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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영원한 사랑
날이 뿌옇게 밝아 왔다.
구양봉의 두 눈은 충혈되었고 두 손은 피로 얼룩졌다. 그는 철장방 사내들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사내들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구양봉을 노려보고 있었다.
"좋다. 자네들이 바라는 대로 해 주지."
구양봉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혼신의 힘을 다해 일장을 갈겼다. '쿵!'소리와 함께 앞에 섰던 세 사나이가 저만치 밀려 나가 고꾸라졌다. 한 놈이 벽에 박혔다가 떨어지면서 소리쳤다.
"구양봉 이 놈! 네 놈을 죽여 버릴 테다!"
그는 비척거리며 달려들려 했으나 그 자리에서 꺼꾸러져 죽고 말았다. 다른 한 놈은 땅에 넘어졌다가 간신히 일어났는데 가슴이 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
"구양봉 이 놈아, 네 놈을 죽어도 용서할 수가 없다. 지옥에 가서라도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그는 맥없이 중얼거리더니 스스로 자기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머리에서 피가 터지면서 그의 몸은 보기 좋게 뒤로 넘어갔다.
세 번째 놈은 구양봉의 장에 맞아 두 다리가 부러진 채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자기 사형과 사숙들을 쳐다보며 발광하듯 소리쳤다.
"저 놈을 죽여 줘요. 저 놈을 죽여 주지 않으면 난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말겠어요!"
구양봉은 점점 속이 탔다. 모용쟁은 땅에 엎드린 채 아무런 소리도 없었는데, 밑에 깔린 아이까지 둘 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아이가 깔려 죽었다면 세상에 이렇게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이 이쯤 이르자 구양봉은 무서운 비통과 분노를 씹어 삼키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네 놈들이야말로 천하에 드문 악인들이다. 네 놈들을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이 사무치는 분노를 풀 길이 없을 것이다! '
그는 모용쟁과 아들이 죽었다고 단정짓고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울부짖음은 마치 산속의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 같았고 큰 호수에서 용이 우는 것 같았다. 그 울부짖음에 놈들은 그만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양봉을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구양봉은 자기를 에워싼 사내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무시무시한 눈매로 구양봉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열두 놈이었다. 열두 놈은 모두 내력을 운행시켜 가면서 열두 쌍의 손을 담벽처럼 세우고 있었다. 서로 내력을 겨루는 본격적인 싸움이었다. 한 놈씩 달려든다면 쉽사리 거꾸러뜨릴 수 있었지만 열두 놈이 뭉쳐서 동시에 내력을 내뿜는다면 제아무리 구양봉이라
해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구양봉이 꺼꾸러질 판이었다.
구양봉도 죽음을 각오했다. 그는 두 손으로 앞에 선 자를 밀치면서 내력을 뿜었다. 놈은 왈칵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뒤에 있던 놈들이 등을 받쳐 주면서 한 동아리가 되어 내력을 운행시켜 구양봉의 내력을 막아냈다.
내력의 겨룸이란 잔재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체내에 있는 기력으로 하는 것인만큼 여섯 사람의 기력이 모이니 자연 엄청난 힘이 되었다. 구양봉은 이를 가까스로 막아내면서 속으로 '여기서 죽겠구나'하고 탄식했다. 하지만 이 무지막지한 철장방 놈팽이들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원통한 일이었다.
구양봉은 다시 군음을 다잡아 죽을 힘을 다해 여섯 놈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섯 놈 중에서 두 놈이 참아 내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놈이 급히 소리쳤다.
"빨리, 빨리 죽여 버려야 해!"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다른 여섯은 속이 조마조마했다.
'혼자의 내력으로 범 같은 여섯 사내들의 뭉쳐진 내력을 당해 내다니!'
그들은 합세하여 구양봉을 쓰러뜨릴까 하고도 생각했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철장방의 범 같은 사내 예닐곱이 구양봉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하여 자기들까지 가세한다면 그 얘기가 뭇호걸들의 귀에 들어갈 겅우 철장방의 큰 망신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여섯 사내의 내력이 구양봉의 내력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구양봉의 내력은 더욱 커지는 것만 같았다. 손에 땀을 쥐며 지켜 철장방 패거리들 중 한 늙은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바보 같은 자식들아, 지금 어느 때라고 뻗대고 서 있기만 하는 거냐? 빨리 손을 쓰지 못할까!"
그제야 여섯 사내는 제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뻗대고 서 있다가는 구양봉의 내력을 당해 내지 못하고 맥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겁에 질려 서로 바라보더니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 놈, 우리 장을 받아랏!"
