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년, 건설완료와 더불어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중해 최고의 부를 자랑하던 콘스탄티노플. 하지만, 이 도시는 유럽진출의 발판이라는것과, 무역의 중심지라는 것에서 끝없이 시달려야만 했다.
비잔티움제국은 만지케르트 전투(1071) 에서 아군의 장군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로마누스 4세는 포로가되고 그 배신한 장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광활한 동쪽땅을 이슬람세력에게 주었다. 물론 전쟁을 끝내고 자신의 야욕을 실현하기위해 그런것이었겠지만, 그 소아시아지방의 아나톨리아는 비잔틴인구의 70%가 살고있었고, 따라서 군사와 인재의 중심지였다. 이 곳을 빼앗기자 비잔틴은 금세 약화되었고,
13세기쯤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빼앗겨 니케아로 수도를 바꾸기에 이른다.
하지만 1261년 미카엘 팔라이올로구스(Michael VIII Palaiologus) 는 콘스탄티노플을 빼앗은 라틴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라이올로구스 왕조를 성립시켜, 미카엘8세로 즉위한다.
미카엘 8세는 왕조를 새로 세웠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를 강화 시키기위해, 연합하다가 배신하여 죽이고 죽이고를 거듭하여, byzantine 이란 형용사는 이 교묘함에서 나와서, 음흉한 이라는 뜻이로 사용된다. 따라서 비잔틴제국이란 말은 근.현대 최고의 역사가인 에드워드기번의 비잔티움제국을 낮추어본데에서 나온 말이다.
아무튼 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도 다른 왕조처럼 처음에는 번성하다가 역시 끝으로 가면 갈수록 안으로 썩어들어가서, 내분에 시달리게되지만, 겉에서는 왕권을 잘 지켜나가는듯 보였다.
그렇게 무너져내리던 비잔티움제국은 마누엘2세 팔라이올로구스(재위1391-1425)~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구스(재위1448~1453) 때에 잠시 회복세를 보일듯 했지만.
마누엘의 장남이자, 콘스탄티 11세의 큰 형인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구스(재위1425~1448)이 앙카라전투로 오스만투르크가 잠시 해체된 찬스를 놓쳐버려서 회복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1448년, 격렬한 종교내전속에서 마누엘2세의 4남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살고있던 집에서 왕관을 받아 대관식을 치르지 못하고 황제로 즉위하게된다.
이 황제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황제답게 훌륭하고 고결한 인품을 지녔다고한다.
그는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마호메트2세의 그리스할양을 거부하고, 콘스탄티노플 방어전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노플은 자신을 키워준 소중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만투르크에서는 이미 1만5천의 재니세리(jenicery,예니체리 혹은 재니세리. 오스만 투르크의 정예직속 근위대.) 를 콘스탄티노플주위에 포진하였다.
단 3천명의 비잔틴용병은 재니세리를 격퇴시킨다. 이에 놀란 마호메트2세는 우르반의거포70문(1453년에 제작됨, 헝가리의 우르바누스가 제작한 대포, 길이9m, 한발장전시 2시간 소요.) 으로 성벽의 여러부분을 공격했지만, 역시 부를 자랑하는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금세 수리를 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내항인 골든혼도 사슬로 막아버렸다. 항구를 열어 교역하다가 적들에게 입항을 허용하느니 차라리 문을 닫아버리는게 낫다는 것이다.
12주동안 대포로 공격해오다 도저히 파괴가 불가능하자, 마호메트2세는 또 전략을 바꾸어, 이번에는 성벽을 한부분을 집중공격하여 성벽을 완전히 파괴해버리기로하고 새벽부터 공격해왔다. 드디어 한밤중에 성벽을 부서졌고, 재니세리 2명이 들어왔다. 재니세리2명은 마호메트의 묘를 발견하고 승리의 징조로 받아들였고, 5월 21일의 완전월식은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의 기를 축 빠지게 해버렸다. 달이 뜨는한 콘스탄티노플은 영원하다라는 말이 퍼졌는데 월식이 일어났기때문이다. 그로부터 4일후, 모든것을 체념한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에서는 마지막 예배가 행해졌고, 오스만 투르크에서는 봉쇄된 곤골든혼으로 들어오기 위해 산에 종이를 깔아 배를 끌어서 배30척을 이동시키는데 성곡하고, 그렇게 잠입하게된 재니세리들은 하루동안의 혈전으로 3천명의 비잔틴용병의 방어선을 뚫게되었다. 그렇게 3일간의 약탈,방화,전투등으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피란민으로 가득차게되었고, 성에 입성한 마호메트2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하기아 소피아성당을 모스크로 만들어버렸다.
