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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4-46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마 22:34-46 / [첫째 가는 계명;막12:28-34,눅10:25-28]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선생님, 모세의 율법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3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ㄴ. 신6:5)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다. 39) 그러나 ㄷ)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가는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ㄷ. 레19:18) 40) 모든 다른 계명과 예언자들의 요구는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41)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막12:35-37,눅20:41-44]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는 자리에서 질문을 던지셨다. 42)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43)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렇다면 다윗이 성령의 감화로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다윗은 이렇게 말하였다. 44) ㄹ) '여호와께서 나의 주 임금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여기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앉아 있어라.' (ㄹ. 시110:1)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46) 그들은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그리고 그후부터는 아무도 예수께 더 이상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부활 문제를 질문한 사두개인들을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하였다는 소식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찾아와 율법의 큰 계명에 대하여 질문했습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4-40) 당시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에서는 613개의 계명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그 계명들 중 어느 것이 가장 큰 것인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계명을 연구하고 토의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율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성경을 가르친다고 공격할 것이고, 자기들과 다른 답을 하면 반대자들에게 공격받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를 실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구약의 많은 계명 중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6:5). 예수님은 익숙한 이 계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율법의 핵심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둘째로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레 19:18).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세오경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한 것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41-46) 질문을 받기만 하시던 예수님이 이제 질문을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면서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라는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십니다(시 110:1) 그리고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어찌 주라고 불렀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윗은 성자 예수님을 자기의 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불렀는데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되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지만 태초부터 계셨으며 다윗의 주가 되신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서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용: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며,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당신은 이 계명을 어떻게 실천하고 계십니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물의 꿈을 가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꿈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러 세파에 시달리고 여러 사람에게 시달리면서 꿈과 비전이 깨지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깨진 꿈과 비전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깨진 꿈과 비전을 복원하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용서’입니다. 이 땅에 완벽한 교회나 교인은 없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누구에게나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 용서가 가장 많이 필요한 곳은 죄인이 갇힌 교도소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큰 인물이 되려면 용서하는 삶은 필수 조건입니다.
< 설 교 >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
마 22:34-40 / 이규현 목사(수영로 목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핵심을 붙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다 보면 모두 중요한 것 같지만,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말씀 중에 ‘대’ 자가 붙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대사명’과 ‘대계명’입니다. 대사명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주님의 유언의 말씀이고, 우리가 꼭 지켜야 하는 대명령입니다. 또, 대계명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통달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라고 구약 신명기 6장 5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해서 명쾌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율법은 사랑인데, 첫째가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가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줄을 그어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이 계명을 놓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불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와 신앙의 활동은 이 말씀의 줄기에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이며, 다른 것은 좀 부족해도 이것만 붙들고 순종한다면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의 행위는 여기에 종속된 것입니다. 이것을 능가하는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해서 전심으로,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끼어들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신앙의 균열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대계명을 확실히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으뜸이 되기 원하시고, 비교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원하시고 자존 하시며 홀로 영광 가운데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올려드린다고 순위가 올라가고, 우리의 박수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에 영향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광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 삶에 으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바른 관계 설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삶에 첫째 자리에 두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뒤틀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하지 않으면 다른 관계도 온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우선이 될 때 관계와 삶이 풀립니다. 삶의 첫 자리에 주님을 올려놓느냐에 따라 삶의 성패가 결정됩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는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언약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언약이고, 그 언약에 우리가 동의할 때 언약에 들어갑니다. 언약은 매우 중요합니다. 결혼도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언약을 맺는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다른 모든 관계들보다 우선합니다. 부모도 끼어들 수 없는 강력한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표현은 언약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습니다.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관계라는 뜻이고,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의무와 강요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 안에서 맺어진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계명이 어렵거나 무겁지 않습니다. 관계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고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랑은 그냥 주어진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부터 출발하고, 이것이 신앙의 첫 단추입니다. 신앙이란 인간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깊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고 반응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친밀함의 깊이가 성숙으로 이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에 대한 헌신입니다.
복음서 안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나오는데 마가복음 14장 3~9절에서 예수님께서 흥분하셔서 극찬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9)」 주님께서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에게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 옥합은 그녀에게 전 재산이고, 미래였습니다. 마리아는 제자도 아니고,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외양적으로 보면 그녀가 주님에게 그렇게 비싼 향유를 깨뜨려야 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경악했습니다. 특별히 가룟 유다가 소리를 지르며 미친 여자 취급을 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라고 했는데 이런 반응은 가룟 유다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반응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행동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시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격려하는 마리아의 사랑을 주님이 아셨습니다. 여인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것을 부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개념이 없어지고, 수리 능력이 저하됩니다. 정말 사랑하면 내 모든 것을 주고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자기가 해 준 것을 강조하며 따지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을 하면 자신의 것을 다 주고도 내 사랑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내가 할 만큼 했다고 말한다면, 손해 본다는 느낌이 든다면, 아직 깊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헌신한 것에 대한 기억이 날마다 살아나고 내가 희생한 것들 앞에 기념탑을 세워 놓았다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헌신의 순수성을 의심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상한선도, 규격품도, 경계선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가 아니면 종교적인 수준에서 왔다 갔다 하는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살짝 빠져도 안 되고, 푹 빠져야 합니다. 오지에 나가는 선교사님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계산하지 않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주고받는 상업적 관계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이런 헌신을 했을까요?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의 전부, 자신의 미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마가복음 14장 8절을 보면, “그는 힘을 다하여”라고 했는데,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것입니다. 그것이 헌신이고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는 신앙입니다.
구약에도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전부고, 너무도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번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100세에 낳은 이들이냐, 하나님이냐! 아브라함은 아들보다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 삶에서 가장 귀중한 것, 그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이런 선택을 걱정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강제로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신앙을 가진 순간부터 “자식 내놓으라”, “집 팔아라”, “십일조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에게나 요구하지도, 억지로 강요하시지도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은 신앙의 절정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았습니다. 100세의 태가 죽은 몸에서 생명을 만들어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시며 아름다우시며 풍성하신 분이신지를 알게 하시고 그 사랑안에서 우리 삶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을 올려놓게 하십니다. 내 신앙의 수준에 맞게 요구하십니다.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면 그때 하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부담스러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수록 하나님을 내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삶을 다 쏟아 부어도 모자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기 바랍니다. 그 사랑 안에 빠져들면 내 생명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깨달은 진리이고, 믿음의 선진들이 겪은 은혜였습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신다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이고, 신앙의 중심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는 우리의 결단, 우리 삶에 가장 귀중한 것을 주님 앞에 올려놓는 단계에 가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마음이 통하게 되고, 우리 삶에 거칠 것이 없는 믿음의 용장으로 일어서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할 것인지, 하나님도 사랑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만’과 ‘하나님도’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어렵지만 명절 제사문제도 한번은 칼을 빼야 합니다. 내가 기준을 정해서 나는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는 결단을 보일 때, 하나님도 여러분을 그렇게 대하실 줄 믿습니다.
둘째,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예배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나의 삶의 최고가 되시며, 지존자이시며, 절대 가치가 되신다는 것을 고백하고 마음껏 높여 드리는 시간입니다. 신앙은 예배를 통해서 증명됩니다. 좋은 교회는 예배가 살아있습니다. 부흥은 예배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삽니다. 예배가 살면 가정이 삽니다. 예배가 죽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는 예배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생명을 바치는,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린다면 이 민족 가운데 다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예배는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과 정성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외관상으로는 비슷한 예배였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만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자리에 앉아 있지만,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의 횟수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를 받기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벨의 제사에는 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율법이 있기 전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정성이 담긴 마음의 예배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십니다. 무엇을 바쳤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드렸느냐를 보십니다. 주님께서도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두 렙돈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액수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입니다. 구약에서 예배자 중의 예배자로 다윗을 꼽습니다. 빼앗겼던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그는 감격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돌아오자 그는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하여 기뻐하는 예배자였습니다. 시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다윗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끝없이 갈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기가 막힌 칭호를 주셨습니다.
누가 온전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예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를 때,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여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앉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으면 우상숭배입니다. 예배에 임하는 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예배에서 시작해서 예배로 끝납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거나 형식적으로 드리면 공동체는 죽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잘 드리면 됩니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것,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면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부흥이 일어납니다. 하늘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전심을 다하여 예배하는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한다고 해도 예배가 예배답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한 주일 동안 예배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를 사모하며 주일에 나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온전한 예배를 드립시다. 예배에 늦지 않고, 축도가 끝나면 나갑시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소홀히 여김을 받으십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예배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다양한 활동이나 봉사가 중요하지만, 예배를 우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않고 봉사하는 사람은 자기를 우상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는다면 분명히 다른 것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타락은 예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할 제단이 허물어질 때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고, 열국의 수치를 당합니다. 핵심은 제단인데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하는 제단에 예배가 온전히 살아있을 때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을 붙드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 제단이 허물어집니다. 정성이 빠진 제사, 마음으로 드리지 않는 제사는 공허합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조금씩 마음 안에서 허물어져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를 온전히 드리기만 하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만족이 아닙니다. 가끔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오늘 예배가 참 좋았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하는 고백을 듣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자기감정에 빠진 자기중심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내가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의 부산물로 은혜가 임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만을 추구하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에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예배, 내 마음에 드는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예배 장소, 건물, 조명, 순서나 악기 혹은 음악의 장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핵심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배 안에 다른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며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마음을 열 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점점 깊이 알아가고 경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첫 순서부터 마지막까지, 찬송가 한 구절, 기도하는 한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마음을 열고 전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우하고 그분을 인정하고 높여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도 높여주실 줄 믿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사랑을 입은 자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경험하는 예배자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히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인생에서 “주여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옵소서”라고 열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 주의 영광을 보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예배보다 우리를 축복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두 기준, 내 삶의 최상을 그분께 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를 붙잡고 믿음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모든 우리 삶의 영역에서 놀라운 축복들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기 바랍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삶의 첫 자리에 놓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주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마 22:34-40 / 이한규 목사(분당샛별교회)
< 사랑의 힘 >
요새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합니다. 부동산 가치 하락으로 개인 자산이 줄고 있습니다. 미국도 경제가 어려우니까 경기 부양을 위해 엄청나게 돈을 찍어냅니다. 그러면 자연히 달러 가치가 떨어지고 원화 가치가 한참 올라가야 하는데 무슨 영문인지 원화 가치는 잘 오르지 않습니다. 결국 풀린 달러로 원자재 가격이 올라가고 물가가 올라가면서 자산은 주는데 물가는 오르는 기현상으로 중산층의 고통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고령화 문제나 실직 문제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얼마 전 50대 전후에 실직된 가장들의 삶을 다룬 얘기가 TV에 나왔습니다. 새로운 일자리도 얻기 힘들고, 일자리를 얻어도 수입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습니다. 할 수 없이 자영업이나 몸으로 때우는 일에 나서지만 몸만 축나고 생각만큼 돈을 못 법니다. 그래서 절망이 깃든 그들의 삶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과거에는 집 한 채만 가지면 어느 정도 위안이 되고 노후가 대비되었습니다. 물가가 올라도 집값은 더 올라주니까 걱정이 덜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집값이 떨어지면서 집 한 채 가진 사람도 노후 걱정이 큽니다. 그리고 집값이 떨어지니까 집을 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전세나 월세를 선호하면서 전세와 월세는 크게 올랐습니다. 그래서 집 있는 사람도 힘들지만 집 없는 사람은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2년 만에 이번에 또 이사 가야 되니까 아내에게 미안합니다. 분당에서만 6번째 이사입니다. 어제 아내가 이사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그래도 목회자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일반인들은 집 없는 설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상황이 그러니까 더욱 ‘인물 한 사람’이 그립습니다. 한 사람의 인물이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카네기가 억만장자가 되자 그를 통해 지인과 동료 등 40여 명이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가수 싸이(Psy)가 뜨자 소속사도 뜨고, 아버지 회사도 뜨고, 케이팝도 뜨고, 한국도 뜨고, 그의 노래를 패러디한 수많은 패러디도 떴습니다. 심지어는 그 이름을 이용해 나쁜 의도로 자신을 띄우는 사람들도 무수히 생겼습니다. 어떤 비밀결사체는 자기 존재가 희미해질 때쯤 되면 항상 해왔던 방식대로 유명인들을 엮어서 “싸이는 그 결사체 회원이다! 아무개는 그 결사체 회원이다!”란 역정보와 음모론을 흘려 자기 존재와 힘을 교묘하게 홍보하고, 또한 그런 음모론을 이용해 영혼을 불안하게 만들고 미혹하는 종말론 장사꾼도 여지없이 등장했습니다.