여섯 놈이 동시에 구양봉의 등허리를 번개같이 내쳤다. 구양봉은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구양봉은 이제 합마공을 다 썼고 사부에게서 물려받은 60년 공력도 다 써 버린 상태였다. 구양봉은 '나는 이젠 죽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합마공으로 저 놈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더라면 지금 이 지경에 처하지는 많았을 텐데……. 철장방의 놈들은 천하에 없이 비열하고 졸렬한 놈들이다. 내력을 겨루다가 감쪽같이 손을 쓰다니! ……아,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저 놈들의 손에 곱게 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네 놈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 무려 열둘이나 달려들어 한 사람을 죽이
려 하다니 그런 망신스런 일이 어디 있느냐?'
여섯 쌍의 거무칙칙한 손바닥이 다시 구양봉의 등판에 겨누어졌다.
"손을 멈춰라!"
이때 웬 사나이의 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법당 안을 울렸다.
"철장방 사람들이 이게 무슨 짓인가? 여럿이 한 사람을 치다니?"
그 사나이는 훌쩍 날아오더니 동에 번쩍 서에 뻔적 하면서 여섯 사내를 몽땅 물리쳤다. 바로 철장방의 방주 구천인이었다.
철장방의 한 사내가 말을 건넸다.
"구천인, 우리 말을 들어 보게. 자네가 우리 철장방의 원수인 저 구양봉 놈을 죽여 버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자네를 방주로 추대할 걸세."
구천인이 정색하고 꾸짖었다.
"당신들은 모두 나의 선배들인 데 어쩌면 이 지경으로 후안무치할 수 있소? 열들이 하나를 에워싸고 싸웠으니 철장방의 명성은 말 그대로 일락천장이 된 셈이오! 실로 강호의 영웅들이 비웃을 일이오!"
"허이 참, 보는 사람도 없는데 공연한 근심이 아닌가? 방주로 추대할 테니 어서 손이나 쓰라구."
다른 사람이 거들었다.
"구천인, 우린 모두 철장방 사람들일세. 필 사숙은 죽었고 우리들 중 방주가 되고픈 사람은 하나도 없네. 그러니 자네가 우리를 도와만 준다면 틀림없이 방주로 추대할 걸세. 사내 대장부는 꼭 약속을 지키는 법이니까."
구천인은 슬그머니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구양봉과 철장방 패들을 번갈아 보면서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이때 느닷없이 한 여인이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여인은 키드득 웃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봐, 저 사내는 왜 여기에 다른 사람이 없다고 할까? 우리도 저 사내들과 한 집안 사람인가 뭐? 정말 우스워 죽겠네, 호호호……"
맞장구를 치는 다른 여인의 소리도 들려 왔다.
"그래도 여기에 우리 집안 사람이 있네요. 저봐요, 구양 장주님을요. 몹시 지친 것 같으니 우리 함께 도와줍시다!"
여인들이 주절대는 소리를 듣고 철장방의 사내가 소리쳤다.
"누구얏? 냉큼 나오지 못할까?"
"이 참, 우리더러 나오라네? 같이 나갈까?"
한 여인의 말에 다른 여인이 대답했다.
"나가고말고. 우리가 나가지 않으면 저 사내들은 우리를 볼 수 없잖아!"
이때 또 한 여인이 캐들캐들 웃으며 쑥덕거렸다.
"너는 보여도 그만 안 보여도 그만이지만 이 애는 장주님께 꼭 보여야 해. 장주님을 못 보면 빌빌 우는 애니깐."
그 바람에 왁자그르 웃음이 터졌다. 왈가닥스러운 여자들의 경망스러운 웃음 소리였다. 아마 여남은 명은 족히 될 듯싶었다.
철장방의 사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구양봉을 죽이려고 했는데 난데없는 여인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난처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저 여인들이 떠들고 다니는 날에는 철장방의 큰 수치가 아닌가?
철장방의 사내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누구얏? 어서 나오지 못할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열한 명의 여인들이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대체 웬 여인들일까? 철장방 사내들은 강호에서 몇십 년 간을 떠돌아다니면서도 한번에 이렇게 많은 여인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생김새는 조금씩 달라도 모두 그림같이 아름다운 용모에 늘씬한 몸매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인들은 미끄러지듯 걸어와 사내들 앞에 섰다.
