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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0년 10월 4일 연중 27주일(군인주일)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군인주일 담화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본당 신부님들과 신자 여러분!
저는 올해 군인 주일을 맞아 담화문 대신, 전국의 모든 본당 신부님들과 신자 여러분께 직접 드리는 호소 형태의 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의 이런 결정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고통 받고 있는 ‘코로나19’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추석 명절과 올해 군인 주일이 겹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 군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를 갖고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경우, 대부분의 손자와 손녀들, 아들과 딸들이 의무 사병으로서 혹은 부사관과 장교로서 국방의 소임을 위해 복무했거나 현재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평화를 유지함에 있어 우리나라의 안보가 지극히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온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라의 안보가 튼튼히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녀들의 군 복무 현실과 더불어 나라 안전의 방패요 기초가 되는 안보의 중요성을 알고 계시기에, 자연스레 군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신뢰심을 갖고 계시며, 그래서 군의 복음화에, 특히 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젊은 병사들에게, 크나큰 관심을 갖고 격려해주시고 여러 면으로 저희 군종교구를 도와주고 계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전파의 큰 업적을 남기신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흥미롭게도 당신이 지극히 사랑하고 신뢰한 사도 티모테오를 군인으로 간주하면서 복음전파에 투신하라고 권고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사도 티모테오에게 보내신 둘째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훌륭한 군사답게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군대에 복무하는 이가 자기를 군사로 뽑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개인의 일상사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2티모 2,3-4)라고 권고하시고, 이어서 복음 선포를 명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2티모 4,2-5)
사도 성 바오로와 같은 생각으로 군의 복음화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이들이 바로 군인 신분의 군종 사제들입니다. 저는 저희 군종 사제들의 군에 대한 구원의 말씀 선포와 군 신자들의 영신 생활을 돌보는 수고와 희생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1월 말부터 시작하여 2월 중순부터 무서운 기세로 확진자와 사망자를 늘리기 시작한 ‘코로나19’로 인해, 저희 군종 사제들과 군종교구에서 사목하는 수녀님들과 병사들에게 교리 봉사를 하는 평신도 선교사들과 저는 복음화 수행에 너무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저희 군종교구는 일반 교구와 달리 군 당국의 매우 엄격한 방역 지침을 따라야 하기에, 일반 교구보다 더 오랜 기간 주일미사 중지 및 여타 교회 활동 중지를 겪게 되었습니다. 올해 2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미사를 포함한 교회 활동이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군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이 중단되었습니다. 여기에다 2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예비자 교리가 모두 중단되었으며, 2월 중순부터 시작된 저의 본당 사목방문 중지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아마도 올해 말까지 중지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기며, 결국 올해 2월 중순부터 올해 말까지 사목방문 때 늘 있던 군인들 및 군 가족들과의 형제애 넘치는 만남과 매우 중요한 성사인 견진성사 집전도 어려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난 3년 간 군 세례자가 많이 줄어 고민을 해왔는데, 올해는 이 전염병으로 인해 군 세례자가 전에 비해 더욱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고, 견진성사 수혜자도 90% 정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적인 면에서 그리고 재정적인 면에서 참 어려운 한 해가 되고 있어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다가 올해의 군인 주일은 추석 명절 연휴 마지막에 있게 되어 어려움이 한층 더 커지고 있습니다. 저희 군종교구의 일 년 예산 대부분이 이 군인 주일에 전국의 신자 여러분이 봉헌하는 2차 헌금에서 옵니다. 추석 명절이라 군종 신부님들이 본교구에 운전하여 가는 것도 어렵지만, 군 당국도 이 전염병 때문에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고, 신부님들도 멀리 여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인 주일 미사 봉헌을 위해 방문한 지역에 만약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 그 군종 신부님은 부대에 돌아와 2주간 자가 격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군종 신부님들이 올해 군인 주일에 본교구의 본당에 파견되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올해 군인 주일에 신부님들을 본교구나 혹은 요청에 의해 본교구가 아닌 다른 교구에 파견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군종후원회 봉사자들이 여러 본당에 파견되어 봉사하는 것도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국의 모든 본당 신부님들과 신자 여러분께 이 어려움을 알려드리면서, 2차 헌금을 변함없이 너그러이 해 주시고, 군종후원회의 후원회원 모집에 보다 많은 신자분들께서 응답해주시길 호소하는 마음으로 요청드립니다. 저는 이 어려움 속에 제53회 군인 주일을 맞이하면서, 전국의 본당 신부님들과 신자 여러분께서 군 복음화를 위해 계속 기도해주시고 후원해주시기를 겸손히 그리고 간절히 요청드립니다. 여러분 사랑의 희생과 협력이 하나의 큰 기적을 이루게 되길 주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영육 간 건강과 내적 평화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본당 신부님들과 신자 여러분! 코로나19의 위험에서 건강을 잘 지키시고, 이 시련의 때에 오히려 성화의 길로 더욱더 나아가시길 기도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20년 10월 4일 제53회 군인 주일에,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F. 하비에르 주교 드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저작권 안내 - http://www.cbck.or.kr/Copyright]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4,6-9
형제 여러분,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8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9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축일: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St.FRANCIS of Assisi
San Francesco d’Assisi Patrono d’Italia
Assisi, 1182 - Assisi, la sera del 3 ottobre 1226
(1181 at Assisi, Umbria, Italy as Francis Bernardone
-4 October 1226 at Portiuncula, Italy)
Canonized:1228 by Pope Gregory IX
성 프란치스코, 부제, 세 수도회의 창설자, 대축일
1181(l182?)년 아씨시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청년 시절의 가벼운 생활에서 마음을 돌이켜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민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뜻을 같이 하는 형제들이 모여와 작은형제회가 시작되었다.
