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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
마 22:23-33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마 22:23-33 / [부활에 대한 질문;막12:18-27,눅20:27-40] 같은 날에 사두개파 사람 몇이 예수께 왔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 부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24) `선생님, 모세는 ㄱ) 만일 어떤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형수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재산을 상속할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ㄱ. 신25:5) 25) 그런데 우리 이웃에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첫째가 결혼해 살다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형수는 둘째와 결혼하였습니다. 26) 이 둘째도 아들이 없이 죽었고 그 여자는 다음 동생과 결혼을 하여 차례로 일곱째 동생까지 내려갔습니다. 27) 그런 후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28) 이 여자가 칠 형제를 모두 자기 남편으로 삼았으니 부활 때 이 여자는 칠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30) 부활한 다음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31-32)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것을 성경에서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나님께서 ㄱ)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ㄱ. 출3:6) 33) 군중은 예수의 이 말씀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부활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하였습니다.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23-28)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성경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에서 부활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제기한 질문은 모세오경에 나타나는 수혼법에 근거한 질문이었습니다. 수혼법은 계대 결혼 또는 형사취수제라고도 합니다.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의무를 이행하여 형의 이름으로 가문을 대신 이어 주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수혼법에 따라 남편이 계속 죽어서 일곱 남편까지 모두 죽고, 그 여인마저도 죽었다면 그 여인이 부활하는 때에 어떤 남자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는 황당한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이전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의 질문에 비해서 악의적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 권위를 실추시키겠다는 간교한 질문입니다.
너희가 오해하였도다(29-33)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부활 이후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과 동일할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이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고 하십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 이외에는 그 외의 모든 성경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전체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내세와 부활,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오경만을 믿고 있는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모세오경 중 하나인 출애굽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출 3:6; 3:15; 4:5). 예수님 당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던 시대로부터 수천 년이 지나 그들의 유골조차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오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부활을 설명하자 무리가 듣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적용: 당신은 부활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두개인처럼 부활을 부정하고 있습니까? 또 당신이 부활할 것을 믿고 있습니까? 서로 나누어 봅시다.
코로나19 이후로 교회를 멀리하는 성도들이 매우 많아졌습니다. 새벽기도회나 금요 철야 기도회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적어졌습니다. 영적으로 빈곤해지고, 무뎌지고, 쇠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더 이상 시험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기도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시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무엇이나 홀로 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 설 교 >
그리스도의 부활, 그 이후
마 22:23-33, 고전 15:20-28
한 사냥꾼이 있었는데,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으려고 화살을 겨누면서 독수리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뱀을 잡으려고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뱀을 쳐다보았더니 뱀도 어딘가를 노려보았는데, 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개구리를 노려보았습니다. 개구리도 마찬가지로 꿈쩍 않고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개구리는 무당벌레를 잡으려고 노려보았습니다. 무당벌레도 꼼짝 않고 있었는데, 진딧물을 잡아먹으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냥꾼은 그 먹이사슬을 보다가 슬그머니 화살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이 경이로운 현장을 목격한 후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혹시 누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는 것은 아닐까?” 사냥꾼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언제인가는 죽음에 의해 잡아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을 피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통곡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분이 있습니다. 생명이요 부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그 이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본문 고전15:20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했습니다. 첫 열매가 열리고 나면, 그 뒤를 이어 계속해서 열매들이 열리게 되는 것처럼 성도들이 그 뒤를 이어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1-22)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와 죽음과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은 아담입니다. 한 사람 아담 안에 모든 인간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범할 때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죽음의 형벌도 모든 인간이 받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와 같이 예수님의 순종으로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의 길이 열려지고, 이 예수님 안에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의 사슬로 하나로 묶여 있었는데, 예수 안에서는 ‘의로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담 안에서 하나로 묶여있던 사슬을 끊어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함께 죄에 묶여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승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베다니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지만 말씀 한마디로 다시 살게 하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침체된 신앙이 살아나게 되고, 사명이 살아나게 되고, 삶의 의욕이 살아나게 되고, 인간관계가 새로워지고, 예배생활에 활력이 생기게 되고, 봉사와 헌신이 살아나게 됩니다. 기쁨, 감사, 영생의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수많은 순교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고난을 당해도 그 고통은 잠깐이고, 장차 받을 영광은 영원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모든 제자들과 많은 성도들이 다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2. 말씀을 신뢰하여 믿을 때 부활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다.
고전15:3-4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했습니다. 제자들이 한동안 부활을 믿지 못하여 의심하고,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되었던 것도 주님이 이미 여러 차례 십자가의 일과 부활에 대한 예고의 말씀을 믿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두 주류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주류라고 항상 티격태격하는 적대적인 사이였는데, 신기하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협력하였습니다. 결국 이 두 종파 모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주류라고 한 것은 다 거짓되고, 헛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리새파는 자기들이 가장 경건한 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로, 구약성경 외에 추가로 조상들의 유전을 신앙과 생활의 한 표준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지 않았고, 주님이 책망하신 것처럼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는 자들이었고,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귀족계급의 사람들로 헤롯 왕가와 로마인들에게 호의적이며, 일반 서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바리새인들과 교리적으로 부딪히는 적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거부하면서 구약성경의 권위를 일부만 인정하고 대부분 부정하였습니다.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좋은 성도는 성경대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성경이 약속한 복을 받게 되고 생명의 부활과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요, YMCA의 운동을 일으켰던 월남 이상재 선생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일제의 무수한 협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가 작전을 바꿔서 그를 돈으로 매수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루는 총독부가 보낸 한 청년이 돈 뭉치를 들고 이상재 선생을 찾아와서 선생 앞에 돈 뭉치를 건네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 이 정도의 돈이면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디 시골에나 가서 조용하게 사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그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 사람아, 나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세. 그러니 나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생각은 버리게' 그러자 청년은 선생을 겁내 줄 생각으로 넌지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인도의 간디나 영국의 처칠은 100세를 산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얼마나 더 사실 것 같습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라는 으름장입니다. 그러자 선생은 대뜸 말하기를 '이 사람아!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죽지를 말아야지, 죽기는 왜 죽어?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거야' 이 청년이 그 대답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선생님, 불로초까지 먹었던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겠다고 장담합니까? 무슨 불사약이라도 드셨습니까?' 선생이 대답을 합니다. '그럼, 먹었지! 나는 너희 천황도 먹지 못했던 불사약을 먹었지. 그래서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걸세. 나는 살아서 너희 나라 일본이 망하고 군국주의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 것 거야' 청년은 웃긴다는 듯이 '세상에 그런 약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이상재 선생은 옆에 놓여 있는 성경을 손에 쥐고서는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그 약일세. 이것은 신약과 구약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일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었네. 그러니 그까짓 돈으로 나를 매수하려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게' 그러면서 그 청년을 쫓아내 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믿는 자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신뢰 하고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 성도는 장차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반박하기 위해서 신명기 25:5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좀 과장해서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어었다가 죽어 후사에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는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이 질문은 예수를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서 억지로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유치한 질문이었습니다. 창세기 38:8에 보면 유대 민족의 풍속 중에는 가문의 대를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맡아 후사를 얻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풍속은 아랍민족, 힌두교도, 일본인 등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30절의 말씀에서 "부활할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5:42-49절에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썩지 않는 몸, 강한 몸,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 영생하는 몸입니다. 전혀 새로워진 몸입니다. 연못 바닥에 잠자리 애벌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 줄기를 타고 물 위로 올라 간 수많은 친구들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는 누구든지 일단 물 위로 올라 간 후에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 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 와서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물속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도저히 불가능 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도의 부활도 애벌레와 같이 탈바꿈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두 번째 답변은 31-32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 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말은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인데, 과거에는 조상의 하나님, 또는 역사적인 하나님이란 뜻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산 자의 하나님으로 더 의미를 새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과거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은 육은 비록 죽었지만 지금도 하나님나라에 가서 살아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찌 그 분들 뿐이겠습니까? 앞서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다 영원한 천국에 가서 살아계십니다. 이 분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는 산자의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의 하나님으로 살아 계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현재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다고 믿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요, 아버지이심을 믿게 될 때 인생길이 괴로워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고, 험한 시험과 환난이 와도 두렵지 않게 살 수 있고, 좌절과 절망이란 있을 수 없고, 마음을 바로 가지고 의롭게 살게 되며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곧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현재로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절대로 의지하고 믿고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2. 말씀을 신뢰하여 믿을 때 부활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다.
