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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질문지(인텃넷 뉴스편집장)
☺매우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서동진선생님!
요즘은 ‘문화관광해설사’로서 매일 노력하는 생활을 살고 있습니다.
☺매년 이 맘 때(11월)면 온 마을이 노란 국화꽃으로 물들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데 ‘질마재국화축제’는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질마재국화축제’는 제가 미당시문학관개관 때부터 질마재마을(진마, 신흥, 서당, 안현)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미당시문학관이 질마재주민이고 질마재주민이 미당시문학관입니다. 서정주선생님을 알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모든 회의와 대소사의 일들을 미당시문학관에서 서정태선생님을 모시고 의견을 모아야 합니다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회의나 대소사의 일들이 미당시문학관에서 의논되고 그 실천이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2003년 11월 중순경 정우영(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부장)시인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서정주선생님 묘소를 찾아가 뵈니 참 부끄럽습니다. 「국화 옆에서」 시가 있는데 산소관리를 부탁합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고창군의원이던 정원환이 부인과 함께 사무국장을 찾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서정태, 정원환의원 부부, 서동진이 며 칠 전 정우영부장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정원환부부는 저의가 고창군을 위해 국화꽃(「국화 옆에서」)을 심고 책임지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후부터 주저 없이 잡목과 쓰레기로 뒤덮은 미당선산(6,000평)에 정원환의 사비로, 그의 지인(들꽃학습원-이학성)에 도움으로, 윤만수(선운교회장로, 윤씨 선산지기)에 배려로, 이태문(안현마을, 이씨문중대표)에 신의로 질마재가 들썩거렸습니다. 전국에 국화꽃축제의 시작이 된 2004년 11월 3일 3,000평 ‘황금빛 국화꽃’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특종으로 시작해서 전국의 사진작가와 관광객이 한 달간 30만 명이나 찾았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전년도의 10배인 3만평에, 2006년도에는 전년도의 10배인 고창읍내 석정온천에 30만평에, 그리고 고창군민의 후원으로 질마재에서 고창읍(12㎞)까지 도로 양옆에 국화꽃을 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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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시문학제’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미당시문학관 사무국장 서○○ 부부는 한국문학관협회회의에서 위 사실을 발표한 바, 모두로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에 『미당시문학제』 공모사업에 응모 권고를 받았습니다. 위 사실을 고창문인협회회 진기동회장께 말씀드렸고, 진기동회장님은 정일묵, 표순복, 신미수 등과 함께 사방으로 『미당문학제』 준비했습니다. 『미당문학제』는 동국대 윤재웅, 중앙일보 이경철, 미당시문학관 정원환이사장, 진기동, 서동진, 신미수, 질마재마을 주민들이 서정태선생님을 모시고 준비(진흥위원회공모기금, 1,800만원, 현금-현물모금 3,000만원, 복분자술 50병, 고구마 50박스, 계란 100박스 등)하였습니다. 2005년 11월 3일 『미당문학제』는 황금빛 국화꽃과 함께 질마재에 가득했다. 이날 『미당문학제』에 참여한 인사로는 중앙일보사장, 동국대총장, 이어령장관, 신경림시인, 황동규교수, 김재홍교수, 이근배시인, 유자효방송인, 장사익가수, 김남곤전북일보사장, 송하선교수, 이상인시인, 정주환수필가, 전원범교수, 진동규시인, 김해동사장, 이기영작가, 이남호교수, 전옥란작가, 서지월시인, 민용태교수 부부 등이 참석했다. 이날 질마재주민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계란과 고구마와 복분자와 부녀회에서 손수 만든 마을음식들로 손님들을 대접하고 지역 특산품을 선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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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미당 시문학과 건립 동기는 어떻게 추진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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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민선지자체에서 개관한 미당시문학관은 한국 현대 시사에서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위치는 확고하여서. 