열한 명의 여인들은 모두 거위털 같은 횐 치마를 입었는데, 그 아름다운 얼굴들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모란꽃을 방불케 했다. 어떤 여인은 교태를 머금었고 어떤 여인은 살짝 볼우물을 만들며 추파를 던지는 듯싶고 또 어떤 여인은 공연히 키득거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그녀들을 보자 속으로 여간 반갑지 않았다. 이 여인들은 모두 무공을 갖추고 있었다. 그네들은 밤에 사내를 다루는 재주도 재주지만 무공에도 막힘이 없었으므로 한다 하는 사내들도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다. 그들은 원래 청루의 기녀였거나 떠돌아다니는 여인들이었는데, 보고 겪은 것이 많다 보니 남성들의 세계도 손금 보듯 했다. 그녀들의 두목은 허청청이라는 자그마한 몸매의
여인이었다.
철장방 사내들은 버들가지처럼 호리호리한 여인들을 보고 은근히 코웃음을 쳤다.
'흥, 한 떼의 용사들이 들이닥치는가 했더니 치마를 두른 계집년들이구나. 계집년들이 야 사내들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몸을 파는 재주가 있을지는 몰라도 주먹질에야 무슨 재주가 있을라구. 저 애호박처럼 애리애리한 계집들이 무슨 싸움을 한다고 그래? 좌우간 구양봉이란 놈을 잡아죽이고 나서 저 년들까지 말끔히 잡아 족쳐야지.'
사내들 중 하나가 으름장을 놓았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썩 꺼져 버려. 여기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청청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세요?"
철장방사내들은 청청의 요염한 자태에 현기증 나는 유혹을 느꼈다. 한 사내가 시치미를 뚝 떼며 소리쳤다.
"네가 누군지 알 턱이 있나?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여길 나가라!"
그러자 청청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려 드릴까요? 나는 강남의 명기 허청청이에요. 강남의 이름난 술집이나 기생집에서는 내 명성이 쩌르르해서 사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죠. 어떤 사내들이 찾아왔는지 알아요?"
철장방의 사내가 고개를 흔들자 청청이 말을 이었다.
"참 둔하시네요. 이름난 왕공 귀족이 아니면 큰 장사치와 강호의 호걸들이었죠. 그 어른들이 찾아오면 내가 뭘 부탁하는지 아세요?"
철장방 사내들은 점점 오리무중에 빠져 눈만 껌뻑거렸다. 허청청이 깔깔 웃더니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 어른들이 오면 우선 맘껏 놀게 하지요. 그러고 나면 자연 나의 부탁을 들어주게 마련이지요……."
사내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청청이 달콤한 목소리로 계속 속살거렸다.
"기왕 얘기가 나온 거 다 말하지요, 뭐. 그 양반들은 자리를 뜰 때마다 무예 한 가지씩을 가르쳐 줬거든요."
허청청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손을 쭉 뻗쳐 사나이의 등허리를 움켜쥐었다. 사나이의 등허리에 있는 세 개의 혈은 그녀의 향긋한 손에 잡히고 말았다.
"장주님, 이 놈을 어떻게 할까요?"
허청청이 묻자 그녀의 솜씨를 잘 알고 있는 구양봉이 대답했다.
"죽여라!"
허청청이 내력을 발하니 철장방 사나이는 두 눈을 흡뜬 채 피를 왈칵왈칵 토하며 쓰러져 버렸다.
이 열한 명의 여인들은 모두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임일천에게 잡혀 들어와 백타산의 '금옥'에 갇힌 뒤 날마다 할 일이 없는 터라 무예를 익히는 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녀들은 매일 틈만 나면 새장 같은 다락방에서 무예를 닦았는데 서로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배웠다. 언제든 반드시 요긴하게 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오늘 구양 장주가 밤늦게
까지 돌아오지 않자 하녀 가노에게 물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데, 드디어 그 동안 닦아 온 무예를 써먹게 된 셈이다.
가노는 구양봉이 부인을 쫓아갔다고 했다. 여인들은 모용쟁이 구양봉의 형수인 줄만 알았지 둘 사이의 말 못할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남자가 여자를 쫓아갔다니 무슨 구경거리나 있을까 하여 희희낙락 찾아 나섰던 것이다.
여인들이 나타나 곤경에 빠진 구양봉을 구하자 구천인은 구양봉의 편을 들기로 작심했다.
"저 놈들이 당신네 장주의 형수와 아기를 죽였는데 죽여 버리지 않고 가만 놓아둘 참이오?"
