 점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다가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 그릇에 입을 대고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신다.
찌그러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싸악 다 비우고 나자 속이 얼얼해지면서
술기운이 짜리하게 퍼진다.
그래.
바로 이 시원하고도 짜릿한 맛 때문에 아버지께서도 그 지독한 무더위와
고된 농삿일을 이겨낸 게 아니겠는가.
톡 쏘는 듯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막걸리...
찌그러진 노오란 양은 주전자와 뿌우연 막걸리.
찌그러진 막걸리잔과 찌그러진 냄비 속에서 옛 고향의 흔적과 추억을 차분하게
더듬어 볼 수 있는 막걸리집.
어릴 때 발가벗고 놀았던 친구들과 어머니, 아버지, 고향 어르신들의
살가운 목소리가 도란도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