콘스탄티11세는 전투중에 죽었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한 가정집주위의 땅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보라색과 비잔틴을 상징하는 쌍두독수리가 새겨진 신발을 신은 머리없는 유해가 발견됨으로서, 증명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다. 수십개의 창과 화살을 맞고 죽어서 그것에 감명받은 투르크전사들이 장례를 치루어 졌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노플도 그와 같이 멸당하고, 지금도 투르크족의 이스탄불로 존재한다......
최초의 기독교 도시로서 고대 문화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과정을 장엄하고도 감동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은 1453년에 벌어진 투르크족과의 공방전과 그 전후 상황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지루한 이론보다는 공방전 당시의 드라마틱한 상황이 압축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실제 모습이 이보다 더 정확하고 감동적으로 묘사된 예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서방의 원조를 기다리며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황제와 영웅적 분투를 아끼지 않은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투쟁담, 정치적으로 쇠락하는 시기에도 찬란하게 꽃피어난 비잔티움 문화, ‘정복자’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집념, 함락 전 하기아 소피아(소피아 대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는 절박한 시민들의 모습,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오는 투르크족의 기세, 동서 교회의 오랜 갈등과 대립, 주변국들의 어정쩡한 태도, 동방정교회의 신비주의적 분위기, 체념적 운명론자인가 하면 또 불굴의 전사이기도 한 비잔티움인들의 상반된 모습, 너무도 안타깝고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아 절로 탄식이 새어나오는 전투 장면들, 승자와 패자, 이 모든 것들이 격조 높은 역사가의 안목으로 박진감 있게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런치만은 영국이 자랑하는 비잔티움 역사 연구의 일인자로 전체적인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독자들은 한 편의 전쟁영화를 보듯 서스펜스와 스릴, 페이소스를 맛보며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탁월한 학술적 가치와 수준 높은 품격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수많은 사료들을 참고하며 성실하고도 정확하게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비잔티움을 ‘추잡한 미신의 간막극’이라 말하며 노골적으로 무시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나온 지도 2세기가 지났고, 그 동안 비잔티움 제국을 경멸적으로 바라본 서양 사학계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은 이런 반성을 넘어 지금까지 서방에서 홀대받아온 비잔티움 제국을 새로운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본 책이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저자 : 스티븐 런치만 경(1903~2000)
비잔티움 제국사와 십자군 역사 연구의 일인자로 손꼽히는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이자 언어학자다. 1903년 영국 노섬벌랜드에서 출생하여 이튼 컬리지의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캠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언어에 두각을 나타내, 불과 11살의 나이에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등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잠깐 강의를 하기도 했으나 부친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뒤로는 집필과 여행을 하기 위해 강의를 그만두었다.
런치만이 학자로서의 명성을 전 세계에 떨치기 시작한 것은 3권으로 된 저작 『십자군 역사』를 1951~1955년에 걸쳐 내놓으면서부터였다. 이어서 나온 『동방정교회의 분리』 『시칠리아의 만종』『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역시 많은 찬사를 받았다. 마지막 작품, 『한 여행자의 알파벳』은 1991년에 출간되었다.
집필 활동 외에도 런치만은 영국과 미국 대학들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했고, 대영 박물관,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 런던 도서관에서도 역사 연구를 했다. 1958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그리스와 불가리아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명예훈장을 받았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연구 활동에 전념하다 2000년 11월 1일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가 사망하자 전 세계의 언론은 앞다투어 애도를 표했고, 영국의<더 타임스>와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장문의 추도사를 싣기도 했다.