구천인의 말을 듣고 철장방 패거리들은 분해서 펄펄 뛰었다. 그들은 구천인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배은망덕한 반역자 운운하며 욕을 퍼부었다. 이에 구천인도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너희들은 뭐냐? 네 놈들은 한 동아리가 돼서 날 죽이려고 날뛰지 않았느냐? 내 오늘 네 놈들과 죽든지 살든지 결판을 내고야 말 테다!"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범같이 달려나가 세 사숙과 맞붙었다.
청청은 측은한 눈길로 구양봉을 보면서 물었다.
"장주님 , 괜찮으신지요?"
구양봉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몽땅 죽여 버려! 죽여 버려!"
여인들의 마음이란 더 지독한 법이다. 이 열한 명의 여인들은 오랫동안 백타산장에 갇혀 있던 터라 팔다리가 근질근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여인들은 좋은 기회를 만난 듯이 제법 폼을 잡으며 사내들에게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칼이 번쩍이고 장이 번개같이 오갔다. 여인들의 자그마한 주먹에 맞은 사내들이 '어이쿠, 어이쿠'연신 비명을 질러 댔다.
한쪽에 서 있던 다섯 명의 사내들은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구양봉을 대적하던 여섯 명의 사내들 중 한 명이라도 죽는 날이면 육합전이 흐트러져 더는 구양봉의 신공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다급해진 그들은 얼른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한바탕 혼전이 벌어졌다.
열한 명의 여인들은 칼을 휘두르고 주먹을 날리면서 혼신을 다해 싸웠다. 그녀들은 강호의 사나이들과의 싸움은 처음이고 또 그녀들 중에서 피를 보는 혈전을 겪어 본 것은 청청과 뚱보 여인 둘 뿐이었다. 두 여인은 대장이라도 된 듯이 "쳐라, 죽여라!"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여인들을 지휘했다. 여인들은 사내들에게 악착스럽게 달려들어 주먹을 안기면서도 키득키득 웃으면서 까불어댔
다. 여인들이 허점을 보여 뒤로 몰릴 때면 허청청과 뚱보 여인이 번개같이 뛰쳐나가 달려드는 사내들을 물리치곤 했다. 싸움은 도무지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한쪽에 물러서서 싸움을 구경하던 구천인은 혼자 생각을 굴렸다.
'철장방 쪽에서 저 극악스러운 여인들을 당해 낼 성싶지가 않군. 저 사숙이나 사숙조란 작자들이 나를 못살게 굴었으니 점잔 뺄 것 없이 이 기회에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 버리자. 그러면 내가 철장방 방주가 되는 일에 감히 막아 나설 자가 어디 있겠는가.'
구천인은 결단을 내리자 벼락같이 손을 써서 한 사내의 등판에 늘씬하도록 강타를 안겼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왈칵 피를 토하더니 구천인을 돌아보며 간신히 내뱉었다.
"구천인, 이, 이 놈아…… 참 지독하구나……."
사내는 말을 맺지 못하고 고목나무 쓰러지듯 뒤로 벌렁 자빠졌다.
청청은 구천인이 장승 같은 사내를 일 장에 쓰러눕히는 것을 보고 좋아서 깡충 뛰었다.
"호호, 참 멋들어지네요!"
청청이 구천인을 보고 방긋 웃었다. 순간 구천인은 청청의 아리따운 미모에 넋을 뺏기고 말았다.
이제 여인들과 대결하는 자들은 넷밖에 남지 않았다. 네 놈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세가 기운 것을 깨닫고 물러서려 했으나 여인들이 호락호락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시퍼런 검을 휘두르며 마구잡이로 내리치고 내지르는 데는 누구라도 당해 낼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구천인은 꺽다리 사내를 때려눕히고 나서 또 번개같이 달려들어 다른 한 사내의 어깨에 드세게 일 장을 안겼다. 한창 허청청과 맞붙어 싸우고 있던 그 사내는 난데없이 날아오는 구천인의 장에 맞아 푹 고꾸라졌다. 설상가상으로 한 여인이 그자의 옆구리에 깊숙이 검을 박았다.
이젠 세 놈만이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 흘끔 흘끔 쳐다보면서 도망칠 틈을 노렸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청청이 외쳤다.
"너희 세 놈은 스스로 자기를 결박하고 투항해라. 차차 장주님의 기분이 돌아서면 자비심을 베풀어서 놓아 주실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세 사나이는 고함을 지르면서 일시에 청청에게 덮쳐들었다.
