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1베드 4,7-13; 마르 11-25 / 성 바오로 6세 교황; 2026.5.29
어떤 문제를 풀고자 하는 수학자들이 논리적 추론을 하기 위해 세우는 출발점이 공리입니다. 너무도 당연하고 기본적인 약속이어서 별도의 증명이 필요없는 명제가 바로 공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공리를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기도하는 사람 자신도 믿지 않는 기도는 들어질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하며 청하면서도 이미 받은 줄로 믿기보다는 조건부 거래에 가까운 기도에 익숙합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바치거나 희생할 테니 소원을 들어달라는 식입니다.
유다인들은 지은 죄를 용서받고 싶으면 성전에 가서 짐승의 몸을 불살라 제사를 봉헌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속죄를 위한 번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고 이를 관리하던 사두가이파 소속 사제들은 부유해졌습니다. 이 지위를 유지하고자 대사제직은 정치적 지배자들에게 가져다 바치는 뇌물로 거래되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타락한 성전을 제 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와 같게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를 쫓아내시고 기도의 집이 되기를 소망하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본격적인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밝히셨습니다 :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고자 기도하면서도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으면 우리를 통해 내려질 그 축복이 가려지거나 굴절될 수 밖에 없기에 용서를 통해 먼저 우리 자신을 하느님 축복의 도구가 될 만하도록 정화시켜야 하는 이치도 기도의 공리에 비추어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의 관계에 대한 이치는 전례(제사, 祭儀)와 행동, 종교와 사회적 실천의 관계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전례는 힘이 없고, 사회적 실천으로 입증되지 못하는 종교적 진리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기도를 요청하셨고, 기도가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하느님의 힘을 전달해 줌으로써 살아있는 전례를 바라셨으며, 사회적 실천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종교를 믿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몸소 본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질병으로 고통받고 마귀 들려 괴로워하는 가난한 이들을 숱하게 만나셨고, 그들이 겪고 있던 사회적 소외를 치유해 주시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이 존엄한 인격체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공동선의 혜택을 누리게끔 처신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가 해야 할 바를 대신하여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통하여 신정일치의 사회 체제에서 국가와 사회를 대표하는 종교 세력을 향하여 강력하게 경고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경고를 본보기로 삼아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셨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으며,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마르 11, 15-16). 한 마디로,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을 마비시켜 버리신 것인데, 그 이유를 예수님께 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 17ㄴ).
오늘 우리 교회가 기억하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성 요한 23세의 뒤를 이어 공의회를 마무리하고, 그 성과를 교회 쇄신의 여정으로 삼기 위하여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반포한 바 있습니다. 이 회칙 제5항에서 바오로 교황은 ‘정의 평화 위원회’를 전 세계 모든 교구에 설치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마침내 공의회의 요청도 실천하며, 나아가서 발전 도상에 있는 민족들의 정당하고도 중대한 요구를 들어주려는 성청의 노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최근 교회 중앙 행정 기구에 교황 직속 위원회를 두기로 하였다.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움직여 시대적 사명감을 체득케 하여 빈곤한 사람들의 발전을 증진시키며 국가간에 사회 정의를 고취시키는 한편, 저개발 국가에 원조를 제공하여 그들 자신이 스스로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임무를 이 위원회에 맡겼다. “정의와 평화”가 동 위원회의 이름이며 동시에 그 사업 계획이다. 이런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톨릭 신자들과 그리스도교 형제들뿐 아니라 모든 선의의 사람들이 자기 능력과 노력을 함께 모아야 할 줄로 여긴다. 그러므로 본인은 오늘 모든 사람들에게 엄숙히 호소하거니와 서로 의논하고 협력해서 개인의 완성과 인류의 발전에 힘쓰기 바란다.
교황의 이러한 호소는 공의회에서 반포한 사목헌장 첫 머리의 선언, 즉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사목헌장 1항) 하는 가르침에 대한 후속 조치인 동시에 이 기도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려는 교황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봉독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현대에 메아리치게 한 목소리였기 때문입니다.(이사 61,1-2; 루카 4,18-20)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던 예수님의 기도와 가르침 그리고 모범은 초대교회로 이어졌고 폭발적인 활력으로 복음을 퍼뜨렸으며 이것이야말로 성령 강림의 역사적 실체였습니다. 그런데 이 실체가 천8백년 동안 지하 수면으로 가라 앉았다가, 18세기 말에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서 첫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어서 비오 11세의 ‘사십 주년’ 회칙, 요한 23세의 ‘어머니요 스승’, ‘지상의 평화’ 회칙으로 계승되면서 가톨릭 사회교리가 가톨릭교회의 확고한 노선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은 이 노선을 복음화 제3천년를 맞이하기 위한 교회 쇄신의 여정으로 확대시켰습니다. 4년 여에 걸친 회의와, 4개 헌장 및 9개 교령 그리고 3개 선언문으로 집대성된 공의회 문헌이 그 열매로 남았습니다.
바오로 6세 이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를 ‘새 복음화’라고 부르며 공의회 성과를 교회 전반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진력하였고, 이어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도 같은 노선을 한결같이 계승하였습니다. 레오 13세 이후 역대 교황들과 공의회 교부들의 기도는 예수님을 따라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나자렛 선언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기도의 공리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교회와 신앙인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는 기도의 청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먼저 우리 자신부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