후학 시인 고은은 「서정주 시대의 보고」라는 글에서 “서정주는 하나의 정부(政府)”라고 말한 바 있고, 어떤 이는 서정주를 “살아 있는 시신(詩神)”이라고 하여서, 신라의 국선도와 불교의 윤회전생, 그리고 민간에 떠도는 온갖 설화를 에두르는 그의 시적 방황 또는 정신사적 편력은 한국인의 심상과 우주에 떠올라 있는 역사의 총체, 생사관, 이승과 저승을 한데 아울러서. 그래서 초, 중, 고, 대학교에서 그의 작품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그의 고향집(선운리)으로 학생, 교수, 기자 등이 찾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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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1995) 우리나라 민선정부가 시작되면서 지자체에서는 민심의 수요와 공급을 찾는 데 군력을 힘을 모으던 차에, 서정주의 생가(선운리)가 폐가인 점이 찾는 이마다 안타까워했습니다. 이것이 전국에 소문이 나면서 생가복원과 미당시문학관으로 건축하자는 여론이 그 때에 앞서갔던 것 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고창군수(이호종)는 생가복원을 하여서 서정태(미당아우, 귀촌)옹이 그 집에서 거주하면서 서정주의 문학을 선양하기를 바랬고요. 그리고 김원(광장-건축환경연구소)교수에게 미당시문학관 설계를 1998년에 의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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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광장-건축환경연구소에서는 미당생가에서 외가 쪽 길가 안(70~80m)까지 거리에 지하터널을 만들어서 미당시문학관을 만들자는 설계(398억)를 제출하였고. 이에 미당시문학관건축은 이호종군수의 민선초기의 군정에 사정(군비)과 김원교수가 생각하는 미당서정주시인의 아우라(예술작품에서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에 충돌 같았습니다. 이호종군수는 선운리에서 주민, 교수, 향토사학자들과 최선의 방법을 찾던 차에, 문득 서정태옹으로부터 귀에 번뜩이는 제안을 듣게 됩니다. “지금 이 앞에 선운분교(3,000평)가 폐교 상태입니다. 이 선운분교를 활용하면 환경문제와 제정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남현동 서정주선생님께 의논 차, 서정태, 이호종, 김원, 김준형(부안면 군의원)이 찾아 갔는데, 서정주선생님은 “문학관은 나 죽거든 짓든지 말든지 해라.”하고 문전박대를 합니다. 이 환경을 가지고 김원교수가 새로운 설계로 제안을 하였는데, 선운분교(폐교)는 낡았고 미당시문학관 설계는 새로워서 건축이 어려웠어요. 그리고 건축비용(성금 1억, 국비 3억, 군비 3억)마저 빠듯하였는데,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유족회 등은 연일 친일문제와 전두환 찬양을 문제 삼고. 다시 말하면 국내 최초로 지어진 미당시문학관과 생가 복원은 3~4년에 우여곡절 끝에 2001년 11월 3일에 개관합니다. 이는 미당의 중앙고보 재학시절 광주학생의거 지원시위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정해진 날이죠.
☺문학관과 관련된 친일 논쟁에 대한 얘기를 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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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시문학관이 개관 때부터 온라인과 사이버상에서 고창군수(이강수)와 미당시문학관, 그리고 관계된 곳을 찾아다니며, “공부도 않고 신문도 안보는 무식한 것들이, 혈세로 친일분자를 선양하다니”를 구호로 태평양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이 무리지어 다녔다. 이에 서◌◌ 미당시문학관 사무국장은 문학관 개관 때부터 태평양유족회는 일본의 정책 「대동아공영권(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민족 끼리 같이 번영할 권리'-유럽세력을 일본이 몰아내고 보호 해준다는 뜻)」에 참여한(유족의 주장은 300만을 강제로 징발했다고 하나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해 의무와 영광을 위해 참여했다고 서◌◌은 주장) 전범에 후예이니 자 민족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라고 주장하였고, 민족문제연구소에게는 ‘죄’는 연대 죄와 자범 죄로 구분할 줄(모든 주장이 태평양유족회 같음)알라며 옥신각신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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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의 친일시는 언제부터인가 문학관에 걸려 있다.
‘미당의 친일시 달기’는 국화축제(2004)와 미당시문학제(2005) 때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유족회측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 그 당시 미당시문학관 박우영 이사장과 김정웅이사 등이 협의 하였다고 들었다. 미당의 친일시를 미당문학관에 벽(관람하기 좋은 자리)에 게첨하는 날(2004년 11월)은 미당문학관측에서 박○○, 김○○ 등이 참여하였고, 상대 쪽에서는 손○◌, 오◌◌, 이◌◌ 등이 참여해서 서로 간에 협의하였다.
