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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니까
마 22:15-22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 22:15-22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막12:13-17,눅20:20-26] 바리새파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말씀에서 트집을 잡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까 하고 모여서 궁리를 하였다. 16) 그래서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런 질문을 시켰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시고 또 누가 두려워서 말을 못하거나 사람의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는 일 없이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17) 이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로마 정부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18) 예수께서는 그들의 간교한 생각을 아시고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내게 보여라.' 그들이 데나리온 한닢을 가져다가 보여 드리자 20)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21) `가이사의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22)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라 당황하면서 떠났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더 인정받고 많은 사람이 따르자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흠집을 내려고 당시 첨예한 논쟁거리였던 납세 문제를 가지고 질문하였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15-18) 본문의 특징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함께 예수님께 논쟁을 걸어온 점입니다. 이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헤롯 당원들에게는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찬성하였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는 문제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서로 연합하여 예수님께 논쟁을 거는 모습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에서는 하나가 되는 악한 자들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이사에 대한 납세 질문은 예수님을 매우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든지 한쪽 편에는 배척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들은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려고 질문하였기 때문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19-22)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로마 황제가 발행한 동전인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동전에는 황제의 초상과 황제를 신의 아들로 묘사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로마 동전을 사용하는 것은 십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온 동전을 내보이며,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는 것, 그 자체를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 로마 동전을 사용하는 상황을 인정하시고,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한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한 납세를 핑계로 십일조와 성전세와 헌물 등을 바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황제에게 온전한 세금을 납부하고, 하나님에게도 온전한 헌금을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적용: 성도들은 세금을 낼 때 바르게 하고, 헌금할 때도 바르게 해야 합니다. 당신은 온전한 세금과 온전한 헌금을 하고 계십니까?
존 뉴턴’ 목사는 임종 직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에 놀라는 일이 세 번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천국에서 만나게 될 때이고, 두 번째는 내가 마땅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며, 세 번째는 나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깜짝 놀랄 것이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6-27)
< 설 교 >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마 22:15-22 / 박신진 목사
3년째 극성을 부리는 코로나 전염병이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어제부터 외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코로나검사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조건을 완화하였다. 이렇게 해나가다가 정말 이른바 ‘위드코로나’ 되어서, 마스크 쓰기, 거리 두기, 소독하기 등의 불편함을 벗어나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그러나 코로나가 극복되었다고 방역당국이 말할 때까지는 절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겠지? 오늘 설교는 2년 전에 써놓았다가 하지 못한 설교인데, 지금에도 아주 중요한 신앙문제이기 때문에 조금 고쳐 설교한다.
2년 전에 감신학보를 보았는데, 이쪽 면 저쪽 면에 두 칼럼 글이 서로 다른 입장에서 오늘의 현실을 보고 있었다. 한 칼럼은 세속권력이 코로나바이러스를 핑계하여 기독교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탄압하고 있으니 기독교인들은 정신을 차리고 이런 때일수록 예배에 더욱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다른 칼럼은 교회는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의 전염병과 전쟁 때에 세상을 지키고 돌보는 역할을 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거짓된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되니, 앞장서서 예배를 멈추어 비대면 예배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감리교회 안에서도 이 문제는 심각한 논쟁이 되었다. 어떤 목사님은 대면예배를 몇 주 못드리고 나서는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다면서, 절대 다음부터는 대면예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하였다. 강릉의 어떤 목사님은 코로나 이후 한 주도 대면예배를 안 드린 적이 없다고 하더라. 나는 이런 태도에는 세상 권력에 기독교가 지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가 하면 서울의 어떤 목사님은 두세 달이나 예배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전염병의 위험에서 지키는 데 앞장서고 있으며, 교회가 어렵지만 교우들도 다 이해하고 한 마음이 되어 비대면 영상예배를 드리며 사회적 거리두기에 힘쓰고 있다고 하더라.
성실한 크리스천은 이런 문제가 고민스럽다. 이 문제는 사회와 교회의 관계성의 문제요, 현실 정치와 정치가, 공직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살 것이냐 하는 실제적인 문제와도 연관이 되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에 있어서 거룩한 나라인 교회와 세속의 나라인 사회 사이에서 어떤 입장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과 국가는 불완전하고 죄에 매여있으며 따를 수 없는 악한 권력이라고 보면, 우리는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항거해야 마땅할 것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도 우리는 정부나 공무원에 협조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에만 치중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만약 이 세상과 국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이 세상 질서를 잘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선한 양심의 길이기도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세속 정부나 공무원들의 지침을 잘 따라 행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이 세상에서 참되게 사는 것일까?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나?
오늘 본문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듣기 좋은 말로 짐짓 예수님을 칭찬한 뒤에 묻는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들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나? 그러자 예수님이 세금 낼 돈을 보이라고 하시며, 데나리온 하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러자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다. 요즘 황제가 없고 황제에게 세금 낼 일도 없으니까 별로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씀 같지만, 우리의 사회생활, 시민으로서의 생활에 대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세금을 어떻게 할 거냐? 이것은 ‘세상 권력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해?’ 하는 문제이다. 바울은 롬13:1-7에서 세금문제, 더 나아가 황제와 세상권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다룰 때, 세상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고 한다. 조세를 바치는 것도 하나님의 사역자에게 할 마땅한 일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이 일에 항상 힘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은 기존 권력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의무를 다함으로 정부 말만 잘 듣는 보수 여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로마서 13장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질서에 지배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정치적 영역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 그 배경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각 사람이 국가 권력에 복종함으로 사회적 질서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의 사법적 권력을 통해 선이 포상받고 악이 징벌받으며 사람들의 기본생활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국가에는 다양한 대표자들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응당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세상권력에는 협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국가와 도시의 시민으로서 마땅한 의무와 역할을 다해야 한다. 시민의 역할을 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는 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집은 저 하늘에 있다. 세상은 잠시 머물 곳이요, 세상나라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항상 부족하고 죄의 지배를 받는 나라이다. 우리는 크고 완전한 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 때, 종말론적 태도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그게 뭐냐 하면, 종말이 곧 온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며 철저한 믿음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우리나라에서 믿음 좋다는 크리스천은 거의 종말론적 입장에 서서 하나님 뜻에만 합당하게 살면 된다는 입장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대로 순수하고 철저하게 신의 도시만 바라보며 살아도 되는가? 그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을 현실부적응자들로 만들고, 오늘의 교회를 세상 속에 있는 외딴 섬으로 만들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올인하며 거룩한 기준으로만 살 것이냐, 동시에 세상에서 선한 시민으로 살 것이냐? 그것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사는 한 거룩한 도성인 교회와 세속의 도성인 사회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는, 두 도시 사이에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요즘 한편으로 코로나바이러스 방역에 앞장서는 사람들 입장과 한편으로 정부정책에 반하더라도 예배를 드리고 세상질서에 거스르겠다는 사람들 입장 사이에서, 이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의 어느 교회를 담임하고 교회연합단체의 회장까지 역임한 한 목사가 교회와 신앙의 입장만을 강조하면서 정부와 사회의 다수와 대적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던 것을 보면서 크리스천들이 당황하는 것은 바로 이런 때문이다.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간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지고 이루기 힘쓰나, 동시에 죄 많은 현실 사회에서 해야 할 선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데나리온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자. 예수님은 그 유명한 선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를 외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의 것만 하면 되니, 가이사 황제의 것, 즉 세속생활은 신경쓰지 말라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 도시의 황제에게도 해야 할 의무를 해야하고, 거룩한 도시의 주님께도 마땅한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지만, 이 땅 위에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다.