한꺼번에 덮쳐들면 그녀가 비켜서리라는 계산하에 그 틈을 타서 도망치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총명하고 날렵한 청청은 틈을 주지 않고 검을 살짝 들이댔다. 덮쳐 들던 한 놈이 뱃가죽이 찢겨져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덮쳐 들던 다른 두 놈은 얼결에 방향을 바꿔 한 놈은 구천인 앞으로 밀려갔고 다른 한 놈은 여인들 속으로 들어갔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비명을 지르면서 넘어졌다.
청청이 놀라서 소리쳤다.
"좋다, 네가 사람을 죽였단 말이지?"
청청이 매섭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서릿발 같은 검이 춤을 추는 듯싶었다.
구천인도 가볍게 몸을 날리면서 틈을 노렸다. 그의 경공을 일컬어 수상표(水上飄)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수면을 차고 솟구치는 물새와 같이 날렵했다. 구천인은 틈을 노려 번개같이 장을 내질렀다. 놈이 일 장을 얻어맞고 비틀대는데 어느새 시퍼런 검이 번쩍하더니 머리통을 수박 쪼개듯 쪼갰다. 뜨겁고 비릿한 피가 사방에 뿜어졌다. 한 여인이 그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지르더니 검을 떨어뜨
리고 얼굴을 싸쥐었다.
구천인이 다시 주먹을 날려 다른 한 놈을 꺼꾸러뜨리자 청청이 사납게 검을 내질러 그 놈의 몸뚱이에 맞구멍을 뚫었다.
여인들과 싸우던 자들은 이제 다 꺼꾸러졌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구양봉이 여섯 놈을 상대로 내력을 겨루고 있었다.
구양봉의 얼굴에서는 굵직한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고 머리에서는 솥뚜껑을 열어젖힌 듯 김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주선 여섯 명의 사내들도 땀투성이가 되어 씩씩거리고 있었다. 놈들은 한쪽에서 싸우던 패거리가 다 죽고 자기들 뒤에 여자들이 몰려오자 형세가 기울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러나 구양봉이 놓아줄 리 만무했으므로 죽기살기로 버티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허청청이 구양봉에게 말을 건넸다.
"장주님, 다 죽은 거나 다름없는 놈들하고 내력을 겨를 게 뭐 있나요? 그 내력은 남겨 두었다가 우리 여인들하고 놀 때나 쓰세요."
구양봉은 허청청에게 눈을 흘겼다. 청청은 무안을 당하자 혀를 쏙 내밀었다. 평소에 구양봉이 무섭게 다루었으므로 그녀들은 구양봉의 말이라면 설설 기었다.
여인들은 바삐 달려가 모용쟁을 부축해 앉힌다, 아기를 안는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모용쟁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아이만은 부둥켜안고 놓지 않았다.
청청은 구양봉이 모용쟁과 아이를 걱정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되돌아가 알려 주었다.
"장주님, 안심하체요. 애기 엄마는 상처를 입었을 뿐이고 애기는 아무 일 없어요."
구양봉은 될 듯이 기뻤다. 아들과 모용쟁이 비참하게 죽은 줄만 알았는데 둘 다 살아 있다니 세상에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기운이 솟구치며 온몸에 힘이 뻗쳤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내 손에 한번 죽어 봐라!"
그는 큰소리로 외치며 어깨에 힘을 넣어 사내들을 떼밀었다. 사내들은 저만치 벌렁 나가자빠졌다.
사실 구양봉도 어지간히 지친 상태였다. 그런데 모용쟁과 아이가 살아 있다는 말에 불끈 힘이 솟아 여섯 사내를 거뜬히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내들은 벽에 머리를 찧었지만 구양봉의 기력이 약한 상태라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구양봉은 허청청을 보고 재촉했다.
"어서, 어서 아이를 보자꾸나."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백타산장의 사람들도 구양봉과 모용쟁의 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백타산장에서는 구양봉과 모용쟁은 시동생과 형수 사이이며 모용쟁의 남편은 구양적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인들은 구양봉이 아이를 그토록 귀여워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끌끌 羨다. 저렇게 아이를 귀여워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며
여자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일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녀들은 이 아이가 구양봉의 친아들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구양봉이 아기를 얼싸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거렸다.
"극아, 극아, 너는 우리 구양씨 가문의 후손이고 백타산장의 어린 주인이다. 앞으로 너는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고 너를 당할 자는 세상에 없을 거다!"
허청청이 구양봉에게 물었다.
"장주님, 철장방의 놈들을 어떻게 처치할까요?"
