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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에는 다양한 환자가 들른다. 처방전을 들고 약을 받아가는 환자도 있지만, "잠이 안 와서요", "감기약 좀 주세요"라며 곧바로 약사를 찾는 환자도 많다. 이 중에 조현병이나 양극성장애 환자가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무심코 집어 드는 일반의약품이 처방약과 충돌하거나, 가까스로 잡혀 있던 기분 상태를 다시 흔드는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처방전 없이 약국을 찾는 환자에게서 약사가 무엇을 알아채야 하는지,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인 환자가 일반의약품을 사러 올 때 무엇을 막고 무엇을 권해야 하는지 약국 상담의 시점에서 이야기해보자.
PART 1. 조현병과 양극성장애 ― 두 질환을 짧게 짚어두기
조현병(schizophrenia)은 사고·지각·감정·행동에 광범위한 장애가 나타나는 만성 정신질환이다. 평생 유병률은 약 0.7%로 알려져 있으며[1],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처음 발병해 재발과 호전을 반복한다. 핵심 병태생리는 뇌 내 도파민(dopamine) 신호의 불균형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뇌변연계의 도파민 과활성이 환각·망상 같은 양성 증상을, 전전두엽의 도파민 저활성이 감정둔마·무의욕·사회적 위축 같은 음성 증상과 주의력·기억력 저하 같은 인지 증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2].
양극성장애(bipolar disorder)는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들뜨는 시기(조증 또는 경조증)와 가라앉는 시기(우울)를 반복하는 만성 기분 장애다. 평생 유병률은 1형과 2형을 합쳐 약 2%로[3], 한 번이라도 조증이 있었으면 1형, 경조증과 주요우울 삽화만 있으면 2형으로 분류된다. 진단의 핵심은 "조증 삽화가 있었는가" 한 가지 질문에 달려 있다. 그러나 환자 본인은 경조증을 "기분이 좋다"고만 느끼는 경우가 많아, 양극성장애가 진단되지 못한 채 우울증으로만 치료받다가 항우울제 사용 중 조증이 나타나서야 양극성으로 재진단되는 경우가 흔하다[4].
두 질환은 서로 다르지만, 임상에서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조현병에도 우울·조증 양상이 동반될 수 있고, 양극성장애에서도 환각·망상 같은 정신병적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두 질환의 약물 치료에서 비정형(2세대) 항정신병약이 공통적으로 쓰이며, 약사가 두 환자군을 함께 이해해두면 도움이 된다.
PART 2. 처방전 없이 약국을 찾는 환자 ― 약사가 먼저 알아채는 신호
조현병과 양극성장애의 평생 유병률은 각각 약 0.7%, 약 2%로[1, 3], 합치면 인구의 3% 가까이가 겪는 흔한 질환이다. 그러나 약국에서 "저 조현병이에요."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환자는 드물다. 아직 진단을 받기 전이거나, 약을 임의로 끊은 뒤 재발 중이거나, 가족이 대신 와서 어색하게 약을 사 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양극성 조증·경조증을 의심해야 하는 신호
가장 흔히 놓치는 장면이 조증과 경조증이다. 환자 본인은 "기분이 좋다"고 표현하며 먼저 병원을 방문하지 않는다. 이 때 "며칠째 잠을 두세 시간만 자도 하나도 안 피곤해요", "요즘 머리가 너무 잘 돌아가서 일이 막 풀려요" 같은 멘트가 단서다. 미국정신의학회 진단 기준(DSM-5)상 조증의 핵심은 수면 욕구 감소다. 잠을 안 잤는데도 활력이 유지되는 상태는 단순 불면이 아니라 조증의 가장 강력한 신호이며, 여기에 사고비약· 빠른 말· 충동적 소비가 동반되면 더욱 그렇다. 이 시점에 약사가 디펜히드라민(diphenhydramine)을 건네는 순간, 잠재된 조증을 가속할 수 있다.
조증과 경조증은 지속 기간·기능 손상·정신병적 양상의 유무에서 갈리며, 이 차이가 양극성 1형과 2형을 가르는 핵심 기준이 된다[5]<표1>.