역자 : 이순호
홍익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주로 외국인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주립대학에서 유럽사와 미국사를 포함한 서양사 일반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사를 영화와 연계시켜 공부하던 중 미국 현대사를 많이 다룬 올리버 스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의 전기를 한국으로 가져와 번역 출간했다. 옮긴 책으로는 『살라딘』 『로버트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 『시간의 딸』 『문신의 역사』, 『올리버 스톤』 등이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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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해가 지는 제국
2장 떠오르는 술탄의 나라
3장 황제와 술탄
4장 서방 원조의 대가
5장 포위전의 준비
6장 포위전의 시작
7장 골든 혼의 상실
8장 꺼져가는 희망
9장 비잔티움의 마지막 날들
10장 콘스탄티노플 함락
11장 정복당한 사람들의 운명
12장 유럽과 정복자 술탄
13장 살아남은 사람들
부록
콘스탄티노플 함락사 연구에 쓰인 주요 사료
함락 후 콘스탄티노플 교회들의 운명
비잔티움 제국 연표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통치자
비잔티움 왕조의 가계도
옮긴이의 말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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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미디어 리뷰
• 미디어 리뷰
최초 기독교도시의 흥망 감동적 서술 | 국민일보 책과길 장지영 기자 | 2004-09-10 |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은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건설한 도시다. 최초의 기독교 도시인 이곳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리된 이후 동로마 제국,즉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서 무려 1100여년간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 및 지식을 보존하고 다양한 예술과 철학을 장려,세계의 수도로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제국에 함락됨으로써 서방 기독교 세계와 단절된다. ‘로마제국 쇠망사’로 유명한 에드워드 기번마저도 비잔티움 제국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하지만 저자 영국의 역사학자인 스티븐 런치만은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서양에서 홀대받아온 비잔티움 제국사를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1453 콘스탄티노플...' | 매일경제 허연의 북카페 | 2004-09-11 |
터키는 유럽대륙에 속한 나라이면서도 이슬람 국가다. 인종도 유럽인종과는 근 본적으로 다른 투르크족이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흔히 돌궐족이라고 배운 민족 이다. 남아시아계 이슬람 민족의 나라인 터키는 꽤 오랫동안 유럽대륙의 일원이었다. 축구도 유럽연맹에 소속되어 있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 를 유지해오고 있다. 민족적 종교적 동질성이 약한 터키가 어떻게 기독교 문명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는 도시 때 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은 현재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불이다. 콘스탄티노플 이전 에는 비잔티움으로 불리던 로마문명의 중심도시였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인 보스포러스 해협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서기 330 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도시다. 동양 과 서양이 만나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은 번창했다.
콘스탄티노플 은 1100년이라는 세월 동안 로마문명의 꽃이었고, 유럽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러나 역사는 화려한 풍요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그냥 두지 않았다. 세력을 확대하던 이슬람을 신봉하는 투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을 탐내기 시작한 것이다 . 투르크의 왕으로 서방원정을 시작한 21살의 메메드 2세는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콘스탄티노플뿐" 이라고 외치며 전쟁을 선포했다. 결국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성 꼭대기에 투르크 제국의 깃발이 걸리면서 화려했던 비잔 티움문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스티븐 런치만은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에 서 역사의 분기점이 된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치밀한 다큐멘터리로 재현한다. 유럽문명과 아시아문명이 정면으로 충돌한 이 사건 이후 유럽문명의 상징인 콘 스탄티노플을 손에 넣은 터키는 유럽의 일원이 됐고, 함락 당시 콘스탄티노플 을 탈출한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다른 도시로 퍼져 나가면서 유럽대륙은 르네상 스를 맞이하게 된다. 책에서 만나는 건 역사의 비정함이다. 피비린내 나는 격변을 통해 다음 시대의 밑그림을 그려주는 역사의 그 비정함 말이다.
버림받은 제국의 장엄한 대서사시 | 한겨레 책과사람 구본준 기자 | 2004-09-11 |
1453년 5월 28일, 비잔티움 제국 곧 동로마제국 그 자체인 항구도시 콘스탄티노플은 7000명의 병력에 의지하며 8만 명에 이르는 오스만 투르크의 대군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스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7주가 넘도록 용케 이슬람 군단의 집중 포화를 견뎌내면서 조금만 기다리면 형제 기독교 국가들의 원군이 도착할 것이란 믿음으로 자신들의 기독교 국가를 지켜내고 있었다. 권좌에 오르자마자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에 모든 것을 걸고 공격을 시작한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로선 조급해지기 시작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기습공격을 마치고 돌아온 비잔티움 돌격대원 하나가 성벽 모서리의 비상문 빗장을 잠그는 것을 그만 깜빡 잊고 말았다. 이를 눈치 챈 투르크군은 성의 내부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이튿날인 29일 도시는 마침내 점령당했다.