3. 성도는 장차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우리 모두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시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마 22:23-33 / 노경모 목사
믿지 않는 집안에서는 설 연휴에 친척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를 지내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조상에게 잘 하고 있다.’ 또는 ‘나는 조상에게 잘 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그것은 조상에게 불효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집안 전체가 믿지를 않으면 제사지내는 문제 때문에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고 이것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불신자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상에게 효도하는 것인데 왜 기독교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반대하는가? 기독교는 조상을 모르는 불효의 종교가 아니냐?’ 하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천주교에서는 1995년부터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허용을 했습니다. 천주교 초창기 때에는 귀신을 숭배하지 않기 위해서 제사하는 것을 거부하다가 순교한 분들도 계셨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은 것 같고 조상을 기리고 효도하는 것은 참 좋은 풍습인데 왜 기독교에는 그것을 허용하고 있지 않느냐 기독교는 편협한 종교가 아니냐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서 위축되지 말고 정확하게 답변을 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제사는 하는 것은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0-21절에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사람은 죽으면 이 땅에서 그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면 그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이 세상을 떠돌아 다닙니까? 그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에 갑니다. 그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천국에, 믿지 않았으면 지옥에.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영혼이 떠돌아 다닙니까? 천국 아니면 지옥인데..
그러므로 조상의 영혼이 떠돌아 다니다가 제사를 차려주면 와서 제사를 받고 제사 음식을 먹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제사지내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조상이요? 조상은 없다고 말씀드렸지요? 육체는 흙으로 돌아갔고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에 있습니다. 제사지내면 귀신이 좋아하지요. 귀신이 볼 때 제사 지내는 것은 자기들을 섬겨주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어느 남자분이 사람만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척척 알아 맞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당을 찾아가보니 무당기가 있다고 무당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중간 과정은 제가 생략합니다. 결국 그 사람은 무당이 되어서 굿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눈에는 조상이 보인데요. 설날 같은 명절에 제사를 지내면 조상 귀신들이 와서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데요. 죽은 조상들, 그 집안의 돌아가신 조상인 할아버지가 제사 지내는 데에 온다고 해요. 실제로 자기가 봤다고 해요. 자기 눈에만 보인 거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집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어느 날 제사지내는 곳을 가게 되었네요. 그런데 이 분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이 눈을 열어서 그 제사지내는 곳에 찾아오는 것들의 정체를 보여 주는데 죽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거짓으로 꾸민 귀신들이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제사드리는 사람들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귀신들이 그냥 찾아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많은 돈을 들여 조상들을 공경한다고 제사드리는 것이 누구를 섬기는 것이라고요? 네 바로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둘째, 기독교는 어른을,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자기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인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우리 예수님도 부모를 공경하셨습니다.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구약을 읽어 보십시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부모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자식들은 죽이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모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출애굽기 21장 15절을 볼까요?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마태복음 15장 4절도 읽어 봅시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지 않으셨습니까?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제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해 인간이 지켜야 할 계명이고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인간끼리 지켜야 할 계명인데 이 중에서 가장 첫 번째가 되는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이렇게 까지 부모 공경을 중요시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에서 3절을 봅시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누가 기독교를 조상도 모르는 불효의 종교라고 합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특히 기독교를 비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안됩니다. 분명히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조목조목 차분히 설명해 주세요.
셋째,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입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 할지라고 세상을 떠나면 애석하고 슬퍼도 그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해 있고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갔으면 그 영혼은 천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형성이 됩니다. 할아버저 할머니 아빠 엄마 형 누나등..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는 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이런 관계를 전혀 모르는 것이지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만 이러한 인간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면 이런 인간관계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형님의 관계보다 훨씬 더 좋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일곱 형제가 있는데 큰 아들이 부인을 두고 죽었습니다. 상속을 잇기 위해서 둘째가 그 형수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셋째가 그 형수와 결혼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째까지 그 형수와 결혼했습니다. 일곱째도 죽고 그 형수도 죽었습니다. 부활 때에 서로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갔다고 합시다. 천국에서 어떻게 부를까요? 천국에는 눈물도 없고 근심도 없고 고민도 없는데.. 여섯 명의 형제들이 자기 형수를 ‘여보’라고 불러야 하나, ‘형수’라고 불러야 하나, ‘제수씨’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을 한다면 그 곳은 천국이 아니지요. 천국은 고민이 없습니다. 이 여자가 고민을 해야 합니까? 누구를 보고 ‘남편’이라고 해야 하나, 누구를 보고 ‘도련님’이라고 해야 하나, 누구를 보고 ‘시아즈버님’이라고 해야 하나.. 이 여자가 고민한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지요.