조현병·재발기 환자를 의심해야 하는 신호
약을 임의로 끊은 뒤 재발이 시작되는 환자도 약국에서 신호를 보낸다. 환자 본인 대신 가족이 자주 약을 사러 오거나, 정기 처방을 받던 환자가 갑자기 발길을 끊거나, 반대로 처방 없이 진정·수면 일반의약품만 자주 찾는 경우다. "누가 나를 감시한다", "TV에서 내 얘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항정신병약은 환자가 임의로 중단하는 일이 흔하다. 환자의 약 40%가 1년 이내, 75%가 2년 이내에 약을 중단하는 것으로 보고되며[1, 7], 약을 중단했을 때 1년 내 재발률은 약 64%로 유지군의 27%에 비해 두 배 이상 높다[6]. 재발이 반복될수록 예후가 악화된다. 처방 간격이 갑자기 변하거나 보호자가 대신 약을 받으러 오는 빈도가 달라진다면, 이 신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병원 안내가 우선인 응급 신호
위와 같은 의심 신호와 별개로, 약국에서 즉시 병원 안내가 필요한 응급 상황이 따로 있다. 이럴 때는 일반의약품을 권하거나 자가 관리를 안내할 게 아니라, 보호자에게 연락을 하거나 정신과 진료를 안내하는 것이 우선이다.
약사가 알아 두어야 할 대표적인 응급 상황은 다음과 같다. 환자가 스스로를 해칠 위험을 보일 때(특히 양극성장애 환자가 우울이 심한 시기나 항우울제만 복용하다가 조증으로 바뀌는 시기[3]), 항정신병약 복용자에게서 신경이완제악성증후군(NMS, neuroleptic malignant syndrome)이 의심될 때(고열·근경직·발한·의식 변화, 사망률 5~20%[5, 9]), 리튬(lithium) 복용자에게서 중독 신호가 보일 때(손떨림·구토·설사·운동실조, 발열·탈수·NSAIDs 추가 직후 빈번[10]), 클로자핀(clozapine) 복용자에게서 응급 부작용이 의심될 때(고열·인후통·흉통·심한 변비, 한국에서 치료저항성 환자에게만 처방되어 처방 빈도는 낮지만 무과립구증·심근염·장마비 모두 사망 가능[8]), 라모트리진(lamotrigine) 복용자에게서 스티븐스-존슨 증후군(SJS, Stevens-Johnson syndrome)이 의심될 때(첫 8주 내 발진 + 발열 또는 점막 병변, 동아시아인 위험 증가, SJS 5%·TEN 30% 사망률[11]), 그리고 급성 조증이나 정신증이 발현될 때(통제 불가능한 흥분·환각·망상의 급격한 악화)다. 각 상황의 구체적 신호는 <표2>에 정리했다.
PART 3.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인 환자가 일반의약품을 사러 올 때
조현병·양극성장애 처방약은 좁은 치료역과 다양한 부작용을 가진다. 환자가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드는 일반약 한 알이 의도치 않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약국에서 자주 마주치는 경우를 <표3>에 정리했다.
1. 리튬 복용자와 NSAIDs ― 가장 위험한 일반의약품 상호작용
리튬은 양극성 1형 유지요법의 중심 약물이며, 양극성장애에서 자살률을 낮추는 근거를 가진 유일한 기분조절제다[12]. 그러나 치료역이 매우 좁다. 일반적으로 급성기에는 0.8~1.2 mEq/L, 유지기에는 0.6~1.0 mEq/L를 목표로 하며[3, 13], 1.2 mEq/L를 넘으면 독성 위험이 높아진다. 최근 ISBD/IGSLI Task Force 합의는 노인이나 신기능 저하 환자에서 0.4~0.6 mEq/L까지 낮추는 것을 권고한다[14].
리튬은 거의 전적으로 신장에서 배설된다. NSAIDs는 신장 내 프로스타글란딘(PGE2) 합성을 억제하여 사구체 여과를 줄이고, 동시에 원위세뇨관에서 나트륨 재흡수가 증가하면 리튬도 같은 경로를 따라 재흡수된다.