여섯 명의 철장방 사내들은 땅에 주저앉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 중 상처를 입은 두어 놈은 멀뚱멀뚱 구양봉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 놈들은 죽여도 아깝지 않으니까 모조리 죽여 버려라!"
구양봉이 한마디 내뱉자 청청은 여인들을 데리고 놈들에게 덮쳐 들었다. 여인들은 칼과 검을 휘둘러 닥치는 대로 베고 찔렀다. 눈깜짝할 새에 놈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로세로 쓰러졌다. 그 중 둘이 뻗치고 일어나 여인들에게 달려 들었으나 다시 꺼꾸러졌다. 두 놈은 죽어 가면서도 바락바락 악을 썼다.
"구양봉, 이 천하에 없는 독종아! 암캐 같은 계집들이 우글거리는 백타산장에서 맘껏 잘살거라, 이제 천벌을 받을 날도 멀지 않았다!"
구양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아들을 안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얘야, 사나이가 되려면 이 애비 같은 사나이가 돼야 한다. 남의 군소리를 듣거나 강호의 의리를 지키는 따위는 헌신짝처럼 던지고 자기의 주관대로 살아야 해! '
구양봉은 침울한 기색으로 아이를 안고 모용쟁에게로 다가갔다. 모용쟁은 오른팔을 베고 모로 누워 있었다. 얼굴은 핏기라고는 없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몸을 풀고 제대로 뒷수습을 못한 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더군다나 억센 사내의 주먹에 가슴팍을 맞았으니 죽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파리한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졌다. 모용쟁을 처음 만나서부터 오늘이 있기까지의 파란만장했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구양봉은 그만 설움을 참지 못하고 모용쟁을 흔들었다.
"형수님! 형수님……."
하지만 모용쟁은 여전히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구양봉이 모용쟁의 콧구멍에 손을 대 보니 다행히도 숨은 멎지 않았다. 구양봉은 철장방 놈들이 새삼스럽게 미워졌다.
'망할 놈의 자식들, 네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야 직성이 풀리겠다!'
구양봉은 천천히 일어나 철장방 사내들에게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그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반병신이 된 놈들을 둘러보면서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두 다리가 부러진 사내가 일어나 앉으며 욕을 퍼부었다.
"구양봉 이 놈아, 네 놈은 우리 철장방의 기둥 같은 사내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렸다. 나는 저승에 가서라도 네 놈을 잡아 갈갈이 찢어 죽일 테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주먹으로 자기의 머리를 쳐서 자결하고 말았다.
구양봉은 그를 떠나 다른 놈들 앞으로 다가갔다.
"철장방의 사내들은 죽음을 초개같이 안다니까 시원히 죽여 주도록 하마!"
그는 한 팔에 아이를 안은 채 다른 한 손을 펴서 앉아 있는 사내들의 면상에 차례로 장력을 발산했다. 사내들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차례로 나동그라졌다.
무너진 법당 안에는 구양봉 가족과 백타산장의 열 명 여인들, 그리고 구천인만이 남게 되었다. 구양봉은 구천인을 뚫어지게 쏘아 보면서 물었다.
"자네는 왜 나를 도왔는가!"
구천인이 쌀쌀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을 도운 게 아니라 내 스스로를 도운 것이오. 나 자신을 구한 거란 말이오."
구양봉이 빙긋 웃었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철장방의 신임 방주가 밉지 않았다. 이 놈팽이들이 살아서 돌아갔더라면 구천인은 방주가 되기는커녕 목숨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양봉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구천인, 자네가 보다시피 철장방의 범 같은 사내들 열여덟이 이 구양봉의 손에 죽었네. 만약 복수할 마음이 있다면 아마도 오늘 밤이 제일 좋을 것 같으니 한번 손을 써 보라구."
구천인은 휑뎅그렁한 법당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시체를 둘러보며 몸서리쳤다. 평소에 검술을 익히고 장법을 연마하던 때와는 판판 달랐다. 구천인은 내색을 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구양봉 어른, 아직 당신을 죽일 때가 아닌가 하오. 그건 그렇고, 방주님께서 모용 아가씨를 잘 보살펴 드리라고 당부하셨건만 제가 잘 보살펴 드리지 못했으니 방주님의 부탁을 저버린 셈이라 하겠소. 당신에게도 신세를 졌소. 이 철장방 사나이들은 비록 나의 선배들이라고는 하지만 이 신임 방주의 명을 거역하고 반역을 꾀했으니 주살을 당하여 마땅하고 하나도 아까울 게 없소."