천국에는 이런 인간관계가 없습니다. 다 서로 보고 즐겁고 기뻐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10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살아 있을 때에 시집가고 장가간 그 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사들과 같이 서로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관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갔고 영혼은 천국과 지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역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살아있는 성도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을 보살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32절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죽은 우리들의 조상들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마치 죽은 조상들이 살아있는 것 처럼 여기고 제사를 지낸다면 우리의 하나님을 죽은 자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귀신에게 제사하는 일은 귀신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반복해서 행하게 된다면 그 사람과 그 가정은 귀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과 가정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살아있는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께 잘 해야 합니다. 정성껏 공경해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 공경한다는 것은 그것은 거짓이요. 귀신들의 놀음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하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효도는 효도 받을 사람이 살아있을 때 해야 합니다. 아무리 효도하려고 해도 정작 효도 받으실 분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면 효도를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무엇을 압니까? 절을 한다고 압니까? 무얼 잡수시기나 하십니까? 아무리 정성을 들여 제사상을 차려놓아도 결국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은 죽은 조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쓸데없는 짓입니다. 귀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한 집에서 같이 살았던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은 사람에게 절하면 안 된다는 것을 교회에서 배워서 알았기 때문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께서 “요놈의 자식, 너는 내가 죽어도 절 안 할 거지. 불효자식 같으니라고.”라고 분을 내시며 매우 섭섭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머니를 설득했습니다. “할머니, 돌아가신 분에게 절하면 알아요? 몰라요?” “죽었는데 어떻게 알아.” “그래서 제가 절을 안 하는 거예요. 지금은 할머니가 살아계시니까 얼마든지 절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절대로 저는 절 안 해요. 돌아가신 다음 절 안 한다고 섭섭해 하시면 미리 절할 테니 지금부터 절 받으세요.”라고 말하고 큰절을 했습니다. 저는 그 다음 날 아침부터 아무리 바빠도 학교에 가기 전에 꼭 할머니 방에 들러 “할머니, 미리 절 받으세요. 돌아가시면 안 해요.”하고 큰절을 하고 학교로 뛰어갔습니다. 몇 달인가 이 일을 계속하던 어느 날 할머니께서 저에게 절 그만하라고 하시면서 “나도 예수 믿겠다.” 하시며 교회를 따라 나오셨습니다. 그 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예수 잘 믿고 사시다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 천국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계실 때에 효도를 해야 그것이 효도입니다. 죽은 자에게 효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잊지 많아야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죽은 자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런 생각들을 예수믿는 사람이 해서도 안되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명기 32장 17절에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잘못된 자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요한계시록 9장 20-22절에도 결국 이런 자들이 지옥에 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점점 예수님을 잘 믿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시대가 바뀌고 세상의 분위기가 어느 쪽으로 흘러간다 하더라고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지키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합니다. 시류에 따라갑니다. 세상 분위기와 풍습에 편승합니다. 그러다 보니깐 성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점점 하나님과 우상, 귀신을 겸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래서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이 더더욱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희석시키지 말고 그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 잘 했다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산자의 하나님
마 22:23-33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에서 "산 자의 하나님이다!" 그렇게 제목을 삼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생명의 하나님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러분 그 산 자의 하나님이라 그럴 때는, 먼저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첫 번째로, 죽었던 분입니다. 또 죽어야 마땅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살았다는 것에는 여러분과 제게, 바로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메시지로 오늘날 모든 응답과 해답이 여기 다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옛날 사람들이 아이를 낳았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지가 먹을 거 지가 타고난다!' 그러더라 구요. 그러면 그게 사실로 살아보면 이해가 돼요. 아이를 낳는 순간, 어떤 면에서 부모가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고, 아이를 낳는 순간 아이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부모를 붙여주고, 또 부모를 붙여줄 뿐 아니라 돈을 계속 벌어서 대어주도록 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이어집니다. 어떤 면에서 부모보다도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예비해 놓았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지금, '예수 생명을 받았다! 다 끝입니다!' 답이 여기 다 있어요.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 먼저 우리가 각인해야 될 것은, 이제는 기도응답이, '지금 내려주옵소서!'가 아니고 이미 주어진 기도응답을, 이미 주어진 모든 준비된 것을 찾아 누리면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브라함이 말한 것처럼, 아브라함이 참 복음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 여러분 지금 없는 것을 뺏어내고 찾아내는 게 아니고, 준비된 것 보면 돼요. 눈만 뜨면 돼요.
만약에 쥐가 창고 앞에서 굶어 죽었다! 그것은 진짜 나무랄 정도가 아니고, 그건 뭐라고 말을 해야 됩니까? 등신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뭐라 말할 수 없어요. 오늘 참 복음을 가졌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 '궁핍하다! 연약하다! 배고프다! 슬프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그것은 말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준비되어 있는 것에 눈만 열면 돼요. 하기야 사람이 되게 피곤하고, 너무 어려울 때는 밥상에 앉아서 밥을 퍼먹는 것조차도 힘이 들더라 구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뭘 아셔야 하면요. 조금만 힘을 얻어버리면 됩니다. 눈만 조금만 열어 버리면, 이미 여러분에게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완벽하게! 이 축복된 역사를 보면 됩니다. 깨달으면 됩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누림'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죽었다가 살았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 아마 기념하고 또 이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해결 다 했습니다. 바로 그 분,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이 성찬 예식에 대해서 많은 학설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성찬식이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성례식'이라 그래서 오늘 성찬식 주일도 아니고, 성례주일이라 그랬습니다. 교회에서는 성례가 두 가지입니다. 학습세례 세례식과 그 다음에 성찬식, 이 두 가지! 뭐 구 교회에서는 장례식도 성례라 그러고, 결혼식도 성례라 그러고, 그런데 상당히 좀 불합리한 것이 결혼을 성례라 그러면 한번 결혼하면 끝까지 잘 살아야되는데 결혼이 얼마나 오해되어 가지고, 좀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부터 성례를, 결혼식은 성례로 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만 세례식과 그 다음에 성찬식 그랬습니다.
이 성찬식이라는 것은 원래 성만찬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지금 성경에서 보여주신 것은 저녁입니다. 그래서 저녁을 '만찬'이라 그러잖아요. 한문으로... 그래서 여기서 앞에 '성'자를 붙여서, 거룩하다는 '성'자를 붙여서 구별된 만찬입니다. 그래서 성만찬 그랬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시간이 1시쯤 되었으니 점심때 아닙니까! 그러면 점심때 먹는 것을 뭐라 그럽니까? '오찬'이라 그러죠. 지금은 '성오찬' 굳이 붙이려고 그러면... 그래서 '오찬, 만찬' 빼버리고 성찬식 그랬습니다. 초대교회는 너무 이 성찬식이 귀중하니까, 모일 때마다 했습니다. 구역예배 드릴 때도 했고, 가정예배 드릴 때도 했고, 주일날 예배에 모일 때마다 했습니다. 그런데 모일 때마다 떡을 해 가지고 성찬식을 하려고 그러니까 번거롭고, 시간 걸리고... 이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1년에 두 번씩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일 때마다 또 성찬식을 하는 배경에서, 나누어주던지, 앞에 떡을 갖다 놓고 이러니까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 나누어주는, 주로 우리는 이제 나누어주는 방식 아닙니까! 어떤 교회에서는 쭉 나와 가지고 앞에 떡을 갖다 놓고, 그 다음에 잔을 갖다 놓고, 포도즙을 갖다 놓고, '와서 퍼 잡수어라!' 그렇게 했거든요. 그랬는데 와 가지고 조금씩 떡을 떼어 가면 되는데, 얼마나 많이 떼어 가지고 떡이 모자라 가지고... 이런 것도 있었고, 이런 재미있는 이런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분배에서 조금 문제 있고, 또 시간도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성찬식을 나누어드리는 것으로 했습니다.
그것은 나누어 먹든지, 떼어먹든지, 뭐 어떻게 해 먹든지 상관없는데, 중요한 의미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되겠어요. 이 성찬식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화체설이라 그럽니다. 주로 구 교회에서 이렇게 시행을 하죠. 화채설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마 이건 상당히 좀 받아들이기 우리는 힘들어서 그걸 취하지는 않습니다 만은, '떡을 먹을 때에 예수님의 살로 화한다!'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이 포도즙을 마실 때에, '예수님의 피로 화한다!' 그걸 화채설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마치 살을 먹고 피를 먹는, 직접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먹는 의미를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그랬지만 나도 그렇고, 아무리 성찬예식을 할 때에 떡을 떼어먹어도 그 떡이 순간에 살로 변해 가지고 질기다던가, 그런 경험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즙을 마실 때에, 한번도 비릿한 냄새가 난 적이 없더라 구요. 끝까지 포도즙이지! 그래서 이 화채설은 신교에서는 받지 않습니다. 구 교회에서 주로 해 내려오는 그런 경우가 되고...
