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을 바라보며
한춘희
나들이를 하고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정신없이
마셨다 옷도 벗기가 무섭게 마루에 큰 대자로 누웠다 그나마 선풍기바람이
시원하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기려는 순간 마루 끝으로 보이는
봉선화 한 포기가 애처롭게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며칠 전만 해도 두
뼘 정도 크기의 봉선화가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는데 웬 일일까 깜짝 놀라
급히 다가가 살펴보니 다른 화분의 화초들은 별 이상이 없었다 똑같이 물을
주었는데 왜 봉선화만 죽은 상인가 혹시 화분 탓은 아닐까 싶어 들어보니
양은화분의 흙이 바짝 말라 버렸다.
몇 년 전 대학입시공부를 하던 아들 녀석이 “라면은 노란 양은 냄비에
끊여야 제 맛이 난다”고 하면서 구해달라고 하였다. 요즘 좋은 그릇을 다
제쳐두고 하필이면 양은 냄비를 찾느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어디 어미
마음이 그런가 입이 짧은 아이라 라면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을까하는
마음으로 시장에 갔다.
하지만, 사라져가는 물건이었다 한때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무쇠 솥에
음식을 해야 했던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에게 가볍고, 앙증맞은 양은 냄비가
애용품이 되었던 시절도 옛 이야기가 되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양은 냄비를 찾아 여기저기 여러 곳의 그릇가게를
돌아다닌 후에야 겨우 아들 손에 들려 줄 수가 있었다.
아들은 양은냄비에 라면을 끓여 맛있게 먹곤 했다 공부하다가 지치면,
허기와 스트레스를 해소라도 하려는지 자주 밤늦게까지 부엌을 들락거렸다.
어쩌면 시간을 아껴야할 아들에게는 더 없이 유용한 물건인지도 모른다.
손쉽게 사용할 수 있고, 함부로 해도 상관없고 빨리 끓여 내주고..... 아무튼
아들 녀석과는 찰떡궁합인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양은냄비를 볼 때마다
하찮아 보였다 사실 예쁘고 기능성이 좋은 신제품의 냄비가 얼마나 많은가.
버릴 때만 벼르고 있던 터에 아들이 군에 입대를 하였다 그러자 막상
아들의 손때가 묻은 양은냄비를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싱크대 깊숙이
넣어두었다.
계절이 몇 번인가 바뀌고 찬바람도 한발 물러서던 어느 날 문득 아들
생각이 나 싱크대를 열고 구석에 있는 양은냄비를 꺼내 보니 구멍이 숭숭
나 있다 순간 아주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버린 어이없는 낭패감에 힘이 쭉
빠졌다 아 이럴 줄이야....... 진작 알았더라면 아들이 그리울 때 눈물을
흘리지 말고 꺼내 보면서 손질을 잘해둘 것을, 후회가 되었다 항상 그대로
있을 것으로 믿고 소홀히 생각한 탓에 저 지경이 되어버린 양은 냄비를
보면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평소 아들에게 칭찬에 인색했고, 군에 보낼 때마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다 어른처럼 크고 작은 일들을 알아서 척척 해내 주기를 바랬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모자지간의 관계는 저 양은 냄비에 생긴 구멍처럼 흠이
생겼고 그곳에서 부풀어 오른 상처들이 구멍을 만들고 있음을 나는 몰랐다.
아들이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구멍 난 냄비일지라도 내다 버리는 것은 아들에 대한 어미로써의 사랑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져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을 대하듯이- 2
물끄러미 바라보다 생각 끝에 꽃씨를 심기로 했다 자신이 화분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냄비에 흙을 담고 아들이 좋아하던 봉선화씨를
묻었다 정성껏 씨앗을 뿌리고난 후 열흘이 지났다 아침햇살에 뾰족이
파란새싹이 내밀고 있었다. 그리도 보고 싶던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아들이 휴가를 올 때쯤이면 봉선화도 꽃을 활짝 피우겠지.
예쁜 꽃잎을 따서 손톱에 꽃물을 빨갛게 들여 주면 행운을 얻을 수 있다
기에 더욱 조바심이 일었다.
처음엔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이 신비스러워 요리조리 들여다보며
흙이 마를새라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었다 가녀린 줄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면서 한 발짝 두 발짝
세상을 향하여 커가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라 미소를 머금곤 하였다 마치
아들이 곁에 있는 듯 미덥고 흐뭇하였다. 그러다가 작은 집안일들에 매달려
동동거리며 사느라 소원해져 버렸다. 무더운 날씨에 물주는 일조차 며칠째
잊고 무심했었다.
그동안 뜨거운 햇볕에 목말라 하는 봉선화를 보면서 화분이 된 양은 냄비는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아마도 흙으로 구운 화분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속성을 한탄했겠지. 나의 경솔함을 탓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을 듬뿍
뿌렸다. 분무기에서 솟구치는 물줄기가 햇살을 받으면서 오색찬란한 빛으로
내려앉는다. 군복을 입은 아들의 싱싱한 얼굴이 물방울 속에서 싱글거리고
있는 듯 했다.
이튿날이었다 죽은 줄로 알았던 봉선화의 싱싱한 모습이 내게로 다가왔다.
나의 손길이 사랑의 물줄기로 닿았나 싶어졌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물기
오른 봉선화 꽃대가 하늘을 밀어 넘길 듯 서있었다 언젠가 시험을 잘못
봤다고 풀죽은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힘내”한 마디 하면 바로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기운을 내던 모습이 파란 잎으로 겹쳐져 싱싱하게 피어났다.
생명력의 강인함과 신비로움, 죽음의 기로에서 선택된 봉선화의 삶. 굉장한
지식에서 얻음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의 깨달음이었다. 화분이 된
양은냄비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면서 그 특성에 맞는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해주었다. 위기를 모면하고 탐스럽게 자라는
봉선화가 한없이 대견스럽다.
2주일쯤 지나면 꽃이 피려는지 잎겨드랑이마다 작은 꽃대가 가느다랗게
나오고 있다. 파란 잎을 어루만지니 가슴은 환희에 가득 찬 그리움으로
넘쳐났다 여름밤이면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마당에서 사랑에 겨워 빙빙 돌려주던 것처럼 화분을 끌어안고 기쁨에 젖어
춤을 추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봉선화 꽃이 아름답게 필 때쯤이면 아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화분에다 물을 주었다.
첫댓글 양은냄비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면서 그 특성에 맞는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해주었다. 위기를 모면하고 탐스럽게 자라는 봉선화가 한없이 대견스럽다.
화분이 된 양은냄비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면서 그 특성에 맞는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