여기 데나리온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 가지 돈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시장과 직장, 혹은 관청에는 데나리온을 써야 했다. 반면 그들이 성전으로 나와 하나님께 예배할 때는 로마의 화폐로 드려서는 안 되었다. 거기에는 황제의 상이 있으므로, 소지하는 것 자체가 율법에 어긋난다. 그들은 성전에 나올 때 성전에서 쓸 수 있는 화폐, 세겔을 가지고 나와야 했다. 그들은 데나리온을 버릴 수도 없었고, 세겔을 버릴 수도 없었다. 세상에서는 데나리온을 썼다. 경제활동을 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로마라는 현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황제의 상이 새겨진 데나리온 화폐를 가지고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전에서 하나님께 헌금할 때는 세겔을 사용했다. 그들이 하나님께 헌금하면서 우상인 황제의 상이 그려진 돈으로 드릴 수는 없었다.
제국의 정치는 데나리온을 요구하고,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세겔을 필요로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득불 두 세상의 요구를 들으며 살았던 것이다. 로마의 화폐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세속 정치에 굴복하는 것인가? 로마제국과 기독교제국을 대립되는 개념으로만 보지말라! 어거스틴은 ‘거룩한 도시’라는 책에서, 거룩한 도성과 세속도시를 말하면서,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거룩한 도성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똑같이 살지만, 속이 다른 사람이다. 거룩한 도시의 개념과 사상,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거룩한 도시의 개념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고 더 반듯하게 서도록 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현실을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현실을 바로 잡고 더욱 살아있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사실 이 땅위의 제국과 도시는 누가 세웠나? 인간이?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문제는 이 세속도시가 완전하지 않고 타락되었다는 데 있다. 세상의 제국과 도시는 인간의 욕심과 폭력, 거짓과 싸움이 난무한다. 성도는 제국과 도시의 시민으로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굴복은 아니다. 계21장을 보면, 종말론적 새예루살렘 도시의 미래는 바로 현재의 제국과 도시를 변화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선교의 비전이자 종말론적 신앙의 완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고, 세상의 의무와 질서를 따르면서, 세상을 이용하고 세상에 적용해야 한다. 세상 황제, 권력자, 부자는 세상 로마의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하며 백성들을 통치하였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세금이다. 유대인들과 당시 로마의 이방 사람들은 로마의 보호 아래 살았다. 바울의 복음도 로마의 대로를 따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원칙을 따라 세계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세속 문명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할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하다.
예수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속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인정하신다. 그당시 급진파 젤롯당은 로마황제에 내는 세금을 반대하고, 절대 타협불가를 외치며 싸웠다. 예수와 예수의 교회는 로마황제에 내는 세금을 반대하는 젤롯당은 아니다. 그러나 젤롯당에게 배울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간직하고 우선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나라 질서와 꿈을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 가운데 살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삶의 우선되는 일이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파묻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거룩한 도성의 꿈을 잃어버리고 세속의 도시에 모든 것을 바쳐버린다. 요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속한다! 바울이 그들을 향해 안타까이 외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20)
하나님의 것이 무엇일까?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숨결인 생명이다. 생명 속에 영원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의 초월존재가 깃들어 있다. 곧 태초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형상이다. 세상의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과 창조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생명과 영원을 보호하고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영생과 지혜를 전하기 위해 교회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 엄한 율법도 듣고 조정하고 새로 세워가면서.
야곱의 열두 형제 중 제일 촉망받았던 사람이 단연 요셉이다. 그가 결혼할 때 이집트 여인 아스낫과 하는데, 기원전 1세기 문헌 중에 ‘요셉과 아스낫’이란 문헌을 보면,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려 하니 율법에 위배되었다. 이방여인과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요셉은 아스낫을 이방 여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아스낫은 일주일 금식했다. 하나님은 아스낫을 받아주셨고 천사를 보내어 아스낫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선포해주셨다. 요셉의 가정은 그렇게 다문화가족으로 출발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이집트 총리의 아들이었으니 금수저 가족인 셈이었다. 구약 율법은 거룩한 원리, 변할 수 없는 확고한 규례를 적어놓았으나, 자세히 살피면 거룩과 세속의 지속적인 연합과 조정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있다. 그 엄한 율법도 조정하고 새로 세워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가운데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고 살았다. 거룩한 율법 말씀은 하늘과 땅, 거룩과 세속의 역동적이고 긴장감 있는 타협의 결과에 다름이 아니다.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한 내용이 중심에 들어가 있는 산상설교를 보라. ‘옛사람은 이렇게 말하였거니와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우리들이 볼 때는 너무 높은 윤리, 보통 사람들이 지키기에는 어려운 기준을 세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당시 예수님 말씀을 산위에서 들었던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님이 너무 푹신한 이불을 사람들에게 깔아준다’고 보았다. 그렇게 율법을 무르게 지키다가는 뭐가 남겠는가! 좀 엄하게 확실히 지켜야지! 하였을 것이다. 마태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값싸게 약속한 나머지 불법이 성할까봐 걱정하지 않았을까! 거룩한 타협, 창조적인 조합이 필요하다!
오늘 성경이 하려는 말씀은?
오늘 성경이 하는 말씀은, ‘우리는 두 도성 앞에 서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할 때에도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발은 이 땅 위에 서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땅에서 거룩한 백성의 삶을 바로 살 것인가? 우리는 거룩한 도시,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속 도시, 대한민국 삼척시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세상의 법, 세상의 상거래, 세상의 방역 질서, 세상의 교육체계를 따라 살아야 하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종말에 이뤄질 하나님 질서에 맞게 사는 것, 거룩한 기준에 올인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크리스찬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대립하고 있는 두 세계를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서기 251년, 홍역이 로마제국을 강타했을 때, 사람들은 큰 고통과 불안을 겪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마을은 적막해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기독교가 크게 부흥했다고 한다. 당대의 기독교인들은 지쳐있던 이들에게 천국의 소망으로 위로와 치유를 베풀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펴서 아픈 자들을 간호하고 봉사했다. 이러한 사랑과 구제의 현장을 지켜본 율리우스 황제는 원래 기독교를 미워했었으나, 그 마음을 바꾸어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교도들에게도 간호를 베풀며 다른 사람들도 품을 수 있는 종교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고난의 시절에 전염병을 대하는 교회의 모습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시민들이 승리하는 비결이었다. *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마 22:15-22 / 박지온 목사
본문 말씀에는 아주 고차원 적인 어떤 시험에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제목을 오늘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라 했습니다. 사실은 제일 어려운 시험이 웃으면서 다가오는 시험, 또 뭔가 좋은 것으로서 다가오는 시험, 뒤에는 더 무섭고 또 죽음의 숨겨져 있는데도 웃고 좋은 것으로 다가오는 시험!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제일 무서운 시험이 아예 뿔을 달고 다가오는 사단의 역사가 아니고, 천사로 접근하는 사단의 역사가 가장 어려운 시험이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 나온 헤롯 당과 바리새파들의 합당입니다. 말하자면 둘이 협조해 가지고 오랜동안 의논하고 논의해서 나온 아주 악날한 시험이 되겠죠. 그러면서 무슨 시험을 하느냐 하면, 본문 말씀대로 칭찬을 장황하게 해 놓습니다. 16절 말씀에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맞는 말인데도 아첨을 하고 있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외식하는 말입니다.