구양봉은 구천인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풀렸으나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구천인도 더는 말하지 않고 장작더미로 가더니 상관위의 유체에 삼배를 하였다.
"사부님, 사숙과 사숙조님들은 모두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었으니, 말 그대로 자업자득이지요. 장차 철장방도 중흥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구천인은 말을 마치고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구천인은 상관위의 유체를 깨끗이 태운 뒤 골회 몇 개를 주워 들고 죽은 사내들 중 한 사람의 옷자락을 찢어 내어 골회를 싸 들고는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가 버렸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옆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모용쟁을 내려다보노라니 그래도 제일 사랑했던 여인은 다름 아닌 모용쟁이라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비록 그녀의 눈이 멀었을망정 자기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모용쟁의 머리카락은 식은땀에 젖어 촉촉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이 여인의 아름다운 몸뚱이와 살결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졌다. 사막에 있을 때 모용쟁은 구양봉을 묶어 놓고 모래 벼락을 안기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래도 그의 품에 안겼고 사막의 네 .호걸의 청을 거절해 버렸다. 그때 황막한 사막에는 모용쟁의 몸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낭만의 사막은 과거 속으로
흘러가 버리고, 구양봉의 무릎 위에는 인사불성이 된 모용쟁이 초췌한 얼굴로 누워 있을 뿐이었다. 구양봉은 아이를 청청에게 안겨 주고 모용쟁의 두 어깨를 애타게 잡아 흔들었다.
"정신 좀 차리구려 모용쟁, 눈을 좀 떠 봐요……."
구양봉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더니 모용쟁을 안아 자기의 무릎 위에 앉히고 그녀의 두 다리를 가지런히 펴놓았다. 그는 두 손을 모용쟁의 어깨 위에 얹고 손바닥으로 어깨에 있는 정대혈(莽大穴)을 지그시 누르면서 내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내력을 넣어 주면서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임자의 말대로 하겠소. 정말이오. 착한 사람이 되고 사람을 죽이지도 않겠소. 어쨌든 그 놈들은 나는 물론이고 임자나 극이를 죽일 수는 없었어. 내가 있는데 그 놈들이 감히 범접이나 할 수 있었겠소?"
구양봉은 모용쟁을 살려내려고 자기의 모든 내력을 모용쟁의 몸에 불어넣었다. 철장방 패거리들과 밤새도록 악전고투하다 보니 별로 내력이 없었지만 지금은 자기를 돌볼 계제가 아니었다. 사실 기진맥진해서 내력이 약하기에 망정이지, 평소 정력이 왕성할 때의 내력을 불어 넣었다면 오히려 모용쟁이 견뎌 차지를 못했을 것이다.
한식경이나 지나서 모용쟁이 가냘프게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깨어났다. 그녀는 무엇을 찾는지 이리저리 앞을 더듬더니 애타게 소리쳤다.
"아기는? 아기는요? 내 아기는요?"
구양봉이 눈짓하자 청청이 아이를 안고 왔다.
모용쟁은 여인의 향내를 맡더니 화들짝 놀랐다.
"이 여잔 누구예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급히 구양봉을 찾았다.
구양봉이 얼른 두 손을 잡아 주었다.
"여기 있소."
그러자 모용쟁이 버럭 화를 냈다.
"이봐요. 아기를 다른 여인에게 맡겨서는 안 돼요. 저의 몸종이 아니면 당신이 꼭 데리고 있어야 해요. 알겠나요?"
"알았소. 그렇게 하겠소."
구양봉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봉은 그녀의 푹 꺼진 두 눈을 보노라니 새삼 가슴이 아팠다.
'모용쟁이 눈을 잃게 된 것도 다 내 탓이야. 모용쟁은 천하에 드문 미인이었는데, 나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이야.'
구양봉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모용쟁을 덥석 끌어안으며 목놓아 울었다.
모용쟁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울긴 왜 울어요? 진심으로 우는 건가요, 네?"
구양봉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릿결도 옛날의 윤기가 돌던 그 머리가 아니었다. 구양봉은 가슴이 쓰라렸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임자의 마음은 알고도 남음이 있소. 이 구양봉이 보기 싫어서 떠나려는 거지. 하지만 아이는 어떻게 하겠소? 아이와 함께 있으면 안 되겠소? 아이와 함께 백타산장에서 살구려. 내 절대로 방해하지 않고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리다. 임자는 극이를 데리고 뜰에서 하루 종일 놀구, 난 멀리서 바라볼 수만 있어도 만족하겠소. 철장방에는 절대로 가지 마오. 그 놈들은 나쁜 놈들이니까. 그 놈
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큰일이오. 알아듣겠소?"
