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마음 기뻐 뛰노나니.” 우리 귀에 익숙한 이 구절은“성모찬송(Magnificat)”(루카 1,46-55)의 첫구절입니다. 흔히 ‘찬송하다’로 번역되는‘magnificare’동사는 ‘큼(magnum)’과 ‘하다, 만들다(facere)’의 합성2어입니다. 그러니까, ‘찬송’은 상대방을 크다고 인정하거나 크게 해 드린다는 뜻일터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이런 의미로 하느님을‘찬송’하며 기뻐 뛰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음이로다.”
마리아가 하느님을 “크시다”고 고백하는 이유
‘비천함’의 원어는 ‘타페이노시스(tapeinosis)’인데, ‘작다, 보잘것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하느님께서 자기의 작고 보잘것없는 상태를 하찮게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정히 눈여겨보신다는(epeblepho) 사실 때문에 그분을 크시다고 고백하며기뻐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극히 크신 분이, 지극히작은 마리아를 따듯하게 바라보시며 “얘, 내가 사람이 되어야겠는데 허락해 줄래? 네 안으로 들어가도록, 너를 지나가도록 말이야” 하고 허락을 구하신다고 상상해보면, 제 마음도 그만 신령스런 기쁨으로울렁거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작은 마리아의 몸을 통과하시기 위해, 그리하여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는 마리아보다 더 작아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필리피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비우고 낮추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노래하는데(2,6-8), 이때 나오는 동사‘낮추다(tapeinoo)’ 역시 ‘작아졌다, 보잘것 없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원래(본질 자체로!) 너무도 큰 하느님께서 지금 작은 마리아보다 더 작은모습으로 서서 따듯한 눈으로 그의 하찮음 혹은 ‘없음’을(1코린 1,28 참조) 굽어보시면서 허락을 구하고 계신다고 말해서 그리 큰 과장도 아닐 터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하느님”을 만난 순간 마리아가얼마나 놀랐을지, 그리고 얼마나 기뻤을지 조금은상상할 수 있지 않나요? 마리아는 자기보다 더 작은하느님, 자기보다 더 ‘없는(없어보일 뿐만 아니라)’하느님을 눈 앞에 둔 것입니다. 이 순간의 놀라움으로 마리아의 영혼은 기뻐 뛰며 그만 자기 바깥으로나와 버립니다. 이른바 ‘탈아(脫我, ekstasis)의 순간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을 두고 “진짜로 크십니다, 참말위대하십니다!”라며 찬송해드리는 것은, 바로 그가체험한 하느님의 이 ‘작음’ 혹은 ‘없음’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그건 아주 특별한 의미의 ‘작음’이요‘없음’입니다. 그분의 크심은 우리의 상상을 훌쩍 초월하는 것이어서, 이런 작음 혹은 없음 속에서 가장잘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말씀’과 관련한 바오로의 가르침을(1코린 1,18-25) 더욱 잘 알아듣게 됩니다. 나아가 발터 카스퍼 추기경이, “하느님의 권능과 힘은 당신의 힘에 모종의 절제를 가하는 데서 가장 크게 드러난다”며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자기 철회(撤回)”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 역시 알아듣게 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에게서 드러나는 이런 종류의 ‘크심’ 앞에서 자기의 작음과 비로소 화해합니다. 그는,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커질 필요가,다시 말해 더 훌륭해지거나 심지어 더 거룩해 질 필요가 없음을 알아듣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라면, “그저 작은 채로 있기만 하면 된다” 정도로 표현했을터입니다. 그저 자기의 ‘아무것도 아님(nothingness)’ 안에 머물면 하느님께서 그 안에 들어와 ‘전부(all)’가 되어주십니다. 마리아의 기쁨과 용약의 이유가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의 실종?
히브리 성경 전체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이 하느님의 점진적인 ‘실종’이라고 관찰한 유대 성경학자가있었습니다(Richard E. Friedman, <The Disappearance of God>, 1995). 아담에서 에즈라까지, 하와에서 에스델까지, 전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점진적인 사라짐을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에스델서에는 심지어 ‘하느님’이란 단어조차 안나옵니다! 인류역사의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압도적인 기적과 발현등으로 인간사에 개입하십니다. 그러다가 점차, 이기적, 발현, 천사 이야기 등에 담긴 하느님의 압도적인 현존은 성경 장면들에서 사라집니다. 반면, 인간의 역할은 점점 커지면서, 마침내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주도권을 쥐게 되지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어쩌면 세례 요한의 태도를 하느님이 먼저 인간 앞에서 취하셨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한은 기쁨에 넘쳐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잖아요(요한 3,30).
그런데 신약성경도 이런 점에서 비슷하게 읽힌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실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고 볼 수있잖아요. 물론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만, ‘승천’이란 또 뭡니까. 주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는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라지셨다는거잖아요?
좋은 선생님이라면, 좋은 아버지라면, 좋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라면 대체로 이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 않나요? 제자-아들-내담자가 더 이상 자기를필요로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고 힘있고 건강해지는 것, 그게 이들의 바램이지요. 나아가, 전에 인용한쟝 바니에 선생님 인터뷰에도 나오는 말씀이지만,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 앞에서 어떤 식으론가 무력하고 상처입게 되는 것이 아닌가요? 작아지고 ‘없어지는’ 여정으로 접어든다고 할 수 있지않나요?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우리는 자신의 허약함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지극한자비를 만나고, 그 자리에서 교회의 신학 전통이 말해온 “숨어계신 하느님(Deus Absconditus)”을 만납니다. 그 하느님이 숨어계신 자리는 사랑으로 상처입는 그 자리,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 하느님을 “상처입으시는 하느님(Deus Vulnerabilis)”으로 불러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침내 하느님 자신의 ‘허약함’에 대해 묵상하게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사제를 두고 한 히브 5,2의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께서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있는 유일한 곳이, 하느님 자비의 빛으로 내 허약함과 화해하게 되는 바로 이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자리를 프란치스꼬 교종께서는 ‘야전병원’이라 불렀거니와, 바로 여기서만 교회 안팎으로 취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와 교회의 ‘체질’도 변할 수 있는게 아닐까 합니다. 말하자면 “똑바로!”라며 가르치고 훈계하려드는 태도보다 “내 탓이오!”의 태도를더 취하게 되고, 성직주의와 권위주의의 폐습도 고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어느 작가의 말씀을 인용해 드리며 제 묵상을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