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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온리원(only one)의 '참 나'>
제대로 된 교육이라면 '넘버원(number one)'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온리원(only one)'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도 '온리원(only one)' 사람입니다.
일일 고등학생 체험을 한 서울시 조 교육감의 인터뷰 중 마지막 대목이 이채로웠습니다.
"지난 30-40년 산업화 시대의 교육 패러다임은 넘버원 교육이었다.
1등을 육성해서 1등이 잘 돼야 나라가 잘 된다는 줄세우기식으로 교육이었다.
이젠 넘버원 교육에서 온리원 교육을 실현하고 싶다.
1등이 안 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꿈, 끼를 마음껏 발휘해
사회에서 유능한 인재로 인증받는 '오직 한 사람' 교육이 이뤄지길 바란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언급입니다.
사람은 고립단절의 '혼자'가 아닌 관계속의 '더불어' 존재이지만,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그만의 고유한 존엄한 품위의, 마땅히 존중받아져야 할 온리원(only one) 인간입니다.
오늘은 '온리원'의 '참 나'란 주제로 두 물음을 중심으로 그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게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이자 정의입니다.
내가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은 내 존엄한 품위의 근거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물어도 나를 알 수 없습니다.
온리원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과 끊임없는 대화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여 우리 각자를 향한 주님의 엄중한 명령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갈림없는 마음, 전 존재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닌 우상 숭배가 얼마나 큰 죄요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은 물론 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된 테살로니카 신도들에 기뻐하는 바오로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더욱 기도하게 되고 세상 우상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온리원, 참 나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자발적 하느님 사랑과 사랑의 표현인 기도는 필수입니다.
둘째, '나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입니다.
나는 하느님과 나의 이웃 사이에 있습니다.
여기가 나의 제자리입니다.
바로 여기 제자리로 끊임없이 돌아오는게 회개입니다.
하느님과 나와 너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나-너'는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 없는 공동운명체입니다.
하여 하느님 사랑의 첫째 계명에 이은 두 번째 계명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바로 둘째로 큰 계명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이 달렸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주었으면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나는 자비하다."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이방인, 과부, 고아, 가난한 이들을 각별히 사랑하십니다.
바로 내 자리는 하느님과 이웃 사이에 있고,
여기서 내가 할 일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제자리에서 항구히 사랑을 실천할 때 온리원, '참 나'의 실현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여 하느님과 끊임없는 대화의 기도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과 이웃사이에 있습니다.
하여 하느님과 아웃사이의 제자리에 끊임없이 돌아오는 회개입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과 이웃을 온 마음과 몸으로 끊임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온리원 인간으로 살 수 있기 위해 끊임없이 묻고 찾아야 할 답은 기도, 회개, 사랑 이 셋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온리원(only one)의 '참 나'를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
(시편 18,2-3ㄱ)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어떤 자매님께서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새로 이사 온 자기 집 맞은편 자매님 성격이 고약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새로 이사 온 자매님께서 ‘말을 거칠게 한다.’, ‘사람을 무시한다.’ 등등의 말을 듣다보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새로 이사 왔으면 동네 분위기 맞춰서 살 것이지 자기가 뭐라고 주인행세를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따끔하게 말을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런 일은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이 자매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자매님은 처음부터 강하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자매님이 새로 이사 온 바로 고약하다는 분이세요?”
이 말을 들은 자매님은 무슨 말인가 하더니만 ‘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으며 말합니다.
“아, 동네 사람들이 말하는 고약한 자매님이요?
그 자매님은 제가 아니고요.
제집 맞은편에 사는 자매님이래요.
성격이 보통 고약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결국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동네 사람들은 자기를 두고도 고약한 사람이라는 평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기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누군가를 혼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을 듣는 사람인데 말이지요.
어쩌면 우리 모두가 다 똑같습니다.
나는 옳고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그 옳고 정의로움으로 인해 아픔을 겪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옳고 정의로움을 보면서 수군대며 '고약한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우리에게는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보다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만이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완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점을 생각하고 실천하면 다른 계명들도 저절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봉사할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정의를 외치며,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듯이 과부나 고아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분노를 사는 행동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의 희망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마태 22,37-38)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느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도(또는 다른 것들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유일무이'입니다.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또 하느님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서 실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느님만 사랑하는데,
하느님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노력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지근한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묵시 3,16).
'미지근함'은 '사랑 없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신앙생활의 기본은 사랑이다."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아가페나 필리아나 에로스 같은 그리스어 단어를 말하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랑인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그렇게 세부적으로 구분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섬겨야 하고,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인데,
이 '사랑'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사랑'입니다.
옛날 구약시대 때에는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포심으로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순전히 '복'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참 신앙이 아니라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냥 이기적인 욕망일 뿐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마태 22,39-40)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1요한 4,20).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거짓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23-24)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일보다 형제와 화해하는 일이 더 급하고 중요하다는 이 말씀은,
이웃 사랑 실천을 바탕으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이웃 사랑을 '먼저' 실천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라는, 순서에 관한 가르침은 아니고,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먼저냐? 도 따지지 말고, 함께(동시에)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함께 실천하는 것과 같습니다.