모용쟁은 구양봉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저는 사막에 있을 때부터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사람이 변했어요? 아무튼 저는 철장방에는 가지 않을 거예요. 이봐요, 이렇게 맥도 못 추는데 어딜 가겠어요?"
그녀는 잠간 망설이는 기색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줘야 해요……."
"들어주고말고. 말만 하오.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겠소."
구양봉이 큰소리를 치자 모용쟁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극이에게 그 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절대 알려서는 안 돼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 애를 조카라고만 불러 줘요. 알겠어요?"
구양봉은 살을 저미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소리쳤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왜 내가 그 애를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그 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단 말이오? 그 앤 내 친아들이고 임자가 또 그렇게 고생해서 낳았는데, 왜 이 모든 것을 숨겨야 한단 말이오?"
모용쟁은 풀럭거리며 기침을 했다. 입가에 한 가닥 피가 흘러 나왔다. 그녀는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애에게 다 알려 준다면, 그 애가 당신 형님과 백면라살 사이의 일이나 저와 당신 사이의 일을 어떻게 보겠어요? 세상에 떳떳이 나설 수도 없을 거예요.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에요?"
그 말에 구양봉은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아들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오늘부터 그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나그네가 아니라, 극이를 지켜 주고 극이를 훌륭하게 키워 내야 할 커다란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구양봉은 모용쟁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다짐했다.
"마음놓으시오. 내 평생 그 말을 극이에게 하지 않으리다."
허물어진 벽 사이로 훤한 빛이 들어왔다. 먼지들이 서늘한 아침 바람에 희끗희끗 날리고 있었다. 상관위의 시체를 태운 자리에서는 그을음내가 고약하게 풍기고 법당 안 여기저기는 온통 핏자국으로 실로 살풍경하기 그지없었다.
구양봉의 품에 안긴 모용쟁의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손을 만져 보니 역시 얼음장처럼 싸늘해지고 있었다. 구양봉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하늘도 무심하십니다. 모용쟁같이 착한 여자를 이렇게 죽게 하다니! 정녕 착한 이는 명이 짧단 말인가요? 만약 하늘이 굽어살펴 모용쟁이 살 수만 있다면 이 구양봉은 다시는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구양봉이 아무리 애를 써도 모용쟁은 점잠 숨이 잦아 갔다.
구양봉은 홱 고개를 돌려 어지러이 널려 있는 철장방 사내들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네깟 놈들 목숨은 백이고 천이고 내 사랑하는 한 여인의 목숨에 비길 수 없어.'
구양봉은 모용쟁을 안고 밖으로 나가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갑시다. 우리 집으로! 나는 기어코 합마신공과 봉황력 경공을 연마해서 5년 후에 화산에 갈 거요. 거기서 왕중양, 단지흥, 황약사, 그리고 홍칠 같은 놈들과 자웅을 겨룰 거요. 그때 가면 천하 무공의 제일인자가 이 구양봉이라는 것이 판명날 것이오!"
청청과 아홉 여인은 벌써부터 밖으로 나와 백타산장의 장주 구양봉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청은 백타산장의 어린 주인 구양극을 안고 얼르면서 생각했다.
'저 모용쟁이란 여자는 허구한 날 사흘 굶은 시에미 상을 해 가지고 바락바락 역정만 내더니 아들 하나는 잘도 낳아 놓았군. 뽀얗고 토실토실한 게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네? 세상에 별 신기한 일도 다 있지. 호호…… 아무튼 모용쟁이 죽었으니 우리 지자루의 여인들은 살판이 났어. 저 구양봉처럼 시원시원한 호남아는 그리 흔치 않거든. 이젠 톡톡히 재미볼 일만 남았구나.'
구양봉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마치 청청 일행이 보이지도 않는 듯 모용쟁을 안고 성큼성큼 지나쳐 갔다. 그것은 언젠가 신혼의 밤을 즐기려고 모용쟁을 안고 백타산 위의 석굴로 들어가던 모습과 흡사했다
―제1부 끝―
첫댓글 ``@-@``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잘보구 갑니다..
^^
아련히 아파오네요~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다니~~
좋은글 감사합니다
마음에 담고 잠시 머물다 갑니다
즐감~~~
즐감
즐감
ㅎㅎ
즐감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