문제는 일부 교인들까지 그런 음모론에 휘둘려 믿음이 ‘약속 위에 건축된 믿음’이 아닌 ‘공포 위에 건축된 믿음’으로 영혼이 침탈되면서 또 초보신앙으로 향한다는 사실입니다. 1992년 시한부 종말론 장사꾼들에게 그렇게 심하게 당해서 한국교회의 신뢰추락 및 조롱거리 되는 일에 큰 일조를 하고도 또 미혹되는 모습을 보면 누군가의 종말계시나 공포적인 추리에 입각한 믿음이 아닌 말씀 중심적인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이런 혼란한 때이기에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역사의 주인공이 더욱 그립습니다. 누가 인물이 됩니까? 남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우리도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그런 인물을 꿈꾸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인물의 소명을 가지면 사랑도 잘하게 됩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충족되고 만족을 느끼면 관대해지고 비판과 불평이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늘 인물의 꿈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큰마음과 큰 꿈을 품으십시오.
군대에서 위관급 장교는 직접 총을 쏘며 병사들을 이끄는 용장이 되어야 합니다. 영관급 장교는 작전을 지혜롭게 잘 세우는 지장이 되어야 합니다. 장군은 큰마음으로 전 군대를 품는 덕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덕장 교인을 꿈꾸십시오.
중국에 부하를 끔찍이 사랑하는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말단병사가 발에 종기가 나자 그 장군은 친히 고름을 짜며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그 병사의 어머니가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사연을 알아보니 그 어머니의 남편도 그 장군의 부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남편도 발에 종기가 생겼을 때 그 장군이 친히 고름을 짜서 치료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에 감격해 그녀의 남편은 그 장군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그 남편처럼 아들도 그 장군을 위해 목숨을 걸 운명임을 짐작하고 통곡한 것입니다.
사랑과 덕을 가지고 누군가를 최선의 삶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지도력입니다. 그래서 큰 인물이 되려면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정의를 증오와 폭력으로 세우려고 하면 참된 정의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미움의 힘이 아닌 사랑의 힘입니다. 이제 미운 것을 잘 보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예쁜 것을 잘 보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무력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때 최상의 능력도 나타납니다.
어느 날, 13세기에 살았던 사랑의 성자 프랜시스에게 굽비오란 마을이 늑대로 인해 피해가 많다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프랜시스는 제자 한 명과 함께 무장도 없이 늑대 굴로 갔습니다. 그들을 보자 늑대는 으르렁거렸지만 프랜시스는 태연했습니다. 그리고 곧 조용히 늑대에게 사랑을 설교한 후 두 손을 부드럽게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늑대가 다가오더니 프랜시스의 손 위에 앞발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때 프랜시스가 늑대의 목을 껴안자 늑대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가끔 흉악한 사형수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도소에서 사랑을 실천하다가 장기를 기증하고 평화롭게 죽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것도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인간의 힘든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교회와 교인의 최대 존재 이유이고 자신의 최대 존재 이유입니다.
< 무엇을 사랑해야 할까요? >
본문은 사람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사랑과 관련한 2가지 교훈을 줍니다. 성도는 무엇을 사랑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많은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제일 큰 계명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본문 37-3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초점이 ‘하나님 사랑’에 맞춰지지 않으면 인생은 방향을 잃고 허무해지지만 그 초점이 잘 맞춰지면 인생은 가장 성공적인 모습이 됩니다. 결국 인생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좌우됩니다. 저급한 것을 사랑하면 저급한 인생이 되고 고귀한 것을 사랑하면 고귀한 인생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통 소중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까요? 본문 37절은 간단하지만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3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1) 마음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무엇이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까?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한 가지 예를 든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의 자녀 사랑입니다. 부모들은 온통 자녀 생각뿐입니다. 조금 늦게 오면 길을 잃지 않았는지, 누가 납치한 것은 아닌지 염려합니다. 그리고 어떤 희생을 무릅써서라도 최선을 다해 자녀의 길을 열어주려고 합니다. 그 이상으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예배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모릅니다. 또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면 기도내용도 달라집니다.
사람들의 기도를 보면 대개 이런 기도가 많습니다. “하나님! 물질 주세요! 명예 주세요!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렇게 달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협박까지 합니다. “하나님! 안 주면 안 믿을래요.” 그렇게 협박조로 기도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반면에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제가 뭘 하기를 원하시나요? 항상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가게 하소서! 어떤 시련을 만나도 아멘을 잃지 않게 하소서!” 그처럼 철저히 하나님 중심주의로 사는 것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 목숨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배우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당신은 나만 사랑해야 돼!”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목숨을 다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에게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지 않았다면 사랑을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목숨 걸고 우리를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목숨 걸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다 보면 속상할 때도 많습니다. 그처럼 자녀가 힘들게 하고 못나 보여도 부모의 자녀 사랑은 변함없고 자녀를 위해서라면 이런 기도도 합니다. “하나님! 필요하다면 자녀의 목숨 대신 제 목숨을 가져가시고 자녀에게 길을 활짝 열어주소서!” 그처럼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녀를 위해 목숨까지 겁니다. 그 이상으로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늘 그런 마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마음을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3) 뜻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자신이 가진 것, 즉 시간, 물질, 재능, 정열 등의 모든 것을 가지고 힘써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찬송할 때는 힘껏 찬송하고 말씀 들을 때는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기도할 때도 간절히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는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최상의 존재이신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십시오.
시간이 남아서 예배에 나오지 말고 시간을 구별해서 예배에 나오고, 물질이 남아서 헌금하지 말고 물질을 구별해서 헌금하십시오. 우주를 창조하신 영광의 하나님께 쓰다 남은 찌꺼기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처럼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겸손하게 은혜 받을만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무엇이든지 드릴 때는 정성스럽게 먼저 좋은 것을 구별해서 드리십시오. 사랑하지 않으면 작은 헌신도 아깝지만 사랑하면 큰 헌신도 아깝지 않습니다.
어떤 분에게 30만 원짜리 애완견이 있었습니다. 그 애완견이 병들었습니다. 수의사가 수술비가 3백만 원이 드니까 수술하지 말고 다시 애완견을 사서 키우라고 친절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때 애완견 주인이 말했습니다. “수의사님! 3천만 원 들어도 수술해주십시오!” 사랑은 헌신을 낳고 헌신은 사랑을 낳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헌신하면서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처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2.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본문 39절 말씀을 보십시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 받은 자만이 할 수 있기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비례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이웃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소중한 추억을 남깁니다. ‘나만 사랑하는 것’은 불행의 시초이고 ‘남도 사랑하는 것’은 행복의 시초입니다. 교회생활을 잘한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주일성수, 십일조, 헌신적인 봉사, 그리고 새벽기도를 하는 것도 교회생활을 잘하는 표시이지만 역시 교회생활을 잘하는 가장 뚜렷한 표시는 교회와 교우를 사랑하고 선교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했지만 이웃을 사랑할 때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본능적으로 얼마나 사랑합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자기만 사랑하는 것은 죄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며 이웃 사랑에 나서십시오. 희생이 없는 사랑은 감상주의입니다. 감상적인 사랑이 아닌 호주머니를 실제로 비우는 사랑이 세상을 이기는 놀라운 능력과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을 보면 육십갑자로 육갑을 떨어 결혼날짜를 잡고, 개업날짜를 잡고, 이사날짜를 잡습니다. 시신을 보면 부정 탄다고 그의 마지막 얼굴을 보는 것까지 막아서 평생을 아쉬움 속에 살게 합니다. 가끔 이상하게 생긴 바위나 나무가 보이면 여지없이 그 앞에 촛불이 켜지고 시루떡이 놓이면서 고사를 드립니다. 어떤 분은 연초에 점쟁이가 “물을 멀리하라!”고 하니까 여름휴가도 안 갑니다.
시골의 어떤 집에서는 집에 뱀이 들어오면 터줏대감이라고 여기고 잡지도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해합니다. 그처럼 미신에 사로잡히면 영혼이 속박됩니다. 어떤 사람은 중요한 날 수염을 깎으면 안 된다고 믿고 지저분한 얼굴로 면접시험에 갑니다. 당연히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동물이나 사람 인형이 자기를 지켜준다고 생각하고 마스코트로 삼습니다. 그런 것이 어떻게 행운을 주고, 길을 열어주고, 자기 앞날을 지켜줍니까?
점쟁이에게 가면 종말론 장사꾼들처럼 반드시 하는 말이 “살이 끼었다! 마가 끼었다! 40대에 큰일 치르겠다!”라는 종류의 말입니다. 그래야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그 순간 그 영혼은 두려움의 영에 속박됩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고, 묏자리를 바꾸고, 멀쩡한 집에서 이사를 갑니다. 그처럼 미신은 영혼을 불안하게 만들고, 문제가 생기면 자기의 부덕을 탓하지 않고 집터나 묏자리나 이름을 탓하게 해서 자기 성찰의 길까지 막습니다.
이제 ‘운명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라 ‘운명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십시오. 축복의 원리는 신기하고 신비하고 괴상한 신앙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축복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랑할 때 참된 평안이 생기고 그 평안 위에 행복의 열매들이 맺힙니다. 이제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나누십시오. 그러면 행복과 축복의 길에서 결코 뒤쳐진 인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고, 43세에 미국 최대 부자가 되고, 53세에는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 버는 일에만 매달려 악덕기업주란 말을 들었던 그에게는 결코 행복이 없었습니다. 55세가 되었을 때 그는 머리와 눈썹이 빠지고 몸이 마르는 병에 들어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기자들은 그의 사망기사를 미리 써 놓고 타전 날만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그가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들어서는데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 그 글을 보자 갑자기 어렸을 때 하신 어머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3가지를 꼭 당부했습니다. “첫째, 교회를 네 몸처럼 사랑해라. 둘째,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드려라. 셋째, 소득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바치고 십분의 일은 이웃을 위해 써라.”