그 다음에 또 한가지가 뭐냐하면, 초대 교구 중에서 쯔핑글리를 중심으로 해서 단순히, '성경은 기념하라!' 그랬다. 그래서 기념 설이 있습니다. 떡과 포도즙은 그냥 상징적으로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또 말을 하고 그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이래서 여러분과 제가 지금현재 참여하고 있는 것은, 기념 설을 취하면서 뭐라 그랬느냐? 영적 임재 설이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잡고 기념하라!' 그래서 기념할 때에, 그래서 떡을 먹고 포도즙을 마실 때에 성령이 임하신다! 성령으로 우리에게 사실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더 큰 의미로 체험할 수 있다! 체험되게 한다! 그래서 영적 임재 설이라 그랬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정말 떡을 먹고 포도즙을 마실 때에, 그것은 떡과 포도즙이 변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여러분의 심령과 생각과 마음에 임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큰 은혜의 승리로 실제적으로 인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죽었다는 말, 또 죽음에 대한 의미, 우리는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냥 학설들에 대한 이야기만 또 우리가 구체적으로 붙잡고, '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임한다!' 이 사실을 확인하시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는 뭐냐하면. '살았다, 부활했다!' 이 말은 뭐냐하면, 성경에서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좀 설명을 했습니다 만은, 한번 받아합시다. "하늘 나라가 분명히 있다!" 지금 이 땅에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와 여러분이 분명히 어디예요? 하늘나라에 간다! 새로운 나라가 준비되어 있다! 그 이야기를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새로운 나라다!' 그럴 때에, 많은 말로 지금 표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나라, 그 나라, 하늘나라, 그 영광을 한마디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곳이로다!' 말로 표현이 안되고, 입으로 표현이 안되고, 감정으로 표현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늘 그런 이야기를, 막 귀가 따갑도록 말씀 드렸어요. 그 나라 가니까, 전부 하늘나라! 얼마나 좋으냐?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막 좋다!' 그런데 그 말하는 자체가 벌써 아닙니다. 왜? 사람의 말로 표현이 안돼요. '꽃이 핀다! 새가 운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만들 수 있어요. 제가 미국가보니까 정말로 멋있는 그런 집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집을 하루를 돌아도 다 못 돌겠어요. 그런 집이 있더라 구요. 그런데 꽃을 심고, 막 화원 정원에 새가 날아다니고, 그런데도 그걸 보고 '천국'이라 소리 안 합니다.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입으로, 말로, 눈으로도 표현이 안됩니다.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표현이 안 됩니다. 이 말 한마디에 진짜 여러분 은혜 받아야 됩니다. '표현이 된다!' 그러면 별로 그런 것이죠. 너무 좋아서, 그래서 제가 늘 이 말씀을 할 때마다 한마디밖에 안 나와요. 뭘 하느냐? 너무 좋아서 할말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한번 받아합시다. '아~!' 이 말은 너무 좋아서... '아~!' 그 나라의 영광, 이 축복된 영광이 여러분과 제가 성령으로만이 이해가 되는 그런 표현입니다. 여러분 이 축복과 역사가 오늘 그 나라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오늘 표현한 말씀을 조금만 말씀드리면, 그러면 그 나라가 어떤 나라냐? '사망이 없는 곳이다!' 그랬어요.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죽음이 없어요. 사망이 없어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인간의 근본적인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공포가 뭐냐하면, 사망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사망의 왕으로, 사망을 가지고 여러분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에 전부 굴복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 현실적으로 바로 사단의 장난이요,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죽는다!' 그러면 또 그냥 죽는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 죽을 때 그냥 죽느냐? 물론 간단하게 죽습니다 만은, 죽음에 배경은 아파 죽고, 슬퍼 죽고, 뭐 엎어져 죽고, 뭐 여러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냥 죽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런 게 없어요. 아픈 것도 없고, 슬픈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고 그것이 얼마나... 여러분 이 한가지만 없어졌다! 모든 걱정근심 다 없어요. 지금 뭔가 죽음 때문에 매여있는 것이 우리 근본 인간의 모습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그 나라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나라에는 슬픔도, 곡하는 것도, 염려도...
그래서 여러분 제일 이 땅에 슬픔과 곡하는 애통이 뭐냐하면,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늘 고통하고, 슬퍼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이런 사망이 없다! 그렇게 성경이 말씀하고, 그 다음에는 그 나라에는 뭐가 없느냐? 결혼이 없어요. 여러분 결혼 좋죠. 그러나 결혼, 진짜 인생을 망치는 것이 결혼입니다. 좋은데도 망치는 것이 결혼이에요. 결혼이라는 것이 참 요물이에요. 좋다가도 나쁘고, 나쁘다가도 좋고... 결혼, 뭘 해야 됩니까? 아이를 낳아야 되죠. 아이가 좋은데도 낳으려고 그러면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없어요.
우리교회 몇 일전에도 아이를 낳은 사람이 연락이 왔는데, 아이가 일찍 나오려고 그래가지고 요즘에는 급한가 봐요. 때도 안되었는데 나오고... 그것가지고 너무 아파 가지고 몇 일을 고생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낳았는데, 아들을 낳았다고 그러면서 너무 좋아 가지고... 아이를 낳는다! 이게 여자 분들이 아이 낳는 고통만 없다 그래도 진짜 낳을 만 하죠.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담석증이 걸렸을 때에 얼마나 고통스러우냐? 그럴 때에 쉽게 표현하더라 구요. '아이를 낳는 고통보다 힘들다!' 그러더라 구요. 그러면 고통에 대한 것이 대번에 안다 구요.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고통보다도 크다!' 그러면, 아이를 낳아본 사람은 금방 이해가 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 그 나라에는 자녀를 생산하고, 결혼하고, 그래서 서로 좋아하고, 나빠하고 이런 것이 없어요. '남편 좋다! 아내 좋다!' 상관없어요. 그래서 그 나라에는 결혼이 없다! 그래서 말라기 2장 15절에 보면,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뭐냐하면, 중요한 가정의 이유 중에 하나가 자녀 생산!
그런데 문제는 그 나라가면 이게 필요 없어요. 왜? 자녀를 생산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과 제가 하늘나라 갔다! 안 죽는데, 여기다가 자꾸 놓으면 곤란해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이 땅에는 종족 보존을 위해서 아이를 낳아야 됩니다. 아이를 안 놓는 이것은 뭔가 하나님 앞에 어떤 면에서 참 잘못된 것이죠. 그런데 그 나라 가면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왜? 영원히 삽니다. 아이를 낳고 종족 보존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그럴 필요가 없다!
그 다음에 결혼해서 여러분 주의할 것은 뭐냐하면, 사실상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결혼할 때마다 꼭 다짐을 시키는 것이, 서약하는 것이 있어요. 뭐냐하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남녀의 정조를 지키고, 부부의 도리를 지키고, 참 행복하게 살아라!' '서약합니까?' 이러거든요. 그러면 남자들은, '저 뒤에 들릴 때까지 하라고...' 그러면, '예!' 그러고 고함을 지르거든요. 그러고는 돌아서 가지고 이게 잘 안되더라 구요. 여자들은 뭐, '고개를 숙이라고...' 그러니까, 예쁘게 그냥 고개를 숙이고, 그래놓고는 지 마음대로 달아나 버리고... 참 어려운 것이 이 부분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하느냐 하면, 지금 이 땅이 너무 어렵고,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뭐냐하면, 최고의 어렵고, 괴로운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 위안처로, 그 다음에 이 땅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뭘 주셨느냐? 가정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정을 주실 때에 슬프고, 고통스럽고, 때에 따라 기쁘고, 어렵고, 힘들고, 그런 모든 과정을 능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의 단위로 가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해내요.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저주의 시간이 왔다!