☺미당 서정주를 개인적으로 설명 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미당서정주는 특별한 애국지사(김구, 김좌진 등외)는 아니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을 위해서 일본 동경대 법대의 꿈도 꿨고, 주변의 불의를 보면 행동도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중앙고보(광주학생 독립운동)사건, 그 이듬해 고창고보 자퇴(독립운동/불온자, 퇴학권고)사건, 매번 만주로 독립운동하기 위해 가출사건, 보다 나은 효도를 위해 스승을 찾고 친구를 찾아 공부도 하지요. 그래서 주변의 도움으로 『화사집』(1940) 발표 후에 박한영대종사, 만해한용운선생, 조선일보사장, 동아일보사장 등 우리 민족진영의 지사들로부터 최고의 인품과 시인이란 칭찬을 받게 된 미당서정주는 조선일보( 폐간시), 김좌진전기, 이승만전기 등은 그 분들의 부탁에 의해 쓰게 됩니다. 이 후 미당은 한시도 게으르지(식민지, 분단, 전쟁, 가난을 극복) 않아서 모두로부터 배우고자하고 부탁받는 시인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미당 서정주의 시를 하나 소개한다면?
아버지의 밥숟갈
아버지가 들고 계시던 저녁 밥상머리에서
나를 보시자 떨구시던 그 밥숟갈
정그렁 소리내며 떨어지던 밥숟갈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 주모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감옥에 끌려간 내가
해 어름에 돌아와 업드려 절을 하자
저절로 떨어져내리던 아버지의 밥숟갈
`````그래서 나는 또
아버지가 끼니밥도 제대로는 못 먹게하는
대불효의 자격을 또하나 얻었다.
☺‘광주학생사건과 고창고보자퇴(퇴학권고)의 사상배경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요?
<일본제국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한다! 우리 조선독립만세>의 배경은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로 레닌의 『러시아 혁명의 거울로서의 레오 톨스토이』와 일본인 사회주의자 누군가의 『제이빈핍물어』, 자본주의의 『가다꾸리니』, 『아메리카 기행』 등 다양한 전문서적이 다양한 이론과 행동으로 자리를 잡아간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은 사상적 배경과 조선일보 ˂폐간시˃행진곡이 독립운동 연극 ‘시나리오‘로 암암리에 활성화되자 1944년 고창경찰서에 투옥이 됩니다.
☺동아일보의 사회부장과 문화부장(1946년), 그리고 대한민국 서기관(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3급, 1948년)에 합격하고도 그만 둔 이유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미당은 천재였지만 정신적환경(1915~2000)은 항상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미당(未堂)의 뜻은 본인은 집터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더듬더듬 조심조심 사셨다고(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1900년대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미국 진주만공격 등 가히 일본은 세계 최고의 힘을 가진 아시아의 일등 국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변명할 여지가 없다. 우리(한민족)의 잘못이다. 일본은 탓할 이유가 없다. 모든 생명체는 생겨나면서부터 ‘약육강식’의 생태계가 존재한다. 일본국민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서 국력을 키운다면, 우리도 그에 못지않게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을사늑약’에서 해방 때까지 우리 한민족의 백성들은 그 ‘삶’과 ‘심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업’으로 말하면 기업경영진이 바뀐 것이 아닌가? 우리 편이 아닌 저 편이 와서 기업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이 회사 직원과 가족들은 다양한(각 분야) 방법으로 이 전의 〈기업주권〉을 위해 희망하고 살았을 것이다. 손은 안으로 굽는 것 아닌가! 이때에 살았던 모든 분들에게 아픔을 전하고 싶다.
☺태평양전쟁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논쟁도 대단했다. 돌이켜 생각한다면 바뀐 것은 없는가?