그 어머니의 음성이 생각나면서 마음속에 전율이 흐르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처럼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자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예수님을 묵상했습니다. 한참 눈을 감고 묵상하는데 옆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병원 사무원과 환자의 보호자가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에서는 병원비가 없으니까 입원이 안 된다고 하는데 환자의 어머니는 제발 입원시켜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했습니다.
그때 록펠러의 마음에 선한 마음이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비서를 시켜 그 소녀의 병원비를 대신 지불하게 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입원 후에 기적적으로 죽을병이 나았습니다. 옆에서 그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니까 자기도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서전에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그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그때 그는 베풀면서 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을 지키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신기하게 잘 자고 잘 먹게 되었습니다. 그 후 98세까지 장수하면서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임종할 때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늦게나마 이 행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처럼 교회를 사랑하며 남을 은밀하게 돕는 삶은 행복의 최대 원천입니다. 그런 나눔이 없으면 행복은 결코 그를 찾아와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임종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다음과 같은 3가지 말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좀 더 감사하며 살 걸!”이란 말입니다. 둘째는 “좀 더 참고 살 걸!”이란 말입니다. 셋째는 “좀 더 베풀며 살 걸!”이런 말입니다. 그런 후회가 없도록 이제 좀 더 감사하며 살고, 좀 더 참고 살고, 좀 더 베풀면서 사십시오.
지금 선교사님 중에 어려운 선교사님들도 많고 도와야 할 곳도 많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어렵고 우리도 여유가 없으니까 안타깝게도 많이 돕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도 한때 전방 선교사를 꿈꿨다가 후방에서 사역하게 되면서 항상 전방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해드리고 힘써 나누면서 나중에 “좀 더 나누며 살 걸!”이란 후회가 없게 하십시오.
우리 분당 샛별교회는 열심히 선교하고 나눌 줄 아는 나눔의 모델 교회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와 교인에 대한 인식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 이때 우리는 “교회와 교인이 이렇게 멋지게 나누며 사는구나?” 하는 칭찬을 듣는 교회를 꿈꿔야 합니다. 그 꿈을 이루도록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고 또한 우리 중에 인물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네트영어를 위해서도 계속 기도해주십시오. 2019년까지 5000페이지를 목표로 틈틈이 집필하고 있는 <네트영어 사전>은 어제까지 A4용지로 539장(대략 1350페이지)을 완성했습니다. 현재까지 완성된 워크북이 약 20여권이 있고, 조만간 800-1000페이지 정도 되는 네트영어 입문 단행본도 계획하고 있고 네트영어 동영상들도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을 위해 시설, 장비, 인력(교수인력, 연구인력, 행정인력) 확보 등에 초기 재정이 필요합니다. 이 사역을 통해 국제적인 일꾼을 배출하고 더 많은 재정을 창출해 나눔의 꿈을 멋지게 이루려고 합니다. 이 비전을 후원할 거룩한 커넥션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같이 기도해주십시오.
나중에 성도가 하나님 앞에 상급 심판을 받을 때 상급을 좌우하는 2가지 최대 기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두 가지 사랑의 계명이 너무 중요해서 본문 4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랑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의 핵심 내용이고, 인간 존재의 최대 이유이며, 성도의 가장 기본적인 행동강령입니다. 그래서 힘써 사랑하면 하나님은 그로부터 최고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어느 날, 캐나다에 사는 한 자매가 설암에 걸려 혀를 자르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 전에 자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말을 한 마디 했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지금 힘든 일이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을 자신도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런 사랑의 고백이 입술에 넘치고 실제 삶에서도 넘침으로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
마 22:34-40 / 이규현 목사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세분화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열 가지 계명을 613가지로 세분화해서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명령을 365개로,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248개로 분류했습니다. 613가지도 부족해서 계속 더 많은 세칙을 만들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복잡해지면 본질이 흐려집니다. 그들은 모여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것에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보통 주로 몇 년도에 어느 교회에 다녔고, 목사님은 어떤 분이었고, 건축 헌금한 이야기, 봉사한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남자 분들은 술이나 담배를 일절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우리는 이런 외적인 것들이 신앙의 본질이고 핵심인가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잡다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신앙이라고 할 때 이런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신앙에 열심히 있었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애를 썼지만,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분노하시고 책망하셨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보도록 의도적으로 규칙을 깨뜨리기도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들에게 손을 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주님은 손을 대셨고, 어떤 때는 그들이 말하는 안식일에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어기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자는 돌로 쳐 죽이던 시대에 주님은 용서를 베풀기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규칙을 깨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행동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하는 질문에 아주 명쾌하고, 쉽고,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주님은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던 율법사들과는 달리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셨습니다. 율법의 종류에 대해서 늘어놓으신 것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니” 양보할 수 없는 최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선명한 기준을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들에게 일격을 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무엇을 얼마나 지켰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느냐’인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형식에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지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익숙해지는 가운데 찾아오는 유혹은 내용은 빠지고 형식만 남는 것입니다. 그때 형식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당시에 가장 열심을 다하던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과격할 정도로 책망하셨습니까? 그들 안에는 내용이 빠져버리고 형식만 남은 형식주의자들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장 어귀에서도 기도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가장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한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할 정도로 열심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그것이 자신의 의가 되어 하나님이 필요 없는 자들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으면 신앙이 아니라 종교행위가 됩니다. 생명을 가진 신앙의 삶이 아니라 외적 껍데기만 남은 종교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종교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종교생활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종교생활이란 진심이 없이 규격화된 행위의 수행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고, 의무를 지키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행위에 기쁨이나 즐거움, 감동이나 열정도 없고,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됩니다. 안 지키면 기분이 찜찜하고, 때로는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어서 지키긴 하지만 자발성도 없고 그저 그런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괜히 어떻게 될 것 같은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구약시대 신앙의 중심에는 성전이 있고, 성전의 핵심이 제사였습니다. 제사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만나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라는 의식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구약시대에 그들은 제사에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음에도 인애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애는 마음을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미 6: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 그러므로 하나님이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의식을 드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태도입니다. 마음이 담긴 의식이어야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올려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다면 어떤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의미 없는 행동의 반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진심 어린 마음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봉사하고 수고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를 보십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숫양이나 기름진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 시대에 유대 종교는 낡을 대로 낡아져서 성전이나 제사제도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전절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장사하는 상들을 뒤집어엎으시고 내쫓아 버리셨습니다. 그 당시는 멀리서 양을 바치러 오면 양에 흠이 생기면 안 되니까 성전 입구에서 깨끗한 양을 팔았고, 동전을 바꾸는 등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형식뿐인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 만에 다시 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사건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크게 대립되는 중대한 국면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보이는 성전의 시대는 끝나고, 이제 곧 보이지 않는 성전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 형식만 남아, 이미 생명이 다한 종교의 폐기에 대한 비장한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맞아 죽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핵심,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망합니다. 잘못하면 고등사기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성전 건물이 아무리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가 막힌 의식으로 제사를 드린들 그 자체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전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교회에 다녔는가는 핵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내용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다니는 것은 출석도장을 찍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에게로 향해 있는가, 예배 안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마주침이 일어났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적 연결, 친밀한 대화, 자연스러운 영적 접촉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거나, 혹은 진실된 신앙생활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내면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점검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 민감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나도 나를 속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위선으로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쉽게 병이 들거나 나도 모르게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외형적으로는 날마다 제사가 드려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던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사라는 형식은 있었지만,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숭배하며 떠나갔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행음한 여인으로 비유하며 질책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심 어린 사랑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으로 소개합니다. 질투는 인간적인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불꽃 튀기는 감정입니다. 질투하는 여호와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랑은 언제나 일대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늘도 일대일로 만나십니다. 사랑이 삼각관계를 만들 때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와 같이 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여인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면 당연히 아내의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질투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아주 예민하게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대충 사랑하는 관계라면 질투할 것도 없습니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는 아주 작은 감정의 파장도 서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깊이 들어간 사람은 아주 작은 것도, 내 마음이 빼앗긴 것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표현은 의인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속된 감정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강렬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어떤 것과 비교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멋들어지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 찬송을 불러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아십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우리와 더없이 친밀해지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다른 곳에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구약의 다윗을 보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았고, 실수와 허물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보신 것은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 보면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틈을 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의 사이에 어떤 틈이라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위기를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하던 봉사가 힘들어지고, 자발적인 헌신이기보다는 의무감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기쁨으로 하기보다 억지로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감사와 감격이 없다면 영적 위기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다양할 수 있지만 가장 핵심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생활에서 여러 문제를 겪지만, 가장 위기는 부부가 사랑에 금이 가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 관계에서도 핵심은 사랑입니다. 주의 일을 사명감으로 하지만 사명감이 바닥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감은 사라지더라도 주님과의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사명감은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사명감보다 더 큰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중국 내지 선교의 길을 열었으며 OMF의 창설자인 허드슨 테일러가 선교사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선교사 후보들이 어떻게 중국 선교사로 가게 되었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사명도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순종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저절로 됩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안에 있을 때 순종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살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영어 성경을 보면, ‘heart(마음), soul(목숨), mind(뜻)’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영역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마음이 끌려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너무 사랑해서 시간만 나면 닦고 닦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 아들이 날카로운 못으로 차를 긁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순간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망치로 아이의 손을 내려쳤습니다.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짓이겨진 아들의 손을 치료한 후에 보니까 아이가 자동차에 “아빠, 사랑해요”라고 쓰던 것이었습니다. 아빠의 잘못된 사랑이 아이의 손과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해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빼앗기지 말고, 그분만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라는 말을 쉽게 이야기하면 사랑에 푹 빠지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사랑에 잠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한 분이 없다는 고백이 예배 안에서 가슴으로 터져 올라야 합니다. 사랑은 형식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형식이라면 오늘 예배에 왔으니 하나님께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돈 개념이 없습니다. 계산 불능입니다. 사랑하는 곳에 마음이 갑니다. 사랑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멋진 신앙은 사랑에 빠진 신앙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전부인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입니다. 마리아는 다 바치면서도 누구보다 행복했습니다. 사랑을 돈으로 계산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사랑 없이 행하는 것은 재미가 없고, 힘들고 피곤합니다. 형식을 의무로 지키는 것처럼 재미없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전성기, 우리에게 은혜가 흘러넘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는 것이 실제로 느껴질 때입니다. 분석하고 이해만 했던 교리적 하나님이었는데 어느 날 갈보리 언덕에서 그 아들을 통해 나에게 주신 그 은혜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사랑을 폭포수처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개념이나 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사랑은 이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느끼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계명이 무거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613가지의 조항으로 너무나 힘들어하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마 11:2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짐은 바리새인들의 무거운 종교적 짐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가면 계명들이 무겁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고 특권이고 신 나는 일입니다. 힘든 요구라 할지라도 피곤한 줄 모르고 해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없다고 하십니다. 최근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은 아무 부담을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세칙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딱 한 가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면 그 사랑에 내가 반응하고 경험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일들은 자기를 만족하게 하는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에 빠지면 나도 모르게 사랑하는 분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때부터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붙잡으십시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신앙이 깊어져 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서 사랑이 점점 더 깊어져 가고 그 사랑이 점점 부어지면서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과 반응이 흘러나올 때 그것이 우리 신앙의 변화, 인격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들이라도 출발지점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외적 행위만 남은 것은 아닌지, 의무적 수행에 몰두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들의 평가에 목을 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과 헌신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흘러나오는 부수적인 산물인 것입니다. 신앙은 부담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하거나 액땜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뇌물이나 복채가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선도 아닙니다.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배나 봉사가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율법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열심이었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껍데기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식주의, 율법주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반응하십시오. 신나는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랑보다 가장 강렬하고 농도 짙은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마음껏 경험하고, 그 사랑에 빠져 그분과 접속하십시오. 그 사랑에 이끌려 주를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마 22:34-40 / 김동호 목사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저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구원’도, 그 구원의 삶이 이루어지는 나라인 ‘하나님 나라’도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행복’이라는 단어와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니라’는 말씀만 보아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소원이 오로지 우리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 다시 말해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무엇을 통하여 이루어지는가 할 때 우리는 그 답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해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구원과 행복을 하나님의 뜻에서 찾으셨습니다. 말씀에서 찾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에서 말씀하신 자유는 구원을 의미하는 큰 자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유가 진리를 통하여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구원은 말씀 속에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뜻과 식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행복과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린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제 멋대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우리 인간은 실낙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삶의 구원과 행복을 욕심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오늘 본문의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를 물었습니다. 이 엄청난 질문에 예수님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과 삶속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대표가 제게는 ‘손녀 사랑’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요즘 손녀들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정의해 보려면 그냥 우리 손녀 딸들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손녀 딸들에 대한 제 마음과 생각과 삶이 그냥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다 우리 손녀 딸 대하듯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어디를 가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한 순간도 우리 아이들을 잊지 못합니다.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다니는 휴대전화, 아이패드, 노트 북 어디에나 제 손녀 딸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볼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합니다.