바리새파 혹은 헤롯 당원들이 합작을 해서, 본인들은 나서지 아니하고 하수인들, 일꾼들을 시켜서 이렇게 예수님을 아주 치켜세우면서 죽이려고 하는 이런 어떤 그 내포된 시험입니다. 그래서 이 시험에 배경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악하다!' 그랬습니다. '악하다! 외식하는 자다!' 그렇게 표현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내용은 사실은 유대인들이 이 일이 있기 100년 전에 벌써 로마에 속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속국이 되어 있으면서 로마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이런 때에, 바리새인들이 속국이 되어있는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해 가지고 시험을 하는데, 우리가 일제치하에 있었던 것처럼, 일제치하에는 일본에 세금 안내고, 일본에 뭘 내라고 그러면 안내고 숨기고 이런 것을 애국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노예근성 그럴 때는 바로 이런 문제거든요.
우리나라가 지금도 나라 살림에서 어려운 것이 뭐냐하면, 나라에 내려고 그러면 될 수 있으면 안 내려고 하는 것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노예근성이라 그럽니다. 제가 미국에 가 보면서 느낀 것은 뭐냐하면, 그 사람들은 세금 많이 내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거든요. 기쁨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세금 내는 것을 굉장히 수치로 알고 있어요. 그냥 세금을 될 수 있으면 안 내고, 떼어먹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도적놈이라 그러죠. 그런데 그것을 기쁘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아마 일제치하에 어떤 노예근성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인 의식을 가지고 많이 내고, 국가가 되도록 많이 밀고, 그 다음에 또 내가 노후에 내가 또 보장을 받고, 이런 떳떳한 과정이 아니고, 이런 것이 바로 그런 문제죠.
그런데 이런 어떤 배경이 되어서, 어떤 유대인들이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을 수치로 알고 세금 안 내는 것을, 그렇게 뭔가 애국하는 것으로 알고 보는 이런 때입니다. 이런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리를 그렇게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세리가 내는 헌금도 안 받았어요. 교회에서도 유대교에서는 '세리가 내는 헌금을 안 받았다!' 성경에 그랬어요. 성경에 보면, '세리와 창기의 헌금을 안 받았다!' 그랬거든요. 왜냐하면 세금을 받아 가지고는 로마에 갖다 바친다고 그런 어떤 배경입니다. 이런 때에 세금을 내는 것이 가합니까? 불가합니까? 이렇게 물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했느냐 하면, '그러면 너희가 갖고 있는 돈이 뭐냐? 가져오너라!' 말하자면, '세 돈이 뭐냐?' 그랬습니다. 세금을 내는 돈! 그때 그 세금을 낼 때에 로마화폐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내는 돈이 데나리온인데 그 데나리온을 가지고 왔습니다.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로마화폐의 동전으로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한 데나리온이 하루 노동자의 품삯입니다. 가치로 말해서는 우리나라 돈으로 한 5만원 정도입니다. 요즘 많이 받는 사람은 7만원, 또 적게 받는 사람은 3만원 받는다고 그러는데 대략 한 5만원 정도, 그러면 노동자 품삯이니까!
그래서 이 데나리온을 가지고 오니까, 그때 그 데나리온의 새겨져 있는 상이 우리나라는 세종대왕상이나 이런 게 있는데 거기에는 가이사입니다. '이 화상이, 그림이 누구냐?' '가이사입니다!' 그러니까! '글이 누구 글이냐?' '로마 글입니다!' 그럴 때에 하신 말씀이,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뭐 너무 변명할 수 없는 대답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돌아갔더라! 그렇게 한 것이 오늘 본문에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뭔가 중요한 몇 가지를 잡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뭐냐하면,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는 말입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이것만 믿고, 이것만 확인이 되어도 우리 신앙생활이 바로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꾸 사기 치려고 그러고, 외식하려고 그러고, 또 거짓말하려고 그러고, 그러니까 성경에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더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있다! 그러면서도 거짓말하는 자!' 그렇게 보면 어떤 면에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참 믿음의 어떤 근본을 못 가지게 되면 진짜 어리석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악하고 악한 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 18절 말씀에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시험하는 것을, 우리 주님께 나와서 시험하는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다 아셨습니다. 모르실 이가 없잖아요! 다 아시고, 그리고 그 심보도 알고, 배경도 알고, 그들이 뭘 의도하는지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와서 웃으면서 살랑거릴 때에, '외식하는 자들아, 악한 자들아!' 어떤 면에서 차라리 막 다가와 가지고 성내면서 덤벼드는 것보다도, 이것은 슥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악하고 더 악날하죠. 여러분들이 먼저 이 점을 좀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나의 형편도 아시고, 나의 문제도 아시고, 나의 모든 것 다 아십니다. 내 하나님은 잘 안 믿는 것도 아시고, 외식하는 것도 아시고, 거짓말하는 것도 아시고, 그런 것도 아십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나오시면서 제일 뭘 느끼느냐 하면, 정말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고 있느냐?'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응답이 안 된다! 기도가 왜 안 되느냐? 할 것 없어요. 진실하지 못해서 그래요. 진실하지 못한 배경이 하나님이 믿어지지 못하니까! 진실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오셨다! 나오셔 가지고, '하나님!' 그럴 때에, '하나님!' 그러니까, 아버지 부를 때에 아버지를 나의 대상으로 확실히 안 믿어지는데 뭐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기도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구하는 것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이게 '안 된다!' 그러면 전부 여러분 가식 아닙니까?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조차도 전부 가식입니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정말 하나님 나의 모든 것, 나의 형편, 나의 것, 다 아시는 어떤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죽고 살릴 수 있는 하나님! 내 양심도 아시는 하나님! 다 아십니다. 여기에 조금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도, 하나님 앞에 응답 '받는다, 안 받는다!' 이것은 그 다음에 문제로 올릴 필요조차 없다! 그렇게 봅니다.
교회 와서 내가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 뭘 한다! 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바로 하느냐? 거짓말하느냐? 양심으로 하느냐? 진짜 전심으로 하느냐? 아니면 가식으로 하느냐? 위선이냐? 외식하는 자냐? 다 아십니다. 그러면 다 알 것 아닙니까! 여러분 뭐 어디 이런 저런 할 이야기가 없어요. 중심으로 조금만 하나님 앞에 섰다!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역사가 나오죠.