클라라 관상 수녀회와 재속회를 세우고 이교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했다. 성인으로부터 새로이 발견된 복음적 생활양식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수도 공동체로 발전되었다.
성인이 시작한 수도생활의 이 새로운 형태는 신앙적 기초 위에서 세상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교회에 가져왔고,
당시 교회의 교계제도를 거부하면서가지 성행하던 청빈운동에 바른길을 제시하였다.
1224년 라베르나 산에서 관상하던 중 주님의 거룩한 오상을 받아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그리스도처럼 되었다.
1226년 10월 3일 아씨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2 년 후인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유해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전에 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를 놀라게 하고 교회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작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을 옹색한 자의주의자(字意主義者)로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모든 것을 기쁘게, 아무런 제한이나 한 조각 자존심 따위로 없이 실천함으로써 모든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젊은 프란치스코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자신의 경박한 생활이 허무함을 깨달았다. 기도는 힘든 일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우도록 프란치스코를 이끌어 갔고 결국 길에서 만난 나병환자를 끌어안을 정도로 그를 변화시켰다. 이것이 결정적인 회개였다.
"프란치스코야, 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
버림받은 성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은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하게 가난뱅이가 되었고 비천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나의 집을 지어라."는 말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허물어져 가는 성당의 벽돌을 한 장씩 쌓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가난뱅이로 있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그는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물건을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앞에서 옷까지 벗어버림으로써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였으며 마침내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는 그가 문전걸식하며 돌아다니자 옛 친구들은 그의 무모한 짓을 보고 그를 미친 수도자 취급을 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 너희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도 가지지 말며 여행 가방도 신도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맨 처음 규칙은 복음의 구절들을 모은 것이었다. 그는 수도원을 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자 이 수도원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적 절차를 받아들였다. 교회에 대한 그의 헌신과 충성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여러 가지 개혁 운동이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고 있던 당시에는 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는 기도에 완전히 헌신하는 생활과 복음을 설교하는 활동적인 생활 모두를 병행하다가 결국 복음 설교에 더 중점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할 수 있을 때는 고독한 기도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는 시리아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지만 파선과 질병으로 모두 좌절되었다. 그는 제4차 십자군 원정 중에 터키의 술탄을 회개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비교적 짧았던(그는 44세에 세상을 떠남) 그의 말년에는 눈이 거의 멀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그는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상처를 실제로 느끼는 오상을 받았다.
임종 때에 그는 태양의 노래 마지막 부분을 말했다.
"오! 주님, 찬미 받으소서. 우리 누이인 죽음이 다가왔나이다."
그는 시편 141편을 노래하고 마지막에는 그의 장상에게 마지막 순간이 오면 자기의 옷을 벗겨서 주님을 본받아 땅 위에 벌거벗은 채로 누워 운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 www.ofmconv.or.kr
10월 4일은 성 프란치스코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중병으로 쇠잔하여 모진 고통을 당하며 죽음에까지 다다르자, 그는 자신을 알몸으로 맨땅에 눕히게 하였다... 그렇게 땅바닥에 뉘어진 채 그는 거친 옷을 벗고 습관대로 얼굴을 하늘로 향하였다. 그의 온 신경을 하늘의 영광에 쏟으며, 그는 오른쪽 옆구리의 상처를 왼손으로 감싸서 보이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내가 할 일을 마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이 할 일을 가르쳐 주시기를 빕니다.’”(첼라노 제 2생애 216항).
“형제들이 오열하였고, 위로할 길 없는 신음에 빠져 있는 동안에, 거룩하신 사부님은 그에게 빵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가 강복을 하고 빵을 떼어 작은 조각들을 각 형제들에게 먹으라고 나누어 주었다. 복음서도 가지고 오게 하여 요한복음을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부터 읽으라고 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주께서 그의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으로 거행하신 지극히 거룩한 만찬을 경건히 되새기며 자기 형제들에게 지니고 있던 깊은 사랑을 보였다. 그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며칠 동안을,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동료들에게 자기와 함께 그리스도를 찬미하자고 가르치며 찬미로 보냈다.
그가 온 힘을 다하여 다음 시편을 노래하였다:
‘목소리 높여 주께 부르짖나이다. 소리소리 지르며 주께 비옵나이다.’
그는 모든 피조물에게 권유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였고, 전에 그가 지은 노래를 빌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그들을 열심히 일깨웠다.
그는 누구에게나 소름끼치는 일이고 저주스럽기만 한 일인 죽음 그것을 찬미하도록 하였고,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하여 자기 안에 죽음이 머물도록 초대하였다:
‘나의 자매 죽음이여, 어서 오십시오.’”(첼라노 제 2생애 217항).
"주님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선보다
자기를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선을 더 많이 자랑하지 않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권고17)
프란치스꼬는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뽀르찌운꿀라에서 임종했다. 2년 뒤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프란치스꼬의 유해는 성 지오르지오(Giorgio)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30년에 지금의 프란치스꼬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모든 프란치스코 형제들과 재속 회원들과 모든 프란치스칸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