1000년 대제국은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독일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저서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다뤘던 바로 그 장면, 동로마제국 최후의 모습이다. 동로마제국은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최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이름과 비슷한 사람이 될 것”이란 예언처럼 콘스탄티노스 황제 대에 멸망했다. 정복자의 향연이 끝난 뒤 술탄은 동로마제국의 옛 수도에 찬란한 새 수도를 건설했고, 도시는 기독교의 도시에서 무슬림의 도시로, 그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바뀌지 않았다.
츠바이크의 말처럼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그토록 집착했던 정복자 술탄 메메드2세의 ‘광기’와, 비상문을 잠그는 것을 잊은 돌격대원의 실수라는 ‘우연’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또한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서 볼 때 당연하고 또한 사소한 사건일 수도 있다. 한 때 이 도시의 멸망으로 중세라는 역사 단계가 끝났으며, 동로마의 소멸로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르네상스가 시작됐다고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요즘 역사 관점에서 볼 때 비잔티움 제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쇠락해 어차피 망할 나라였고, 르네상스 역시 동로마제국 몰락 이전에 이미 진행 중이었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최후는 그저 식물인간이 된 제국의 입에서 산소호흡기를 떼어버린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최후의 순간에 펼쳐진 이야기까지 그저 그런 옛이야기였을까? 그 속에 들어있는 인간 군상의 드라마는 역사 속 수 많은 전쟁 이야기의 하나였을 뿐일까?
동로마제국은 그동안 ‘잊혀진 제국’이었다. 역사적 의미를 떠나 서구 유럽은 그 당시에나 지금에나 무려 1000여 년 넘게 애써 이 제국의 존재를 외면해왔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로마의 적통을 유일하게 계승한 것이 동로마제국이었음에도 서구의 눈으로 볼 때 동로마는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가까운 이질적 존재였다. 같은 기독교를 믿었지만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가톨릭과는 다른 정교회를 고집하는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동로마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이후 지금까지 이어졌다. 에드워드 기번 같은 로마사 전문 역사가들은 비잔티움을 역사의 막간극 정도로 치부했고, 이런 서구중심 역사관은 세계로 뻗어나가 동로마제국의 역사적 존재감을 지워버리고 있다.
지은이 스티븐 런치만(1903~2000)은 이같은 서구 관점에서 벗어나 동로마제국이란 주제를 다룬 영국의 역사학자다. 런치만은 비잔티움 최후를 그린 이 책에서 서유럽이 비잔티움 문명을 시기했으며, 베네치아 등 비잔티움제국의 동맹국들과 교황 등 형제 기독교 세력들이 비잔티움제국의 위기를 외면해 동로마는 결국 홀로 처절하게 저항하다 사라졌다고 역설한다. 또한 이 도시를 저버린 세력들이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지만 결국 잊어버리는 쪽을 택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오지 않을 원군을 기다리며 외롭게 투쟁한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백성들을 독려하며 헌신한 동로마 황제와 투르크 제국의 존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야만 했던 술탄의 대결이자 기독교와 무슬림의 대결,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과 투르크 사람들의 대결에 대한 장렬하고 드라마틱한 서사시다. 영화를 연상케 하는 생생한 포위전 이야기는 제국 최후의 시민들의 용맹이 왜 정복자 술탄마저 감동시켰고, 술탄이 질서가 회복된 뒤 그리스 백성을 좀더 공정히 대하게 되었는지를 절로 깨닫게 만든다.
오! 신이시여, 동로마를 구해주소서 | 동아일보 책의 향기 허문명 기자 | 2004-09-11 |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동서로 갈라진 중세 로마제국 중 동방제국을 동로마제국(330∼1453년)이라고 한다. 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0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후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 비잔티온에 제2의 로마 수도를 짓고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거리라는 뜻)이라 명명한다.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가르는 보스포루스 서쪽 입구에 건설된 이 도시는 동양과 지중해 사이 해상로와 유럽과 아시아 사이 육로의 교차점에 있었다.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과 상품들로 넘쳐났다. 한창때인 12세기에는 인구 100만명이 살 정도였다. 그러나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튀르크제국 술탄 메메트 2세의 점령으로 멸망했다.
동로마제국은 서양사에서 푸대접을 받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믿고 싶은 로마는 476년에 끝난 고대 로마뿐이었다.
이 책은 1453년에 벌어진 튀르크족과의 공방전과 그 전후 상황에 초점을 맞춰 지금까지 서방에서 홀대받아 온 동로마제국을 새로운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로마제국의 원년을 아우구스투스가 등극한 기원전 27년으로 잡는다면,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동서 로마를 막론하고 로마제국 1480년의 사직이 무너진 역사적 사건이다.