그래서 흔히 그럽니다. 제일 답답한 것이 상담을 하거나 뭘 하다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참, 다른 사람은 내 이런 고통을 모릅니다!' 그러더라 구요. '나만 이런 것을 받는다!'고 이래요. 그래서 그걸 들어보면 다른 사람도 다 그런 것을 받아요. 다 그런 것을 겪고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나만 맨 날 이렇냐?' 그게 참 어렵거든요. 그때 보면 얼굴이 그렇게 고독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어요 자기 혼자 세상 짐을 다 지고있는 사람처럼... 우리가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나만 그럴 때에 한가지 하나님도 다 아십니다. 여러분 '어렵다! 힘들다!' 왜 모릅니까? 다 아십니다. 그러면 문제는 달라져 버려요.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뭐 '오해를 받는다, 뭘 받는다!' 오해받고 할 것도 없어요. '하나님은 다 아신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이 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기도가 달라져 버려요.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하나님은 내 마음도 아시고, 내 중심도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이 지금 입으로 변명하려고 하지 마시고, 입으로 뭘 말하려고 그러지 마시고, 이 자리에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나와 어떤 관계 속에, 하나님이 나를 어느 정도로 아시고, 내가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느냐? 이것만 이해가 되면 이해되는 만큼 하나님이 축복하신다! 안 하신다는 것은, 나는 그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왜? 자꾸 '축복한다!'고 그러니까, 이건 뭔가 늘 무심히 들려지는 것 같아요. '축복 받아라!' 늘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이 '그냥 말하네...' 이 말이 엄청난 말인데도, 너무 무심히 들어요. 어쩔 때는 이 메시지를 하다가도 워낙 보통으로 알아들으니까, 화가 나기도 하고 그래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말씀하고 싶은 것은,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섰느냐? 나의 통치자가 누가 되어 있느냐? 이것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될 필요가 있죠.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오라!'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확인시킨 것이 뭐냐하면, '너희가 지금 누구의 통치를 받고 있느냐?' 그걸 확인시켜 준겁니다. 데나리온을 갖고 와서, '이 글과 화상이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러면 '가이사에게 바치라!' 그 말이 뭐냐? '너희들은 지금 가이사의 다스림과 가이사의 노예 속에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 당연히 뭡니까? '그대로 순종해 나가라!' 저는 그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이 진리가 안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 어떤 것을 보느냐하면, 국가 시책에 제일 많이 비판하고, '산업선교!' 그래서 산업현장에서 많이 비판하고, 이런 분들이 옛날에 기독교인들이 참 많았거든요. 거의 그런데 성경에 원리는 뭐냐하면,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노예로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 노예로 '다스리는 자에게 순종하라!' 그 로마서에 보면, '정치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뭐냐하면요. 기독교인들이 어떤 산업선교라는 어떤 좋은 선교의 모임으로 통해서 뭐냐하면, 그 기업에 말하자면, 그 주인에게 어떤 항거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에 진짜 원리는 아닙니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들에게 협조하고 거치는 것이 되지 말라!' 이것이 성경에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뭔가 될 수 있으면, 국가에서 뭘 하려고 하는 것은 안 하려고 그러고, 뭔가 국가에서 하는 일에 비 협조가 된다! 그것은 성경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이걸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어떤 자리에 먼저 서야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말씀을 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가이사의 통치를 받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응당히 가이사의 통치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죠. 여러분과 제가 오늘 누구의 통치를 받느냐? 이 눈이 열리는 것을 성경은, '영적인 눈이 떠졌다!' 그럽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거의 많은 경우 이게 잘 안되었어요. 그래서 이런 눈이 안 열리고 신앙 생활하게 될 때에 우리가 어디에 빠지느냐 하면, 자신도 모르게 '율법에 빠진다! 신비에 빠진다!' 그런 배경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눈이 안 열리고 우리가 자녀를 교육한다! 뭔가 이렇게 가정을 다스린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도 모르게 뭐냐하면, 열심을 낼수록 다른 데로 빠집니다. 다른 데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안 되어있는 상황에서 '뭘 한다!' 전부 다른 열매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 지난주에 말씀드렸죠.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께서는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었지 만은 결국 어떤 열매가 맺혔어요? 들 포도 열매가 맺혔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심어줬는데 종교 열매를 맺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이 전부 지금 여기에 있는 배경이거든요. 그러면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조금 전에 미국에서 신봉준 목사님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오늘 주일날인데 목사님 건강하십니까?' 그러면서 '저는 이제 교인들의 기도 속에서 사역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이제 이야기를 하다가, '가서 지난번과 다른 어떤 문제점들이 있느냐?' 이러니까! '다른 것은 다 하시려고 애를 쓰는데, 지금까지 교회에서 메시지 듣고 갖고, 메시지 가지고 치유하고 이러니까, 그 메시지 붙들고 막 치유 받고 그 메시지대로 하려고 애를 쓰더라!' 그래요.
애를 쓰고 참 좋은데, 그런데 신 목사님 이야기가 뭐냐하면, '중요한 한가지가 좀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그게 뭐냐하면, 생명이 구체적으로 임해야 되는데, 이게 이제 생명을 못 받고, 구원에 대한 감격과 축복이 이해가 안되고, 쉽게 말해서 복음이 이해 안된 상황에서 말씀을 받아 가지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를 쓰니까! 그걸 받아 가지고 실천하고, 그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하니까, 이게 뭔가 더 어려워지는 겁니다. 중요한 문제죠.
여러분 그 아이가 죽어버렸는데, 아무리 옷을 잘 입히면 뭐합니까? 아이 죽었는데 다가 귀고리하고 목걸이 해놓고 안 되는 겁니다. 문제는 뭐냐? 살려놓아야 돼요. 생명이 살아야 다 되는 겁니다. 그때는 생명이 살아버렸다! 옷 못 입어도 예쁘기만 해요. 금방 낳은 아이들은 생긴 것이 이상하잖아요. 나는 금방 낳은 아이를 보니까 진짜 이상하더라 구요. 그런데도 생명이 있는 것 때문에 그게 얼마나 귀엽습니까! 그게 생명이 나와 관계 있다는 이유 때문에 더 귀엽습니다. 여러분 뭔가 저 남의 아이들은 보면, 핏덩이 별로 예쁜 것도 없어요. 이상하게 보이죠. 그런데 그게 '내 손자다, 내 아이다!' 눈이 이상해져 버립니다. 완전히 한 껍질 덥힌 것이지. 그게 그렇게 사랑스러워 질 수 없는 거잖아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죽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입혀도 소용이 없어요. 살아버려야 됩니다. 생명이 주어져야 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이 정말 이점을 좀 붙잡아야됩니다. 내가 교회 와서 신앙생활 잘 하려고 백 번, 천 번 노력해도,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 안 되었다!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점을 조금 더 말씀을 드리면, 영적 문제가 여러분 인식이 되어야 됩니다. 내가 지금 본질적으로 어디에 속해 있느냐?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이 점치고, 안 믿는 사람들이 우상에 절하고, 그건 당연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어요. 안 그러면 더 못사는데, 안 믿으면... 부지런히 우상숭배하고, 부지런히 절하고, 그래야 돼요. 그래야, 그래도 뭔가 생명이 붙어있고, 그래도 뭔가 살아갈 수 있어요.