효도한다고 하면서 형제간의 우애가 없다면, 그것은 사실상 불효입니다.
종교인들의 사회 참여 활동은 이웃 사랑 실천의 한 방식입니다.
그런 활동에 대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 안에서도 시비를 걸고 박해를 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신앙인은 교회 안에서 기도만 하면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웃은 교회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으니, 안에서도 밖에서도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도 역시 교회 안에만 계신 것은 아니고, 교회 밖에도 계시는, 글자 그대로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 사랑도 역시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어디에서든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혹시 "속세와 차단되어 있는 생활을 하는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하느님 사랑만 실천하고 이웃 사랑 실천은 안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분들도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거짓 사랑이라는 쪽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하느님도 안 믿고 예수님도 안 믿어서 하느님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웃 사랑 실천은 잘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그런 경우에 그 사랑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들이 정말로 사심 없이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그 이웃 사랑도 하느님 사랑과 통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을 외면하는 차갑고 이기적인 신앙인보다는
종교와 신앙이 없어도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더 좋게 보실 것 같습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
저는 본당 신부를 2년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경험해 보았습니다.
교적 인원은 약 4천 명이었고 주일 미사에는 1200명 내외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2년 4개월이란 시간이 짧다는 것을 느낀 이유는
성당을 떠나올 때 아직도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대하다보니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었고
혹 보이던 분이 보이지 않게 되면 ‘사정이 있겠지...’하며 넘겨버리기 일쑤였습니다.
한 가족을 챙기는 것도 힘든데 어찌 그 많은 신자들을 일일이 다 챙길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런 핑계로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분들에게까지도 더 다가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깝게 지낸다고 하는 분이 병원에 한 달 가까이 입원하고 있어도 연락 한 번 못 드리고 한 번도 찾아보지 못했고,
큰 결심을 하여 찾아보려 했더니 어제 퇴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비롯하여 저와 가까이 지내는 분들일수록 저에게 섭섭함을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또 ‘한 사람도 만족시키기 어려운데,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 잘 해 줄 수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결국 이렇게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갈등을 하고 있을 즈음, 유투브에서 박보영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며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처럼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장 큰 계명이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인데,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장로들의 다툼 등을 보면서 또 아버지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하느님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었고
더군다나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죽도록 해서 의사가 되었고
결혼을 하여 부유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사랑스러운 아들까지 있었던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심장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또 기적적으로 죽음이 임박했을 때마다 심장과 간의 두 번의 치유를 받고는 구토를 할 때까지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아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자 아들까지 버리고 하느님을 전하는 데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2년 동안 혼자 성경을 읽으며 공부하고 아주 작은 집을 얻어 교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말이 어눌하고 그 교회가 있는 곳이 우범 지역이라 1년 동안 단 한 명의 신자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가끔 비가 오면 우유를 판매하는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시는 분인데 약간 정신이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고마운 마음에 비 오는 날만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설교를 들어줄 사람이 1년 만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자매님은 설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느라고 소리만 질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감사해서 매일 창문을 열고 그 자매만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 자매는 올 때마다 우유와 요구르트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굶은 날이 더 많았던 때여서 정말 잘 받아먹었는데 그때마다 배가 아프고 설사를 했습니다.
유통기간이 지나 곽이 부풀어 터지기 일보 직전의 것들을 가져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받아먹지 않으면 그 자매가 실망하여 나오지 않을까 봐
그 앞에서 마셔보이고는 그 자매가 떠나면 바로 들어가 손을 넣어 다 토해 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설교를 들어줄 양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였고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옆에 또 자그마한 교회가 하나 생겼고 창립 1주년 행사를 할 때
한복을 입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쳐다보는데 그 자매가 그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양이 없는 목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또 얼마간 혼자서 예배를 드리다가 얼어 죽을 것만 같아서 누군가 재개발 될 때까지 들어와 살라고 하는 11평짜리 아파트로 갔습니다.
그 아파트는 이미 사람들이 다 떠나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방에 불이 켜 있더랍니다.
문을 열고 살짝 보니 본드를 불어 눈이 다 풀려버린 깡패 아이들이 칼로 여기저기 다 찢어놓고 돈 같은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얼른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습니다.
너무 기뻤다고 합니다.
자신의 양떼가 될 아이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본드를 흡입하여 판단력이 흐려진 아이들은 칼로 목사님을 찌르려고 했는데
목사님은 잠시 뒤에 찌르라고 말하면서 본드에 취한 아이들에게 복음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쌀 한 줌으로 밥을 해 먹이고는 교회에 오라고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렇게 첫 신자들이 생긴 것이고 그 깡패들과 거지아이들과 함께 7년 동안을 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먹을 것이 없는데 그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이들은 다시 나가서 도둑질을 했고 그 때마다 목사님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털린 집을 찾아다니며 죄송하다고 빌었습니다.
아이들 제발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빈 것입니다.