그러면 어느 정도냐 하면, 결혼이 참 괴롭고 고통스러우니까 결혼만 없어도 살만해요. 여러분 멀쩡한 여자가 결혼한번 잘못하면 영 버려버립니다. 그래서 잘나갔던 처녀들이 결혼하고 나서 쪼다가 된다! 하루아침입니다. 잘나갔던 총각이 결혼하고 바보가 되었다! 하루아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통계를 보면, 70%가 '죽지 못해 산다!' 그럽니다. '저 인간 죽었으면 좋겠다! 저 여자 없었으면 좋겠다!' 이래가지고 억지로 산다! 이겁니다. 70%더라 이겁니다. 통계가 나왔어요.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나라 영광이 바로 이해가 되고, 그 영광의 모델로 결혼을 주었거든요. 결혼은 천국에 모델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안 들어가면 이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그 나라는, 복음가지고 가게 된 그 나라는 결혼이 필요가 없어요. 왜? 결혼해서 좋은 것보다도, 자식을 낳고 좋은 것보다도, 더 좋은, 더 좋다는 정도가 아니고 풍성한 것이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결혼해서 좋을 필요도 없고, 자녀 낳아서 좋을 필요도 없고, 자녀 낳아서 노후 보장받을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뭐냐하면, 결혼이 필요가 없다! 그렇게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 그랬느냐 하면, 22장 30절에 보면,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랬습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부활하면 그 나라에서는 귀찮은 시집장가 안가도 된다!" 제가 이 표현이 좀 과한지 모르지만, 여러분 잘 살펴보세요. 아무리 '행복하다!' 그래도 결혼이라는 것은 엄청난 멍에가 됩니다. 아무리 '행복하다!' 그래도 결혼 통해서 인간은 멍에를 지도록 되어 있어요. 자녀의 멍에, 여러 가지 멍에에 매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라도 멍에를 지게된 배경은, 그나마 이 땅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멍에를 져도 가정을 통해서 위안 받는 것이 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가는 것이죠.
요즘 이걸 알고 약삭빠른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독신주의를 부르짖고 안 가는 사람 참 많아요. 우리교회에도 지금까지 안 간 사람... 하기야 못 가서 안 간 사람도 있습니다 만은, 어쨌든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참 붙잡아야 될 것은, 그 나라에는 정말 이 땅에서 이런 한시적인 어떤 방법으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결혼 자체가 필요가 없더라! 그러니까 얼마나 그 나라에는, '결혼이 필요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 이겁니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는 뭐냐하면, 한번 받아합시다. "천사들과 같이 된다!" 나는 이 한마디 말에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천사 얼마나 신기합니까! 시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뭐 날개를 달았는지, 안 달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날개를 달 필요도 없지 싶어요. 그냥 하나님 앞에서 이 우주 천지를, 하나님의 나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이 안 들어요. 엄청난 그런, 참 부분에 우리가 마음놓고 영적인 교제를, 그리고 영육간에 교제를,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사이를 가지면서 누리게 되어 있다!'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뭐냐하면,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배경, 그 다음에 우리가 결혼이 필요가 없다는 배경에 있어서, 여기에 오늘 성경에 뭐라 그랬느냐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 다음에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누구입니까? '자녀로, 영원히 죽지 않고, 이런 축복과 은혜 속에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성경이 말씀을 했죠. 그렇다 그러면, 오늘 마태복음 22장 32절에 보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런데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느냐 하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삼대를 거론했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러면, '이삭의 할아버지!' 그래야 되고, 그러면 누구의 할아버지, 할아버지 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만약에 이것이 계속해서 유효하다 그러면. 여러분과 저는 천당 가서 절하고 다니느라고 무릎 다 까질 겁니다. 명절 되면! 명절 될 것도 없지만, 절하러 다닌다고... 왜? 내 선조가 얼마나 많습니까! 고 고 고 고 고 선조가... 전부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할아버지 왔습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눈을 못 들것 같아요. 그게 안됩니다. 그런 제도가 아닙니다.
이 땅에 가정의 제도는 천국에 모형으로 줬을 뿐이고, 바로 천국에 올라가면 여러분과 제가 전부다 똑같이 하나님 자녀! 그리고 그 하나님의 특권과 자유를 마음껏 함께 누립니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뭐냐하면요. 안 믿는 사람들이, '상놈'이라 그러는데, 진짜 내가 독한 말을 붙여야 되겠습니다 만은, 예의상 안 붙이겠습니다. 여러분 진짜 뭘 모르니까! 그래서 성경이 뭐라 그러느냐? '무식하니까, 이 말한다!' 그랬거든요.
일곱 형제가 있는데, 유대나라의 풍습입니다. 결혼을 했다가 남자가 죽으면 둘째한테 시집을 가도록 되어 있어요. 바로 둘째 형제에게, 왜? 이건 유산과 그 다음에 자녀문제입니다. 그런데 둘째가 죽어버렸습니다. 결혼하고 자녀도 없이, 셋째가 또 왔습니다.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그런데, '부활 때에 누구의 부인이 되겠습니까?' 곤란하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식하기 때문에 무식한 질문을 하는구나!' 그러면서, 부활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대해서 조금 설명했습니다. 천사와 같이, 거기에는 결혼할 필요도 없고, 결혼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으냐 하면, 하늘나라 영광에 눈이 안 열리면,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지혜가 어두워져 버립니다. 판단이 어두워져 버립니다. 여러분 정말 복음 잡고, 무시기도 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복음 잡고 말씀 앞에 섰을 때에, 여러분 이 땅에 모든 판단과 모든 결정이 지혜롭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무식하다는 게 다른 게 아니거든요. 복음이 이해가 안되면 여기에 무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나라, 그 영광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천사와 같이... 그래서 지금 우리를 뭐라 그랬느냐? 히브리서에,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 나라가 완전히 회복이 되어서 천사와 같이 되는 이런 축복과 역사!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과 제게 이런 천국의 그분이,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축복이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여러분과 제게 '그 분은 그분이고, 나는 나다!' 이러면 내게 산 자의 하나님이 안 되시는 거죠. 이 산 자의 하나님이다! 바로 이 산 자의 하나님을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모실 수 있는 것이 뭐냐하면, 세례라는 겁니다. 세례!
그래서 성경에 보면, 로마서 6장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 산 자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역사가 누구와 연합해요?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산 자와 연합하는 것이다!' 어떻게 연합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산 자의 하나님에 생명이 내 안에 오시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과 멸망의 저주와 재앙에서부터 여러분과 제가 완전히 해방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명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분이 어떻게? 세례 받는 동시에 연합한다! 그래서 세례라는 것은 연합한다!