태평양전쟁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은 온라인과 사이버상에서 “공부도 않고 신문도 안보는 무식한 것들이, 혈세로 친일분자를 선양하다니”라는 구호로 미당시문학관과 고창군수에게, 사이버상에서 더욱 극렬하였다, 그러던 차에 사이버상에서 본인신분을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나는 돌○○로서 고려대 학사, 석사를 마친 현직교사이다. 고창군청공무원 〷새끼들은 신문도 텔레비전도 안보니까 혈세로 〷들을 하지! 쓰고 있었다. 그래서 서○○은 「대동아공영권」(일본에는 자신들이 또 다른 유럽이라는 기묘한 사상으로, 그 원류로서 유럽사가 있고 원류의 원류로서 로마제국이 있는데 그 로마가 붕괴된 후 되살리려 했던 게 르네상스이고, 그걸 이어받아 크게 발전시킨 것이 대영제국, 그 영향을 받은 게 일본이라는 생각이다.)은 일본과 조선은 동등한 일선동조론에 근거해서, 권리와 영광을 함께하는 차원에서, 일본의 정치적 활동에 징용이든 보급이든 일본신민으로서(태평양전쟁유족회의 조상) 참여한 매국노후손들이 마치 대한민국애국자인 것처럼 행동하지마라! 이 후 댓글은 없었고, 그 당시 고창군청 미당시문학관 담당 팀장님(이○○)과 교육청 장학사(박○○) 께서는 미당선생님 제자들이 그리 많은데, 사무국장님께서 큰 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이버상’에서는 위와 같은 댓글은 없습니다.
☺끝으로 ‘질마재권역’과 ‘미당시문학관’의 콘텐츠가 대단하다. 앞으로 어떤 게획을 가지고 있는가?
질마재권역의 콘텐츠는 사리안마을(진마, 신흥, 서당, 안현)에서는 각 마을별로 그 동안 공부하고 실천한 내용을 가지고, 국화벽화체험마을, 맛 체험마을, 마을 가꾸기마을, 미당선생님의 『질마재 신화』를 읽고 각 마을의 정체성을 찾아서 『질마재권역』 마을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창군청에서는 현재 『고인돌 박물관』과 『질마재권역』에 각종 국화꽃을 키워서 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당시문학관의 콘텐츠는 2015년 2월 7일 고창부안축협 참예우한우명가에서 〖미당문학회〗 창립총회를 열고, 『미당문학』 창간호를 발표하는 등 ‘미당정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창간호에서 ‘미당문학회’ 김동수회장은 ‘문학의 본질은 우리의 사회적 편견과 독선에 맞서, 인간 본연의 존엄과 자유를 향한 끊없는 사랑과 연민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인간적 지향이야말로 문학의 자율성과 심미적 고양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미당이 일찍이 《시인부락》(1941) 창간호에서 언급한, 우리는 한 정신의 편향을 바라지 않고, 여러 지향을 합해 하나의 심포니를 만들어 보려한다는 창간사를 떠올린다. 《미당문학》도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되살리고 대립과 분열을 화쟁(和諍)으로 이끌어 가면서 한국문학에 또 하나의 정신세계를 열고자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도 질마재주민과 고창군이 지금처럼 노력하리라 믿습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한 미당선생님의 의자와 책상(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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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창 국화축제가 고인돌에서와, 미당문학관에서 펼쳐진다고 합니다.
내일 미당 문학관 국화축제장 방문을 합니다.
오늘은 고인돌 국화축제장을 찾았어요.
이미 지난 10월29일 방문을 해서 다 둘러봤던 터라,
운곡습지를 들어갔다가 나와서 바로 미당 문학관 국화축제장으로 향하는 것이 오늘 일정이었는데,
운곡습지 둘레길이 어마어마 하더군요. 들어가서 길을 잃어 헤메는 통에 시간을 다 써버렸지 뭐예요.
그리하여, 일정 변경,
미당문학관은 내일 방문을 하게 생겼어요.
미당 서정주!
국화 옆에서 라는 시가 왜 일본 황실을 찬양을 한 시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뿐더러,
사실 냉혹하게 생각을 해보고 평가를 해보자면 미당은 친일파는 아니지 않습니까? 친일파입니까? ???
자신의 과거 행적 지우고, 그러고선 미화시키고 왜곡시키는 자들이 판치는 세상, ...
허나 미당님은 친일 발언을 하였노라 스스로 고백을 하신 분이십니다. ...
그외 그분이 친일한 행적은 없슴.
장택상 같은 정말 악질 친일파들은 냅두고
애먼 서정주님만 잡는 고창양반들님이 있으시던데 놀랄 놀짜입니다. ...