영국이 자랑하는 동로마 역사연구의 일인자 스티븐 런치만(1903∼2000년)은 한 편의 전쟁영화 시나리오를 쓰듯이 서스펜스와 스릴, 페이소스에 방대한 자료를 버무려 품격과 재미를 갖춘 이 역사서를 펴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실제가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서방의 원조를 기다리며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황제와 영웅적 분투를 아끼지 않은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투쟁, 정치적으로 쇠락하는 시기에도 찬란하게 꽃 피어난 문화, ‘정복자’ 메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집념, 함락 전 소피아 대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는 시민들의 절박한 모습,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오는 튀르크족의 기세, 동서 교회의 오랜 갈등과 대립, 주변국들의 어정쩡한 태도, 동방정교회의 신비주의적 분위기, 처한 상황에 따라 체념적 운명론과 불굴의 전사로 갈린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은 가혹한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우리네 삶으로 읽힌다.
이순호씨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고대 서양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의 최후는 흥망성쇠 생로병사의 순환 고리를 갖는 인간사의 종말과 비유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았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옛 로마의 광휘란 찾아 볼 수 없다. 흥망성쇠를 거스를 수 없던, 외롭고 처절하게 투쟁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시공을 뛰어넘은 인간적 비애와 연민을 느낀다’고 밝혔다.
비잔틴 제국의 최후는 | 조선일보 Books | 2004-09-18 |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드라마처럼 그린 교양 역사서.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와 그의 신민들, 그에 맞서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사이에 벌어진 영웅적 전투와 비극적 죽음이 현장 중계되듯 이어진다. 성이 함락되기 전 성 소피아 대성당에 모여 구원의 기도를 드리던 시민들의 절박한 모습, 함락 이후 소피아 대성당을 파괴하려는 부하들을 제지할 줄 알았던 술탄 메메드2세의 결정이 모두 감동적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인문지리적 지식을 곁들였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는 칼과 화살만으로 싸웠던 '기사들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우르바누스에게 거액을 주고 대포를 제작하게 했죠. 우리나라도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상이 극심한데 기술의 진보를 무시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 배워야 할 겁니다.
신간이라 도서관에서 구하기 어려울 지도..스티븐 런치만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은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좀 다르더군요. 책의 행간에서 느낀 건데..전자는 비잔틴 사람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줬고, 후자는 오스만 투르크의 강력한 공격을 좀 더 부각시킨 것 같아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서양과 동양 간의 한판 승부라서 영국학자와 일본작가의 관점이 서로 차이가 있는 건가? 다크킬러님이 말씀하신대로 투르크는 전함을 육지로 운반해 북쪽 금각만으로 옮겼고, 해군과 육군의 병사가 함께 성벽을 돌파하는 인해전술에서 정복왕 메메드2세의 집념이 무섭다는 건 실감했음.
본시 해운 전통이 없던 투르크 인지라 그래도 타 해운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전함의 크기가 작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래봐야 전함이 전함인지라 크긴 무지하게 컸겠지만요... 그나저나 제 생각엔 금각만을 쇠사슬로 막아놓을 생각을 한 비잔틴 쪽도 대단하더군요... 좁다해도 거길 쇠사슬로 막으려면 그 쇠가 얼마겠습니
치우천님 콘스탄티누스11세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국고는 완전히 텅 비고 수비군은 8천가량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2만명의 서유럽 구원군은 전멸, 성에 기대는 수 밖에 없었죠. 대포300문과 육상군 20만 함선 400척을 수비군 8000으로 막으려 한 데서 이미 콘스탄티누스11세는 죽을을 예감하지 않았을까요? 체통을 버리
첫댓글 술탄 메메드(마호메트) 2세가 난공불락인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파괴할 때 사용한 대포가 바로 우르반의거포. 미디블 토탈워의 포병유닛'밤발드'나 '모탈'과 비슷한 것 같군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대포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사실상 중세가 끝난 셈..
딴건몰라도 배가지고 산을 넘엇다는것이 정말 경이롭기만합니다..