거기에서 빠져나왔다! 해방 받는 것 아닙니까! 운명과 죽음과 멸망과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것 아닙니까! 누구로 말미암아?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안된 상황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계속해서 오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과 괴로움에서부터 빠져 나올 수 없어요. 그리고 집안과 가문에서 내려오는 저주와 재앙에서부터 해방 받을 수 없습니다. 빠져 나올 수 없어요. 개인이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실패를 한번만 혹시 했다! 그러면 이해가 되지만, 거듭 거듭 실패가 온다! 그것은 배경이 벌써 다른 겁니다. 뭔가 근본 문제를 바로 봐야 됩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니면서, 아니 교회를 내가 몇 년 다녔던 간에 계속해서 고통이 밀려옵니다. 그것은 근본문제가 안된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 다녀서, 아무리 '내가 잘하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열심히 새벽기도 안 해서 그런가 보다!' 새벽기도 나오지 말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열심히 기도하지 말라는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근본문제가 해결이 안되어 있는데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죽는다! 이겁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말이 간단한 말이지만, 이게 엄청난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망하고 싶어서 망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내가 재앙 속에 있고 싶어서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영적인 문제가 보여진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나를 다스리는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내가 사단의 손아귀에서부터 헤어나지 못했다!' 그 이야기가 사단의 다스림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원래의 자리에 있었던 부분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여기에 있는 한은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이게 해결이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도 응답이 없습니다. 왜, 기도응답이 없느냐? 그래가지고 막 밤새도록 기도하고, 밤새도록 기도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근본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는데 기도할수록 더 고생입니다. 왜, 응답이 없어요. 응답하고도 남죠. 조금만 진실해 보세요. 이 기본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것이 해결이 안되면 안될수록 뭐냐하면, 점점 더 하는 것만큼 더 어려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더 고통스럽고 더 괴롭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 그럽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이 배경이,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이 순간 얼마나 위대한 역사가 나오느냐? 간단하거든요. 실패하고, 망하고, 저주 속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길이, 그 배경이 사단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단의 세력이기 때문에, 막 욕한다고 사단이 물러가지 않거든요. 욕한다고 물러갈 것 같으면 연구하면서 욕하겠어요. 그런다고 물러가지 않거든요. 눈을 부릅뜬다고 날 겁내서 물러갈 수 있느냐? 그러면 눈을 이상하게 떠 가지고 별 짓을 다 해보겠습니다. 그런다고 물러가는 게 아닙니다. 돈 때문에 물러간다! 아닙니다. 돈 때문에 더 덤벼들지 물러가는 게 아닙니다. 명예나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여러분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여기에 '귀중성과 가치에 눈이 열렸다!' 하는 것이, 여기에 눈이 열렸다! 그겁니다. 왜? 사단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이외에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어렵다, 힘들다, 문제 생겼다!' '돈 벌면 해결된다! 뭘 하면 해결된다!' 아닙니다. 여러분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실적인 믿음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기본적인 이것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쉬운 문제인데도, 이게 별로 쉬운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그 성경에 보면 바울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주의 영광을 위해서하라!' 굉장히 어려운 것처럼 생각되거든요. 바울처럼 하려면 어려운데... 왜? '주안에서, 주안에서, 주안에서...' 그럴 때에 굉장히 어려운 것처럼 생각이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만 해결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 딱 여러분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진심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이 자녀가 됐다고 하는 순간부터 뭐가 안 오느냐 하면, 사건과 일과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도 모르게 뭐가 나오느냐? '주여!'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여!' 나옵니다. 그게 근본적으로 이것이 확실히 안되어 있으면, 사건과 일이나 문제가 나올 때마다, '주여!' 그러기 전에 내 머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내 수단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일이 생기면, 먼저 내 머리가 팽팽, 팽팽 돌아가잖아요. 나도 모르게 내 머리가 돌아가는 데로 합니다. 한참 하다가 '아이고, 기도 안 했구나! 한번 물어보고 하자!' 이렇게 되어도 벌써 늦어요. 그게 벌써 나를 잡고 있는 실제적인 지배자는 뭡니까? 다른 배경이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게 안 되어있다! 그럴 때는 아무리 일을 잘 처리 해놓고, 뭔가 되는 것처럼 해도, 열매는 다른 열매가 나옵니다. 여러분 좀 등신 같고, 잘 안 되는 것 같고, 일이 안 되는 것 같아도, 문제나 사건과 일이 생길 때마다 나도 모르게, '주여!' 주님 바라보고, 그렇게 되면 일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여러분 분명히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 열매는 엄청난 축복과 은혜로 나옵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말씀했습니다 만은, 여러분 자동차에 앉을 때에, '하나님, 사고 안 나고, 뭐 안 나고...'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어요. 왜? 그런다고 사고 안 나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기도한다고 해서 사고 안 나고, 내가 뭔가 기도한다고 해서 내가 바라는 어떤 것이 안나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동차에 딱 앉았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성령으로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그런 중에도 나도 모르게 하다보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사고가 날수도 있고, 그러나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반드시 열매는 축복으로 맺어진다! 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인도 받게 될 때에, 그때부터 뭐냐? 저주와 재앙이 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되어있을 때는 잘 되는 것 같아도 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저주와 재앙에 주인이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런 일이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성공했다!'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또 이 자리에 서 있으면서, '나는 실패했다!' 그렇게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미안한 말인지 모르겠고, 건방진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은, 나는 '성공했다!'고 싶은 생각이 더 있지, '실패했다!'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러면 그 동안에 내가 살아오면서 '좋은 일만 생겼다!' 아니거든요. 여러 가지 상상 못할 어려움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뭐 혼자만 들어 누워 있어도 그런데, 둘이 교통사고 나가지고, 이등실에 가 가지고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 친구 목사님들이 오셔서, '여긴 뭐 새삼스럽게 신혼 여행 하냐?' 그러면서, 그것도 2월 11일인가, 완전히 죽었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오면서 뭘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으냐 하면, 하나님이 모든 사건과 일을 통해서 축복으로 인도해 주셨지, 그게 고통과 괴로움과 저주로 끝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 배경에는 나는 뭘 말씀하고 싶으냐 하면, 잘하든, 못하든, 일단 앉든, 서든, 가든, 시작하든 일이나 사건들 생길 때마다 먼저 주님을 바라봤습니다. '주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을 이루실수 있다!' 이 믿음 하나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 암아 하나님의 인도 받으면서 살았다!' 그것이 내가 '생각이나 마음이나 어떤 큰 일을 했다!' 그런 게 아니고, '내 생각과 마음속에 나의 진짜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이, 나의 삶 속에서 적은 일에도 늘 확인하며 살았다!' 맞습니다! 열매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이 지금 분명히 성경에 말씀했잖아요. '나를 실제로 다스리시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나를 저주와 재앙으로 이끌어 가는 사단의 배경이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그 적은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적은 고백이 여러분과 저를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책임지고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뭡니까? '자긍심, 자부심 가져라!'는 말이 그것이거든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게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말씀했죠. 받아합시다. "나는 극상품 포도나무다!" 가짜가 아닙니다. 들 포도가 아닙니다. 극상품 포도나무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귀히 여기고 하나님께서 울타리를 쳐 주셨잖아요. 교회를 주셨고, 교리를 주셨고, 그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집도 주셨고, 그것도 울타리예요.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자식들도 주셨고, 여러 가지 부도 주셨고, 여러 가지 먹고 마실 수 있는 물질도 주셨고, 그것도 다 울타리입니다. 그래가지고 극상품 포도 나무열매를 맺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 나가십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래서 우리가 순간, 순간 이 고백이, 사건과 문제가 올 때마다 다른 이름은 없어요 이 땅에 오직 천하인간에 한가지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만 축복과 은혜로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언약에 서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그렇게 인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나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훈련도 시키신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씀했습니다. '영적인 문제, 내가 소속되어 있는 문제!' 이것을 빨리 인정하고 시인되어야 됩니다. 정신문제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하면, 자기를 시인하지 않아요. 이것만 시인되면 해결되어요. 뭐 반 이상 해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말씀하신 것처럼 딱 시험하러 왔을 때에, '시험하러 왔구나!' 이걸 아는 것만 해도 벌서 반 이상 해결입니다. 여러분 정신적인 문제는, '아, 이게 흑암이 나한테 왔구나! 내가 지금 소속이 이렇게 되었구나!' 이것만 알아도 벌써 반 이상 해결입니다. 이걸 모르면 아무리 애를 쓰고, 아무리 메시지를 줘도 안 들어가요. 이것만 해결되면...