그러면 이미 세례 받았다! 혹시 세례 못 받은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느냐? 앞으로 세례 받아야 되겠죠. 못 받은 사람은... 세례 받은 사람은 날마다 연합입니다. 뭐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부활로, 참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영접하는 동시에 누가 내게 임합니까? 성령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연합하십니다. 여기서 모든 답이 다 나오죠. 여러분 누가 함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이 지식이 그렇게 많이 배워도 잘 모르는가 봐요. 저는 우리 손자한테, '야, 희락아! 하나님 어디 계시냐?' 그러면 가슴을 두드리거든요. 알더라 구요. 그런데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이 믿음이 열리지 않으면 몰라요.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시죠. 아무리 바보라도, '하나님, 어디 계시냐? 내 안에 계십니다!' 바보가 아닙니다. 천재입니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산 자의 하나님이 정말 나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실 때에,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끝났습니다. 이미 예비 되어 있습니다. 한 주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영원한 승리가 계속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파의 도전
마 22:23-33 / 이정선 목사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에는 주요한 세 개의 종교적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바리새파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약 7,000명쯤 되었다고 하는데, 유대사회에서 가장 큰 메이저 집단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정과 율법에의 헌신으로 특징져지는 이 집단은, 그러나 매우 현세적이기도 했습니다. 종교적 열정과 경건으로 잘 포장은 하였지만, 탐욕과 거짓이 그들의 주된 동기였습니다. 대부분의 서기관들, 율법학자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잘 모르는 일반 백성들을 멸시했습니다. 율법의 위탁자를 자처하는 그들은 그만큼 자부심과 자존심도 강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원래 이 바리새파 사람이었지요.
두 번째 그룹은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에 비해 소수이지만, 실제로 부와 권력을 장악한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여 대제사장 계급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헬라 문화를 많이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있어서도 바리새파와 견해를 달리했습니다. 바리새파는 모세오경과 랍비들의 전통을 똑같이 율법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랍비들의 전통이라는 것은 모세오경에 대한 해석과 실천에 대한 규범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탈무드라든가 미쉬나 같은 것들도 율법으로 인정된단 말이지요. 그러나 사두개파는 오직 모세의 오경만을 율법으로 인정했습니다.
이 두 그룹,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회원이 70명이고 대제사장이 의장이 됩니다. 그래서 총 71명으로 구성이 되는데, 예수님이 재판을 받은 것도 이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서이고, 나중에 사도들이 붙잡혀서 재판을 받은 것도 이 산헤드린 앞에서였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에센파인데, 이 그룹은 현실적인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사막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언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 거리에 나타나 예수님을 만나 토론을 했다면 성경에 나왔을 텐데, 그런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세례요한이 이 에센파에 속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현실정치에서 떠나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건생활에 전념했던 것이 세례요한의 행태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서 헤롯당이니 셀롯당 같은 소수 그룹도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헤롯당은 헤롯을 지지하는 정치적 그룹이었고, 셀롯당은 유대의 독립을 추구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이 셀롯당 출신이 한 명 있었지요.
본문의 내용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바리새파와 충돌을 하셨고 사두개파와 충돌한 경우는 훨씬 적은데, 그것은 아마도 바리새파가 유대인들의 종교와 생활을 훨씬 더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사상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가 헤롯당과 손잡고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다가 실패한 것을 본 사두개파 사람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예수를 신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나아와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사람들이 위대한 스승에게 가르침을 얻기 위해 질문하는 형식입니다. 물론 사두개파 사람들의 속내는 높이 띄웠다가 떨어뜨리려는 것이지요.
만일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말로 무너뜨린다면 바리새파에 대한 승리가 되겠지요. 그래서 아주 교묘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는 교묘한 질문을 만들어낸 것에 필적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형의 상속자를 낳아주어야 합니다. 지금도 그런 게 있는지 모르지만, 전에는 삼대독자는 군대를 안 갔습니다. 대가 끊어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수가 적으면 생존하기가 어렵습니다. 수가 많아야 힘도 커지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계속해서 사는 방법은 자식을 낳는 것입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없이 죽으면 영원히 잊혀지고 소멸하는 것처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가 끊어진다는 것은 재앙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없이 죽으면 편법을 사용해서라도 대를 잇게 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는데, 동생이 형의 아내와 결혼해서 첫 아들을 낳으면 죽은 형의 법적인 아들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습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는데, 이 형사취수제도가 율법에도 도입되었습니다.
이제 사두개파 사람들의 수수께끼가 나옵니다. 우리 중에 칠형제가 있는데, 첫째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둘째가 형수와 결혼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둘째도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차례에 따라 셋째가 그 여자와 결혼했는데 역시 자식이 없이 죽었고, 넷째와 다섯째, 여섯째, 그리고 일곱째까지 다 그 여자와 결혼했지만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나중에 이 사람들이 부활한다면 그 여자는 일곱 중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
참 대답하기 곤란한 수수께끼 아닙니까? 쉽게 생각해서, 그거야 한 여자가 일곱 남편을 갖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유대인의 문화에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남자가 일곱 아내를 갖는 것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두개파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은 부활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있어서도 안 됩니다. 부활이 정말로 있다면 이런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두개파의 주장은 부활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이런 율법을 주었다는 것은 모세 자신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라는 것은 나중에 생겨난 개념이지 원래의 율법에는 없었던 것이란 말이지요. 사두개파는 모세의 오경만 율법으로 인정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부활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두개파가 부활을 부인하는 데는 그들의 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두개파는 사독이라는 사람이 세웠는데, 사독은 주전 280년 경 안티고누스 소카에우스라는 랍비의 제자였습니다. 안티고누스는 하나님을 섬길 때 죽은 다음의 상급 같은 것을 기대하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사독은 이 스승의 가르침을 발전시킨다고 하면서 죽은 다음의 부활이나 상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파는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이 모두 소멸하는 것이고, 사후의 세계나 부활 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영적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도 부인하였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말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뿐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은 참 무섭습니다. 자신의 믿음에 따라서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혼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사람도 있었잖아요? 또 며칠 전에는 미국에서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정리하고 산에 올라가 휴거를 기다리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시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야 휴거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자기들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겠지만, 그 전에는 아무도 그들의 믿음을 포기하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라는 것이 무섭단 말이에요. 그러므로 올바른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얼마나 철저하고 단호하던가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그분들처럼 딱한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까?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도 없고 천국과 지옥의 심판도 없으며, 천사나 영도 없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믿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 딴에는 아주 교묘한 문제를 만들어서 예수를 무너뜨리고 부활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나섰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들의 실상을 잘 드러낸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신 계시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엉터리로 해석해서 거짓된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에 불과합니다. 사실 이 사두개파 사람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대결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면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단 말이에요. 우리가 성경을 잘 배워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경을 근거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게 될 것을 알지만, 부활 후의 우리 모습이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기는 했지만, 그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도 대단히 수준이 낮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으로 부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장애를 가진 채로 부활할 것입니다. 아기 때 죽었으면 아기의 모습으로 부활하고, 늙어서 죽은 사람은 늙은 모습으로 부활하겠지요. 이게 바리새파의 초보적인 부활에 대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들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부활 후의 모습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면 부활 후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는 대단히 다를 것이 확실합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존재양식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거란 말이에요. 지금 사두개파 사람들은 한 여자가 일곱 형제 모두와 결혼을 했으니 부활하면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인데, 그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과 관점에서 부활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인 것입니다. 바리새파의 부활 개념에 의하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지요.