외부 다른 국민들은 고창분네님들만큼
서정주는 친일파다 하고 입에 거품무는 국민들 별로 거의 없어요. 없습니다
내자식은 영식 영애고, 남자식은 개똥 또순이고,
내집돼지는 돈사에서크고
남집돼지는 돼지굴에서 크고
나는 사랑하고 남은불륜하고,
하는 이런편협함과 단견을
우리 고창선조들은 후손들께
가르치지 안으셨죠! 제가배운
훈육으로는?저희선조들은
상추밭에 똥누는 개가되지
말라는 교육을주셨죠ㆍ
미당이 고창인으로 문학이
뛰어나다고 그큰 과오를 덮지
마세요ㆍ미당은 필설로 일본에 개짓했습니다ㆍ
내집식구를 감싸기보다
부꾸럼을 감출줄도 압시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니 이해 해줍시다.
오늘 미당문학제 방문했어요. 도착하니 가수가 무대에 올라서서 노래부르드라구요. 송창식의 노래 푸르른 날, 하늘은 푸르르고 날은 청아하니 약간 춥기도 한데 날이 굉장히 맑고 그러한데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하는 미당님 시가 노래로 음율로 울려퍼지니 눈물이 나더이다. 문학관 안을 둘러보고 문학관 3층에 올라가니 미당님 친일시 전시가 되어 있더라구요. 놀랐습니다. 거기 머물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깊이 있게 못 들여다 보았는데 저걸 어떻게 친일시라 전시를 했는지, 그러다가 문학관의 커다란 배포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미당님이 당신을 두고 친일파다 하는 말에 대해 말씀을 하시었던데 미당님은
친일을 한 기억이 없노라 하셨드라구요 그러면서 그렇다면 종천친일파쯤이 되겠다 하고요. ...
내부 올라가는 계단을 수리를 한 모양이에요. 문학관을 나와서 미당 묘소까지 둘러보았네요.
거기 문학관 방문을 했을 때,
50-60대쯤 된 청주여고 동창들이 20여명쯤 와서 문학관 앞 무대를 접수를 하고 놀던데,
여고시절로 돌아간 소녀들 같았어요.
문학제를 빛내주고 그러는 장면에 부러웠고 눈물이 나드라구요. ...
문학관의 커다란 배포가 아닌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유족회의 제안에 의한 겁니다.
경남 합천에 가면 황강이 있고 강가 숲과 강모래가 아름답게 펼처져있습니다.
2000년에 공원을 만들어 새천년공원이라 이름 했다가 일해공원으로 고쳤습니다.
그때 한참 이름에 대한 시비가 있었는데 합천군에서 일해공원으로 고집하여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일해는 전두환의 호입니다.
그리고 합천군 출신으로 그들은 애지중지 전두환을 옹호하며 칭송하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삼습니다.
그런데 공원시비가 있을 때 합천 농산물 불매운동을 했고 합천군에 대한 이미지가 떨어지고 한편 멸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서정주는 전두환이 5.18 항쟁을 유발하여 반역의 역사를 만든 장본인을 칭송하여 1987.1.18일 56회 생일에 송시를 바쳤지요.
그리고 1981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tv에 출연하여 찬조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친일의 역사와 이승만 독재자를 옹호하고 전기를 써서 칭송한 행적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기에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전국 도서관이나 학교에 비치된 친일인명사전 2권. 267~271P (민족문제연구소 간. 2009년 )을 한 번 열람해 보세요.
사료에 근거한 사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정주문학관에 전시된 친일 시5편도 의식있는 분들의 강력한 주장의 결과이지 문학관 측이나 고창군의 자발적 의지는 아님을 밝힙니다.
참고로 친일문학자를 기리는 문학상에 대한 비판도 거세고 중앙일보사에서 재정한 서정주문학상
(상금 3000만원) 2017년 후보였던 송경동시인은 단호하게 거절하했습니다.
합천 군민과 같이 우리고장 인물이란 이유 만으로 무조건 칭송하고 옹호할 일은 아님니다.
보다 냉철한 의식을 갖고 부끄럽지 않게 역사를 가꾸며 고창을 발전시켜야 하겠지요.
저도 생각 없이 중고등학교를 고창에서 다니며 우리 고장의 빛나는 시인이라고 칭송하며 자랑했던 서정주 시인을 지금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호명님은 고창중 고 졸업하시고 영남지방서
30 여년 공립고등학교 봉직
교감 정년퇴직 하신 저희
선배님이시고 작고하신
항농님과 동기분이십니다ㆍ