그렇게 온갖 모욕을 당하는 목사님을 보면서도 아이들은 바뀌지 않더랍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쇠파이프를 하나 준비해 아이들을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또 도둑질을 하고 돌아오자 한 아이를 엎드려뻗쳐 시켰습니다.
워낙 온순하기만 한 목사님이라 아이들은 장난을 치는 줄 알았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가진 온 힘을 다해 아이를 한 대 때렸습니다.
아이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쇠파이프를 쥐어주며 이렇게 세게 자신을 때리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하면서 아이들보고 자신을 차례대로 때리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목사님을 때렸고 한 아이가 잘못 때려 목사님은 꼬리뼈를 다쳐 지금도 혼자 일어서기 힘들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 때 이후로는 아이들이 굶으면 굶었지 나쁜 짓은 안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다 위선적으로 자신들에게 잘 대해 주다가도 막상 집에 들어가면 지갑이나 귀중품부터 감추기 일쑤랍니다.
그래서 어른들을 믿지 않았는데 이 목사님의 사랑을 그때서야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사랑은 이렇게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을 때 저는 보통 ‘사랑해야지!’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더 다가오는 부분은 바로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습과 박 목사님의 사랑과는 분명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다 만족스럽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경험으로 내가 아무리 목숨을 바쳐 열심히 하려고 해도
그 사람이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단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사랑하는 방법은 태양과 같아야 하고 물과 같아야 합니다.
태양처럼 뜨겁게 타오르면 모든 사람이 나의 사랑을 완전히 받게 됩니다.
물처럼 태양에게 내 자신을 맡기면 알아서 세상이 적셔집니다.
내가 이웃을 위해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충만히 거하시게 하기 위해
내 마음을 어린이의 깨끗한 마음처럼 만들어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님은 아이들이 인터넷을 하지 못하게 하다가 단 몇 분 야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너무 죄스러워서 온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며 사죄하였다고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 깨끗함을 통해 활동하시는 성령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무언가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해 주시지는 않으셨지만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품고 그 구원을 세상에 전해주셨기 때문에 결국 우리 각자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신 셈이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각자에게 무엇을 해 주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겨 필요한 곳에 쓰이게 하면 그만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고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고부터였습니다.
성모님처럼 깨끗한 마음을 지녀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충만히 거하시게 해야겠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되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하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뵙고자 한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이 시간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을 하려면 상처 입고, 자기를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행위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어렵고 힘들지만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얻게 됩니다.
내 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인간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눈높이 사랑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노래 한 곡 불러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온유하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말씀을 노래했습니다.
자! 그러면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에 견주어서 우리 사랑의 정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오래 참습니다.
나는 친절합니다.
나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례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
나는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어떻습니까?
부족함을 알았으면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4-40)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9)
따라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일상생활 안에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약한 사람이건 힘이 센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알아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주님을 만나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친교가 깊으면 깊을수록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크고 거창하게 사랑하려 하지 말고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일상 안에서 사랑할 소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친절로, 때로는 온유로, 밝은 미소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으로,
청소를 하는 것으로, 설거지를 도와주고, 환자를 방문해 주고…
어떤 의견에 공감해 주는 것으로….상대를 인정해 주고, 칭찬의 말 한마디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할 기회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4-35)
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고
그 만남의 기쁨도 이웃에게 전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항구하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그 분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더 데레사)
먼저 기도 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가을이 깊어 갑니다.
신학교 시절, 어느 가을의 아름다운 ‘공동체의 밤’이 생각났습니다.
그날 지도 신부님은 우리에게 사제직은 외로우면서도 고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미셀 콰스트 신부의 기도 시집 『삶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서
주일 저녁 모든 일과를 마치며 느끼는 본당 신부의 소회를 표현한 기도 한 편을 읽어 주셨습니다.
“주님,
오늘 밤, 저는 혼자입니다.
성당 안의 소음도 차츰 사라지고
모두들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도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 혼자서.
주님,
저를 보십시오.
저는 혼자입니다.
침묵이 나를 숨 막히게 하고
고독이 나를 괴롭힙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중략)
혼자라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 있으면서도 혼자라는 것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고통과 죽음과 죄 앞에 혼자 서 있다는 것/
주님,
정말 어렵습니다 …….”
이 기도의 몇 대목을 읊조리면서,
우리 사제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신 참된 사랑의 갈망을 따라가려는 모든 이를 위한 기도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위한 삶은 때로는 이해받지 못하고, 외로우며, 지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사랑을 혼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귀한 길을 포기하여 외로움을 ‘잊는’ 어리석음 대신에,
그 길을 인내함으로써 사랑 안에서 벗을 ‘얻는’ 삶을 선택할 용기를 가집니다.
이 기도의 마지막 대목이 더욱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제 몸도 제 마음도 제 영혼도, 다 여기 있습니다.
저로 하여금 주님께로 향해 가는 길이 되게 하시고
아무것도 꺾일 것이 없는 길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저는 주님 앞에
혼자 있습니다.
이 밤의 평화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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