그 결과 리튬 혈중농도는 NSAIDs 시작 후 수일 내 평균 약 15~60%까지 상승할 수 있고, 인도메타신에서는 최대 58%까지 보고된다[15]. 뉴질랜드 Medsafe는 리튬과 ACEi·NSAIDs 병용 후 사망에 이른 70대 여성 사례를 공식 보고한 바 있다[16]. 리튬 복용자의 진통 상담은 단순하다. 이부프로펜· 나프록센· 덱시부프로펜 등 NSAIDs는 피하고, 아세트아미노펜을 우선 권한다.
환자가 다른 의원에서 NSAIDs를 처방받아 복용 중이라면 정신과 전문의에게 알려 리튬 농도 모니터링이 필요함을 전달하도록 안내한다. 같은 신장 기전으로 ACE 억제제·ARB·티아지드계 이뇨제도 리튬 농도를 약 25~40% 올린다[17].
2. 항정신병약 복용자와 종합감기약·수면유도제 ― 진정·항콜린·QT의 삼중 위협
조현병·양극성장애 환자가 약국에서 가장 자주 찾는 일반의약품이 종합감기약과 수면유도제다. 이 둘이 항정신병약과 부딪히는 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 두 약이 모두 진정 작용을 가질 때다. 쿠에티아핀(quetiapine)· 올란자핀(olanzapine)· 클로자핀(clozapine) 등 비정형 항정신병약은 강한 진정 작용을 가진다. 1세대 항히스타민제(디펜히드라민· 독시라민· 클로르페니라민 등)나 진해제인 덱스트로메토르판이 더해지면 졸음·어지러움·낙상 위험이 급격히 올라가며, 노인에서는 섬망 위험이 보고되기도 한다.
둘째, 두 약이 모두 항콜린 작용을 가질 때다. 1세대 항정신병약(할로페리돌(haloperidol)· 클로르프로마진(chlorpromazine)), 일부 비정형 항정신병약(올란자핀·클로자핀)은 자체 항콜린 작용을 가진다. 항히스타민제가 포함된 감기약· 멀미약(디멘히드리네이트 등)이 더해지면 입마름· 변비· 배뇨곤란· 시야 흐림이 가중되고, 심하면 마비성 장폐색이나 요저류로 이어질 수 있다.
셋째, 두 약이 모두 QT 간격을 연장시킬 때다. 항정신병약 중 할로페리돌(특히 정맥주사)· 지프라시돈(ziprasidone)· 클로자핀· 쿠에티아핀은 QT를 연장한다[18]. 같은 방향의 약물이 더해지면 치명적인 부정맥(TdP, torsade de pointes) 위험이 올라간다. 약국에서 볼 수 있는 QT 연장 가능 약물로는 일부 마크로라이드계 항생제(에리스로마이신· 클래리스로마이신), 플루오로퀴놀론, 아졸계 항진균제, 시탈로프람(citalopram)· 에스시탈로프람(escitalopram) 같은 SSRI가 있다[20]. 환자가 이런 약을 처방받아 오는 경우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항정신병약 복용자에게 권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 대안은 <표4>에 정리했다.
3. 양극성 환자의 자가 수면유도제 ― 디펜히드라민이 조증을 깨우는 순간
양극성장애 환자가 약국에서 가장 자주 집는 일반의약품이 1세대 항히스타민 성분의 수면유도제다. 환자는 "잠이 안 와서요"라고 말하지만, 그 불면이 조증의 전조일 가능성을 항상 의심해야 한다.
DSM-5에서 수면 욕구 감소는 조증의 핵심 진단 기준이다. "잠이 안 와요"가 "잠이 안 오는데 안 피곤해요"로 바뀌는 순간, 이미 조증 또는 경조증이 시작됐을 수 있다. 이 시점에 디펜히드라민이나 독시라민을 건네면 일시적으로 잠은 들 수 있어도 다음 날 졸림과 항콜린성 인지 혼선이 더해지고, 1세대 항히스타민의 REM 수면 억제 작용이 일주기 리듬을 더 흔든다[21].