첫 손녀를 낳았을 때 우리 손녀 민희는 계룡대라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다녀오려면 왕복 5시간에서 6시간 정도를 잡아야만 했습니다. 하루 중 7시간만 비면 미친 사람처럼 계룡대를 향해 갔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멀리 미국에 있지만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습니다. 막내 손녀는 가까이에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으나 멀리 미국에 있으나 관심과 사랑은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거의 우리 손녀의 사소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큰 손녀와 전화를 하는데 기침을 조금 심하게 하는 듯 보였습니다. 싫었습니다. 계속 큰 아이 기침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는 여행을 다닐 때 거의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처음 안식년 할 때 약 두 달을 쉬지 않고 미국과 카나다 유럽 그리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핸드캐리 하나만 가지고 다녔습니다.
요즘도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나 손녀딸이 사는 미국 뉴욕에 갈 때는 언제나 가방이 이민가방입니다. 어떤 때는 미국 세관원에게 가방을 열고 그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은 무척 신경 쓰이고 불편합니다.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하여튼 뉴욕에 갈 때는 이민 가방을 가지고 갑니다.
거기에는 대부분 손녀 딸들의 선물이 있습니다. 손녀 딸들이 구하지 않아도 저와 제 아내가 혼자 다 알아서 이것, 저것 거의 닥치는대로 다 사서 가지고 갑니다. 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도 같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벌써 미리 다 아시고 그것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저는 정말 굳게 믿습니다.
아이들이 결혼하기 전 우리 집 식구는 여섯 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여섯으로 나누었습니다. 그것을 나누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만큼의 몫을 가족들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제 마음에 느닷없이 ‘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제 마음에 ‘아버지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야 알아 차렸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우리 가족의 수에 넣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섭섭해 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계산을 정말로 다시 하였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1/7로 계산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진짜 제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제 가족이 되셨습니다. 식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부족하지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계산도 바꾸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몫을 내 가족과 아이들의 몫과 같이 셈하였다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서도 똑 같은 몫을 떼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몫을 1/7이 아닌 1/8로 하고 최소한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의 1/8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몫을 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1년 째 금전출납부를 씁니다. 저는 목사인데 제법 적지 않은 돈이 매달 들어오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주는 생활비, 강사비, 인세등등 제법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많은 돈이 생긴다고 싫어하겠습니다. 그 돈이 많아서 다 쓰지를 못하길 하겠습니까?
그 돈을 다 내 돈이라고 나만을 위하여 쓰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약속을 하였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몫을 정하고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하여 쓰는 몫을 정하였습니다. 그것을 금전출납부 맨 앞장에 써 놓았습니다.
하나님 1/8, 이웃 1/8이면 둘을 다 합쳐 1/4 즉 25% 정도를 떼면 됩니다. 그렇게 꼭 돈을 뗀다고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처럼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1년 정도 연습을 하니 이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하여 몫을 떼는 것이 조금 쉬워졌습니다. 조금씩 쉬워지다 보니 실력도 조금씩 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와 저희 가족 모두를 위하여 쓰는 몫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하여 쓰는 몫이 거의 비슷해졌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하였더니 제 마음속에 하나님과 사람이 점점 더 사랑스러워져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내 손녀 딸들만을 위하여 챙기던 이민 가방을 이제는 내 손녀 딸이 아닌 인도와 아프리카와 북한을 위하여서도 챙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녀 딸을 보기 위하여 왕복 6시간을 운전하고 시간이 없어서 50분만 손녀를 안아 보고 되돌아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계룡대를 운전하여 오가며 느꼈던 행복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몫을 구체적으로 떼면서부터 그 행복의 지경이 넓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가 세운 열매나눔재단이 섬기고 있는 말라위 그물리라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출발하여 현지에 도착하는데 까지를 계산하면 하루 24시간이 좀 넘습니다. 비행기를 세 번이나 타야만 합니다. 그것을 일주일 사이에 왕복한다는 것은 정말 중노동도 그런 중노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피곤한 줄을 몰랐습니다. 피곤한 줄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해가 되지 않으리만큼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을 갈 때 동부와 서부를 가는 것이 다릅니다. 동부는 서부를 다녀오는 것보다 비행시간이 거의 5시간 정도가 더 걸립니다. 비행시간이 10시간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한 시간, 한 시간은 정말 힘듭니다. 당연히 동부를 다녀오는 것보다 서부를 다녀오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입니다. 저는 서부를 다녀오는 것보다 동부를 다녀오는 것이 더 쉽습니다. 까닭은 당연합니다. 우리 손녀가 동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위 여행이 동부를 다녀오는 것 같이 즐거웠습니다. 작년 7월 그물리라 사역을 시작할 때 인간적으로는 그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 년 만에 다시 가보니 조금 과장한다면 정말 천지가 개벽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막연하게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직원들의 숙소와 사무실이 지어졌습니다. 주민들을 위한 보건소가 지어지고 창고가 지어지고, 학교 교사들을 위한 사택이 지어졌습니다. 보건소에 상주하는 간호사가 살 사택도 지었습니다. 학교도 곧 지을 겁니다. 이제 곧 마을에 전기도 들어오게 될 겁니다. 정미소도 세우고 주둥이가 넓적한 곡괭이 하나로만 농사를 짓던 동네에 농기구 뱅크가 세워질 것입니다.
영아 사망률이 눈에 뜨게 줄어들고, 저들의 소득은 전과 비교도 되지 않게 높아지게 될 겁니다. 벌써 그물리라는 굶지 않게 되었고 이제 그곳의 아이들은 우리들이 신발을 사주지 않아도 옷을 사주지 않아도 자기 엄마 아버지들이 신을 사서 신기고 옷을 사서 입힐 수 있게 될겁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이루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 함께 동행을 하였던 장로님 한 분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KBS에서 지금 아프리카 말라위 모습이 기획 방송되고 있습니다. 2주전의 눈물이 다시 나려고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행복을 잘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복이 숨박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행복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행복을 돈에서 권력에서 세상 쾌락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열심히 그것을 좇지만 다 꽝입니다. 행복은,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식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이 다 완성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아내입니까? 남편입니까? 자식입니까? 그 사랑의 지경을 하나님과 세상으로 넓혀보세요. 일주일 사이에 50시간 비행기를 타도 피곤치 않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천국으로 보일겁니다. 밤낮 자기와 자기 가족만 생각하며 살지 말고 하나님도 생각하고 이웃도 생각하며 사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시대의 가장 큰 계명
마 22:34-40 / 김영존목사(기쁜소식교회)
인류의 문화에는 수평문화가 있고 수직문화가 있습니다. 수평문화란 시대에 따라 바뀌는 음악 · 패션 · 소비문화 · 유행 이런 것을 가리킵니다. 반대로 수직문화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유구한 가치관을 말합니다. 윤리 · 철학 · 종교 이런 것이 수직문화에 해당합니다. 사람이 수평문화를 알지 못하고 수직문화만을 따른다면 그 사람은 고리타분한 사람, 보수적인 사람,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을 것입니다. 반대로 수직문화를 모르고 수평문화만을 따르는 사람은 깊이가 없고,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질 안개와 같은 가치를 좇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당연히 수직문화에 해당합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나오시는 이유는 요즘 유행하는 사상이나 문화를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른 곳에 가도 얼마든지 배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나오시는 목적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반석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율법사가 계명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답변을 했다는 사실은 수직문화도 늘 새로운 질문에 직면할 수 있고, 늘 그 시대에 흡족한 대답을 제공해야 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계명이 경직돼 있어서 어떤 해석의 여지가 없다면 율법사는 질문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 질문에 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토론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21세기에 들어섰는데, 그들의 윤리와 종교는 여전히 중세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는 아직도 여자가 운전을 하는 것이 금지돼 있습니다. 여자가 운전하다가 걸리면 매를 맞아요.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자가 직업을 갖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그래서 의대를 졸업한 여자 의사가 하루아침에 거지로 길거리에 나서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권의 모든 성인 남자는 수염을 길러야 되는데, 그 이유는 모하멧이 수염을 길렀다 라는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의 문제는 이런 주제에 대한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에요. 질문 자체를 금지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21세기를 살면서도 중세의 가치관을 고집하는 모순을 빚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도 예외는 아니에요.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가족계획을 금지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가톨릭 성도들이 가족계획을 하지 않느냐? 합니다. 많은 가톨릭 성도들이 합니다. 그 말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성도들이 행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에요.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성도들이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문화 · 결혼문화 · 가족 이것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교회가 옛날의 계명만을 고집하게 되면 결국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면 사람들이 듣지도 않고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에요. 그렇다고 그것이 경직돼 있어서 해석의 여지가 없고 적용의 자율성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율법사가 계명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예수님이 대답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해석과 토론이 가능하고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의식하지 못할 뿐이에요.