3차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 공방전이 3년이었지만,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불과 두 달만에 끝났음.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통찰력이 있었다면 견고한 성벽에 의존하지 말고, 헝가리 기술자 우르바누스가 제안한 청동 대포 개발 계획을 수용해야만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는 칼과 화살만으로 싸웠던 '기사들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우르바누스에게 거액을 주고 대포를 제작하게 했죠. 우리나라도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상이 극심한데 기술의 진보를 무시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 배워야 할 겁니다.
이 책 신간인가요? 빌릴수 있다면 도서실에서 빌려봐야겠군요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현 한국 사회의 이공계 기피 현상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책재밌긴하더이다, 치우천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두달이었던가요..기억이 가물가물하군요, 그책좀찾아봐야겠는데 어디있는지원..
신간이라 도서관에서 구하기 어려울 지도..스티븐 런치만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은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좀 다르더군요. 책의 행간에서 느낀 건데..전자는 비잔틴 사람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줬고, 후자는 오스만 투르크의 강력한 공격을 좀 더 부각시킨 것 같아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서양과 동양 간의 한판 승부라서 영국학자와 일본작가의 관점이 서로 차이가 있는 건가? 다크킬러님이 말씀하신대로 투르크는 전함을 육지로 운반해 북쪽 금각만으로 옮겼고, 해군과 육군의 병사가 함께 성벽을 돌파하는 인해전술에서 정복왕 메메드2세의 집념이 무섭다는 건 실감했음.
본시 해운 전통이 없던 투르크 인지라 그래도 타 해운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전함의 크기가 작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래봐야 전함이 전함인지라 크긴 무지하게 컸겠지만요... 그나저나 제 생각엔 금각만을 쇠사슬로 막아놓을 생각을 한 비잔틴 쪽도 대단하더군요... 좁다해도 거길 쇠사슬로 막으려면 그 쇠가 얼마겠습니
까. 만들다 지쳐 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일것 같더군요...--;;;
전 치우천님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네요.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우르반의 말을 수용할 수 없었던 이유는 결정적인 자금부족이었습니다... !!!
그리고 저책이 신간이면서, 이번에 무슨 인문독후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 중에 하나더군요. 그래서 불티나게 팔리더군요.
책 사긴 글렀네요..(어차피 돈도 없다) 다만 이런 류의 책이 앞뒤 사정에 대한 이해 없이 100% 느낄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1000년 아틸라도 콘스탄티노플 뚫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적은 없던걸로 아는데요. 1204년과 1453년 이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적은 없는걸로 압니다만...(그리고 1000년이라면 아틸라가 활동하는 시기도 아니죠.
아틸라는 콘스탄티노플로 가려다가 말고 서로마 지역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즉 공격한 적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 적어도 사료상으론...
그리고 만을 사슬로 막는 방법은 적어도 제가아는 바론 유럽쪽에선 많이 쓰였습니다. 아마 동양에서도 쓰이지 않았을까하지만 이건 정확히 모르겠고, 어쨋든 로마 시절에도 쓰였습니다. 금각만이 얼마나 넓은 지는 모르겠으나 항구방어시 쓰인 전략중 하나.
하나 더 제가 생각하기론 우르반의 대포가 있었든 없었든 이미 로마제국이 진게임이었습니다. 방어병력이 5000명도 안되는 상황에서라면 꼭 터키가 아니더라도 질 가능성이 높은데, 게다가 당시로선 거의 무한인력의 터키였으니...말이 무한이지 졸병들이 불쌍타..ㅡ.ㅡ
치우천님 콘스탄티누스11세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국고는 완전히 텅 비고 수비군은 8천가량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2만명의 서유럽 구원군은 전멸, 성에 기대는 수 밖에 없었죠. 대포300문과 육상군 20만 함선 400척을 수비군 8000으로 막으려 한 데서 이미 콘스탄티누스11세는 죽을을 예감하지 않았을까요? 체통을 버리
면서까지 교황에게 카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하면서까지 구원군을 요청했지만.. 결국 1200년 역사에 맞는 장렬한 최후였죠.. 애초에 성벽에 기대는 순간부터 이길 가능성은 0% 니....
아 엘 테무르님 님께서 잘못 알고 계신겁니다. 아틸라는 콘스탄티노플의 2중성벽을 뚫지 못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1200년 역사중 세워진지 900년만인 1204년에 한번 그로부터 200년후인 1453년 밖에 없습니다. 아틸라는 대신 조공물을 두둑히 챙겨갔지요
,MTW2에서는 콘스탄티노플도 성벽 하나밖에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