약사가 던질 수 있는 핵심 감별 질문은 한 문장이다. "며칠째 잠을 못 주무셨어요? 그런데 낮에 피곤하세요?" 수면 욕구 감소가 의심되면 일반의약품 수면제를 권하지 말고 정신과 진료를 안내한다. 단순 입면 곤란이라면 길초근(valerian root)·호프(hops) 복합제(레돌민) 같은 비항콜린· 비진정 계열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안이지만, 길초근은 간 효소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보고되어 발프로산(valproate)·카르바마제핀(carbamazepine) 복용자는 주의가 필요하다.
4. 건강기능식품·생약 ― 가장 자주 누락되는 상호작용
"이건 약이 아니라서 괜찮죠?"라고 묻는 환자가 많다. 그러나 정신과 약 복용자에게는 건강기능식품과 생약도 처방약과 부딪힐 수 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세인트존스워트(St. John's Wort)다. 하이퍼포린(hyperforin) 성분이 PXR을 활성화시켜 CYP3A4·CYP1A2·P-gp를 강하게 유도한다 [22, 23]. 그 결과 CYP3A4·CYP1A2 기질인 클로자핀· 쿠에티아핀· 아리피프라졸(aripiprazole) 등 항정신병약의 혈중농도가 떨어져, 안정 상태이던 조현병 환자가 세인트존스워트 자가 복용 후 정신증이 악화된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24]. 동시에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 작용으로 양극성에서 조증 전환과 세로토닌 증후군 위험을 올린다.
이외에도 카페인 함유 에너지 음료· 고용량 카페인 보충제는 클로자핀 농도에 영향을 주고 양극성 환자의 수면 박탈을 악화시킨다. 마황 함유 한약은 교감신경 흥분 작용으로 조증을 자극할 수 있다. 정신과 약 복용자가 어떤 형태든 건강기능식품·생약을 새로 시작하려 할 때는, "전문의에게 한 번 알리고 시작하자"는 안내가 가장 안전한 답이다.
PART 4. 약국에서 도울 수 있는 비약물 영역과 마무리
복약순응도 ― 가장 큰 재발 위험인자
항정신병약을 임의로 중단했을 때 1년 내 재발률은 약 64%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6], 양극성장애 역시 자의 중단이 가장 흔한 재발 원인이다[3]. 약사가 처방을 받으러 온 환자에게 "오늘 약 잘 챙겨 드셨어요?", "다음 진료는 언제예요?" 한마디만 건네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흡연·음주·카페인 ― 약물 농도와 직결되는 생활 변수
조현병 환자의 흡연율은 일반 인구의 2~3배에 달한다. 흡연은 CYP1A2를 유도하여 올란자핀· 클로자핀의 혈중농도를 낮춘다. 흡연자의 클로자핀 농도는 비흡연자에 비해 평균 약 50% 낮은 것으로 보고되며[25], 갑자기 금연하면 며칠 만에 농도가 급상승하여 클로자핀의 경우 평균 약 72% 상승한 사례도 보고된다[26]. 환자가 금연을 시작하거나 흡연량을 크게 줄일 때는 전문의에게 미리 알려 용량 조정과 농도 모니터링이 가능하도록 안내해야 한다. 음주는 항정신병약의 진정 작용과 간독성을 키운다. 카페인은 양극성 환자의 수면을 깨뜨려 조증을 자극할 수 있다.
가족 상담의 출발점
가족이 약을 대신 받으러 오는 자리는 단순한 처방 전달의 자리가 아니다. "요즘 잠은 잘 주무세요?", "약은 빠뜨리지 않고 드시던가요?", "평소와 달라 보이는 점은 없으세요?" 같은 한두 마디면 재발 위험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가족 심리교육은 조현병·양극성장애 모두에서 재발률을 유의하게 감소시키는 것으로 일관되게 보고된다[27, 28].
마무리
조현병과 양극성장애의 진단과 치료는 정신과의 영역이다. 그러나 환자가 가장 자주 마주치는 의료인은 약사다.
처방전을 받은 환자에게 약을 정확히 안내하는 일만이 약사의 역할은 아니다. 처방전 없이 약국을 찾는 환자가 흘린 한마디에서 단서를 읽고, 정신과 약 복용자가 피해야 할 일반의약품을 가려내며, 필요할 때 병원 진료를 안내하는 것, 여기까지가 약국 상담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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