부활이라는 것은 육체 가운데 있던 인간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관문입니다. 부활 이편의 삶은 모든 한계와 연약함을 내포한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것이고, 부활 저편의 삶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이편의 모습과 저편의 모습이 다를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 변화가 부활을 통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우리 인간의 트랜스포메이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모습 그대로, 혹은 죽을 때의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부활의 성격에 전혀 합당하지 않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우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한 육체가 어떤 성격일 것인지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육체를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고 숨어 있던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육체가 가진 모든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함정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으십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의 아내가 된다는 개념 자체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과 가족의 근본적인 기능은 자식을 낳는 것인데, 천국에서는 자식을 낳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사들과 같이 됩니다.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오경만 인정하는 사두개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세오경을 가지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은 가시떨기에 붙은 불 가운데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출 3:6).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세보다 500년 전에 살았던 조상들입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서 육체와 영혼이 소멸되었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라고 하심으로써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모세만을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로 인정하는 사두개파 사람들로서는 불만이나 이의가 있을 수 없지요.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KO를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겠다고 말씀하시던 차였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야 예수를 넘어뜨릴 소재로 부활을 선택하였고 부활은 없다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으로서는 부활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치실 기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준비하라는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부활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믿음 가운데 살고 계십니까? 우리의 육체는 늙고 병들기도 하고, 결국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히 9:27). 그래서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요 5:29). 욥이 극심한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욥 19:25-26).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에게 이 부활의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해하지 말라
마 22:28-30, 창세기 3:3-5 / 이성희 목사
어떤 이가 자신의 생일을 맞아 네 친구를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꼭 와야 할 친구가 안 왔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한 친구가 “그럼 우린 꼭 와야 할 친구 아닌가?”라고 하더니 그만 그 사람이 가버렸습니다. 그는 다시 “아이고, 가지 말아야 할 친구가 가버렸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또 다른 친구는 “그럼 가야 할 사람은 나란 말인가?”하더니 또 한 사람이 가버렸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친구가 충고하였습니다. “야, 이 친구야 말을 조심해야지.” 그는 “내 말을 모두 오해한 것 같네. 난 그 친구들에게 한 말이 아닌데”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럼 나한테 한 말이란 말인가?”라고 하더니 마지막 한 사람이 가 버렸습니다. 그의 말을 오해한 친구들 모두가 다 가버렸습니다. 말은 오해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오해는 갈등의 씨앗입니다.
현대사회의 화두는 역시 ‘소통’입니다. 소통은 이해범위를 넓히고, 오해범위를 줄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통의 핵심은 ‘의미공유’입니다. 정확한 이해를 증가하고, 오해를 감소하면 의미공유가 많아집니다. 오해의 주원인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 새로운 정보의 입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 대한 오해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46년 동안이나 지었는데 어떻게 사흘에 지을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킴이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예수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기에 오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오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아들이거든’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오해하였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변호사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하는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 24:5에는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전염병이라고, 소요하게 한다고, 이단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는 율법의 벽을 허물지 못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신령한 지식이 없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신령한 은혜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그리고 당시의 가장 강력한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자들까지 모두가 자신의 편협한 눈으로 예수님을 보므로 오해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강조하고 소중히 여기던 전승을 버리지 못하므로 생긴 오해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어떤 이가 결혼하여 자녀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 자녀를 갖게 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인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엘과 오난이 다 자녀가 없이 죽었고, 유다는 셋째 아들인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를 통하여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유다는 순수한 가문의 번성을 위하여 시아버지를 통하여 아기를 낳은 다말에게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베레스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음을 일러줍니다.
이런 유대인의 전승을 통하여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이 아들들이 한 여인을 취하였다면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해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 대한 수많은 오해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 큰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여 생기는 오해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첫째, 오해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마태복음 22:29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마태복음 22:23에는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라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부유한 귀족이며 지배계급에 속한 자들입니다. 제사장들 가운데 대부분이 사두개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헬라사상을 받아들이고 모세오경은 인정하지만 기타 구전이나, 문서나, 바리새인의 유전이나, 서기관의 성경해석을 배척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하였습니다. 부유한 계층인 사두개인들은 현실에 안주하고, 내세보다 현세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형제들이 다 죽은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은 구약전체를 가리킵니다. 구약을 ‘율법과 선지자’ 혹은 ‘모세와 엘리야’라고 불렀습니다. 부활교리는 전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교리가 성경에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헬라어로 ‘헤 뒤나미스 투 데우’라는 말입니다.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흙으로 만든 사람의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어 사람이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신 능력을 말합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쉬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사두개인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믿으면서 부활은 믿지 못하여 부활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반쪽만 믿는 어리석음이 곧 그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부활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죽으셨나 라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오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해 오는 오해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면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회 앞에 예수님이 섰을 때에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에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 분의 말이 “그건 도저히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자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였는데 동정녀 탄생을 왜 못 믿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한다면 그 분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이란 어느 한 부분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다 믿던지 못 믿으면 다 못 믿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못 믿으면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신앙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분리된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으니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오해는 멸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젊은 관원이 영생의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까닭에 예수님과의 소중한 만남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재물이 있으면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가 결국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멸망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는데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자기 눈앞에 두고도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진리를 자신의 머리와 세상의 지식과 같은 다른 데서 찾은 오해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래 전 우리교회가 사할린에 처음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총회 세계선교부 총무 목사님과 제가 먼저 사할린에 가서 그곳 상황을 살폈습니다. 사할린에서 일을 마치고 하바로프스크에 잠시 다른 교회의 일로 들렀는데 공항에 내리니 어떤 고려인이 저희를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무턱대고 그 분을 따라 가는데 이상한 숲속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과 저는 차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총무 목사님이 제게 귓속말로 영어를 하는 것입니다. “We don't know who he is”(우리 저 사람이 누군지 몰라). 깜깜한 숲속을 지나는데 목사님의 그 말에 갑자기 온몸이 오싹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려움보다 믿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어느 목사님이 부탁하여 대신 공항에 차를 가지고 나왔는데 알고 보니 참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 분을 모르니까 오해를 한 것입니다. 알고 보니 좋은 분인데 모르면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잘 알아야 오해가 없습니다. 성경을 잘 알면 오해가 없는데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오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 영생 얻는 진리를 알아야 오해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우리의 구원을 아는 것은 오해를 없이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데이비드 토머스라는 남자는 42년 동안 매주 꼬박꼬박 동갑내기 이웃인 레이첼 존스의 집 문 밑에 편지 한 통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 편지 한 통에는 그들이 32살 때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한 오해를 풀고 관계를 개선하자고 하는 내용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레이첼 존스는 편지를 보지도 않고 불태워버렸습니다. 자신의 구혼자였던 데이비드 토머스를 상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로 오랜 세월을 지났습니다. 데이비드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려 청혼하였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 사이의 오해가 풀리고 결혼을 승낙하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숙원인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혼할 당시 그들의 나이는 74세였다고 합니다.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오해는 손해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하나님께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당시의 사두개인들뿐만 아니라 현재의 많은 반 기독교인들이나 이단들이 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몰라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잘 알아야 오해가 없습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잘 아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오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마태복음 22:30에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시는 인류의 번식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시 결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어느 부부 세미나에 저와 아내가 참석하였는데 서로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제 마음을 전달하는 편지에 “여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장가도 시집도 없다는데 우리 예수님 천천히 오시게 기도 합시다”라고 썼더니 재미있다고 뽑혀서 세미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저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부부가 좋아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부가 아닌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는 말은 우리가 죽은 후에 부활하게 되면 영적 존재로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부활은 영체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조반을 드셨습니다. 제자들이 잡은 고기를 드셨습니다. 조반을 드셨다는 것은 육체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에 문이 닫혔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육체로 부활하셨지만 영적 육체이심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육체이지만 지금의 육체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들과 비교하신 것은 천사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개인에 대해 공격하신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부정하고, 천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영적 무지 때문에 오해를 부른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세상 철학으로 성경과 하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 철학과 지식과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의지하여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볼 때에 오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해하였도다”라는 말은 ‘플라나스데’라는 말인데 헬라어의 중간태입니다. 헬라어는 능동태, 수동태 말고 중간태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간태는 내가 내 자신을 위하여 하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기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완악하고 비판적인 마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이므로 스스로 자신을 기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해란 자기기만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오해란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오해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오해란 자기를 속이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3:18에는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지혜로 하나님을 판단하게 되면 오해가 생깁니다. 작은 머리에 크신 하나님을 넣으려고 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미련한 일입니다. 속이는 일입니다.