예컨대 레위기 20장에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에요. 그러나 이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을 근래는 못 봤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시대와 경우에 맞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해석을 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해석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거부했을 텐데 해석을 함으로써 오히려 그 말씀을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신명기 22장 말씀을 보면 ‘남자가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 여자를 친정아버지 문에서 끌어내어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당연히 오늘날 이 말씀대로 실천할 수 없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구절을 부인하기 때문입니까? 아니에요.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시대와 경우에 맞춰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의 계명을 해석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명령하셨냐면 남자든 여자든 다 죽이고 그들의 가축과 소유를 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구절을 읽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아무 해를 끼치지 않은 나라를 쳐들어가서 정복하는 것은 범죄행위이고, 그 성의 남자와 여자를 다 죽이는 것은 살인행위이고, 그들의 가축과 소유를 빼앗는 것은 강도행위에 해당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런 명령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경직돼 있어서 해석할 수 없고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은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사실이에요. 한 예로 구약성경에는 일부다처제를 실천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내가 두 명이 있었고, 야곱에게도 아내가 네 명이 있었고, 다윗 왕에게는 아내가 몇 명이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고, 솔로몬에게는 아예 하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태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금지도 안했지만 장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 당시의 문화였기 때문이에요. 그 당시에는 그것이 통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 그렇게 했다가는 아내에게 얻어맞고 감옥에 갑니다. 왜냐하면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율법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의 의식수준과 보조를 맞춥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을 때, 그들을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시키셨지만 그렇다고 노예제도 자체를 하나님이 비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과거 노예 신분이었지만 나중에 그들도 노예를 두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노예제도는 존재했습니다. 누가복음을 쓴 누가는 의사였는데 그 당시 의사는 노예계급에 속했습니다. 그럼 왜 성경은 노예제도를 비판하지 않았느냐? 링컨이 말한 것처럼 ‘나는 남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도 남을 노예로 두지 않겠다.’ 왜 이런 말씀이 성경에 없느냐? 그건 마치 그 시대에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다 라는 주장을 하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만일 그런 주장을 했다면 사람들이 거부하고 실족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의식수준과 보조를 맞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칙은 주시되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사람의 자율성에 맡기셨습니다. 사람이 준비가 되면 그때 가서 자율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원칙을 실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내가 남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으니 나도 남을 노예로 부리지 않겠다’라는 말씀은 없지만, ‘남에게 대접 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에요. 얼마나 적용하느냐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임금이 있고 귀족이 있고 계급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 자체를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바라는 공정사회에 대한 원리가 다 성경말씀 속에 이미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얼마나 발굴하고 적용하느냐? 이것은 우리의 몫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 속에 있는 원리를 다 발굴하지도 못했고 다 적용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우리의 의식수준은 여전히 발전의 여지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계명의 핵심 목적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명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람은 계명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다’는 말, 그 한마디 말씀 속에 이 모든 계명을 주신 목적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혜택을 받으시는 게 아니고 사람이 혜택을 입습니다. 사람이 계명을 어기면 하나님이 해를 입으시는 게 아니고 사람이 해를 입습니다. 사람이 계명을 어길 때 사람만 분노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분노하십니다.
예로부터 종교인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청난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광신의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광신은 신앙이든 계명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이웃에게 득의도 되지 않는 나의 종교, 나의 열심, 나의 광신만을 주장하게 될 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신의 위험이에요. 우리가 열심히 믿으려고 할 때 열심히 믿어야 되고 열심히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심이 목적을 벗어나게 되면 누구를 위한 열심이 되겠습니까? 참 사람은 안 믿는 것도 문제이지만 잘못 믿는 것도 문제에요. 차가운 것도 문제이지만 이상하게 뜨거운 것도 문제에요. 그래서 안 믿으면 불신자가 되지만 잘 못 믿으면 이단이 됩니다. 올무는 양쪽에 존재합니다. 이쪽에 가도 멸망의 길이 있고 저쪽으로 가도 멸망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고 정치의 관심이 지나쳐서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원수로 여기고 대적하고 칼로 찔러 죽이고 그리고 서로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정치에 대해 무관심한 게 나아요.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가져서 그것이 국가에 무슨 득이 된다는 얘기입니까. 왜 우리 민족은 정치든 스포츠든 신앙이든 무엇을 하든 그것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하지 못하고 광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사람에게 해가 되고 덕이 되지 못하고 자기의 고집만을 주장하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얘기입니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에요.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의 열심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정말로 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것입니까? 교회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되는 문제에요. 예수님이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길에서 무엇을 의논하였느냐 너희 가운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고 먼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늘 그들에게 이 근본적인 동기에 대해서 일깨워 주셨다는 사실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던, 사도가 되던, 목사가 되던, 무엇이 되던 늘 근본적인 이유와 동기에 대해서 바로잡지 않으면 빗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도 빗나갈 위험이 있다면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여기까지 제 설교를 들으신 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역할이 뭐냐? 계명이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계명을 인간이 해석해야 되고, 계명이 인간의 의식수준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라면 하나님 없어도 되는 것 아니냐? 하나님을 배제하고도 사람끼리 계명이 무엇인가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질문하는 사람은 율법사였지만 대답하는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스스로 계명을 정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여쭈어야 됩니다. ‘하나님, 나는 누구며 무엇을 해야 됩니까? ― What must I do? 내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됩니까? 어떤 것이 바른 것입니까? 그리고 왜 내가 그것을 해야 되고 내가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내가 그것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그것을 행하지 못할 때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의식수준이 발전하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인류역사의 정치 · 사회 · 사상의 발전을 가져온 위대한 인물들, 그들은 뛰어난 의식수준을 가졌지만 그것이 개인의 삶과 일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말한 토마스 제퍼슨에게는 흑인노예가 있었고 ‘나에겐 꿈이 있다!’라고 외쳤던 마틴 루터 킹 박사는 사생활이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캘커타의 성자였던 테레사 수녀는 개인적인 의심의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의식수준이 발전해도 스스로 바른 길을 발견할 수 없고, 그것을 이룰 행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도 예수님이 필요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도 예수님이 필요하고, 그것을 행하지 못할 때에 그때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시고, 예수님이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모든 이의 영원하신 주
마 22:41-46 / 이수영 목사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빈정거리는 교묘한 질문을 한 적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그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모세에게 맞서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모세의 권위를 빌어 예수님을 처치할 구실을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계략을 오히려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시는 기회로 역이용하심으로써 그들의 두 가지 노림수를 다 무력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두개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어 물러나고 말았습니다(눅20:40). 오늘 본문보다 조금 앞서는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다” 합니다. 사두개인들이 간교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는 데 실패하자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다시 몰려와 달려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일 구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가는 무리들의 모습이 훤히 보입니다. 평소에는 서로 싸우던 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에는 자연스럽게 협력하며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악하고 거짓된 세상의 세력들은 진리와 의를 대적하는 일에는 늘 하나가 되곤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로 하여금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게 만드신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에 이어 몰려온 바리새인들 또한 더 이상 당신에게 아무런 간교한 질문을 할 수 없게 만들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뜻은 또 멋지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뭐라고 합니까?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어떤 질문과 무슨 말씀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딱 두 차례의 질문으로 그 말 많은 바리새인들의 입을 막아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던지실 수 있는 수많은 질문 중에 굳이 이 질문을 하신 것은 괜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자신에 대한 이해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구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지식에 관한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다니면서 사람들로부터 들은 대로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고백하는 지식은 주님께서 그 위에 복을 주시고 교회를 세우실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주님께서 음부의 권세도 물리치게 해주시고 천국 열쇠까지 받게 해주실 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적대시하며 모함하려는 모든 자들을 결정적으로 침묵시키시면서도 또 그 기회에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시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보다 더 적절한 질문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모든 시도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온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 오신 당신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 자신에 관한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당신을 부인하며 제거하려고 하는 모든 저항세력에 대해 정면 승부를 거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은 사실 그 대답이 여러 가지로 주어질 수 있는 폭넓은 질문입니다. 질문을 받는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대답해야 할지 당황해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그 질문의 방향을 좁혀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누구의 자손이냐?” 원문은 “누구의 자손이냐?”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누구의 아들이냐?”라는 뜻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며 당신 자신에 대해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밝히 가르치려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역시 예수님께서 예상하신 대로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대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유대인들의 이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메시야 이해에 제동을 거신 것입니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메시야 이해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메시야를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해방자로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하는 물음에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한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의 후손일 것으로 알고 있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를 다윗 같이 유대 민족에게 군사적인 승리와 정치적인 해방과 경제적인 부를 가져다 줄 지도자로 기대하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성취로 보내신 메시야이신 당신께서 다윗과 같은 그런 지도자나 군주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높으실 뿐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이시고 왕이심을 가르치려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라는 상식적 명제에 새로운 의미, 참된 의미를 입혀주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라는 상식적 명제의 재해석을 위해 준비하신 후속 질문은 본문 43-45절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두 번째 질문을 하시며 성경을 인용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을 침묵케 하실 때에도 모세오경을 들어 설명하셨듯이 바리새인들을 잠잠케 하시는 데에도 성경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번에는 시편 110편의 1절을 사용하셨습니다. 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것을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한 말로 확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시편을 훗날에 메시야로 오신 당신에 관한 예언적인 글로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한 말 가운데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에서 앞의 “주”는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뒤의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110:1을 인용하여 질문하시며 다윗이 먼 훗날 자기의 혈통에서 태어날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 사실에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누구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자기보다 높고 크고 뛰어난 분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자기의 혈통에서 태어날 메시야를 “주”라고 불렀다는 이 사실로부터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메시야는 단순히 다윗의 인간적 자손이 아니며 다윗처럼 오직 이스라엘 민족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해방자나 군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이해시키려 하신 것입니다. 45절에서 보듯 예수님께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는 것이 다윗의 혈통에서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가 다윗 가문의 자손으로 오시지만 그는 혈육으로 다윗의 자손인 사람 이상의 어떤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옛날 다윗 자신이 성령의 감동으로 “주”라 불렀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적으로 다윗의 후손이라면 왜 이스라엘의 왕이요 최고로 높은 사람이었으며 선조인 다윗 자신이 그를 “주”라고 말했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우편에 앉게 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던지신 두 가지 질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의 메시야가 아니며 온 인류의 메시야이시고,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가 아니라 온 인류를 죄와 죽음과 불안과 절망과 기쁨 없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시며 죄의 용서와 구원과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한때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입단속을 시키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야가 순전히 인간적이고 민족적인 해방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런 메시야로 알고 군중이 열광하여 그를 앞세우며 무력봉기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로마군대의 무자비한 유혈진압과 희생을 초래할 것을 예수님께서 염려하셨기 때문에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참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을 이루실 날이 가깝기까지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직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참 뜻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진정한 뜻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단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이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가난을 면하는 것이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를 빼앗기고 이방나라의 압제와 민족적 굴욕과 수모를 당하며 경제적인 착취와 수탈을 겪어야 했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뜻과 그를 향한 그의 백성의 참된 믿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배반과 우상숭배와 신앙적 무지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곧 모든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의 죄였습니다. 이 모든 죄와 그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닥친 죄의 노예상태와 죽음과 불안과 절망의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것이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나라의 회복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민족의 국가를 회복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리시기 위하여 던지신 것이 그리스도에 관한 오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혈통으로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셨으나 그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참 인간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유대인만의 주가 아니시고 만인의 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옛날 예수님 시대에만 그리스도이셨던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간적으로 그의 훨씬 후대에 오실 이를 가리켜 “내 주”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초월해 계신 이 즉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이의 영원한 주이신 것입니다. 그가 모든 이의 영원한 주시라는 것은 그는 단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겪고 있던 문제의 해결만 아니라 온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유일한 주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정치적 경제적 해결사로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죄와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주로 오신 참되고 영원한 왕이신 것입니다. 로마제국과 싸워 그 압제로부터 해방을 쟁취해줄 군사적 메시야가 아니라 사탄과 악한 세상의 권세를 파하시고 죄의 노예상태와 죽음의 공포와 절망과 불안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해방시키실 구세주로 오시는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을 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그러자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다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오신 왕이십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의 진리를 선포하려 오신 주님이십니다. 먹어도 또 배고프게 하는 양식과 마셔도 또 목마르게 하는 음료가 아니라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해주는 하늘의 양식과 음료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일시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영원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신 주님이십니다. 잠시의 만족과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과 복락을 담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예수님께서 물으셨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을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물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바르게 대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모두의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구원자이시고 주님이심을 분명히 하며 확고히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 나에게 당장 급한 세상적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적인 복 받기를 원해서 예수 믿으며 그의 강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의 영원하신 주이심을 잊지 않으며, 모든 인간과 온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그의 오심을 간구하는 우리가 됩시다. 오직 온 누리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번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땅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이번 성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마 22:39 / 권오서 목사
들어가는 말
공자의 제자 가운데 공멸(孔蔑)이라는 사람과 자천(子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 다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관리였습니다. 나중에 공자는 두 사람을 앞에 놓고 물었습니다. “자네들이 지금까지 관리생활을 해오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이에 공멸은 대답했습니다. “저는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잃어버린 것만 많습니다. 공무에 쫓겨 일하느라고 독서할 시간이 없어서 공부도 못하고, 봉급은 적어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도 힘들었고, 바빠서 친구들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한테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방문하지 못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방문하지 못해서 점점 친구들과 멀어지고, 급기야 친구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보니 참으로 다 잃어버린 것 밖에 없군요.” 그런데 자천은 반대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만 많습니다. 실제로 관리생활을 하면서 이제껏 배운 것을 실천하게 되고, 그러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비록 봉급은 적었지만 식구들과 같이 먹고 살기에는 넉넉했고, 또 다소나마 친척들을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공무에도 무척 바빴지마는 그 바쁜 중에도 오히려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됐습니다. 또 옛 친구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지요.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잃어버린 것은 없고 얻은 것만 많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자천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자천, 자네는 정녕 군자로구먼. 노나라에 자네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노나라의 복일세.”(예화노트, 검색어 : 봉사, 공자의 제자 공무와 자천)
성도 여러분, 공멸과 자천,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입니다. 일을 일로써만 생각하지 않고, 이 일을 통해서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마음,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 섬기겠다는 마음-이것이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랑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위대함을 권력, 소유물, 명성, 지위의 측면에서 정의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섬김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나 우선(me-first)의 정신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어쩌면 인기없는 개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대함을 신분이 아닌 섬김의 잣대로 측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대함을,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얼마나 섬기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섬겼느냐에 따라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중심적인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섬김을 위해 부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335-336)
본 론
1. 어떤 사람이 섬기는 사람입니까?