그래서 '흑암에 세력이구나!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다! 이 죄와 사망의 법이 그 법이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구나!' 이것만 알면 자연적으로 필요한 것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 요구가 됩니다. 그리고 '참, 이 이름뿐이구나!' 이해가 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의 적은 문제나 적은 사건 속에서도 나도 모르게, '아, 예수 그리스도!' 그게 간단하게 '축복이다!' 그게 아닙니다. 엄청난 여러분 생애와 문제를 바꾸어 버리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거기에 모든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이해되고, 이것이 확인되는 만큼 그 다음에 다 풀려 나간다니까요.
이런 배경 속에서 교회에 앉아서 기도할수록, 이런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실천할수록, 이런 배경 속에서 주의 말씀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갈수록 힘이 되는 겁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시나니!' 그런데 이것이 안되거든, 안 되는 그런 문제라면, 이 말씀 듣는 동안에 이것이 안되었다 그러면, 말씀이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고, 이 말씀 가지고 한 주간 기도도 안 될 겁니다. 근본 이 문제가 해결되면, '내가 말씀가지고 붙잡고 기도해야지!' 이런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저절로 말씀이 붙잡혀 져서 기도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가 나오느냐? 기도할 때마다 힘이 나오게 되는, 사실적인 역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뭐라 그랬습니까? '바치라!' 그랬거든요. 바치라 그랬는데, 바치라는 그런 말을 조금 이렇게 유의해서 보면, 바치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이런 것이 되고, 영어로는 'Give' 한다 아니면, '드려라!' 이렇게 되는데, 원래 그 원문에 의미는 '∼되게 하라' 이런 뜻이 되는데, '돌려 드려라!' 이런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그 좀 빌려온 것이다! 그러면 랜트했다는 말과 조금 달라요. '원래의 것으로 돌려드려라!' 그런 배경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럴 때에, 여러분과 저는 모든 것이 근본소유주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사실은 앞에 부분을 빼어 버리고, 우리가 시간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이런 배경이 우리의 신앙생활이거든요. 이것만 이해가 된다 그러면 여러분 재물 관이라든가, 그 다음에 자식 관이라든가, 모든 삶이 전부 달라져 버립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여러분이 몸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누구의 것입니까? 왜 그러면 지 마음대로 하려고 그럽니까? 이 자체가 안되어 있거든요. 여러분이 받은 모든 것들이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것을 너무 알았기 때문에, 성전을 짓기 위해서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놓고는 뭐라 그랬습니까?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지고, 또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릴 수 있게 하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 여기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것인데도,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지고 쓰면서도 뭐라고 생각하는 줄 압니까? 헌금한다 그러면 '내 것을 가지고 빼앗긴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가지고 될 수 있으면 안 빼앗기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가지고 헌금하려고 그러면 만원 짜리 나오면 쑥 넣어버리고, 천원 짜리 내고... 될 수 있으면 이게 세금 내는 속국이 되어있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세금 내는 기분이에요. 노예근성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 '주인으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이게 없어요. 지 몸도 지 마음대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사용한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데, 그게 안되고 있어요. 한번 물어봅시다. 자식들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진짜로? 맞습니까! 그런데 왜 지 마음대로 합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잠시동안 여러분께 맡겨서 복음으로 잘 양육시키라고 맡겨 놓았는데, 지 마음대로 하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도 돌아간다!'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갈 때는 빈손으로 갑니다. 그런데 빈손으로 가는 이유가 뭐냐하면, 그건 내 것이 아닙니다. 벌었지만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그래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중요한 약속을 했어요. 워낙에 이것을 모르고 사니까, 이것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벌은 것 다 좋다! 아홉은 네가 먹어라! 하나만 나한테 맡겨라! 원칙은 다 맡겨야 되는데, 살아야 되니까 아홉은 네가 먹어라! 하나만 나한테 바치면서 내 것을 가지고 빌려 가지고 먹고산다! 이것을 좀 알아라!' 그 이야기입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내 것을 가지고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인데,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내가 하나님의 것으로 이 땅에 살다가 하나님의 것인 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버는 것마다 1/10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러분 잘 알아야 합니다. 돈을 버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고, 또 돈벌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나는 그 농촌생활을 하면서 보는 것이, 아무리 수고를 해도 하늘이 허락지 않으면 한 톨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 이 땅에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다 하는 줄로 생각해요. 이것 하나만 가지고 조금만 되어도 여러분 재대로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여러분 십일조를 떼어먹었을 때에, 성경은 말라기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도적놈이라!' 그랬거든요. 그러니 이게 이해 안되면, '왜, 도적놈이라 그러느냐? 왜, 도적이라 그러느냐?' 이해가 안되거든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홉은 네가 먹어라!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중에 내 것인 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1/10을 드려라!'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 1/10을 드렸다! '내 것을 가지고 고백하는 마음으로 드려라!' 그랬는데, 그 하나를 빼어먹었다! 그래서 뭐라 그랬느냐? '네가 도적놈이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것으로 표식을 안 했기 때문에, 도적놈이다! 여러분 도적놈 그러면 율법적으로 큰 죄 정도가 아니고, 구약에서는 사형입니다. 제가 웃기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정말 조금만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진지한 헌신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몸이, 여러분 가지고 있는 것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기에 진실한 마음이 되어야 되지, 여기에 조금만 다른 마음이 있어도 축복은커녕 그것은 따귀한대 맞아야 될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뭐 '축복 받는다! 뭐 받는다!' 이 말하기에 부끄러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말씀을 드리면서, '복 받아라!' 그 말보다도 왜? 너무 자주 말하니까! 그게 식상이 되어 가지고, '복 받아라!' 그래도 감동이 없어요. 복 받으라는 문제의 수준에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연한 것 정도가 아니고, 이건 엄청난 단어입니다. 조금 난 헌신을 진짜 한번 해보세요. 워낙 이게 안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 부교역자로 있으면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뭔가 이게 '하나님 앞에 드린다!' 그럴 때에, 뭐 주일학교도 그렇고, 기관에도 그렇고, 그 다음에 교역자들한테 좀 '베푼다!' 이럴 때에, 너무 그 자세나 이런 것들이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고, 고만 성질이 저도 좀 더럽고, 이상한 성질이 되어서 보기도 싫어요. 꼴도 보기 싫어요. 그래서 제 마음에 뭐냐하면, 교회 오면서, 개척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나는 개인을 통해서 뭘 안 받겠다!' 하는, '꼬락서니가 더러워서 못 받겠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데,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럴 때에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인데, 너무 안되니까! 제게 와서 개인적으로 뭐 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을 안 했어요.