언젠가 해외여행 때의 일입니다. 동행하던 어느 여자분이 기착지에서 가방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방에 웬걸 그렇게 많이 넣어왔는지 작은 가방에 많은 짐을 꽉꽉 집어넣어 공항에서 가방의 옆구리가 터진 것입니다.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과 여성의류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 분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얼른 짐을 챙겨 넣고 수습을 했지만 일행들도 상당히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지극히 작은 머리와 경험에 크신 하나님을 집어넣어 제한하고 판단하면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면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작은 머리에 제한하면 우리 머리가 터질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상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미술관에 가면 바닷물을 퍼내고 있는 아이를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의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머리로 풀지 못해 바닷가를 거닐고 있을 때 어느 아이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내는 광경을 환상으로 보게 됩니다. “얘야 뭘 하고 있니?”라고 물으니 아이는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다 퍼서 바다를 말려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너는 참 어리석은 일을 하는구나. 네가 어떻게 작은 조개껍질로 이 큰 바닷물을 다 말리게 할 수 있겠느냐?” 그 때 아이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아저씨는 저보다 더 어리석어요. 어떻게 그 작은 머리로 크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있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인간의 작은 머리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계산하고 다 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면 성경의 말씀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도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교만을 자신감이라 오해하고, 겸손한 사람은 자신감을 교만이라고 오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오해하기 참 쉽습니다.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7에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스스로 속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해는 자기기만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절대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한 사람이 뜻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5-3=2)와 (2+2=4)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던진 그 사람의 설명은 의미와 재미가 있었습니다. (5-3=2)란, 어떤 오해(5)라도 세 번(3)을 생각하면 이해(2)할수 있게 된다는 뜻이고, (2+2=4)란, 이해(2)와 이해(2)가 모일 때 사랑(4)이 된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오해란 문자 그대로 이해를 잘 못 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생긴 일들을 보세요. 거절, 부당함, 뜬소문, 빈정거림, 고통, 오해, 굴욕, 평판을 잃음,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 대한 오해에서 온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을 헐면 사흘에 일으키겠다는 말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바알세불의 힘이라고 생각하여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이런 정도의 오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3:4에는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뱀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박하여 하와로 하여금 오해하게 하였습니다. 오해는 자기기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해는 스스로 속게 하는 것입니다. 뱀이 사람을 스스로 속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입니다.
결 론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좋은 글들이 많은 작은 책이 있습니다. 어느 미국의 유명 과학자가 이 책에 ‘하나님을 믿는 10가지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는 지구가 돌아가는 속도가 시속 1,600km입니다. 만일에 이보다 느려서 시속이 150km이면 낮에는 타죽고, 밤에는 얼어 죽습니다. 둘째, 지구와 태양의 떨어진 거리는 신비합니다. 너무 멀어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도 안 됩니다. 셋째,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으므로 4계절이 있습니다. 만일 지구의 축이 수직이면 남북극은 얼음덩어리일 것입니다. 넷째, 지구와 달의 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정한 거리에 있으므로 바다가 평안합니다. 다섯째, 지구의 두께가 3m만 두꺼우면 지구에 산소가 없게 됩니다. 여섯째, 대기권의 두께가 지금보다 얇으면 지구는 별똥별에 의해 불바다가 될 것입니다. 이 외에도 몇 개를 더 열거하였습니다.
히브리서 3:4에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우리 집을 지으신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 참 지식이며 지혜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오해하지 않습니다. 호세아가 말한 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는 말이 중요하고 새겨야 할 소중한 말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면 오해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식에 의존하면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오해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세요. 성경의 말씀들을 오해하지 말고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이 일러주신 대로 굳건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살아있는 믿음
마 22:31-33, 갈 2:19-20 / 강원용 목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아 계시는 동안 그 분은 민족으로서는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그 당시의 큰 세력 바리세파. 사두개파 사람들하고 항상 부딪혔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3가지다, (1)구약성서에 씌어진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것 (2)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만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이라는 것 (3)하나님이 계신 곳은 성전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 거룩하신 성전은 영원히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 이 율법과 선민과 성전 이 세 가지가 그들의 신앙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뿌리를 예수님이 다 건드리셨다. 가령 율법에 대하여 여러 군데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안식일에 대한 율법이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환자를 고친 것을 가지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했을 때 무어라고 했는가? 하나님께서 안식일의 율법을 준 것은 사람을 위해 준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선민사상에 대해서 율법학자가 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물어보았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하라고 했는데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이웃을 누구라고 대답했는냐 하면 사마리아사람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이다. 그러니까 선민사상을 거부한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집이기 때문에 영원한 집이다. 제자들이 물어볼 때 이 성전이 내가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사흘 안에 새 성전을 세울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직접 가야바의 궁전에 끌려가서 성전모독죄로 고발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이 세 가지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점은 유대인이나 예수님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점은 유대인들은 성경에 씌어진 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은 죽은 하나님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서 움직이는 산 하나님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각이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려고 왔다”그 예수님이 완성케 하려고 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5:43에 나온다. 바로 옛 성경 속에는 네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는데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네 원수를 사랑하라 왜? 내가 믿는 하나님은 선한사람, 악한사람 가리지 않고 햇빛을 비춰주고 비를 내려 주지 않느냐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바로 내 안에 와 있다. 우리가 열심히 믿는다는 것이 굳어진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을 때 성전 안에 이방인과 유대인과 남자와 여자의 사이의 막이 짝 벋겨져 버렸다. 예수님은 지금 막힌 담을 허시는 분이다.
그러면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지게 하고 바로 그렇게 받아드리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그러면 살아있는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통해 강림하시고 내 안에 계신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올 때 죄로 가득한 내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와 계시다는것은 영원한 생명이 내 안에 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얻었다는 말뜻이 된다. 그러면 그 분을 모시고 사는 내 삶 그것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내가 정말 예수의 몸이 되어지고 있느냐? 예수의 몸이라면 예수님이 땅위에서 하신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가 아닌가? 마 25:31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찾아와 주었고” 오늘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어디에서 보아야 하나? 우리는 우리의 선교의 대상이 고난 당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이 지구의 상처받은 자연까지 살펴야 한다. 우리가 몸이 되고 부단히 전진해 나가는 행렬 속에 어떤 환난이 와도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