진실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어줍니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대신에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돕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군인과 같이 임무를 위해 항상 대기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편할 때만, 형편이 될 때에만 섬기는 사람이라면,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종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종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돕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니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종은 모든 일을 자기 관점에서 행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관점에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하셔도 그분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종으로서 우리는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만 섬기겠다고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스케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고, 언제든지 원하시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337)
참되게 누군가를 섬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실된 종이며, 그런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필요를 목격하게 되면 성경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고 명하신 것처럼,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잠언 3장 28절은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라고 말씀합니다.
죤 웨슬리(John Wesley)에게는 한 가지 좌우명이 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자. 모든 수단,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어떠한 장소에서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상대가 누구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오랫동안 하자.”(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338)
어떤 형제가 한 은둔자에게 물었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려고 분투하지만 선배들처럼 은혜를 덧입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에 은둔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때는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으뜸 규칙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이웃을 위로 끌어올려 주었소. 그런데 지금은 사랑이 점점 식는 가운데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웃을 밑으로 잡아 내리려 애쓰고 있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하는 것이오.”(사막교부들, 깨달음, 25)
성도 여러분, 은혜 안에 살기를 원하십니까? 사랑으로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은혜가 없습니다. 형편 따져가면서, 조건 따져가면서, 대상 따져가면서 살다보니, 사랑해야 할 대상이 점점 줄어들어요. 그뿐입니까? 사랑도 사랑해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인데, 사랑해야 할 대상이 줄다보니, 점점 사랑할 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되게 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 똑같이 헌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의 규모를 상관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일에는 최대한 헌신하고, 드러나지 않는 일에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식당봉사하는 일, 교회학교 교사로 헌신하는 일, 잘 드러나지 않는 일입니다. 차량봉사하는 일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서는 이런 일에 봉사하려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교회는 안 그래요. 오히려, 안내위원 좀 하라고 하면 안 한다는 사람이 많아요. 다른 교회에서는 안내위원 하라고 하면 ‘얼씨구나!’하고 좋아하는데,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사실, 그래서 우리교회가 더욱 소망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잠시 예수님의 전공분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 전공분야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다른 사람들이 하기를 꺼리던 하찮은 일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발 씻기기, 어린 아이들 돌보기, 아침 식사 만들기, 문둥병자 돌보기.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기 때문에 당신이 섬기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있지만, 작은 일을 기꺼이 하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섬기는 사람, 봉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리더가 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고 비좁지만, 종이 될 수 있는 길은 환하게 열려 있고 많은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은 한 사람이 적어도 한 곳이상에서 섬기는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 할 일이 없다고 하시는 분들은, 누차 말씀드리지만, 교회 오실 때에 손걸레라도 들고 오셔서 지나다니는 길에 먼지라도 닦으세요. 그러면, 교회가 늘 깨끗해서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안겨다 주지 않겠습니까? 1+1운동은 영혼구원만을 위한 구호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한 곳에서 섬기자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봉사해야 합니까?
첫째로, 성령의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봉사해야 합니다.
봉사는 내 지식의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경험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해가 안 되시죠?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그렇습니다. 봉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봉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몸이 약하든지, 그 일이 힘에 벅차든지, 자신이 없기 때문에 봉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봉사하려면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지요. “하나님! 봉사할 능력을 주세요. 힘을 주세요. 도와주세요.” 봉사할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힘을 주십니다. 시간도 허락해주십니다. 물질도 주십니다.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니까, 힘도 없고, 시간도 없고, 물질도 없는 것입니다. 하려고 하면 길이 열리고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핑계가 생깁니다.
둘째, 봉사하면서 불평이나 원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 9절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원망 없이 봉사하라. 봉사하면서 불평하지 말아라.” 봉사를 하면서 대가를 바란다면, 참된 봉사라 할 수 없습니다. 인정이나 칭찬을 받으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봉사가 주님을 드러내는 일인데, 인정받을 것은 무엇이고 칭찬받을 것은 또 무엇입니까? 오직 주님만 드러내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는 이것을 했는데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봉사한다면, 원망없이 대접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존재와 가치를 드러내고 증명하려고 “내가 해놓은 업적을 보시오”라고 한다면 성도는 언제나 봉사를 통해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셋째로, 은사를 받은 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봉사는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모든 사람이 똑같은 봉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봉사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은사대로 일하면 모두가 다 즐겁습니다.
은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간단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일해도 싫증나지 않고 피곤하지 않는 일이 내가 받은 은사입니다. 예를 들면, ‘가르치기만 하면 신이 난다’, ‘찬양은 아무리해도 즐겁기만 하다’, ‘나는 설거지하고 세탁할 때, 힘이 넘치고 속까지 시원하다’ 바로 이것이 은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사는 서로 다를 수 있어요.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엌일 못하지만 가르치는 것 잘하고,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것은 잘하는데 부엌 일 못할 수 있어요. 서로 탓하지 말고 ‘은사가 다르구나!’ 이해해야 합니다.
넷째, 한결같이 인내하며,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봉사하다가 어려움 겪는 사람들 많습니다. 식당 봉사하다보면, “반찬이 짜네요. 국이 싱겁네요.” 이런 말 듣기 십상이지요. 주차 봉사자들은 어떻습니까? 추운 날씨에 밖에서 주차시키려고 하면, 왜 이리 말을 듣지 않는지, 정말 짜증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이곳에 주차하지 말고 저곳에 해 주세요’ 안내하면 ‘당신이 뭔데 교회에 와서까지 간섭이냐? 주차관리원 보면 괜히 짜증부터 난다’는 표정으로 민망하게 얼굴 찡그리고 그냥 가 버립니다. 주차요원이 없으면 질서가 없어지고 질서가 없어지면 내가 불편해진다는 사실을 아셔야지요? 찬양대는 찬양대원으로써, 교사는 교사로써 자신이 봉사하는 현장 속에서 속이 탑니다. 화가 치밀어 올라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결국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성경은 이런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9절 “우리가 선을 향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봉사는 인내로써 해야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봉사라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1절로 2절 말씀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나 자신을 위해 열심을 내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으로 이왕 봉사할 것이라면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며 봉사한다는 굳은 각오로 임하시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3. 봉사자가 받는 축복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감당할 만한 건강을 허락하십니다. 건강하시길 원하십니까? 봉사하세요.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받기 원하십니까? 봉사하면 복 받을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 남들이 가질 수 없는 그런 기쁨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기쁨이 충만하시길 바랍니까? 봉사하세요. 그 어떤 것으로도 누릴 수 없는 기쁨이 내 마음 속 깊은 데서부터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이라고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예수회 사제로서, 영성에 관한 탁월한 저술가로 유명합니다. 예일, 노틀담, 하버드 대학에서 재직하였고 30여 권이 넘는 귀중한 책들을 저술하였습니다. 하버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두드리셨습니다. “너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고 섬기는 삶에 대하여 가르치는데, 너는 뭐하고 사느냐? 너는 정말 섬기는 사람이냐?” 오랜 고민 끝에 헨리 나우웬은 교수직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라르쉬 데이브레이크’(The L'Arche-Daybreak)라는 시설에서 정신 박약 장애인들을 섬기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매일, 아담이라는 한 장애인을 깨워서 씻기고, 옷 입히고, 음식을 먹이고 그의 대소변을 처리하는 것까지 돌보았습니다. 하루는, 헨리 나우웬이 아담에게 “내가 누구인지 아니? 내가 하버드 대학의 유명했던 교수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정신박약아였던 아담은 아무 대답 없이 침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좀 알아달라고 말했던 것인데, 글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답답했습니다. 그때 나우웬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 아이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구나! 이제까지 나는 인기 있는 훌륭한 교수와 박사로 세상에 알려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지만 그 아이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봉사의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봉사하는 사람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봉사를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이것이 봉사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아니, 누려야만 할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왜 봉사합니까?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까? 그런 마음으로 하면, 봉사를 해도 즐겁지 않습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면서도 기쁨이 가득한 것은 봉사를 통해서 예수를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봉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 리
성경은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7-28)”,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고 말씀합니다. 오늘 당신의 시간과 노력과 재원을 누군가를 위해 투자하십시오. 저명한 성공학 강사 지그 지글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우면, 당신도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존 메이슨, 크리스천 생활백서, 201-203)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 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축복받기 위해서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섬길 때 축복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봉사할 때 복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봉사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각이 운명을 좌우한다
마 22:37-40 / 김홍도 목사
구약성경의 계명이 전부 몇 개나 될까요? 모두 합해서 613개나 됩니다. 여기서 긍정적인 계명 즉 “하라”는 계명이 248개이고, 부정적인 계명 즉 “하지 말라”는 계명은 365개나 됩니다.