그래서 누가 와서 뭐 양복을 한 벌 해준다! '당신이 뭐하려고 나한테 양복을 해주려고 그러냐!' 이래가지고 돌려 보내버리고, 그래서 지금까지 조금 마음에 뭐냐하면, '개인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이런 기회를 다 막았다!'는 생각이 좀 들고,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런데 왜, 그러냐? 너무 이게 안되어요. 내가 조금만 베풀어 놓으면 뭐같이 그냥 뻐기고, 모르겠어요. 본인들은 안 그런데 내가 눈이 이상해 가지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진실로 하나님 앞에 헌신할 때에,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조금만 해보세요. 여러분 주의 종들에게 정말 한다! 조금만 진실하게 해보세요. 그래서 성경이 뭐라 그러느냐? 전도한다! 정말 조금만 해보세요. '전도하면 복 받는다!' 그 말이 아닙니다. 조금만 해 보세요.
그 다음에 성경이 말씀한 것처럼, 주의 종들에게 '보호자가 된다!' 혹은 교회에 '식주인이 된다!' 조금만 진실하게 해 보세요. 이게 왜 그렇게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어떤 면에서 욕이 나올 정도입니다. 뭐 '그냥 꼴랑 해놓고...' 진실하게 조금만 하시면 이것은 축복 받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것은 뭐 엄청나게... 그래서 나는 교회에 '주여, 우리교회에 재벌이 나게 해 주옵소서! 네 심보를 고치고 말해라!' 하나님 앞에 조금만 하면 재벌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못 주십니까? 너무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우리가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께 뭘 낼 때, 막 내가 뭘 내는 것처럼!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 겸손하게 감사함으로 드릴뿐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세금은 잘 내면서 하나님의 것은 다 떼어먹고 앉아 가지고, 이게 문제라! 진짜 이런 믿음이 전혀 안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맺으면서 여러분 정말 말씀드립니다. 이제 뭐 거창하게 할 것이 없어요. 우리 마음에 한 주간 '조금만 하나님 앞에 진실해 보자! 조금만 하나님 앞에 믿음가지고 살아가 보자! 조금만 하나님 앞에 정말 생명을 근거로 해가기고, 참 생명을 바탕으로 해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사실적인 헌신을 조금만 해보세요.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 땅을 복음화 하기를 원합니다. 복음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바울을 하나님이 유럽에 보냈을 때에 가난뱅이로 안 보냈습니다. 브리스가 부부가 세계 복음화 위해서 바울을 계속해서 후원했을 때에, '재벌이라!' 그랬습니다. 그냥 안 보냈습니다. 여러분 세계 복음화에 위해서 이 땅에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우시기를 약속하시고 보내셨습니다. 믿음 조금만 회복하시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짓는다 할 때에 저 교회 짓는 문제에 있어서 여러분 조금만 하나님 앞에 진실해 보세요. 정말 세계를 살릴 교회를 짖는다! 여기에 여러분 조금만 마음 문 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진실하게 될 때에 주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축복하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루실 것입니다! 거창하게 하지말고 오늘 조금만 진실해 보자!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 박수를
마 22:15-33 / 최영기목사
지금도 좀 그렇습니다만 어떤 목사님이 예배 중에 "주님께 박수로 영광 돌립시다"라고 말하면 거북함을 느낍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잘했을 때에 쳐주는 박수를 주님을 위해 친다는 것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진정으로 주님께 박수를 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대적하는 사람들을 몇 마디 말로 코가 납작하게 만들고 이들이 쳐놓은 함정을 가볍게 피해나가십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을 빠져나가는 007 영화의 주인공은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예수님께 박수를'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워야하는데 상대가 만만치 않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조심스럽게 다음 계획을 짰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보내었습니다. 국회에서도 정당끼리 비난을 주고받을 때에 당 중진 대신에 젊은 국회의원을 내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체면 보지 않고 원색적으로 공격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헤롯당원을 동반했습니다. 헤롯당원은 신약 성경에만 나오는 명칭인데 헤롯 왕가와 친밀한 사람들로 로마와 협조하는 현재 체제에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평소에 바리새인들과 이들은 앙숙인데 앙숙인 두 그룹이 같이 찾아온 이유는 조금 있으면 분명해집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갖가지 찬사를 늘어놓습니다. 진실한 분, 진리를 말하는 분,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개의하지 않는 분,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분(16절). 이렇게 현란한 말을 늘어놓는 것은 예수님을 꼼짝없이 코너에 몰아넣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은 준비 작업을 한 후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치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
이 질문은 깊숙한 음모가 담긴 질문입니다.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이 계속되느냐 끝장이 나느냐가 결정이 됩니다. "바치는 것이 옳다"라고 대답하면 경건 주의자들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줄 때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신 17:15). 세금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로마 황제를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라고 간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민중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금은 관세가 아니라 인두세입니다. 관세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기 위해 바치는 것이니까 그런 대로 용납을 할 수 있지만 인두세는 돌아오는 혜택은 없이 인구 숫자대로 로마에게 바치는 세금입니다. 서기 6년 이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했을 때에 갈릴리 출신의 유다라는 사람이 주동이 되어서 반란까지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그러나 바치지 말라고 하면 헤롯 당원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이들이 총독에게 보고하여 체포를 당하고 반역죄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는 긴박한 순간입니다.