또 이 계명들을 “무거운 계명”(heavy)과 “가벼운 계명”(light), 둘로 나누기도 합니다. 무거운 계명은 중요한(important) 계명을 의미하고 가벼운 계명은 덜 중요한 계명을 의미하는데 무거운 계명은 꼭 지켜야 되지만 가벼운 계명은 안 지켜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가장 큰 계명은 “쉐마”라고 해서 신명기 6장 4~5절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왜 “쉐마”(shema)라고 하는가 하면 “들으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말씀인데 첫 글자 “들으라”(hear)가 “shema”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을 “쉐마”라고 해서 이마에도 써 붙이고 손목에도 써 붙이고 대문간에도 써 붙이고 날마다 읽고 외웁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22:36) 하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613가지 계명을 10가지로 간추린 것이 10계명이고 이 계명을 둘로 줄이면 위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을 하나로 줄인다면 “사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웃사랑”에 대한 말씀이 요한일서 3장 10~18절에 설명되어 있는데 특별히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또 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과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먼저 생각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할 때에 먼저 생각을 바로 해야 합니다. 선한 행실을 가지려면 먼저 선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1.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
가령 창녀굴에 빠진 여자가 있다고 하면 더럽고 추한 여자로 보고 정죄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얼마나 가정환경이 나빴으면 저런 죄에 빠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버지니아 공대에서 조승희 씨가 총기난사로 32명이나 애꿎은 젊은이들을 비참하게 죽였습니다. 우리는 대뜸 고약한 놈, 잔인한 놈, 나라 망신까지 시킨 놈, 하며 별별 악한 생각을 다 합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얼마나 왕따를 당하고, 알아주거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고 대화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그렇게 폭발을 했을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들고, 도와주지 못하고 대화의 대상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가 오죽했으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신 이 말씀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저가 무엇을 원할까를 생각해야 남을 바르게 대접할 수가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내가 시어머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이해할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저 며느리 입장이라면 어떨까 하고 바꾸어 생각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 제일이라고 합니다. 40% 이상이니까 10가정이 결혼하면 4가정 이상이 이혼을 하는데 그 원인도 부부가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자기 자존심만 세우려고 하니까 결국은 이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상대편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교인들은 목사의 입장을 생각하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나 같은 사위를 두었다면 장인, 장모가 만족하실까?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부족함이 많은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느 기차 안에서 한 남자가 어린 아기를 업고 가는데 그 아기가 얼마나 울어재끼는지 온 기차간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더랍니다. 참다못해 한 여자가 “그 아기 좀 엄마에게 갖다줘서 젖을 물리게 해서 울지 않게 못합니까?” 하고 화를 내니까 아기를 등에 업은 남자가 대답하기를 “아기 엄마가 있으면 왜 안 그랬겠습니까? 이 아기 엄마가 죽어서 저 뒤 칸에 시체를 싣고 가는 중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모두 숙연해지면서 그 남자를 동정하더랍니다. 오늘날 너무 이기주의가 팽배해서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이 여자를 돌로 치리이까 말리이까” 했을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있으면 먼저 돌로 쳐라”라고 말씀하시니까 모두 가책을 느끼고 한 사람씩 돌을 버리고 다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물으셨습니다. 여자가 “예. 없나이다”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하시며 선뜻 용서해서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쉽게 용서해 보내신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고 합니다. “너, 왜 그런 죄를 범했느냐? 너 그럴 수가 있느냐? 너 양심이 있냐? 없냐? 이 나쁜 여자야!” 등등 좀 책망이라도 했음직한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그 여자의 과거, 환경, 입장을 다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이 범죄하거나 실수하면 온갖 악담, 저주를 다 퍼붓습니다.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실상, 자기는 더 큰 죄인인데도 남을 무섭게 정죄합니다.
2. 결과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행동이나 말을 하기 전에 이 행위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고 말도 하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어에 “생각하는 모자를 쓰라”, “thinking cap을 쓰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그 말의 결과를 생각해본 다음에 말하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놀라게 한 조승희 군이 32명이나 사살한 참사의 결과를 생각했다면 차마 그런 행동을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오랫동안 외롭게 살고 이해하거나 대화해주는 사람이 없이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 정신병에 걸렸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좌우간 결과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죄의 결과는 생각 아니하고 당장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우니까 우선 선악과를 자꾸 쳐다보다가 무서운 죄를 범하고 온 인류에게 큰 불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한 믿음이 독실한 미군이 동양 어느 나라에서 근무하던 중 너무 외로우니까 처음에는 맥주를 마시다가 그 다음에는 양주를 마시다가 춤을 추고 놀다가 양공주와 잠을 잤습니다. 근무를 다 마치고 귀국하여 고귀한 가정의 규수와 결혼을 했고 드디어 아기를 가지고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아기가 나왔는데 의사가 못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 귀한 아들이 성병 매독균에 감염되어 눈에 고름이 차고 코가 비틀어지는 등 불구자로 태어났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죄의 결과를 생각지 않고 일시적인 충동을 못 이겨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달콤한 맛으로 유혹합니다.
“괜찮아, 나중에 회개하면 되지 뭐” 하고 유혹하지만 결과는 100배, 1000배 쓴 맛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에 쓰디 쓴 맛을 주다가 후에 100배, 1000배 달콤한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매일 씨를 심으며 삽니다. 하나님은 매일 우리의 행실을 저울로 달아보고 계십니다. 말이나 행동이나 씨를 심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는 것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고 결과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령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도 그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 모든 고난과 시험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도 그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심지어 굶주린 사자굴에 빠져 잡혀 먹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자기와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믿음의 영웅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 이상으로 임재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강단 의자에 좋은 방석을 깔아놓고 아무도 그 자리에 못 앉게 하고 자기도 앉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이 그 강단에 늘 임재해 계심을 실감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좀 미신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실감하며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이용도 목사님의 서간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킨 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킨 바 되는 이 합일의 원리여. 오 나의 눈아! 주를 바라보라. 주만 바라보라. 잠시라도 딴눈 팔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보세”.
전남 광주에 부흥회 인도 차 갔다가 특이하게 목회하는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주일 낮 예배나 밤 예배나 수요일 예배, 새벽기도까지 모이는 숫자가 똑같습니다. 강단에 말구유 같은 것을 올려놓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까지 탄생하신 것을 늘 생각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교회 이름도 “예수님의 교회”인데 꼭 “님”자를 붙이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설교할 때나 기도할 때 “예수가”라고 하면서 “님”자를 안 붙이는데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 표현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기도할 때 하나님을 “당신, 당신”이란 말을 많이 듣는데(우리 교회는 절대 안 그러지만) 어떻게 육신의 부모한테도 “당신”이라고 못하는데 지극히 존귀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당신”이라고 합니까? “당신”은 3인칭 단수일 때만 극존칭이 됩니다. 가령 제가 누구와 대화하면서 “당신, 참 고집이 세셔” 하고 다른 데 계신 부모님을 당신이라고 할 때 극존칭입니다. 결코 실례가 아닙니다. 그러나 2인칭 단수일 때는 친구나 아랫사람한테나 “당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결코 존칭이 아닙니다. 가령 제 아이들이 저한테 “당신”이 어쩌구 하면 불벼락이 떨어질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실감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10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지켜보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며, 일의 결과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마 22:37-40 / 김인환 목사
오늘 본문 마태복음 22장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내용입니다.
먼저 34-3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셨다는 말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본문의 앞의 내용을 보면,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부활에 관하여 질문을 했고, 예수님은 명쾌히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뿌리는 같습니다. 다르다고 한다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안 믿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집권자들이고 기득권층입니다. 돈 많은 부자들입니다. 부자들, 집권자들,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있다면 세상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가졌으니까, 기득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별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이 좋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셨습니다. 아마 그 소문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렸나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이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전문가들입니다. 율법을 다 합하면 613가지나 되는데, 이 613가지나 되는 율법에 통달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지식도 자랑할 겸, 예수님도 곤란하게 만들고,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의도에서 예수님께 물었다는 것입니다. 알고 싶어서, 답을 얻고 싶어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613가지나 되는 그 많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 어느 율법이 제일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명쾌하게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7-4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아주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포함해서, 613가지의 그 모든 계명을 종합해서 중요한 것을 두 개를 꼽는다고 한다면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이다.” 여기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친 말씀은 이 두 가지에 의존해 있고, 이 두 가지를 기초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율법을 두 개로 요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은 쉽게 말하면 자기 사랑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 나의 삶의 의미 전부를 투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나의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찾아야 합니다. 그게 첫 번째인 사람들, 이게 우리 크리스천들입니다. 율법이 가지고 있는, 말씀이 가지고 있는, 선지자들이 외친 그 말씀의 중심의 골자는 바로 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세 가지 태도를 언급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그저 하나님 사랑,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 마음을 달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예배드리러 왔습니다. 여러분의 몸만 온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온 줄로 믿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처녀가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 나서 늘 마음은 옛날 애인에게 있다면 그것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이 함께 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목숨을 다해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아펜젤러 선교사도, 주기철 목사님도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순교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뜻을 다해서’라고 했습니다. 정성껏 하라는 것입니다. 시간, 돈, 젊음, 은사 이런 것들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라고 하는 원래의 뜻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지금은 1, 2, 3부 예배를 드리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교회가 크지 않아서 주일 예배를 드리면 11시에 딱 한 번 예배 드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귀한 시간,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여기는 안 그렇지만 이민사회에서는, 1, 2, 3부 예배가 있으면 1부에 일찍 와서 예배드리고 얼른 골프 치러 갑니다. 그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까? 중심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께 한 번 묻습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민족이 어느 민족입니까? 제 생각에는 누가 뭐래도 이스라엘 민족이 첫 번째입니다. 제가 미국에서도 20년을 살았고, 유대인들도 수없이 접촉을 해봤지만, 그래도 지구상에서 제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은 역시 아직은 유대민족입니다. 두 번째는 미국입니다. 1620년 8월 15일, 102명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배를 타고 무작정 떠나 12월 21일 보스턴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추운 겨울을 지나고 보니까 절반이 죽었습니다. 신앙을 지키다가 절반의 생명이 죽었습니다. 그래도 봄이 되어 그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예배당을 짓고, 그 다음에 학교를 짓고, 그 다음에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게 미국입니다. 그 청교도들의 정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애절한 정신이 지금까지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 한국입니다. 저는 자신 있게 ‘제2의 청교도’가 우리 한국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인 역사는 한인 교회의 역사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1903년 제일 먼저 미국에 간 사람들은, 하와이 사탕수수를 재배하러 거기를 갔습니다. 그때 청교도 102명보다 1명이 더 많은 103명이 갔는데, 103명의 대부분이 내리감리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그들도 역시 예배당을 세운 일입니다. 그게 바로 미국 이민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인들을 사랑해 주셔서 세계 어디를 가든지 ‘제2의 청교도’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자주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세계에 흩어져서 사는데, 가는 곳마다 식당을 세운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중국 음식점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자동차 가게를 세운다.” 일본 사람들은 자동차를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는데, 그래서 자동차 가게를 세웁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어딜 가나 교회를 세운다.” 그게 한국 사람입니다. 지난번에 세르비아, 보스니아 발칸 반도를 다녀왔는데, 거기에는 한국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열 명 밖에 없는데도 한인 교회가 있습니다. 열 명만 있어도 교회를 세우는 민족입니다. ‘제2의 청교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백성에게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높은뜻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님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미국에 오셔서 부흥회 때 한 간증을 제가 들었는데 잊히지가 않습니다. 이분이 고등학교 시절 청량리 중앙교회를 다녔답니다. 청량리는 그 당시 가난한 촌이었고, 하수구 처리가 제대로 안된 지역이라서 비가 오면 길이 패이고 물이 고여 웅덩이가 생깁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교회 가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어느 날, 그때도 비가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새벽에 일찍 책가방을 싸가지고 교회를 먼저 갔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 김동호는 움푹 파여진 교회 가는 길을 삽으로 메우려고 가방을 들고 교회부터 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가정에 전화도 없었고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인데, 약속이나 한 듯이 2, 3학년 고등부 학생들이 다 나왔습니다. 그래서 모래 가마를 만들어서 움푹 파인 곳을 메워 길을 평평하게 만들고, 교인들이 오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물이 고인 곳은 물을 다 퍼내고 그렇게 봉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30년의 세월이 지나 50이 되어서, 고등부 친구들이 가족과 함께 다 모이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몇 십 년 만에 만나 친구들을 보았더니 자기만 잘 된 것이 아니라 그때 고등부 다니던 학생들이 다 잘 되었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되고, 자녀들도 자기 아들 삼형제만 잘 된 것이 아니라 그 친구들의 자녀들도 다 잘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외국에서 사는 교포들이 20-30년 만에 한국에 오게 되면 굉장히 놀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 잘 살고 좋은데, 그런데 의외로 놀라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선 무슨 방들이 많은 것에 놀랍니다. 노래방, PC방, 찜질방, 모텔방. “지구상에 러브호텔이 이렇게 많은 나라가 있는가? 왜 이렇게 많을까?” 놀란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모텔이 많습니다. 변태 업소가 너무 많은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할 때, 곳곳에 우상을 숭배하는 산당이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했습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망했는데 왜 망했습니까? 죄를 지어서 망했습니까? 죄가 많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죄 많은 도시 얼마나 많습니까? 죄가 많아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은 말하기를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 보니까 한국은 참 죄가 많은 나라인거 같답니다. 너무 부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이 잘 되는가?’를 생각해 본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죄도 많지만 의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나라에게 복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게 외국에서 살고 있는 교포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판단입니다.
여러분, 한국만큼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 구국기도회, 나라를 위한 통곡기도, 산에서도 기도원에서도 연초에 모여서 대통령을 위해서, 지도자를 위해서, 북한을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를 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또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 나라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할 고비 때마다 하나님이 넘겨주신 겁니다. 과거 역사를 보십시오. 망할 것 같은데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우리나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켜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뭘 한번 한다면 하는 민족입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랬습니다. 서울 시청 앞에 몇 십만 명이 모여서 우리나라를 위해서 애국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응원을 했는데, 다 끝나고 난 다음에 외국인 기자들이 보니까 쓰레기 하나 없이 도로 되가져갔습니다. “외국인들이 많이 왔는데, 우리가 응원을 하고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 그게 젊은이들 사이에 쫙 퍼져서 수십 만 명이 모였다가 갔는데도 쓰레기 하나 없었습니다. 그뿐 입니까? 소매치기들도 모여서 회의를 했답니다. “월드컵이 있는 한 달 동안은 절대 소매치기 하지 말자.” 그래서 월드컵 기간 중에 소매치기 당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답니다. 우리나라 참 대단한 나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에 있어서 남에게 뒤쳐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좀 뒤져도 괜찮습니다. 공부는 뒤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남에게 뒤쳐지지 마십시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사랑에 있어서 절대 뒤쳐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어부 출신입니다. 마태는 세리 출신이라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부 출신입니다.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수제자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 사랑하는데 으뜸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위대한 신앙 고백도 베드로가 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가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을 다 모아놓고 솔직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너희들이 다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니까 제자들이 긴장을 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자기가 먼저 나서서 말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절대 부인을 안 합니다.” 이렇게만 얘기를 하면 좋은데, 또 한다는 말이 “다른 사람들은 다 부인해도 나는 절대 안합니다”라고 다른 사람을 끌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보기 좋게 자기가 세 번 부인을 하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말로는 했는데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십자가의 주님을 경험하고,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고 만났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 이렇게 대답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아시잖아요.”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아시잖아요.” 다시 또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신데, 주님은 나를 알잖아요. 내가 사랑하는 거 알잖아요. 말로 사랑한다고 할 때는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마음을 다 살피시는 예수님, 부활의 주님은 내가 주님 사랑하는 걸 알잖아요.” 베드로는 진짜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까지 하고 더 이상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설교하니까 3,000명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말로가 아닙니다. 겉으로가 아닙니다.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을 다 모은다면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자비입니다.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럽니다. “한국 사람은 정(情)이 많은 민족이다.” 그렇습니다. 정이 참 많은 민족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살 때에는 동네 잔치가 있으면 초청 받은 사람만, 일가친척만, 친구들만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네사람,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와서 국수를 먹었습니다. 생면부지라 할지라도 백년지기처럼 다 왔습니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여관이나 주막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그네가 어느 집에 가서 “주인 양반 계십니까?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하루 좀 묵고 갈 수 있을까요?” 그러면 재워주고 식사도 제공했습니다. 그게 한국입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민이 1,000만 명 이었는데, 피난민 수용소 없이 민간 가정에서 그들을 다 흡수한 나라는 지구상에 한국밖에 없답니다. 대단한 나라입니다. 1,000만 명의 피난민을 다 수용한 나라입니다. 그렇게 정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고운 정, 미운 정' 정에 끌려 사는 것이 우리 민족입니다. 그런데 북미에서 15년간 판사생활을 하고 있는 판사 한분이 책을 썼는데, 자기가 이민 생활을 하면서 보니까 한국인들은 정이 있는 백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왜 아니라고 하는지 제가 그 책을 읽어 봤습니다. 어느 상가에 한인 가게가 들어오면 유태인이 긴장을 한답니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부지런해서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기 때문입니다. “저 한국인한테 우리가 지겠네.” 그런데 조금 있다 한국인 가게가 하나 더 들어오면 안심합니다. “이제 됐다.” 왜냐하면 한국인끼리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인 식품점에서는 두 가게가 경쟁을 해서 쌀 한 포대를 1불에 팔았다고 합니다. 함께 망하는 길입니다. 이민 사회를 아는 사람이 볼 때에는 한국인이 정이 많다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이 분이 판사니까 한인 일간신문 부장들, 사장들을 만나서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기자와 사장들에게 판사로서 이런 말을 했답니다. “이민사회에서 일간신문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왕이면 부정적인 기사 쓰지 말고 좋은 기사 쓰세요. 그리고 이민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얘기해 주세요” 그랬더니 기자 한 명이 나서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그러고 싶습니다. 판사님의 의견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에 대해서 성공사례를 기사로 내면 그 다음부터 전화가 빗발칩니다.” 그래서 무슨 전화냐고 묻자 “그 사람을 어떻게 알고 그런 기사를 썼느냐, 그 사람 좋은 사람 아니다, 사기꾼이다.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무슨 성공사례로 그 사람에 대해서 띄웠느냐” 하면서 전화가 온답니다. 그래서 좋은 기사를 내고 싶어도 힘들답니다. 그걸 배 아파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그래서 부정적이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 비판적인 것을 쓰면 또 전화가 온답니다. 언론은 그런 비판적인 기능을 해야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그 기사 잘 썼다고 칭찬을 한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정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해외유학 붐이 일어서 많이 유학을 갑니다. 그런데 유학을 보내는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아는 일가 친척집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그 친척집에 보내면 사이가 좋아지는 것보다는 나빠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합니다. 70%가 깨진다고 합니다. 서로 기대하는 것이 많아서 ‘잘 해주겠지’ 하는 인간적인 정을 가지게 되는데, 친척집에 보내면 보낸 사람도 토라지고 받은 사람도 토라지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정이 아니라는 겁니다.
미국 UMC 감독님이 쓰신 글입니다. 한인교회를 방문해 보니까 진짜 정이 많은 교회라고 느꼈답니다. 왜냐하면 미국 한인교회는 우리처럼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꼭 점심을 먹습니다. 미국 백인교회에서 점심을 주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준다면 커피 아니면 도너츠 정도지 더 이상 주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인교회는 정이 많구나’ 하면서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고 감독으로서 일을 하다보니까 한인교회 교인들이 감독한테 편지를 하고 고소를 합니다. 교인이 교인을 고소하고, 목사를 고소하고 야단입니다. 백인교회는 교인이 목사님한테 고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한인교회는 교회마다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감독님이 회의감을 가졌답니다. “한인교회는 정이 있는 건가? 한국 백성이 정이 있는 건가?”
요즘에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서 한국 국민들이 정으로 대합니까? 얼마나 깔봅니까? 특별히 한국 물정을 잘 모르는 탈북자들에게 사기를 칩니다. 사기 칠 사람이 없어서 탈북자들에게 사기를 칩니까? 안 되는 겁니다.
지난번에 핀란드를 갔더니 관광 안내를 하는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핀란드에 유학생으로 와서 20년 동안 머물면서 핀란드 백인과 결혼을 했답니다. 그러면서 관광 안내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핀란드인들이 한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런데 유학 온 유학생들에게 “한국말이 쉬우냐, 어려우냐?” 했더니, 쉬우면서도 지구상에서 제일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가 그리 어렵냐고 했더니 한국말은 욕이 너무 많다고 한답니다. 핀란드는 욕이 딱 두 가지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수 십 가지가 넘는다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그것도 모르고 만날 욕만 얻어먹고 살았답니다. 우리나라는 약소국가로 살아 콤플렉스가 많아서 그런지 큰 나라에 대해서도 비아냥거립니다. 미국 사람들을 ‘양키’라고 부르고, 중국 사람들을 ‘떼놈’이라고 그러고, 일본 사람들을 ‘왜놈, 쪽바리’, 흑인들을 ‘깜둥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운전기사가 승객을 태우고 의정부, 동두천 쪽으로 가는데, 흑인 병사 한명이 합승을 하자고 태워달라고 그랬답니다. 먼저 탄 승객에게 운전기사가 물어봤습니다. “저 구공탄 태워도 됩니까?” 흑인 병사를 ‘구공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괜찮다고 그래서 태웠답니다. 동두천에 가서 흑인이 내리는데 흑인 병사가 택시요금을 안내고 그냥 가더랍니다. 그래서 왜 안내고 가느냐고 그랬더니 그 흑인병사가 “구공탄이 돈 내는 거 봤어요?” 그랬답니다. 이 흑인 병사는 자기에게 구공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알았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정이 있는 것 같아도 아닙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우리 한국 사람들이 운전하다가 타이어가 펑크 나서 길가에 세우고 갈아 끼우면, 백인들이 도중에 서서 여지없이 도와줍니다. 우리가 외국인이니까, 얼굴이 노란 사람들이니까 도와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에 와서 사는 외국인들에게 그렇게 합니까? 우리가 정말 정이 있습니까? 외국인 근로자에게 정이 있습니까? 인터넷을 보십시오. 얼마나 욕으로 도배합니까? 욕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느 유명 연예인이 인터넷에서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얼마나 그게 힘들고 견디질 못했는지 자살을 했습니다. 마지막에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이렇게 비정한 국민인줄 몰랐다” 그러고 자살을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다 모아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