이 위기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지혜롭게 헤쳐나갔습니다. 세금을 바치는데 쓰는 주화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주화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주화일 것입니다. 그것을 보이면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21절). 너무나도 현명한 대답이었습니다. 이 대답을 갖고 바리새인도 헤롯당원도 트집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멋진 것은 위기 상황을 피해갔을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앞서서 바래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무슨 권리로 가르치느냐고 했을 때에 예수님은 침례 요한의 침례가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대답했다고 하면 그러면 너희들은 왜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침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민중들의 분노를 살 테니까 궁지를 벗어나기 위하여 한 것이 대답을 거부한 것입니다 (마태 21:24-26). "모르겠다." 이스라엘의 엘리트들이 모른다고 대답했을 때에 얼마나 바보 스럽게 보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동시에 정확한 답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에게 박수를 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Ⅰ. 나라법을 지켜야한다
1.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셨다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즉 권위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황제가 제정한 법도 지키고 세금도 바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황제는 하나님이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단 2:21). 같은 이유로 사도 바울도 모든 권위에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3:1). 하나님은 인정하지 아니하는 황제나 임금도 하나님의 통치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여서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권위를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황제를 세우시는 가장 큰 이유는 불완전한 정부가 무정부보다는 낫기 때문입니다. 수년 전에 제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였습니다. 제가 인도할 세미나에 참석할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제 저서를 몇 십권 갖고 갔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에 돈을 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제가 저술한 책이고 제가 선물용으로 갖고 왔다고 했는데도 관세를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50불을 주고 통관을 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님들의 얘기를 들으니까 그렇게 모아진 돈은 국고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관 직원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출국할 때에도 시장에서 산 조그마한 그림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북 사람이 그린 것이라고 그림 하나를 샀습니다. 호랑이 그림인데 그림도 그림틀도 조잡했지만 이북 동포가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 약 미화로 5불을 주고 샀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세금을 내라고 세관 직원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도 속이 상해서 안 갖고 가겠다고 직원에게 던져주고 왔습니다. 당시 블라디보스톡은 5개의 마피아가 지배하는데 그때에 느낀 것이 부패한 정부라도 무정부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로마 황제들도 부패했고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황제가 있었기 때문에 길에서 강도가 없어졌고 바다에서 해적이 없어졌고 여행이 자유스러워지면서 복음이 이곳저곳에 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통치자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2:14). 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왕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딤전 2:2).
2. 나라법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법을 지켜야합니다. 우리 주위에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나라법을 지키는 것은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천이 나라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3:2). 크리스천은 나라법을 지켜야합니다.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가짜 물건도 팔지 말아야합니다. 모든 법을 잘 지켜야하고 특히 이민자로서 이민법도 잘 지켜야합니다.
이민법에 관한 말이 나와서 얘기인데 저의 교인들은 대부분이 미국에 거주해도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거주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잘 하는 일입니다. 나라법을 지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경험으로 보면 불법으로 미국에 체류하여서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을 보기가 극히 힘이 듭니다. 특히 위장 결혼이라든가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등 사기를 쳐서 영주권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만이 불행할 뿐 아니라 자녀들도 웬일인지 장래가 꼬이고 잘 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제가 이제서야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권세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법을 준수할 뿐만이 아니라 법을 준수하는 사람을 존중해 주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세금 보고할 때에 법을 지키는 계리사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최대한의 세금 공제 혜택을 주는 계리사를 찾아가시되 불법적인 방법을 써서 세금을 공제토록 해주는 사람은 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은행 융자를 할 때에도 법을 지키는 사람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싼 이율로 융자를 해주는 사람을 찾아가시되 융자 신청서에 숫자를 속이는 것을 마다 않는 사람은 끊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기가 힘이 듭니다. 변호사도 법을 지키는 변호사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영주권을 가장 빨리 내줄 수 있는 변호사를 찾아가시되 가짜 서류를 작성하는 것을 마다 않는 사람은 단호히 끊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을 의지하여서 이민 생활에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법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권위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십시다.
Ⅱ. 나라법보다 하나님 법이 우선한다
나라법에 순종하여야하지만 절대적으로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법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날 때에는 하나님의 법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려라"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 말을 어떤 분은 잘못 이해해서 황제의 분야와 하나님의 분야가 분리되어 있어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2중적인 삶을 삽니다.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사회에 나가서는 사회의 법을 따라 삽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말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황제에게 순종하지만 황제는 하나님이 세웠기 때문에 순종의 한계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예를 들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큰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평사원이라면 예를 들어서 과장의 지시를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과장의 지시가 경영주의 원칙에 크게 벗어나면 여러분의 경영주를 따라야합니다. 황제가 아무리 힘이 있다해도 회사 과장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영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나라법을 존중해야하지만 나라법이 하나님의 법과 상충할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좇아야하는 것입니다.
2차 대전 때에 나치들이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평소에는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전쟁 전범 재판이 열렸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부의 명령에 순종하고 좇았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본 훼퍼라는 목사님은 나치 정권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였다가 발각이 되어서 결국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악한 정부를 대적하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 훼퍼 목사님의 위대한 점은 국가의 법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면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군대에 가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정당한 전쟁이라면 참여해야합니다. 그러나 월남 마이라이에서 있었듯이 양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이 있으면 거부해야합니다. 나라법보다 하나님의 법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낙태도 그렇습니다. 낙태는 여성의 권리라고 주장하고 낙태가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낙태를 거부합니다. 여성의 선택권보다 태아의 생존권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태아를 인간으로 인정하려하지 않는데 태아도 인간입니다. 생명은 잉태되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침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에 태아가 기뻐서 뛰었다고 했습니다(눅 1:41-44). 상식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여성의 낙태권을 주장하는 여성들도 아기를 기다린다고 하면 언제 기뻐합니까? 임신할 때부터일 것입니다. 임신한 어머니에게는 태아는 잉태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아기입니다. 그래서 태아 교육을 해도 임신하자마자 시작하는 것입니다.
노름도 그렇습니다. 노름도 미국 법에는 합법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는 어긋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땀흘려 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노동 자체가 신성한 것입니다. 돈은 신성한 노동에 종사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살후 3:10). 노름은 노동하지 않고 돈을 벌어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하나님이 뜻에 어긋나기 때문에 노름에 빠지면 자신의 삶을 망치고 가정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도박 벽에 빠진 분들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하기 바랍니다. 첫째는 자신이 도박 벽의 노예가 된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나는 끊으려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벗어나기 못합니다. 둘째는 공개해야합니다. 남편이 도박 벽이 있을 때에 창피하다고 감추는 아내가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공개해서 노름 돈을 꾸어주지 못하게 하고 노름 돈은 갚아주지도 말아야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고치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형태이든 중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가능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섹스에서, 술에서, 마약에서, 인터넷에서 구원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넷째로 공동체에 소속되어야합니다. 중독과의 싸움은 혼자서는 못이깁니다. 금단 초기에는 목장에 가서 정기적으로 보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충동이 생기면 목자와 목녀에게 전화하시기 바랍니다. 영어를 하시는 분은 GA(Gambler's Anonymous) 모임에 참석하기 바랍니다.
하늘 나라의 백성 된 우리들은 나라의 법을 성실하게 지키되 그 법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과감하게 거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면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